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효진의 세계탐험 ① 실크로드 : 월간조선

실크로드는 예나 지금이나 고난의 길이다. 옛사람들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의 길을 모래바람과 싸우며 실크로드를 오갔다. 나침반 대신 낙타나 사람의 뼈가 흩어져 있으면 여기가 길이려니 하고 계속해서 걸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엔 사막을 건너는 사람의 소망과 꿈이 기다리고 있었다.

돈과, 명예와, 맛있는 음식과, 황홀한 음악과,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道(도)도 있었다. 그래서 이것들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실크로드를 건너 저 세상으로 갔다. 그리고 이 세상으로 왔다.

명사산의 품속에 안겨 있는 月牙泉은 오아시스 속의 오아시스다. 누각의 오른쪽에 초승달 모양을 하고 있는 월아천은 3000여 년 동안 마르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사막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물줄기가 끊어져 인공으로 물을 대고 있다고 한다.

오아시스 마을에선 위구르의 후예들이 어김없이 포도농사를 짓는다. 포도농가에선 아가씨들이 그들의 전통춤을 추어 주고, 맛없는 수박을 대접하며, 건포도를 팔았다. 나중에 우루무치 큰 시장에 가서 값을 알아보니, 농가에서 배나 비싸게 팔았다. 농가의 2층은 포도 건조실이다. 높이 솟은 TV 안테나가 이채롭다.

지금도 그 길은 고난의 길이다. 모래와 자갈과 민둥산이 계속 이어지는 끝없는 사막을 고행자처럼 건너야, 꿈결에서처럼 오아시스가 나온다. 그리고 그런 삭막한 곳에도 인간이 거친 자연과 싸우며, 마침내는 승리하고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귀중하게 깨닫게 된다. 황량한 모래벌판 위에서도 하늘은 시리도록 파랗고, 오아시스의 나뭇잎은 꺼멓도록 푸르른데,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그 道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육상 실크로드의 역할이 끝날 때까지 임무를 다했던 東西 문명이동의 통로는, 西安(시안)에서 시작해 둔황(敦煌)→하미(哈密)→투루판(吐魯番)→우루무치(烏魯木齊)로 통하는 톈산남로(天山南路)였다. 이제 그 길을 따라가 본다.

메마른 모래 언덕 저편 뒤에는 짙푸른 나무가 있다. 그러면 그곳에는 그늘이 있고, 바람이 있고, 물이 있고, 우리들의 인생도 있을 것이다.

위구르族 아가씨들이 건포도를 팔고 있다.

1000원짜리 모자와 거대한 중국

남대문시장에 가서 단돈 1000원짜리 모자를 샀다. 실크로드에 먼저 다녀온 사람이 모자와 긴소매 셔츠를 꼭 준비하라고 해서 시장에 들렀던 것이다. 큰길가에 면한 허름한 상점에 허름한 모자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언뜻 마음에 드는 모자가 있어서, 일흔은 넘었을 것 같은 주인 할머니에게 얼마냐고 물으니, 말도 하기 싫은지 손가락 한 개를 세워 보였다. 내가 얼른 『만원이요?』하고 물었더니 주인 할머니는 무표정하게 『천원』했다. 나는 주인이 말을 잘못했다고 할까 봐 얼른 그 모자를 사가지고 뒤에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둘러서 군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주 세련된 모자였다. 겉은 베이지 색이었고 안은 그 유명한 브랜드의 체크 무늬였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상표와 만든 곳이 적힌 라벨이 보이지 않았다. 그 모자를 사기 전에 다른 가게에서 대충 값을 알아봤는데, 이 정도라면 1만원짜리는 돼 보였다. 나는 이 멋진 모자가 어떻게 1000원짜리가 돼서 내 손에 들어왔는지,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의 경제학으로는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횡재라도 한 것처럼 아내에게, 이렇게 멋진 모자를 단돈 1000원에 샀다고 자랑을 했다.

포도밭 가까운 곳엔 둔황의 옛 영광 막고굴이 있다. 이 9층 누각 안엔 높이 35.5ｍ의 이곳 최대의 불상이 안치돼 있다. 唐나라 측천무후의 후원으로 만들어졌는데, 당시의 누각은 4층이어서 불상의 머리는 밖으로 나와 있었다고 한다. 5층부터는 국민당 정부에서 지었다고 한다. 이 막고굴의 17번 굴에서 혜초의「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됐다.

투루판에서 남동쪽으로 46kｍ쯤 떨어진 곳에 5세기 말에 세워진 高昌國의 옛 왕성이 있다. 위엄으로 가득 찬 왕성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부서진 흙더미만 여기저기 쌓여 있어 보는 이의 마음도 쓸쓸하다. 당나귀 수레들만이 부산하게 오간다.

과연 중국의 사막 가운데 가서 보니 모자가 필수품이었다. 관광지에도 모자 가게가 즐비했다. 그 많은 모자 가운데 내 것과 비슷한 건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더욱 신이 나서 그 근사한 모자를 쓰고 여기저기 부산하게 돌아다녔다. 일행 30여 명 중의 모자 가운데 내 모자가 가장 멋져 보였다.

그러다가 일이 벌어졌다. 내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둔황(敦煌)의 莫高窟(막고굴)에 가서였다. 큼지막한 버스에서 중국 관광객 40여 명이 우르르 내렸는데, 그 40여 명 모두가 나와 똑같은 모자를 쓰고 있지 않은가! 천도 색깔도 무늬도 다 똑같았는데 모자 앞에 그들의 소속 단체의 마크가 찍혀 있을 뿐이었다.

사막에서 만난「접시꽃 당신」이 반갑다. 사막에도 꽃이 있다. 꽃이 있으니 벌·나비도 있고, 벌·나비가 있으니 사랑도 있을 것이다. 월아천 부근.

그걸 보는 순간 나는 내 모자에 대한 프라이드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의 중국 현주소가 눈앞에 완연하게 떠올랐다. 중국은 한국에서 1만원짜리 상품을 1000원에 팔 수 있는 나라다. 그러면서 세계 일류 브랜드에 뒤지지 않는 세련된 상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아니, 그건 그 유명한 브랜드의 모조품일는지 모른다.

우리도 얼마 전까지 미국과 일본에 그런 나라였다. 우리가 몇 년 전까지 버스 한 대에 탄 관광객 모두가 똑같이 빨간 모자에 빨간 조끼를 입고 다녔던 것처럼, 지금 중국인들도 그런 모습으로 관광지를 휩쓸고 다니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노라니 한국인으로서의 내 자존심이 다소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농가 근처로 쿤룬(崑崙)산맥에서 눈 녹은 물이 콸콸 흐르고 있었다.

고창국의 국가사원이었던 베지켈리크 천불동 석굴엔 막고굴처럼 벽화들이 가득 그려져 있었지만, 영국·프랑스·스웨덴·일본의 학자들이 벽화를 뜯어가 이젠 흔적만 남아 있다.

사막의 길, 바람의 길

여행은 우루무치(烏魯木齊)에서 시작됐다. 우루무치는 중국의 북서쪽 끝에 있는 신장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의 區都(구도)로 처음엔 오아시스 도시로 발전하다가 지금은 인구 230만 명의 제법 큰 국경지역의 거점도시가 됐다.

우루무치라는 도시 이름부터가 중국식 발음이 아니고 낯설다. 위구르語로 「아름다운 목장」 또는 「큰 목장」이라는 뜻이다. 「웨이우얼」이라는 말도 낯설다. 「위구르」란 말의 중국식 표기다. 처음 이 땅은 回族(회족)의 땅이었다. 아랍에 뿌리를 둔 회족들이 이곳을 차지해 살다가 몽골, 튀르크 같은 유목민들의 쟁탈지가 됐다. 8세기경엔 唐(당)나라가 차지해 처음으로 중국의 영토가 됐다. 唐이 철수하면서부터 위구르族의 차지가 돼서 이어져 내려오다가 18세기에 다시 淸(청)나라의 영토가 됐다.

고창고성과 천불동 부근에「서유기」의 손오공과 저팔계, 그리고 삼장법사가 지나간 화염산이 있다. 여름엔 80℃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저녁 때 무렵엔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산 전체가 붉게 물든다.

우루무치에서 시작된 사막 길은 둔황에 닿아도 끝나지 않았다. 우루무치→투루판(3시간)→하미(5시간)→둔황(6시간), 이렇게 14시간을 버스로 달리는데도 사막의 길은 도무지 끝날 줄을 몰랐다. 오죽하면 「가도 가도 사막의 길」 하고 시작되는 아득한 옛 노래 진방남의 「사막의 애상곡」이 떠오르기까지 했다. 정말 그 노랫말이 기막히게 맞는다.

「가도 가도 사막의 길/바람이던 사막의 길/모래밭 언덕의 길/또 넘어도 꿈속의 길/나그네의 지친 몸을/낙타 등에 싣고 가면/아득한 지평선에/달빛만이 애달파라」

朴昌吾(박창오)라는 멋진 이름을 두고도 작사를 할 땐 半夜月(반야월)로, 노래를 할 땐 秦芳男(진방남)으로 행세했던 이 음악가가 1916년생이니 그 옛날에 사막체험을 했으리라고 보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어떻게 이 노래에서 그는 사막의 길을 두 눈으로 확실히 본 듯이 그렸을까. 확실히 천재였던가 보다.

아무 쓸모없던 고비사막 ?善 부근에서 기름과 가스가 솟아올라 중국은 이제야 사막을 힘들게 지켜온 보람을 찾은 것 같다. 사막의 낙타 뒤로 풍력발전기의 날개가 돌아가고 있다.

정말 사막에는 바람이 많았다. 더운 바람이 모래를 싣고 사정없이 몰아쳤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센 바람도 몇 번 겪었다. 그중에 다시는 체험하고 싶지 않은 사막의 바람을 몸을 던져 겪기도 했다.

신장에서 간쑤성(甘肅省)으로 경계를 넘을 때였다. 톨게이트 옆에 자동차 용품을 파는 건물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省의 경계를 넘을 때는 가이드도 버스도 바뀌었다. 새로 등장한 가이드는 아가씨였다. 새 가이드는 10분을 준다면서 화장실에 다녀오라고 했다. 우리는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화염산 근처 위구르인들의 마을. 이 마을에서 천불동의 벽화를 뜯어 간 독일인 르코크가 묵었다고 한다. 허술한 지붕 위에 위성 안테나가 놓여 있다.

위구르인의 집 거실. 인간은 다 비슷하게 살고 있다. 그 집에서 먹은 수박이 실크로드 여행에서 먹은 수박 중 가장 달았다.

사막의 소나기(?) 세례

우루무치에서 동쪽으로 110km쯤 떨어진 톈산산맥 속에 백두산 천지보다 조금 작은 톈산천지가 있다.

우선 우리는 자동차 용품을 파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러나 거기 있던 사람들은 우리의 말도 들어보지 않고 손을 저으며 어서 나가라고 했다. 매점 안의 화장실을 쓰라고 할 법했는데, 그들은 건물 안에 화장실을 두고도 우리를 밖으로 내몰았다.

할 수 없이 밖으로 쫓겨난 우리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있는 야외 화장실로 가야 했다. 그 화장실은 중국여행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그런 것이었다. 야트막한 칸막이, 직사각형으로 뻥 뚫린 구멍, 그 아래 오물.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미관과 위생의 문제는 때와 장소가 그러니까 그냥 참는다고 하겠지만, 사정없이 몰아치는 바람이 문제였다. 오줌줄기가 역풍을 만나 밑으로 떨어지기는커녕, 거꾸로 솟구쳐서 소나기처럼 얼굴로 달려들었다.

어리석은 나는 적지 않은 물방울 세례를 받으며, 「이거 사막에 난데없이 소나기가 오는 게 아닌가」 했다. 그러나 내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던 남자는, 자기 것도 아닌 남의 물방울 세례를 받더니 얼른 사태를 파악하고, 『어어, 이거 안 되겠는데!』 하더니, 뒤로 돌아서서 그냥 버스로 돌아갔다.

멋쟁이 선글라스를 끼고 화장실에 다녀온 어떤 부인은 안경알을 닦아 내면서 말했다.

『물방울이 안경알에 떨어져서 이게 웬 물인가 했어요!』

한바탕 소동이 지나갔다. 나는 가이드 아가씨에게 다가가 조그맣게 말했다.

『다른 것도 좋지만, 우선 화장실부터 잘 지어 놓으라고 정부에 건의하세요』

가이드한테선 곧 정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나라에선 백성이 정부에 무얼 어떻게 해달라고 하는 건 없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중국 공포증에 걸린 사람들이, 「중국이 우리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고, GDP가 우리의 3배 가까이 되고, 외환보유고는 4배 넘게 빠른 속도로 불어나고 있다」면서 벌벌 떠는 게 좀 과한 허풍처럼 느껴졌다.

「고비」와 「사막」

이렇게 실크로드 여행은 고비사막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고행 길이었다. 그러나 그 여행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 금수강산에서 사는 내가 참으로 행복하다는 생각이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가슴속으로 거듭거듭 파고들었다.

나는 사막을 여행하면서 사막에 대한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우리는 대체로 고비사막의 「고비」가 사막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연변 출신의 가이드는 고비는 사막이 아니라고 했다. 고비는 고비고, 사막은 사막이라는 것이었다. 고비는 「아무짝에도 쓸 곳이 없는 모래와 자갈만 있는 땅」이고, 사막은 말 그대로 「모래로 된 언덕이 늘어선 땅」이라고 했다.

정말 그랬다. 현지인들은 고비와 사막을 구분해서 쓰고 있었다. 고비는 몽골어로 「풀이 잘 자라지 않는 거친 땅」 또는 「물이 없는 곳」이란 뜻이라고 한다. 이런 땅이 끝없이 이어져 고유명사 「고비사막」이 된 게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곳은 우리에게 黃砂(황사)를 몰아다 주는 고약한 그 황사의 고향이기도 했다.

고비사막은 넓기만 했다. 하도 넓어서 감이 잡히지 않았다. 길이가 몽골-중국-내몽고에 걸쳐 東西로 1600km나 뻗쳐 있고 너비만도 좁은 곳은 500여km, 넓은 곳은 1000km나 됐다. 면적은 130만km2나 된다. 길이로 치면 서울~부산의 3배가 넘고, 면적으로 따지면 한반도의 6배쯤 된다. 이렇게 넓은 땅이 말 그대로 아무짝에도 쓸 데 없는 모래와 자갈로 뒤덮여 있었다. 가끔 가다 메마른 낙타풀이 거친 바람에 괴롭게 흔들리고 있었으나, 야생낙타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隊商(대상)들이 낙타를 몰고 다니던 길에는 아스팔트 도로가 깔려 東西를 횡단하고 있으니, 그까짓 풀이 무슨 소용일 것인가.

『사막에 길 닦는 건 일도 아닙니다』

끝없는 사막 길을 달리면서 나는 질문 하나에 골똘하게 매달렸다. 보다시피 이 거칠고 메마른 땅은, 지금은 몰라도 과거엔 쓸모없는 황무지였다. 그리고 이 땅은 흉노, 위구르, 튀르크, 티베트, 몽골, 카자크 같은 少數(소수)민족들의 땅이었다. 그들이 그런 대로 행복하게 살면 그뿐인 땅이었다. 그런데, 중국은 이 쓸 데 없는 땅을 차지하려고 漢(한)나라 때부터 수천 년을 왜 그렇게 아등바등했던가.

사막 길은 그런대로 잘 닦여 있었다. 중국 정부가 참 돈 쓸 곳이 많을 텐데 큰일을 했다 싶어 가이드에게 『돈이 참 많이 들었겠다』고 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사막에 길 닦는 건 일도 아닙니다. 이 넓은 땅이 다 나라 꺼 아닙니까. 또 여기 천지가 자갈 아닙니까. 이거 죽죽 끌어 모아 놓고 쓱쓱 다진 다음에 그 위에 기름을 쫙 뿌리면 이런 포장도로가 금방 됩니다』

그런 길이라서 그런지, 버스가 털털 튀어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우리가 털털 튀는 버스에서 흔들리는 걸 보고, 가이드가 농 삼아 『실크로드 여행을 오면 엉덩이 운동을 많이 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시달리며 서너 시간 달리면 거짓말 같은 오아시스 도시가 나타났다. 그러면 거기서 또 하룻밤이나 이틀 밤을 잤다. 그러기를 서너 번 반복하면서 도착한 곳이 꿈에 그리던 둔황이었다.

둔황의 陽關은 西域南路의 출발점이었다. 양관의 한 건물 아래로 고비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鳴沙山은 너울너울 춤을 추고

둔황의 볼거리는 단연 鳴沙山(명사산)이다. 「모래가 우는 산」이라서 명사산이 됐다고 하는데 어떻게 우는지 궁금했다. 전날 6시간이나 버스에 시달리며 오느라고 고생했다고, 내일은 오전 11시까지 푹 쉬라며 인심을 쓴다. 덕분에 시간이 넉넉해졌다. 이튿날 아침 나는 맛없는 중국식 뷔페를 일찍 먹고 명사산 탐험에 나섰다. 명사산이 시내에서 자동차로 5분이면 도착한다고 했다. 걸어갈까 했더니 거리로는 5km나 된다는 것이었다.

짧은 중국어로 호텔 앞에 대기 중인 택시기사한테로 가서 흥정을 했다.

『명사산 얼마?』

『20위안』

『노오, 10위안!』

젊은 택시기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1위안이 한국 원화로 130원쯤 하니까 우리 돈으로 1300원쯤 되는 셈이어서 비교적 싼 편이었다. 한국에서 자라며 갈고 닦은 흥정기술이 둔황에서도 잘 통하는 게 뿌듯했지만, 「언젠가 이러다 바가지 쓰지」 하는 생각을 하면 다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명사산은 시내에서 남쪽으로 쭉 뻗은 가로수 길 끝에 거짓말처럼 품위 있게 앉아 있었다. 막 떠오른 아침 햇살을 받아 부드럽고 푸근하게 보였다. 옅은 갈색에 붉은색과 노란색이 아주 조금 섞여 있는 것 같았다. 파란 하늘과 멋진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은 산과 그 그림자가 만들어 내는 콘트라스트가 어찌나 아름답던지 카메라를 들이댈 생각도 못 하고 한참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거대한 산은 마치 파도처럼 춤을 추고 있었다. 아니 어찌 보면 수많은 용들이 꿈틀대며 용틀임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파도와 용틀임에선 힘이 느껴지기보다는 부드러움과 포근함이 느껴졌다. 아니, 그것도 아니다. 귀부인이 곱디 고운 비단옷을 입고 바람에 옷자락을 휘날리며 아주 멋진 춤을 추고 있는 것 같다. 아니, 그것도 아니다. 수많은 선녀들이 飛天像(비천상)에서처럼 하늘나라의 가락에 맞춰 하늘나라의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그런 비천상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입장료 120위안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명사산이 우는 이유

그런데 이 멋진 산에서 왜 우는 소리가 날까. 전설은 그럴듯한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옛날 이곳에서 전쟁을 하던 군인들이 갑자기 불어 닥친 모래바람에 휩쓸려 모래 속에 파묻히고 말았는데, 지금까지도 그들의 원혼이 바람결을 타고 흐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과학원은 모래가 우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1)모래가 이동하면서 크고 작은 공간이 생기는데 이 공간에 바람이 들어가 진동하면서 소리가 난다.

2)사막 위에는 건조한 모래층이 있고 아래에는 습기를 품은 모래층이 있는데, 건조한 모래층의 진동파가 습기를 품은 모래층의 진동파에 전달되면서 소리가 난다.

3)모래 표면에 아주 건조한 석영 성분이 있는데, 이것들이 햇볕에 쪼이거나, 바람이 불거나, 사람이나 낙타가 걸어 다닐 때 마찰을 일으키면서 소리가 난다.

4)이 석영 결정체는 압력을 받을 때마다 전기가 발생하는데, 이 전기작용이 신축하면서 진동현상을 일으키며 정전기 감응이 일어나 소리가 난다.

알 듯 모를 듯한 원인을 밝히느라고 중국과학원은 참 수고를 많이 했다.

중국은 사람도 땅도 통이 크다. 명사산만 해도 그렇다. 南北이 20km, 東西가 40km란다. 이곳이야말로 고비가 아닌 말 그대로의 사막이다. 고비는 관광지로도 쓸 데 없는 몹쓸 땅이지만 사막은 멋진 관광지가 된다. 그래서 입장료를 아주 비싸게 받는 데도 국내외 관광객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들끓는다. 일본 관광객은 이제 한물 간 듯하다. 중국 국내 관광객들과 한국 관광객들로 성시를 이루고 있다.

명사산에서 내려다본 둔황시내. 일직선으로 쭉 뻗은 도로 끝에 명사산이 귀부인처럼 앉아 있다.

사막에서 비를 만나다

여기 오기 전 사진으로만 명사산을 봤을 땐, 끝없이 펼쳐진 사막 한가운데 이런 모래산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와서 보니, 둔황의 코앞에 이 산이 떡하니 앉아서 시내를 그윽이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낙타 이외엔 탈것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물론 낙타도 수백 마리가 성업 중이었지만, 관광용 자동차도 쉴 새 없이 다녔고, 하늘에선 경비행기도 돈벌이에 바빴다. 그런가 하면 고관대작인 듯한 사람들은 세단을 타고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다녔다.

나는 명사산이 우는 그 구슬픈 소리를 듣고 싶어 가파른 모래산을 올라가기로 했다. 벌써 해가 솟아 햇볕이 뜨겁고, 게다가 바람이 부는데다, 운동화 속으로 모래가 자꾸 들어가 신경이 쓰여서, 쉬엄쉬엄 사진을 찍으며 올라가는 데도,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칼날 같은 산등성이를 올라가다 보니, 아차 했다간 저 아래로 곤두박질 칠 것 같아 슬그머니 겁이 나기도 했다.

30여 분쯤 걸려 막상 꼭대기 부근에 올라 보니,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부는지 모래가 폭풍을 만난 바닷물처럼 휘날려 사람을 때리는 바람에, 날아가려는 모자를 붙잡으랴, 카메라를 챙기랴 정신이 없었다. 겨우 바람이 좀 뜸한 골짜기로 와선 아이들처럼 엉덩이로 150m는 됨직한 모래 비탈을 미끄럼을 타며 내려오니, 어어 이게 웬일인가. 사막에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정신없이 중국인들의 매점으로 뛰어가서 비를 피하며 생각하니, 아차 잊은 게 있었다. 언제 모래가 울었지!

비는 또 금방 멎고 새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이곳의 강수량이 30mm 정도라는데, 메마른 사막에 와서 그 귀한 빗방울을 맞아 본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선녀의 눈물, 月牙泉

오아시스 속의 오아시스 「月牙泉(월아천)」은 명사산의 품안에 있었다. 영어로 만들어 붙인 이름(「크레센트 문 레이크」)이 더 멋지고 설명적이다. 연못의 모양은 꼭 초승달처럼 생겼는데 南北이 100m 東西가 50m쯤 된다.

월아천도 전설을 가지고 있다. 갑자기 울창한 숲이 모래산으로 변하자 선녀가 그 모습을 보고 서글퍼져서 눈물을 흘렸는데, 그 눈물이 땅에 떨어져 월아천이 됐다고 한다. 사실 3만여 년 전엔 이 일대가 울창한 삼림지대였다고 한다.

월아천은 현대에도 슬픈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월아천은 모래 폭풍이 아무리 불어와도 모래에 묻히는 일이 없었다. 또 3000여 년이나 마르지 않고 물이 퐁퐁 솟아올랐다. 월아천의 水源(수원)은 쿤룬(崑崙)산맥의 눈 녹은 물이었다. 이 물이 지하로 흘러들어 黨河(당하)가 됐는데 이 물줄기가 월아천으로 흘러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구온난화로 고비사막이 확장되면서 당하와 월아천 사이의 물길이 끊겨 더 이상 물이 솟아오르지 않게 됐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근처에 인공호수를 만들어 놓고 거기서 물을 끌어다 공급하고 있다. 어떻든 사막 한가운데서 잘 자라고 있는 나무와 꽃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특히 빨간 접시꽃들이 낯선 손을 반갑게 맞았다.

인구 15만여 명이 몰려 사는 도시 둔황은 요즘 중국에서 한참 뜨고 있는 도시다. 일본 소설 「둔황(敦煌)」, 中·日 합작 드라마 「둔황」, 韓·中·日 합작 다큐멘터리 「新실크로드」, 영화 「신용문객잔」, 소설과 영화 「손오공」, 우리 드라마 「해신」 같은 소설·영화·드라마·다큐멘터리 같은 것들이 분위기를 띄우면서 중국의 실크로드 거점 도시 둔황도 덩달아 뜨고 있다.

둔황의 뜻이 「크고 빛나라」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8세기 唐나라 때 크고 빛났던 둔황이 21세기에 들어와 또 한 번 이름값을 하고 있다. 지금 둔황은 오아시스 도시답게 시내는 짙은 녹음으로 푸르르고, 상가는 흥청대고 있고, 사람들의 표정은 밝기만 하다.

밤에는 야시장이 흥청 댄다. 작은 판매대 100여 개가 두 줄로 늘어선 야시장에선 자질구레한 액세서리에서부터 골동품까지 없는 것이 없다. 여름 날씨가 뜨거우니까 밤엔 자정이 넘도록 시장에 나와 마시고 사고파는 사람들로 말 그대로 盛市(성시)를 이룬다.

누각 옆 반달 같은 연못이 월아천. 물줄기가 끊어져 안타깝다.

「往五天竺國傳」이 발견된 곳

우리에겐 慧超(혜초)의 「往五天竺國傳(왕오천축국전)」 때문에 둔황이 더욱 의미가 깊은 곳이다. 8세기 초 신라에서 태어난 승려 혜초는 16세에 唐으로 가서, 불교의 한 교파인 密敎(밀교)의 高僧(고승) 金剛智(금강지) 밑에서 공부를 해서 그의 뛰어난 제자가 된다. 그는 스승의 뜻에 따라 20세에 바닷길로 인도대륙에 가서 다섯 천축국(인도)을 돌아본다. 그리고 24세에 서역을 거쳐 唐나라 서울 長安(장안: 지금 西安)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그의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이 1900년에 둔황의 한 동굴에서 2만여 점의 고문서와 함께 발견된 것이다.

그래서 혜초가 여기 와서 기행문을 써서 이 동굴 속에 남기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연구도 있었다. 지금 통설로 보면, 처음 세 권으로 된 원본이 있었는데 그것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고, 이 동굴에서 나온 것은 원본을 두루마리 하나에 필사한 것이고, 그것도 앞뒤와 중간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殘簡本(잔간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혜초가 이 부근을 지났다고 추정해 볼 수는 있지만, 꼭 둔황을 지났고 막고굴에서 묵으면서 이 책을 썼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멀고 험한 길을 천신만고 끝에 뚫고 돌아온 혜초의 위대함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 책이 우리나라 사람이 쓴 最古(최고)의 책이라는 데에도 변함이 없다.

둔황은 중국의 중심부에서 보면, 실크로드의 서쪽 끝부분에 있는 관문 도시로 이곳을 통해 비단을 비롯한 鑄鐵(주철)기술·양잠·제지법 같은 중국의 문물이 서역으로 나갔고, 역시 여기를 통해서 불교·조로아스터교·마니교·이슬람교가 들어왔고, 胡樂(호악)·胡舞(호무) 같은 胡風(호풍)이 들어와서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게 됐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교도 이 길을 따라 중국에 왔다가 다시 백제에 건너온 것이다.

唐나라의 서울이었던 西安에서 시작한 실크로드는 이곳 둔황에 와서 갈라진다. 처음엔 이곳에서 쿤룬(崑崙)산맥 북쪽을 지나가는 南路와, 톈산(天山)산맥 남쪽을 지나가는 北路로 갈라져 이용됐지만, 唐나라 시대에 돌궐이 일어나서 방해가 되는데다 노프노르 호수에 사막화가 진행돼서 남로의 이용도가 낮아지는 바람에, 북로가 톈산남로와 톈산북로로 나뉘어 이용됐다. 우리가 역순으로 따라온 둔황→하미(哈密)→투루판→ 우루무치로 통하는 길은 톈산남로로 가장 보편적으로 이용됐던 실크로드다.

장경동에서 발견된 혜초의「왕오천축국전」두루마리. 원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이것은 간략하게 필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석굴 745개에 불상 1400여 개

둔황이 중국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11년, 漢나라의 武帝(무제)가 이곳에 河西四郡(하서사군)을 설치하면서부터다. 당시 팽창정책을 쓰던 漢武帝는 두 차례에 걸쳐 장건(張騫)을 보내 흉노를 제압하고 西아시아로 가는 교통로를 확보했다. 이때부터 이 길로 東西의 문물이 넘나들게 됐다. 이 길을 「실크로드」라고 처음 부른 사람은 독일의 지질학자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 1883~1905)이었다.

4세기 중엽에는 이미 이 지방의 문화가 크게 발전했다. 366년 전진(前秦)의 승려 낙준(樂?)은 황량한 명사산에서 찬란한 금빛이 퍼져 나가는 것을 보고 이곳에 굴을 파고 부처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막고굴의 시초였다.

이때부터 수많은 승려들과 신자들이 몰려들어 굴을 파고 부처를 만들어 모시고 禮佛(예불)했다. 대부분의 굴은 이 지역의 호족이나 왕들의 지원에 의해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지역의 지배권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중엽까지 五胡十六國時代(5호16국 시대)의 後凉(후량), 北凉(북량), 西凉(서량)으로 넘어갔다. 이 시기 동안 둔황은 중앙아시아의 교역에서 隊商(대상)들의 도시로 크게 발전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이 지역을 北魏(북위), 西魏(서위), 隋(수), 唐이 지배하면서 둔황은 더욱 발전했다. 한때(781~840)는 土蕃(토번·티베트)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그 뒤 明(명), 西夏(서하)를 거치면서 14세기까지 1000여 년 동안 석굴 조성사업은 계속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석굴이 현재 남아 있는 것만 745개나 된다. 그러나 남쪽 기슭에 있는 492개 석굴엔 불상이나 벽화가 있고 공개돼 있지만, 북쪽 기슭에 있는 250여 개 굴은 승려들이 수행하던 곳으로 벽화나 불상이 없고 현재까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곳에 남아 있는 불상이 1400여 개, 벽화의 총면적이 4만 5000m2이고, 이 벽화를 연결하면 벽면의 길이가 16km나 된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되자 이곳은 거대한 불교의 중심지이자 순례지가 돼서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여러 왕국에서 온 승려와 신도, 그리고 포교사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12세기에 이르러 바닷길을 통한 해상 실크로드가 등장하면서 육상 실크로드는 점점 빛을 잃고 쇠퇴기를 맞게 됐다. 그와 함께 둔황도 빛을 잃고 한낱 오아시스 마을이 돼서 존재가 희미해지게 됐다.

그때부터 둔황의 막고굴은 깊은 잠에 빠지게 됐다. 막고굴은 그렇게 오랫동안 방치돼 오다가 19세기 말이 돼서야 불교의 승려도 아닌 道敎(도교)의 道士(도사) 王圓?(왕원록)이 와서 겨우 보살피게 됐다.

그러다가 마침내 1900년에 17굴에서 2만여 점의 문화재가 덜컥 쏟아져 나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여기서 나온 문화재들은 불교경전, 황제의 칙령, 마니교의 기도문집, 고대 기독교 일파의 경전, 당시의 호적, 계약서 같은 것들이었다. 물론 그 가운데 두루마리로 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있었다. 그 이후로 이 엄청난 자료를 연구하는 「敦煌學(둔황학)」이 생겨나기도 했다.

찬란한 사막의 박물관

사막 속의 찬란한 미술관 막고굴. 현재 492개 석굴 속에 수많은 벽화와 불상이 보존돼 있다.

「千佛洞(천불동)」이라고도 하는 막고굴은 둔황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25km쯤 떨어진 사막 한가운데 길게 누워 있었다. 거기도 명사산의 한 자락이라고 했다. 곱디고운 황금빛 모래언덕의 아랫부분은 왕사와 자갈이 다져진 역암으로 돼 있어서 굴을 파기에 쉬웠을 것 같았다. 그러나 불상을 만들고 벽화를 그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고 한다. 벽면엔 강바닥의 흙을 발라 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불상을 만들 땐 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풀이나 직물을 감아 형체를 만든 다음, 그 위에 진흙을 발라 모양을 다듬고, 마지막으로 색을 칠하고 금박을 입혀 완성했다는 것이다.

석굴들은 이 야트막한 산 아래에서부터 위까지 석 줄로 고만고만한 규모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굴들을 기다란 구름다리와 같은 복도로 연결해 놓았다. 언뜻 고대인들의 아파트처럼 보였다.

경내에 들어서자 北大佛(북대불)이 모셔진 9층 누각이 얼른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는 우리말을 곧잘 하는 漢族(한족) 젊은이가 안내를 맡았다. 그는 이 500여 개 동굴 가운데, 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곳, 또 한국인인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곳을 몇 군데 골라 설명해 줬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많은 굴 가운데 어느 곳을 보여 주는가 하는 건 순전히 안내인에게 달려 있었다. 또 가는 곳마다 굴 안이 어두컴컴한데다 안내인이 비춰 주는 손전등이 희미해서, 벽화와 불상에 대해서 부풀었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漢族 청년은 우리를 처음 唐나라 측천무후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북대불로 안내했다. 바깥에 있는 9층 누각은 唐代엔 4층이어서 대불의 머리가 밖으로 나와 있었으나, 1928년 국민당 정부가 그 위에 5층 누각을 더 만들어 실내불로 만들었다고 했다. 높이가 자그마치 35.5m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부처고, 실내불로는 단연 가장 크다고 한다.

그 남쪽으로 역시 唐나라 玄宗(현종) 때 만들어진 높이 26m의 南大佛은 29년간에 걸쳐 제작됐다고 한다. 부처님의 열반 모습을 만든 148굴의 臥佛(와불)은 길이가 15m나 된다고 하니 중국의 규모를 알 것만 같다.

『도둑놈들이 80%나 가져갔어요』

그는 이 지역이 토번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만들어진 237굴을 보여 줬는데 거기엔 뜻밖에 몽골 왕자와 함께 신라 왕자가 토번 여왕 옆에 꿩의 깃털로 장식된 모자를 쓰고 서 있었다. 그때 신라가 이미 먼 서역과 교류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지금부터 1500여 년 전인 西魏시대에 만들어진 249굴에선 고구려 고분벽화의 수렵도와 비슷한, 사냥하는 모습이 벽면에 그려져 있어 잠시 발길을 멈추게 했다. 말 탄 사냥꾼은 앞서서 활을 겨누며 도망하는 사슴 세 마리를 뒤에서 쫓고 있고, 또 다른 사냥꾼은 말 위에서 뒤를 돌아보며 머리가 둘 달린 호랑이를 쏘려 하고 있다. 그런데 왜 호랑이 머리가 둘인가. 그리고 그 머리 모습도 영 호랑이 같지 않다. 漢族 청년은 더듬더듬 그 의문을 풀어 줬다.

『여기 사막에는 호랑이가 없잖아요. 화공이 호랑이를 못 봐서 잘못 그린 거예요』

역시 우리에겐 17번 굴이 의미심장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여기서 나왔던 것이다.

17번 굴은 16번 굴의 입구를 지나서 오른쪽에 붙어 있었다. 漢族 청년이 굳은 표정으로 얘기했다.

『1900년에 여기를 관리하던 도사 왕원록이 16번 굴 입구에 쌓인 황사를 청소하다가 오른쪽 입구를 벽돌로 막아 놓은 걸 발견했어요. 왕원록이 벽돌을 밀었더니 힘없이 넘어갔어요. 17번 굴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안에서 많은 문서가 나왔어요. 불경 같은 것이 많이 나와서 이 굴을 「藏經洞(장경동)」이라고 그래요. 西夏가 침입해 올 때 감춰 뒀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물이 그렇게 많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영국·프랑스·독일·일본 같은 나라에서 온 도둑놈들이 그걸 80%나 가져갔어요. 그래서 왕오천축국전도 여기 없고 프랑스에 있어요. 나쁜 도둑놈들이에요』

마지막 말을 할 때는 그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15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249굴의 벽화 수렵도. 고구려 고분벽화(오른쪽)의 수렵도와 비슷해서 눈길을 끈다.

둔황문서 약탈사

장경동 두루마리 속에서 펠리오가「왕오천축국전」을 찾아내고 있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왕원록이 둔황문서를 발견했지만 아무도 그 중요성을 몰라 5년간이나 그대로 방치했었다.

1)그러다가 1905년 10월 러시아의 오부르체프(V. A. Oburuchev)가 둔황에 와서 중국어·몽골어·티베트어·산스크리트어·터키어 등으로 쓰인 두루마리 문서 두 보따리를 가져갔다.

2)1907년 3월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A. Stein)이 이곳에 와 寫經類(사경류) 20상자, 회화류 5상자(모두 25상자, 7660여 점)를, 왕원록을 꾀어 馬蹄銀(마제은) 40판을 주고 가져갔다.

3)1908년 2월 프랑스의 젊은 교수 펠리오는 하노이대학에 와 있다가 이곳에 와서 역시 왕원록을 매수해서 寫經류 1500여 권 24상자, 회화와 직물류 25상자로 모두 49상자를 헐값에 사서 프랑스로 보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여기 포함됐다. 한자에 능통했던 그는 이미 「왕오천축국전」이란 기행문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래서 「왕오천축국전」이 프랑스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가 있다. 그는 1909년 5월 北京에 와서 중국의 학자들에게 장경동에서 발견한 일부 古書를 공개했다.

4)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든 淸나라 정부는 1910년 둔황에 남아 있던 古書 5000~6000권을 北京으로 옮겼다.

5)좀 늦었지만 1910년 일본의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탐험대도 이곳에 와서 왕원록이 감춰 두었던 나머지 古書 500여 권의 사본을 가져갔다. 이때 이 지역에서 가져온 자료의 일부가 우리나라 박물관에 남아 있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6)1914년 영국의 스타인이 다시 와서 왕도사로부터 寫經 570여 권 5상자와 자수·직포·회화 등을 싼 값으로 속여서 또 빼앗아갔다.

7)1909~1910년과 1914~1915년 러시아의 올덴부르크(S. F. Oldenburg)가 두 번 와서 벽화 10장을 뜯어 갔다.

8)1924년 미국 예일대학의 워너(L. Warner) 일행도 벽화 20여 판과 불상 몇 구를 가져갔다(정수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참조).

힘 없는 나라엔 정의가 통하지 않는다

당시 문명에 조금 눈을 일찍 떴던 나라들이 한다는 일이 이런 일이었으니, 애국심에 가득찬 漢族 청년이 그들을 싸잡아 『도둑놈들』이라면서 분개해하는 일도 무리는 아닌 듯싶었다.

나는, 「그 지식으로 무장된 약탈자들에게 나라의 보물을 헐값에 팔아넘긴 왕원록이란 자는 어떻게 된 사람인가, 그 사람이 그 사람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봤다. 세계적 보물을 잃은 중국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야시장에서 100위안 달라는 것을 50위안에 깎아서 산 실크로드 한글판 화보집에는 그를 이렇게 단호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둔황의 막고굴 역사를 소급해 보면 왕원록은 국가의 보배를 팔아먹은 놈이다」

지금 그 유물의 대부분은 대영박물관이나 파리 루브르박물관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公共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그러나 입바른 사람이 이런 말을 하지 않을지 생각해 볼 일이다.

『아니, 그래도 그 사람들 덕분에 그 귀중한 보물들이 오늘날까지 잘 보관돼 있지 않은가. 그냥 뒀더라면 지금 누구 손에 들어가 어떻게 됐겠는가! 제 조상이 만든 일을 제가 건사 못 하면 남의 손에 넘어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대한제국 말기와 日帝시대를 경험한 우리들도 많이 들었던 얘기다. 당시 列强(열강)이라던 나라들이 아프리카의 하이에나와 조금도 다름없어 보인다. 淸나라 말기 힘 없는 「巨人(거인)」은 이렇게 제 살을 뜯어 먹히면서도 어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경험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힘이 없는 나라엔 정의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할 만한 대목이다.

발 빠르게 변화하는 중국

깨끗한 중국 기차의 내부. 사막을 가로지르는 기차여행은 쾌적했다.

최신판 관광안내 책자엔 둔황의 기차역이 시내에서 128km 떨어진 류이안(柳園)에 있어서 버스를 타고 두 시간을 달려가야 한다고 돼 있다. 그러나 지금 중국의 철도당국은 둔황 교외에 철로를 끌어 들이고 임시 驛舍를 지어 놓았다.

실크로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중국 기차에 대한 惡名(악명)을 너무 많이 들어서 단단히 각오를 하고 여행길에 올랐다. 「지저분해서 온몸이 근질근질하다」, 「사람이 짐짝 취급을 받는다」, 「사 먹을 것도 별로 없다」, 「냉방이 되지 않아 후텁지근하다」… 뭐 이런 내용들이었다. 그래서 컵라면과 종이수건을 준비하고, 마음의 준비까지 단단히 했지만, 덥고 짜증나는 임시건물에서 기다리면서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막상 기차에 올라 보니 딴판이었다. 한 컴파트먼트 안에 2층 침대가 모두 4개 놓여 있었는데, 깨끗하고 냉방도 잘 됐다. 이부자리는 깨끗하게 세탁돼 있었다. 기차가 쉴 때마다 물을 보충해 줘서 화장실을 쓰고 세수를 하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역시 중국은 발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먹는 데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었다. 현지에서 싸준 김밥 도시락은 더운 날씨에 금세 시어서 먹을 수 없게 됐다. 기차가 설 때마다 현지인들이 과일을 팔았지만, 이 지역의 명산물이라는 「하미가(멜론)」 두 개를 샀더니 속이 곯은 것이었다. 그때 준비해 간 컵라면이 위력을 발휘했다. 미리 먹을 것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은 더러 굶기도 했다. 기차 안에선 먹을 것을 팔지 않았다.

그것 말고는 모든 게 훌륭했다. 기차는 이 사막 길을 시속 160km로 편안하게 달렸다. 차창 밖으론 또 끝없는 고비사막이 펼쳐졌다. 바다에 산과 계곡이 있듯이, 고비사막에는 제법 높은 산이 있고 그럴듯한 강도 있다. 그러나 그 산엔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았고, 강엔 물 한 줄기 흐르지 않았다.

도대체 이런 땅을 중국의 황제들은 왜 그렇게 차지하려고 안간힘을 썼을까. 지금은 이 사막 한가운데서 석유와 가스가 「퀄퀄」 쏟아져 나와서 중국이 노가 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땐 석유도 없었지 않은가.

의문은 또 있다. 이 사막 한가운데 있는 손바닥만 한 둔황의 언덕에 사람들은 왜 몰려들었으며 누가, 왜 굴을 파고 벽화를 그리고 불상을 만들었을까. 그리고 혜초는 뭐 하러 唐에까지 갔을까. 아니, 唐에 갔으면 됐지, 또 뭐 하러 그 먼 천축국을 돌아보고 왔을까.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는데 기차는 아무렇지 않은지 13시간을 지치지 않고 달려 마침내 이튿날 아침 우루무치 역에 닿았다.

그래, 맞다 길이로구나!

비행기를 타고 우리나라로 돌아오면서 참 세월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혜초가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못한 귀국길을 나는 6시간 안에 조는 듯 마는 듯 하며 돌아올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 맞다 길이로구나!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의문이 스스르 풀렸다. 지금으로 말하면 唐나라나 천축국은 문화와 문명이 몰려 있는 미국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쪽에 돈이 몰려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학자는 지식을 구하려고, 상인은 돈을 벌려고 그 길을 한사코 갔을 것이다. 그리고 황제들은, 생물의 種(종)들이 자기의 DNA를 퍼뜨리려고 목숨도 버리는 것처럼, 자기의 권력을 퍼뜨리려고 앞뒤 돌아보지 않고 西域 길을 뚫었을 것이다.

그렇다. 帝王과 지방 土豪(토호)들은 살아서는 권력을 향유하고, 죽어서는 西方淨土(서방정토)에 가고 싶어서 畵工(화공)과 일꾼들을 시켜 굴을 파게 하고, 벽화를 그리게 하고, 불상을 만들게 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곳을 지나던 상인들은 사막 길을 무사히 지나가서 큰돈을 벌어 오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그래, 길이다. 지금 우리에게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항공노선이 가장 큰길인 것처럼, 당시 중국에겐 실크로드가 문물을 받아들이고 전파하는 가장 큰길이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은 그 길을 통해서 불교 같은 문화를 받아들였고, 비단 같은 문명을 전파했다.

그렇지 않은가. 중국이 육상 실크로드에서 주도권을 빼앗기면서 서양에 해양 실크로드의 주도권을 넘겨주고 나서, 淸末에 중국 땅에 서양의 도둑들이 들끓었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천지에 서양의 DNA가 판을 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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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를 전파하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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