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玉均은 배를 탄 지 무려 23일(사실은 21일) 만에 비로소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바다에서 온갖 위험을 다 겪어서 그 때문에 앓고 있던 여러 병들이 한꺼번에 극도로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자리에 오래도록 머뭇거리고 있습니다만, 한 가닥 생명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할까요. 가소롭습니다〉
―金玉均의 편지 중에서
오효진
1944년 충북 청원 출생. 서울大 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국문학 석사. 영란女商·숭문高 교사, MBC 기자, 조선일보 사회부장대우, 서울방송 보도국장·東京지국장. 편성이사, 정부 공보실장, 청원군수 역임. 저서 「오효진의 인간탐험」, 「개망초의 행복」, 「인터뷰의 황제가 되는 길」.
―金玉均의 편지 중에서
오효진
1944년 충북 청원 출생. 서울大 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국문학 석사. 영란女商·숭문高 교사, MBC 기자, 조선일보 사회부장대우, 서울방송 보도국장·東京지국장. 편성이사, 정부 공보실장, 청원군수 역임. 저서 「오효진의 인간탐험」, 「개망초의 행복」, 「인터뷰의 황제가 되는 길」.
도쿄 남쪽 1000km 孤島 오가사와라
오가사와라(小笠原)는 일본의 야구선수로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오가사와라는 사람이 아니고 머나먼 태평양 남쪽 바다에 떠 있는 섬들을 말한다. 야구선수의 이름은 「오가사와라 미치히로(小笠原道大)」고, 섬 이름은 오가사와라 제도(小笠原諸島)다. 일본의 姓 가운데는 그 조상이 살던 지명을 따서 지어진 것이 적지 않지만, 이 경우는 그런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1593년 이 섬을 발견한 사람이 오가사와라 사다요리(小笠原貞賴)라는 사람이어서 그의 이름을 따서 섬 이름을 지은 것이다. 어떻든 야구선수의 이름과 섬의 이름이 같기 때문에 오가사와라村(촌)에서는 오가사와라 선수에게 관광친선대사를 위촉해 연관을 맺고 있다.
도쿄에서 남쪽으로 1000km나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에 작은 섬 30여 개가 흩어져 있다. 바로 이 섬들이 오가사와라 제도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제2차 세계대전의 격전지로 알려진 「유황도」가 있다. 일본 본토에서 이렇게 아득하게 먼 곳에 떨어져 있는데도 행정구역상으로는 도쿄도(東京都)에 속한다.
이 섬들의 중심지는 「치치지마」, 곧 아버지의 섬(父島)이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50km쯤 떨어진 곳에 「하하지마」, 곧 어머니의 섬(母島)이 있다. 이 두 섬에만 사람이 살고 다른 섬들은 無人島(무인도)다. 치치지마에 1900명쯤, 하하지마에 450명쯤으로 모두 2350명쯤 되는 일본인들이 본토와는 동떨어진 환경에서 살고 있다. 남태평양에 가까운 곳이니 완연한 아열대 기후에 속한다. 그러나 실제론 열대에 가깝다.
섬들은 모두 작아서 보통 지도의 축척으로는 눈에 띄게 그리기가 어려울 정도다. 가장 큰 치치지마의 면적이 23.8km2로 경기도의 영흥도(23.6km2)와 비슷하고, 그보다 조금 작은 하하지마가 20.21km2로 역시 경기도의 덕적도(20.6km2)와 비슷하다.
이렇게 먼 곳에 있는 오가사와라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 먼 곳에 우리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숨어 있다. 다름 아닌 金玉均(김옥균)이 바로 이곳에서 일본 정부에 의해 만 2년 동안이나 억울하게 귀양살이를 해야 했던 것이다. 조선 사람인 그가 왜 일본 정부에 의해 이 먼 곳에 유배돼 갇혀 살아야 했을까.
金玉均 2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
1884년 12월4일, 부패와 무능으로 스러져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고 분연히 일으켰던 쿠데타가 三日天下(삼일천하)로 끝이 나자, 주동자인 金玉均은 朴泳孝(박영효) 등과 함께 천신만고 끝에 일본에 망명하게 된다. 朴泳孝, 徐光範(서광범), 徐載弼(서재필)은 곧 미국으로 떠나고 일본에 남게 된 그는, 일본에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일본을 대표하는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같은 지식인들의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일본에서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조선침공계획을 세우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사회주의자 다루이도기치(樽井藤吉)의 조선침공계획, 후쿠오카 도야마 미쓰루(頭山滿)를 중심으로 한 玄洋社(현양사) 일파의 조선침공계획, 그리고 자유당 左派(좌파) 오이겐타로(大井憲太郞) 일파의 조선침공계획이 그것이다.
이들은 金玉均과 접촉하면서 그를 앞세워 조선에 쳐들어갈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속뜻을 알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특히 이들 가운데 자유당 左派의 일부는 거사자금을 모은다는 핑계로 강도짓을 하는 등 不法(불법)을 저지르다가 계획이 밝혀져 주동자들이 체포되는데, 이것을 「오사카 사건」이라고 불렀다. 그들도 金玉均을 앞세워 조선에 침공하려 했으나 그는 휩쓸리지 않고 냉담하게 대했다.
金玉均에게 내려진 국외추방령
그러나 조선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金玉均이 일본의 장수들을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올 것이란 소문이 파다했다. 조선정부는 그가 망명한 직후 徐相雨(서상우)와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보내 그를 인도해 줄 것을 요구했다(1885년 2월). 그 뜻이 관철되지 않자 조선은 자객 張殷奎(장은규)를 보냈고, 이 계획이 실패하자 이듬해 2월엔 高宗(고종)이 직접 자객 池運永(지운영)을 보냈으나 이것마저 허사로 끝났다.
한편 淸(청)나라 정부는 조선과 협의 하에 일본주재공사 徐相祖(서상조)를 시켜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일본 外務卿(외무경·외교부 장관)에게 金玉均을 上海(상해)로 유인해서 체포하자고 요구한다(1886년 1월).
이렇게 두 나라의 압력을 받고 곤란해진 일본은 金玉均을 국외로 추방한다는 묘안을 짜낸다. 이때부터 사방을 둘러봐도 의지할 곳이 없는 망명객 金玉均에게는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이 절박하게 다가온다.
1886년 6월2일, 미시마 미치쓰네(三島通庸) 일본 경시총감은 정부의 명령을 받아 金玉均에게 퇴거명령을 전한다. 6월11일 內相(내상)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그에게 15일 이내에 國外退去(국외퇴거)를 명령한다.
뜻밖의 명령을 받은 金玉均은 놀라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총리와 이노우에(井上馨) 외무경에게 호소의 편지를 보았으나 무시당하고 말았다.
답답해진 金玉均은 자신을 잡아 오라고 자객을 보낸 高宗에게 長文(장문)의 上奏文(상주문)을 보내고(1886년 7월 초순), 역시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는 淸나라의 李鴻章(이홍장)에게 긴 편지를 보내며(7월 중순), 한편으로는 설득하고 한편으로는 사정해 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다행히 이런 편지가 일본 언론에 공개되자 여론은 일본 정부의 처사가 부당함을 소리 높이 외쳐 주었다. 이런 여론에 힘입어 일본 정부는 그를 국외로 추방하는 대신 머나먼 남쪽의 絶海孤島(절해고도) 오가사와라에 유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외무대보에게 구명 호소
일본 정부는 그의 身柄(신병)확보에 나섰다. 그때까지 요코하마(橫浜)의 그랜드 호텔에 묵고 있던 그를 근처에 있는 미츠이 별장(三井別莊) 公衆園(공중원)에 강제구금한 것이다. 8월8일, 金玉均은 별장에서 경찰관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나와 요코하마港(항)에 정박 중이던 히데사토마루(秀鄕丸)에 옮겨졌다. 그 배는 시나가와(品川)에 들렀다가 8월9일 오가사와라로 떠나게 된다. 金玉均이 36세 때의 일이다.
그는 머나먼 南洋(남양)에 끌려가기 싫어서 미국이나 프랑스로 건너갈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돈이 문제였다. 다른 땐 돈을 대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럭저럭 살아 나갈 수 있었는데, 이번엔 그만한 돈을 대겠다는 사람이 선뜻 나서지 않았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일본 정부가 金玉均의 후원자들에게 뒤로 손을 써서 돈을 주지 못하게 한 게 아닌가 여겨진다. 물론 작은 정성을 내놓겠다는 사람이 나서기는 했지만.
망연자실한 金玉均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총리와 내무경에게 살려 달라고 간절한 편지를 보냈으나 무시당한 뒤, 그는 외무대보(外務大輔) 요시다 기요나리(吉田淸成)에게 도와주기를 간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번에도 답장이 없었다. 그래도 그는 절박한 내용의 편지를 그에게 연달아 사흘간이나 보낸다. 6월18일 두 번째 보낸 편지를 보자.
<요시다 대인 각하
어제 올린 편지는 곧 받아서 자세히 읽으셨습니까. 玉均은 지금 앞길이 막히는 절박한 상황을 당했으나 호소할 곳도 없고 구차한 일을 피할 길도 없습니다. 이에 또 거친 편지를 올리오니 천만 번을 빌건대 각하께서 살아날 방편을 지시하셔서 이 급박함에서 저를 구해 주시옵소서.
만약 각하께서 (저를 도우시기에) 혹시 불편하신 일이 있으시다면, 또 혹시 각하께서도 역시 저를 버리신다면 저 또한 이 형세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일이옵니다. 곧 玉均의 명맥을 보전하기 어려운 運(운)이오니 다시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그러나 玉均은 각하께서 평일에 의를 존숭함을 중히 여기시는 것을 특별히 믿사옵고, 이에 이르러 우러러 하소연하오니 비옵건대 곧 답을 내리어 주옵소서. 만약 답을 내리지 않으신다면 玉均은 각하께서 저를 버리시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 채로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18일 아침 金玉均 올림>
얼마나 절박했으면 「선 채로 기다리겠다」고 했을까. 그가 이렇게 절박한 편지를 보냈는데도 요시다에게선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개처럼 끌려 나가 배에 태워져
8월8일, 그가 감금됐던 별장에서 끌려 나가는 모습 또한 비참하다. 당시의 일본 신문들과 경찰의 보고를 종합하면 상황은 다음과 같다.
8일 아침 일찍 경찰 30여 명이 金玉均을 구치하고 있던 별장에 들이닥쳐 곧바로 명령을 집행하려고 하자, 金玉均은 잠옷을 입은 채로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를 보호하고 있던 서생 4명이 그를 끌고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경찰과 그들 사이에 일시 소동이 벌어져 서생 한 명이 상처를 입었다.
경찰은 金玉均을 둘러싼 서생들을 완력으로 떼어 놓고 그를 伊勢山의 언덕 위에서 아래까지 끌고 내려왔다. 신도 신지 않고 모자도 쓰지 않은 채로였다. 그는 개처럼 그렇게 끌려나와 마차에 태워져서 부둣가에 가서 작은 배에 옮겨졌고, 그 배로 항내에 정박해 있던 히데사토마루(秀鄕丸)에 보내졌다.
당시 경찰 책임자였던 덴겐지로(田健治郞)의 전기에는 그때 상황이 이렇게 기술돼 있다.
<金의 막료와 그 후원자인 내지의 志士는 맹렬히 그것을 반대했고, 金도 역시 전에 했던 약속을 번복해서 먼 섬에 가는 것을 거절했지만, 이때 덴경 부장(田警部長)의 태도는 자못 준열함을 극해서 마쓰모토 경부(松本警部) 외에 수명의 순사를 시켜서, 울면서 저항함에도 불구하고 8월8일 강제로 히데사토마루로 납치해서 오가사와라 섬에 보냈다. 당시 입회했던 다수의 지사는 경부장의 무자비한 취급에 분개하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田健治郞傳」 p.55~56)>
경찰 책임자의 전기에 이런 글이 자랑스럽게 실려 있는 걸 보면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만하다. 어쨌든 그는 이 일을 잘 처리했다고 해서 상급자의 눈에 들어 승승장구했다. 그는 후에 귀족원 의원, 대만 총독을 거쳐 農商務大臣(농상무대신)에까지 이르렀다.
2등 객실에 몸을 싣고
그로부터 121년이 지난 2007년 9월27일 오전 10시, 나는 도쿄 다케시바항(竹芝港)에서 오가사와라로 가는 오가사와라마루(小笠原丸)에 몸을 실었다. 총 톤수 6700t에 全長 131m, 승선정원 1043명이나 됐다. 이 배가 시속 22.5노트(41.67km)로 쉬지 않고 25시간 반을 달려가야 목적지에 닿을 수 있다. 1주일에 한 번 정도 운행한다. 승객은 자위대와 공무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관광객들이었다. 내가 탄 배는 만원이었다. 요금이 만만치 않았다. 편도 2등 성인 요금이 2만2570엔(약 17만7550원)으로 서울-도쿄 비행기 요금과 거의 맞먹었다.
사전에 알아본 바로는 2등 객실은 그냥 넓은 방이어서 승객들이 눕거나 앉아서 간다고 한다. 나는 예전에 흑산도로 가는 작은 배를 타고 한방에서 승객들이 멀미를 하다 못해, 나중엔 숫제 낯모르는 남녀가 서로 끌어안고 간 경험이 있다. 그러면 멀미가 사라진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혹시 일본의 젊은 여자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해서,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나에게 배정된 C데크 2등 선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선실에 들어서는 순간 기대나 걱정이 사라졌다. 일본 사람들이 작은 일에도 얼마나 정확한지 한 사람이 누울만 한 넓이에, 깔고 잘 담요를 반듯하게 접어서 깔아 놓고, 그 위엔 덮고 잘 담요를 발치에 반듯하게 접어 놓았다. 베개의 위치는 한쪽으로 정해서 줄을 맞춰 놓았다. 발과 발이 서로 맞닿도록 자리를 마련해 놓아서 다른 사람의 발이 내 머리나 입 가까이 올 수 없도록 해놓았다. 중간중간에 놓여 있는 노란 양은 그릇을 보자 괜히 좀 메슥거렸는데, 토할 때 쓰라는 것이었다.
컵라면과 주먹밥으로 세 끼 해결
배에 올라올 때 무슨 번호표를 하나씩 주기에 무엇인지도 모르고 덥석 받아 왔는데 알고 보니 좌석번호였다. 일본 사람들은 각각 마련된 자기 좌석을 찾아 반듯하게 눕거나 앉아서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갔다. 꼭 초등학교 학생들 같았다. 누구를 끌어안을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 했다.
나는 선실 가운데쯤에 마련된 내 자리를 찾아 짐을 풀었다. 짐 속에는 내 세 끼 식사가 들어 있었다. 한국에서 미리 준비해 간 컵라면, 도쿄에서 산 삼각주먹밥(오니기리), 그리고 빵, 커피다. 이런 것들로 세 끼를 해결하며 머나 먼 바닷길을 헤쳐 갔다. 일본 사람들이 대부분 먹을 것을 미리 준비해 와서, 일본 사람들처럼 소리 내지 않고 조심조심 먹었다. 단체관광객들은 식당을 이용했다. 배 안에는 식당 외에 매점, 스낵 바, 가라오케 룸 같은 시설이 있었다. 특등실과 1등실은 침대가 마련된 선실로, 운임이 두 배 이상 비쌌다.
배 떠날 시간이 돼서 3층 갑판으로 올라가 봤다. 배는 1분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오전 10시에 떠났다. 도쿄가 점점 멀어지는 걸 보며 또 金玉均 생각을 했다.
金玉均은 사실 일본에서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 죄가 없으니 재판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런 권한이 없는 일본 정부가 그에게 법률에도 명시되지 않은 유배라는 가혹한 형벌을 내린 것이다. 그것도 기한이 명시되지 않은 無期刑(무기형)을.
金玉均, 駐日 각국 공사들에게 구명 호소 편지 보내
金玉均 자신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강제로 배에 태워지기 이틀 전인 8월6일, 그는 일본에 주재하는 각국 공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저는 지금 완전히 일본 정부의 손아귀에 있어서 同 정부가 반드시 저를 오가사와라에 보내는 조치를 집행하려고 하지만, 제가 일본의 법률을 범한 일이 없는데도 흡사 죄인처럼 취급한다면, 끝까지 저항해서 일본 정부가 이와 같이 엄중하게 저를 취급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저를 오가사와라에 보낼 것이라면 同 정부는 강제로 저를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권력과 자비를 함께 가지고 계신 각하께서 다소 저를 도와주는 일이 없이, 또 어떤 異說(이설)도 펴지 않고, 이와 같은 조치를 간과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각국 공사들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간과하고 말았다.
이 편지를 보내고 그는 이틀 뒤 순전히 바람의 힘으로만 가는 범선에 실렸다. 배는 가나가와縣(현)에 속해 있는 요코하마에서 도쿄都(도)에 속해 있는 시나가와항(品川港)에 가서 정박했다. 여기서 金玉均과 從者(종자) 李允?(이윤고)의 신병이 경시청으로 넘겨졌다. 일본경찰이 작성한 「明治19年 金玉均護送資料」를 보면 그날 반가운 사람들을 만난 것으로 돼 있다.
<시나가와에서 정박 중에 (마침 일본에 와 있던) 朴泳孝·鄭蘭敎·柳赫魯·申應熙 등이 면회 왔다. 네 사람은 일단 돌아갔다가 오후 6시경, 다시 모여 와서 金玉均과 술을 마셨는데 밤 12시까지 계속됐다고 한다>
다른 자료에는, 손님들이 돌아간 후에 金玉均은 이윤고를 시켜서 그릇을 가져오게 한 뒤 토해 내고 나서도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럴 것이다. 참 심란했을 것이다. 같은 처지의 동료들을 만났으니 반갑기도 했겠지만, 한쪽은 머나 먼 곳으로 귀양 가는 신세고, 다른 한쪽은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참 안됐다면서 위로하는 처지였을 테니, 위로받는 쪽에선 술이 술술 넘어갈 리 없었을 것이다. 다 같이 조국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신세건만 어찌해서 이렇게 처지가 갈렸을까.
이튿날인 8월9일, 마침내 배가 떴다. 시원한 東風(동풍)이 불어 왔다. 바람을 잔뜩 받은 범선은 쏜살같이 바다 한가운데로 미끄러져 나아갔다. 지긋지긋하던 도쿄가 점점 멀어져 갔다. 금방이면 오가사와라에 닿을 것 같았다. 8월10일, 아득해진 도쿄만을 바라보면서 金玉均은 詩를 한 수 지었다.
<울적하게 伊勢山(이세산)에 잡혀 있던 몸
아무런 속박 없이 성문을 떠나네
하늘도 푸르러라 東風은 건듯 불고
천리 밖 오가사와라 하루면 돌겠네
(鬱鬱拘囚伊勢山 不妨推縛出??
天空好與東風便 千里笠原一日還)>
金玉均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 같다. 우선은 속박에서 풀려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서 갔다가 하루 만에 돌아오고 싶었을 것이다.
폭풍 만나 죽을 뻔해
당시 호송을 맡고 있던 경찰은 그의 船上(선상)생활에 대해 『배가 떠난 후, 천기가 청명하고 바람이 잔잔한 날에는 갑판 위에서 바둑을 두고, 혹은 방에 들어가 책을 보기도 하고, 또는 遊戱(유희)를 하기도 하며, 식사도 다름없이 잘 하고 있으나 다만 때때로, 本職(본직)이나 손님에게, 「일본 정부는 무정하다」, 「믿을 수 없다」며… 자주 폭언을 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이런 선상생활은 곧 깨지고 만다. 며칠간 순풍에 돛 단 듯이 잘 달리던 배가 느닷없이 폭풍을 만나 생사간을 넘나들었던 것이다. 당시 경찰보고와 신문보도를 보면 시나가와를 떠난 히데사토마루는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배에 탄 사람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나 다행히 침몰을 면해서 겨우 살아났다. 모두가 뱃멀미에 시달려 밥을 못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가사와라 눈앞에 두고 6일간 빙빙
배는 폭풍우에 밀려 앞으로 휩쓸려나갔다가 다시 뒤로 다시 밀려오곤 했다. 특히 마지막엔 오가사와라를 빤히 앞에 두고 6일간을 바다에서 출렁이며 빙빙 돌았다. 金玉均은 이때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호송경찰은 『이틀간을 暴風(폭풍), 暴雨(폭우), 怒濤(노도), 狂瀾(광란)으로 선체가 몹시 흔들려서 金玉均을 찾아가니 「나는 반은 죽고 반은 산 것 같은데 내가 살아 있는지 좀 봐주시오」했다. 그래서 위로하고 식사를 권했다』고 적고 있다.
오죽하면 도착해서 바로 쓴 편지에 『소생이 前生(전생)에 惡業(악업)을 많이 지어 현재 받고 있는 이 고초는 그 악을 되받는 것이어서 오히려 생명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 다행일 뿐입니다』라고 했을까.
범선 히데사토마루는, 이렇게 폭풍을 만나는 바람에 보통 6일이면 닿는 거리를 21일이나 바다에서 시달린 끝에 8월 29일 오후 6시20분에야 마침내 오가사와라 제도 치치지마의 후타미항(二見港)에 닻을 내리게 됐다.
내가 탄 오가사와라마루는 밤바다를 가르며 질주하고 있었다. 뱃전에 부서지는 파도가 하얗게 튀어 까만 밤바다에 수묵화를 그려 놓은 것 같았다. 갑판에 올라가 밤하늘을 바라보니 별들이 그만 머리 위로 와르르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은하수는 냇물에 밀가루를 풀어 놓은 것처럼 희뿌연 띠를 이루며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얼마 만에 보는 밤하늘의 모습인가! 승무원들은, 승객들이 별을 보기 좋게 하려고 배에 달린 외등을 일부러 꺼주었다. 나는 칠흑 같은 밤하늘과 밤바다를 바라보며, 나라를 지극히 사랑한 한 젊은 애국자가 이 낯선 바다에서 폭풍에 시달리며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들며 고초를 겪던 모습을 떠올려 봤다.
배는 아주 얌전하게 달렸다. 파도도 없었다. 그러나 선실에 들어와 누우니 등허리로 일렁이는 바다의 움직임이 더 크게 느껴졌다. 속이 좀 불안해졌다. 조용하고 얌전하게 자는 일본 사람들처럼 나도 곱게 잠들기를 바라며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일본 사람들은 섬 여행에 익숙해서인지 뱃멀미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매운 컵라면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아침에 컵라면을 먹었다. 辛(신)라면이었다. 매콤한 게 정신을 퍼뜩 들게 했다. 金玉均처럼 半生半死(반생반사)의 지경까지는 안 갔지만 자고 일어나는 것이 불분명하게 오랜 시간을 자다 말다 했더니 정신이 흐리멍텅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매운맛을 보니 뒷맛이 개운했다.
辛라면 하면 생각나는 게 있다. 나는 라면회사가 이 「辛」자를 자기네 기업주의 姓氏에서 따온 줄 알았다. 그런데 일본에 가서 보니 「辛라면」, 「辛우동」 이런 상품들이 수두룩했다. 고유명사가 아니고 보통명사였다. 알고 보니 매운맛이 나는 면류를 그렇게 불렀다. 辛이 「매울 신」 자여서 그 뜻을 딴 것이었다.
「너구리」 우동도 그렇다. 나는 『맞다, 내 너구리!』 하면서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는 것을 보면서, 「이름을 참 잘 지었구나」 했다. 그러나 그것도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일본엔 「너구리(다누키) 우동」, 「너구리 소바」가 이미 일반명사로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우동에 튀김가루를 뿌려 넣은 게 너구리 우동이다. 여우(기쓰네) 우동과 소바도 있다. 유부를 넣은 것이다. 이렇게 일본과 우리나라는 先後(선후)와 愛憎(애증)이 뒤엉켜 있기 일쑤다.
아침을 먹고 갑판에 나가 보니 해가 높이 솟았다. 깜빡 日出(일출)을 놓친 것이다. 그러나 먼 바다에 구름이 끼어 일출 모습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바다 빛깔이 짙푸르다 못해 숫제 검었다.
멀리 오가사와라가 보였다. 배는 왼쪽에 섬을 두고 오래도록 달렸다. 金玉均이 탄 범선은 이렇게 섬을 눈앞에 두고도 6일간을 표류했다. 雪上加霜(설상가상)으로 불운에 불운이 겹친 것이었다.
바다 바람은 후텁지근했다. 여름엔 30℃를 넘나들고 겨울이라야 최저기온이 11℃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다. 겨울의 평균 최고기온은 23℃ 정도다. 겨울이 없는 常夏(상하)의 섬나라, 언제나 해수욕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관광객들에겐, 먼 거리만 아니라면 하와이보다 더 좋은 곳이다. 그렇게 좋은 곳이 金玉均에게는 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金玉均의 생각이 移入(이입)돼서 그런지, 배에서 본 오가사와라의 아름다운 해안이 눈에 썩 들어오지 않았다.
이 諸島(제도)의 중심지 치치지마(父島)가 눈앞에 다가온다. 날씨는 쾌청한데 훅 하고 열기가 몰려온다. 한국에서 겨우 무더위를 피해서 왔는데 여기 와서 진짜 무더위를 만난 것 같다. 여우 굴을 피해 호랑이 굴로 온 셈이다. 아열대 기후라고 하지만 열대에 가깝다.
깨끗한 바다에, 깨끗한 부두. 여기가 일본인 것을 새삼 일깨워 준다. 그러나 마음은 급하다. 金玉均은 여기서 내려 그 지친 몸을 이끌고 어디 가서 긴 한숨을 쉬며 다리를 뻗었을까.
9월28일 오전 11시40분, 6700t의 오가사와라마루는 예정보다 10분 늦게 치치지마의 후타미항(二見港)에 도착했다. 도착하기 전에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 배가 10분 늦어지고 있어서, 이 배에서 내리는 손님의 일부를 받아 치치지마에서 하하지마로 떠나는 배도, 12시30분 예정시간보다 10분 늦게 12시40분에 떠난다고. 그까짓 10분, 뭐 그냥 그대로 떠나면 어떤가. 아니, 아무 말도 않고 있다가 그냥 10분 늦게 떠난다고 누가 시비할 사람 있을까.
일본에 오면 모든 게 자로 잰 듯 너무 정확하게 움직이니까 어느 땐 숨이 막힐 것 같다. 북한에 가서 「아리랑」 공연을 보고 온 사람들이 「10만이 넘는 사람들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는 걸 보고 놀라기보다 숨이 막히더라」고 한 얘기를 들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어디서나 비슷비슷한 2차색의 옷을 입고, 같은 표정을 지으며, 질서와 규칙을 잘 지키고, 튀지 않고 똑같이 사는 모습을 보면 때론 숨이 막힌다.
金玉均, 출장소장 관사에서 묵어
金玉均은 21일 만에 범선에서 내려서 이 마을에 하나밖에 없던 히라이데이조(平井貞藏)의 여관에 잠시 들어가 허리를 폈다. 그러나 그 주인이 자진해서 『이곳은 너무 좁고 누추해서 모실 만한 곳이 못 되니 관사로 모시는 게 어떻겠느냐』고, 오가사와라 東京府出張所長(동경부출장소장)이던 다치키 가네요시(立木兼善)에게 건의했다.
다치키 소장은 산수화를 잘 그리고 글도 잘 쓰는 사람이었는데, 金玉均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건의는 그날로 받아들여져 곧 출장소 관사에서 그를 수행했던 이윤고와 묵게 됐다.
경찰 보고를 보면, 金玉均은 그런대로 낯선 곳에서의 귀양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고는, 『섬에 도착한 후에는 항해 중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피로한 기색 없이 이웃들과 서로 왕래하고, 상인 서생들과 바둑을 두고, 담소하고, 또는 상인 등과 함께 당시 「오가사와라의 로빈슨 크루소」라고 불리던 성공한 개척자 다나카 쓰루요시(田中鶴吉)의 집에도 놀러가고, 때로는 산야에 약초를 캐러 가기도 하고,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가기도 하고, 날마다 적당한 운동을 하면서, 울적했던 마음을 풀고 있고, 전날의 불평도 줄어들었다』라고 듣기 좋게 쓰고 있다.
그러나 金玉均이 친구들에게 보낸 첫 편지를 보면 그가 그렇게 성공적인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 편지의 일부를 살펴본다.
『최고로 치는 먹을거리는 거북이입니다』
<玉均은 배를 탄 지 무려 23일(사실은 21일) 만에 비로소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바다에서 온갖 위험을 다 겪어서 그 때문에 앓고 있던 여러 병들이 한꺼번에 극도로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자리에 오래도록 머뭇거리고 있습니다만, 한 가닥 생명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할까요. 가소롭습니다. 이 땅에 와서 경황을 보니 살아 나가는 데 걱정되는 게 많습니다. 샘물은 극도로 나빠서 맛은 소금을 타 놓은 것 같고, 색은 누런데 흙탕물 같습니다. 하루 한 끼 먹는 것도 밥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나지 않습니다. 저처럼 평소에 체증을 가지고 있던 자는 정말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날씨가 뜨겁기 보통이 아닙니다. 매일 사나운 바람이 두세 차례 불어오고 소나기가 들이닥치면 갑자기 한기와 전율이 느껴져서 참을 수가 없고, 땀을 뿌리며 헐떡이게 돼서 갑자기 두꺼운 옷을 끼어 입어야 합니다. 또 저처럼 류머티즘을 앓고 있는 사람에겐 가장 나쁜 곳입니다. 중요한 醫藥(의약)은 단지 명색뿐이고 소나 말의 병을 치료하듯 하니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바람이 또 난폭하게 불어올 때엔 사람이나 물건, 모래와 자갈이 정처 없이 휘날리지 않는 것이 없고 가옥도 종종 넘어집니다. 이 한 달 안에도 한두 번은 겪었으니 두렵고 두렵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집도 달팽이집처럼 낮게 짓고, 기둥을 세우지 않고 네 귀를 받치고 있어서 집에 들어가면 구부리고 펴기가 부자유스러운 형편입니다.
매일 날이 새면 파리의 함성이 우레가 우는 것 같고, 무리지어 날면 하늘을 가리니 아주 위험한 형세입니다. 한낮에도 장막을 치지 않으면 서로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개미의 종류도 아주 많습니다. 아주 작고 아주 가는 놈들이 정말 무섭습니다. 홀로 다니는 놈들은 거의 그 형체를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만일 먹을 것이라도 있으면, 달고 시고 쓰고 맵고를 가리지 않고, 순식간에 긴 줄을 서서 달려오는데, 무리가 모이면 곧 땅이 시커멓게 됩니다. 심하면 사람의 피부를 깨무는데, 가렵기가 보통이 아닙니다.
먹을거리에 이르러서는, 소가 있으나 잡지는 않습니다. 낮에 숲속에 풀어 놓고 먹이는 놈이라 잡아도 근육이 딱딱해서 이가 들어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직 최고로 치는 먹을거리는 거북이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낮에 바다에 가서 거북이를 잡아 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한 마리를 지고 와서 팔려고 했습니다. 놈을 보니 크기가 두레반만 한데 등에 무늬가 영롱해서 사람이 비쳐 보였습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보는데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것 같았습니다. 玉均은 곧 몇 마디 말로 그를 조문했습니다.
『거북아, 거북아, 네 무늬를 살펴서 모양을 본뜨고, 네 靈性(영성)을 믿고 점을 쳤노라. 네 어찌 그 옛날 영물스럽고 신령한 자가 아니더냐.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슬프다, 덕을 잃어서 먹히게 되었구나! 조상에게 바치게 됨을 삼가지 말지어다. 누가 너를 삶을 것인지도 말하지 말지어다. 거북아, 거북아, 어찌하면 좋은가! 글을 지어 올리고 한 끼 제물로 바칠까 하노라』>
안내자 시마다 기누코와의 만남
나는 배에서 내려 바로 오가사와라촌 교육위원회에서 나온 시마다 기누코(島田絹子)씨를 만났다. 사전에 내가 취재할 내용을 연락해 놨더니 자료를 꼼꼼하게 챙겨가지고 부두에 나와 나를 맞았다.
아주 가냘프게 생긴 여성이어서 「더운 날씨에 여기저기 함께 가자고 하기가 어렵겠다」 생각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시마다씨는 일본의 모범적인 공무원이 어느 정도인지 나에게 본때를 보여 줬다. 시마다씨는 나에게 꼭 긴소매 옷, 모자, 선글라스를 준비해 오라고 당부했다. 만나고 보니 막상 자신은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지 않았다. 나도 한 가지를 위반했는데, 긴소매 옷을 입고 다니지 않았다.
시마다씨는 나를 만나자마자 출장소의 관사가 있던 자리로 안내했다. 지도에 장소까지 표시해 와서 설명했다.
『琴秉洞(금병동·80) 선생이 말한 자리는 여긴데, 여기 사시는 분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몇 군데가 더 나옵니다』
琴秉洞 선생은 「金玉均과 日本」이라는 방대한 책(1025페이지)을 일본어로 쓴 在日(재일)교포 학자로, 나를 아주 많이 괴롭게 한 분이다. 그는 이 책에 金玉均과 일본에 관련된 일본 측 자료를 거의 다 모아 분류하고, 해석하고, 평가해 놓아서 金玉均에 다가가자면 그 책을 읽지 않을 수 없다(이 글 뒤에 붙은 琴秉洞 인터뷰 참조). 그러나 문제는 메이지 시대의 일본어였다. 현대 일본어나 한문은 그럭저럭 사전을 찾아 가며 읽을 수 있는데, 옛날 古문서는 사전에 안 나오는 단어가 더 많았다.
그런데 시마다씨가 비록 모국어지만 그 책을 다 읽고,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전화까지 걸어 다시 의견을 물은데다, 金玉均과 교류했던 사람들의 자손들에게 考證(고증)까지 한 뒤에, 나를 데리고 다니며 설명을 했던 것이다.
金玉均의 발자취를 찾아서
치치지마에 현재 사람이 몰려 살고 있는 곳은 크게 세 군데쯤 된다. 金玉均이 처음 묵었던 오무라(大村), 바닷가에 같이 붙어 있으면서 깊숙하게 자리 잡은 오쿠무라(奧村), 그리고 오무라에서 건너다 보이는 오기우라(扇浦)다. 金玉均은 여기 오무라에서 6개월쯤, 그리고 오기우라에서 1년쯤 살았다. 金玉均은 이 오가사와라에서 거의 2년을 살았는데, 나머지 6개월간은 하하지마에 건너가 살았다.
金玉均이 이 섬에 건너온 1886년은, 오가사와라가 일본 정부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척되기 시작한 지 10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다. 1862년에 일본 정부는 처음 이민을 시작했으나 실패해 1년 만에 철수시키고, 1876년에야 국제적으로 일본 영토로 인정을 받고 본토에서 37명을 이민시켰다. 그리고 그 이전에 하와이와 미국 등지에서 먼저 와서 살던 先住民(선주민)들을 1875년에 모두 일본인으로 귀화시켰다. 이런 초창기였으니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았을 때였을 것이다.
金玉均이 도착했던 8월29일, 이 섬을 관할하는 관청은 東京府(동경부) 오가사와라 출장소였다. 그런데 11월에 출장소가 東京府 오가사와라島廳(도청)으로 승격했다. 지금은 東京都오가사와라支廳(지청)이 돼서 바로 그 자리에 있다. 관사는 물론 없어졌다. 옛날의 관사는 아마 이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치치지마의 오무라는 손바닥만 하다. 부두에서 내려 하나밖에 없는 큰길(2차선)을 따라 서남쪽으로 400m쯤 내려가다 보면 세 갈래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같은 폭의 길이 70~80m 쯤 뻗어 있다. 이 길로 돌아서면 왼쪽에 오가사와라 村사무소(村役場)·우편국·경찰서가 나란히 붙어 있다. 그 길의 막다른 곳에 있는 나지막한 2층 흰 건물이 도쿄都의 지청이다. 그러니까 당시의 관사는 이 근처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다치키 도청장, 金玉均의 식비 등 인상 건의
메이지 시대의 사진을 보면 정문 앞에 큰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그중 오른쪽의 한 나무는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다. 지금의 경찰서 부근에 관사가 있었다는 說(설)이 있다. 시마다씨가 새롭게 추정하는 곳은 여기서 조금 떨어져 있다. 지청 정문에서 한 블록 서쪽으로 내려가면 중간에 마당을 사이에 두고 산 밑에 집 두 채가 있는데, 그중 한 군데에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든 金玉均이 도착하자마자 6개월이나 살았던 집은 부두에서 500m 정도, 해안에서 1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 집에서 나서면 바로 코앞에 후타미(二見) 해안의 해수욕장이 펼쳐진다. 물이 얼마나 맑고 깨끗한지 관광객들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나는 옅은 옥색에서부터 짙은 코발트색으로 아롱진 바다를 한참 바라다보았다. 金玉均은 이 바다를 보면서도 아름답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서 옷을 벗고 풍덩 뛰어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내가 죄스러워졌다.
金玉均은 이 집에서 전혀 행복하지 못했다. 적응하기 힘든 환경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일본 정부의 처우가 만족할 만하지 못했다. 그를 이 섬에 보내면서 일본 정부는, 金玉均과 그의 隨從者(수종자)에게 식비로 한 달에 6엔씩 지급하도록 訓令(훈령)으로 정했다.
이 식비는, 혈혈단신으로 직업이 없는 사람에게 시행하던 恤救規則(휼구규칙), 곧 오늘날의 「생활보호법」 같은 것에 준하여 마련된 것이었다. 이런 실정을 보고 가엽게 여긴 다치키 島廳長(도청장)은 곧바로 다카사키 고로쿠(高崎五六) 도쿄지사에게 식비와 잡비를 올려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한다.
그 건의서의 내용은 대강 이렇다.
<원래 절해고도라서 왕래가 불편하기 때문에, 물가도 따라서 비싸졌습니다. 정기선으로 왕래하는 상인도 1박에 35전이나 40전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金玉均과 그 수종자의 식비 월 6원으로는 질 낮은 식품을 제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상의 물품도 內地에 비해서 5~6할 비싸거나 2~3배하는 상태여서 잡비도 4원과 1원으로는 도저히 지불할 수 없어, 金씨 前日의 신원을 생각해서 …식비는 한 명에 10원씩, 평균 잡비는 金씨에게 7원, 從者에게 3원씩 올려 주도록 결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金玉均, 큰 배만 오면 산 속으로 숨어
그가 이 섬에 사는 동안 돈에 시달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柳赫魯(유혁로)가 배편이 있을 때마다 들락거리며 그의 뒤를 봐주었는데 그때마다 본토에서 보내는 후원금품이 전달됐던 것 같다.
문제는 건강이었다. 그는 앞에서 말한 대로 위장병, 류머티즘, 안질에 시달리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특히 오무라는 물이 나빠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그를 불안하게 하는 소문이 있었다. 1886년 11월, 미국 어선이 이 섬에 와서 정박한 일이 있는데 그 선원들이, 장차 중국의 군함이 와서 金玉均을 산 채로 잡아갈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불안해진 金玉均은 오무라를 뜨기로 하고 다치키 島廳長에게 그런 뜻을 전했다. 다치키는 섬 안에서는 그를 어디에든 거주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옮겨 갈 장소를 물색하도록 했다.
金玉均은 섬에서 가장 좋은 물이 나오는 곳을 찾았다. 그곳은 바로 오무라에서 바다 건너 빤히 바라다보이는 오기우라(扇浦) 뒷산 계곡이었다. 그곳은 「렌주다니(連樹谷)」라고 했다. 그는 그 물을 며칠간 먹어 봤다. 맛이 참 좋았다.
그는 그곳에 自費(자비)로 자신이 살 집을 지었다. 이 섬에 올 때부터 이곳의 주택이 달팽이집 같아서 오래 살게 되면 집을 새로 짓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렌주다니로 가기로 했을 때도, 미국으로 추방되지 않는다면 거기서 계속 살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오기우라는 해안의 모습이 부채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오무라보다 먼저 개발된 곳이다. 최초의 행정기관도 여기에 있다가 건너편 오무라로 옮겨졌다. 그때까지 그 주변에 15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는 「렌주가와(連樹川)」라는 작은 내가 흐르는 계곡에 터를 잡고 집을 지었다. 그가 그곳으로 이사한 시기는 1887년 1월에서 2월 사이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가서도 마음 놓고 살 수 없었다. 그가 살던 건너편 후타미항에 큰 배가 들어오면, 자기를 잡으러 온 게 아닌가 해서 뒤에 있는 시구레야마(時雨山) 아래 깊은 계곡 나가다니(長谷) 대피소에 가서 꼭꼭 숨어야 했다. 지금도 그와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의 손자나 증손자들이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그때의 얘기를 전설처럼 말하고 있다.
『배가 들어오면 金玉均은 렌주다니의 집에서 나와 시구레야마나 구레키노야마(桑木山)에 몸을 숨겼습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칼을 들고 金玉均을 지키려고 함께 산에 들어갔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배가 들어올 때는 金玉均과 함께 나흘이고 닷새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할머니가 얘기했지요』(齊藤良二의 말, 琴秉洞, 「金玉均과 日本」, p.396)
정글이 돼버린 金玉均의 옛집
렌주다니에 있었던 金玉均의 집에 대해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1906년 이 섬의 역사(小笠原島志)는 金玉均의 집을 이렇게 詩的(시적)으로 쓰고 있다.
<오기우라(扇浦)의 동쪽은 구레키노야마(桑木山)인데 그 계곡을 렌주다니라고 부른다. 산이 급박하고, 계곡이 깊고, 수목이 울창해서 그윽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이 땅은 先年 한국 망명객 金玉均이 살던 땅으로, 玉均은 지금 故人(고인)이 됐지만 그 茅屋(모옥)은 지금도 남아 있다. 合歡花가 노랗고 희게 분분한 곳에 한 서재가 있으니, 처마가 낮고, 창이 밝은데, 쓸어도 먼지 하나 없다. 옛날을 생각하면 그 누가 이곳을 무심히 지나가랴. 이 집터에 접해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다. 시냇물 역시 먹을 수 있다. 지금은 홈통으로 물을 끌어 온 마을에 닿는다>
이제 내가 그곳을 찾을 차례다. 교육위원회의 시마다씨는 여기서 실력을 발휘한다. 시마다씨는 내가 도착하기 전에 사전 조사를 해서 장소를 알아 놓았는데, 당일 아침에 또 확인 답사를 하느라 언덕에서 넘어져서 팔에 상처를 내고 왔다. 긴소매 블라우스에 흙을 많이 묻히고 나타났다. 나는, 「저분이 어디 가서 저 고생을 하고 왔나」 하면서도 그냥 지나쳤다.
우리는 할아버지가 경찰로 있으면서 金玉均을 지켜드렸다는 오키야마 쇼지(沖山昭二·82) 영감의 안내를 받았다. 영감은 정수장 뒤 나가다니(長谷)로 올라가는 도로로 200m쯤 가서 왼쪽 계곡을 보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이 큰 나무 두 그루를 보면 알지요. 이 두 나무 사이로 길이 있었어요. 이 시내를 건너 집터가 있었는데, 어렸을 때 어른들이 「여기서 金玉均이 살았다」고 했어요. 저 밑에 빨래하는 바위가 있지요. 어릴 때 여기서 놀았거든요』
그러나 숲이 너무 우거져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다. 시마다씨는 나를 이끌고 다시 그 도로를 따라 정수장 앞으로 내려가서 사다요리진자(貞賴神社)로 가는 길을 따라 죽 올라갔다. 개척의 碑(비)와 또 다른 오래된 비석이 나왔다. 거기서 계곡 쪽으로 내려가니 아까 오키야마 영감이 가리키던 집터 부근이 보였다. 오래된 바나나 나무, 보리수, 왕대나무들이 꽉 들어차서 도저히 비집고 들어갈 수 없었다.
시마다씨는 난마처럼 엎치고 덮친 대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헤집고 내려가며 나를 보고 「어서 오라」고 했다. 날은 덥고, 땀은 비 오듯 하고, 벌레들은 달려들고, 썩은 대나무는 밟으면 푹푹 빠지는데 시마다씨는 용케 저만큼 가서 나를 오라고 했다.
나는 한 발도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러다가 「아차」 하고 쭉 미끄러졌는데, 시마다씨한테 비상이 걸렸다. 보통보다 두 옥타브는 높을 것 같은 소리를 내더니 순식간에 쫓아와서 준비해 온 약으로 소독을 하고, 약을 발라 줬다. 그리고 밴드까지 붙여 줬다. 그 바람에 나는 그 詩的인 분위기를 느껴 보지 못하고 계곡을 빠져나왔다. 하긴 그 밀림 속에서 무슨 분위기가 나겠는가.
金玉均을 생각하며 눈물 흘리다
우리는 다시 오기우라 바닷가로 나왔다. 金玉均이 바닷가에 나와서 먼 바다를 보며 고국을 그리워했다는 그 자리에 와서 나도 그 바다를 바라봤다. 조선 제일의 학식을 갖춘 사람, 조선 제일의 경륜을 가진 사람, 조선 제일의 책략을 가진 사람, 조선 제일의 결단력을 가진 사람, 조선 제일의 안목을 가진 사람, 조선서 제일 똑똑한 사람, 조선에서 제일 말을 잘하는 사람이, 이 좁은 땅에 와서 얼마나 답답했을까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누구랑 천하대세를 논했을까. 누구랑 망해 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자고 열변을 토했을까. 누구랑 도탄에 빠져 허덕이는 백성들을 어서 구해 내야 한다고 가슴을 치며 답답해했을까. 누구랑 몽매한 대신들과 썩은 벼슬아치들을 몰아 내야 한다고 머리를 맞댔을까. 아아, 누구랑 비명에 간 아버지, 종이 된 아내, 생사를 알 수 없는 딸아이를 생각하며 목 놓아 울었을까.
나는 옛날의 그가 했던 것처럼, 꼭 모자처럼 생긴 바위(烏帽子岩) 너머 북쪽 바다를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 있다가, 준비해 간 도시락을 먹었다. 시마다씨는 이번에도 일본인다웠다. 자기 도시락은 자기 돈으로 사왔던 것이다.
자기는 공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 돈으로 물을 사서 나에게 줬다. 그 정도는 公金(공금)으로 사줄 수 있다고 했다. 시마다씨가 그 당시 일본 총리였더라면 金玉均은 그런 고생을 안 했을 것 같았다. 아니, 우리나라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다.
金玉均은 렌주다니에서 참으로 많은 일을 겪었다. 우선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먹여 주고 가르쳐 줬다. 옛 사람들의 증언을 들으면 아이들 10여 명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가 上海에서 洪鍾宇(홍종우)의 총탄을 맞고 죽을 때까지 그를 따라다니며 뒷바라지를 다했던 와다 노부지로(和田延次郞)를 만난 것도 이 집에서였다. 와다의 회고를 들어 본다.
『내가 아직 철없는 아홉 살 때였습니다. 나는 부모님에 이끌려 오가사와라에 있던 소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해 金玉均씨는 거의 유배와 같은 몸이 되어 우리가 사는 오가사와라라는 孤島에서 恨 많은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영웅이 한가한 일월을 보내고 있다고나 할까, 金씨는 전연 세상 일을 잊은 것처럼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는 어린이들을 많이 불러 모아서 이런저런 물건을 주기도 하고, 장난하며 놀기도 하면서 그날 그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金씨에게 이끌려서 거의 매일 놀러 다니게 됐습니다.
金씨가 수박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에 내가 半里는 되는 우리 집에서 학교에 갈 때 맛있는 수박을 가져다 드리게 됐습니다. 이것이 인연이 돼서 내가 金씨에게 많은 사랑을 받게 됐고, 드디어는 金씨가 사는 곳에서 통학을 하게 됐고…』(民友社, 「金玉均」)
그때의 오기우라 소학교는 지금 정수장이 됐다. 金玉均의 집에서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다.
前 혼인보 슈에이의 방문
金玉均은 가난해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데려다가 일본어 쓰기와 읽기를 가르쳐서 그의 덕에 글을 배워 까막눈을 면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가 섬에 가기 전 해인 1885년에 「오가사와라 폭동」이란 게 일어났는데, 말이 폭동이지 바른소리하는 백성들에게 관리들이 罪를 뒤집어씌운 사건이었다. 그 바람에 마을 주민 7명이 억울하게 잡혀 가 본토에서 재판을 받게 됐다. 이렇게 되니 그들의 자녀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고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됐다.
金玉均은 그들을 데려다가 먹이고 가르쳤다. 그 후 재판에서 억울함이 풀려 마을 사람들이 無罪(무죄)판결을 받고 돌아오게 됐는데, 金玉均이 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보고 더욱 친하게 지내게 됐다고 한다. 그때의 아이들은 자라서 金玉均을 은인으로 생각하며 고마워하면서도, 다만 훌륭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몰랐다고 한다.
바둑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바둑을 참 좋아했다. 오죽하면 그를 강제연행해서 오가사와라로 떠나 보내던 경찰관이 바둑판을 선물했을까. 그는 그 바둑판으로 흔들리는 배 안에서도 바둑을 두며 왔다. 이 섬에 와서 그는 바둑으로 소일을 했다. 시냇물 소리 상쾌하게 들리는 계곡에 와서는 마치 신선놀음이라도 하는 양 바둑을 많이 두었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살면서 그들에게 바둑을 가르쳤다. 그 덕분에 아이들 중 몇몇은 이 섬에서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되어 제법 행세를 했다.
뭐니뭐니 해도 바둑 얘기라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의 「國手(국수)」와 같은 칭호를 일본에서는 「혼인보(本因坊)」라고 하는데, 前 혼인보 슈에이(秀榮)가 1887년 2월, 金玉均이 렌주다니 계곡에 있을 때 그의 집을 不遠千里(불원천리)하고 찾아와 5월까지 석 달간이나 함께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吳淸源(오청원)은 슈에이가 오가사와라에 가서 金玉均과 석 달간 무려 一萬局(일만국)을 두었다고 그의 책 「莫愁」에서 밝히고 있다. 슈에이가 거기까지 찾아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본의 혼인보 타이틀을 놓고 다소 혼선이 있었을 때 金玉均이 나서서, 중재를 잘해줘서 두 사람은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됐다고 한다. 金玉均의 바둑 실력은 프로 초단에 두 점을 놓는 실력이라고 한다. 그 정도면 아마추어 5단 실력이라고 한다.
글씨 팔아 조선인 유학생들 도와
5월이 돼서 슈에이가 떠나려 하자 金玉均은 그에게 글 한 장을 지어 주었다.
<혼인보 슈에이는 나의 스승이요, 또한 나의 벗이다. 비단 碁道(기도)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의리에 있어서는 벗인 것이다. 내가 丙戌年(병술년) 가을에 南海 오가사와라 섬으로 쫓겨나 絶海孤島에서 더불어 벗하며 살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그가 다음해인 丁亥年(정해년) 봄에 홀연히 온 것은 내가 窮塞(궁색)한 섬에서 외롭게 사는 것을 염려해서다. 그 出入(출입)의 義氣(의기)가 어찌 나에게만 감흥이 있겠는가. 함께 보낸 3개월, 내가 사는 어지러운 산 속에는 낮인 데도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매일 흙을 나르고 잡초를 뽑아 한 작은 정원을 만들며 그대와 내가 웃으며 소일하게 됐다. 초여름에 배가 와서 그대가 도쿄로 돌아가려함에 글을 써서 주노니, 후일에 다시 만나 손을 잡을 때 웃음거리로 삼으려 한다>
슈에이는 1년 뒤 金玉均이 다시 홋카이도로 쫓겨 가게 됐을 때, 함께 만나 손을 잡았지만 그때 그 글을 보면서 한바탕 웃었을까, 아니면 울었을까, 알 길이 없다. 의리의 일본 사나이 슈에이는 그때도 삿포로까지 함께 가서 위로한다.
그러나 지금 이 렌주다니 계곡에선, 아이들의 재깔대는 웃음소리도, 영웅들의 호탕한 웃음소리도, 세월을 잊은 신선들의 바둑 돌 놓는 소리도,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다. 다만, 열대의 정글이 돼버린 숲속에선 이름 모를 새소리만 들리고, 그 맑다던 개울엔 해묵은 푸른 이끼만 가득하다. 나는 그냥 주저앉고만 싶다.
金玉均은 이곳에 와서 많은 사람들에게 글씨를 써서 주었다. 소학교나 우편국에 그의 글씨가 걸렸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본토로 疏開(소개)가 있었던데다 미군의 공습으로 그 글씨들이 지금은 이곳에 남아 있는 게 없다. 이 지역 토박이들 가운데, 『우리 집에도 金玉均의 글씨가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특기할 것은 그가 글씨를 써서 도쿄에 내다 판 돈으로 게이오기슈쿠(慶應義塾)에 다니던 조선인 학생 10여 명을 그 난중에 도와줬다는 사실이다.
하하지마의 金玉均
金玉均의 병은, 그 조용하고 물 좋은 계곡에 살면서도 좋아지지 않았다. 위장병이 심했고, 때때로 가슴이 아파 괴로워했으며, 심하면 인사불성이 되었다. 그는 內地(내지·본토) 요양을 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88년 1월, 결국 그는 거기서 남쪽으로 50km쯤 떨어진 하하지마(母島)로 이주하는데, 아마 일본 정부가 내지요양의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는 대신에 용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때 수행원을 데리고 갔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혼자 건너갔던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金玉均의 흔적을 찾으러 다시 배를 타고 하하지마로 갔다. 두 시간쯤 걸렸다. 그까짓 건 배타는 것도 아니었다.
오키항(沖港)에 오가사와라촌 하하지마 지소장 곤노 미쓰로(今野滿)씨와 관광협회의 사카이리유코(坂入祐子)여사가 마중 나왔다.
곤노 지소장의 명함엔 배 부분이 노란 낯선 작은 새 사진이 실려 있었다. 길이가 14cm밖에 되지 않는 작은 새지만 이 섬에만 사는 고유종으로 「하하지마메구로」라고 한다. 이 새는 치치지마에도 없다고 한다.
이 諸島에는 동식물 고유종이 많다. 어딜 가나 문어처럼 생긴 타코노키(문어나무)가 즐비하다. 나무 아랫부분에서 문어 다리처럼 생긴, 길다란 도끼 자루 같은 것이 여러 개 나오는데 이것이 땅에 닿으면 뿌리를 박는다. 언뜻 보면 문어가 서서 걸어다니는 것처럼 보여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하하지마의 거리는 치치지마보더 더 간단했다. 오키 항구를 둘러싸고 두 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모두 450명쯤 산다고 했다. 과거엔 여러 마을에 사람이 흩어져 살았는데, 지금은 일도일촌(一島一村)의 원칙에 따라 한 곳에 모여 살게 됐다고 한다.
두 사람은 나를 데리고 金玉均이 처음 묵었던 하하지마支廳 출장소장 하기와라 데쓰(萩原轍)의 관사 자리로 갔다. 바닷가에서 200m쯤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왼쪽에 하하지마小中學校가 보이는데 이곳이 당시 하하지마 오키무라소학교(沖村小學校)가 있던 자리였다. 金玉均은 이 학교에서 직접 교실에 들어가 어린이들에게 서예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의 글씨가 입구에 붙어 있어서 학생들이 언제나 보고 다녔다고 한다.
지금 그 자리에는 현대식 건물이 지어졌다. 서양인 교사가 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옛날의 金玉均처럼.
바로 그 앞에 옛 관사 자리가 있었는데, 그 공터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뽕나무과의 교목 가주마루(榕樹)와 야자수들이 잡초 가운데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거기서 15m쯤 내려오니 당시 우체국장 와다 겐조(和田元藏)의 집터가 나왔다. 그곳에도 잡초만 무성했다. 金玉均은 이 별채에서도 살았다.
『훌륭한 사람이 한국에서 우리 집에 亡命 와서 살았다』
그는 이 섬에서 6개월쯤 사는 동안 여러 군데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주로 남의 집 별채에서 살았는데, 이걸 보면 하숙을 하며 옮겨 다닌 것 같다. 특히 스즈키 미키조(鈴木美喜藏)의 별채에서 살 때 그의 부인 신세를 많이 졌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어딜 가나 동네 사람들한테 환영을 받았다. 맛있는 음식을 하면 서로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그가 신세를 많이 졌다는 스즈키 미키조의 손녀 스즈키 교코(京子·84) 여사는 아직까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살고 있었다. 바로 바닷가에 면한 집이었는데, 당시 金玉均이 바닷가에 나와 먼 바다를 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고 한다. 그 집 앞으로 작은 실개천이 흘러 바다로 들어갔다. 물웅덩이에선 손바닥만 한 물고기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놀고 있었다.
교코씨는 얼마 전까지 민박을 운영했다고 한다. 金玉均에 관한 얘기는 어른들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훌륭한 사람이 한국에서 우리 집에 亡命 와서 살았고, 벽장 안에 그가 써 준 글씨가 가득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집터뿐이다.
스즈키 교코씨는 그의 집 뒤 별채가 있던 곳을 안내했다. 그 집 둘레에 스즈키 미키조의 자손들이 모여 살고 있었는데, 그 터만 비어 있었다. 터 입구에 「엔슈마치(遠州町)」란 옛 지명을 쓴 팻말이 박혀 있었다.
이 밖에 그는 한적한 산골인 나가하마(長浜)의 기쿠치 기헤에(菊池義兵衛)의 집에서 살았다. 북쪽으로 가는 단 한 줄기 도로를 달리다가 나가하마 터널을 빠져나가면 「롱 비치(LONG BEACH)」라는 표지판이 나오지만 먼 바다만 바라다보일 뿐 내려가는 길이 없다. 당시에 이곳에서 개척민 여섯 가구가 살았다는데 그들이 경작하던 땅은 다시 정글이 돼버렸다고 한다.
나가하마 못 미처에 니시우라(西浦)가 있는데, 거기엔 진입로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길도 곧 끊기고 열대의 수림이 앞을 가로막아서 다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저 아래 해안에 당시 유력자였던 기쿠치 도라타로(菊池虎太郞)의 집이 있었는데 그는 그 집 별채에서도 살았다. 거기 살면서 자주 바닷가에 나가 아이들과 놀았다고 한다.
金玉均은 하하지마에 와서 6개월밖에 살지 않았지만 섬사람들에겐 치치지마에서보다 더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1888년 7월 하순, 金玉均은 恨 많은 오가사와라를 떠나 또 恨 많은 홋카이도(北海島)로 가게 된다. 그는 하하지마에서 치치지마로 돌아와 일단 요코하마(橫濱)까지 갔다가, 다시 하코다테항(函館港)으로 가서 또 2년 가까운 세월을 홋카이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이번에는 열대지방이 아니라 지독하게 추운 곳이었다.
일본 정부가 그런 자비를 베푼 주된 이유는, 金玉均이 內地에서 요양을 하도록 해달라고 여러 차례 애원을 했는데, 절해고도에서 병을 치료하기 어려워, 이를 불쌍히 여겨 그의 고국과 날씨가 비슷한 홋카이도에서 생활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이제 오가사와라를 떠나야 했다. 치치지마에서 2박3일, 하하지마에서 1박2일을 살면서, 짧은 시간이지만 金玉均의 恨이 내 나라의 恨이 돼서 내 가슴을 묵직하게 누르고, 그 속에 들어와 앉았다.
바다에서 들려오는 金玉均의 목소리
오가사와라와 金玉均의 사적을 조금이라도 더 보여 주려고 애쓴 시마다 기누코씨와도 헤어질 시간이 됐다. 시마다씨는 휴일인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헌신적으로, 일과시간이 넘어서까지 조금의 불평도 없이 땀을 뻘뻘 흘리며 일했다. 우리가 헤어질 때가 가까워 오자 시마다씨는 나에게 다가와 조그맣게 말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공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니까, 혹시 선물을 주신다면 사양하겠습니다』
나는 배가 떠날 때의 장관을 잊을 수 없다. 후타미항에서 3박을 하고 다시 도쿄로 향하는 오가사와라마루가 부두를 떠나자, 항구에 정박해 있던 12척이나 되는 배들이 우리 배를 좌우 앞뒤로 따라오면서 배에 탄 사람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미야모토씨, 고맙습니다! 사요나라!』
작은 배에 탄 사람들은 자기 손님들을 향해 하나같이 목이 터져라 외쳐 댔다. 이런 배웅이 이 섬의 전통이라고 한다. 그 작은 배들은 거의 30분이 지나도록, 우리가 탄 큰 배가 깊은 바다에 나설 때까지 한사코 따라오며 소리쳐 댔다. 그러다가 작은 배에 탄 사람들은 바닷물로 풍덩풍덩 뛰어들었다. 그들은 바다에 빠져서도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사요나라!』
나는 내가 묵었던 민박집 주인이 저 속에 끼어서 나를 부르지 않나, 하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저기 金玉均이 나를 부르고 있다!」●
[인터뷰] 金玉均 자료 집대성한 在日원로학자 琴秉洞
『김옥균은 실패는 했지만 실천을 했습니다』
『金玉均은 일본을 이용하려 한 것』
琴秉洞(금병동·80) 선생을 일본 도쿄 교외 히가시야마토시(東大和市)에 있는 자택으로 찾아간 것은 지난 10월2일 오후 7시쯤이었다. 金玉均이 2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한 오가사와라(小笠原)에서 막 돌아오던 참이었다.
琴선생은 金玉均에 관한 일본 측 자료를 거의 빠짐없이 수집, 1991년 「金玉均과 日本」이란 책을 일본에서 출판해 金玉均 연구를 집대성한 在日(재일) 원로학자다.
그는 아담한 2층집에서 부인과 막내아들하고 셋이서 살고 있었다. 아래층엔 서재가 있었는데, 방 두 개에 책이 가득 쌓여 있어서 사람이 비집고 앉을 자리도 없어 보였다.
그는 우리 말을 곧잘 했으나 가끔 생각이 나지 않을 때는 일본어를 한두 마디 섞어서 썼다. 깡깡한 몸매에 선량한 얼굴로 잘 웃었지만, 가끔 눈을 부릅뜰 때는 좀 무섭기도 했다.
―어떻게 金玉均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습니까.
『조선 사람은 모두 같은 의문을 가지게 되지요. 왜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나…. 그걸 따라가다 보면 꼭 金玉均이 나옵니다』
―역사에 대해선 일찍부터 흥미가 있으셨나 보죠.
『어릴 때부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중단하려고 했습니다. 金玉均이 親日派(친일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 사람들이 金玉均을 親日派라고 했으니까요』
―金玉均이 親日派가 아니라는 확신이 섰나요.
『1962년에 조선大 도서관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역사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로 했지요. 자료를 보는 데 유리했으니까요. 金玉均에 관한 자료를 보면서 다시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金玉均은 일본을 이용하려고 한 것이지 親日派는 아니었어요』
「관동대지진」 연구
―그때부터 자료를 모으셨군요.
『그렇지요. 그땐 복사기가 없어서 대학노트에 일일이 베껴 써야 했어요. 그런데 1964년 평양에서 「金玉均」이란 책이 나왔어요. 그 속에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거의 다 나와 있었어요. 내가 나갈 무대가 없어진 겁니다. 또 중단했지요. 그리고 다른 데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많이 학살됐는데, 그걸 연구했지요』
그는 이 분야에 관해서 세 권의 책을 펴냈다. 「關東大震災(관동대진재)와 朝鮮人(조선인)」(강덕상과 공편, 1963, 미스즈書房), 「關東大震災 朝鮮人虐殺關聯 兒童證言史料」(1989, 綠蔭書房), 「關東大震災 朝鮮人虐殺關聯 官廳史料」(1991년 綠蔭書房)가 그것이다. 뒤의 두 책은 자료뿐만 아니라 해설을 곁들였다. 「耳塚」(1978, 二月社)을 비롯해서 韓日문제에 관한 책을 여러 권 냈다.
여기서 얘기가 다른 길로 나갔다.
―일본에서 年金(연금)을 받으며 사시는데, 일본이 싫어할 일만 하시네요.
『우리가 왜 일본의 식민지가 됐나? 일본 때문에! 그래서 문제점이 될 만한 걸 찾게 된 겁니다』
―일본 정부가 싫어할 텐데요.
『公的(공적)으로는 못 하지만 내색은 하지요. 자료를 제공한 사람에 대한 압력도 있었지요. 그러나 역사니까 할 수 없지요』
여기서 그의 위크 포인트를 건드려 본다.
―조선大 강사로 계시니 조총련 쪽이시지요.
『지금 그걸 구별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그는 후쿠오카(福岡)에서 태어났지만 본적은 경북 문경이었다.
―고향이 경북 문경이던데 다녀오셨습니까.
『가려는 마음은 있지만 못 갔습니다. 왜 안 가나? 국가보안법 때문에! 국가보안법 때문에 어려움 겪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가면 의리가 서지 않아요』
―북한에는 더 무서운 법이 있는데 거긴 갔다 오셨겠지요.
『그거야…, 양쪽 지도자가 호상간에 상의해서 잘 처리했으면 좋겠는데…』
그는 북한에 세 번 다녀왔다고 했다. 아무래도 논리가 옹색해 보였는지, 이때 뒤에서 지켜보던 부인(崔敏子·69)이 끼어들었다.
『나하고 아들·딸하고 온 식구는 다 한국 다녀왔는데 저 양반만 저래요』
그는 그 말을 듣고 흘낏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저 사람은 처녀 적부터 그쪽(민단) 계통이었어』
부인도 지지 않았다.
『그렇게 北이다 南이다, 하니까 통일이 안 돼요! 우리 집부터 먼저 통일이 돼야 해요!』
琴선생은 졌다 싶은지 어조를 좀 누그러뜨렸다.
『내가 명색이 조선大 선생인데 아이들 네 명 가운데 한 명도 조선大에 안 왔어요. 첫 놈이 그러는 걸 보고 나는 그날로 학교의 현직에서 물러났어요. 그랬더니 학교에선 그냥 나와 달라고 해서 강사로 나갔지요』
이 집안의 南北문제는 이미 승패가 판가름 난 것 같았다. 琴선생 쪽이 數(수)에 있어서나 논리에 있어서나 많이 달리는 것 같았다.
오가사와라에서 발견한 金玉均
얘기를 다시 본론으로 돌린다.
―그래 金玉均 연구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1980년 머리에 핏줄이 터져서 건강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손이 말을 듣지 않아서 글씨를 쓸 수 없었어요. 학교를 쉬고 따뜻한 곳으로 요양을 가기로 했어요.
이즈(伊豆)로 갈까 하고 있는데, 집사람이 오가사와라가 좋을 거라고 그래요. 속으로 「金玉均이 거기서 살았지만 아는 사람 있겠나, 조선인 강제징용 얘기는 많을 거야」, 하면서 2주일치 약을 챙겨 가지고 갔지요.
그 섬에 가서 바로 가게에 필름을 사러 들어갔더니, 그 집에 「오가사와라 얘기」라는 책이 있어요. 그걸 훑어보니까, 金玉均 얘기가 많이 나와요. 그래서 그 이튿날부터 金玉均을 잘 아는 사람의 자손들을 찾아다녔지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사람들을 만나고, 현장을 찾아다니고 했어요.
병 고치러 간 사람이 취재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지요. 밤에는 취재해 온 걸 대학노트에 다시 정리했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글씨를 쓸 수 있게 된 겁니다.
2주 만에 도쿄로 돌아왔는데 대학에선 쉬라고 해요. 「아, 찬스다!」 매일 국회도서관에 가서 메이지(明治) 시대의 신문을 다 봤습니다. 金玉均이 살았던 곳을 다 찾아갔습니다. 홋카이도, 나가사키, 上海…』
―돈이 없었을 텐데요.
『집사람이 부인들 파머를 해주고 번 돈으로 도와줬습니다』
―어려움이 많았겠지요.
『金玉均이 달필이어서 초서로 쓴 글을 읽을 수 없었어요. 마침 동료 교사의 아버지가 漢學者(한학자)여서 그분한테 가서 배웠습니다』
―책이 되기까지 얼마나 걸렸습니까.
『1991년에 책이 나왔으니, 11년 걸렸습니다. 책이 나오고 나서 내 어깨가 가벼워졌습니다. 중압감에서 해방돼서요. 「이젠 할 일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이 나오고 한국에서 많은 분들이 찾아와서 바빠졌어요.
한국에 곧 제 책 세 권이 번역돼서 나올 예정입니다. 「종군위안부」, 「한국인의 일본관」, 「일본인의 한국관」입니다. 그리고 제가 모은 자료와 책을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하기로 했어요』
―아니, 그런 건 북한에 줘야지요.
『그거야 어디 남아도 남는 거니까』
우리는 마주 보며 껄껄 웃었다.
갑신정변 실패의 원인
―金玉均은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조선 역사에서 10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사람이었습니다. 왜? 세상을 바꾸려고 했으니까. 생각하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吳慶錫(오경석)·朴珪壽(박규수)·柳大致(유대치) 이런 사람들은 생각만 했지요. 金玉均은 실패는 했지만 실천을 했습니다』
―甲申政變(갑신정변)이 왜 실패했다고 보십니까.
『첫째는 민중의 기초가 돼 있지 않았습니다. 민중이 일어나게 하려면 10년은 기다려야 했을 겁니다. 둘째는 일본을 너무 의존했습니다. 일본이 배신한다는 걸 생각 못 했습니다. 일본은 나중에 金玉均의 암살을 도와주기까지 했습니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은.
『내일 죽어도 좋습니다. 내가 할 일은 다 했습니다』●
1593년 이 섬을 발견한 사람이 오가사와라 사다요리(小笠原貞賴)라는 사람이어서 그의 이름을 따서 섬 이름을 지은 것이다. 어떻든 야구선수의 이름과 섬의 이름이 같기 때문에 오가사와라村(촌)에서는 오가사와라 선수에게 관광친선대사를 위촉해 연관을 맺고 있다.
도쿄에서 남쪽으로 1000km나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에 작은 섬 30여 개가 흩어져 있다. 바로 이 섬들이 오가사와라 제도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제2차 세계대전의 격전지로 알려진 「유황도」가 있다. 일본 본토에서 이렇게 아득하게 먼 곳에 떨어져 있는데도 행정구역상으로는 도쿄도(東京都)에 속한다. 이 섬들의 중심지는 「치치지마」, 곧 아버지의 섬(父島)이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50km쯤 떨어진 곳에 「하하지마」, 곧 어머니의 섬(母島)이 있다. 이 두 섬에만 사람이 살고 다른 섬들은 無人島(무인도)다. 치치지마에 1900명쯤, 하하지마에 450명쯤으로 모두 2350명쯤 되는 일본인들이 본토와는 동떨어진 환경에서 살고 있다. 남태평양에 가까운 곳이니 완연한 아열대 기후에 속한다. 그러나 실제론 열대에 가깝다.
섬들은 모두 작아서 보통 지도의 축척으로는 눈에 띄게 그리기가 어려울 정도다. 가장 큰 치치지마의 면적이 23.8km2로 경기도의 영흥도(23.6km2)와 비슷하고, 그보다 조금 작은 하하지마가 20.21km2로 역시 경기도의 덕적도(20.6km2)와 비슷하다.
이렇게 먼 곳에 있는 오가사와라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 먼 곳에 우리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숨어 있다. 다름 아닌 金玉均(김옥균)이 바로 이곳에서 일본 정부에 의해 만 2년 동안이나 억울하게 귀양살이를 해야 했던 것이다. 조선 사람인 그가 왜 일본 정부에 의해 이 먼 곳에 유배돼 갇혀 살아야 했을까.
金玉均 2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
1884년 12월4일, 부패와 무능으로 스러져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고 분연히 일으켰던 쿠데타가 三日天下(삼일천하)로 끝이 나자, 주동자인 金玉均은 朴泳孝(박영효) 등과 함께 천신만고 끝에 일본에 망명하게 된다. 朴泳孝, 徐光範(서광범), 徐載弼(서재필)은 곧 미국으로 떠나고 일본에 남게 된 그는, 일본에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일본을 대표하는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같은 지식인들의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일본에서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조선침공계획을 세우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사회주의자 다루이도기치(樽井藤吉)의 조선침공계획, 후쿠오카 도야마 미쓰루(頭山滿)를 중심으로 한 玄洋社(현양사) 일파의 조선침공계획, 그리고 자유당 左派(좌파) 오이겐타로(大井憲太郞) 일파의 조선침공계획이 그것이다.
이들은 金玉均과 접촉하면서 그를 앞세워 조선에 쳐들어갈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속뜻을 알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특히 이들 가운데 자유당 左派의 일부는 거사자금을 모은다는 핑계로 강도짓을 하는 등 不法(불법)을 저지르다가 계획이 밝혀져 주동자들이 체포되는데, 이것을 「오사카 사건」이라고 불렀다. 그들도 金玉均을 앞세워 조선에 침공하려 했으나 그는 휩쓸리지 않고 냉담하게 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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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치지마 전경. 이곳이 오가사와라 제도의 중심지다. |
金玉均에게 내려진 국외추방령
그러나 조선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金玉均이 일본의 장수들을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올 것이란 소문이 파다했다. 조선정부는 그가 망명한 직후 徐相雨(서상우)와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보내 그를 인도해 줄 것을 요구했다(1885년 2월). 그 뜻이 관철되지 않자 조선은 자객 張殷奎(장은규)를 보냈고, 이 계획이 실패하자 이듬해 2월엔 高宗(고종)이 직접 자객 池運永(지운영)을 보냈으나 이것마저 허사로 끝났다.
한편 淸(청)나라 정부는 조선과 협의 하에 일본주재공사 徐相祖(서상조)를 시켜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일본 外務卿(외무경·외교부 장관)에게 金玉均을 上海(상해)로 유인해서 체포하자고 요구한다(1886년 1월).
이렇게 두 나라의 압력을 받고 곤란해진 일본은 金玉均을 국외로 추방한다는 묘안을 짜낸다. 이때부터 사방을 둘러봐도 의지할 곳이 없는 망명객 金玉均에게는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이 절박하게 다가온다.
1886년 6월2일, 미시마 미치쓰네(三島通庸) 일본 경시총감은 정부의 명령을 받아 金玉均에게 퇴거명령을 전한다. 6월11일 內相(내상)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그에게 15일 이내에 國外退去(국외퇴거)를 명령한다.
뜻밖의 명령을 받은 金玉均은 놀라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총리와 이노우에(井上馨) 외무경에게 호소의 편지를 보았으나 무시당하고 말았다.
답답해진 金玉均은 자신을 잡아 오라고 자객을 보낸 高宗에게 長文(장문)의 上奏文(상주문)을 보내고(1886년 7월 초순), 역시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는 淸나라의 李鴻章(이홍장)에게 긴 편지를 보내며(7월 중순), 한편으로는 설득하고 한편으로는 사정해 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다행히 이런 편지가 일본 언론에 공개되자 여론은 일본 정부의 처사가 부당함을 소리 높이 외쳐 주었다. 이런 여론에 힘입어 일본 정부는 그를 국외로 추방하는 대신 머나먼 남쪽의 絶海孤島(절해고도) 오가사와라에 유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외무대보에게 구명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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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균. 오가사와라 유배 당시보다 3~4년 뒤에 찍은 것. |
그는 머나먼 南洋(남양)에 끌려가기 싫어서 미국이나 프랑스로 건너갈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돈이 문제였다. 다른 땐 돈을 대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럭저럭 살아 나갈 수 있었는데, 이번엔 그만한 돈을 대겠다는 사람이 선뜻 나서지 않았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일본 정부가 金玉均의 후원자들에게 뒤로 손을 써서 돈을 주지 못하게 한 게 아닌가 여겨진다. 물론 작은 정성을 내놓겠다는 사람이 나서기는 했지만.
망연자실한 金玉均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총리와 내무경에게 살려 달라고 간절한 편지를 보냈으나 무시당한 뒤, 그는 외무대보(外務大輔) 요시다 기요나리(吉田淸成)에게 도와주기를 간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번에도 답장이 없었다. 그래도 그는 절박한 내용의 편지를 그에게 연달아 사흘간이나 보낸다. 6월18일 두 번째 보낸 편지를 보자.
<요시다 대인 각하
어제 올린 편지는 곧 받아서 자세히 읽으셨습니까. 玉均은 지금 앞길이 막히는 절박한 상황을 당했으나 호소할 곳도 없고 구차한 일을 피할 길도 없습니다. 이에 또 거친 편지를 올리오니 천만 번을 빌건대 각하께서 살아날 방편을 지시하셔서 이 급박함에서 저를 구해 주시옵소서.
만약 각하께서 (저를 도우시기에) 혹시 불편하신 일이 있으시다면, 또 혹시 각하께서도 역시 저를 버리신다면 저 또한 이 형세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일이옵니다. 곧 玉均의 명맥을 보전하기 어려운 運(운)이오니 다시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그러나 玉均은 각하께서 평일에 의를 존숭함을 중히 여기시는 것을 특별히 믿사옵고, 이에 이르러 우러러 하소연하오니 비옵건대 곧 답을 내리어 주옵소서. 만약 답을 내리지 않으신다면 玉均은 각하께서 저를 버리시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 채로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18일 아침 金玉均 올림>
얼마나 절박했으면 「선 채로 기다리겠다」고 했을까. 그가 이렇게 절박한 편지를 보냈는데도 요시다에게선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개처럼 끌려 나가 배에 태워져
8월8일, 그가 감금됐던 별장에서 끌려 나가는 모습 또한 비참하다. 당시의 일본 신문들과 경찰의 보고를 종합하면 상황은 다음과 같다.
8일 아침 일찍 경찰 30여 명이 金玉均을 구치하고 있던 별장에 들이닥쳐 곧바로 명령을 집행하려고 하자, 金玉均은 잠옷을 입은 채로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를 보호하고 있던 서생 4명이 그를 끌고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경찰과 그들 사이에 일시 소동이 벌어져 서생 한 명이 상처를 입었다.
경찰은 金玉均을 둘러싼 서생들을 완력으로 떼어 놓고 그를 伊勢山의 언덕 위에서 아래까지 끌고 내려왔다. 신도 신지 않고 모자도 쓰지 않은 채로였다. 그는 개처럼 그렇게 끌려나와 마차에 태워져서 부둣가에 가서 작은 배에 옮겨졌고, 그 배로 항내에 정박해 있던 히데사토마루(秀鄕丸)에 보내졌다.
당시 경찰 책임자였던 덴겐지로(田健治郞)의 전기에는 그때 상황이 이렇게 기술돼 있다.
<金의 막료와 그 후원자인 내지의 志士는 맹렬히 그것을 반대했고, 金도 역시 전에 했던 약속을 번복해서 먼 섬에 가는 것을 거절했지만, 이때 덴경 부장(田警部長)의 태도는 자못 준열함을 극해서 마쓰모토 경부(松本警部) 외에 수명의 순사를 시켜서, 울면서 저항함에도 불구하고 8월8일 강제로 히데사토마루로 납치해서 오가사와라 섬에 보냈다. 당시 입회했던 다수의 지사는 경부장의 무자비한 취급에 분개하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田健治郞傳」 p.55~56)>
경찰 책임자의 전기에 이런 글이 자랑스럽게 실려 있는 걸 보면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만하다. 어쨌든 그는 이 일을 잘 처리했다고 해서 상급자의 눈에 들어 승승장구했다. 그는 후에 귀족원 의원, 대만 총독을 거쳐 農商務大臣(농상무대신)에까지 이르렀다.
2등 객실에 몸을 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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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가사와라마루 2등 선실 내부. 서로 발과 머리가 닿지 않도록 잘 정리돼 있다. |
사전에 알아본 바로는 2등 객실은 그냥 넓은 방이어서 승객들이 눕거나 앉아서 간다고 한다. 나는 예전에 흑산도로 가는 작은 배를 타고 한방에서 승객들이 멀미를 하다 못해, 나중엔 숫제 낯모르는 남녀가 서로 끌어안고 간 경험이 있다. 그러면 멀미가 사라진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혹시 일본의 젊은 여자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해서,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나에게 배정된 C데크 2등 선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선실에 들어서는 순간 기대나 걱정이 사라졌다. 일본 사람들이 작은 일에도 얼마나 정확한지 한 사람이 누울만 한 넓이에, 깔고 잘 담요를 반듯하게 접어서 깔아 놓고, 그 위엔 덮고 잘 담요를 발치에 반듯하게 접어 놓았다. 베개의 위치는 한쪽으로 정해서 줄을 맞춰 놓았다. 발과 발이 서로 맞닿도록 자리를 마련해 놓아서 다른 사람의 발이 내 머리나 입 가까이 올 수 없도록 해놓았다. 중간중간에 놓여 있는 노란 양은 그릇을 보자 괜히 좀 메슥거렸는데, 토할 때 쓰라는 것이었다.
컵라면과 주먹밥으로 세 끼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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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가사와라마루가 다케시바항에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
나는 선실 가운데쯤에 마련된 내 자리를 찾아 짐을 풀었다. 짐 속에는 내 세 끼 식사가 들어 있었다. 한국에서 미리 준비해 간 컵라면, 도쿄에서 산 삼각주먹밥(오니기리), 그리고 빵, 커피다. 이런 것들로 세 끼를 해결하며 머나 먼 바닷길을 헤쳐 갔다. 일본 사람들이 대부분 먹을 것을 미리 준비해 와서, 일본 사람들처럼 소리 내지 않고 조심조심 먹었다. 단체관광객들은 식당을 이용했다. 배 안에는 식당 외에 매점, 스낵 바, 가라오케 룸 같은 시설이 있었다. 특등실과 1등실은 침대가 마련된 선실로, 운임이 두 배 이상 비쌌다.
배 떠날 시간이 돼서 3층 갑판으로 올라가 봤다. 배는 1분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오전 10시에 떠났다. 도쿄가 점점 멀어지는 걸 보며 또 金玉均 생각을 했다.
金玉均은 사실 일본에서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 죄가 없으니 재판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런 권한이 없는 일본 정부가 그에게 법률에도 명시되지 않은 유배라는 가혹한 형벌을 내린 것이다. 그것도 기한이 명시되지 않은 無期刑(무기형)을.
金玉均, 駐日 각국 공사들에게 구명 호소 편지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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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김옥균이 머물던 요코하마 그랜드 호텔. |
<그러니까 저는 지금 완전히 일본 정부의 손아귀에 있어서 同 정부가 반드시 저를 오가사와라에 보내는 조치를 집행하려고 하지만, 제가 일본의 법률을 범한 일이 없는데도 흡사 죄인처럼 취급한다면, 끝까지 저항해서 일본 정부가 이와 같이 엄중하게 저를 취급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저를 오가사와라에 보낼 것이라면 同 정부는 강제로 저를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권력과 자비를 함께 가지고 계신 각하께서 다소 저를 도와주는 일이 없이, 또 어떤 異說(이설)도 펴지 않고, 이와 같은 조치를 간과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각국 공사들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간과하고 말았다.
이 편지를 보내고 그는 이틀 뒤 순전히 바람의 힘으로만 가는 범선에 실렸다. 배는 가나가와縣(현)에 속해 있는 요코하마에서 도쿄都(도)에 속해 있는 시나가와항(品川港)에 가서 정박했다. 여기서 金玉均과 從者(종자) 李允?(이윤고)의 신병이 경시청으로 넘겨졌다. 일본경찰이 작성한 「明治19年 金玉均護送資料」를 보면 그날 반가운 사람들을 만난 것으로 돼 있다.
<시나가와에서 정박 중에 (마침 일본에 와 있던) 朴泳孝·鄭蘭敎·柳赫魯·申應熙 등이 면회 왔다. 네 사람은 일단 돌아갔다가 오후 6시경, 다시 모여 와서 金玉均과 술을 마셨는데 밤 12시까지 계속됐다고 한다>
다른 자료에는, 손님들이 돌아간 후에 金玉均은 이윤고를 시켜서 그릇을 가져오게 한 뒤 토해 내고 나서도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럴 것이다. 참 심란했을 것이다. 같은 처지의 동료들을 만났으니 반갑기도 했겠지만, 한쪽은 머나 먼 곳으로 귀양 가는 신세고, 다른 한쪽은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참 안됐다면서 위로하는 처지였을 테니, 위로받는 쪽에선 술이 술술 넘어갈 리 없었을 것이다. 다 같이 조국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신세건만 어찌해서 이렇게 처지가 갈렸을까.
이튿날인 8월9일, 마침내 배가 떴다. 시원한 東風(동풍)이 불어 왔다. 바람을 잔뜩 받은 범선은 쏜살같이 바다 한가운데로 미끄러져 나아갔다. 지긋지긋하던 도쿄가 점점 멀어져 갔다. 금방이면 오가사와라에 닿을 것 같았다. 8월10일, 아득해진 도쿄만을 바라보면서 金玉均은 詩를 한 수 지었다.
<울적하게 伊勢山(이세산)에 잡혀 있던 몸
아무런 속박 없이 성문을 떠나네
하늘도 푸르러라 東風은 건듯 불고
천리 밖 오가사와라 하루면 돌겠네
(鬱鬱拘囚伊勢山 不妨推縛出??
天空好與東風便 千里笠原一日還)>
金玉均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 같다. 우선은 속박에서 풀려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서 갔다가 하루 만에 돌아오고 싶었을 것이다.
폭풍 만나 죽을 뻔해
당시 호송을 맡고 있던 경찰은 그의 船上(선상)생활에 대해 『배가 떠난 후, 천기가 청명하고 바람이 잔잔한 날에는 갑판 위에서 바둑을 두고, 혹은 방에 들어가 책을 보기도 하고, 또는 遊戱(유희)를 하기도 하며, 식사도 다름없이 잘 하고 있으나 다만 때때로, 本職(본직)이나 손님에게, 「일본 정부는 무정하다」, 「믿을 수 없다」며… 자주 폭언을 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이런 선상생활은 곧 깨지고 만다. 며칠간 순풍에 돛 단 듯이 잘 달리던 배가 느닷없이 폭풍을 만나 생사간을 넘나들었던 것이다. 당시 경찰보고와 신문보도를 보면 시나가와를 떠난 히데사토마루는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배에 탄 사람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나 다행히 침몰을 면해서 겨우 살아났다. 모두가 뱃멀미에 시달려 밥을 못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가사와라 눈앞에 두고 6일간 빙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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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지 시대 요코하마항에 정박해 있던 선박들. 범선의 모습이 보인다. |
오죽하면 도착해서 바로 쓴 편지에 『소생이 前生(전생)에 惡業(악업)을 많이 지어 현재 받고 있는 이 고초는 그 악을 되받는 것이어서 오히려 생명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 다행일 뿐입니다』라고 했을까.
범선 히데사토마루는, 이렇게 폭풍을 만나는 바람에 보통 6일이면 닿는 거리를 21일이나 바다에서 시달린 끝에 8월 29일 오후 6시20분에야 마침내 오가사와라 제도 치치지마의 후타미항(二見港)에 닻을 내리게 됐다.
내가 탄 오가사와라마루는 밤바다를 가르며 질주하고 있었다. 뱃전에 부서지는 파도가 하얗게 튀어 까만 밤바다에 수묵화를 그려 놓은 것 같았다. 갑판에 올라가 밤하늘을 바라보니 별들이 그만 머리 위로 와르르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은하수는 냇물에 밀가루를 풀어 놓은 것처럼 희뿌연 띠를 이루며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얼마 만에 보는 밤하늘의 모습인가! 승무원들은, 승객들이 별을 보기 좋게 하려고 배에 달린 외등을 일부러 꺼주었다. 나는 칠흑 같은 밤하늘과 밤바다를 바라보며, 나라를 지극히 사랑한 한 젊은 애국자가 이 낯선 바다에서 폭풍에 시달리며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들며 고초를 겪던 모습을 떠올려 봤다.
배는 아주 얌전하게 달렸다. 파도도 없었다. 그러나 선실에 들어와 누우니 등허리로 일렁이는 바다의 움직임이 더 크게 느껴졌다. 속이 좀 불안해졌다. 조용하고 얌전하게 자는 일본 사람들처럼 나도 곱게 잠들기를 바라며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일본 사람들은 섬 여행에 익숙해서인지 뱃멀미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매운 컵라면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아침에 컵라면을 먹었다. 辛(신)라면이었다. 매콤한 게 정신을 퍼뜩 들게 했다. 金玉均처럼 半生半死(반생반사)의 지경까지는 안 갔지만 자고 일어나는 것이 불분명하게 오랜 시간을 자다 말다 했더니 정신이 흐리멍텅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매운맛을 보니 뒷맛이 개운했다.辛라면 하면 생각나는 게 있다. 나는 라면회사가 이 「辛」자를 자기네 기업주의 姓氏에서 따온 줄 알았다. 그런데 일본에 가서 보니 「辛라면」, 「辛우동」 이런 상품들이 수두룩했다. 고유명사가 아니고 보통명사였다. 알고 보니 매운맛이 나는 면류를 그렇게 불렀다. 辛이 「매울 신」 자여서 그 뜻을 딴 것이었다.
「너구리」 우동도 그렇다. 나는 『맞다, 내 너구리!』 하면서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는 것을 보면서, 「이름을 참 잘 지었구나」 했다. 그러나 그것도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일본엔 「너구리(다누키) 우동」, 「너구리 소바」가 이미 일반명사로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우동에 튀김가루를 뿌려 넣은 게 너구리 우동이다. 여우(기쓰네) 우동과 소바도 있다. 유부를 넣은 것이다. 이렇게 일본과 우리나라는 先後(선후)와 愛憎(애증)이 뒤엉켜 있기 일쑤다.
아침을 먹고 갑판에 나가 보니 해가 높이 솟았다. 깜빡 日出(일출)을 놓친 것이다. 그러나 먼 바다에 구름이 끼어 일출 모습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바다 빛깔이 짙푸르다 못해 숫제 검었다.
멀리 오가사와라가 보였다. 배는 왼쪽에 섬을 두고 오래도록 달렸다. 金玉均이 탄 범선은 이렇게 섬을 눈앞에 두고도 6일간을 표류했다. 雪上加霜(설상가상)으로 불운에 불운이 겹친 것이었다.
바다 바람은 후텁지근했다. 여름엔 30℃를 넘나들고 겨울이라야 최저기온이 11℃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다. 겨울의 평균 최고기온은 23℃ 정도다. 겨울이 없는 常夏(상하)의 섬나라, 언제나 해수욕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관광객들에겐, 먼 거리만 아니라면 하와이보다 더 좋은 곳이다. 그렇게 좋은 곳이 金玉均에게는 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金玉均의 생각이 移入(이입)돼서 그런지, 배에서 본 오가사와라의 아름다운 해안이 눈에 썩 들어오지 않았다.
이 諸島(제도)의 중심지 치치지마(父島)가 눈앞에 다가온다. 날씨는 쾌청한데 훅 하고 열기가 몰려온다. 한국에서 겨우 무더위를 피해서 왔는데 여기 와서 진짜 무더위를 만난 것 같다. 여우 굴을 피해 호랑이 굴로 온 셈이다. 아열대 기후라고 하지만 열대에 가깝다.
깨끗한 바다에, 깨끗한 부두. 여기가 일본인 것을 새삼 일깨워 준다. 그러나 마음은 급하다. 金玉均은 여기서 내려 그 지친 몸을 이끌고 어디 가서 긴 한숨을 쉬며 다리를 뻗었을까.
9월28일 오전 11시40분, 6700t의 오가사와라마루는 예정보다 10분 늦게 치치지마의 후타미항(二見港)에 도착했다. 도착하기 전에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 배가 10분 늦어지고 있어서, 이 배에서 내리는 손님의 일부를 받아 치치지마에서 하하지마로 떠나는 배도, 12시30분 예정시간보다 10분 늦게 12시40분에 떠난다고. 그까짓 10분, 뭐 그냥 그대로 떠나면 어떤가. 아니, 아무 말도 않고 있다가 그냥 10분 늦게 떠난다고 누가 시비할 사람 있을까.
일본에 오면 모든 게 자로 잰 듯 너무 정확하게 움직이니까 어느 땐 숨이 막힐 것 같다. 북한에 가서 「아리랑」 공연을 보고 온 사람들이 「10만이 넘는 사람들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는 걸 보고 놀라기보다 숨이 막히더라」고 한 얘기를 들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어디서나 비슷비슷한 2차색의 옷을 입고, 같은 표정을 지으며, 질서와 규칙을 잘 지키고, 튀지 않고 똑같이 사는 모습을 보면 때론 숨이 막힌다.
金玉均, 출장소장 관사에서 묵어
金玉均은 21일 만에 범선에서 내려서 이 마을에 하나밖에 없던 히라이데이조(平井貞藏)의 여관에 잠시 들어가 허리를 폈다. 그러나 그 주인이 자진해서 『이곳은 너무 좁고 누추해서 모실 만한 곳이 못 되니 관사로 모시는 게 어떻겠느냐』고, 오가사와라 東京府出張所長(동경부출장소장)이던 다치키 가네요시(立木兼善)에게 건의했다.
다치키 소장은 산수화를 잘 그리고 글도 잘 쓰는 사람이었는데, 金玉均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건의는 그날로 받아들여져 곧 출장소 관사에서 그를 수행했던 이윤고와 묵게 됐다.
경찰 보고를 보면, 金玉均은 그런대로 낯선 곳에서의 귀양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고는, 『섬에 도착한 후에는 항해 중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피로한 기색 없이 이웃들과 서로 왕래하고, 상인 서생들과 바둑을 두고, 담소하고, 또는 상인 등과 함께 당시 「오가사와라의 로빈슨 크루소」라고 불리던 성공한 개척자 다나카 쓰루요시(田中鶴吉)의 집에도 놀러가고, 때로는 산야에 약초를 캐러 가기도 하고,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가기도 하고, 날마다 적당한 운동을 하면서, 울적했던 마음을 풀고 있고, 전날의 불평도 줄어들었다』라고 듣기 좋게 쓰고 있다.
그러나 金玉均이 친구들에게 보낸 첫 편지를 보면 그가 그렇게 성공적인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 편지의 일부를 살펴본다.
『최고로 치는 먹을거리는 거북이입니다』
<玉均은 배를 탄 지 무려 23일(사실은 21일) 만에 비로소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바다에서 온갖 위험을 다 겪어서 그 때문에 앓고 있던 여러 병들이 한꺼번에 극도로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자리에 오래도록 머뭇거리고 있습니다만, 한 가닥 생명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할까요. 가소롭습니다. 이 땅에 와서 경황을 보니 살아 나가는 데 걱정되는 게 많습니다. 샘물은 극도로 나빠서 맛은 소금을 타 놓은 것 같고, 색은 누런데 흙탕물 같습니다. 하루 한 끼 먹는 것도 밥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나지 않습니다. 저처럼 평소에 체증을 가지고 있던 자는 정말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날씨가 뜨겁기 보통이 아닙니다. 매일 사나운 바람이 두세 차례 불어오고 소나기가 들이닥치면 갑자기 한기와 전율이 느껴져서 참을 수가 없고, 땀을 뿌리며 헐떡이게 돼서 갑자기 두꺼운 옷을 끼어 입어야 합니다. 또 저처럼 류머티즘을 앓고 있는 사람에겐 가장 나쁜 곳입니다. 중요한 醫藥(의약)은 단지 명색뿐이고 소나 말의 병을 치료하듯 하니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바람이 또 난폭하게 불어올 때엔 사람이나 물건, 모래와 자갈이 정처 없이 휘날리지 않는 것이 없고 가옥도 종종 넘어집니다. 이 한 달 안에도 한두 번은 겪었으니 두렵고 두렵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집도 달팽이집처럼 낮게 짓고, 기둥을 세우지 않고 네 귀를 받치고 있어서 집에 들어가면 구부리고 펴기가 부자유스러운 형편입니다.
매일 날이 새면 파리의 함성이 우레가 우는 것 같고, 무리지어 날면 하늘을 가리니 아주 위험한 형세입니다. 한낮에도 장막을 치지 않으면 서로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개미의 종류도 아주 많습니다. 아주 작고 아주 가는 놈들이 정말 무섭습니다. 홀로 다니는 놈들은 거의 그 형체를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만일 먹을 것이라도 있으면, 달고 시고 쓰고 맵고를 가리지 않고, 순식간에 긴 줄을 서서 달려오는데, 무리가 모이면 곧 땅이 시커멓게 됩니다. 심하면 사람의 피부를 깨무는데, 가렵기가 보통이 아닙니다.
먹을거리에 이르러서는, 소가 있으나 잡지는 않습니다. 낮에 숲속에 풀어 놓고 먹이는 놈이라 잡아도 근육이 딱딱해서 이가 들어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직 최고로 치는 먹을거리는 거북이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낮에 바다에 가서 거북이를 잡아 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한 마리를 지고 와서 팔려고 했습니다. 놈을 보니 크기가 두레반만 한데 등에 무늬가 영롱해서 사람이 비쳐 보였습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보는데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것 같았습니다. 玉均은 곧 몇 마디 말로 그를 조문했습니다.
『거북아, 거북아, 네 무늬를 살펴서 모양을 본뜨고, 네 靈性(영성)을 믿고 점을 쳤노라. 네 어찌 그 옛날 영물스럽고 신령한 자가 아니더냐.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슬프다, 덕을 잃어서 먹히게 되었구나! 조상에게 바치게 됨을 삼가지 말지어다. 누가 너를 삶을 것인지도 말하지 말지어다. 거북아, 거북아, 어찌하면 좋은가! 글을 지어 올리고 한 끼 제물로 바칠까 하노라』>
안내자 시마다 기누코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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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관사 자리로 추정되는 곳. 큰 나무 한 그루가 그대로 있다. |
아주 가냘프게 생긴 여성이어서 「더운 날씨에 여기저기 함께 가자고 하기가 어렵겠다」 생각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시마다씨는 일본의 모범적인 공무원이 어느 정도인지 나에게 본때를 보여 줬다. 시마다씨는 나에게 꼭 긴소매 옷, 모자, 선글라스를 준비해 오라고 당부했다. 만나고 보니 막상 자신은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지 않았다. 나도 한 가지를 위반했는데, 긴소매 옷을 입고 다니지 않았다.
시마다씨는 나를 만나자마자 출장소의 관사가 있던 자리로 안내했다. 지도에 장소까지 표시해 와서 설명했다.
『琴秉洞(금병동·80) 선생이 말한 자리는 여긴데, 여기 사시는 분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몇 군데가 더 나옵니다』
琴秉洞 선생은 「金玉均과 日本」이라는 방대한 책(1025페이지)을 일본어로 쓴 在日(재일)교포 학자로, 나를 아주 많이 괴롭게 한 분이다. 그는 이 책에 金玉均과 일본에 관련된 일본 측 자료를 거의 다 모아 분류하고, 해석하고, 평가해 놓아서 金玉均에 다가가자면 그 책을 읽지 않을 수 없다(이 글 뒤에 붙은 琴秉洞 인터뷰 참조). 그러나 문제는 메이지 시대의 일본어였다. 현대 일본어나 한문은 그럭저럭 사전을 찾아 가며 읽을 수 있는데, 옛날 古문서는 사전에 안 나오는 단어가 더 많았다.
그런데 시마다씨가 비록 모국어지만 그 책을 다 읽고,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전화까지 걸어 다시 의견을 물은데다, 金玉均과 교류했던 사람들의 자손들에게 考證(고증)까지 한 뒤에, 나를 데리고 다니며 설명을 했던 것이다.
金玉均의 발자취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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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기우라 해변. 金玉均은 이 바닷가에 나와 자주 북쪽을 바라봤다고 한다. |
金玉均이 이 섬에 건너온 1886년은, 오가사와라가 일본 정부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척되기 시작한 지 10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다. 1862년에 일본 정부는 처음 이민을 시작했으나 실패해 1년 만에 철수시키고, 1876년에야 국제적으로 일본 영토로 인정을 받고 본토에서 37명을 이민시켰다. 그리고 그 이전에 하와이와 미국 등지에서 먼저 와서 살던 先住民(선주민)들을 1875년에 모두 일본인으로 귀화시켰다. 이런 초창기였으니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았을 때였을 것이다.
金玉均이 도착했던 8월29일, 이 섬을 관할하는 관청은 東京府(동경부) 오가사와라 출장소였다. 그런데 11월에 출장소가 東京府 오가사와라島廳(도청)으로 승격했다. 지금은 東京都오가사와라支廳(지청)이 돼서 바로 그 자리에 있다. 관사는 물론 없어졌다. 옛날의 관사는 아마 이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치치지마의 오무라는 손바닥만 하다. 부두에서 내려 하나밖에 없는 큰길(2차선)을 따라 서남쪽으로 400m쯤 내려가다 보면 세 갈래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같은 폭의 길이 70~80m 쯤 뻗어 있다. 이 길로 돌아서면 왼쪽에 오가사와라 村사무소(村役場)·우편국·경찰서가 나란히 붙어 있다. 그 길의 막다른 곳에 있는 나지막한 2층 흰 건물이 도쿄都의 지청이다. 그러니까 당시의 관사는 이 근처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다치키 도청장, 金玉均의 식비 등 인상 건의
메이지 시대의 사진을 보면 정문 앞에 큰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그중 오른쪽의 한 나무는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다. 지금의 경찰서 부근에 관사가 있었다는 說(설)이 있다. 시마다씨가 새롭게 추정하는 곳은 여기서 조금 떨어져 있다. 지청 정문에서 한 블록 서쪽으로 내려가면 중간에 마당을 사이에 두고 산 밑에 집 두 채가 있는데, 그중 한 군데에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든 金玉均이 도착하자마자 6개월이나 살았던 집은 부두에서 500m 정도, 해안에서 1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 집에서 나서면 바로 코앞에 후타미(二見) 해안의 해수욕장이 펼쳐진다. 물이 얼마나 맑고 깨끗한지 관광객들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나는 옅은 옥색에서부터 짙은 코발트색으로 아롱진 바다를 한참 바라다보았다. 金玉均은 이 바다를 보면서도 아름답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서 옷을 벗고 풍덩 뛰어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내가 죄스러워졌다.
金玉均은 이 집에서 전혀 행복하지 못했다. 적응하기 힘든 환경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일본 정부의 처우가 만족할 만하지 못했다. 그를 이 섬에 보내면서 일본 정부는, 金玉均과 그의 隨從者(수종자)에게 식비로 한 달에 6엔씩 지급하도록 訓令(훈령)으로 정했다.
이 식비는, 혈혈단신으로 직업이 없는 사람에게 시행하던 恤救規則(휼구규칙), 곧 오늘날의 「생활보호법」 같은 것에 준하여 마련된 것이었다. 이런 실정을 보고 가엽게 여긴 다치키 島廳長(도청장)은 곧바로 다카사키 고로쿠(高崎五六) 도쿄지사에게 식비와 잡비를 올려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한다.
그 건의서의 내용은 대강 이렇다.
<원래 절해고도라서 왕래가 불편하기 때문에, 물가도 따라서 비싸졌습니다. 정기선으로 왕래하는 상인도 1박에 35전이나 40전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金玉均과 그 수종자의 식비 월 6원으로는 질 낮은 식품을 제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상의 물품도 內地에 비해서 5~6할 비싸거나 2~3배하는 상태여서 잡비도 4원과 1원으로는 도저히 지불할 수 없어, 金씨 前日의 신원을 생각해서 …식비는 한 명에 10원씩, 평균 잡비는 金씨에게 7원, 從者에게 3원씩 올려 주도록 결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金玉均, 큰 배만 오면 산 속으로 숨어
그가 이 섬에 사는 동안 돈에 시달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柳赫魯(유혁로)가 배편이 있을 때마다 들락거리며 그의 뒤를 봐주었는데 그때마다 본토에서 보내는 후원금품이 전달됐던 것 같다.
문제는 건강이었다. 그는 앞에서 말한 대로 위장병, 류머티즘, 안질에 시달리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특히 오무라는 물이 나빠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그를 불안하게 하는 소문이 있었다. 1886년 11월, 미국 어선이 이 섬에 와서 정박한 일이 있는데 그 선원들이, 장차 중국의 군함이 와서 金玉均을 산 채로 잡아갈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불안해진 金玉均은 오무라를 뜨기로 하고 다치키 島廳長에게 그런 뜻을 전했다. 다치키는 섬 안에서는 그를 어디에든 거주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옮겨 갈 장소를 물색하도록 했다.
金玉均은 섬에서 가장 좋은 물이 나오는 곳을 찾았다. 그곳은 바로 오무라에서 바다 건너 빤히 바라다보이는 오기우라(扇浦) 뒷산 계곡이었다. 그곳은 「렌주다니(連樹谷)」라고 했다. 그는 그 물을 며칠간 먹어 봤다. 맛이 참 좋았다.
그는 그곳에 自費(자비)로 자신이 살 집을 지었다. 이 섬에 올 때부터 이곳의 주택이 달팽이집 같아서 오래 살게 되면 집을 새로 짓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렌주다니로 가기로 했을 때도, 미국으로 추방되지 않는다면 거기서 계속 살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오기우라는 해안의 모습이 부채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오무라보다 먼저 개발된 곳이다. 최초의 행정기관도 여기에 있다가 건너편 오무라로 옮겨졌다. 그때까지 그 주변에 15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는 「렌주가와(連樹川)」라는 작은 내가 흐르는 계곡에 터를 잡고 집을 지었다. 그가 그곳으로 이사한 시기는 1887년 1월에서 2월 사이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가서도 마음 놓고 살 수 없었다. 그가 살던 건너편 후타미항에 큰 배가 들어오면, 자기를 잡으러 온 게 아닌가 해서 뒤에 있는 시구레야마(時雨山) 아래 깊은 계곡 나가다니(長谷) 대피소에 가서 꼭꼭 숨어야 했다. 지금도 그와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의 손자나 증손자들이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그때의 얘기를 전설처럼 말하고 있다.
『배가 들어오면 金玉均은 렌주다니의 집에서 나와 시구레야마나 구레키노야마(桑木山)에 몸을 숨겼습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칼을 들고 金玉均을 지키려고 함께 산에 들어갔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배가 들어올 때는 金玉均과 함께 나흘이고 닷새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할머니가 얘기했지요』(齊藤良二의 말, 琴秉洞, 「金玉均과 日本」, p.396)
정글이 돼버린 金玉均의 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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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균이 1년이나 살았던 렌주다니 집터. 이젠 정글이 됐다. |
<오기우라(扇浦)의 동쪽은 구레키노야마(桑木山)인데 그 계곡을 렌주다니라고 부른다. 산이 급박하고, 계곡이 깊고, 수목이 울창해서 그윽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이 땅은 先年 한국 망명객 金玉均이 살던 땅으로, 玉均은 지금 故人(고인)이 됐지만 그 茅屋(모옥)은 지금도 남아 있다. 合歡花가 노랗고 희게 분분한 곳에 한 서재가 있으니, 처마가 낮고, 창이 밝은데, 쓸어도 먼지 하나 없다. 옛날을 생각하면 그 누가 이곳을 무심히 지나가랴. 이 집터에 접해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다. 시냇물 역시 먹을 수 있다. 지금은 홈통으로 물을 끌어 온 마을에 닿는다>
이제 내가 그곳을 찾을 차례다. 교육위원회의 시마다씨는 여기서 실력을 발휘한다. 시마다씨는 내가 도착하기 전에 사전 조사를 해서 장소를 알아 놓았는데, 당일 아침에 또 확인 답사를 하느라 언덕에서 넘어져서 팔에 상처를 내고 왔다. 긴소매 블라우스에 흙을 많이 묻히고 나타났다. 나는, 「저분이 어디 가서 저 고생을 하고 왔나」 하면서도 그냥 지나쳤다.
우리는 할아버지가 경찰로 있으면서 金玉均을 지켜드렸다는 오키야마 쇼지(沖山昭二·82) 영감의 안내를 받았다. 영감은 정수장 뒤 나가다니(長谷)로 올라가는 도로로 200m쯤 가서 왼쪽 계곡을 보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이 큰 나무 두 그루를 보면 알지요. 이 두 나무 사이로 길이 있었어요. 이 시내를 건너 집터가 있었는데, 어렸을 때 어른들이 「여기서 金玉均이 살았다」고 했어요. 저 밑에 빨래하는 바위가 있지요. 어릴 때 여기서 놀았거든요』
그러나 숲이 너무 우거져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다. 시마다씨는 나를 이끌고 다시 그 도로를 따라 정수장 앞으로 내려가서 사다요리진자(貞賴神社)로 가는 길을 따라 죽 올라갔다. 개척의 碑(비)와 또 다른 오래된 비석이 나왔다. 거기서 계곡 쪽으로 내려가니 아까 오키야마 영감이 가리키던 집터 부근이 보였다. 오래된 바나나 나무, 보리수, 왕대나무들이 꽉 들어차서 도저히 비집고 들어갈 수 없었다.
시마다씨는 난마처럼 엎치고 덮친 대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헤집고 내려가며 나를 보고 「어서 오라」고 했다. 날은 덥고, 땀은 비 오듯 하고, 벌레들은 달려들고, 썩은 대나무는 밟으면 푹푹 빠지는데 시마다씨는 용케 저만큼 가서 나를 오라고 했다.
나는 한 발도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러다가 「아차」 하고 쭉 미끄러졌는데, 시마다씨한테 비상이 걸렸다. 보통보다 두 옥타브는 높을 것 같은 소리를 내더니 순식간에 쫓아와서 준비해 온 약으로 소독을 하고, 약을 발라 줬다. 그리고 밴드까지 붙여 줬다. 그 바람에 나는 그 詩的인 분위기를 느껴 보지 못하고 계곡을 빠져나왔다. 하긴 그 밀림 속에서 무슨 분위기가 나겠는가.
金玉均을 생각하며 눈물 흘리다
우리는 다시 오기우라 바닷가로 나왔다. 金玉均이 바닷가에 나와서 먼 바다를 보며 고국을 그리워했다는 그 자리에 와서 나도 그 바다를 바라봤다. 조선 제일의 학식을 갖춘 사람, 조선 제일의 경륜을 가진 사람, 조선 제일의 책략을 가진 사람, 조선 제일의 결단력을 가진 사람, 조선 제일의 안목을 가진 사람, 조선서 제일 똑똑한 사람, 조선에서 제일 말을 잘하는 사람이, 이 좁은 땅에 와서 얼마나 답답했을까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누구랑 천하대세를 논했을까. 누구랑 망해 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자고 열변을 토했을까. 누구랑 도탄에 빠져 허덕이는 백성들을 어서 구해 내야 한다고 가슴을 치며 답답해했을까. 누구랑 몽매한 대신들과 썩은 벼슬아치들을 몰아 내야 한다고 머리를 맞댔을까. 아아, 누구랑 비명에 간 아버지, 종이 된 아내, 생사를 알 수 없는 딸아이를 생각하며 목 놓아 울었을까.
나는 옛날의 그가 했던 것처럼, 꼭 모자처럼 생긴 바위(烏帽子岩) 너머 북쪽 바다를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 있다가, 준비해 간 도시락을 먹었다. 시마다씨는 이번에도 일본인다웠다. 자기 도시락은 자기 돈으로 사왔던 것이다.
자기는 공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 돈으로 물을 사서 나에게 줬다. 그 정도는 公金(공금)으로 사줄 수 있다고 했다. 시마다씨가 그 당시 일본 총리였더라면 金玉均은 그런 고생을 안 했을 것 같았다. 아니, 우리나라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다.
金玉均은 렌주다니에서 참으로 많은 일을 겪었다. 우선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먹여 주고 가르쳐 줬다. 옛 사람들의 증언을 들으면 아이들 10여 명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가 上海에서 洪鍾宇(홍종우)의 총탄을 맞고 죽을 때까지 그를 따라다니며 뒷바라지를 다했던 와다 노부지로(和田延次郞)를 만난 것도 이 집에서였다. 와다의 회고를 들어 본다.
『내가 아직 철없는 아홉 살 때였습니다. 나는 부모님에 이끌려 오가사와라에 있던 소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해 金玉均씨는 거의 유배와 같은 몸이 되어 우리가 사는 오가사와라라는 孤島에서 恨 많은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영웅이 한가한 일월을 보내고 있다고나 할까, 金씨는 전연 세상 일을 잊은 것처럼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는 어린이들을 많이 불러 모아서 이런저런 물건을 주기도 하고, 장난하며 놀기도 하면서 그날 그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金씨에게 이끌려서 거의 매일 놀러 다니게 됐습니다.
金씨가 수박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에 내가 半里는 되는 우리 집에서 학교에 갈 때 맛있는 수박을 가져다 드리게 됐습니다. 이것이 인연이 돼서 내가 金씨에게 많은 사랑을 받게 됐고, 드디어는 金씨가 사는 곳에서 통학을 하게 됐고…』(民友社, 「金玉均」)
그때의 오기우라 소학교는 지금 정수장이 됐다. 金玉均의 집에서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다.
前 혼인보 슈에이의 방문
金玉均은 가난해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데려다가 일본어 쓰기와 읽기를 가르쳐서 그의 덕에 글을 배워 까막눈을 면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가 섬에 가기 전 해인 1885년에 「오가사와라 폭동」이란 게 일어났는데, 말이 폭동이지 바른소리하는 백성들에게 관리들이 罪를 뒤집어씌운 사건이었다. 그 바람에 마을 주민 7명이 억울하게 잡혀 가 본토에서 재판을 받게 됐다. 이렇게 되니 그들의 자녀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고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됐다.
金玉均은 그들을 데려다가 먹이고 가르쳤다. 그 후 재판에서 억울함이 풀려 마을 사람들이 無罪(무죄)판결을 받고 돌아오게 됐는데, 金玉均이 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보고 더욱 친하게 지내게 됐다고 한다. 그때의 아이들은 자라서 金玉均을 은인으로 생각하며 고마워하면서도, 다만 훌륭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몰랐다고 한다.
바둑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바둑을 참 좋아했다. 오죽하면 그를 강제연행해서 오가사와라로 떠나 보내던 경찰관이 바둑판을 선물했을까. 그는 그 바둑판으로 흔들리는 배 안에서도 바둑을 두며 왔다. 이 섬에 와서 그는 바둑으로 소일을 했다. 시냇물 소리 상쾌하게 들리는 계곡에 와서는 마치 신선놀음이라도 하는 양 바둑을 많이 두었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살면서 그들에게 바둑을 가르쳤다. 그 덕분에 아이들 중 몇몇은 이 섬에서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되어 제법 행세를 했다.
뭐니뭐니 해도 바둑 얘기라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의 「國手(국수)」와 같은 칭호를 일본에서는 「혼인보(本因坊)」라고 하는데, 前 혼인보 슈에이(秀榮)가 1887년 2월, 金玉均이 렌주다니 계곡에 있을 때 그의 집을 不遠千里(불원천리)하고 찾아와 5월까지 석 달간이나 함께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吳淸源(오청원)은 슈에이가 오가사와라에 가서 金玉均과 석 달간 무려 一萬局(일만국)을 두었다고 그의 책 「莫愁」에서 밝히고 있다. 슈에이가 거기까지 찾아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본의 혼인보 타이틀을 놓고 다소 혼선이 있었을 때 金玉均이 나서서, 중재를 잘해줘서 두 사람은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됐다고 한다. 金玉均의 바둑 실력은 프로 초단에 두 점을 놓는 실력이라고 한다. 그 정도면 아마추어 5단 실력이라고 한다.
글씨 팔아 조선인 유학생들 도와
5월이 돼서 슈에이가 떠나려 하자 金玉均은 그에게 글 한 장을 지어 주었다.
<혼인보 슈에이는 나의 스승이요, 또한 나의 벗이다. 비단 碁道(기도)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의리에 있어서는 벗인 것이다. 내가 丙戌年(병술년) 가을에 南海 오가사와라 섬으로 쫓겨나 絶海孤島에서 더불어 벗하며 살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그가 다음해인 丁亥年(정해년) 봄에 홀연히 온 것은 내가 窮塞(궁색)한 섬에서 외롭게 사는 것을 염려해서다. 그 出入(출입)의 義氣(의기)가 어찌 나에게만 감흥이 있겠는가. 함께 보낸 3개월, 내가 사는 어지러운 산 속에는 낮인 데도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매일 흙을 나르고 잡초를 뽑아 한 작은 정원을 만들며 그대와 내가 웃으며 소일하게 됐다. 초여름에 배가 와서 그대가 도쿄로 돌아가려함에 글을 써서 주노니, 후일에 다시 만나 손을 잡을 때 웃음거리로 삼으려 한다>
슈에이는 1년 뒤 金玉均이 다시 홋카이도로 쫓겨 가게 됐을 때, 함께 만나 손을 잡았지만 그때 그 글을 보면서 한바탕 웃었을까, 아니면 울었을까, 알 길이 없다. 의리의 일본 사나이 슈에이는 그때도 삿포로까지 함께 가서 위로한다.
그러나 지금 이 렌주다니 계곡에선, 아이들의 재깔대는 웃음소리도, 영웅들의 호탕한 웃음소리도, 세월을 잊은 신선들의 바둑 돌 놓는 소리도,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다. 다만, 열대의 정글이 돼버린 숲속에선 이름 모를 새소리만 들리고, 그 맑다던 개울엔 해묵은 푸른 이끼만 가득하다. 나는 그냥 주저앉고만 싶다.
金玉均은 이곳에 와서 많은 사람들에게 글씨를 써서 주었다. 소학교나 우편국에 그의 글씨가 걸렸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본토로 疏開(소개)가 있었던데다 미군의 공습으로 그 글씨들이 지금은 이곳에 남아 있는 게 없다. 이 지역 토박이들 가운데, 『우리 집에도 金玉均의 글씨가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특기할 것은 그가 글씨를 써서 도쿄에 내다 판 돈으로 게이오기슈쿠(慶應義塾)에 다니던 조선인 학생 10여 명을 그 난중에 도와줬다는 사실이다.
하하지마의 金玉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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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균이 하하지마에서 신세를 졌던 스즈키 미키조의 별채 터. |
1888년 1월, 결국 그는 거기서 남쪽으로 50km쯤 떨어진 하하지마(母島)로 이주하는데, 아마 일본 정부가 내지요양의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는 대신에 용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때 수행원을 데리고 갔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혼자 건너갔던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金玉均의 흔적을 찾으러 다시 배를 타고 하하지마로 갔다. 두 시간쯤 걸렸다. 그까짓 건 배타는 것도 아니었다.
오키항(沖港)에 오가사와라촌 하하지마 지소장 곤노 미쓰로(今野滿)씨와 관광협회의 사카이리유코(坂入祐子)여사가 마중 나왔다.
곤노 지소장의 명함엔 배 부분이 노란 낯선 작은 새 사진이 실려 있었다. 길이가 14cm밖에 되지 않는 작은 새지만 이 섬에만 사는 고유종으로 「하하지마메구로」라고 한다. 이 새는 치치지마에도 없다고 한다.
이 諸島에는 동식물 고유종이 많다. 어딜 가나 문어처럼 생긴 타코노키(문어나무)가 즐비하다. 나무 아랫부분에서 문어 다리처럼 생긴, 길다란 도끼 자루 같은 것이 여러 개 나오는데 이것이 땅에 닿으면 뿌리를 박는다. 언뜻 보면 문어가 서서 걸어다니는 것처럼 보여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하하지마의 거리는 치치지마보더 더 간단했다. 오키 항구를 둘러싸고 두 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모두 450명쯤 산다고 했다. 과거엔 여러 마을에 사람이 흩어져 살았는데, 지금은 일도일촌(一島一村)의 원칙에 따라 한 곳에 모여 살게 됐다고 한다.
두 사람은 나를 데리고 金玉均이 처음 묵었던 하하지마支廳 출장소장 하기와라 데쓰(萩原轍)의 관사 자리로 갔다. 바닷가에서 200m쯤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왼쪽에 하하지마小中學校가 보이는데 이곳이 당시 하하지마 오키무라소학교(沖村小學校)가 있던 자리였다. 金玉均은 이 학교에서 직접 교실에 들어가 어린이들에게 서예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의 글씨가 입구에 붙어 있어서 학생들이 언제나 보고 다녔다고 한다.
지금 그 자리에는 현대식 건물이 지어졌다. 서양인 교사가 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옛날의 金玉均처럼.
바로 그 앞에 옛 관사 자리가 있었는데, 그 공터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뽕나무과의 교목 가주마루(榕樹)와 야자수들이 잡초 가운데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거기서 15m쯤 내려오니 당시 우체국장 와다 겐조(和田元藏)의 집터가 나왔다. 그곳에도 잡초만 무성했다. 金玉均은 이 별채에서도 살았다.
『훌륭한 사람이 한국에서 우리 집에 亡命 와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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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가 떠날 때 이 섬의 여러 배들이 따라 나오며 배웅하고 있다. |
그가 신세를 많이 졌다는 스즈키 미키조의 손녀 스즈키 교코(京子·84) 여사는 아직까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살고 있었다. 바로 바닷가에 면한 집이었는데, 당시 金玉均이 바닷가에 나와 먼 바다를 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고 한다. 그 집 앞으로 작은 실개천이 흘러 바다로 들어갔다. 물웅덩이에선 손바닥만 한 물고기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놀고 있었다.
교코씨는 얼마 전까지 민박을 운영했다고 한다. 金玉均에 관한 얘기는 어른들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훌륭한 사람이 한국에서 우리 집에 亡命 와서 살았고, 벽장 안에 그가 써 준 글씨가 가득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집터뿐이다.
스즈키 교코씨는 그의 집 뒤 별채가 있던 곳을 안내했다. 그 집 둘레에 스즈키 미키조의 자손들이 모여 살고 있었는데, 그 터만 비어 있었다. 터 입구에 「엔슈마치(遠州町)」란 옛 지명을 쓴 팻말이 박혀 있었다.
이 밖에 그는 한적한 산골인 나가하마(長浜)의 기쿠치 기헤에(菊池義兵衛)의 집에서 살았다. 북쪽으로 가는 단 한 줄기 도로를 달리다가 나가하마 터널을 빠져나가면 「롱 비치(LONG BEACH)」라는 표지판이 나오지만 먼 바다만 바라다보일 뿐 내려가는 길이 없다. 당시에 이곳에서 개척민 여섯 가구가 살았다는데 그들이 경작하던 땅은 다시 정글이 돼버렸다고 한다.
나가하마 못 미처에 니시우라(西浦)가 있는데, 거기엔 진입로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길도 곧 끊기고 열대의 수림이 앞을 가로막아서 다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저 아래 해안에 당시 유력자였던 기쿠치 도라타로(菊池虎太郞)의 집이 있었는데 그는 그 집 별채에서도 살았다. 거기 살면서 자주 바닷가에 나가 아이들과 놀았다고 한다.
金玉均은 하하지마에 와서 6개월밖에 살지 않았지만 섬사람들에겐 치치지마에서보다 더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1888년 7월 하순, 金玉均은 恨 많은 오가사와라를 떠나 또 恨 많은 홋카이도(北海島)로 가게 된다. 그는 하하지마에서 치치지마로 돌아와 일단 요코하마(橫濱)까지 갔다가, 다시 하코다테항(函館港)으로 가서 또 2년 가까운 세월을 홋카이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이번에는 열대지방이 아니라 지독하게 추운 곳이었다.
일본 정부가 그런 자비를 베푼 주된 이유는, 金玉均이 內地에서 요양을 하도록 해달라고 여러 차례 애원을 했는데, 절해고도에서 병을 치료하기 어려워, 이를 불쌍히 여겨 그의 고국과 날씨가 비슷한 홋카이도에서 생활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이제 오가사와라를 떠나야 했다. 치치지마에서 2박3일, 하하지마에서 1박2일을 살면서, 짧은 시간이지만 金玉均의 恨이 내 나라의 恨이 돼서 내 가슴을 묵직하게 누르고, 그 속에 들어와 앉았다.
바다에서 들려오는 金玉均의 목소리
오가사와라와 金玉均의 사적을 조금이라도 더 보여 주려고 애쓴 시마다 기누코씨와도 헤어질 시간이 됐다. 시마다씨는 휴일인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헌신적으로, 일과시간이 넘어서까지 조금의 불평도 없이 땀을 뻘뻘 흘리며 일했다. 우리가 헤어질 때가 가까워 오자 시마다씨는 나에게 다가와 조그맣게 말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공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니까, 혹시 선물을 주신다면 사양하겠습니다』
나는 배가 떠날 때의 장관을 잊을 수 없다. 후타미항에서 3박을 하고 다시 도쿄로 향하는 오가사와라마루가 부두를 떠나자, 항구에 정박해 있던 12척이나 되는 배들이 우리 배를 좌우 앞뒤로 따라오면서 배에 탄 사람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미야모토씨, 고맙습니다! 사요나라!』
작은 배에 탄 사람들은 자기 손님들을 향해 하나같이 목이 터져라 외쳐 댔다. 이런 배웅이 이 섬의 전통이라고 한다. 그 작은 배들은 거의 30분이 지나도록, 우리가 탄 큰 배가 깊은 바다에 나설 때까지 한사코 따라오며 소리쳐 댔다. 그러다가 작은 배에 탄 사람들은 바닷물로 풍덩풍덩 뛰어들었다. 그들은 바다에 빠져서도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사요나라!』
나는 내가 묵었던 민박집 주인이 저 속에 끼어서 나를 부르지 않나, 하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저기 金玉均이 나를 부르고 있다!」●
[인터뷰] 金玉均 자료 집대성한 在日원로학자 琴秉洞
『김옥균은 실패는 했지만 실천을 했습니다』
『金玉均은 일본을 이용하려 한 것』
琴秉洞(금병동·80) 선생을 일본 도쿄 교외 히가시야마토시(東大和市)에 있는 자택으로 찾아간 것은 지난 10월2일 오후 7시쯤이었다. 金玉均이 2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한 오가사와라(小笠原)에서 막 돌아오던 참이었다. 琴선생은 金玉均에 관한 일본 측 자료를 거의 빠짐없이 수집, 1991년 「金玉均과 日本」이란 책을 일본에서 출판해 金玉均 연구를 집대성한 在日(재일) 원로학자다.
그는 아담한 2층집에서 부인과 막내아들하고 셋이서 살고 있었다. 아래층엔 서재가 있었는데, 방 두 개에 책이 가득 쌓여 있어서 사람이 비집고 앉을 자리도 없어 보였다.
그는 우리 말을 곧잘 했으나 가끔 생각이 나지 않을 때는 일본어를 한두 마디 섞어서 썼다. 깡깡한 몸매에 선량한 얼굴로 잘 웃었지만, 가끔 눈을 부릅뜰 때는 좀 무섭기도 했다.
―어떻게 金玉均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습니까.
『조선 사람은 모두 같은 의문을 가지게 되지요. 왜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나…. 그걸 따라가다 보면 꼭 金玉均이 나옵니다』
―역사에 대해선 일찍부터 흥미가 있으셨나 보죠.
『어릴 때부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중단하려고 했습니다. 金玉均이 親日派(친일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 사람들이 金玉均을 親日派라고 했으니까요』
―金玉均이 親日派가 아니라는 확신이 섰나요.
『1962년에 조선大 도서관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역사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로 했지요. 자료를 보는 데 유리했으니까요. 金玉均에 관한 자료를 보면서 다시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金玉均은 일본을 이용하려고 한 것이지 親日派는 아니었어요』
「관동대지진」 연구
―그때부터 자료를 모으셨군요.
『그렇지요. 그땐 복사기가 없어서 대학노트에 일일이 베껴 써야 했어요. 그런데 1964년 평양에서 「金玉均」이란 책이 나왔어요. 그 속에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거의 다 나와 있었어요. 내가 나갈 무대가 없어진 겁니다. 또 중단했지요. 그리고 다른 데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많이 학살됐는데, 그걸 연구했지요』
그는 이 분야에 관해서 세 권의 책을 펴냈다. 「關東大震災(관동대진재)와 朝鮮人(조선인)」(강덕상과 공편, 1963, 미스즈書房), 「關東大震災 朝鮮人虐殺關聯 兒童證言史料」(1989, 綠蔭書房), 「關東大震災 朝鮮人虐殺關聯 官廳史料」(1991년 綠蔭書房)가 그것이다. 뒤의 두 책은 자료뿐만 아니라 해설을 곁들였다. 「耳塚」(1978, 二月社)을 비롯해서 韓日문제에 관한 책을 여러 권 냈다.
여기서 얘기가 다른 길로 나갔다.
―일본에서 年金(연금)을 받으며 사시는데, 일본이 싫어할 일만 하시네요.
『우리가 왜 일본의 식민지가 됐나? 일본 때문에! 그래서 문제점이 될 만한 걸 찾게 된 겁니다』
―일본 정부가 싫어할 텐데요.
『公的(공적)으로는 못 하지만 내색은 하지요. 자료를 제공한 사람에 대한 압력도 있었지요. 그러나 역사니까 할 수 없지요』
여기서 그의 위크 포인트를 건드려 본다.
―조선大 강사로 계시니 조총련 쪽이시지요.
『지금 그걸 구별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그는 후쿠오카(福岡)에서 태어났지만 본적은 경북 문경이었다.
―고향이 경북 문경이던데 다녀오셨습니까.
『가려는 마음은 있지만 못 갔습니다. 왜 안 가나? 국가보안법 때문에! 국가보안법 때문에 어려움 겪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가면 의리가 서지 않아요』
―북한에는 더 무서운 법이 있는데 거긴 갔다 오셨겠지요.
『그거야…, 양쪽 지도자가 호상간에 상의해서 잘 처리했으면 좋겠는데…』
그는 북한에 세 번 다녀왔다고 했다. 아무래도 논리가 옹색해 보였는지, 이때 뒤에서 지켜보던 부인(崔敏子·69)이 끼어들었다.
『나하고 아들·딸하고 온 식구는 다 한국 다녀왔는데 저 양반만 저래요』
그는 그 말을 듣고 흘낏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저 사람은 처녀 적부터 그쪽(민단) 계통이었어』
부인도 지지 않았다.
『그렇게 北이다 南이다, 하니까 통일이 안 돼요! 우리 집부터 먼저 통일이 돼야 해요!』
琴선생은 졌다 싶은지 어조를 좀 누그러뜨렸다.
『내가 명색이 조선大 선생인데 아이들 네 명 가운데 한 명도 조선大에 안 왔어요. 첫 놈이 그러는 걸 보고 나는 그날로 학교의 현직에서 물러났어요. 그랬더니 학교에선 그냥 나와 달라고 해서 강사로 나갔지요』
이 집안의 南北문제는 이미 승패가 판가름 난 것 같았다. 琴선생 쪽이 數(수)에 있어서나 논리에 있어서나 많이 달리는 것 같았다.
오가사와라에서 발견한 金玉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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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병동씨가 어렵게 구한 金玉均의 글씨를 들어 보이고 있다. |
―그래 金玉均 연구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1980년 머리에 핏줄이 터져서 건강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손이 말을 듣지 않아서 글씨를 쓸 수 없었어요. 학교를 쉬고 따뜻한 곳으로 요양을 가기로 했어요.
이즈(伊豆)로 갈까 하고 있는데, 집사람이 오가사와라가 좋을 거라고 그래요. 속으로 「金玉均이 거기서 살았지만 아는 사람 있겠나, 조선인 강제징용 얘기는 많을 거야」, 하면서 2주일치 약을 챙겨 가지고 갔지요.
그 섬에 가서 바로 가게에 필름을 사러 들어갔더니, 그 집에 「오가사와라 얘기」라는 책이 있어요. 그걸 훑어보니까, 金玉均 얘기가 많이 나와요. 그래서 그 이튿날부터 金玉均을 잘 아는 사람의 자손들을 찾아다녔지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사람들을 만나고, 현장을 찾아다니고 했어요.
병 고치러 간 사람이 취재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지요. 밤에는 취재해 온 걸 대학노트에 다시 정리했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글씨를 쓸 수 있게 된 겁니다.
2주 만에 도쿄로 돌아왔는데 대학에선 쉬라고 해요. 「아, 찬스다!」 매일 국회도서관에 가서 메이지(明治) 시대의 신문을 다 봤습니다. 金玉均이 살았던 곳을 다 찾아갔습니다. 홋카이도, 나가사키, 上海…』
―돈이 없었을 텐데요.
『집사람이 부인들 파머를 해주고 번 돈으로 도와줬습니다』
―어려움이 많았겠지요.
『金玉均이 달필이어서 초서로 쓴 글을 읽을 수 없었어요. 마침 동료 교사의 아버지가 漢學者(한학자)여서 그분한테 가서 배웠습니다』
―책이 되기까지 얼마나 걸렸습니까.
『1991년에 책이 나왔으니, 11년 걸렸습니다. 책이 나오고 나서 내 어깨가 가벼워졌습니다. 중압감에서 해방돼서요. 「이젠 할 일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이 나오고 한국에서 많은 분들이 찾아와서 바빠졌어요.
한국에 곧 제 책 세 권이 번역돼서 나올 예정입니다. 「종군위안부」, 「한국인의 일본관」, 「일본인의 한국관」입니다. 그리고 제가 모은 자료와 책을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하기로 했어요』
―아니, 그런 건 북한에 줘야지요.
『그거야 어디 남아도 남는 거니까』
우리는 마주 보며 껄껄 웃었다.
갑신정변 실패의 원인
―金玉均은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조선 역사에서 10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사람이었습니다. 왜? 세상을 바꾸려고 했으니까. 생각하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吳慶錫(오경석)·朴珪壽(박규수)·柳大致(유대치) 이런 사람들은 생각만 했지요. 金玉均은 실패는 했지만 실천을 했습니다』
―甲申政變(갑신정변)이 왜 실패했다고 보십니까.
『첫째는 민중의 기초가 돼 있지 않았습니다. 민중이 일어나게 하려면 10년은 기다려야 했을 겁니다. 둘째는 일본을 너무 의존했습니다. 일본이 배신한다는 걸 생각 못 했습니다. 일본은 나중에 金玉均의 암살을 도와주기까지 했습니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은.
『내일 죽어도 좋습니다. 내가 할 일은 다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