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지원 : 국방부「건군 60주년 기념사업단」
곤경에서 구출해 준 미모의 공군 대위
- 2007년 6월4일 레바논 남부에 주둔 중인 스페인대대 병사들을 겨냥한 자살폭탄 차량 테러로 6명의 스페인軍이 사망했다. 사고 당시 사진이다.
카타르의 도하를 거쳐 베이루트 공항에 도착한 것은 지난 3월20일 오후 2시30분. 서울에서 정확히 24시간이 걸렸다. 입국심사대의 출입국관리직원은 한국에서 비자를 얻지 않고 입국한 내게 『티르市에는 왜 가느냐』고 캐물었다.
레바논에 주둔한 유엔 평화유지군(PKO)에 대해 이곳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몰라서 『티르市에서 일하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질문이 이어졌다.
『친구 이름이 뭐냐』
『그 친구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느냐』
『친구의 직업이 뭔데 티르市에서 일하느냐』
나는 「안기부 X파일」 全文(전문) 보도로 인한 소송사건이 대법원에 계류 중이어서 사실상 출국금지 상태다. 이번에 출국하면서 담당 대법관의 출국허가를 받고 1년짜리 여권을 만들었다. 통상 10년 기한의 여권이 발급된다.
인천공항 출국 도장 하나만 달랑 찍힌 내 여권이 이상했던지 공항 직원은 계속 내 여권을 뒤적였다.
나는 2003년 이스라엘 외무부 초청으로 이스라엘 「실판 샬롬」 외무장관을 인터뷰하고, 4박5일간 이스라엘 전역을 여행했다. 레바논은 敵國(적국)인 이스라엘 방문 기록이 있는 이들의 입국을 전면 거부하고 있다. 새 여권을 발급받은 게 잘된 것인지, 일을 복잡하게 만든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새 여권에, 해외여행 기록이 하나도 없는 한국인이 위험천만의 이스라엘-레바논 접경지역에 간다는 게 아무래도 미심쩍었던 모양이다. 나는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군 부대를 취재하러 간다」는 얘기를 끝까지 못 했다. 自國(자국)에 주둔한 외국군에 대한 반감은 어디나 있게 마련이니까.
10여 분간 실랑이를 하던 직원은 나를 출입국관리사무소 사무실로 끌고 갔다. 상급자로 보이는 이가 내 여권을 다시 뒤적이며 본격적인 조사를 준비하는 눈치였다.
곤욕을 치르고 있는데 훤칠한 키에 미모의 한국 여성이 내게 다가왔다.
『김연광 편집장님이시죠』
그녀의 가슴에는 유엔 마크가 선명했다. 레바논 평화유지단 동명부대의 공항업무통제장교 반은정 대위였다. 반대위는 공항 통제구역 출입이 허가된 출입증을 달고 있었다.
사정을 설명했더니 반대위가 『동명부대 취재하러 왔다고 얘기를 하시지』라며 웃었다.
『카타르 항공 422편 승객들이 모두 나왔는데 편집장님이 안 나오셔서 들어왔습니다. 동명부대에 취재 왔다고 했으면 「프리패스」시켜 줬을 거예요. 적어도 레바논軍과 공무원들은 유엔과 평화유지군에 대해서 아주 좋은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괜한 걱정을 하셨네요』
동명부대, 『마중 곤란하다』
나를 물고 늘어졌던 출입국사무소 직원은 반대위에게 큰 몸짓으로 인사를 하면서 입국 허가 스탬프를 「쾅」 찍었다.
『반대위, 원래 2주일짜리 입국허가를 해주는데, 한국군에 감사하는 뜻에서 4개월 입국허가를 내줬다』
한국에서부터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던 동명부대 공보장교 이규원 대위가 공항 대합실에서 반갑게 내 손을 잡았다. 공항터미널 건물 밖으로 나왔다. 도하 공항에서 환승을 위해 6시간 대기하고, 20시간 가까운 비행 탓에 온몸이 파김치였다. 빨리 티르市의 숙소로 가서 쉬고 싶었다. 베이루트 공항에서 티르市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 거리다.
레바논에 오기 전에 이규원 대위와 여러 번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 이번 취재를 주선해 준 합동참모본부와 이대위는 『베이루트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티르市의 숙소까지 오라. 마중을 나갈 수 없다』고 했다.
이역만리를 찾아간 사람을 위해 1시간 거리의 공항으로 마중 나오는 게 뭐 그렇게 힘든 일인가, 섭섭했다. 더구나 알 카에다 연계조직인 「이라크 이슬람 국가(ISI)」가 2007년 12월 한국인을 타도할 的(적)으로 선언한 마당이 아닌가.
이대위에게 「공항으로 좀 나와 줄 수 없느냐」고 이메일을 보냈고, 이대위는 「마중 나가는 일이 까다롭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유엔 차량은 폭탄테러의 제1 목표
공항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나를 마중하러 나온 사람은 모두 6명이었다. 반대위와 이대위, 특전사 對테러담당 707부대의 부사관 2명, 운전병 2명. 모두 권총과 K-1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지프 두 대가 대기 중이었다. 방탄조끼를 입고 반대위·이대위와 함께 같은 지프에 탔다. 우리 차량은 베이루트 시내의 한 「안전지대」로 이동했다. 유엔 표식을 단 차량이 베이루트 거리를 다니다가 테러단체들의 정보망에 포착되면 곧 폭탄테러의 목표물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레바논軍이 여러 겹으로 이 안전지대를 방어하고 있었다. 이동시간을 기다리면서 반대위, 이대위와 얘기를 나눴다. 이규원 대위는 『레바논에 온 지 두 달 만에 베이루트에는 오늘 처음 나와 봤다』고 했다(국방부에서 테러예방을 위해 「안전지대의 위치, 이동시간에 대해서는 보안을 지켜 달라」고 요청했다).
―곧바로 티르市로 가는 게 아닙니까.
『주간 이동이 금지됐습니다. 안전지대에서 대기하다가 일몰 후 「베이루트 주재 유엔잠정주둔군(UNIFIL·유니필)이 지정한 시간에 이동해야 합니다. 레바논에서 유엔 표식을 단 차량은 폭탄테러의 제1 목표입니다』
―레바논의 평화유지를 위해서 온 유엔 차량이 왜 제1 목표입니까.
『레바논의 각 정파와 종파, 테러단체들은 테러해야 할 다양한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유엔 차량을 테러해서 평화유지군을 살상하면 손쉽게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유엔 마크가 붙지 않은 차를 갖고 오시지 그랬습니까.
『UNIFIL이 그건 절대 금지합니다. 유엔 평화유지군이 레바논의 안정에 기여하고 있고, 우리가 이 지역의 치안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거죠. 쉽게 말해서 유엔의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겁니다』
새벽부터 6명 이동
―지프 한 대면 충분할 텐데, 왜 두 대나 갖고 오셨습니까.
『그것도 UNIFIL 규정입니다. 한 대는 이동할 수 없습니다. 꼭 두 대가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오늘처럼 한국군 관할 구역을 벗어나서 이동할 경우에는 반드시 UNIFIL의 사전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아까 주간이동이 금지됐다고 했는데, 그럼 공항에 올 때는 언제 이동했습니까.
『오늘 새벽에 이동했습니다. 지금까지 「안전지역」에서 머물다가 공항으로 왔습니다』
―아침·점심식사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전투식량을 먹었죠』
―그런 사정을 얘기하셨으면 제가 베이루트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갔을 텐데.
『保安(보안) 때문에 이메일로 자세한 사정을 설명드릴 수 없었습니다』
―제가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부대로 가는 것은 안전한 겁니까.
『그쪽이 조금 안전할 걸로 보입니다. 다행히 이곳은 이라크와 달리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마구잡이 폭탄 테러는 벌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곳의 테러는 특정 목표물을 정확하게 타격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민간인 한 명을 데려가기 위해 6명이나 되는 군인들이 테러위험을 무릅쓰고 새벽부터 움직였다는 사실이 너무 미안했다. 나의 미안함을 눈치챘는지 반대위가 이런 얘기를 했다.
『폭탄테러가 심했을 때는 「새벽 ○시대에만 이동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국방부나 합참에서 오시는 분들을 공항에서 맞이하기 위해 새벽에 이동했다가 다음날 새벽에 부대로 돌아갔습니다. 24시간 안전지역에서 햄버거와 샌드위치만 먹었죠. 그때에 비하면 오늘은 그래도 경계태세가 좀 나은 편입니다』
「시돈의 테러단체 폭탄제조했다」는 첩보
「안전지대」에는 이탈리아軍 장갑차 두 대와 군인들이 대기 중이었다. 이탈리아軍은 한국군 주둔지역의 남쪽 지역을 맡고 있다. 사방이 캄캄해지자 차량들은 일제히 이동을 시작했다. UNIFIL이 정해 준 바로 그 시각이었다.
이탈리아軍 장갑차에는 테러범들이 무선으로 폭탄을 작동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주파수 방해장치」가 탑재돼 있다. 한국군은 「재머」로 불리는 전자파 교란 장치를 차량에 장치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우리 차량은 지중해를 바라보면서 달리는 해안 고속도로와 꼬불꼬불한 국도를 번갈아 이용했다. 레바논軍이 운영하는 검문소를 여럿 통과했다. 고속도로에 들어서면 속도가 무섭게 높아졌다. 707부대의 부사관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테러범들이 주로 고속도로에 시한폭탄을 장치해 두고 유엔 차량을 노리고 있습니다. 테러범들은 차량들이 빨리 달리기 때문에 「기준점」을 정해 두고 그 지점에 차량이 오면 무선 폭파버튼을 누르게 됩니다. 빨리 달리면 그만큼 폭탄테러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야간에 고속으로 이동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빨리 달리면 정말 폭탄테러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가요.
『이론이 그렇다는 거죠. 그런데도 폭탄테러를 당한다면 다른 선택을 해야겠죠』
―오늘 폭탄테러 위협이 높은가요.
『1주일 전에 「시돈 지역의 한 테러단체가 TNT 17kg 분량의 폭발물 2개를 만들어, 테러를 준비 중」이라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시돈은 티르市로 가는 길목입니다. 이 지역을 우회 통과할 예정입니다』
『영국·프랑스軍이 첩보 강해』
―그런 첩보는 얼마나 믿을 만합니까.
『한국군을 포함한 26개국 평화유지군이 모두 활발하게 첩보수집 활동을 벌입니다. 이 지역을 식민지배했던 프랑스 軍과 영국軍이 첩보가 강합니다. 생계를 위해 정보를 파는 사람이 있고, 이쪽에서 심어놓은 정보원이 있습니다. 첩보가 들어오면 일단 레바논軍과 첩보당국에 넘겨서 판별을 요청합니다. 상당한 신뢰가 있다고 판단되면, UNIFIL 차원에서 첩보를 다국적軍에 하달합니다』
창 밖으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반짝이는 민가의 불빛이 가끔씩 보인다. 지금 이 순간 우리를 노리고 있는 폭탄이 도로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떠올랐지만 스물네 시간의 여행 때문인지 고개가 절로 툭툭 떨어진다.
반대위와 이대위는 아무런 말이 없다. 얼굴에서 긴장감이 스며 나온다. 두 사람은 한밤중에 나를 티르市 도심에 있는 「레스트 하우스」에 내려 놓고, 부대로 돌아갔다.
대통령이 4개월째 공석
인구 392만 명의 레바논에서는 「정상국가」에서는 한 가지도 일어나기 어려운 일들이 셀 수 없이 벌어지고 있다. 우선 정규군과 非정규군이 공존한다. 그나마 트리폴리를 중심으로 한 레바논 북부지역, 시리아 접경의 베카계곡에서는 軍과 경찰이 치안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 레바논 곳곳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난민촌과 정착촌은 「치외법권」 지역이다.
1978년 3월부터 30년째 안보와 치안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 유엔 평화유지군이다. 레바논에는 현재 1만3000여 명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주둔 중이다. 한국군 「동명부대」는 다국적軍의 일원으로 2007년 8월 주둔을 시작했다.
시리아軍 철수를 주장해 온 「라픽 하리리」 총리는 2005년 2월14일 암살당했다. 시리아의 소행임이 분명하지만 레바논 정부는 범인 검거에 실패했다. 유엔과 영국, 사우디아라비아가 앞장서서 최근 이 암살사건을 다룰 「국제사법재판소」를 설치했다. 2005년 이후 7명의 고위 공직자가 폭탄테러로 사망했다.
라픽 하리리 총리의 암살 이후 레바논 의회와 정치권은 「反시리아」와 「親시리아」의 양대진영으로 쪼개졌다. 시리아에 반대하는 「3월14일 동맹」이 128석의 의석 가운데 71석을, 親시리아인 「3월8일 동맹」이 57석을 차지하고 있다. 국회는 이슬람系 64석, 기독교系 64석으로 같은 비율이다.
6년 단임제 대통령제 국가인 나라에서 대통령이 4개월째 공석 중이다.
「에밀 라후드」 대통령의 임기가 2007년 11월23일 끝났지만, 與野가 후임 선출 방식에 합의하는 데 실패했다. 대통령 선거일이 16번 늦춰졌고, 2008년 3월25일이 선거일로 잡혔지만 선거가 실시되지 않았다.
1975년부터 15년간 계속됐던 레바논 內戰의 후유증, 기독교와 이슬람의 충돌이 재현되고 있는 양상이다. 2007년 여름 과격 테러단체 「파타 알 이슬람」 소탕작전으로 국민적 지지를 얻은 슐레이만 총사령관이 가장 강력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된다.
둘로 갈라진 政情(정정)의 틈새를 파고드는 것은 外勢(외세)다. 이란과 시리아는 같은 종파인 시아派 정치세력에 줄을 대고, 정치적 교착상태가 지속되는 방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분열이 구조화한 나라 레바논
政情이 이렇게 불안한 것은 레바논의 헌법이 정파와 종파에 따른 분열을 구조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의 토머스 프리드먼 기자는 「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까지」라는 저서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베이루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여러 권의 레바논 관련 저서를 읽었지만, 그의 분석이 탁월했다.
<1943년 레바논의 이슬람들은 시리아와의 통일을 포기했고, 그대신 「마로나이트」(로만 가톨릭의 일파) 세력은 프랑스와의 연계를 끊고 「大레바논」이 아랍국가가 되는 데 동의했다. 문서로 된 약속은 아니었지만 이건 「국민협약」으로 받아들여졌다.
협약에 따라, 대통령은 「마로나이트」가 맡고, 의회 의석은 「기독교 6, 이슬람 4」의 비율을 지키기로 했다. 이것은 기독교 세력의 우위를 제도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반면 총리는 수니派 이슬람이, 의회 의장은 시아派 이슬람이 맡게 됐다. 이건 레바논의 아랍-이슬람 전통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러한 서로의 이해는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50%에 이르던 때는 유지됐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인구구성이 뒤집어졌다. 기독교 인구가 전체의 3분의 1로 줄고, 이슬람 인구가 전체의 3분의 2로 늘어난 것이다. 이슬람은 인구 구성에 맞는 권력배분을 요구했고, 마로나이트는 거절했다. 「현상 유지」를 위해 기독교 세력은 「팔랑헤」, 「타이거」 같은 민병대를 조직했다. 이에 맞서 이슬람 세력 역시 비슷한 민병대를 만들었다.
1970년 요르단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곧바로 레바논에서 둥지를 틀었다. PLO와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은 레바논 남부지역과 이스라엘 접경에서 準(준)주권기구처럼 행동했다. PLO의 이스라엘 공격은 이스라엘의 반격을 불러왔다. 이슬람계인 팔레스타인과 기독교계 레바논 정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긴장은 점점 고조됐다.
1975년 4월13일, 東베이루트의 기독교 지역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괴한이 차를 타고 가면서 기독교 민병대원 2명을 포함한 4명을 사살했다. 그날 저녁 東베이루트에서 버스를 타고 가던 27명의 팔레스타인 민간인이 기독교 민병대원에게 사살됐다.
다음날 아침 이슬람계 무장세력의 지원을 받는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베이루트 거리에서 기독교 민병대 「팔랑헤」, 「타이거」와 전쟁을 시작했다. 15년에 걸친 레바논 內戰은 그렇게 시작됐다>
커튼을 열어젖히자 지중해의 옥빛 바다와 푸른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호텔방의 베란다에서 해변으로 나갈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맨발에 전해지는 모래의 감촉은 밀가루처럼 부드러웠다. 오전 7시30분쯤 호텔 1층의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
2006년 7월12일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대한 공습을 시작하자 유엔 관련 직원들은 모두 이 「레스트 하우스」로 도피했다. 일주일 뒤 이스라엘 지상군이 레바논 국경을 넘어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략 요충지 티르
외관으로는 흑해의 「소치」에 비해 모자람이 없는 고급 휴양지이지만, 계속되는 內戰과 전란은 관광객들을 멀찌감치 쫓아 버렸다. 레바논人 1300만 명 가운데 1000만 명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300만 명이 레바논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티르市는 아브라함이 一家(일가)를 이끌고 잠시 거주했던 고대 도시다. 구약성경에는 「수르」라는 이름으로 자주 나온다. 로마제국은 이곳에 「로만 로드」를 닦았고, 로마에서 두 번째로 큰 전차경기장을 지었다. 전차경기장의 흔적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어, 영화 「벤허」의 전차경기 장면을 이곳에서 찍었다고 한다. 티르는 십자군이 예루살렘 원정을 가기 위해 거쳐 갔던 길목이다.
1975년 레바논 內戰 발발 이후 티르 지역은 이스라엘-레바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震央(진앙)으로 자주 등장했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1차 침공했던 1982년 9월, 티르市와 북쪽에 위치한 시돈에서는 팔레스타인 저항단체를 중심으로 反이스라엘 항쟁이 거세게 벌어졌다. 이스라엘軍이 팔레스타인 난민촌 사브리아와 샤틸라의 외곽을 포위한 가운데, 기독교 민병대「팔랑헤」가 800~1000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을 학살했다.
이 학살 직후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끌던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레바논의 베이루트를 떠나 알제리의 튀니지로 망명처를 옮겼다.
이스라엘은 2006년 7월 레바논을 다시 전면 침공했다. 이번에는 이슬람 시아派인 헤즈볼라 게릴라 제거가 목적이었다. 헤즈볼라의 저항은 티르 인근 지역에서 가장 거셌다. 헤즈볼라 무장세력과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근거로 한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이 손 잡은 결과였다.
이스라엘 공군은 티르市를 고립하기 위해 베이루트 공항과 티르市 북부지역을 집중포격했다. 이스라엘 지상군은 2006년 8월 티르市 남쪽의 「마르자윤」 지역까지 進攻(진공)한 상태에서 유엔의 휴전 중재를 받아들였다.
30년째 주둔 중인 유엔잠정주둔군
동명부대는 이스라엘의 2차 침공을 마무리한 「유엔 결의안 1701호」에 따라, 2007년 8월부터 티르市와 인근 5개지역을 관할하고 있다. 레바논의 남부와 북부를 가르는 자연 경계선인 리타니江남쪽의 가로 7km, 세로 8km의 지역이다. 베이루트에서 레바논-이스라엘 국경으로 남하하는 해안 고속도로를 동명부대가 책임지고 있다.
리타니江은 레바논의 남부와 북부를 가르는 자연 경계선이다.
이 강 아래쪽 레바논 남부지역에 유엔 평화유지군 1만3000명이 주둔 중이다. 26개 다국적軍으로 구성된 이 부대가 「유엔잠정주둔군(UNIFIL)이다. 1978년 3월23일 레바논 남부지역에 전개된 UNIFIL은 주둔 30주년을 맞았다.
이스라엘의 2차 침공 이후에는 주둔 병력이 2000명에서 1만3000명으로 증원됐다.
동명부대의 임무는 「감시와 정찰」이다. 언제든지 전투에 투입될 수 있다. 동명부대의 주축은 특전사 장병들이다. 「평화 재건」을 임무로 한 이라크의 자이툰부대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레바논 남부지역에서 폭탄테러는 끊이지 않고 있다.
潘基文(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최근 유엔에 보고한 폭탄테러 사건들이다.
<2007년 6월4일 스페인 대대의 평화유지군 6명이 사망한 사건에 대한 레바논과 스페인 정부의 수사는 계속되고 있다. 이 공격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주장하지 않았으며, 아직도 범행자들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레바논 당국은 2007년 7월16일 있었던 탄자니아 UNIFIL 헌병차량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도 수사를 계속해 용의자 중 한 명을 체포했다>
<2008년 1월8일 유니필 차량이 베이루트와 남부 레바논을 잇는 주 해안도로를 지나다가 시돈市 외곽에서 원격 제어된 급조폭발물에 의해 공격을 당했다. 폭발은 두 명의 아일랜드 평화유지군들에게 작은 부상을 입혔고, 그들이 타고 있던 유엔 차량이 파괴됐다>
<2007년 12월12일에는 레바논軍의 엘 하지 장군이 폭탄테러로 운전사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2008년 1월15일에는 레바논軍의 위샴 아이드 대위가 폭탄테러로 희생됐고, 이 사건으로 추가로 5명의 사망자와 2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2008년 1월15일에는 레바논 주재 미국대사관 소속의 차량을 겨냥한 폭탄테러로 인해 3명의 사망자와 수십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동명부대로 가는 길
동명부대로 가는 길가에는 바나나와 귤 나무들이 무성했다. 새빨간 양귀비꽃이 선명한 자태를 뽐냈다. 2004년 1월에 돌아본 이스라엘 북부지역의 골란 고원, 하이파 지역과 비슷했다. 레바논 취재를 오면서, 「서울을 경유해서 판문점을 돌아본 외국기자가 평양을 거쳐서 판문점 지역을 돌아보는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이스라엘 취재 때 中東사태에 대한 「이스라엘 버전」을 알았으니까, 이번에는 中東사태에 대한 「이슬람과 레바논 버전」을 배우고 싶었다.
숙소를 떠나서 20분쯤 달렸을까, 「동방의 빛(Light of East)」이라는 동명부대 표지가 보였다. 지난 3월21일의 경계등급은 「옐로 플러스」였다. 「레드」보다 한 등급 낮지만, 시돈 지역 테러단체의 「폭탄제조 첩보」로 인해 평상시보다 한 단계 높아졌다고 한다. 오전 8시30분부터 30분 동안 진행된 동명부대 참모회의에 참석했다.
평화유지단장 姜贊玉(강찬옥·49·육사 37기) 대령이 가장 신경을 쓴 것은 테러에 관한 첩보였다. 참모회의는 30초간 박수치기, 30초간 웃기로 끝났다. 쑥스러웠지만 나도 따라서 박수를 치고, 웃었다. 姜단장은 이런 얘기를 했다.
『300여 명의 장병들이 항상 권총과 소총을 휴대합니다. 감시정찰을 맡은 특전사 요원들은 24시간 지역 순찰과 경계근무를 합니다. 테러에 노출돼 늘 긴장상태입니다. 장교들의 경우 사무실과 숙소가 바로 옆에 붙어 있습니다. 술은 절대금지입니다. 긴장을 풀 방법이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박수치기와 소리내서 웃기입니다. 효과가 좋습니다. 한국에 가서 한번 해보세요』
보이지 않는 敵
동명부대의 敵은 누구일까? 이스라엘의 2차 침공에 맞서 싸웠던 이슬람 시아派 헤즈볼라 게릴라일까? 팔레스타인 난민촌과 정착촌 등을 근거지로 암약하는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일까? 오사마 빈 라덴이 지휘하는 세계적인 테러조직 알 카에다일까? 아니면 이슬람 무장세력의 투쟁을 지원하고 있는 이란과 시리아일까?
「유엔 안보리 결의안 1701호」가 부여한 「유엔레바논잠정군(UNIFIL)」의 임무는 명확하다.
<블루라인(레바논과 이스라엘 사이의 완충지역)과 리타니江 사이 지역에서 적대행위 재발을 방지하고, 인가되지 않은 무장인원, 자산, 그리고 무기의 배제를 위해 노력한다>
레바논 남부지역에서 이스라엘과의 무력 충돌, 긴장을 유발하는 것은 「헤즈볼라」(神의 정당) 게릴라들이다.
동명부대장 姜贊玉 대령은 『서방 언론이 보는 헤즈볼라와 레바논 남부 사람들이 보는 헤즈볼라의 성격은 전혀 다르다』며 『헤즈볼라를 이해하는 것이 복잡한 레바논 정치를 이해하는 첩경』이라고 했다.
姜대령은 『중동 분쟁이 워낙 복잡해서 취재하기 전에 공부를 좀 해야 한다』며 나를 부대장실로 이끌었다.
姜대령은 특전사 3공수여단의 작전참모와 참모장, 특전사 작전처장을 역임했다.
『동명부대의 주축인 특전사 요원들과 끈끈한 정으로 엮여 있어 부대지휘에 큰 힘이 된다』고 했다. 姜대령은 1990년부터 1992년까지 프랑스 지휘참모대학에서 공부하면서, 파리1대학에서 역사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논문 주제가 「근대 분쟁사」다.
프랑스어가 능숙해 프랑스어를 쓰는 지역 지도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있다. 부대장실에서 국제정치학 강의 비슷한 인터뷰가 이뤄졌다.
헤즈볼라 지역 한복판에 주둔한 한국군
―「레바논 남부지역에서 헤즈볼라 게릴라들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 한 언제든지 다시 침공할 수 있다」는 게 이스라엘의 입장입니다. 평화유지군의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가 헤즈볼라 민병대의 활동을 제어하는 것 아닙니까.
『레바논 남부지역에서 헤즈볼라는 무장한 민병대나 게릴라가 아니라 정치세력입니다. 헤즈볼라는 레바논 국회에서 14석의 의석을 갖고 있고, 레바논 남부에서는 확고한 기반을 갖고 있습니다. 헤즈볼라는 제도권 정치세력이자 準군사조직입니다.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의 완전 제거를 목표로 한다면 그건 이루어지기 어려울 겁니다』
―레바논 정규군과 헤즈볼라 게릴라의 관계는 어떤 겁니까. 정규군이 있고, 準군사조직이 있는 상황이 언제까지 갈 수 있습니까.
『현재로서는 불안한 공존입니다. 헤즈볼라는 자신들이 레바논軍의 대안세력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2006년 이스라엘의 침공 때 미사일과 총을 들고 이스라엘 공군과 지상군에 맞서 싸웠던게 헤즈볼라입니다. 「이스라엘에 맞서 한 달간 싸워서 승리했고, 이스라엘을 물리쳤다」는 헤즈볼라의 주장을 레바논 사람들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헤즈볼라는 이란과 시리아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세력을 확대했습니다. 對民(대민)지원 활동을 하고, 도로를 닦고, 부서진 건물을 새로 지어 주고 있습니다. 지난겨울은 유난히 추웠는데 헤즈볼라가 집집마다 난방용 기름을 나눠 줬습니다. UNIFIL이 관할하고 있는 레바논 남부에서는 헤즈볼라 당원들이 자치단체장을 맡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헤즈볼라는 아말당과 연합해 레바논 남부를 장악한 상태입니다. 우리 동명부대는 헤즈볼라 지역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습니다』
―왜 그런 거죠.
『동명부대 동쪽 2km 지점에 「타이르 디바」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곳이 헤즈볼라의 2인자 무그니에의 고향입니다. 무그니에는 이 마을의 우상입니다』
헤즈볼라 2인자 무그니에의 고향
지난 2월12일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차량 폭탄테러로 사망한 「이마드 무그니에」(45)는 헤즈볼라의 군사분야 책임자다. 1983년 베이루트 공항 내 미국 해병대 막사를 폭파해 241명의 미군을 죽였고, 1985년 TWA 비행기 공중납치 사건 등을 주도했다.
그의 사망 직후 미국 국무부 대변인 숀 매코믹은 『그자가 없는 이 세상은 더 좋은 세상이 됐다. 수없이 무고한 사람을 죽인 살인자인 그를 어떻게든 정의의 심판대에 세우려 했다』는 논평을 냈다. 그러나 베이루트와 티르市 전역에는 「순교자 무그니에」의 대형 사진이 곳곳에 걸려 있다.
―무그니에가 폭탄테러로 사망하자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에 대한 「전면전」을 선언했습니다. 무그니에의 사망으로 이스라엘과 접경한 레바논 남부지역의 긴장이 높아졌을 것 같은데.
『제도권에 진입한 헤즈볼라의 고민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레바논 남부지역 사람들은 전쟁을 원치 않습니다. 이스라엘에 미사일을 쏘거나 무장투쟁을 벌이기 어렵습니다. 불법 국가테러단체라는 오명을 씻고, 레바논의 대안세력으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런 단계에서 다시 「알 카에다」 같은 테러단체로 낙인 찍히는 것은 피하고 싶은 거죠. 레바논의 정치세력들은 영국과 프랑스 정부에 많은 신경을 씁니다. 헤즈볼라가 테러와의 전쟁을 감행하지 않을 것으로 낙관하고 있습니다』
―헤즈볼라가 UNIFIL에 대한 적대행위를 벌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낮게 보고 있습니다. 레바논 의회가 유엔 결의안 1701호를 승인했습니다. 거기에는 헤즈볼라 국회의원 14명이 포함돼 있습니다. 자신들이 승인한 결의안에 따라 주둔한 평화유지군을 향해 폭탄테러를 할 것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시리아와 이란의 입김
―헤즈볼라가 아니라면 가장 위협적인 테러단체는 어디입니까.
『지난해 스페인 평화유지군 6명을 살해한 테러단체는 수니派 과격단체 「파타 할 이슬람」으로 추정됩니다. 주로 非시아派 계열의 테러단체인 「아스밧 알 안사르」, 「준드 일 샴」 등이 위협적입니다. 이란과 시리아, 알 카에다의 지원을 받는 과격단체들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습니다』
―레바논에 대한 시리아와 이란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시리아는 자신이 레바논의 맹주, 「형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란 역시 헤즈볼라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시리아와 레바논 접경의 베카계곡에서 헤즈볼라 세력이 시리아와 함께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프랑스는 유엔에 「베카계곡에 유엔 평화유지군을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시리아와 이란의 간섭이 실제로 감지됩니까.
『물론이죠. 우리 부대 정보팀이 對民접촉 과정에서 「마을 청년 한 명이 이란에 가서 게릴라 교육을 받다가 폭탄이 폭발해 죽었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며칠 뒤에 장례식이 열렸습니다. 첩보와 맞아떨어진 거죠.
「옆 마을 청년이 헤즈볼라 조직에서 사격훈련을 하다 죽었다」는 첩보가 입수됐는데, 그것도 사실로 확인됐습니다. 이 청년들은 시리아와 이란의 지원으로 한 달에 수백 달러씩 월급을 받았습니다』
폭발물 제거반과 함께 리타니江으로
―복잡한 레바논 內政(내정), 외세의 개입 속에서 동명부대의 임무는 뭡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방지고, 다른 하나는 레바논軍 지원입니다. 헤즈볼라에게도 밀리는 레바논軍의 자생력을 키워 주는 것이 다국적軍의 주요 임무입니다. 동명부대는 레바논軍 12여단과 함께 작전활동을 하면서 지원해 줍니다. 미국은 레바논軍 지원을 위해 매년 6억 달러 정도를 쓰고 있습니다』
―부대 지휘관으로서 긴장을 풀기 어렵겠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대통령과 총리, 참모총장 후보를 출근길에 차량폭탄 테러로 죽일 수 있는 곳이 레바논입니다. 라픽 하리리 총리 암살 사건은 아직 미궁입니다.
레바논은 후임 대통령을 뽑지 못해 「정치적 교착상태」입니다. 시리아와 이란, 이스라엘 등 주변 국가들이 이런 취약한 레바논의 내정을 이용하려고 덤벼 듭니다. 언제 어디로 불똥이 튀어 폭탄테러가 터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런 곳에서 토요일, 일요일 없이 24시간 수색 정찰 업무를 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죠』
―스트레스는 어떻게 풉니까.
『화상회의로 서부여단 소속 다국적軍 부대장들과 회의를 끝내면 오후 9시입니다. 그때부터 참모들과 미니 축구장에서 「20골 넣기」 축구 시합을 합니다. 밤 12시가 넘어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지난 3월21일 오전 10시45분 동명부대 「폭발물제거반」의 수색 정찰에 따라 나섰다.
동명부대 공보과장 金基範(김기범) 소령과 한 차에 올랐다. 기관단총이 탑재된 장갑차와 무장 트럭 한 대가 우리를 선도했다. 폭발물제거반은 리타니江의 「카시미아」 다리로 향했다. 리타니江은 레바논을 남부와 북부로 나누는 자연 경계선이다. 이 다리를 건너지 않고는 레바논 남부로 진입할 수 없는 전략 요충이다.
카시미아 다리
한국군 관할지역은 티르市를 안고 있는 가로 7km, 세로 8km의 구역이다. 동명부대는 이탈리아軍으로부터 이 지역을 인계받았다. 한국군 관할지역 아래에 이탈리아 1대대와 2대대, 한국군 동쪽 편으로 프랑스軍과 가나軍 대대가 주둔하고 있다.
카시미아 다리에는 레바논軍 12여단 병사들이 장갑차를 세워 놓고 지나가는 차량을 검문하고 있었다.
우리 폭발물제거반은 카시미아 다리 주변을 오가며 폭발물이 설치돼 있는지 확인했다. 지뢰탐지기와 폭발물탐지견 두 마리가 동원됐다. 폭발물제거반은 한국군을 노린 사제폭탄이 설치됐는지를 수시로 탐지한다.
특전사 병력들은 24시간 관할 구역을 감시 정찰한다. UNIFIL이 하달한 테러 의심차량을 찾아내고, 무장병력이 이 지역 안을 이동하는지 관찰한다. 또 테러의심 차량과 인력들이 팔레스타인 정착촌을 드나드는지 감시한다.
카시미아 다리 주변에서 폭발물 탐지 작업을 끝내고, 우리는 리타니江 남쪽을 따라 이동했다. 낭떠러지 아래로 리타니江이 흘러가는 게 보였다. 한국군은 이 강을 건너 헤즈볼라 게릴라와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이 남하하는지 집중 감시하고 있다. 金基範 소령의 설명이다.
『저 아래 강가에서 헤즈볼라 게릴라들이 가끔 사격훈련을 합니다. 우리는 그걸 UNIFIL에 보고할 뿐이지 제지할 권한은 없습니다. 24시간 감시체제를 구축해 놓았기 때문에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무장병력을 색출해 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봇짐에 폭발물을 숨기고 혼자 산을 넘는 게릴라가 있다면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의심이 가는 레바논 민간인에 대한 검색, 체포 권한이 없는 겁니까.
『없습니다. UNIFIL에 소속된 26개 다국적軍 가운데 탄자니아軍이 헌병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것도 유엔차량에 대한 단속만 가능합니다. 평화유지군은 레바논軍을 지원하는 보조적인 임무를 하는 거죠. UNIFIL이 「주민들이 돌을 던질 때는 이렇게 대처하라」 같은 교범을 내려보내서 숙지하고 있습니다』
「부르즈라 할」 지역으로 들어섰다. 마을 곳곳에 순교자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AK47 소총을 불끈 쥔 손을 담은 깃발이 보였다. 「헤즈볼라」 깃발이었다. 이슬람 시아派 정당인 「아말당」 깃발, 「팔레스타인」 깃발이 간간이 섞여 있었다.
姜贊玉 대령의 설명대로 이곳은 헤즈볼라의 본거지였다.
특전사 요원들의 태권도 교실
「부르즈라 할」의 마을회관에 들렀다. 마침 태권도 교실, 컴퓨터 교실이 열리고 있었다. 특전사 요원들이 사범을 맡고 있는 태권도 교실에서 30여 명의 어린이들이 기본 품세를 익혔다. 24시간 지역 수색정찰을 마친 특전사 요원들이 휴식시간을 쪼개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벽면 하나를 가득 메운 대형 태극기가 선명했다.
히잡을 쓰고 두 남자아이를 양손에 잡고 온 레바논 여성이 한국군들에게 무언가를 하소연했다. 아랍어 통역요원 이주영씨의 설명이다.
『한 아이는 자기 아이고 한 아이는 조카인데, 태권도반에 좀 넣어 달라고 하네요. 며칠째 찾아오는데 빈 자리가 없어 받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사작전을 담당하고 있는 김형관 중령이 『정원이 넘더라도 좀 받아 줘. 연락처 받아 두고』라고 한마디 거들었다.
동명부대는 관할구역內 세 곳에서 태권도 교실을, 다섯 곳에서 컴퓨터 교실을 운용하고 있다. 또한 55개소의 도로포장, 옹벽공사, 공공시설 건설사업을 진행 중이다. 300여 명의 병력으로 감당하기에는 벅찬 사업들이다. 왜 이렇게 주민지원 사업에 열심인지 민사협조반장 김형관 중령에게 물었다.
『현장에 투입되는 특전사 장병들이 조금이나마 덜 적대적인 환경에서 작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작업이죠. 특전사 요원들이 감시정찰 활동차 마을을 지나가면 이곳 아이들이 손을 흔들어 줍니다. 그게 바로 민사작전의 효과죠』
―동명부대는 이라크에 파견된 자이툰부대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규모인데, 민사작전을 병행하기가 힘든 것 아닙니까.
『규모가 작다고 민사지원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자이툰은 평화재건이 목적이고, 우리는 군사적인 정찰이 주업무입니다. 민사지원 역량에 한계가 있지만 자이툰을 벤치마킹해서 현지 상황에 맞게 접목하고 있습니다』
―동명부대의 민사활동에 대한 현지인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주둔하기 전에는 이탈리아軍이 있었습니다. 이탈리아軍에 대한 주민들의 인상은 「좀 뻣뻣하다. 세심하지 못하다」였던 것 같아요.
이탈리아軍이 이 지역 관청에 물탱크를 싣는 특장차를 하나 기증했습니다. 그런데 물탱크를 빼놓고 준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 우리가 예산을 반영해서 물탱크를 증여했습니다. 「한국군은 따뜻하고 섬세하다. 애프터서비스가 좋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일단 문을 연 태권도 교실, 컴퓨터 교실은 착실하게 운영할 생각입니다』
팔레스타인 난민들
―레바논 사람들이 외국군인 한국군에게 친밀함을 느낀다니 다행입니다.
『레바논 사람들에게 「한국도 內戰을 겪고, 유엔의 도움으로 戰後복구에 성공했다」는 얘기를 하면 깜짝 놀랍니다. 「정말이냐」고. 한국 사람들이 자신들과 비슷하게 많은 외침을 겪었고, 內戰의 상처를 겪었다는 사실에 더 따뜻하게 다가 서는 것 같습니다』
동명부대 민사작전의 사각지대는 팔레스타인 정착촌(카시미아·사브리아· 엘부스) 3곳이다. 이곳에는 4000여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살고 있다. 유엔이 관리하는 난민촌에는 유엔과 국제사회의 지원이 이뤄지지만, 정착촌은 외부 지원이 전혀 없다.
레바논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은 40만 명으로 추산된다. 레바논 정부가 시민권을 주지 않아 지난 60년간 난민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난민촌이나 정착촌이나 레바논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고 있다.
「부르즈라 할」 시장 인터뷰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얻을 수 있는 직업은 인근 지역의 일용직이다. 빈곤과 높은 실업률은 「알 카에다」 같은 테러단체들이 增殖(증식)할 수 있는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마을회관 2층에 있는 시장 사무실에서 「부르즈라 할」市의 시장인 「하산 하무르」를 만났다. 그는 이슬람 시아派를 대표하는 아말당 소속이다.
곧바로 레바논의 정치 현실에 대해 물었다.
―레바논이 「정상국가」로 가기 위해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뭔가.
『평화다. 평화가 정착돼야만 그걸 토대로 경제가 일어날 수 있다』
―레바논의 총리가 폭탄테러로 죽고, 후임 대통령 선출이 끝없이 연기되고 있다. 왜 그런가.
『레바논 사람들을 하나로 묶기 위한 정치제도가 不在(부재)한 상태다. 각 종파와 정파가 권력을 철저하게 배분하도록 헌법이 정하고 있다.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제도가 없다』
―이스라엘과의 분쟁이 해소되지 않는 상태에서 평화가 정착될 수 있겠나.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분쟁은 지혜롭게 들여다봐야 한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50년이 넘는 오랜 숙제다. 1982년 이스라엘의 1차 침공은 많은 상처를 남겼다. 우리 레바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영토 주권이다. 이스라엘의 침공을 받지 않고, 우리의 영토주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이스라엘과 우리의 분쟁은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레바논 남부 주민 70% 이상의 생각이다』
―이스라엘-레바논 갈등의 한복판에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가 있다. 팔레스타인 난민에 대한 레바논 사람들의 입장은 뭔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안의 레바논江 서안지구·가자지구로 가라는 입장인가, 아니면 여기 살아도 좋다는 건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여기 살아도 좋다. 이스라엘과 문제 없이 공존하기를 바란다』
―살아도 좋다면 시민권을 줘야 할 것 아닌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레바논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정착촌·난민촌에서 살고 있다. 물론 인간적인 환경이 아니다. 그들이 보통사람처럼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시민권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나.
예를 들어 내가 한국이나 미국에 간다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건 외국 시민권으로 가능한 일이다.
레바논 시민권을 갖게 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영원히 팔레스타인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40만 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레바논 시민권을 갖게 되면 무슬림의 수가 크게 늘어난다. 이건 다양한 종파 간 균형을 이루고 있는 레바논 정치질서를 깰 것이다』
『번영의 전제조건은 평화』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캠프가 테러나 소요의 근원이 되고 있다는 지적에 동의하는가.
『동의한다. 그들은 집을 사거나 팔 수 없다. 그들은 시민권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티르가 대단한 휴양도시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이 지역 경제를 일으킬 방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무엇보다 농업이다. 오렌지·바나나 등의 유럽 수출을 늘려야 한다. 레바논 남부에는 많은 역사 유적들이 있다. 관광객을 불러들이려면 평화가 정착돼야 한다. 외국 관광객을 위해 우리는 우리 집이라도 빌려 줄 용의가 있다』
오후 4시쯤 부대로 돌아오니, 우리를 뒤따라 수색정찰에 나섰던 「특전사 요원들이 테러용의 차량으로 수배된 벤츠 승용차가 카시미아 다리를 지나 북쪽으로 가는 것을 확인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 정보는 곧바로 UNIFIL에 보고됐다.
테러용의 차량 적발
姜贊玉 단장은 아랍어 통역차 따라갔던 이정현 일병을 불러서 격려했다. 두 아들이 모두 군복무 중인 姜단장은 아들뻘인 이일병이 대견한지 연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명지大 아랍어과 1학년을 마치고 입대한 이일병은 『기초적인 아랍어를 하는 정도였는데, 지난해 7월부터 현지인들과 접촉하면서 아랍어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했다. 동명부대에는 3명의 아랍어 통역병이 있다. 6개월마다 교체되는 일반 병력들과 달리 통역병들은 연장 근무가 가능하다.
UNIFIL은 한국군 부대의 첩보 등을 종합해서 이날 저녁 26개 다국적 평화유지군에 통신문을 하달했다.
<3월21일 12시24분경 프랑스대대 정찰팀은 아스 술타니아에서 검은색 메르세데스 벤츠를 식별했다. 동 차량은 14시30분 카시미아 다리 근처에서 한국대대 정찰팀에 의해 재식별됐다. 높은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할 것이며, 특히 유니필 작전지역 내외에 보급수송 작전 및 작전 시 주의할 것을 당부한다>
UNIFIL 사령부는 이 벤츠 차량을 이용하고 있는 테러리스트 6명의 이름과 신원을 한국군에게 상세하게 제공했다. 6명 가운데 4명은 팔레스타인, 1명은 이라크, 1명은 알제리 출신이었다. 모두 남성으로 나이는 30代와 40代였다.
UNIFIL 사령부는 「테러 용의자 6명 가운데 1명이 거리 청소부로 변장하고 주변을 관찰하는 것이 관측됐다. 이들은 검은색 벤츠 외에 한 대의 차량을 더 운용하고 있다. 이들은 의심을 피하기 위해 여성들을 데리고 다니는 경우가 있다」고 경고했다.
3월22일 아침 일찍 일어나 영국의 BBC 방송을 보니 「시돈 지역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레바논軍과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의 충돌로 소요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시돈은 티르에서북쪽으로 30km쯤 떨어져 있다.
부대에 가서 동명부대 정보요원들에게 확인해 보니 덤덤한 반응이었다.
『시돈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종종 있는 일입니다. 시리아에서 헤즈볼라 2인자 「이마드 무그니에」가 폭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부대 주변 곳곳에서 하늘로 총을 쏴대는 게 목격됐습니다. 어딘가에 무기가 숨겨져 있다는 얘기죠. 이곳 사람들은 사망 40일째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무그니에의 40일 기일이 3월24일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폭력시위나 충돌이 있지 않을까 바짝 긴장하고 있습니다』
동명부대의 최첨단 감시장비를 맡고 있는 김한얼(23) 상병은 논산의 육군훈련소에서 조교로 근무하다가 2007년 11월 인터넷으로 동명부대 2진 모집에 응모했다. 김상병의 아버지는 육사 37기인 金榮植(김영식) 준장이다.
장군의 아들
―혹시 어머니가 레바논에 가는 걸 반대하지 않았나요.
『아버지가 합참의 해외파병과장으로 동명부대 1진 파병을 준비하셨습니다. 레바논을 많이 왔다 갔다 하셨어요. 무슨 일을 하나 궁금했죠. 「파병에 자원하겠다」고 했더니, 아버지께서 「생각만큼 위험하지는 않다. 새로운 세상을 보고 견문을 넓힐 기회」라고 하셨어요. 이 부대의 터를 닦은 분 말을 안 들으면 누구 말을 듣겠어요(웃음)』
―파병에 선발될 때 아버지 덕을 좀 봤나요.
『아니오. 아버지가 그때는 육군 산악부대의 참모장이셨습니다』
―중앙大에 다니다가 입대했는데, 군대에 가기 싫다는 생각은 안 해 봤습니까.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겠다는 생각까지는 안 해봤고요. 병역의무는 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2년을 허송세월한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자기 하기 나름 아닐까요』
―근무가 힘들지 않나요.
『부대를 지키는 감시장비가 24시간 가동됩니다. 밤낮을 바꾸어서 일하는 게 좀 힘들죠』
―부대가 對民지원 사업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데 나간 적이 있습니까.
『지난 2월에 있었던 「피스 웨이브」에 나가서 솜사탕을 만들었습니다. 팔이 아플 정도로 만들었는데 아이들에게 제일 인기 좋았어요』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우리나라도 한국전쟁이 끝나고서 이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이 나라에는 전쟁이 끊이질 않나 생각했지만,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일 불편한 점은.
『먹는 것, 입는 것은 훈련소에 있을 때보다 훨씬 좋은데, 집 생각이 더 나는 것 같아요. 어머니가 해주는 밥이 더 생각납니다』
―아버지가 군인인데 육군사관학교에 갈 생각은 안 했습니까.
『어렸을 때 하도 이사를 많이 다녀서 육군사관학교에 가는 건 일찌감치 포기했어요』
―얼마나 이사를 다녔기에.
『초등학교는 4곳, 중학교는 2곳을 다녔습니다. 고등학교는 기숙학교라 한 곳이었고요. 군인아파트는 다 비좁습니다. 방이 대개 2개밖에 없죠. 방을 늘 남동생과 같이 썼습니다. 군인 가족이 아니면 군인들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없죠』
2006년 이스라엘의 2차 침공 때 60여명의 레바논 어린이들이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사망한 「카나의 학살」이 발생했다. 이스라엘은 이 참사를 계기로 레바논 지역 공습을 48시간 잠정중단했다.
「카나의 학살」
카나는 동명부대 주둔지에서 동쪽으로 20km쯤 떨어진 곳에 있다. 『카나에 가겠다』고 했더니 동명부대에서 『우리 관할구역 밖이라 곤란하다』며 만류했다. 할 수 없이 동명부대에서 통역요원으로 일하는 마루아 부르지氏(32·여)와 둘이서 택시를 이용해 카나로 향했다.
프랑스어와 영어가 유창한 마루아는 말하기를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그녀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反이스라엘 저항운동 「안티파타」를 시작한 날이 내 생일』이라며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헤즈볼라에 대한 친밀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만큼 이스라엘에 대한 적개감이 대단했다. 자신의 생각을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그녀와의 동행은 즐거웠다.
그녀의 두 남동생 이브라힘(27)과 알리(18)는 지금 앙골라에서 살고 있다. 여동생은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에서 살고 있다. 레바논 공립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한 큰 남동생은 앙골라에서 사업을 하는 작은아버지를 돕고 있고, 둘째 남동생은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한다. 불안한 政情과 경제난 때문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하는 이야기를 할 때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여기에는 일자리가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들 집에서 쉰다. 일자리를 잡아야 월급이 400~500달러밖에 안 된다. 한국군 부대에 일자리를 잡은 것은 내게 큰 행운이다. 동명부대에 감사하고 있다. 이건 내 진심이다』
이란 도움으로 길 닦아
카나로 가는 길은 잘 닦여 있었다. 도로를 포장한 지 얼마되지 않은 듯 아스팔트의 검은빛이 진했다. 길가에는 보수 중인 집들이 많이 보였다. 2006년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파괴되거나, 새로 짓다만 건물들이라고 한다.
―길이 다른 지역보다 잘 닦여 있다.
『2006년 이스라엘의 침공이 끝나고 이란이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파괴된 도로를 닦아 주었다. 이란은 헤즈볼라와 이 지역을 재정적으로 지원한다』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의 이동을 차단하기 위해서 도로를 파괴한 건가.
『그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레바논 사람들이 피란을 가지 못하게 하려고 도로를 파괴했다』
―피란을 못 가게 하려고 도로를 파괴할 리가 있나.
『이스라엘은 레바논 사람들을 죽이기위해 도로를 파괴했다. 헤즈볼라는 모두 산에 있었다. 헤즈볼라는 이곳 지리를 손금 보듯 훤히 다 안다. 그들은 계곡과 산을 타고 이동했다. 헤즈볼라의 이동을 차단하려고 공습을 한다는 게 말이 되나』
―정말 그렇게 믿나.
『그게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은 지난 전쟁뿐 아니라 1996년 4월에는 공습으로 140명의 무고한 레바논 사람들을 학살했다. 학살현장에 세워진 기념관에 가보면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두 근본주의의 충돌
이스라엘과 이슬람의 분쟁은 종교와 인종, 정파와 영토 싸움이 뒤얽혀 있다. 구약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수천 년 묵은 감정싸움이다. 서로에 대한 증오와 불신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제3자의 눈에는 우스꽝스럽게 비칠 때가 적지 않다.
2004년 1월 이스라엘의 나사렛 지역에서 만난 한 팔레스타인 노인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기꾼」이라고 단언했다. 노인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내게 자세히 설명했다. 이야기가 하도 재미있어서 그 후에 만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다들 진지하게 공감을 표시했다. 팔레스타인 노인의 얘기는 이랬다.
『아브라함의 처 사라는 90세 넘어서 아들 이삭을 낳았다. 아브라함은 남자니까 100세 넘어 생산을 할 수 있다. 하지만 90세 넘는 여자가 어떻게 아이를 낳나. 그건 말이 안 된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후사를 잇기 위해서 어디서 주워온 아이가 분명하다. 아브라함이 젊은 여종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이 진짜 아브라함의 아들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이삭의 후손이고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데, 그건 거짓말이다. 근본도 알 수 없는 이삭이 어떻게 아브라함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스마엘의 후손인 바로 우리 이슬람人들이다』
아브라함은 기원전 2000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팔레스타인 노인은 4000년 전 성서 속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근본부터 싸잡아 비난한 것이다. 재미있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해서 노인에게 물었다.
―성경에 나온 아브라함의 이야기들은 비유적인 이야기, 우화가 아닐까요. 아브라함이 실제로 존재했는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구약과 코란은 神이 내려 줬다. 쓰인 그대로가 진실이고, 일자일획 고칠 수 없다』
답답한 것은 이슬람 사람들뿐만이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근본주의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근본주의자들끼리 부딪치니 파열음이 클 수밖에 없다.
『유대인은 어정쩡한 타협은 못 한다』
4박5일간 이스라엘 전역을 함께 돌아다녔던 이스라엘 외무부의 가이드 「론 에델하이트」에게서 그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론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스라엘이 로마시대 이후 지독한 탄압과 학살의 대상이 됐던 이유는 예수의 神聖(신성)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유대인들과 같은 피를 나눴다. 처음에는 몰라도 예수의 神聖이 확립된 4세기 이후에 가서는 「지금 생각해 보니 우리도 예수가 神으로 생각된다」 정도로 물러설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론은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이 어떻게 神이 되나. 사람은 사람이고, 神은 神이다. 예수는 우리 유대인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고, 형제자매가 있었다. 그가 목수로 생계를 이어 갔다는 걸 주변에서 다 알았다. 모르면 몰라도 그걸 아는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는 神이다」라고 얘기할 수 있나. 神이면 神이고 사람이면 사람이지, 사람이기도 하고 神이기도 하고 성령이라고도 하니,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나. 죽으면 죽었지 우리 유대인은 그런 식으로 어정쩡하게 타협하고 못 산다』
카나에 거의 도착했을 때 안내를 자청한 마루아에게 헤즈볼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지난번 이스라엘 침공 때 로켓포를 어깨에 메고 이스라엘 전투기와 맞서싸웠던 게 바로 헤즈볼라의 전사들이었다. 내 눈으로 그걸 봤다』며 두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2006년 전쟁 이후 이스라엘에 대한 내 생각이 달라졌다. 헤즈볼라는 레바논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헤즈볼라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는 「레바논 정규군을 제대로 키우고 좋은 무기를 주면, 우리는 우리의 무기를 내려놓겠다」고 했다. 그게 진심이라고 믿는다』
2차 이스라엘 - 레바논 전쟁의 승리자는 헤즈볼라
―헤즈볼라는 레바논 의회에 14석의 의석을 얻었다. 헤즈볼라가 무기를 내려놓고 완전한 제도권 정당으로 전환하는 순간이 올 걸로 생각하나.
『그렇다. 헤즈볼라는 테러 집단이 아니다. 테러조직의 기준이 뭔가, 이스라엘에 맞서싸우면 테러조직인가? 헤즈볼라는 레바논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조직이다』
―당신은 헤즈볼라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만이 아니다. 레바논 남부지역 사람들은 전부 그렇다. 헤즈볼라는 우리 가운데 있고, 우리 모두가 헤즈볼라를 지지한다』
―헤즈볼라 무장세력은 어디서 왔나. 레바논 사람들이 주축인가, 외부 지원세력이 가세한 것인가.
『헤즈볼라는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다. 여기 지형을 제대로 알고, 터널과 계곡을 잘 안다』
2006년 2차 레바논 침공이 끝난 후 이스라엘의 「위노그라드 조사위원회」는 34일에 걸친 이 침공이 「심대하게 기회를 놓친 전쟁」이라는 보고서를 에후르 올메르트 총리에게 전달했다. 이 보고서는 헤즈볼라의 항전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2차 레바논 전쟁 이후 레바논 남부지역에서 헤즈볼라의 명성이 치솟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보고서의 일부를 소개한다.
<이스라엘은 전쟁을 시작했지만, 분명한 군사적 승리 없이 전쟁은 종결됐다. 고작 수천 명으로 구성된 準군사집단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규모 및 질적으로 우위인 中東지역 최강의 군대(이스라엘軍)를 상대로 수주 동안 견뎌 냈다. 이스라엘 민간인을 목표로 한 수천 발의 로켓 공격은 전쟁 기간 내내 계속됐고, 이스라엘軍은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들이 피해를 봤으며 많은 이스라엘 국민들은 일시적으로 집을 떠나거나 대피호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오랫동안 원거리 화력戰과 제한된 지상작전만을 펼치다가 이스라엘은 결국 대대적 지상 공세작전을 시작했지만, 이는 국제연합 안보리가 휴전을 제시하기 직전에야 이루어졌다. 지상공세는 어떠한 군사적 성과도 이끌어 내지 못했으며 완전히 시행되지 못했다>
시리아가 세워 준 「학살기념관」
1996년 4월18일 이스라엘의 誤爆(오폭)으로 사망한 레바논 희생자 140명은 검은 대리석 관에 안장돼 있었다. 길쭉한 20여 개의 검은 대리석관이 기념비처럼 누워 있었다. 관 위에는 죽은 이들의 이름이 아랍어로 적혀 있었다.
그 옆에 시리아 정부가 세워 준 「학살 기념관」이 보였다. 문이 잠겨 있었다. 관리인이 멀리서 우리가 온 것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마루아가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설명한 모양이다. 관리인은 앞장서 가면서 당시의 상황을 흥분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40평쯤 되는 기념관 안에는 당시 참상을 담은 사진, 아랍국가들이 보내온 그림과 조각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강렬한 증오가 담겨 있었다.
티르에서 카나로 이어지는 길에는 이스라엘과 싸우다 전사한 젊은 헤즈볼라 병사들의 초상화가 연이어 걸려 있었다. AK46 소총을 든 손을 그린 헤즈볼라 깃발이 건물 옥상마다 펄럭였다. 레바논 사람들이 그렇게 열망하는 평화는, 피가 피를 부르는 보복의 악순환 속에서 이뤄질 수 있는 것일까?
끝없이 이어지는 마루아의 전쟁 체험담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3월22일 저녁, 티르 시장과 압바시아 시장이 마련한 저녁식사 자리에 姜贊玉 단장과 함께 참석했다. 「페니키아」라는 해산물 요릿집이었다. 2시간 정도의 저녁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여러 번 停電(정전)이 됐다. 姜단장은 『아름다운 레바논의 별들을 보여 주기 위해 불을 끈 모양』이라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姜단장은 유창한 프랑스語로 70代의 老(노)정객들과 정겹게 이야기를 나눴다.
압바시아 시장은 포크와 나이프 등이 담긴 식기세트를, 티르 시장은 티르 역사책 한 권을 내게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전날 동명부대가 압바시아 종합학교에서 연 「어린이날」 기념 주민잔치에서 두 시장을 처음 만났다. 姜단장이 『한국에서 온 언론인인데, 곧 떠난다』고 소개하자, 두 시장은 『내일 姜단장과 저녁 모임이 있는데 송별잔치를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남부 레바논의 「小통령」 티르 시장
「압둘 무센 일 후세이니」(73) 티르 시장은 시아派인 레바논 국회의장 「나비 베리」(아말당 당수)의 오랜 정치적 동지다. 레바논 남부지역 35개 지자체 연합회의 회장으로 남부 레바논의 「小통령」으로 불린다고 한다.
후세이니 시장은 『나비 베리가 어제 우리 집에 왔다 갔다』며 『나비 베리와도 주로 이 집에서 식사를 한다』고 소개했다.
「압드알라 파르둔」(78) 압바시아 시장은 역시 시아派로 기업가 출신이다. 아프리카의 「아이보리 코스트」에서 코코아·커피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두 시장은 20代에 만나 우정을 나눈 사이라고 했다.
티르 시장은 『姜단장은 나의 아들이자 형제 같은 사람』이라며 『姜단장의 초청을 받고 온 당신 역시 나의 친구』라며 호의를 보여 주었다. 압바시아 시장은 『남부 레바논의 아름다움을 다 보려면 3박4일은 너무 짧은 일정』이라며 『일주일 더 머물다 가라』고 했다.
老정객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으면서, 姜단장과 동명부대원들이 이들과 우호적인 관계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을 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동명부대의 한 참모는 이런 얘기를 했다.
『평화유지군이 레바논에 파병될 때 이라크 자이툰부대 파병연장과 맞물려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동명부대의 현지 활동 중에 테러로 우리 軍사상자가 발생하면 「평화유지군 철수하라」는 여론이 빗발치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죠. 자체 사고를 막고, 테러 예방에 신경을 쓰는 만큼 지역사회의 민심을 잡는 데 힘을 기울여 왔습니다』
두 시장은 우리 국방부의 초청으로 李明博 대통령 취임식에 다녀왔다. 두 사람은 한국의 발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한국이 50년간 성장을 이루고 세계 10大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데는 국가지도자의 역할이 컸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그래도 국민의 눈치를 보고 뜻을 따른다. 여기 정치인들은 자기 이익만 좇는 게 문제다』(후세이니 티르 시장)
『레바논 문제는 안이 아니라 밖에 있다』
티르 시장에게 「레바논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물었다. 후세이니의 설명이다.
『레바논의 문제는 레바논 안보다 레바논 밖에 있다. 미국과 프랑스, 시리아와 이란 같은 외세가 얽혀 있어서 문제다. 가까운 미래에 우리 정치인들이 연합·화합하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국민의 70~80%가 그걸 원한다. 내 친구 나비 베리 의장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압바시아 시장은 『한국군이 반년 동안 진주하면서 이탈리아軍이 10년 동안 쌓은 정을 쌓았다』며 『그런 얘기를 한국의 합참의장에게 편지로 써서 보냈다』고 했다. 티르 시장이 공감했다.
『이곳 주민들이 한국군을 좋아한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지원 프로젝트를 떠나 인간관계 형성이 잘 돼 있다는 얘기다』
두 노인이 뺨과 이마에 퍼붓는 키스세례를 받으면서 식당을 떠났다. 숙소로 나를 바래다 준 姜단장은 이런 얘기를 했다.
『밖으로 나와 보면 한국은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닙니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국력에 걸맞은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웃에 주둔하고 있는 이탈리아·프랑스 軍만 하더라도 병력이 각각 2500명, 1500명에 이릅니다. 우리는 겨우 350명에 불과합니다. 평화유지군 파견은 단순한 군대의 파견이 아니라 군사외교단을 파견하는 겁니다. 물론 위험하죠. 그렇더라도 움츠리지 말고 국제분쟁의 현장에 나서는 게 옳은 선택입니다』
3월23일 새벽 숙소에서 일어나 베이루트 공항으로 출발했다. 올 때처럼 두 대의 경호차량이 동원됐다. 리타니江의 카시미아 다리가 가까워질 무렵 도로 옆에 세워진 장갑차와 병력들이 언뜻 보였다. 경계근무 중인 우리 특전사 장병들이었다.
먼 아시아의 동쪽 끝에서 온 우리 병사들이 中東의 화약고 한복판에서 평화를 지키기 위해 밤을 지새우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릿하게 저려 왔다.●
레바논에 주둔한 유엔 평화유지군(PKO)에 대해 이곳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몰라서 『티르市에서 일하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질문이 이어졌다.
『친구 이름이 뭐냐』
『그 친구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느냐』
『친구의 직업이 뭔데 티르市에서 일하느냐』
나는 「안기부 X파일」 全文(전문) 보도로 인한 소송사건이 대법원에 계류 중이어서 사실상 출국금지 상태다. 이번에 출국하면서 담당 대법관의 출국허가를 받고 1년짜리 여권을 만들었다. 통상 10년 기한의 여권이 발급된다.
인천공항 출국 도장 하나만 달랑 찍힌 내 여권이 이상했던지 공항 직원은 계속 내 여권을 뒤적였다.
나는 2003년 이스라엘 외무부 초청으로 이스라엘 「실판 샬롬」 외무장관을 인터뷰하고, 4박5일간 이스라엘 전역을 여행했다. 레바논은 敵國(적국)인 이스라엘 방문 기록이 있는 이들의 입국을 전면 거부하고 있다. 새 여권을 발급받은 게 잘된 것인지, 일을 복잡하게 만든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새 여권에, 해외여행 기록이 하나도 없는 한국인이 위험천만의 이스라엘-레바논 접경지역에 간다는 게 아무래도 미심쩍었던 모양이다. 나는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군 부대를 취재하러 간다」는 얘기를 끝까지 못 했다. 自國(자국)에 주둔한 외국군에 대한 반감은 어디나 있게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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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명부대가 지난 3월22일 개최한「어린이날」잔치에 참석한 레바논 어린이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
곤욕을 치르고 있는데 훤칠한 키에 미모의 한국 여성이 내게 다가왔다.
『김연광 편집장님이시죠』
그녀의 가슴에는 유엔 마크가 선명했다. 레바논 평화유지단 동명부대의 공항업무통제장교 반은정 대위였다. 반대위는 공항 통제구역 출입이 허가된 출입증을 달고 있었다.
사정을 설명했더니 반대위가 『동명부대 취재하러 왔다고 얘기를 하시지』라며 웃었다.
『카타르 항공 422편 승객들이 모두 나왔는데 편집장님이 안 나오셔서 들어왔습니다. 동명부대에 취재 왔다고 했으면 「프리패스」시켜 줬을 거예요. 적어도 레바논軍과 공무원들은 유엔과 평화유지군에 대해서 아주 좋은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괜한 걱정을 하셨네요』
동명부대, 『마중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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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명부대의 공항통제장교 반은정 대위. 레바논 어린이날 행사를 위해 사물놀이를 연습하는 모습이다. |
『반대위, 원래 2주일짜리 입국허가를 해주는데, 한국군에 감사하는 뜻에서 4개월 입국허가를 내줬다』
한국에서부터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던 동명부대 공보장교 이규원 대위가 공항 대합실에서 반갑게 내 손을 잡았다. 공항터미널 건물 밖으로 나왔다. 도하 공항에서 환승을 위해 6시간 대기하고, 20시간 가까운 비행 탓에 온몸이 파김치였다. 빨리 티르市의 숙소로 가서 쉬고 싶었다. 베이루트 공항에서 티르市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 거리다.
레바논에 오기 전에 이규원 대위와 여러 번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 이번 취재를 주선해 준 합동참모본부와 이대위는 『베이루트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티르市의 숙소까지 오라. 마중을 나갈 수 없다』고 했다.
이역만리를 찾아간 사람을 위해 1시간 거리의 공항으로 마중 나오는 게 뭐 그렇게 힘든 일인가, 섭섭했다. 더구나 알 카에다 연계조직인 「이라크 이슬람 국가(ISI)」가 2007년 12월 한국인을 타도할 的(적)으로 선언한 마당이 아닌가.
이대위에게 「공항으로 좀 나와 줄 수 없느냐」고 이메일을 보냈고, 이대위는 「마중 나가는 일이 까다롭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유엔 차량은 폭탄테러의 제1 목표
공항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나를 마중하러 나온 사람은 모두 6명이었다. 반대위와 이대위, 특전사 對테러담당 707부대의 부사관 2명, 운전병 2명. 모두 권총과 K-1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지프 두 대가 대기 중이었다. 방탄조끼를 입고 반대위·이대위와 함께 같은 지프에 탔다. 우리 차량은 베이루트 시내의 한 「안전지대」로 이동했다. 유엔 표식을 단 차량이 베이루트 거리를 다니다가 테러단체들의 정보망에 포착되면 곧 폭탄테러의 목표물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레바논軍이 여러 겹으로 이 안전지대를 방어하고 있었다. 이동시간을 기다리면서 반대위, 이대위와 얘기를 나눴다. 이규원 대위는 『레바논에 온 지 두 달 만에 베이루트에는 오늘 처음 나와 봤다』고 했다(국방부에서 테러예방을 위해 「안전지대의 위치, 이동시간에 대해서는 보안을 지켜 달라」고 요청했다).
―곧바로 티르市로 가는 게 아닙니까.
『주간 이동이 금지됐습니다. 안전지대에서 대기하다가 일몰 후 「베이루트 주재 유엔잠정주둔군(UNIFIL·유니필)이 지정한 시간에 이동해야 합니다. 레바논에서 유엔 표식을 단 차량은 폭탄테러의 제1 목표입니다』
―레바논의 평화유지를 위해서 온 유엔 차량이 왜 제1 목표입니까.
『레바논의 각 정파와 종파, 테러단체들은 테러해야 할 다양한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유엔 차량을 테러해서 평화유지군을 살상하면 손쉽게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유엔 마크가 붙지 않은 차를 갖고 오시지 그랬습니까.
『UNIFIL이 그건 절대 금지합니다. 유엔 평화유지군이 레바논의 안정에 기여하고 있고, 우리가 이 지역의 치안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거죠. 쉽게 말해서 유엔의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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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명부대는 리타니江 남쪽 지역에서 레바논 정규군과 합동작전을 펼치고 있다. |
새벽부터 6명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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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을 친 지역은 팔레스타인 정착촌이다. |
『그것도 UNIFIL 규정입니다. 한 대는 이동할 수 없습니다. 꼭 두 대가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오늘처럼 한국군 관할 구역을 벗어나서 이동할 경우에는 반드시 UNIFIL의 사전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아까 주간이동이 금지됐다고 했는데, 그럼 공항에 올 때는 언제 이동했습니까.
『오늘 새벽에 이동했습니다. 지금까지 「안전지역」에서 머물다가 공항으로 왔습니다』
―아침·점심식사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전투식량을 먹었죠』
―그런 사정을 얘기하셨으면 제가 베이루트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갔을 텐데.
『保安(보안) 때문에 이메일로 자세한 사정을 설명드릴 수 없었습니다』
―제가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부대로 가는 것은 안전한 겁니까.
『그쪽이 조금 안전할 걸로 보입니다. 다행히 이곳은 이라크와 달리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마구잡이 폭탄 테러는 벌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곳의 테러는 특정 목표물을 정확하게 타격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민간인 한 명을 데려가기 위해 6명이나 되는 군인들이 테러위험을 무릅쓰고 새벽부터 움직였다는 사실이 너무 미안했다. 나의 미안함을 눈치챘는지 반대위가 이런 얘기를 했다.
『폭탄테러가 심했을 때는 「새벽 ○시대에만 이동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국방부나 합참에서 오시는 분들을 공항에서 맞이하기 위해 새벽에 이동했다가 다음날 새벽에 부대로 돌아갔습니다. 24시간 안전지역에서 햄버거와 샌드위치만 먹었죠. 그때에 비하면 오늘은 그래도 경계태세가 좀 나은 편입니다』
「시돈의 테러단체 폭탄제조했다」는 첩보
「안전지대」에는 이탈리아軍 장갑차 두 대와 군인들이 대기 중이었다. 이탈리아軍은 한국군 주둔지역의 남쪽 지역을 맡고 있다. 사방이 캄캄해지자 차량들은 일제히 이동을 시작했다. UNIFIL이 정해 준 바로 그 시각이었다.
이탈리아軍 장갑차에는 테러범들이 무선으로 폭탄을 작동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주파수 방해장치」가 탑재돼 있다. 한국군은 「재머」로 불리는 전자파 교란 장치를 차량에 장치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우리 차량은 지중해를 바라보면서 달리는 해안 고속도로와 꼬불꼬불한 국도를 번갈아 이용했다. 레바논軍이 운영하는 검문소를 여럿 통과했다. 고속도로에 들어서면 속도가 무섭게 높아졌다. 707부대의 부사관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테러범들이 주로 고속도로에 시한폭탄을 장치해 두고 유엔 차량을 노리고 있습니다. 테러범들은 차량들이 빨리 달리기 때문에 「기준점」을 정해 두고 그 지점에 차량이 오면 무선 폭파버튼을 누르게 됩니다. 빨리 달리면 그만큼 폭탄테러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야간에 고속으로 이동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빨리 달리면 정말 폭탄테러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가요.
『이론이 그렇다는 거죠. 그런데도 폭탄테러를 당한다면 다른 선택을 해야겠죠』
―오늘 폭탄테러 위협이 높은가요.
『1주일 전에 「시돈 지역의 한 테러단체가 TNT 17kg 분량의 폭발물 2개를 만들어, 테러를 준비 중」이라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시돈은 티르市로 가는 길목입니다. 이 지역을 우회 통과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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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바논 전통 결혼식에 초청받은 동명부대의 여군들이 함께 포즈를 취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아랍어 통역군무원 이주영씨. |
『영국·프랑스軍이 첩보 강해』
―그런 첩보는 얼마나 믿을 만합니까.
『한국군을 포함한 26개국 평화유지군이 모두 활발하게 첩보수집 활동을 벌입니다. 이 지역을 식민지배했던 프랑스 軍과 영국軍이 첩보가 강합니다. 생계를 위해 정보를 파는 사람이 있고, 이쪽에서 심어놓은 정보원이 있습니다. 첩보가 들어오면 일단 레바논軍과 첩보당국에 넘겨서 판별을 요청합니다. 상당한 신뢰가 있다고 판단되면, UNIFIL 차원에서 첩보를 다국적軍에 하달합니다』
창 밖으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반짝이는 민가의 불빛이 가끔씩 보인다. 지금 이 순간 우리를 노리고 있는 폭탄이 도로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떠올랐지만 스물네 시간의 여행 때문인지 고개가 절로 툭툭 떨어진다.
반대위와 이대위는 아무런 말이 없다. 얼굴에서 긴장감이 스며 나온다. 두 사람은 한밤중에 나를 티르市 도심에 있는 「레스트 하우스」에 내려 놓고, 부대로 돌아갔다.
대통령이 4개월째 공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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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시대에 건설된 전차경기장 유적. 티르市에는 고대 로마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영화 「벤허」의 전차경기 장면을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
1978년 3월부터 30년째 안보와 치안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 유엔 평화유지군이다. 레바논에는 현재 1만3000여 명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주둔 중이다. 한국군 「동명부대」는 다국적軍의 일원으로 2007년 8월 주둔을 시작했다.
시리아軍 철수를 주장해 온 「라픽 하리리」 총리는 2005년 2월14일 암살당했다. 시리아의 소행임이 분명하지만 레바논 정부는 범인 검거에 실패했다. 유엔과 영국, 사우디아라비아가 앞장서서 최근 이 암살사건을 다룰 「국제사법재판소」를 설치했다. 2005년 이후 7명의 고위 공직자가 폭탄테러로 사망했다.
라픽 하리리 총리의 암살 이후 레바논 의회와 정치권은 「反시리아」와 「親시리아」의 양대진영으로 쪼개졌다. 시리아에 반대하는 「3월14일 동맹」이 128석의 의석 가운데 71석을, 親시리아인 「3월8일 동맹」이 57석을 차지하고 있다. 국회는 이슬람系 64석, 기독교系 64석으로 같은 비율이다.
6년 단임제 대통령제 국가인 나라에서 대통령이 4개월째 공석 중이다.
「에밀 라후드」 대통령의 임기가 2007년 11월23일 끝났지만, 與野가 후임 선출 방식에 합의하는 데 실패했다. 대통령 선거일이 16번 늦춰졌고, 2008년 3월25일이 선거일로 잡혔지만 선거가 실시되지 않았다.
1975년부터 15년간 계속됐던 레바논 內戰의 후유증, 기독교와 이슬람의 충돌이 재현되고 있는 양상이다. 2007년 여름 과격 테러단체 「파타 알 이슬람」 소탕작전으로 국민적 지지를 얻은 슐레이만 총사령관이 가장 강력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된다.
둘로 갈라진 政情(정정)의 틈새를 파고드는 것은 外勢(외세)다. 이란과 시리아는 같은 종파인 시아派 정치세력에 줄을 대고, 정치적 교착상태가 지속되는 방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분열이 구조화한 나라 레바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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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타임스」의 토머스 프리드먼 기자가 자신의 베이루트 특파원 시절 경험을 담은 저서「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까지」. |
<1943년 레바논의 이슬람들은 시리아와의 통일을 포기했고, 그대신 「마로나이트」(로만 가톨릭의 일파) 세력은 프랑스와의 연계를 끊고 「大레바논」이 아랍국가가 되는 데 동의했다. 문서로 된 약속은 아니었지만 이건 「국민협약」으로 받아들여졌다.
협약에 따라, 대통령은 「마로나이트」가 맡고, 의회 의석은 「기독교 6, 이슬람 4」의 비율을 지키기로 했다. 이것은 기독교 세력의 우위를 제도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반면 총리는 수니派 이슬람이, 의회 의장은 시아派 이슬람이 맡게 됐다. 이건 레바논의 아랍-이슬람 전통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러한 서로의 이해는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50%에 이르던 때는 유지됐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인구구성이 뒤집어졌다. 기독교 인구가 전체의 3분의 1로 줄고, 이슬람 인구가 전체의 3분의 2로 늘어난 것이다. 이슬람은 인구 구성에 맞는 권력배분을 요구했고, 마로나이트는 거절했다. 「현상 유지」를 위해 기독교 세력은 「팔랑헤」, 「타이거」 같은 민병대를 조직했다. 이에 맞서 이슬람 세력 역시 비슷한 민병대를 만들었다.
1970년 요르단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곧바로 레바논에서 둥지를 틀었다. PLO와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은 레바논 남부지역과 이스라엘 접경에서 準(준)주권기구처럼 행동했다. PLO의 이스라엘 공격은 이스라엘의 반격을 불러왔다. 이슬람계인 팔레스타인과 기독교계 레바논 정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긴장은 점점 고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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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월12일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차량폭탄 테러로 사망한 헤즈볼라의 2인자「이마드 무그니에」의 초상화. 동명부대 관할 지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무그니에 사망이 확인되자 美 국무부는『그자가 없는 세상은 더 좋은 세상이 됐다』고 논평했다. |
다음날 아침 이슬람계 무장세력의 지원을 받는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베이루트 거리에서 기독교 민병대 「팔랑헤」, 「타이거」와 전쟁을 시작했다. 15년에 걸친 레바논 內戰은 그렇게 시작됐다>
커튼을 열어젖히자 지중해의 옥빛 바다와 푸른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호텔방의 베란다에서 해변으로 나갈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맨발에 전해지는 모래의 감촉은 밀가루처럼 부드러웠다. 오전 7시30분쯤 호텔 1층의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
2006년 7월12일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대한 공습을 시작하자 유엔 관련 직원들은 모두 이 「레스트 하우스」로 도피했다. 일주일 뒤 이스라엘 지상군이 레바논 국경을 넘어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략 요충지 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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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바논 유엔잠정주둔군(UNIFIL)의 서부여단 사령관인 파올로 루지에로 준장이 부활절을 축하하기 위해 지난 3월21일 동명부대를 찾았다. 동명부대는 서부여단 소속이다. |
티르市는 아브라함이 一家(일가)를 이끌고 잠시 거주했던 고대 도시다. 구약성경에는 「수르」라는 이름으로 자주 나온다. 로마제국은 이곳에 「로만 로드」를 닦았고, 로마에서 두 번째로 큰 전차경기장을 지었다. 전차경기장의 흔적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어, 영화 「벤허」의 전차경기 장면을 이곳에서 찍었다고 한다. 티르는 십자군이 예루살렘 원정을 가기 위해 거쳐 갔던 길목이다.
1975년 레바논 內戰 발발 이후 티르 지역은 이스라엘-레바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震央(진앙)으로 자주 등장했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1차 침공했던 1982년 9월, 티르市와 북쪽에 위치한 시돈에서는 팔레스타인 저항단체를 중심으로 反이스라엘 항쟁이 거세게 벌어졌다. 이스라엘軍이 팔레스타인 난민촌 사브리아와 샤틸라의 외곽을 포위한 가운데, 기독교 민병대「팔랑헤」가 800~1000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을 학살했다.
이 학살 직후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끌던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레바논의 베이루트를 떠나 알제리의 튀니지로 망명처를 옮겼다.
이스라엘은 2006년 7월 레바논을 다시 전면 침공했다. 이번에는 이슬람 시아派인 헤즈볼라 게릴라 제거가 목적이었다. 헤즈볼라의 저항은 티르 인근 지역에서 가장 거셌다. 헤즈볼라 무장세력과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근거로 한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이 손 잡은 결과였다.
이스라엘 공군은 티르市를 고립하기 위해 베이루트 공항과 티르市 북부지역을 집중포격했다. 이스라엘 지상군은 2006년 8월 티르市 남쪽의 「마르자윤」 지역까지 進攻(진공)한 상태에서 유엔의 휴전 중재를 받아들였다.
30년째 주둔 중인 유엔잠정주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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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앞에서 울부짖는 레바논 여인. |
리타니江은 레바논의 남부와 북부를 가르는 자연 경계선이다.
이 강 아래쪽 레바논 남부지역에 유엔 평화유지군 1만3000명이 주둔 중이다. 26개 다국적軍으로 구성된 이 부대가 「유엔잠정주둔군(UNIFIL)이다. 1978년 3월23일 레바논 남부지역에 전개된 UNIFIL은 주둔 30주년을 맞았다.
이스라엘의 2차 침공 이후에는 주둔 병력이 2000명에서 1만3000명으로 증원됐다.
동명부대의 임무는 「감시와 정찰」이다. 언제든지 전투에 투입될 수 있다. 동명부대의 주축은 특전사 장병들이다. 「평화 재건」을 임무로 한 이라크의 자이툰부대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레바논 남부지역에서 폭탄테러는 끊이지 않고 있다.
潘基文(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최근 유엔에 보고한 폭탄테러 사건들이다.
<2007년 6월4일 스페인 대대의 평화유지군 6명이 사망한 사건에 대한 레바논과 스페인 정부의 수사는 계속되고 있다. 이 공격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주장하지 않았으며, 아직도 범행자들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레바논 당국은 2007년 7월16일 있었던 탄자니아 UNIFIL 헌병차량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도 수사를 계속해 용의자 중 한 명을 체포했다>
<2008년 1월8일 유니필 차량이 베이루트와 남부 레바논을 잇는 주 해안도로를 지나다가 시돈市 외곽에서 원격 제어된 급조폭발물에 의해 공격을 당했다. 폭발은 두 명의 아일랜드 평화유지군들에게 작은 부상을 입혔고, 그들이 타고 있던 유엔 차량이 파괴됐다>
<2007년 12월12일에는 레바논軍의 엘 하지 장군이 폭탄테러로 운전사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2008년 1월15일에는 레바논軍의 위샴 아이드 대위가 폭탄테러로 희생됐고, 이 사건으로 추가로 5명의 사망자와 2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2008년 1월15일에는 레바논 주재 미국대사관 소속의 차량을 겨냥한 폭탄테러로 인해 3명의 사망자와 수십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동명부대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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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부 레바논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길거리 벽화들. 남부 레바논에 불을 지르는 이스라엘 병사를 발로 차는 헤즈볼라 병사. 벽에 쓰인 글은「우리의 존엄은 우리의 저항에 있다」라는 뜻이다(사진 위). 「나의 사랑하는 레바논 남부」라는 깃발 아래 각 종파의 사람들이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다(사진 아래). |
지난번 이스라엘 취재 때 中東사태에 대한 「이스라엘 버전」을 알았으니까, 이번에는 中東사태에 대한 「이슬람과 레바논 버전」을 배우고 싶었다.
숙소를 떠나서 20분쯤 달렸을까, 「동방의 빛(Light of East)」이라는 동명부대 표지가 보였다. 지난 3월21일의 경계등급은 「옐로 플러스」였다. 「레드」보다 한 등급 낮지만, 시돈 지역 테러단체의 「폭탄제조 첩보」로 인해 평상시보다 한 단계 높아졌다고 한다. 오전 8시30분부터 30분 동안 진행된 동명부대 참모회의에 참석했다.
평화유지단장 姜贊玉(강찬옥·49·육사 37기) 대령이 가장 신경을 쓴 것은 테러에 관한 첩보였다. 참모회의는 30초간 박수치기, 30초간 웃기로 끝났다. 쑥스러웠지만 나도 따라서 박수를 치고, 웃었다. 姜단장은 이런 얘기를 했다.
『300여 명의 장병들이 항상 권총과 소총을 휴대합니다. 감시정찰을 맡은 특전사 요원들은 24시간 지역 순찰과 경계근무를 합니다. 테러에 노출돼 늘 긴장상태입니다. 장교들의 경우 사무실과 숙소가 바로 옆에 붙어 있습니다. 술은 절대금지입니다. 긴장을 풀 방법이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박수치기와 소리내서 웃기입니다. 효과가 좋습니다. 한국에 가서 한번 해보세요』
보이지 않는 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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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명부대장 姜贊玉 대령. 육군사관학교 37기인 姜대령은 특전사 3공수여단의 작전참모와 참모장, 특전사 작전처장을 역임했다. |
「유엔 안보리 결의안 1701호」가 부여한 「유엔레바논잠정군(UNIFIL)」의 임무는 명확하다.
<블루라인(레바논과 이스라엘 사이의 완충지역)과 리타니江 사이 지역에서 적대행위 재발을 방지하고, 인가되지 않은 무장인원, 자산, 그리고 무기의 배제를 위해 노력한다>
레바논 남부지역에서 이스라엘과의 무력 충돌, 긴장을 유발하는 것은 「헤즈볼라」(神의 정당) 게릴라들이다.
동명부대장 姜贊玉 대령은 『서방 언론이 보는 헤즈볼라와 레바논 남부 사람들이 보는 헤즈볼라의 성격은 전혀 다르다』며 『헤즈볼라를 이해하는 것이 복잡한 레바논 정치를 이해하는 첩경』이라고 했다.
姜대령은 『중동 분쟁이 워낙 복잡해서 취재하기 전에 공부를 좀 해야 한다』며 나를 부대장실로 이끌었다.
姜대령은 특전사 3공수여단의 작전참모와 참모장, 특전사 작전처장을 역임했다.
『동명부대의 주축인 특전사 요원들과 끈끈한 정으로 엮여 있어 부대지휘에 큰 힘이 된다』고 했다. 姜대령은 1990년부터 1992년까지 프랑스 지휘참모대학에서 공부하면서, 파리1대학에서 역사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논문 주제가 「근대 분쟁사」다.
프랑스어가 능숙해 프랑스어를 쓰는 지역 지도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있다. 부대장실에서 국제정치학 강의 비슷한 인터뷰가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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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시정찰을 나가기 전 부대 정문에서 총기를 점검하고 있는 동명부대원들. 모두 특전사 소속이다. |
헤즈볼라 지역 한복판에 주둔한 한국군
―「레바논 남부지역에서 헤즈볼라 게릴라들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 한 언제든지 다시 침공할 수 있다」는 게 이스라엘의 입장입니다. 평화유지군의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가 헤즈볼라 민병대의 활동을 제어하는 것 아닙니까.『레바논 남부지역에서 헤즈볼라는 무장한 민병대나 게릴라가 아니라 정치세력입니다. 헤즈볼라는 레바논 국회에서 14석의 의석을 갖고 있고, 레바논 남부에서는 확고한 기반을 갖고 있습니다. 헤즈볼라는 제도권 정치세력이자 準군사조직입니다.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의 완전 제거를 목표로 한다면 그건 이루어지기 어려울 겁니다』
―레바논 정규군과 헤즈볼라 게릴라의 관계는 어떤 겁니까. 정규군이 있고, 準군사조직이 있는 상황이 언제까지 갈 수 있습니까.
『현재로서는 불안한 공존입니다. 헤즈볼라는 자신들이 레바논軍의 대안세력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2006년 이스라엘의 침공 때 미사일과 총을 들고 이스라엘 공군과 지상군에 맞서 싸웠던게 헤즈볼라입니다. 「이스라엘에 맞서 한 달간 싸워서 승리했고, 이스라엘을 물리쳤다」는 헤즈볼라의 주장을 레바논 사람들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헤즈볼라는 이란과 시리아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세력을 확대했습니다. 對民(대민)지원 활동을 하고, 도로를 닦고, 부서진 건물을 새로 지어 주고 있습니다. 지난겨울은 유난히 추웠는데 헤즈볼라가 집집마다 난방용 기름을 나눠 줬습니다. UNIFIL이 관할하고 있는 레바논 남부에서는 헤즈볼라 당원들이 자치단체장을 맡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헤즈볼라는 아말당과 연합해 레바논 남부를 장악한 상태입니다. 우리 동명부대는 헤즈볼라 지역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습니다』
―왜 그런 거죠.
『동명부대 동쪽 2km 지점에 「타이르 디바」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곳이 헤즈볼라의 2인자 무그니에의 고향입니다. 무그니에는 이 마을의 우상입니다』
헤즈볼라 2인자 무그니에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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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안도로에서 지나가는 차량을 감시하는 동명부대원. 특전사 요원이다. |
그의 사망 직후 미국 국무부 대변인 숀 매코믹은 『그자가 없는 이 세상은 더 좋은 세상이 됐다. 수없이 무고한 사람을 죽인 살인자인 그를 어떻게든 정의의 심판대에 세우려 했다』는 논평을 냈다. 그러나 베이루트와 티르市 전역에는 「순교자 무그니에」의 대형 사진이 곳곳에 걸려 있다.
―무그니에가 폭탄테러로 사망하자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에 대한 「전면전」을 선언했습니다. 무그니에의 사망으로 이스라엘과 접경한 레바논 남부지역의 긴장이 높아졌을 것 같은데.
『제도권에 진입한 헤즈볼라의 고민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레바논 남부지역 사람들은 전쟁을 원치 않습니다. 이스라엘에 미사일을 쏘거나 무장투쟁을 벌이기 어렵습니다. 불법 국가테러단체라는 오명을 씻고, 레바논의 대안세력으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런 단계에서 다시 「알 카에다」 같은 테러단체로 낙인 찍히는 것은 피하고 싶은 거죠. 레바논의 정치세력들은 영국과 프랑스 정부에 많은 신경을 씁니다. 헤즈볼라가 테러와의 전쟁을 감행하지 않을 것으로 낙관하고 있습니다』
―헤즈볼라가 UNIFIL에 대한 적대행위를 벌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낮게 보고 있습니다. 레바논 의회가 유엔 결의안 1701호를 승인했습니다. 거기에는 헤즈볼라 국회의원 14명이 포함돼 있습니다. 자신들이 승인한 결의안에 따라 주둔한 평화유지군을 향해 폭탄테러를 할 것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시리아와 이란의 입김
―헤즈볼라가 아니라면 가장 위협적인 테러단체는 어디입니까.
『지난해 스페인 평화유지군 6명을 살해한 테러단체는 수니派 과격단체 「파타 할 이슬람」으로 추정됩니다. 주로 非시아派 계열의 테러단체인 「아스밧 알 안사르」, 「준드 일 샴」 등이 위협적입니다. 이란과 시리아, 알 카에다의 지원을 받는 과격단체들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습니다』
―레바논에 대한 시리아와 이란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시리아는 자신이 레바논의 맹주, 「형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란 역시 헤즈볼라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시리아와 레바논 접경의 베카계곡에서 헤즈볼라 세력이 시리아와 함께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프랑스는 유엔에 「베카계곡에 유엔 평화유지군을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시리아와 이란의 간섭이 실제로 감지됩니까.
『물론이죠. 우리 부대 정보팀이 對民접촉 과정에서 「마을 청년 한 명이 이란에 가서 게릴라 교육을 받다가 폭탄이 폭발해 죽었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며칠 뒤에 장례식이 열렸습니다. 첩보와 맞아떨어진 거죠.
「옆 마을 청년이 헤즈볼라 조직에서 사격훈련을 하다 죽었다」는 첩보가 입수됐는데, 그것도 사실로 확인됐습니다. 이 청년들은 시리아와 이란의 지원으로 한 달에 수백 달러씩 월급을 받았습니다』
폭발물 제거반과 함께 리타니江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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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곡 아래로 리타니江이 흘러가는 모습이 보인다. 필자 왼쪽은 동명부대 공보과장 金基範 소령. |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방지고, 다른 하나는 레바논軍 지원입니다. 헤즈볼라에게도 밀리는 레바논軍의 자생력을 키워 주는 것이 다국적軍의 주요 임무입니다. 동명부대는 레바논軍 12여단과 함께 작전활동을 하면서 지원해 줍니다. 미국은 레바논軍 지원을 위해 매년 6억 달러 정도를 쓰고 있습니다』
―부대 지휘관으로서 긴장을 풀기 어렵겠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대통령과 총리, 참모총장 후보를 출근길에 차량폭탄 테러로 죽일 수 있는 곳이 레바논입니다. 라픽 하리리 총리 암살 사건은 아직 미궁입니다.
레바논은 후임 대통령을 뽑지 못해 「정치적 교착상태」입니다. 시리아와 이란, 이스라엘 등 주변 국가들이 이런 취약한 레바논의 내정을 이용하려고 덤벼 듭니다. 언제 어디로 불똥이 튀어 폭탄테러가 터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런 곳에서 토요일, 일요일 없이 24시간 수색 정찰 업무를 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죠』
―스트레스는 어떻게 풉니까.
『화상회의로 서부여단 소속 다국적軍 부대장들과 회의를 끝내면 오후 9시입니다. 그때부터 참모들과 미니 축구장에서 「20골 넣기」 축구 시합을 합니다. 밤 12시가 넘어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지난 3월21일 오전 10시45분 동명부대 「폭발물제거반」의 수색 정찰에 따라 나섰다.
동명부대 공보과장 金基範(김기범) 소령과 한 차에 올랐다. 기관단총이 탑재된 장갑차와 무장 트럭 한 대가 우리를 선도했다. 폭발물제거반은 리타니江의 「카시미아」 다리로 향했다. 리타니江은 레바논을 남부와 북부로 나누는 자연 경계선이다. 이 다리를 건너지 않고는 레바논 남부로 진입할 수 없는 전략 요충이다.
카시미아 다리
한국군 관할지역은 티르市를 안고 있는 가로 7km, 세로 8km의 구역이다. 동명부대는 이탈리아軍으로부터 이 지역을 인계받았다. 한국군 관할지역 아래에 이탈리아 1대대와 2대대, 한국군 동쪽 편으로 프랑스軍과 가나軍 대대가 주둔하고 있다.
카시미아 다리에는 레바논軍 12여단 병사들이 장갑차를 세워 놓고 지나가는 차량을 검문하고 있었다.
우리 폭발물제거반은 카시미아 다리 주변을 오가며 폭발물이 설치돼 있는지 확인했다. 지뢰탐지기와 폭발물탐지견 두 마리가 동원됐다. 폭발물제거반은 한국군을 노린 사제폭탄이 설치됐는지를 수시로 탐지한다.
특전사 병력들은 24시간 관할 구역을 감시 정찰한다. UNIFIL이 하달한 테러 의심차량을 찾아내고, 무장병력이 이 지역 안을 이동하는지 관찰한다. 또 테러의심 차량과 인력들이 팔레스타인 정착촌을 드나드는지 감시한다.
카시미아 다리 주변에서 폭발물 탐지 작업을 끝내고, 우리는 리타니江 남쪽을 따라 이동했다. 낭떠러지 아래로 리타니江이 흘러가는 게 보였다. 한국군은 이 강을 건너 헤즈볼라 게릴라와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이 남하하는지 집중 감시하고 있다. 金基範 소령의 설명이다.
『저 아래 강가에서 헤즈볼라 게릴라들이 가끔 사격훈련을 합니다. 우리는 그걸 UNIFIL에 보고할 뿐이지 제지할 권한은 없습니다. 24시간 감시체제를 구축해 놓았기 때문에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무장병력을 색출해 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봇짐에 폭발물을 숨기고 혼자 산을 넘는 게릴라가 있다면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의심이 가는 레바논 민간인에 대한 검색, 체포 권한이 없는 겁니까.
『없습니다. UNIFIL에 소속된 26개 다국적軍 가운데 탄자니아軍이 헌병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것도 유엔차량에 대한 단속만 가능합니다. 평화유지군은 레바논軍을 지원하는 보조적인 임무를 하는 거죠. UNIFIL이 「주민들이 돌을 던질 때는 이렇게 대처하라」 같은 교범을 내려보내서 숙지하고 있습니다』
「부르즈라 할」 지역으로 들어섰다. 마을 곳곳에 순교자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AK47 소총을 불끈 쥔 손을 담은 깃발이 보였다. 「헤즈볼라」 깃발이었다. 이슬람 시아派 정당인 「아말당」 깃발, 「팔레스타인」 깃발이 간간이 섞여 있었다.
姜贊玉 대령의 설명대로 이곳은 헤즈볼라의 본거지였다.
특전사 요원들의 태권도 교실
「부르즈라 할」의 마을회관에 들렀다. 마침 태권도 교실, 컴퓨터 교실이 열리고 있었다. 특전사 요원들이 사범을 맡고 있는 태권도 교실에서 30여 명의 어린이들이 기본 품세를 익혔다. 24시간 지역 수색정찰을 마친 특전사 요원들이 휴식시간을 쪼개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벽면 하나를 가득 메운 대형 태극기가 선명했다.
히잡을 쓰고 두 남자아이를 양손에 잡고 온 레바논 여성이 한국군들에게 무언가를 하소연했다. 아랍어 통역요원 이주영씨의 설명이다.
『한 아이는 자기 아이고 한 아이는 조카인데, 태권도반에 좀 넣어 달라고 하네요. 며칠째 찾아오는데 빈 자리가 없어 받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사작전을 담당하고 있는 김형관 중령이 『정원이 넘더라도 좀 받아 줘. 연락처 받아 두고』라고 한마디 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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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명부대 장병들이 열고 있는 태권도 교실의 어린이들. 동명부대원들은 감시 정찰이라는 기본 업무 외에 對民지원을 위해 1인다역을 하고 있다. |
『현장에 투입되는 특전사 장병들이 조금이나마 덜 적대적인 환경에서 작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작업이죠. 특전사 요원들이 감시정찰 활동차 마을을 지나가면 이곳 아이들이 손을 흔들어 줍니다. 그게 바로 민사작전의 효과죠』
―동명부대는 이라크에 파견된 자이툰부대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규모인데, 민사작전을 병행하기가 힘든 것 아닙니까.
『규모가 작다고 민사지원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자이툰은 평화재건이 목적이고, 우리는 군사적인 정찰이 주업무입니다. 민사지원 역량에 한계가 있지만 자이툰을 벤치마킹해서 현지 상황에 맞게 접목하고 있습니다』
―동명부대의 민사활동에 대한 현지인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주둔하기 전에는 이탈리아軍이 있었습니다. 이탈리아軍에 대한 주민들의 인상은 「좀 뻣뻣하다. 세심하지 못하다」였던 것 같아요.
이탈리아軍이 이 지역 관청에 물탱크를 싣는 특장차를 하나 기증했습니다. 그런데 물탱크를 빼놓고 준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 우리가 예산을 반영해서 물탱크를 증여했습니다. 「한국군은 따뜻하고 섬세하다. 애프터서비스가 좋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일단 문을 연 태권도 교실, 컴퓨터 교실은 착실하게 운영할 생각입니다』
팔레스타인 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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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즈라 할」의 시장인 하산 하무르氏. |
『레바논 사람들에게 「한국도 內戰을 겪고, 유엔의 도움으로 戰後복구에 성공했다」는 얘기를 하면 깜짝 놀랍니다. 「정말이냐」고. 한국 사람들이 자신들과 비슷하게 많은 외침을 겪었고, 內戰의 상처를 겪었다는 사실에 더 따뜻하게 다가 서는 것 같습니다』
동명부대 민사작전의 사각지대는 팔레스타인 정착촌(카시미아·사브리아· 엘부스) 3곳이다. 이곳에는 4000여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살고 있다. 유엔이 관리하는 난민촌에는 유엔과 국제사회의 지원이 이뤄지지만, 정착촌은 외부 지원이 전혀 없다.
레바논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은 40만 명으로 추산된다. 레바논 정부가 시민권을 주지 않아 지난 60년간 난민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난민촌이나 정착촌이나 레바논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고 있다.
「부르즈라 할」 시장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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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숨진 헤즈볼라 병사들의 사진이다. 바람에 헤즈볼라 깃발이 날리고 있다. |
마을회관 2층에 있는 시장 사무실에서 「부르즈라 할」市의 시장인 「하산 하무르」를 만났다. 그는 이슬람 시아派를 대표하는 아말당 소속이다.
곧바로 레바논의 정치 현실에 대해 물었다.
―레바논이 「정상국가」로 가기 위해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뭔가.
『평화다. 평화가 정착돼야만 그걸 토대로 경제가 일어날 수 있다』
―레바논의 총리가 폭탄테러로 죽고, 후임 대통령 선출이 끝없이 연기되고 있다. 왜 그런가.
『레바논 사람들을 하나로 묶기 위한 정치제도가 不在(부재)한 상태다. 각 종파와 정파가 권력을 철저하게 배분하도록 헌법이 정하고 있다.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제도가 없다』
―이스라엘과의 분쟁이 해소되지 않는 상태에서 평화가 정착될 수 있겠나.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분쟁은 지혜롭게 들여다봐야 한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50년이 넘는 오랜 숙제다. 1982년 이스라엘의 1차 침공은 많은 상처를 남겼다. 우리 레바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영토 주권이다. 이스라엘의 침공을 받지 않고, 우리의 영토주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이스라엘과 우리의 분쟁은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레바논 남부 주민 70% 이상의 생각이다』
―이스라엘-레바논 갈등의 한복판에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가 있다. 팔레스타인 난민에 대한 레바논 사람들의 입장은 뭔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안의 레바논江 서안지구·가자지구로 가라는 입장인가, 아니면 여기 살아도 좋다는 건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여기 살아도 좋다. 이스라엘과 문제 없이 공존하기를 바란다』
―살아도 좋다면 시민권을 줘야 할 것 아닌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레바논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정착촌·난민촌에서 살고 있다. 물론 인간적인 환경이 아니다. 그들이 보통사람처럼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시민권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나.
예를 들어 내가 한국이나 미국에 간다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건 외국 시민권으로 가능한 일이다.
레바논 시민권을 갖게 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영원히 팔레스타인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40만 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레바논 시민권을 갖게 되면 무슬림의 수가 크게 늘어난다. 이건 다양한 종파 간 균형을 이루고 있는 레바논 정치질서를 깰 것이다』
『번영의 전제조건은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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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러용의 차량을 적발한 이정현 일병을 강찬옥 대령이 격려하고 있다. |
『동의한다. 그들은 집을 사거나 팔 수 없다. 그들은 시민권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티르가 대단한 휴양도시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이 지역 경제를 일으킬 방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무엇보다 농업이다. 오렌지·바나나 등의 유럽 수출을 늘려야 한다. 레바논 남부에는 많은 역사 유적들이 있다. 관광객을 불러들이려면 평화가 정착돼야 한다. 외국 관광객을 위해 우리는 우리 집이라도 빌려 줄 용의가 있다』
오후 4시쯤 부대로 돌아오니, 우리를 뒤따라 수색정찰에 나섰던 「특전사 요원들이 테러용의 차량으로 수배된 벤츠 승용차가 카시미아 다리를 지나 북쪽으로 가는 것을 확인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 정보는 곧바로 UNIFIL에 보고됐다.
테러용의 차량 적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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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한얼 상병. |
UNIFIL은 한국군 부대의 첩보 등을 종합해서 이날 저녁 26개 다국적 평화유지군에 통신문을 하달했다.
<3월21일 12시24분경 프랑스대대 정찰팀은 아스 술타니아에서 검은색 메르세데스 벤츠를 식별했다. 동 차량은 14시30분 카시미아 다리 근처에서 한국대대 정찰팀에 의해 재식별됐다. 높은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할 것이며, 특히 유니필 작전지역 내외에 보급수송 작전 및 작전 시 주의할 것을 당부한다>
UNIFIL 사령부는 이 벤츠 차량을 이용하고 있는 테러리스트 6명의 이름과 신원을 한국군에게 상세하게 제공했다. 6명 가운데 4명은 팔레스타인, 1명은 이라크, 1명은 알제리 출신이었다. 모두 남성으로 나이는 30代와 40代였다.
UNIFIL 사령부는 「테러 용의자 6명 가운데 1명이 거리 청소부로 변장하고 주변을 관찰하는 것이 관측됐다. 이들은 검은색 벤츠 외에 한 대의 차량을 더 운용하고 있다. 이들은 의심을 피하기 위해 여성들을 데리고 다니는 경우가 있다」고 경고했다.
3월22일 아침 일찍 일어나 영국의 BBC 방송을 보니 「시돈 지역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레바논軍과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의 충돌로 소요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시돈은 티르에서북쪽으로 30km쯤 떨어져 있다.
부대에 가서 동명부대 정보요원들에게 확인해 보니 덤덤한 반응이었다.
『시돈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종종 있는 일입니다. 시리아에서 헤즈볼라 2인자 「이마드 무그니에」가 폭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부대 주변 곳곳에서 하늘로 총을 쏴대는 게 목격됐습니다. 어딘가에 무기가 숨겨져 있다는 얘기죠. 이곳 사람들은 사망 40일째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무그니에의 40일 기일이 3월24일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폭력시위나 충돌이 있지 않을까 바짝 긴장하고 있습니다』
동명부대의 최첨단 감시장비를 맡고 있는 김한얼(23) 상병은 논산의 육군훈련소에서 조교로 근무하다가 2007년 11월 인터넷으로 동명부대 2진 모집에 응모했다. 김상병의 아버지는 육사 37기인 金榮植(김영식) 준장이다.
장군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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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어 통역군무원 이주영씨와 동명부대 영어-프랑스어 통역담당 직원 마루아 부르지氏.「마순이」라는 한국이름을 갖고 있는 마루아씨는「카나」여행에 안내원으로 나서 주었다. |
『아버지가 합참의 해외파병과장으로 동명부대 1진 파병을 준비하셨습니다. 레바논을 많이 왔다 갔다 하셨어요. 무슨 일을 하나 궁금했죠. 「파병에 자원하겠다」고 했더니, 아버지께서 「생각만큼 위험하지는 않다. 새로운 세상을 보고 견문을 넓힐 기회」라고 하셨어요. 이 부대의 터를 닦은 분 말을 안 들으면 누구 말을 듣겠어요(웃음)』
―파병에 선발될 때 아버지 덕을 좀 봤나요.
『아니오. 아버지가 그때는 육군 산악부대의 참모장이셨습니다』
―중앙大에 다니다가 입대했는데, 군대에 가기 싫다는 생각은 안 해 봤습니까.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겠다는 생각까지는 안 해봤고요. 병역의무는 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2년을 허송세월한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자기 하기 나름 아닐까요』
―근무가 힘들지 않나요.
『부대를 지키는 감시장비가 24시간 가동됩니다. 밤낮을 바꾸어서 일하는 게 좀 힘들죠』
―부대가 對民지원 사업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데 나간 적이 있습니까.
『지난 2월에 있었던 「피스 웨이브」에 나가서 솜사탕을 만들었습니다. 팔이 아플 정도로 만들었는데 아이들에게 제일 인기 좋았어요』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우리나라도 한국전쟁이 끝나고서 이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이 나라에는 전쟁이 끊이질 않나 생각했지만,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일 불편한 점은.
『먹는 것, 입는 것은 훈련소에 있을 때보다 훨씬 좋은데, 집 생각이 더 나는 것 같아요. 어머니가 해주는 밥이 더 생각납니다』
―아버지가 군인인데 육군사관학교에 갈 생각은 안 했습니까.
『어렸을 때 하도 이사를 많이 다녀서 육군사관학교에 가는 건 일찌감치 포기했어요』
―얼마나 이사를 다녔기에.
『초등학교는 4곳, 중학교는 2곳을 다녔습니다. 고등학교는 기숙학교라 한 곳이었고요. 군인아파트는 다 비좁습니다. 방이 대개 2개밖에 없죠. 방을 늘 남동생과 같이 썼습니다. 군인 가족이 아니면 군인들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없죠』
2006년 이스라엘의 2차 침공 때 60여명의 레바논 어린이들이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사망한 「카나의 학살」이 발생했다. 이스라엘은 이 참사를 계기로 레바논 지역 공습을 48시간 잠정중단했다.
「카나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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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4월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사망한 140명의 유해를 모신 관. 검은 대리석 관 자체를 기념비로 만들었다. |
프랑스어와 영어가 유창한 마루아는 말하기를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그녀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反이스라엘 저항운동 「안티파타」를 시작한 날이 내 생일』이라며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헤즈볼라에 대한 친밀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만큼 이스라엘에 대한 적개감이 대단했다. 자신의 생각을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그녀와의 동행은 즐거웠다.
그녀의 두 남동생 이브라힘(27)과 알리(18)는 지금 앙골라에서 살고 있다. 여동생은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에서 살고 있다. 레바논 공립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한 큰 남동생은 앙골라에서 사업을 하는 작은아버지를 돕고 있고, 둘째 남동생은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한다. 불안한 政情과 경제난 때문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하는 이야기를 할 때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여기에는 일자리가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들 집에서 쉰다. 일자리를 잡아야 월급이 400~500달러밖에 안 된다. 한국군 부대에 일자리를 잡은 것은 내게 큰 행운이다. 동명부대에 감사하고 있다. 이건 내 진심이다』
이란 도움으로 길 닦아
카나로 가는 길은 잘 닦여 있었다. 도로를 포장한 지 얼마되지 않은 듯 아스팔트의 검은빛이 진했다. 길가에는 보수 중인 집들이 많이 보였다. 2006년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파괴되거나, 새로 짓다만 건물들이라고 한다.
―길이 다른 지역보다 잘 닦여 있다.
『2006년 이스라엘의 침공이 끝나고 이란이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파괴된 도로를 닦아 주었다. 이란은 헤즈볼라와 이 지역을 재정적으로 지원한다』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의 이동을 차단하기 위해서 도로를 파괴한 건가.
『그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레바논 사람들이 피란을 가지 못하게 하려고 도로를 파괴했다』
―피란을 못 가게 하려고 도로를 파괴할 리가 있나.
『이스라엘은 레바논 사람들을 죽이기위해 도로를 파괴했다. 헤즈볼라는 모두 산에 있었다. 헤즈볼라는 이곳 지리를 손금 보듯 훤히 다 안다. 그들은 계곡과 산을 타고 이동했다. 헤즈볼라의 이동을 차단하려고 공습을 한다는 게 말이 되나』
―정말 그렇게 믿나.
『그게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은 지난 전쟁뿐 아니라 1996년 4월에는 공습으로 140명의 무고한 레바논 사람들을 학살했다. 학살현장에 세워진 기념관에 가보면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두 근본주의의 충돌
이스라엘과 이슬람의 분쟁은 종교와 인종, 정파와 영토 싸움이 뒤얽혀 있다. 구약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수천 년 묵은 감정싸움이다. 서로에 대한 증오와 불신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제3자의 눈에는 우스꽝스럽게 비칠 때가 적지 않다.
2004년 1월 이스라엘의 나사렛 지역에서 만난 한 팔레스타인 노인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기꾼」이라고 단언했다. 노인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내게 자세히 설명했다. 이야기가 하도 재미있어서 그 후에 만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다들 진지하게 공감을 표시했다. 팔레스타인 노인의 얘기는 이랬다.
『아브라함의 처 사라는 90세 넘어서 아들 이삭을 낳았다. 아브라함은 남자니까 100세 넘어 생산을 할 수 있다. 하지만 90세 넘는 여자가 어떻게 아이를 낳나. 그건 말이 안 된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후사를 잇기 위해서 어디서 주워온 아이가 분명하다. 아브라함이 젊은 여종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이 진짜 아브라함의 아들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이삭의 후손이고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데, 그건 거짓말이다. 근본도 알 수 없는 이삭이 어떻게 아브라함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스마엘의 후손인 바로 우리 이슬람人들이다』
아브라함은 기원전 2000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팔레스타인 노인은 4000년 전 성서 속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근본부터 싸잡아 비난한 것이다. 재미있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해서 노인에게 물었다.
―성경에 나온 아브라함의 이야기들은 비유적인 이야기, 우화가 아닐까요. 아브라함이 실제로 존재했는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구약과 코란은 神이 내려 줬다. 쓰인 그대로가 진실이고, 일자일획 고칠 수 없다』
답답한 것은 이슬람 사람들뿐만이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근본주의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근본주의자들끼리 부딪치니 파열음이 클 수밖에 없다.
『유대인은 어정쩡한 타협은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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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8월 레바논 남부지역으로 전격 진격한 이스라엘 지상군. |
나는 론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스라엘이 로마시대 이후 지독한 탄압과 학살의 대상이 됐던 이유는 예수의 神聖(신성)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유대인들과 같은 피를 나눴다. 처음에는 몰라도 예수의 神聖이 확립된 4세기 이후에 가서는 「지금 생각해 보니 우리도 예수가 神으로 생각된다」 정도로 물러설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론은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이 어떻게 神이 되나. 사람은 사람이고, 神은 神이다. 예수는 우리 유대인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고, 형제자매가 있었다. 그가 목수로 생계를 이어 갔다는 걸 주변에서 다 알았다. 모르면 몰라도 그걸 아는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는 神이다」라고 얘기할 수 있나. 神이면 神이고 사람이면 사람이지, 사람이기도 하고 神이기도 하고 성령이라고도 하니,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나. 죽으면 죽었지 우리 유대인은 그런 식으로 어정쩡하게 타협하고 못 산다』
카나에 거의 도착했을 때 안내를 자청한 마루아에게 헤즈볼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지난번 이스라엘 침공 때 로켓포를 어깨에 메고 이스라엘 전투기와 맞서싸웠던 게 바로 헤즈볼라의 전사들이었다. 내 눈으로 그걸 봤다』며 두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2006년 전쟁 이후 이스라엘에 대한 내 생각이 달라졌다. 헤즈볼라는 레바논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헤즈볼라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는 「레바논 정규군을 제대로 키우고 좋은 무기를 주면, 우리는 우리의 무기를 내려놓겠다」고 했다. 그게 진심이라고 믿는다』
2차 이스라엘 - 레바논 전쟁의 승리자는 헤즈볼라
―헤즈볼라는 레바논 의회에 14석의 의석을 얻었다. 헤즈볼라가 무기를 내려놓고 완전한 제도권 정당으로 전환하는 순간이 올 걸로 생각하나.
『그렇다. 헤즈볼라는 테러 집단이 아니다. 테러조직의 기준이 뭔가, 이스라엘에 맞서싸우면 테러조직인가? 헤즈볼라는 레바논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조직이다』
―당신은 헤즈볼라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만이 아니다. 레바논 남부지역 사람들은 전부 그렇다. 헤즈볼라는 우리 가운데 있고, 우리 모두가 헤즈볼라를 지지한다』
―헤즈볼라 무장세력은 어디서 왔나. 레바논 사람들이 주축인가, 외부 지원세력이 가세한 것인가.
『헤즈볼라는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다. 여기 지형을 제대로 알고, 터널과 계곡을 잘 안다』
2006년 2차 레바논 침공이 끝난 후 이스라엘의 「위노그라드 조사위원회」는 34일에 걸친 이 침공이 「심대하게 기회를 놓친 전쟁」이라는 보고서를 에후르 올메르트 총리에게 전달했다. 이 보고서는 헤즈볼라의 항전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2차 레바논 전쟁 이후 레바논 남부지역에서 헤즈볼라의 명성이 치솟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보고서의 일부를 소개한다.
<이스라엘은 전쟁을 시작했지만, 분명한 군사적 승리 없이 전쟁은 종결됐다. 고작 수천 명으로 구성된 準군사집단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규모 및 질적으로 우위인 中東지역 최강의 군대(이스라엘軍)를 상대로 수주 동안 견뎌 냈다. 이스라엘 민간인을 목표로 한 수천 발의 로켓 공격은 전쟁 기간 내내 계속됐고, 이스라엘軍은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들이 피해를 봤으며 많은 이스라엘 국민들은 일시적으로 집을 떠나거나 대피호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오랫동안 원거리 화력戰과 제한된 지상작전만을 펼치다가 이스라엘은 결국 대대적 지상 공세작전을 시작했지만, 이는 국제연합 안보리가 휴전을 제시하기 직전에야 이루어졌다. 지상공세는 어떠한 군사적 성과도 이끌어 내지 못했으며 완전히 시행되지 못했다>
시리아가 세워 준 「학살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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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르 시장인 후세이니氏가 강찬옥 단장에게 레바논의 상징인 백향목으로 만든 조각을 선물하고 있다. |
그 옆에 시리아 정부가 세워 준 「학살 기념관」이 보였다. 문이 잠겨 있었다. 관리인이 멀리서 우리가 온 것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마루아가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설명한 모양이다. 관리인은 앞장서 가면서 당시의 상황을 흥분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40평쯤 되는 기념관 안에는 당시 참상을 담은 사진, 아랍국가들이 보내온 그림과 조각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강렬한 증오가 담겨 있었다.
티르에서 카나로 이어지는 길에는 이스라엘과 싸우다 전사한 젊은 헤즈볼라 병사들의 초상화가 연이어 걸려 있었다. AK46 소총을 든 손을 그린 헤즈볼라 깃발이 건물 옥상마다 펄럭였다. 레바논 사람들이 그렇게 열망하는 평화는, 피가 피를 부르는 보복의 악순환 속에서 이뤄질 수 있는 것일까?
끝없이 이어지는 마루아의 전쟁 체험담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3월22일 저녁, 티르 시장과 압바시아 시장이 마련한 저녁식사 자리에 姜贊玉 단장과 함께 참석했다. 「페니키아」라는 해산물 요릿집이었다. 2시간 정도의 저녁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여러 번 停電(정전)이 됐다. 姜단장은 『아름다운 레바논의 별들을 보여 주기 위해 불을 끈 모양』이라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姜단장은 유창한 프랑스語로 70代의 老(노)정객들과 정겹게 이야기를 나눴다.
압바시아 시장은 포크와 나이프 등이 담긴 식기세트를, 티르 시장은 티르 역사책 한 권을 내게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전날 동명부대가 압바시아 종합학교에서 연 「어린이날」 기념 주민잔치에서 두 시장을 처음 만났다. 姜단장이 『한국에서 온 언론인인데, 곧 떠난다』고 소개하자, 두 시장은 『내일 姜단장과 저녁 모임이 있는데 송별잔치를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남부 레바논의 「小통령」 티르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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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바시아 시장인 파르둔氏가 필자에게 식기세트를 선물하고 있다. |
후세이니 시장은 『나비 베리가 어제 우리 집에 왔다 갔다』며 『나비 베리와도 주로 이 집에서 식사를 한다』고 소개했다.
「압드알라 파르둔」(78) 압바시아 시장은 역시 시아派로 기업가 출신이다. 아프리카의 「아이보리 코스트」에서 코코아·커피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두 시장은 20代에 만나 우정을 나눈 사이라고 했다.
티르 시장은 『姜단장은 나의 아들이자 형제 같은 사람』이라며 『姜단장의 초청을 받고 온 당신 역시 나의 친구』라며 호의를 보여 주었다. 압바시아 시장은 『남부 레바논의 아름다움을 다 보려면 3박4일은 너무 짧은 일정』이라며 『일주일 더 머물다 가라』고 했다.
老정객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으면서, 姜단장과 동명부대원들이 이들과 우호적인 관계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을 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동명부대의 한 참모는 이런 얘기를 했다.
『평화유지군이 레바논에 파병될 때 이라크 자이툰부대 파병연장과 맞물려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동명부대의 현지 활동 중에 테러로 우리 軍사상자가 발생하면 「평화유지군 철수하라」는 여론이 빗발치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죠. 자체 사고를 막고, 테러 예방에 신경을 쓰는 만큼 지역사회의 민심을 잡는 데 힘을 기울여 왔습니다』
두 시장은 우리 국방부의 초청으로 李明博 대통령 취임식에 다녀왔다. 두 사람은 한국의 발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한국이 50년간 성장을 이루고 세계 10大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데는 국가지도자의 역할이 컸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그래도 국민의 눈치를 보고 뜻을 따른다. 여기 정치인들은 자기 이익만 좇는 게 문제다』(후세이니 티르 시장)
『레바논 문제는 안이 아니라 밖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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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찬옥 대령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티르 시장. 레바논에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애정을 표시할 때 이마에 키스한다. |
『레바논의 문제는 레바논 안보다 레바논 밖에 있다. 미국과 프랑스, 시리아와 이란 같은 외세가 얽혀 있어서 문제다. 가까운 미래에 우리 정치인들이 연합·화합하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국민의 70~80%가 그걸 원한다. 내 친구 나비 베리 의장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압바시아 시장은 『한국군이 반년 동안 진주하면서 이탈리아軍이 10년 동안 쌓은 정을 쌓았다』며 『그런 얘기를 한국의 합참의장에게 편지로 써서 보냈다』고 했다. 티르 시장이 공감했다.
『이곳 주민들이 한국군을 좋아한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지원 프로젝트를 떠나 인간관계 형성이 잘 돼 있다는 얘기다』
두 노인이 뺨과 이마에 퍼붓는 키스세례를 받으면서 식당을 떠났다. 숙소로 나를 바래다 준 姜단장은 이런 얘기를 했다.
『밖으로 나와 보면 한국은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닙니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국력에 걸맞은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웃에 주둔하고 있는 이탈리아·프랑스 軍만 하더라도 병력이 각각 2500명, 1500명에 이릅니다. 우리는 겨우 350명에 불과합니다. 평화유지군 파견은 단순한 군대의 파견이 아니라 군사외교단을 파견하는 겁니다. 물론 위험하죠. 그렇더라도 움츠리지 말고 국제분쟁의 현장에 나서는 게 옳은 선택입니다』
3월23일 새벽 숙소에서 일어나 베이루트 공항으로 출발했다. 올 때처럼 두 대의 경호차량이 동원됐다. 리타니江의 카시미아 다리가 가까워질 무렵 도로 옆에 세워진 장갑차와 병력들이 언뜻 보였다. 경계근무 중인 우리 특전사 장병들이었다.
먼 아시아의 동쪽 끝에서 온 우리 병사들이 中東의 화약고 한복판에서 평화를 지키기 위해 밤을 지새우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릿하게 저려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