[현장취재] 연해주 식량생산 기지 건설의 꿈 : 월간조선

러시아 연해주 항카 호수 동남쪽의 ‘젬퓨지노’(진주라는 뜻) 농장.

지평선이 아득히 바라보이는 논에서 播種(파종)이 한창이었다. 마른 땅에 볍씨를 그대로 뿌린다. 말로만 들었던 乾畓直播(건답직파) 방식이다. 볍씨는 소독약이 묻어 빨간 빛깔이다. 트랙터 뒤에 달린 파종기가 볍씨와 함께 하얀 비료 알갱이를 함께 뿌린다. 논은 가로 200m, 세로 700m씩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논 하나가 7ha(2만 1000평) 크기다. 트랙터가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논을 질주한다. 뿌려진 볍씨를 트랙터가 밟고 지나가기도 한다. 이 농장의 벼 재배면적은 1000ha(300만 평). 여의도의 3배 크기다.

이렇게 볍씨를 뿌린 후 물을 대고 나면 추수를 하는 10월 말까지 손을 대지 않는다. 논에는 벼와 피가 절반씩 뒤섞여 자란다. 중간에 施肥(시비)를 하거나, 防除(방제)를 하지 않는다. 헬리콥터를 빌리는 비용이 벼를 추가 수확해서 얻는 이득보다 크기 때문이다.

지평선이 보이는 논에서 볍씨를 뿌리는 모습. 마른 땅에 볍씨를 뿌린다.

올해 파종은 지난해보다 10일 이른 지난 5월 1일 시작됐다. 지난해 10월 15일 보름 이상 빠른 첫눈이 폭설로 변해 버리는 바람에 알이 여문 벼를 50% 이상 들판에 그대로 버려야 했다. 잃어버린 벼는 모두 1500t. 최근의 국제시세로 따지면 150만 달러(한화 15억 원)어치의 손실이었다.

연해주에서 농업은 혹독한 기후와의 싸움이다. 가을걷이할 시간이 곡물에 따라 짧게는 15일, 길게는 30일 정도밖에 안 된다. 빨리 추수를 끝내야 하기 때문에 대규모 중장비를 동원해야 한다. 트랙터 한 대에 1억~2억 원을 호가한다. 다른 농장에서 트랙터 같은 추수 장비를 빌려 쓸 여유가 없다.

일 년에 보름을 쓰기 위해 농장마다 대형 트랙터를 구입해야 한다. 고정비용 투자가 많아 경제성을 맞추기 어렵다. 1990년대에 현대건설, 고합 같은 대기업들이 연해주 농업 진출을 타진하다가 그만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지난해처럼 이상기후가 덮치면 속수무책이다. 젬퓨지노 농장에서는 4월 이후 흐린 하늘에 비가 가끔씩 흩뿌리는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비가 오면 대형 트랙터들이 논과 밭에 들어가지 못한다. 트랙터의 바퀴가 진창에 빠지거나, 뿌려 놓은 볍씨가 트랙터 바퀴에 달라붙어서다.

이 농장의 벼 재배 기사 올가 라푼(48·여) 씨는 “서둘러서 파종을 시작해 목표량을 채웠지만, 올해 날씨가 기대만큼 좋지 않다”며 “이상기후가 지구 어디서나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舊(구)소련 시절인 1984년부터 이 농장에서 벼 재배를 담당해 온 24년 경력의 베테랑이다.

―모든 논에서 맨땅에 벼를 뿌리나.

“5월 20일까지는 볍씨를 뿌리고 그 위에 5cm 두께의 흙을 덮었다. 지금은 맨땅 위에 그대로 벼를 뿌리고 곧바로 물을 댄다. 볍씨가 뿌리를 내리면 잠시 물을 뺐다가 다시 넣는다. 그리고 8월 말까지 물을 빼지 않는다.”

―계획대로 다 파종을 했나.

“파종을 열흘 앞당겨 목표보다 조금 더 파종했다.”

젬퓨지노 농장의 벼 재배 기사 올가 라푼 씨. 구 소련시절인 1984년부터 이 농장에서 일하고 있다.

―제때 파종을 끝내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6월 5일이 마지막 파종일이다. 그때까지 파종을 못하면 논에 물을 댄 후 물 위에 볍씨를 뿌리는 방법이 있다.”

―그런 경우에 볍씨가 물 위에 뜨는 것 아닌가.

“농사를 한 번도 안 지어 봤나?(웃음) 잘 여문 볍씨는 물 아래 가라앉아서 뿌리를 내린다. 그럴 경우 수확이 크게 감소될 수밖에 없다.”

―벼가 어느 정도 생산되나.

“1ha당 3~4t 정도다. 올해 목표는 ha당 4t의 벼를 생산하는 것이다.”

항카 호수 북쪽인 흑룡강성 密山(밀산)은 세계적인 벼 생산지역이다. 젬퓨지노 농장보다 위도가 높아 추위가 더 심하다. 그런데 이곳의 벼 생산량이 ha당 7t 정도다.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연해주의 두 배에 이른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걸까?

“중국의 밀산에서는 기계를 이용한 모내기를 한다. 거기에 생장 속도에 따라 비료를 주고, 병충해를 예방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성이 높다. 우리 농장은 조생종 종자를 개량하고, 중간중간에 비료를 주는 방법을 찾고 있다.”

한국의 영농기업인 아그로相生(상생)은 지난 2000년 연해주에 진출, 2002년 처음 인수한 농장이 ‘젬퓨지노’다. 아그로상생은 러시아 연해주 정부로부터 농장 인수를 계속해 지금은 제주도 땅의 두 배가 넘는 12만 6400ha의 농지를 보유하고 있다. 논농사 지을 수 있는 땅만 6만 ha를 확보했다. 소련은 1960년대에 아시아의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에게 쌀을 공급하기 위해 항카 호수 남쪽 일대에 거대한 관개수로를 건설하고 쌀농사를 시작했다.

舊소련 시절의 20% 수준 營農

파종기에 볍씨와 비료를 싣고 있다. 볍씨와 비료를 함께 뿌린다.

올가 씨가 일을 시작했던 1984년 젬퓨지노 농장에서 일하는 농장원은 1500여 명, 벼 재배 면적은 5000ha였다. 아그로상생이 지난 8년간 수로를 복구하고, 흩어진 농장원들을 불러들여 살려낸 논이 1000ha다. 구소련 시절 경작했던 논의 20%쯤을 살려낸 셈이다.

소련 제국이 무너진 후 집단농장은 황무지로 변했다. 농민들은 집단농장의 트랙터와 장비, 부속품을 집으로 가져갔다. 축사의 지붕과 대들보를 뽑아다 연료로 사용했다. 논과 밭에는 잡목과 잡초가 우거졌다. 집단농장은 폭격을 맞은 것처럼 황폐해졌다. 배급체계와 스탈린주의식 계획경제로 결딴난 북한의 농촌 풍경이 이렇지 않을까 짐작됐다. 올가 씨의 이야기다.

“1992년 소련 연방이 무너지자 국가에서 도와주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개인들이 집단농장의 장비를 다 훔쳐갔다. 벼와 콩, 밀 종자까지 팔아 버렸다. 2002년 아그로상생이 인수하기 직전 젬퓨지노는 완전 폐쇄된 상태였다. 겨우 150명 정도의 농민들만 남아 농장과 그 주변에서 생계를 잇고 있었다.”

―농장원이 10분의 1로 줄었는데, 나머지는 어디로 갔나.

“젊은 사람들은 블라디보스토크나 모스크바 같은 큰 도시로 나가고, 늙은 사람들만 소를 키우며 小農(소농)을 했다.”

―소련의 집단농장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을 때 1ha당 벼 생산량은 어느 정도였나.

“1ha당 2~2.5t 정도였다. 생산성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다.”

―젬퓨지노 농장에 소련 시절 논으로 경작했던 땅이 아직 4000ha 방치돼 있다는 얘긴데, 이걸 다 활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수로만 되살리면 얼마든지 가능한데 장비가 너무 부족하다. 1980년대에 정상 가동될 때 농장에 트랙터가 100대 정도 있었다. 지금은 8대에 불과하다.”

―이 지역의 논들이 ‘아시아의 사회주의 형제국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사실인가.

“1969년 中蘇(중소)국경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이 농장의 이름이 다우비하라는 중국 이름이었다. 그 뒤 젬퓨지노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회주의 형제국들을 도와준다고 얘기했지만, 내가 일했던 1980년대에는 해외 수출량이 얼마 되지 않았다. 주로 모스크바, 시베리아 등 국내에서 소비됐다.”

젬퓨지노 농장장 유리 김(58)은 1993년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우즈베키스탄을 떠나 아버지의 고향인 연해주로 돌아왔다. 2003년부터 아그로상생에서 일하고 있다. 유리 김은 “생산성이 우리의 두 배에 가까운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의 벼 생산기술을 배우려 한다”고 했다.

“농한기에 농장원들을 헤이룽장에 보내 우리 실정에 맞는 기술을 배워 오려고 한다. 중국에서 생산하고 있는 대당 150만 원대의 소형 트랙터를 수백 대 사 올 예정이고, 하바로프스크에서 벌목공으로 일하는 북한 노동자들이 겨울에 나무를 베고 여름에는 할 일이 없어서 놀고 있는 처지다. 이 인력을 활용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곡물가격 상승, 복합영농으로 흑자 전환

세계 식량위기를 취재하기 위해 젬퓨지노 농장을 찾은 MBC 취재팀.

高價(고가)의 중장비 구입비용, 낮은 생산성으로 고전하던 아그로상생은 2006년 전기를 맞았다. 곡물가격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유리 김의 설명이다.

“2006년 이전에는 벼 1kg에 10루블이었다. 2006년부터 가격이 폭등해서 지금은 kg당 30루블이다. 2년 만에 세 배가 뛰었다. 다른 곡물 가격도 비슷하다. 극동 러시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연해주는 중국에서 공급되는 값싼 채소와 곡물, 육류에 의존했다. 중국 정부가 곡물 금수조치를 취하면서 가격이 계속 오르는 추세다. 러시아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베개 빵이 두 배 이상 올랐다. 애써 경제성장해 봐야 서민들 생활은 나아지는 게 거의 없다.”

연해주 주정부는 곡물 경작 면적을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지난 5월 초 ‘15년 이상 묵은 농지를 개간하거나, 수로를 살려낼 경우 경비의 70%를 주정부가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젬퓨지노 농장에서 MBC 전주방송의 취재팀을 만났다. MBC 취재팀은 세계적인 식량위기를 취재하기 위해 미국과 브라질 등지를 25일간 취재하고 러시아로 넘어왔다. 연해주 취재가 끝나면 한국에서 며칠 자료를 정리하고 호주로 다시 취재를 떠날 계획이라고 했다.

유용 기자는 “이상하게 가는 곳마다 연해주처럼 해가 나오지 않고 꾸물꾸물한 날씨였다”며 “벌써부터 ‘올해 작황이 지난해처럼 좋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옥수수에서 에탄올을 뽑아내는 ‘바이오 에너지’가 식량난을 구조화시키고 있다”고 했다.

“별의별 酒精(주정) 냄새를 다 맡아 본 것 같다. 곡창지대에서 하루 취재를 하고 나면 온몸에서 주정 냄새가 났다. 에탄올이 바로 주정이다. 한쪽에서는 옥수수로 자동차 연료를 만들고, 한쪽에서는 옥수수가 없어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더 많은 중국과 인도 사람들이 고기를 먹기 위해 옥수수로 소와 돼지를 키우고, 더 많은 빈국의 사람들이 폭등한 옥수수 가격 때문에 굶주리고 있다.”

중국이 생산하는 값싼 생필품과 농산품 덕에 전 세계가 ‘저물가’ 혜택을 봤다. 값싼 중국 김치와 중국산 쌀 때문에 우리는 지난 10여 년간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 5000원짜리 설렁탕을 즐겼다. 하지만 중국이 대량 소비사회의 문턱에 진입하자 중국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물가가 뛰는 역설이 시작됐다. 극동 러시아의 식량기지인 연해주의 곡물 가격 또한 자국 수요를 확보하기 위해 중국 정부가 곡물 禁輸(금수)조치를 취하자 폭등했다.

고려인 10만 명 연해주로 이주

루비노프카 농장의 양 율리아 농장장 부부(오른쪽)와 사위 요나 김. 양 율리아 씨 부부는 우크라이나에서 왔고, 사위 요나 김은 우즈베키스탄 출신이다. 10만여 명의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연해주로 이주해 살고 있다.

아그로상생의 17개 농장은 곡물가 상승에다 돼지와 소를 키우는 복합영농으로 올해 상당한 규모의 흑자를 예상하고 있다. 2009년까지 17개 농장의 돼지 사육 두수를 10만 마리로 늘리기로 했다. 100kg짜리 돼지 한 마리가 최근 400달러에 팔린다. 계획대로 2009년 한 해 동안 7만 마리 정도의 돼지를 출하할 경우, 이 매출만 280억 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자체적으로 사료 곡물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다.

젬퓨지노 농장에서 서쪽으로 200km 떨어진 루비노프카 농장을 찾았다. 축사와 사료가공 공장을 신축하고, 밀 보리 귀리 옥수수 같은 사료작물 재배면적을 늘리느라 한창이었다. 豚舍(돈사)는 가로가 20m, 세로가 100m인 큰 건물이었다. 소련 시절 건축됐다가 폐허가 된 건물을 보수하고 있었다. 농장장 양 율리아(60) 씨는 “이만한 축사를 새로 지으려면 한국 돈으로 10억 원 정도가 들었을 것”이라며 “바닥과 기둥이 온전하게 남아 있어 수리비용이 크게 들지 않는다”고 했다.

양 율리아 씨는 아그로상생의 루비노프카, 네스테로프카 두 농장을 책임지고 있다. 두 농장에서 일하는 고려인은 22명. 모두 1990년대 초반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다. 고려인들은 현지 고용된 러시아인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아그로상생의 정미소를 맡고 있는 나타샤 김.

양 율리아 씨는 우크라이나에서 1994년 연해주로 건너와 소규모 영농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인력이 부족한 러시아 원동지역 자치주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송환됐던 고려인의 귀향을 반기고 있다. 양 율리아 씨는 우크라이나에서 양파 농사를 지었다.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 일대에 벼농사, 양파농사 기술을 전파했다. 양 씨의 이야기다.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 살다가, 18살 되던 1967년 우크라이나로 이주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양파 재배법을 몰랐다. ‘고려인들이 양파를 잘 재배한다’는 소문만 퍼져 있었다. 우리는 집단농장 ‘소호즈’에서 양파 농사를 시작했다. 농장에서는 ‘1ha당 6t의 양파를 국가에 내라’고 했다. 얼마 지나자 ‘15t을 내라’고 했다. 우리는 그때 ha당 40~45t의 양파를 생산했다. 대부분의 고려인들이 부유한 생활을 영위했다.”

―왜 이 먼 곳으로 다시 돌아왔나.

“1992년 소련이 해체되고 집단농장이 무너져 일자리가 사라졌다. 그래도 이곳은 부모님들이 살던 고향 아닌가. 모든 걸 다 팔고 돌아왔다.”

―중앙아시아에서 돌아온 고려인은 얼마나 되나.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연해주를 중심으로 10만 명이 넘어선 걸로 안다. 1990년대 초반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지에 거주하는 고려인이 60만 명 정도였다. 지금도 많은 고려인들이 먼저 이주해 온 친지들을 찾아 계속 합류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처럼 양파를 재배할 계획은 없나.

“쌀과 돼지고기 가격이 너무 좋아 그쪽에 집중하고 있다. 중국서 싼 양파가 계속 들어오고 있어 이익이 박하다. 중국 양파가 들어오지 않으면 양파를 해 볼 생각이다.”

연해주에 진출한 한국 영농기업 아그로상생은 축산업을 통한 복합영농으로 수익성을 높이고 있다.

양파 재배 전문가였던 양 율리아 씨는 이제 돼지 사육 전문가가 됐다. 이 농장에서는 발효 톱밥을 이용하는 자연 순환농법을 실험하고 있다. 3000마리의 돼지를 기르고 있는 이 농장의 돼지 축사 5동에서는 역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

“발효물질을 섞은 톱밥을 돼지 축사 바닥에 1m 정도 깔아 준다. 돼지의 똥오줌이 섞이면 60도까지 열이 난다. 그래서 겨울에 바깥 온도가 영하 40도 이하로 내려가도 실내온도를 25~26도까지 유지할 수 있다. 돼지들이 발효된 톱밥을 먹기도 한다. 전에는 100kg까지 살을 찌우는 데 9개월이 걸렸는데, 발효 톱밥을 이용하고부터 6개월이면 충분하다.”

루비노프카 농장에서는 러시아 수의사 1명, 중국인 수의사 1명이 근무하고 있다. 중국인 근로자 10명이 축사의 허드렛일을 담당하고 있다. 이들이 받는 월급은 300달러 정도다. 양 씨의 사위 요나 김(51)은 10명의 중국인 노동자를 이끌고 돼지 사육을 맡고 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전 참전용사다. 1976년 자원 입대해 3년간 항공학교에서 교육을 마치고 1980년 11월 헬기 조종사로 헤라트 남쪽의 신라드에 배치돼 1981년 8월까지 근무했다고 한다.

“아프간 전쟁에서 소련군 1만 5000명이 전사했다. 헬기가 많이 격추됐다. 두려우니까 술을 많이 마셨다. ‘술 마시고 운항하다 떨어져 죽은 조종사가 더 많았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그는 1987년 하바로프스크에 배치됐다가 1990년 현지에서 전역했다.

“25년간 군에서 복무하면 연금이 나온다. 나는 위험한 헬기를 조종한 데다 아프가니스탄에 참전한 경력 때문에 일찍 연금을 받을 수 있었다. 중국과의 관계가 좋아져 1989년부터 극동 주둔 소련군의 절반을 감축했다. 그때 조기 전역을 선택했다.”

제국이 무너지자 국가가 주는 군인연금은 빵 몇 덩이를 사기에도 모자라는 돈이 됐다. 요나 김은 우수리스크에서 수박 농사를 짓다가, 1992년 항구도시인 나홋카로 이주해 선박회사에서 일했다.

李明博 대통령의 ‘연해주 프로젝트’

이명박 대통령과 정몽준 의원이 2008년 5월 18일 광주 망월동 5·18 민주묘지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정몽준 의원이 대주주로 있는 현대중공업은 최근 연해주에서 농업을 하기 위해 현재 직원들을 연해주에 파견, 농지를 매입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李明博(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4월 15일 미국 뉴욕으로 향하는 전용기 안에서 ‘연해주에 해외 식량기지를 건설하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이 대통령은 비행기가 태평양 상공을 지날 무렵 기내 인터뷰에서 ‘세계 곡물 수입 3위인 한국의 수입곡물 대응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얘기했다.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면 해외 식량기지를 확보하는 방안을 추진할 것이다. 예를 들어 연해주와 같은 지역의 땅을 장기 임차할 수 있다. 이럴 경우 북한의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고, 운송거리가 짧기 때문에 북한에 직접 지원할 수 있다. 쌀값이나 사료값이 너무 올라서 대북 지원을 하는 데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식량 확보가 중요한 과제다. 궁극적으로 통일에 대비해 7000만 민족이 먹고살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

이 대통령이 연해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지는 20년이 넘었다. 그의 저서 <신화는 없다>에 연해주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북방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연해주를 떠올린다. 소련과 경제협력을 추진할 때 우선적으로 연해주의 삼림에 관심을 쏟았다. 1989년 10월 연해주 임업생산연합과 현대종합목재가 임산업 합작회사 설립에 관한 합의를 작성했다. 이 사업을 통해 많은 양의 목재가 우리나라와 제3국에 수출됐다. 이 임업사업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이끌던 소련 정부가 유일하게 성공을 거둔 사례로 꼽힌다.”

경청해야 할 아그로상생의 경험

아그로상생이 연해주에서 생산하여 판매하고 있는 쌀.

당시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은 鄭周永(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연해주 일대의 벌목장을 수시로 방문했고, 이곳에서 생산되는 곡물과 목재에 관심을 가졌다. 20년이 지난 지금 ‘정주영-이명박’ 파트너십은 ‘이명박-鄭夢準(정몽준)’으로 바뀌었다.

세계 최대의 조선기업인 현대중공업은 지난 2월 21일 이사회를 열어 ‘산림과 식량산업 진출’을 위해 이 사업을 회사 정관의 사업목적에 추가시켰다. 현대중공업의 대주주인 정몽준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연해주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현대중공업 팀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심가 세메노브스카야 거리 언덕에 위치한 ‘현대호텔’(이 호텔은 현대중공업 소유다) 내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1차로 2000억 원을 투자해 여의도의 45배 규모인 1만 5000ha의 농지 구입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자세한 내용은 月刊朝鮮 2008년 4월호 ‘정몽준의 대망 연해주에서 출발’ 참조).

1980년대 말 정주영ㆍ이명박 씨와 함께 현대그룹의 연해주 목재사업에 관여했던 한 인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1984년부터 소련을 드나들었다. 나는 현대 리바트 가구가 운영하던 연해주 벌목장에서 ‘유리 온실’을 운영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어린 묘목을 겨울에 유리온실에서 키우면 2년 만에 5년 큰 것만큼 키울 수 있다. 그렇게 키워서 나무를 베어낸 곳에 조림을 했다. 리바트의 벌목장에서 산을 하나 넘으면 북한 벌목공 2만 5000명이 작업하는 곳이었다. 현대 사람들이 북한 벌목사업팀으로부터 이런저런 자문을 많이 받았다. ‘북한 벌목공을 이용할 수 있다’는 이 대통령의 얘기는 이때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공짜가 없는 사람이다. 대북 지원을 공짜로 할 생각이 없다. 북한 노동력을 쓰고 그 대가로 식량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는 “오는 9월에 열리는 한ㆍ러 정상회담에서 연해주 지역의 호롤스키와 항카스키 두 개 郡(군)을 ‘농업개발특구’로 지정하는 방안이 논의될 것”이라며 “이것이 연해주에 우리의 식량기지를 건설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해외식량기지로 떠오르는 연해주의 구소련 농지는 773만ha로 남한 전체 경작지의 4배다. 아그로상생의 고종석(64) 상무는 2000년부터 8년째 연해주에서 상주하면서 17개 농장을 관리해 왔다. 그는 “러시아 농민들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자본주의 개념, 경쟁 원리를 가르치는 게 가장 어려웠다”고 했다. 연해주에 진출하려는 대기업들이 귀를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아그로상생의 고종석 상무, 대순진리회 김진원 총무부장, 아그로상생 안치영 전무(왼쪽부터).

그는 2002년 6월 젬퓨지노 농장을 인수한 후 농장원들을 모아 공청회를 열었다고 한다.

“농장이 위치한 아누친스키 군의 그라지당카 面(면)은 폭격당한 도시처럼 보였다. 3분의 1이 빈집이었고, 마을 회관이나 극장 같은 공공건물은 다 부서졌다. 주민들이 문짝이고 뭐고 다 뜯어가 버린 탓이다. 그해 겨울 그라지당카 면에서 살인사건으로 7명이 죽었다. 남자들은 일이 없어서 아침부터 술을 마셨다. 소련 시절 150명의 아이들을 수용했던 유아원에 아이들이 7명밖에 없었다. 농장을 돌아보니 황무지였다.”

옛 농장원들은 8~10년씩 월급을 받지 못했다. 장부에는 기록이 돼 있었지만, 그걸 지급해 줄 농장주가 없었다. 고 상무는 공청회에서 “앞으로 농장에 나와서 일을 하면, 매달 현금으로 월급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하루 일하고 임금을 달라고 아우성이어서 처음에는 주급으로 줬고, 그 다음에는 열흘에 한 번씩 급여를 줬다. 월급을 지급하는 데 꼭 6개월이 걸렸다. 지금은 雜夫(잡부)에게도 월급을 준다. 2003년 봄에 농사를 시작했는데 남자 농장원들이 대개 아침 10시쯤 술에 취해 나와서 오후 3시쯤 퇴근을 했다. 소도 잘 먹여야 쟁기질을 잘한다. 식당에서 점심을 푸짐하게 줬다. 빳빳한 월급을 집에 가져다 주니 부인과 아이들이 아버지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한다. 남자들이 술 안 마시고 건강해지니까 마을에 평화가 찾아왔다. 해마다 겨울이면 4~5명이 살인사건으로 죽었는데, 2006년 겨울부터 살인사건이 사라졌다. ‘열심히 하면 돈 번다’는 생각이 생겼다. 지금 젬퓨지노 농장에서 일하는 러시아인이 150명이다. 아그로상생이 이곳에 진출해서 150명에게 일자리를 준 것뿐 아니라 150 가족을 살려냈다고 자부한다.”

아그로상생의 고종석 상무에게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 이후 연해주 농업 진출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가’ 물었다.

망설이는 대기업들

아그로상생 농장의 유류 저장 탱크. 중장비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연료 소비가 엄청나다.

“콩 보리 밀 같은 사료, 식품 원자재를 필요로 하는 국내 대기업들은 한 번씩 다 우리 농장을 찾아왔다.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이 연해주 농업에 2000억 원을 투자하기 위해 10명의 직원을 블라디보스토크에 상주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정도다.”

―현지에서 감지되는 움직임이 없나.

“몇몇 대기업에서 우리가 운영하고 있는 17개 농장의 고려인 농장장들에게 ‘돈을 달라는 대로 주겠다’며 접근하고 있다. 한 대기업이 우리가 잡아 놓은 농장을 ‘두 배 주겠다’고 덤벼들어 계약이 무산된 적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 발언 이후에 ‘붐’에 편승해 이익을 보려는 대기업들이 있지만, 연해주에서 농사 지어서 이익을 내겠다고 결심한 대기업은 아직 없지 않나 싶다.”

―대기업들이 투자를 망설이는 이유는 뭔가.

“한국 대기업들은 1990년대에 손익계산서를 만들어 보고 투자를 포기했다. 곡물 가격이 급등하고 있지만, 이곳은 단기간에 투자금을 회수하기가 어렵다.”

―왜 그런가.

“연해주에 있는 농장의 기본 규모가 5000~7000ha 정도다. 이 정도 농장의 영농에 필요한 시설자금이 150억 원 정도로 추산된다. 수확기 5대, 트랙터 3대, 파종기 2대, 쇄토기 2대 등을 구입하는 데 드는 비용, 여기에 종자·비료·농약 구입비를 합친 금액이다. 그렇다고 2000억 원을 투입하면 곧바로 영농이 시작되고, 그해 가을에 수확이 시작되는 게 아니다. 소련 시절의 농장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다. 영농이 10여 년 이상 중단된 논과 밭은 황무지나 마찬가지다. 새로 개간을 해야 한다. 그래선지 ‘위탁영농을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는 대기업들이 많다.”

―소련 시절에 건설된 수로와 농업기반 시설이 다 망가졌단 얘긴가.

“그렇다. 망가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용연한이 다 돼서 전면교체를 해야 할 시기가 됐다. 아그로상생이 인수한 소련 시절의 트랙터 등 농업장비는 쓸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소련 시절에는 이 모든 부분을 국가가 감당했기 때문에 대규모 영농이 가능했다. 지금은 개별기업들이 이걸 감당해야 한다. 단기 순익이 중요한 민간기업들이 연해주에 식량생산기지를 건설하겠다는 것은 무모한 도박으로 보인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씨가 충남 서산 간척지에 대규모 벼 농장을 건설했지만, 큰 이득을 냈다는 얘기를 들어 봤나.”

―소나 돼지, 닭을 키우는 축산업 진출은 어떤가.

“우리의 경우 밀 보리 콩의 찌꺼기를 갈아서 사료로 사용하고, 자체적으로 사료작물을 대량 재배한다. 농장을 운영하지 않고 축산업만 해서는 이익을 내기 어렵다. 연해주의 사료값이 서울보다 더 빠르게 치솟고 있다.”

“서둘러서 되는 곳이 아니다”

舊 소련시절 사용하던 축사를 수리하고 있는 모습.

―아그로상생이 지난 6년간 연해주에 농업투자를 계속한 이유는 뭔가.

“대순진리회는 ‘民族和解(민족화해) 解怨相生(해원상생)’이라는 강증산 선생의 뜻을 따라서 연해주로 왔다. 종교적인 신념이 있기 때문에 버틴 것이지 이익을 따졌다면 벌써 사업을 접었을 것이다.”

―연해주를 식량생산기지로 만들기 위해 정부가 도와주었으면 하는 게 뭐가 있나.

“아그로상생이 2000년 이후 8년간 소련이 경작했던 농경지의 상당부분을 연해주 정부로부터 49년간 임차했다. 하지만 재원의 한계로 20% 정도만 경작하는 데 그치고 있다. 정부에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시설자금에 대한 장기 저리 융자, 연해주에서 일할 고려인과 한국인에 대한 비자업무 개선 정도만 도와준다면 단시간 내에 매년 20만 t 정도의 쌀을 생산하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비자 받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노동비자를 받는 데 1년이 걸린다. 그나마 1년짜리 비자다. 우리 농장에서 고용할 중국인에 대한 비자는 모두 거부됐다. 영농에 차질을 빚을 정도다. 정부가 외교력을 발휘해서 비자 취득 시간을 1개월로 줄이고, 노동비자를 3년까지 늘려 줬으면 한다.”

―식량자원 확보를 위한 연해주 농업기지 건설은 언제쯤 가능할 것 같나.

“아무리 빨라도 10년은 가야 한다. 그렇게 목표를 잡아야 성사된다. 러시아는 서둘러서 되는 곳이 아니다. 또 예측 가능하지도 않다. 우리가 지난해 4월에 우수리스크 시에 목재소를 세웠지만 아직까지 전기가 안 들어와 일본에서 주문받은 紅松(홍송) 수출이 지연되고 있다. 일본 쪽에서는 ‘그쪽 형편을 잘 안다. 그래도 수출을 계속 추진해 달라’고 했는데 우리가 수출 계약을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