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李度珩(이도형·68) 「한국논단」 발행인 겸 편집인과 핸드폰으로 통화하면서, 잘 연결되지 않을 때를 대비해서, 집 전화번호를 물었다. 그랬더니 대뜸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냥 이 전화로 연락합시다. 盜·監聽(도·감청)이 심해서요』
그의 전세 아파트는 청와대와 가까운 서울 세종로 한복판에 있었다.
『대통령과 이웃해서 사시는군요』
그는 이 말에도 정색을 했다.
『아니, 아무리 이웃이지만 사는 게 틀려요. 그 양반이 나를 여기로 流配(유배) 보낸 거요. 청운동 집을 경매당하고 여기로 유배 와서 사는 겁니다. 옛날에는 섬으로 유배를 갔지만 요즘엔 서울 시내 한복판으로 옵니다』
집 주소를 적으려 하자 부인(權五壽·64)이 조용하지만 당황스런 목소리로 막았다.
『안 쓰셨으면 좋겠어요. 그 사람들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해요. 전화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쓰고 있어요』
그는 누가 뭐래도 보수 중의 보수고 우익 중의 우익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보수우익의 최전선에서 親共産勢力(친공산세력)과 맞서서 惡戰苦鬪(악전고투)를 거듭하며, 꼭 일본의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처럼 혼자서 처절하게 싸우고 있다. 왜 그럴까. 무슨 특별한 까닭이 있는 것일까.
李度珩씨가 사는 30여 평의 작은 아파트는 과연 그가 사는 집 같았다. 거실의 벽에는 나라와 병력이 富强해야 영세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뜻의 李承晩 前 대통령의 휘호 「國富兵强 永世自由」가 걸려 있었는데, 그것이 그의 집을 반대파들로부터 지켜 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뜻도 좋고 글씨도 좋아서 梨花莊에서 복사해 온 것이라고 했다.
인생의 分水嶺이 된 思想檢證 토론회
그는 맺힌 게 있어선지 대뜸 金大中 대통령 얘기부터 꺼낸다.
『金大中 대통령과 金玉均씨가 오래 전부터 자꾸 겹쳐 보였어요. 한국에서 정치적으로 실패하고 나서 일본에 가서, 일본에 비굴할 만큼 의존하는 게 내 눈엔 둘 다 좋게 안 보였어요.
내가 일본에 가서 수학한 대학이 게이오(慶應)대학인데, 거기에 金玉均에 대한 자료가 많았어요. 그걸 찾아보면서 이분이 꼭 이렇게 일본 사람들한테 천대까지 받으면서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고 해야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金大中씨도 한국에서 대통령에 낙선한 후 일본에 가서 한국 기자들은 만나 주지도 않고, 일본 기자들한테 의지해서 한국을 비난하는 게 못마땅하게 생각됐습니다. 일본 기자들은 金大中씨 말을 듣고 신문에는 좀 써 줬지만, 같이 만나서 얘기해 보면 굉장히 경멸적으로 얘기했어요. 일본 기자들은 책상에 다리를 얹어 놓고 거의 반말을 하면서 金大中씨 전화를 받았습니다.
내가 1971년 大選 때 金大中 후보를 찍었어요. 그런데 그 기대가 자꾸 실망으로 변하게 됐지요. 또 駐韓美軍을 철수해야 된다고 한다든지, 경제원조를 중단해야 된다고 한다든지, 減軍(감군)을 해야 한다든지, 예비군을 없애야 한다든지, 하는 金大中씨의 주장들이 북한의 주장과 비슷하거나 그쪽을 돕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이 쓰러지지 않겠어요』
그는 金大中 대통령에 관계된 행적, 발언 등을 한 보따리 싸놓고 말했다.
마침내 1997년 大選을 앞두고 10월8일, 서울 타워호텔에서 대통령 후보 사상검증 대토론회가 열렸다. 이것이 그와 金大中과의 관계사에 있어서, 또 그의 인생에 있어서 분수령이 됐다.
『TV에서 각종 각양의 후보초청 토론회가 열렸는데, 내가 볼 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안보문제를 묻거나 대답하는 일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자유민주주의, 시장 경제, 親美주의, 또 안보문제 이런 걸 중심으로 후보들한테 확인을 받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金鍾泌, 金大中, 趙淳, 李仁濟, 李會昌, 이렇게 다섯 사람을 초청했어요. 당시 처음 계획한 건 TV 중계는 생각도 못 하고 그냥 우리끼리 세미나를 하기로 한 겁니다.
그랬더니 네 사람은 초청에 응했는데, 국민회의 측에서 「우리(金大中 후보 측)는 거기 참석 안 합니다」 해요. 그래서 「아이쿠, 사실은 가장 강력한 후보 중의 한 사람인데 참여 안 하면 딱하게 됐구나」 생각했지요』
그런데 며칠 후에 그쪽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서울 태평로 코리아나 호텔 커피숍에서 그쪽 사람과 만나게 됐다.
『거기 나온 사람이 「金大中 후보가 나가려면 TV 생방송이 보장돼야 합니다」 그래요. 그래 「한국논단」 같은 조그만 잡지가 어떻게 생방송을 보장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저는 보장을 못 합니다」 했어요. 그랬는데 며칠 후 그 사람한테서 「李사장님, 저희 나가기로 했습니다」고 전화가 왔어요.「아, 그래요? 그거 참 고맙습니다」 그랬죠. 아닌 게 아니라 진심으로 고마웠다구요.
그러고 나서 회사에 갔더니 당시 편집부장이 「사장님, MBC에서 중계하기로 약속받았습니다」 그래요. 「그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어떻게 MBC가 다섯 시간을 중계한단 말이오?」 「아니오, 정치부장이 그랬어요. 보도의뢰라도 하려고 갔는데 뜻밖에도 다 해준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조환지 MBC서 중계한다니까, KBS하고 SBS까지 따라와서 생각지도 않은 3개 방송이 중계를 하게 된 겁니다, 그게』
마침내 1997년 10월8일 오전 11시 金大中 후보는 두 번째 연사로 등단했다. 이날 있었던 일을 녹취록(「한국논단」 1997년 11월호)을 참고해서 간단히 再구성한다.
DJ와 李度珩의 공방
金大中 후보는 먼저 10분간에 걸쳐 ▲나의 정치노선은 중도우파…, 수십년간 검증받았다 ▲YS는 야당시대에 보안법 폐지를 주장했지만 나는 대체입법을 주장했다 ▲1990년 북한의 연형묵 총리가 와서 환영만찬을 베풀 때 그가 「국가보안법으로 애국자들을 탄압하고 있다」는 등 남한을 장시간 비난할 때 나만이 큰 소리치며 반박했다는 요지로, 자기는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시장경제를 신봉하고,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사상이 건전한 사람임을 역설했다.
金大中-李度珩 두 사람 사이엔 이런 공방도 있었다.
〈사회자 『…첫째, 북한의 독재정치를 비난하고, 민주화를 촉구할 용의는 있으십니까? 둘째, 남북의 군축이 아닌 북한의 군비를 축소하여,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라고 촉구하실 수 있으십니까? 셋째, 金泳三 대통령의 민주화와 개혁에 대한 노력 및 업적을 평가하고, 李承晩의 건국과 구국, 朴正熙의 눈부신 경제발전 업적, 전두환의 무역흑자 업적, 盧泰愚의 민주화 노력 등을 평가하고, 그 대신 金日成 父子의 무력남침을 비롯한 죄상을 비난할 수 있는지. 넷째, 金日成 조문론을 6·25 남침 속죄요구로, 정부비판을 북한 노동당 비판으로 전향하실 수 있는지…』
金大中 『공산주의에 대해 비판하고 반대하라는 것은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사회자 『공산주의가 아니라, 金日成·金正日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이 자리를 빌어서 全국민이 보고 있는 가운데…』
金大中 『지난번 강릉사태 때, 그 자리에서 제가 공개적으로 북한 金正日이를 비난하면서, 국민 성토대회를 열자고까지 주장했습니다.…』
사회자 『남북한이 호혜평등한 입장에서의 군축이 아니고, 지금 저렇게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남침할 생각하지 말고, 너희 軍費를 먼저 줄여라, 이런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할 수 있습니까? 공약으로 내세울 수 있습니까』
金大中 『자기 국민 밥도 못 먹이면서 군비증강한 것은 일종의 죄악적 행동입니다. 그것은 당연히 우리가 요구할 수 있지, 왜 못 합니까?』
사회자 『조문론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金大中 『저는 조문을 주장한 일이 없습니다.…』
說往說來가 한두 차례 이어지고 나서 사회자가 결론을 내렸는데, 사회자에 끌려다니면서 성의를 다해 답변한 金大中 후보로서는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회자 『감사합니다. …새정치국민회의 金大中 총재께서는 사상검증을 받으셨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하고, 아직도 검증작업이 남았습니다만, 시간이 제한됐으므로 이것으로 끝마치겠습니다.…』〉
大統領 당선되던 날 再告發돼
李度珩 사장과 얘기를 계속한다.
―왜 사상검증이 안 됐다고 생각했습니까?
『사상검증이란 게 뭐냐? 우리가 대적하고 있는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를 검증하는 건데, 金大中 후보는 옛날에 많이 얘기(비판)했다는 식으로 넘어가더라구요. 그래서 점점 더 金大中씨에 대해서 의심을 굳히게 됐죠. 또 「金大中의 생전 거짓말 한 번 안 했다는 거짓말을 벗긴다」는 글도 「한국논단」 그 다음호(1997년도 12월호)에 썼고, 병역문제, 학력문제를 붙들고 늘어졌는데 그런 것들이 모두 선거법 위반에 걸린 겁니다』
―그래도 좀 無害無得(무해무득)하게 넘어가시지 뭘…. 그게 그쪽 진영을 화나게 만들었군요.
『그러니까 괘씸죄지. 고발장에도 그런 표현이 있어요. (고발장을 꺼내 보며) 「일국의 야당 총재를 마치 국민학교 학생 다루듯이 불손하게」 대했다는 게 고발 취집니다』
―저쪽에서 언제 어떤 방법으로 訴를 제기했습니까?
『1997년 12월 초에 大選을 보름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에서 「명예훼손,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나를 고발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서울지방검찰청, 고등검찰청에서 차례로 기각을 했습니다. 왜냐? 범죄구성 요건이 되지 않는다고. 정상적인 언론활동의 일환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대답을 들은 것이지 누구를 비방할 목적이 아니었다고 본 거죠.
그런데, 이듬해 1998년 2월25일 대통령 취임하는 날 그쪽에서 다시 고발을 했어요.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검찰이 몇 달 동안 사건이 별거 아니었던지 조사도 안 해요.
1998년 6월15일 검찰에 불려갔습니다. 아주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구형은 매섭게 합디다』
재판은 1998년 후반부터 1999년 8월까지 계속됐다. 그는 결심공판에서 2년 징역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고등법원을 거쳐 대법원에 상소 중이다.
―어떤 부분을 유죄로 인정받았습니까?
『허위사실 유포였지요』
그 혐의 사실을 다시 적으면 다시 허위사실 유포가 되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어떻든 그는 선거에 임박해서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면서 「說」로 떠다니던 얘기를 부각시켰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도 그의 용맹성은 조금도 수그러지지 않았다.
『다 밝혀집니다. 두고 보세요』
여덟 件의 爭訟 사건에 휘말리다
▲ 이도형 [한국논단] 관련 민형사 소송 사건
그와 「한국논단」은 1997년 이후 형사 두 건에 민사 여섯 건의 소송에 휘말렸다(도표 참조).
형사사건 두 건 가운데 5개 시민단체와 시민 두 명이 대통령 후보 초청 사상검증 대토론의 TV 방영 중 발언을 문제 삼아 명예훼손으로 제소한 사건은 무혐의 처리됐다.
민사사건 여섯 건 가운데 한 건은 1억원 배상 판결로 끝나 그가 살던 집이 강제경매돼 그 집에서 쫓겨났고, 나머지 다섯 건은 현재 고법에 항소 중이거나 대법원에 계류 중인데, 1심 판결로만 볼 때 적어도 5억원 정도는 배상해야 한다. 결국 그는 후보초청 검증대회가 말썽이 돼 집까지 잃게 됐다.
―1억원 배상판결을 받으셨는데 왜 집까지 빼앗기셨습니까?
『배상금 1억원에, 재판기간 중 이자를 치니까 6000만원이 돼요. 거기다 경비를 합치고 그 동안 빚진 것 갚고 하니까, 6억원짜리 집이 4억원에 낙찰됐는데, 그게 거의 다 날아갑디다』
―여기 집은?
『어떤 독지가가 얻어 줘서 살고 있지요』
누군가가 34평짜리를 1억5000만원에 얻어 줬다고 했다,
―무슨 발언이 문제가 돼서 집까지 날아갔을까요.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힌 일이오. 그 토론회에서 李會昌 후보 차례 때 패널리스트로 나온 박근 前 유엔대사가 「李후보께서는 총리 재직時에 자유총연맹과 같은 우익단체의 지원금을 대폭 축소시켰는데 이게 무슨 의도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李會昌 후보가 자유총연맹 부분에 대해 「자유총연맹이 국가예산으로 운영되다 보니까 관변단체가 돼서 선거 때 이용되는 면이 있기 때문에 건전한 시민단체로 자립시키기 위해서 예산을 깎은 것」이라고 대답했어요.
그래서 내가 시민단체에 인상이 안 좋았기 때문에 「李후보께서 건전한 시민단체라고 하셨는데 소위 경실련이라든가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참여연대, 가톨릭 인권위원회, 무슨 무슨 사제단… 이러한 시민단체는…」하고 좋지 않게 말했지요. 그러면서 내가 「이 말 자체가 명예훼손으로 또 추가 고소될지 모르겠어요」 했거든요. 그랬더니 내 말 그대로 그 사람들이 또 고소를 한 겁니다. 하하하…』
―왜 유죄가 됐을까요? 증거를 못 대셨군요.
『국가기관과 기업체에서 돈 받은 걸 증거로 제출했더니 채택이 안 됐습니다. 1심에서 10억원의 배상판결을 받고 즉각 항소해서 2심에 갔는데 날 보고 화해를 하라고 합디다. 나는 원칙에 관한 문제기 때문에 합의할 수 없다고 했지요. 그래서 10억원에서 1억원으로 감해진 겁니다』
『이 나라 80%가 共産化됐다』
―아직 대법원에 계류 중인데 왜 집행이 돼서 벌써 집이 경매됐습니까?
『글쎄, 대법원에서 판결이 뒤집히면 내가 또 찾아야지요. 우리나라 법에 1심 판결로도 집행을 할 수 있게 돼 있대요』
―지금 재산이 좀 있으십니까?
『지금은 없죠』
―그럼 이 재판에 다 지면 5억원이나 되는 돈을 어떻게 갚습니까?
『파산 선고받고 패가 망신하는 거죠. 내 배 째라고 하는 수밖에 없죠』
그러나 그에게도 희망은 있다.
『그러기 전에 이 정권 끝나고 재심 청구를 할 겁니다. 그러면 다시 찾을 수 있어요』
―죄송합니다만, 좀 편하게 사시지요. 「미안하게 됐다」고 하고 마시지요?
『천만에 말씀! 내가 뭐가 미안하고 뭘 잘못했어! 원칙에 관한 문젠데 그럴 수가 없죠. 우리나라가, 인권을 짓밟고, 거주 이전의 자유를 빼앗은 공산당이 싫어서 만든 나란데, 이걸 지금 공산당한테 팔아 넘기려고 한단 말요. 내가 볼 때는 지금 80%는 공산화가 됐다고 봅니다』
―80%요?
『그럼요. 의료제도 사회주의화했죠. 교육제도 사회주의화했죠. 인민위원회식으로 노조가 참여해서 운영한다고 하잖아요. 재벌도 실질적으로 해체돼서 정부가 영향력 행사하죠. 그나마 쪼끔 반대하는 언론은 파렴치범으로 몰아서 죽이고 있죠. 안 그래요? 어떻게 金正日이가 원하는 방향과 우연의 일치가 이렇게도 많습니까?
나머지는 헌법만 바꾸면 됩니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하는 국체와 정체의 조항, 제2조 주권재민 조항, 제3조 영토조항, 제4조 자유 민주 기본 원칙에 의한 통일 조항, 이 네 가지만 바꾸면 대한민국은 앉은 자리에서 소멸될 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 개헌 운운하는 소리가 나왔다가 쑥 들어갔지만 잘못하다간 큰일 납니다.
보세요,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가 자꾸 없어져 가고 있지 않아요? 시드니 올림픽에서 태극기가 없어졌잖아요. 그리고 소위 진보적인 단체가 하는 행사에서는 태극기도 안 내걸어요. 국민의례도 안 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체제에 대한 반항과 저항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나라엔 主人이 없다』
―아까 80%가 공산화됐다고 그러셨는데, 이 나라가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갈까요?
『주인이 있어야지, 넘겨 주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주인의 집단이 있어야지! 이번에도 보세요. 중국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사형집행했어도 모르고 넘어갔잖아요. 엘리트 집단이 주인의식이 없어요. 지금 우리나라에 주인이 없어요!』
그는 옛날을 회상했다.
『내 나이 또래가 6·25 때 전투를 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지만, 나는 열여덟 살 때 砲彈雨(포탄우) 속에서 전투를 한 사람이오. 결국은 수류탄을 맞고 죽었다가 깨어났어요. 열아홉 살 이후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오. 그러니까 불의를 본다든지, 내가 목숨걸고 싸워서 지킨 나라가 위태롭다든지 할 때는, 나는 용서할 수 없어요』
그러면서 그는 대한제국 멸망의 날을 얘기했다.
『어느 기록에 보니까 우리나라가 을사보호조약으로 망하던 날 대한문 앞에서 땅을 치고 통곡한 지사가 20여 명밖에 안 됐다고 그럽디다. 거기서 몇 발짝만 가면 商街였는데 다들 장사해서 먹고사느라고 정신이 없었대요』
―자칭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통일인데, 통일을 하자면 상대방하고 얘기를 하고, 공통분모를 찾아가지고 왔다갔다 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그쪽도 인정해야 하고, 얘기도 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날처럼 할 수밖에 없다고 볼 수도 있는데….
『어떤 상대냐가 문제지요. 예를 들면 사람을 인질로 잡고 도끼를 들고 있는 사람하고 다가가서 대화할 수 있습니까? 엔테베 작전처럼 그 인질을 잡거나 없애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이런 얘길 하면 극우적인 발상이다, 냉전적인 발상이다 하는데, 세계 역사를 보십시오. 한 번도 힘에 의하지 않은 통일이나 통합이 없었어요. 영국이 웨일즈를 통합할 때도 힘으로 했죠, 예멘이 그랬죠, 베트남이 그랬죠, 중국이 그랬어요.
독일이 평화적으로 흡수통일됐다? 천만의 말씀이죠. 서독은 정치적, 도덕적, 군사적으로 동독보다 굉장한 우위에 서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쪽엔 자유가 있었고 저쪽엔 자유가 없었지 않습니까? 또 동독 사람은 서독의 TV를 한 20년간 봐 왔지요. 내가 볼 땐 저쪽은 제롭니다, 제로!』
―그럼 대화로는 안 되네요?
『안 됩니다!』
―그렇다면 평화통일이란 있을 수 없는 거네요.
『평화통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金正日 정권이 붕괴되면 평화통일의 제1보를 내디딜 수 있지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나요?
『붕괴가 되도록 작용을 해야지요』
『햇볕정책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햇볕정책은?
『절대로 안 되지요, 그건! 그건 독재정권의 숨을 연장시켜 주는 거지요. 북한 주민 2200만명 가운데 공산당원과 군인 500만명한테는 혜택이 가겠지만 1700만명한테는, 이쪽에서 아무리 퍼줘 봤자 돌아가는 게 없어요』
―그 1700만명이 먹을 게 없어서 굶게 되면 체격적으로, 또 지능에 있어서 열등화될 것이고, 그러면 후에 통일이 됐을 때 우리 민족 전체에 커다란 손실이 될 것 아닙니까. 그러니 남는 것만이라도 나눠 줘서 같이 살면 안 될까요?
『그게 그 사람들한테 가야 말이죠. 우리가 그 동안 정부 차원에서 얼마나 많이 원조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경도 오지에 가면 굶어 죽는 사람이 많고 굶다 굶다 못해서 자꾸 탈출하잖아요』
―주면 누군가는 먹지 않겠어요?
『우리가 쌀을 도와 주면 그게 주민들한테 가지 않고 조선 인민군한테 간다고 합니다』
―그럼 가장 효과적인 對北 정책은?
『우선 무시(Benign Neglect)로 시작해야 합니다. 저쪽이 견디다 못해 지원 요청을 하면 반드시 조건을 내걸어야지요. 그리고 도와 주더라도 감시단이 가서 철저히 조사해야 하구요.
金大中 대통령의 잘못 가운데 하나는 「우리는 흡수통일을 포기하겠다」고 한 겁니다.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되지요. 우리 나라 헌법 제4조에 의하면 자유민주주의 기본원칙에 입각해서 통일을 해야 되고, 그러자면 어차피 흡수통일밖에 더 있어요? 힘에 의한 통일이 아니면 통일이 안 됩니다. 힘이 총을 쏘는 것만 아니죠. 도덕적으로 우세한 것도 힘이죠.
지금 관리들의 부패가 말이 아닌데, 이렇게 하면 공산주의 못 이깁니다. 옛날에 全斗煥 前 대통령이 현직에 있었을 때 이광요 싱가포르 수상을 찾아갔더니 「공산주의를 이기려면 첫째 부패하지 말아야 된다」고 했대요』
―金大中 대통령은 金正日씨를 만나고 나서 「대화할 만한 상대」라고 했는데, 그걸 보면 정당한 논리가 20은 넘었던 것 같은데.
『그건 자기 개인의 생각이지요. 또 金大中 대통령뿐만 아니라 TV를 본 상당수의 한국 사람들이 다 그러지 않았어요. 잘 웃고, 조크 잘 하고…, 그런데 천만의 말씀!』
그는 얘기를 하다 말고 혈당측정기를 꺼내놓고 혈당을 측정했다. 30년간 당뇨와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나와 세 차례 만나는 동안 정해진 시간에 꼭 혈당을 측정했다. 그가 얼마나 당뇨 관리를 잘 하는지 종합병원에서 실시하는 당뇨병 교실에서 성공사례로 그의 예를 든다고 했다. 여기서도 원칙과 규칙에 철저한 그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신문배달, 떡장수 하면서 苦學
여기서 옛날 얘기로 돌아간다.
그는 1933년 6월20일 서울 중구 광희동에서 아버지 李岐雨(이기우·1949년 작고)씨와 어머니 鄭音全(정음전·1969년 작고)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울 문 안에서만 14代를 산 완전한 서울 토박이다. 본관은 全州.
그의 아버지는 韓末에 무관이었고 할아버지(李敏九)는 吏曹參判을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조상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고 물으니 이런 말이 금방 돌아왔다.
『아, 나라가 허망하게 망했는데 아무런 역할도 못 하지 않았어요』
그는 번듯한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늦게 낳은 탓에 어려서부터 세파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고학을 했어요. 열세 살부터 신문배달을 했는데, 그때부터 광화문하고 인연이 깊었지요. 새벽마다 을지로 6가에서 광화문까지 뛰어와서 신문을 받아갔으니까. 동아일보와 서울신문을 배달했지요』
그는 계속한다.
『내 담당구역이 필동에서 장충초등학교 있는 데까지였는데 참 넓었어요. 그때 찢어지게 가난했어요. 아버지는 형님네 식구들하고 일제 말 疎開(소개)로 연천에 가 계셨고.
아침에는 이렇게 신문배달을 하고, 학교에 갔다 와서는 떡장수를 했습니다. 신당동에 가서 떡을 받아 가지고 종로 뒷골목 유흥가에 다니면서 팔았어요. 밤늦게 가지고 다니면 잘 팔아 줬어요. 그게 신문배달보다 나았지요.
그러고도 난 방학을 온전히 보내지 못했어요. 옆집이 모터 코일을 다시 감는 집이었는데, 그 공장에 가서 심부름을 했습니다. 거기서 받는 월급이 신문배달보다 훨씬 나았지요』
그는 그 바쁜 가운데서도 운동에 열중했다.
『내가 이러고 다니니까 조무래기 깡패도 만나고 해서, 힘을 길러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낙원동에 있던 고려권투회에 일주일에 두세 번씩 열심히 나갔는데, 거기서 서울시장하던 염보현씨를 만났어요. 그 양반도 권투 잘했지요. 그분은 경기중학에 다녔는데 나보다 한 학년 위였지요. 6·25 전쟁 날 때까지 권투를 했습니다』
그의 아파트 거실 TV 위에는 대한검도회에서 준 기념패가 놓여 있었다. 지금도 부회장 자리에 있다고 했다. 일본 특파원 시절 배운 실력이 4단이라고 했다.
육군 2등병으로 20일 만에 제대
그의 얘기는 계속된다.
『광희초등학교를 나오고, 일본 담임선생님이 「너는 경성공업학교(現 서울공고)로 가라」고 해서, 해방되던 해(1945년) 토목과로 진학했는데 잘 안 맞았어요. 그때 그 학교가 6년제였는데 5학년 올라가면서 6·25가 터졌잖아요』
그때부터 그에겐 가혹한 시련이 닥쳐왔다.
『그때 만 열일곱 살이었는데, 피난을 못갔어요. 길가에 나가면 의용군으로 잡혀가니까 이집 저집 피해다니다가 9·28 수복을 맞았지요. 그래서 을지로 2가 옛 중구청 자리에 학도의용군 본부가 있어서 지원하러 갔다가 TO(결원)가 없다고 퇴짜를 맞고, 장교 양성소인 종합학교를 지원했습니다. 이번엔 나이가 모자라서 안 되더라구요. 그래서 어물어물하다가 12월 14일에 영장을 받았어요』
―학생 때 공부할 틈이 없었겠네요.
『공부는 엉망진창이고, 다니기 싫은 공업학교를 다니니까 공부하기도 싫고. 그래서 맨날 톨스토이 책이나 읽고 그러는 문학소년이었지요. 李泰俊의 소설도 읽었어요. 金東仁의 「감자」도 읽고. 책을 참 많이 읽었어요. 닥치는 대로 亂讀(난독, 監讀)을 했으니까요. 그 亂中(난중)에 그래도 제일 잘한 게 국어하고 영어였어요』
다시 군대 얘기로 돌아간다.
『그때 비원에 병사구사령부가 있었지요. 1950년 12월18일 오전 10시까지 오라고 해서 거길 갔지요. 눈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안 주고 기다리게 하다가 오후 다섯 시는 돼서 어둑어둑해졌는데 어디로 가자고 해요』
그 당시엔 차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비원에서 출발해서 덕소→ 양평→장호원→수안보→문경새재→경산→청도→대구까지 14일간을 걸어서 갔다. 목적지는 대구 동인초등학교에 있던 제10교육대였다. 그들은 훈련도 받기 전에 녹초가 돼 있었다.
『저녁 때 교육대에 들어가니까 찌그러진 양재기에다 밥을 퍼서 깍두기를 팍 얹어 주는데, 야, 생전에 그렇게 맛있는 밥을 처음 먹어 봤어요』
그는 거기서 20일 동안 훈련을 받았다. 그는 지금도 그때 받은 군번을 외고 있다.
『제 군번이 0183900입니다』
그리고 전방으로 배치되기 직전에 군의관이 와서 「전방에 못 갈 놈 손들라」고 했다. 그때 그가 손을 번쩍 들었다. 군의관이 「왜 못 가느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치질이 굉장히 심합니다』
원래 치질증세가 있었는데다 추위 속에 심한 훈련을 받아 그 부위가 얼어 터져서 상당히 괴로웠다고 한다. 군의관이 말했다.
『까 봐!』
그는 엉덩이를 까 보였다.
그는 그때를 회상한다.
『피가 엉겨 붙어서 엉망이었지. 目不忍見이거든. 군의관이 발길로 엉덩이를 뻥 차더니 그 자리서 생각하지도 않은 제대증을 줬어요. 그래서 2등병으로 군대생활 20일을 했습니다』
美軍과 함께 砲彈雨 속에서 전투
그후 그는 거지가 됐다. 집에서 가져간 돈도 다 썼고, 대구엔 인척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1·4 후퇴로 오산까지 내려왔던 UN군이 다시 올라가, 서울 집을 향해 거지 행각을 하며 걸어갔다. 배가 고프면 농가의 사립문을 열고 『밥 좀 주세요』하고 구걸했다. 『밥 없어!』하고 쫓아내는 집도 많았다.
그렇게 걸어서 1951년 2월쯤 말죽거리까지 왔다. 거기엔 미군 3사단 10포병대가 있었다. 근처에 가니 먹다 버린 깡통들이 많았다. 그는 깡통들을 들고 정신없이 퍼 먹었다. 그때 지나가던 미군들이 뭐라고 했다. 그래서 그가 대꾸한 말이 이런 것이었다.
『아이 엠 어 스쿨 보이(I am a school boy.)』
미군들은 거지가 영어하는 걸 보고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게 내가 생전 처음 써먹어 본 영어요. 학교서도 영어는 괜찮게 했지만 그래도 입을 뗄 수 있었던 것은 6·25 덕분입니다. 피란을 못 하고 9·28 수복까지 석 달간을 서울 종로 4가에 있는 나이 많은 조카사위의 서재에서 숨어 지냈는데, 그 서재에 오노 게이지로(小野圭次郞)의 영문법 책이 있었어요. 밖엔 못 나가니까 그 책을 아주 열심히 집중적으로 공부했는데 그게 효과를 본 겁니다』
―그래 처음 해 보는 영어회화가 잘 통하던가요?
『책에서 본 대로 構文을 만들어 가면서 영어를 하니까, 미군들이 「영어를 곧잘 한다」고 해요』
그리고 여기서 그의 운명이 바뀐다.
『미군들이 나를 데리고 가더니 거지 같은 옷을 다 벗기고, 씻기고, 디디티(DDT)를 뿌리고 그래요. 그러더니, 군복에 UN 점퍼까지 가져다 입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포병대 전방 관측반 사병한테 내가 걸린 겁니다. 그 관측반이 장교, 선임하사, 무전병, 이렇게 세 명으로 돼 있었는데, 내가 그 무전병한테 걸려서 20㎏이나 되는 무전기를 짊어지고 다니게 된 겁니다』
―아니 치질 때문에 국군에서 제대했다면서요?
『치질은 목욕도 하고 약도 바르고 하니까 좀 좋아졌어요』
―싸울 만했어요?
『괜찮았어요. 최전방에서 군번 없는 전투병이 된 거지요. 전방으로 올라가면서 을지로 6가에 있던 우리 집에 가보니, 어머니는 어디로 피난 가셨고, 36권짜리 세계문학전집이 여기저기 팽개쳐져서 똥이 묻고, 엉망이 돼 있더라구요』
그후 그는 미군 포병 관측반을 따라 최전방에서 전투를 하며, 청량리→창동→의정부→동두천으로 北上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군이 전방관측을 잘 못 했어요. 미군이 한국군 9사단에 파견돼서 한국군을 도와 준 거죠. 그 관측반에서 나는 무전기를 메고 따라다니며 전투를 한 거지요. 요즘 좌익들이 들으면 진짜 개노릇 했다고 할지도 모르지요』
통역장교가 되어 두 번째 군대생활
그들은 1951년 5월에 강원도 평창·대화·현리 지구로 갔다. 거기서 그들은 그 유명한 현리 포위 속에 갇히게 됐다. 그의 부대는 거기서 千辛萬苦(천신만고) 끝에 빠져나와 마침내 죽을 구멍으로 들어갔다. 그 유명한 철의 삼각지대로 간 것이다.
『철원, 평강, 금화를 잇는 철의 삼각지대로 가서 9사단과 같이 백마고지 쟁탈전을 했습니다. 하루에 두세 번씩 올라갔다 쫓겨 내려오는 일이 계속 됐지요. 나는 이렇게 1951년 1월부터 11월3일까지 최전방에서 砲彈雨 속에서 싸웠습니다. 백마고지가 395고지였는데 국군이 지키고 있었고, 바로 앞에 1m 높은 396고지를 중공군이 차지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11월3일 그들은 바로 옆에 좀 낮은 281고지로 再배치돼서 갔다. 그들은 거기서 결정적인 순간을 맞았다.
『한밤에 조명탄이 터졌는데, 고지에서 밑을 내려다보니까 야, 뭐가 밑에서 오물오물 몰려서 올라오는데, 그게 다 중공군이야! 가만히 보니까 무기도 없고, 수류탄만 몇 개씩 가지고 있어요. 이거 큰일 났어요. 미군들은 그걸 보고 벌써 겁먹고, 「우리는 여기서 포로로 잡혀갈 테니, 여기 미국 사람 있다고 알려 주고 너 혼자 튀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냅다 내튀는데 바로 그때 중공군이 던진 수류탄이 꽝 하고 터졌어요.
앞을 보니까 시커먼 놈이 보여서 총검으로 콱 찌르고 내튀었어요. 나한테 수류탄을 던진 중공군 같았어요. 그러고 정신없이 뛰는데, 뒤에서 나한테 총을 쏘는데 한 방도 안 맞습디다. 그런데 한참 도망가다 보니까 내 갈비뼈 밑에서 피가 아주 많이 나왔어요(그는 옷을 들추고 상처 부위를 보여 줬다). 수류탄 파편에 갈비뼈 아래, 겨드랑이, 이런 델 네 군데나 맞았어요』
갈비뼈 밑의 파편은 그후 15년 동안이나 박혀 있다가 저절로 빠져나왔다고 한다.
『피를 흘리며 도망쳤지요. 얼음이 지핀 임진강을 건너가지고 9사단 대대 치료소에까지 가서 실신했습니다. 깨어 보니 포천 제5이동외과 병원에 누워 있더라구요. 거기서 40일 입원 치료를 받고 나왔지요』
나중에 보니 같이 싸우던 9사단 중대장과 전우들이 다 죽고 아무도 없었다. 그는 여기서 또 한 번의 轉機(전기)를 맞이한다.
『병원에서 나오는데 미군 포병대의 중대장이 나한테 소개장을 써주면서 「서울에 가면 MIC(軍 정보부대)가 있는데 통역시험을 보라고 해요. 지금 강북 삼성병원(옛 경교장)이 있던 자리에 MIC가 있었는데 거길 가서 시험을 봤더니 2급 통역으로 합격됐습니다. 그게 1952년 2월쯤이었지요』
그래서 그는 서울 중구 회현동에 있던 美 308 방첩대(CIC)에 가서 출판물 번역을 하게 됐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서울 시내 나가면 병역 미필자로 잡혀가는 겁니다. 제대증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데, 중공군과 싸우고 부상하는 바람에 옷을 다 찢어 버려서 그걸 잊어 버렸단 말입니다. 지금 같으면 병무청에 가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그땐 병사구사령부 본부가 대구에 있었는데, 우선 민간인은 한강도 건널 수 없었고, 그때 戰時(전시)라 그런 기록이 정리돼 있었는지도 모를 땝니다』
그러다가 그는 병역미필자로 청진동에 있던 서울지구 병사구사령부로 잡혀갔다. 거기서 그는 뜻밖에 병사구사령부 직원으로 일하고 있던 서울공업학교 동기동창을 만났다. 그 친구는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 통역장교 시험을 보라고 권했다.
그래서 그는 친구의 권유대로 통역장교 시험을 치르게 됐고, 그 시험에 합격해서 1953년 9월23일부로 통역장교가 됐다. 대구 동천비행장 옆에 있던 고급부관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고 육군 중위로 임관했다. 그 사이에 휴전이 됐다.
『이렇게 제가 두 번 軍복무를 했습니다. 통역장교 군번은 225581입니다』
통역장교가 돼서도 그는 9사단에 배속됐다. 거기서 27사단, 1군 사령부, 국방대학원을 거쳐, 1955년 통역장교에서 정훈병과로 병과를 바꾸게 됐다.
『그 무렵 내가 문학소년의 기질을 발휘해서 「思想界」에 글을 몇 번 쓰게 됐지요. 수필도 쓰고 모차르트에 관한 글도 썼는데, 그때 정훈차감이던 이영치 대령이 그걸 봤어요. 李대령도 가끔 「思想界」에 글을 썼거든요.
그분이 나를 불러서 「정훈장교가 될 용의가 없느냐」 해서 「대학 나온 사람들이 정훈장교를 하는데 저는 학력이 없습니다」 했더니, 괜찮다면서 미국 가서 교육받고 오라고 해서 또 시험을 쳐서 미국 정훈학교로 갔습니다. 거기 가서 7∼8개월 정훈 실무교육을 받고 병과를 정훈으로 바꿔서 정훈학교 교관이 됐지요』
드디어 조선일보 기자가 되다
그러다가 1958년 朴正熙 소장이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이었을 때 그 밑에 있던 번역위원회에 가서 정훈에 관한 교본을 번역하게 됐는데, 그는 거기서도 기를 펼 수가 없었다.
『거기 가 보니까 내 학력이 제일 초라해요. 다들 대학 출신이더라구요. 그때 EBS 사장을 하던 朴興壽씨가 거기 같이 있었어요. 거기 있던 장교 하나가 「사회에 나가서 뭐 하겠느냐」 해서 「글을 쓰고 싶다」고 했더니 「그럼 신문기자가 돼야 하는데, 그러자면 대학을 나와야 하니 대학에 진학하라」고 합디다. 그래서 1958년 건국大(야간) 국문학과에 입학해서 1962년에 졸업했지요』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습니까?
『그랬지요. 1960년 제대 前에 조선일보에 시험을 봤는데 1차는 합격을 했어요. 그런데 2차 면접 보러 가기 전에 5·16이 일어나서 못 갔지요』
그는 1964년에 軍에서 육군 대위로 제대해서 유솜(USOM) 농정과에 취직했다. 입사시험으로 토플(TOEFL)을 봤는데 거기서도 1등을 했다. 월급도 꽤 괜찮았다. 육군 대위 월급(7700원)의 두 배나 줬다. 출장비도 그만큼 줬다. 그러나 미국 사람을 따라다니는 게 영 신명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정훈차감 이영치 대령한테 찾아가서 사정을 말했다.
찾아가서 『「재미도 없고, 신문사엘 좀 가고 싶은데, 이젠 나이도 넘고(31세) 큰일났습니다」했더니, 「어, 그래? 그럼 휘(鮮于煇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장)한테 한 번 가보자」 그래요. 鮮于국장이 대령 출신으로 이영치 대령하고 정훈 1기 동기생이었거든요』
그는 李대령 뒤를 따라 조선일보 편집국으로 가서 鮮于煇 당시 국장을 만났다. 鮮于국장은 그의 이력서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경력이 괜찮구먼요. 여기 봉급이 적은데 할라우?』
『얼만데요?』
『9000원이오』
―정훈장교보다는 좀 낫군요.
『그렇지만 거기서는 먹는 것, 입는 것, 다 주잖아요. 그런데도 단순 계산을 해 보니 많은 것 같아서 얼른, 「하겠습니다」 그랬어요』
그때 초임기자가 월급으로 6000원을 받았다. 그는 3년 경력을 인정받고 들어간 셈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1964년 7월에 조선일보 기자가 됐다.
越南 특파원으로 또 한 번 죽을 고비
그는 외신부에 근무하다가 1966년에 越南특파원으로 나가게 됐다.
―특파원은 어떻게 가시게 됐습니까?
『그때 인기가 없었어요. 다 안 가겠다고 해서 내가 지원을 한 겁니다』
―체질에 맞으셨겠네요. 군대도 잘 알고….
『비교적 그랬죠. 거기서도 難攻不落(난공불락)의 베트콩 근거지인 메콩 델타를 미군과 越南 합동군이, 지금 아프간처럼, 헬리콥터를 타고 공수해 들어가는데 내가 끼었습니다. 거기서 죽을 뻔했지요. 그때의 기사가 조선일보에 실렸는데, 커다란 제목이 「본사 특파원 危機一髮(위기일발)」이었지요. 아 헬리콥터가 그 전투하는 한복판에 우리를 내려 놓고 가버리잖아요. 거길 빠져나오느라고 죽다 살았지요. 네 시간 동안 전투를 치렀는데 6·25 때도 그렇게 치열한 전투는 없었어요』
이때 시끄러워서 내쫓았다던 손녀(2)와 손자(1)가 그들의 부모와 함께 들어왔다. 서울 근교에 사는 아들 내외가 일요일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온다고 했다. 조용하던 집안이 순식간에 왁자지껄 와당퉁탕 해서, 우리는 그 사이 부인이 차려 준 점심을 먹고, 그의 서재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韓·日史 관련 책들이 가득했다. 이사하면서 아직 상자에서 풀지 못한 책도 많았는데, 그 상자 겉에는 그 안에 들어 있는 책이나 자료의 목록이 자세하고 꼼꼼하게 붙어 있었다. 그것으로도 그의 성격의 단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우선 그 자료들에 대해 설명했다.
『내가 언젠가 이걸(한국논단) 그만두고, 韓日關係史를 살펴보면서, 韓國民 自省論을 쓰려고 일본에 가서 이렇게 자료를 모은 겁니다. 복사비만 400만원이 더 들었어요』
여기서 그의 역사론이 나온다.
『우리 역사 교육을 보면 근현대사를 독립운동사 중심으로 가르치는데, 난 이게 잘못됐다고 봐요. 의문이 생기지 않아요? 왜 그렇게 독립운동 잘하고 애국자가 많은데 나라가 그 모양이 됐느냐고. 나는 나라가 그 모양이 된 건 절대로 지도계층이 잘못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책꽂이에서 「日韓合邦秘史」를 뽑아왔다.
『내가 이걸 2만5000엔을 주고 샀는데 일본의 浪人 우치다 료헤이가 쓴 거요. 여기 보면 당시 우리나라 팔도의 한다 하는 유지들이 돈을 걷어서 바치면서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겨 달라고 한 내용이 다 나와요. 이걸 다 쓰면 사방에서 또 고소한다고 덤벼들지도 몰라요』
―이제 그런 거 그만하면 어때요?
『글쎄, 정치하는 사람들이 권력에 대한 욕심이 많듯이 나는 아는 것도 부실한데다 글도 잘 못 쓰는데, 의욕은 무지하게 앞서거든요. 이것뿐만 아니라 「金大中 의혹」도 쓰고 싶어요. 내년에 칠순을 기념해서 그 동안 쓴 것 가운데 괜찮은 것을 골라 책으로 내고 싶기도 하고』
집 빼앗기고도 氣가 살아서 당당해
그는 1961년 통역장교 시절에 부인(權五壽)을 만나 결혼했다.
『집사람은 내가 건국大 다닐 때 동급생이었던 여학생의 친구였어요. 소개로 만났지요』
그들은 「思想界」 사장이었던 張俊河씨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가끔 「思想界」에 글을 쓴 것이 인연이 되어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이번에 집까지 빼앗겼으니, 부인께 참 미안하셨겠네요.
『참 불행 중 다행으로 저 사람이 나하고 생각이 같아요. 괜한 짓을 해서 그런 일을 당했다든가 하는 소리를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어요. 어떻게 보면 평생 동지지요. 저런 반려를 만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지요』
그와 오랫동안 조선일보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김윤곤(63·논설위원 역임)씨는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가정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으면서도 부인이나 가족에 대해 조금도 미안하다는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일본의 明治維新 때 보면 그때 국가에 헌신했던 사람들이 가족 같은 것은 우습게 알았다」면서, 그렇게 당했으면서도 오히려 氣가 살아서 더 당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위로 딸 셋을 두고 네 번째로 아들을 두었다.
『내 자식 가운데 좌경한 놈은 한 놈도 없어요』
그로서는 큰 자랑거리일 것이다.
다시 옛날로 얘기가 돌아간다.
그는 1967년 월남에서 돌아온 후 국방부 출입을 4년간 한 다음 다시 외신부로 돌아가 근무하다가, 일본 게이오(慶應)대학 신문연구소에 가서 공부하게 됐다.
그때 그는 일본 열도를 돌아다니며, 일본이 다시 군사대국이 되는 걸 염려하는 장문의 연재기사를 조선일보에 썼는데, 뒤에 그 기사가 「벚꽃은 피려는가」라는 단행본으로 엮어져 나왔다.
게이오 대학에 1년간 가 있는 동안, 그는 유감 없이 실력을 발휘했다.
『400자 원고지로 125장이나 되는 논문을 일본말로 썼어요. 「일본의 신문 사설에서 본 한국관」에 대해서 썼습니다. 게이오대학 설립자인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論吉)가 당시 時事新報라는 신문을 내고 있었는데, 그 사설의 한국관계 논조하고 내가 가 있을 1975년 당시의 아사히(朝日)신문 사설 논조하고 비슷하더라 말입니다. 후쿠자와가 脫亞入歐論(아시아를 벗어나서 유럽의 대열에 들어가자는 논리)을 펴 가면서, 중국과 한국을 먹고 대륙에 진출하자는 주장을 폈었지요. 이 논문이 나중에 게이오 대학에서 나오는 신문연구소 연보에 실렸는데, 그게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고 해요』
『조총련 취재에 물불 안 가려』
거기서 그는 「상당히 충실한」 1년을 보냈다고 한다. 그는 돌아와서 외신부에 2년간 근무했다. 이때의 얘기를 김윤곤씨는 이렇게 말한다.
『조선일보 편집국 내에서 1960∼70년대에 영어와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면서 縱橫無盡(종횡무진)으로 뛰는 민완기자는 李度珩형 선배가 유일했다고 볼 수도 있지요. 외신부에 근무할 때 도끼만행 사건이 일어났는데(1976년 8월18일) 李선배는 사회부 출입처인 판문점으로 달려가서 세계적인 특종을 했습니다. 그때 金日成이 북한 인민군총사령관의 자격으로 유엔군 사령관에게 사과서신을 보냈는데 이걸 특종 보도해서 세계의 언론들이 다 받았지요』
1978년 2월28일 駐日 특파원으로 발령받았다. 당시 그는 외신부 차장이었다.
그는 3월에 일본 도쿄에 부임했다. 거기서 그는 7년 동안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이 실력을 100% 발휘했다.
『나는 말이 자유자재로 되니까 일본 신문에 의존하지 않고 여기저기 쑤시고 다녔지요. 그랬더니 기자실이 바짝 긴장하게 됐지요』
그때의 일을 당시 일본에서 함께 한국일보 특파원으로 근무했던 宋孝彬(68)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駐日 특파원들이 가장 기피하던 곳이 조총련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조총련에 접근하는 것이 두렵고 어렵고 했지요. 그런데 李度珩씨는 조총련 취재에도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어요. 무슨 대회가 열리면 그 본부에까지 쫓아가서 취재했지요. 기자는 초청하지 않았다면 기자가 초청받고 다니느냐면서, 막아도 막 뚫고 들어갔습니다. 그 바람에 조용하던 특파원 세계에 난리가 나곤 했지요』
다시 李度珩씨에게 질문을 던진다.
―특파원 시절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교과서 파동이었지요. 그건 내가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1981년 9월에, 중학교 역사 교과서를 쓴 東京대학의 어떤 교수가, 나한테 교과서와 원고를 가지고 와서, 「당신은 한국 사람이니까 내가 쓴 게 맞는지, 문부성에서 고쳐 쓴 게 맞는지 한 번 보라」고 해요.
원고를 보니까, 「한국인이 강제로 동원돼서 신사참배를 했고, 일본어를 국어로 쓰라고 강제했고, 강제로 징용·징병을 했다」고 씌어 있어요. 그런데 문부성은 「강제로 한 일이 없다, 자발적으로 했다」, 이렇게 고쳤더란 말입니다』
그는 「큰 건」 하나 잡았다고 생각하며 기사를 서울로 보냈는데 서울에서는 그때만 해도 일본 교과서에 관한 感이 별로 없어서, 기대보다 작게 1면 4단 기사로 처리했다.
『내가 야단야단을 하고 소리소리 질렀는데도 일과성으로 끝나고 말았어요』
그 이듬해 6월22일, 일본 신문들이 새로 바뀐 교과서를 들춰 보고 「일본이 중국에 侵略을 했는데, 進出로 썼다」고 크게 보도했다.
『난 그때 또 신바람이 나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기사를 보냈는데, 이번엔 숫제 조선일보엔 나가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어디 다른 신문에 쪼그맣게 나갔던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그걸 보고 사설을 썼어요. 이렇게 되니까 서울에 주재하던 일본 기자들이, 한국인들이 들고 일어났다고 기사를 보냈고, 또 중국에서도 「進出」건을 붙들고 늘어져서, 문제가 一波萬波로 커졌지요. 그렇게 되자 나도 본격적으로 교과서 문제를 들춰내서 문제를 삼았습니다.
이게 계기가 돼서, 그때 崔秉烈 편집국장이 연재를 하자고 해서 「일본을 알자」 시리즈를 싣기 시작했죠. 이런 분위기 때문에 조선일보가 주동이 돼서 독립기념관을 만들자고 했고 또 모금운동을 했지요』
결국은 그가 일으킨 교과서 문제가 독립기념관 건립까지 이어진 것이다.
駐日 특파원 李度珩의 전성시대
이런 일련의 활동으로 그는 뜻하지 않는 상도 받았다.
『1983년 내가 일본에 있는데 중앙대학교에서 제정한 승당 언론상(보도부문) 수상자로 결정됐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는 그 이전(1978년)에 제1회 관훈언론상을 받았고, 이듬해(1984년)엔 일본 라디오 단파사 제정 단파 아시아 상을 받았다.
―駐日 특파원 시절이 「李度珩의 전성시대」였던 것 같군요.
『그렇지요. 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그는 그밖에도 얻은 게 너무 많았다고 한다.
『일본 가서 보니 내 자신이 너무나 일본을 모르면서도 아는 척을 했어요. 일본 가서도 책을 참 많이 읽었는데, 보면 볼수록 일본을 제대로 알기가 어려웠어요. 또 反日은 쉬운데 克日은 참 어렵다는 것도 알았지요. 그 어렵다는 심정을 표현하는 책을, 일본에서 특파원을 만 7년 하는 동안에 일본어로 세 권 썼어요』
―네? 일본어로?
『네, 1982년에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걸 일본어로 일본서 출판했는데 그게 「한국인이 보는 일본(1984년, 공저)」이지요. 21刷나 찍었습니다 이걸로 일본서 단파 아시아賞을 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출판이 됐지요』
그는 또 「일본의 한국 보도는 믿을 수 없다(1980년)」도 7刷나 찍었는데, 이것은 신문에 연재하지 않고 직접 일본어로 쓴 것이다. 이 책은 게이오大에서 쓴 논문이 바탕이 됐다.
그는 「서울로 보내는 도쿄통신」도 일본어로 써서 일본서 출판했다(1984년). 이 책은 서울에서도 「동경통신」이란 이름으로 출판됐다.
그는 서울에서 우리말로도 「벚꽃은 피려는가(1974년)」, 「흑막, 한일 외교교섭 비화(1986년)」, 「일본, 다시 보고 생각한다(1988년)」 같은 일본관계 책을 냈고, 최근엔 「건국의 아버지 李承晩(2001년)」을 펴냈다.
그는 1985년까지 일본에서 7년간 있으면서 부국장 대우까지 승진했다. 귀국해서 부국장으로 승진, 논설위원실로 가서 1992년까지 또 7년간 논설위원으로 재직했다.
『논설위원실에 가서 일본 관계 전문으로 일할까 했더니 그게 잘 안 됩디다. 남북 관계, 군사안보 관계에다 환경 문제에까지 사설을 쓰다 보니까 잡탕이 돼서 안 되겠어요. 그래서 다시 일본에 가서 韓日관계 책을 쓰기 위한 준비를 했던 거지요(1992∼1993)』
「行動하는 良心」 對 「行動하는 良心」
―전에 사시던 집은?
『종로구 청운동 1번지 벽산 빌리지 83坪짜리 집에 살았습니다』
―집 뺏기고 나오던 날 심경이 어떠셨어요.
『사실 집사람한테 신세 많이 지고 삽니다. 나는 우왕좌왕하다가 여관에 가서 잤어요. 思無邪(사무사:마음에 사악한 생각이 없음)지요. 그러나 자기 뜻대로 사는 게 그리 쉽지는 않다, 내가 쉽지 않은 길을 택한 거다, 이렇게 생각할 때 후회는 없지요』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성격이 참 유별나다고 말한다. 그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등장하는 말들이 「원칙주의자」, 「보수 우익」,「 트러블 메이커」, 「싸움꾼」 같은 단어들이다. 그를 지칭하는 이 단어들엔 그의 장점과 단점이 混在해 있다.
그와 「한국논단」을 함께 출범시켰던 前 보사부 장관 宋貞淑 여사(65)는 그를 이렇게 평했다.
『1980년 이후에 세상이 어지러워지면서 모두 자기 빛깔을 감추게 됐는데 이분은 자기 빛깔을 감추지 않고 더욱 선명히 드러냈습니다. 그런 면에선 나도 같아 서로 의기투합했지요.
또 그분은 너무 엄격해서 같이 사는 분들이 성가시겠다고 생각될 때가 있어요. 한 번은 각社 논설위원들이 일본에 함께 가게 됐는데, 그때 보니까 어떤 분한테 예의를 안 지킨다고 막 야단을 치는 겁니다. 저렇게까지 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어요. 그분은 자기 잣대에 맞지 않으면 참지를 못하는 것 같았어요. 아주 원칙주의에 철저하지요. 말인즉 옳은데 자꾸 그러면 남들에겐 골치 아프고 대하기 싫다는 인상을 줄 수 있지요. 이게 큰 약점일 겁니다』
宋孝彬씨도 같은 말을 한다.
『우리가 글로 앉아서 비판하는 건 잘하는데 행동하는 건 잘 못 해요. DJ가 말한 「행동하는 양심」은 별로 없어요. 그런데 李度珩씨는 행동하더라구요. 저항에 대해 굽힘이 없어요. 우린 웬만하면 손들고 말지만』
그러니까 「행동하는 양심」 對 「행동하는 양심」인 셈이다. 다시 李度珩씨에게 질문을 던진다.
대통령 취임 후 발행부수 우수수
―지금 하시는 일이 좀 외롭지 않으세요. 지원군도 좀 있었으면 좋겠고, 「한국논단」도 좀 많이 나갔으면 좋겠고, 보수 우익이라는 사람들이 원망스럽지는 않으세요.
『그런 건 없고, 이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孤立無援(고립무원)하도록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나 하나를 두고 집중적으로 고소·고발을 해서 배상금을 물리게 합니다. 이담에 재판에 또 져서 배상금을 물게 되면 난 파산선고를 하게 되고 그러면 난 인격적으로 없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만들려는 겁니다. 反共, 反金大中 논객 하나를 없애버리는 게 이 사람들 목표요』
―「한국논단」은 어떻게 출발했습니까?
『일본의 산케이 신문처럼 확실하게 보수 우익의 목소리를 내는 매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1989년에 벽산그룹을 비롯한 7개 기업이 중심이 돼 가지고 주식회사로 출발한 거지요. 그 다음에 대한민국의 한다 하는 기업들이 다 들어 왔었지요.
그때 나는 아직 조선일보에 있을 때니까 梁好民 선생을 사장으로 모시고 출발한 겁니다. 그러다가 1992년에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1993년부터 사장이 됐는데, 그 동안에 자본금을 많이 까먹어서 인수받은 돈이 4억9000만원밖에 안 됐어요』
그후 그는 자본금을 8억원까지 늘리고, 잡지 발행 부수도 2만5000부까지 올렸다. 여기까지는 잘 왔는데 그만 1997년 대통령 선거와 사상검증 토론을 고비로 곤두박질을 한다.
『金大中 대통령이 취임하면서부터 急轉直下(급전직하)요. 부수가 매달 우수수 떨어졌지요, 또 광고주도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지금 주주도 대기업은 다 나갔어요』
―광고주는 왜 떨어져 나갔지요?
『무서워서 누가 광고를 내요. 지금 광고주가 딱 세 군데요. 조선일보, 조광인쇄, 월간조선』
―물론 적자겠지요?
『한 달에 잡지 내는 데 나가는 돈이 1200만원쯤 됩니다. 우리 집사람이 수금원이오. 총판에 한 달에 몇 번씩 돌아다니면서 10만원도 받아오고, 20만원도 받아오고, 이렇게 걷어 오는 돈이 700만원쯤 됩니다』
―500만원은 어떻게 메웁니까?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찾아다니며 도와 달라고 구걸을 합니다. 저 사람(부인)은 수금해서 700만원을 걷어 오고, 나는 구걸해서 500만원을 걷어 오고, 이래 가지고 매달 때워 나갑니다』
―빚도 많지요?
『조광인쇄에 6000만원 빚이 있는데 이걸 더는 늘지 않게 하려고 별의별 애를 다 쓰고 있지요』
―옷도 사 입고 밥도 먹어야 하는데, 그 돈은 어디서 나옵니까?
『애들이 여럿이니까 조금씩 도와 주나…, 나는 잘 몰라요. 저 사람이 꾸려 나가니까. 또 생활비도 별로 안 들어요. 난 65세 넘어서 전철 타면 공짜니까 교통비도 별로 안 들고』
―속 편하게 「한국논단」 그만둬 버리시지요.
『그만둘 수 없지요. 증거도 남겨야 되고…. 또 5000명 독자에 대한 신의도 있고, 100만원 200만원 도와 준 사람에 대한 보답을, 말로만 反독재, 反부정하지 말고 책으로 해야지요.
또 이렇게 골치 아프고 복잡한 일을 할 만한 사람이 바보 같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사실 나도 코에서 단내가 나서 몇 사람한테 떠넘기려고 해 봤는데, …없어요』
―이런 일을 하면 「공산화」를 막을 수 있습니까?
『조선노동당이 벌써 반세기 동안을 당 강령과 헌법에 따라 남조선 적화를 위해서 조직적으로 노력을 해 왔습니다. 그 결실이 지금 이 정부 들어서서 맺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 혼자 힘으론 難攻不落이야! 힘들어요!』
―이래저래 안 될 바엔….
『그렇지만 안 할 수가 없어요. …동조자는 있으니까』
『나는 너무 원칙주의자』
―자신의 단점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너무 지나치게 원칙주의잡니다. 10월31일 역대 관훈클럽 총무들이 중국 上海(상해) 구경 간다고 합디다. 나도 가자고 하길래 안 간다고 했어요. 관훈클럽에서 공짜로 금강산 구경시켜 준다고 가자는데 안 갔어요. 백두산 가자는 것도 안 갔어요』
―上海에는 왜 안 가셨어요?
『중국이 한국 마약사범 사형시켰잖아요. 기분 나쁘잖아요. 내가 왜 거기 가서 한 푼이라도 보태줘요? 애국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나는 이것도 애국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에 관한 인물 DB(데이터 베이스)에, 존경하는 인물이 李承晩으로 돼 있어서 물어 봤다.
―李承晩 前 대통령은 어떻게 존경하게 됐습니까?
『내 군대 있을 때도 李承晩 한 번도 안 찍었네! 「한국논단」 형편이 괜찮을 때 6월호를 내게 됐는데, 그때 마침 대학생들 의식 조사한 걸 보니까, 李承晩에 대한 평가가 金日成만도 못하더라구요.
그래서, 이거 안 되겠다, 생각하고 梨花莊에 가서 자료를 좀 내놓으라고 했더니, 엄청난 자료를 내놔요. 그걸 사흘 간 섭렵하면서, 이분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이 탄생도 못 했을 것이고, 이분이야말로 몇 세기에 한 번 날까말까한 위인이란 결론을 얻었어요』
이때의 자료가 「건국의 아버지 李承晩」(2001)이란 책으로 나왔다.
『죄 지은 자 법정에 세우겠다』
우리는 이튿날인 11월5일, 서울 마포구 마포동 한신빌딩 901호에 있는 한국논단 사무실에서 다시 만났다. 사무실은 한강과 여의도가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썩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7∼8평쯤 돼 보이는 방안은 옹색하기 그지 없었다.
방안이 온통 책더미로 가득차 있어서 손님인 내가 앉을 자리도 없었다. 자원봉사나 다름없는 동료 朴花珍 편집대표와 다른 직원 한 명이 앉아서 일을 보고 있었다. 나는 조그만 의자에 겨우 비집고 앉아 얘기를 나눴다. 내가 사무실을 둘러보며 안됐다는 표정을 짓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처음 여기 들어올 땐 이 옆방 하고 두 칸을 사서 들어왔어요. 그것도 좁아서 신문로 널찍한 데로 갔다가 DJ 정권 들어서면서 쫄딱 망해 가지고 다시 여기로 오면서 옆방을 팔았어요. 그후에 그래도 부족해서 이 방도 팔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방에 세들어 있는 겁니다』
―경력을 보니 한때 민주평통 자문위원도 하셨군요.
『閔寬植씨가 언론계 대표로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갔는데, 金大中 대통령 들어서면서, 나하고 맞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작년(2000년) 내 생일(6월20일)을 기해서 탈퇴하고 성명을 내고 아주 관계를 다 끊었습니다』
우리는 세 번째로 11월8일 서울 마포 「한국논단」 근처의 식당에서 만났다.
―대충대충 좀 살아보시지요? 그만 하라면 그만 하고.
『내가 참지 못하는 구석이 있어요. 내가 볼 때 불의라고 생각되고 의혹이 생기는 것은 반드시 기록을 하고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논단」이 그런 걸 기록하는 증겁니다. 그런 걸 가지고 있다가 이담에 밝혀야지요. 그리고 국민과 납세자에게 죄지은 자들을 언젠가는 법정에 세워야 합니다. 편하게 사는 법과 어럽게 사는 법이 있는데 나는 편하게 사는 법을 몰라요』
얘기를 마치고 헤어져서 한참을 걸었는데 뒤에서 李度珩 사장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나를 불러 세웠다.
『우리 가족 얘기는 쓰지 마세요. 나 때문에 시달리고 불이익을 당하면 안 되니까』
내가 잠시 멍 하니 쳐다보고 있으니까 그가 덧붙였다.
『내가 지금 지하세계에 살고 있는 지하인간 같아요』
173㎝의 단단한 체구, 언제나 꼭 맞는 옷을 입고 다니는 신사가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니 宋貞淑 여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생긴 대로 사는 걸 어느 정도 허용하고, 자기 의지에 의해 행동하는 것에 대해 평가해 주고 받아들여 주면 참 좋겠는데, 지금은 정말 그렇지 못한 사회 같아요』
정말 그렇게 성숙한 사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냥 이 전화로 연락합시다. 盜·監聽(도·감청)이 심해서요』
그의 전세 아파트는 청와대와 가까운 서울 세종로 한복판에 있었다.
『대통령과 이웃해서 사시는군요』
그는 이 말에도 정색을 했다.
『아니, 아무리 이웃이지만 사는 게 틀려요. 그 양반이 나를 여기로 流配(유배) 보낸 거요. 청운동 집을 경매당하고 여기로 유배 와서 사는 겁니다. 옛날에는 섬으로 유배를 갔지만 요즘엔 서울 시내 한복판으로 옵니다』
집 주소를 적으려 하자 부인(權五壽·64)이 조용하지만 당황스런 목소리로 막았다.
『안 쓰셨으면 좋겠어요. 그 사람들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해요. 전화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쓰고 있어요』
그는 누가 뭐래도 보수 중의 보수고 우익 중의 우익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보수우익의 최전선에서 親共産勢力(친공산세력)과 맞서서 惡戰苦鬪(악전고투)를 거듭하며, 꼭 일본의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처럼 혼자서 처절하게 싸우고 있다. 왜 그럴까. 무슨 특별한 까닭이 있는 것일까.
李度珩씨가 사는 30여 평의 작은 아파트는 과연 그가 사는 집 같았다. 거실의 벽에는 나라와 병력이 富强해야 영세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뜻의 李承晩 前 대통령의 휘호 「國富兵强 永世自由」가 걸려 있었는데, 그것이 그의 집을 반대파들로부터 지켜 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뜻도 좋고 글씨도 좋아서 梨花莊에서 복사해 온 것이라고 했다.
인생의 分水嶺이 된 思想檢證 토론회
그는 맺힌 게 있어선지 대뜸 金大中 대통령 얘기부터 꺼낸다.
『金大中 대통령과 金玉均씨가 오래 전부터 자꾸 겹쳐 보였어요. 한국에서 정치적으로 실패하고 나서 일본에 가서, 일본에 비굴할 만큼 의존하는 게 내 눈엔 둘 다 좋게 안 보였어요.
내가 일본에 가서 수학한 대학이 게이오(慶應)대학인데, 거기에 金玉均에 대한 자료가 많았어요. 그걸 찾아보면서 이분이 꼭 이렇게 일본 사람들한테 천대까지 받으면서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고 해야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金大中씨도 한국에서 대통령에 낙선한 후 일본에 가서 한국 기자들은 만나 주지도 않고, 일본 기자들한테 의지해서 한국을 비난하는 게 못마땅하게 생각됐습니다. 일본 기자들은 金大中씨 말을 듣고 신문에는 좀 써 줬지만, 같이 만나서 얘기해 보면 굉장히 경멸적으로 얘기했어요. 일본 기자들은 책상에 다리를 얹어 놓고 거의 반말을 하면서 金大中씨 전화를 받았습니다.
내가 1971년 大選 때 金大中 후보를 찍었어요. 그런데 그 기대가 자꾸 실망으로 변하게 됐지요. 또 駐韓美軍을 철수해야 된다고 한다든지, 경제원조를 중단해야 된다고 한다든지, 減軍(감군)을 해야 한다든지, 예비군을 없애야 한다든지, 하는 金大中씨의 주장들이 북한의 주장과 비슷하거나 그쪽을 돕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이 쓰러지지 않겠어요』
그는 金大中 대통령에 관계된 행적, 발언 등을 한 보따리 싸놓고 말했다.
마침내 1997년 大選을 앞두고 10월8일, 서울 타워호텔에서 대통령 후보 사상검증 대토론회가 열렸다. 이것이 그와 金大中과의 관계사에 있어서, 또 그의 인생에 있어서 분수령이 됐다.
『TV에서 각종 각양의 후보초청 토론회가 열렸는데, 내가 볼 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안보문제를 묻거나 대답하는 일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자유민주주의, 시장 경제, 親美주의, 또 안보문제 이런 걸 중심으로 후보들한테 확인을 받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金鍾泌, 金大中, 趙淳, 李仁濟, 李會昌, 이렇게 다섯 사람을 초청했어요. 당시 처음 계획한 건 TV 중계는 생각도 못 하고 그냥 우리끼리 세미나를 하기로 한 겁니다.
그랬더니 네 사람은 초청에 응했는데, 국민회의 측에서 「우리(金大中 후보 측)는 거기 참석 안 합니다」 해요. 그래서 「아이쿠, 사실은 가장 강력한 후보 중의 한 사람인데 참여 안 하면 딱하게 됐구나」 생각했지요』
그런데 며칠 후에 그쪽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서울 태평로 코리아나 호텔 커피숍에서 그쪽 사람과 만나게 됐다.
『거기 나온 사람이 「金大中 후보가 나가려면 TV 생방송이 보장돼야 합니다」 그래요. 그래 「한국논단」 같은 조그만 잡지가 어떻게 생방송을 보장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저는 보장을 못 합니다」 했어요. 그랬는데 며칠 후 그 사람한테서 「李사장님, 저희 나가기로 했습니다」고 전화가 왔어요.「아, 그래요? 그거 참 고맙습니다」 그랬죠. 아닌 게 아니라 진심으로 고마웠다구요.
그러고 나서 회사에 갔더니 당시 편집부장이 「사장님, MBC에서 중계하기로 약속받았습니다」 그래요. 「그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어떻게 MBC가 다섯 시간을 중계한단 말이오?」 「아니오, 정치부장이 그랬어요. 보도의뢰라도 하려고 갔는데 뜻밖에도 다 해준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조환지 MBC서 중계한다니까, KBS하고 SBS까지 따라와서 생각지도 않은 3개 방송이 중계를 하게 된 겁니다, 그게』
마침내 1997년 10월8일 오전 11시 金大中 후보는 두 번째 연사로 등단했다. 이날 있었던 일을 녹취록(「한국논단」 1997년 11월호)을 참고해서 간단히 再구성한다.
DJ와 李度珩의 공방
金大中 후보는 먼저 10분간에 걸쳐 ▲나의 정치노선은 중도우파…, 수십년간 검증받았다 ▲YS는 야당시대에 보안법 폐지를 주장했지만 나는 대체입법을 주장했다 ▲1990년 북한의 연형묵 총리가 와서 환영만찬을 베풀 때 그가 「국가보안법으로 애국자들을 탄압하고 있다」는 등 남한을 장시간 비난할 때 나만이 큰 소리치며 반박했다는 요지로, 자기는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시장경제를 신봉하고,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사상이 건전한 사람임을 역설했다.
金大中-李度珩 두 사람 사이엔 이런 공방도 있었다.
〈사회자 『…첫째, 북한의 독재정치를 비난하고, 민주화를 촉구할 용의는 있으십니까? 둘째, 남북의 군축이 아닌 북한의 군비를 축소하여,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라고 촉구하실 수 있으십니까? 셋째, 金泳三 대통령의 민주화와 개혁에 대한 노력 및 업적을 평가하고, 李承晩의 건국과 구국, 朴正熙의 눈부신 경제발전 업적, 전두환의 무역흑자 업적, 盧泰愚의 민주화 노력 등을 평가하고, 그 대신 金日成 父子의 무력남침을 비롯한 죄상을 비난할 수 있는지. 넷째, 金日成 조문론을 6·25 남침 속죄요구로, 정부비판을 북한 노동당 비판으로 전향하실 수 있는지…』
金大中 『공산주의에 대해 비판하고 반대하라는 것은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사회자 『공산주의가 아니라, 金日成·金正日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이 자리를 빌어서 全국민이 보고 있는 가운데…』
金大中 『지난번 강릉사태 때, 그 자리에서 제가 공개적으로 북한 金正日이를 비난하면서, 국민 성토대회를 열자고까지 주장했습니다.…』
사회자 『남북한이 호혜평등한 입장에서의 군축이 아니고, 지금 저렇게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남침할 생각하지 말고, 너희 軍費를 먼저 줄여라, 이런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할 수 있습니까? 공약으로 내세울 수 있습니까』
金大中 『자기 국민 밥도 못 먹이면서 군비증강한 것은 일종의 죄악적 행동입니다. 그것은 당연히 우리가 요구할 수 있지, 왜 못 합니까?』
사회자 『조문론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金大中 『저는 조문을 주장한 일이 없습니다.…』
說往說來가 한두 차례 이어지고 나서 사회자가 결론을 내렸는데, 사회자에 끌려다니면서 성의를 다해 답변한 金大中 후보로서는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회자 『감사합니다. …새정치국민회의 金大中 총재께서는 사상검증을 받으셨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하고, 아직도 검증작업이 남았습니다만, 시간이 제한됐으므로 이것으로 끝마치겠습니다.…』〉
大統領 당선되던 날 再告發돼
李度珩 사장과 얘기를 계속한다.
―왜 사상검증이 안 됐다고 생각했습니까?
『사상검증이란 게 뭐냐? 우리가 대적하고 있는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를 검증하는 건데, 金大中 후보는 옛날에 많이 얘기(비판)했다는 식으로 넘어가더라구요. 그래서 점점 더 金大中씨에 대해서 의심을 굳히게 됐죠. 또 「金大中의 생전 거짓말 한 번 안 했다는 거짓말을 벗긴다」는 글도 「한국논단」 그 다음호(1997년도 12월호)에 썼고, 병역문제, 학력문제를 붙들고 늘어졌는데 그런 것들이 모두 선거법 위반에 걸린 겁니다』
―그래도 좀 無害無得(무해무득)하게 넘어가시지 뭘…. 그게 그쪽 진영을 화나게 만들었군요.
『그러니까 괘씸죄지. 고발장에도 그런 표현이 있어요. (고발장을 꺼내 보며) 「일국의 야당 총재를 마치 국민학교 학생 다루듯이 불손하게」 대했다는 게 고발 취집니다』
―저쪽에서 언제 어떤 방법으로 訴를 제기했습니까?
『1997년 12월 초에 大選을 보름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에서 「명예훼손,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나를 고발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서울지방검찰청, 고등검찰청에서 차례로 기각을 했습니다. 왜냐? 범죄구성 요건이 되지 않는다고. 정상적인 언론활동의 일환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대답을 들은 것이지 누구를 비방할 목적이 아니었다고 본 거죠.
그런데, 이듬해 1998년 2월25일 대통령 취임하는 날 그쪽에서 다시 고발을 했어요.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검찰이 몇 달 동안 사건이 별거 아니었던지 조사도 안 해요.
1998년 6월15일 검찰에 불려갔습니다. 아주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구형은 매섭게 합디다』
재판은 1998년 후반부터 1999년 8월까지 계속됐다. 그는 결심공판에서 2년 징역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고등법원을 거쳐 대법원에 상소 중이다.
―어떤 부분을 유죄로 인정받았습니까?
『허위사실 유포였지요』
그 혐의 사실을 다시 적으면 다시 허위사실 유포가 되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어떻든 그는 선거에 임박해서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면서 「說」로 떠다니던 얘기를 부각시켰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도 그의 용맹성은 조금도 수그러지지 않았다.
『다 밝혀집니다. 두고 보세요』
여덟 件의 爭訟 사건에 휘말리다
▲ 이도형 [한국논단] 관련 민형사 소송 사건
그와 「한국논단」은 1997년 이후 형사 두 건에 민사 여섯 건의 소송에 휘말렸다(도표 참조).
형사사건 두 건 가운데 5개 시민단체와 시민 두 명이 대통령 후보 초청 사상검증 대토론의 TV 방영 중 발언을 문제 삼아 명예훼손으로 제소한 사건은 무혐의 처리됐다.
민사사건 여섯 건 가운데 한 건은 1억원 배상 판결로 끝나 그가 살던 집이 강제경매돼 그 집에서 쫓겨났고, 나머지 다섯 건은 현재 고법에 항소 중이거나 대법원에 계류 중인데, 1심 판결로만 볼 때 적어도 5억원 정도는 배상해야 한다. 결국 그는 후보초청 검증대회가 말썽이 돼 집까지 잃게 됐다.
―1억원 배상판결을 받으셨는데 왜 집까지 빼앗기셨습니까?
『배상금 1억원에, 재판기간 중 이자를 치니까 6000만원이 돼요. 거기다 경비를 합치고 그 동안 빚진 것 갚고 하니까, 6억원짜리 집이 4억원에 낙찰됐는데, 그게 거의 다 날아갑디다』
―여기 집은?
『어떤 독지가가 얻어 줘서 살고 있지요』
누군가가 34평짜리를 1억5000만원에 얻어 줬다고 했다,
―무슨 발언이 문제가 돼서 집까지 날아갔을까요.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힌 일이오. 그 토론회에서 李會昌 후보 차례 때 패널리스트로 나온 박근 前 유엔대사가 「李후보께서는 총리 재직時에 자유총연맹과 같은 우익단체의 지원금을 대폭 축소시켰는데 이게 무슨 의도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李會昌 후보가 자유총연맹 부분에 대해 「자유총연맹이 국가예산으로 운영되다 보니까 관변단체가 돼서 선거 때 이용되는 면이 있기 때문에 건전한 시민단체로 자립시키기 위해서 예산을 깎은 것」이라고 대답했어요.
그래서 내가 시민단체에 인상이 안 좋았기 때문에 「李후보께서 건전한 시민단체라고 하셨는데 소위 경실련이라든가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참여연대, 가톨릭 인권위원회, 무슨 무슨 사제단… 이러한 시민단체는…」하고 좋지 않게 말했지요. 그러면서 내가 「이 말 자체가 명예훼손으로 또 추가 고소될지 모르겠어요」 했거든요. 그랬더니 내 말 그대로 그 사람들이 또 고소를 한 겁니다. 하하하…』
―왜 유죄가 됐을까요? 증거를 못 대셨군요.
『국가기관과 기업체에서 돈 받은 걸 증거로 제출했더니 채택이 안 됐습니다. 1심에서 10억원의 배상판결을 받고 즉각 항소해서 2심에 갔는데 날 보고 화해를 하라고 합디다. 나는 원칙에 관한 문제기 때문에 합의할 수 없다고 했지요. 그래서 10억원에서 1억원으로 감해진 겁니다』
『이 나라 80%가 共産化됐다』
―아직 대법원에 계류 중인데 왜 집행이 돼서 벌써 집이 경매됐습니까?
『글쎄, 대법원에서 판결이 뒤집히면 내가 또 찾아야지요. 우리나라 법에 1심 판결로도 집행을 할 수 있게 돼 있대요』
―지금 재산이 좀 있으십니까?
『지금은 없죠』
―그럼 이 재판에 다 지면 5억원이나 되는 돈을 어떻게 갚습니까?
『파산 선고받고 패가 망신하는 거죠. 내 배 째라고 하는 수밖에 없죠』
그러나 그에게도 희망은 있다.
『그러기 전에 이 정권 끝나고 재심 청구를 할 겁니다. 그러면 다시 찾을 수 있어요』
―죄송합니다만, 좀 편하게 사시지요. 「미안하게 됐다」고 하고 마시지요?
『천만에 말씀! 내가 뭐가 미안하고 뭘 잘못했어! 원칙에 관한 문젠데 그럴 수가 없죠. 우리나라가, 인권을 짓밟고, 거주 이전의 자유를 빼앗은 공산당이 싫어서 만든 나란데, 이걸 지금 공산당한테 팔아 넘기려고 한단 말요. 내가 볼 때는 지금 80%는 공산화가 됐다고 봅니다』
―80%요?
『그럼요. 의료제도 사회주의화했죠. 교육제도 사회주의화했죠. 인민위원회식으로 노조가 참여해서 운영한다고 하잖아요. 재벌도 실질적으로 해체돼서 정부가 영향력 행사하죠. 그나마 쪼끔 반대하는 언론은 파렴치범으로 몰아서 죽이고 있죠. 안 그래요? 어떻게 金正日이가 원하는 방향과 우연의 일치가 이렇게도 많습니까?
나머지는 헌법만 바꾸면 됩니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하는 국체와 정체의 조항, 제2조 주권재민 조항, 제3조 영토조항, 제4조 자유 민주 기본 원칙에 의한 통일 조항, 이 네 가지만 바꾸면 대한민국은 앉은 자리에서 소멸될 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 개헌 운운하는 소리가 나왔다가 쑥 들어갔지만 잘못하다간 큰일 납니다.
보세요,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가 자꾸 없어져 가고 있지 않아요? 시드니 올림픽에서 태극기가 없어졌잖아요. 그리고 소위 진보적인 단체가 하는 행사에서는 태극기도 안 내걸어요. 국민의례도 안 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체제에 대한 반항과 저항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나라엔 主人이 없다』
―아까 80%가 공산화됐다고 그러셨는데, 이 나라가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갈까요?
『주인이 있어야지, 넘겨 주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주인의 집단이 있어야지! 이번에도 보세요. 중국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사형집행했어도 모르고 넘어갔잖아요. 엘리트 집단이 주인의식이 없어요. 지금 우리나라에 주인이 없어요!』
그는 옛날을 회상했다.
『내 나이 또래가 6·25 때 전투를 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지만, 나는 열여덟 살 때 砲彈雨(포탄우) 속에서 전투를 한 사람이오. 결국은 수류탄을 맞고 죽었다가 깨어났어요. 열아홉 살 이후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오. 그러니까 불의를 본다든지, 내가 목숨걸고 싸워서 지킨 나라가 위태롭다든지 할 때는, 나는 용서할 수 없어요』
그러면서 그는 대한제국 멸망의 날을 얘기했다.
『어느 기록에 보니까 우리나라가 을사보호조약으로 망하던 날 대한문 앞에서 땅을 치고 통곡한 지사가 20여 명밖에 안 됐다고 그럽디다. 거기서 몇 발짝만 가면 商街였는데 다들 장사해서 먹고사느라고 정신이 없었대요』
―자칭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통일인데, 통일을 하자면 상대방하고 얘기를 하고, 공통분모를 찾아가지고 왔다갔다 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그쪽도 인정해야 하고, 얘기도 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날처럼 할 수밖에 없다고 볼 수도 있는데….
『어떤 상대냐가 문제지요. 예를 들면 사람을 인질로 잡고 도끼를 들고 있는 사람하고 다가가서 대화할 수 있습니까? 엔테베 작전처럼 그 인질을 잡거나 없애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이런 얘길 하면 극우적인 발상이다, 냉전적인 발상이다 하는데, 세계 역사를 보십시오. 한 번도 힘에 의하지 않은 통일이나 통합이 없었어요. 영국이 웨일즈를 통합할 때도 힘으로 했죠, 예멘이 그랬죠, 베트남이 그랬죠, 중국이 그랬어요.
독일이 평화적으로 흡수통일됐다? 천만의 말씀이죠. 서독은 정치적, 도덕적, 군사적으로 동독보다 굉장한 우위에 서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쪽엔 자유가 있었고 저쪽엔 자유가 없었지 않습니까? 또 동독 사람은 서독의 TV를 한 20년간 봐 왔지요. 내가 볼 땐 저쪽은 제롭니다, 제로!』
―그럼 대화로는 안 되네요?
『안 됩니다!』
―그렇다면 평화통일이란 있을 수 없는 거네요.
『평화통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金正日 정권이 붕괴되면 평화통일의 제1보를 내디딜 수 있지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나요?
『붕괴가 되도록 작용을 해야지요』
『햇볕정책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햇볕정책은?
『절대로 안 되지요, 그건! 그건 독재정권의 숨을 연장시켜 주는 거지요. 북한 주민 2200만명 가운데 공산당원과 군인 500만명한테는 혜택이 가겠지만 1700만명한테는, 이쪽에서 아무리 퍼줘 봤자 돌아가는 게 없어요』
―그 1700만명이 먹을 게 없어서 굶게 되면 체격적으로, 또 지능에 있어서 열등화될 것이고, 그러면 후에 통일이 됐을 때 우리 민족 전체에 커다란 손실이 될 것 아닙니까. 그러니 남는 것만이라도 나눠 줘서 같이 살면 안 될까요?
『그게 그 사람들한테 가야 말이죠. 우리가 그 동안 정부 차원에서 얼마나 많이 원조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경도 오지에 가면 굶어 죽는 사람이 많고 굶다 굶다 못해서 자꾸 탈출하잖아요』
―주면 누군가는 먹지 않겠어요?
『우리가 쌀을 도와 주면 그게 주민들한테 가지 않고 조선 인민군한테 간다고 합니다』
―그럼 가장 효과적인 對北 정책은?
『우선 무시(Benign Neglect)로 시작해야 합니다. 저쪽이 견디다 못해 지원 요청을 하면 반드시 조건을 내걸어야지요. 그리고 도와 주더라도 감시단이 가서 철저히 조사해야 하구요.
金大中 대통령의 잘못 가운데 하나는 「우리는 흡수통일을 포기하겠다」고 한 겁니다.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되지요. 우리 나라 헌법 제4조에 의하면 자유민주주의 기본원칙에 입각해서 통일을 해야 되고, 그러자면 어차피 흡수통일밖에 더 있어요? 힘에 의한 통일이 아니면 통일이 안 됩니다. 힘이 총을 쏘는 것만 아니죠. 도덕적으로 우세한 것도 힘이죠.
지금 관리들의 부패가 말이 아닌데, 이렇게 하면 공산주의 못 이깁니다. 옛날에 全斗煥 前 대통령이 현직에 있었을 때 이광요 싱가포르 수상을 찾아갔더니 「공산주의를 이기려면 첫째 부패하지 말아야 된다」고 했대요』
―金大中 대통령은 金正日씨를 만나고 나서 「대화할 만한 상대」라고 했는데, 그걸 보면 정당한 논리가 20은 넘었던 것 같은데.
『그건 자기 개인의 생각이지요. 또 金大中 대통령뿐만 아니라 TV를 본 상당수의 한국 사람들이 다 그러지 않았어요. 잘 웃고, 조크 잘 하고…, 그런데 천만의 말씀!』
그는 얘기를 하다 말고 혈당측정기를 꺼내놓고 혈당을 측정했다. 30년간 당뇨와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나와 세 차례 만나는 동안 정해진 시간에 꼭 혈당을 측정했다. 그가 얼마나 당뇨 관리를 잘 하는지 종합병원에서 실시하는 당뇨병 교실에서 성공사례로 그의 예를 든다고 했다. 여기서도 원칙과 규칙에 철저한 그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신문배달, 떡장수 하면서 苦學
여기서 옛날 얘기로 돌아간다.
그는 1933년 6월20일 서울 중구 광희동에서 아버지 李岐雨(이기우·1949년 작고)씨와 어머니 鄭音全(정음전·1969년 작고)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울 문 안에서만 14代를 산 완전한 서울 토박이다. 본관은 全州.
그의 아버지는 韓末에 무관이었고 할아버지(李敏九)는 吏曹參判을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조상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고 물으니 이런 말이 금방 돌아왔다.
『아, 나라가 허망하게 망했는데 아무런 역할도 못 하지 않았어요』
그는 번듯한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늦게 낳은 탓에 어려서부터 세파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고학을 했어요. 열세 살부터 신문배달을 했는데, 그때부터 광화문하고 인연이 깊었지요. 새벽마다 을지로 6가에서 광화문까지 뛰어와서 신문을 받아갔으니까. 동아일보와 서울신문을 배달했지요』
그는 계속한다.
『내 담당구역이 필동에서 장충초등학교 있는 데까지였는데 참 넓었어요. 그때 찢어지게 가난했어요. 아버지는 형님네 식구들하고 일제 말 疎開(소개)로 연천에 가 계셨고.
아침에는 이렇게 신문배달을 하고, 학교에 갔다 와서는 떡장수를 했습니다. 신당동에 가서 떡을 받아 가지고 종로 뒷골목 유흥가에 다니면서 팔았어요. 밤늦게 가지고 다니면 잘 팔아 줬어요. 그게 신문배달보다 나았지요.
그러고도 난 방학을 온전히 보내지 못했어요. 옆집이 모터 코일을 다시 감는 집이었는데, 그 공장에 가서 심부름을 했습니다. 거기서 받는 월급이 신문배달보다 훨씬 나았지요』
그는 그 바쁜 가운데서도 운동에 열중했다.
『내가 이러고 다니니까 조무래기 깡패도 만나고 해서, 힘을 길러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낙원동에 있던 고려권투회에 일주일에 두세 번씩 열심히 나갔는데, 거기서 서울시장하던 염보현씨를 만났어요. 그 양반도 권투 잘했지요. 그분은 경기중학에 다녔는데 나보다 한 학년 위였지요. 6·25 전쟁 날 때까지 권투를 했습니다』
그의 아파트 거실 TV 위에는 대한검도회에서 준 기념패가 놓여 있었다. 지금도 부회장 자리에 있다고 했다. 일본 특파원 시절 배운 실력이 4단이라고 했다.
육군 2등병으로 20일 만에 제대
그의 얘기는 계속된다.
『광희초등학교를 나오고, 일본 담임선생님이 「너는 경성공업학교(現 서울공고)로 가라」고 해서, 해방되던 해(1945년) 토목과로 진학했는데 잘 안 맞았어요. 그때 그 학교가 6년제였는데 5학년 올라가면서 6·25가 터졌잖아요』
그때부터 그에겐 가혹한 시련이 닥쳐왔다.
『그때 만 열일곱 살이었는데, 피난을 못갔어요. 길가에 나가면 의용군으로 잡혀가니까 이집 저집 피해다니다가 9·28 수복을 맞았지요. 그래서 을지로 2가 옛 중구청 자리에 학도의용군 본부가 있어서 지원하러 갔다가 TO(결원)가 없다고 퇴짜를 맞고, 장교 양성소인 종합학교를 지원했습니다. 이번엔 나이가 모자라서 안 되더라구요. 그래서 어물어물하다가 12월 14일에 영장을 받았어요』
―학생 때 공부할 틈이 없었겠네요.
『공부는 엉망진창이고, 다니기 싫은 공업학교를 다니니까 공부하기도 싫고. 그래서 맨날 톨스토이 책이나 읽고 그러는 문학소년이었지요. 李泰俊의 소설도 읽었어요. 金東仁의 「감자」도 읽고. 책을 참 많이 읽었어요. 닥치는 대로 亂讀(난독, 監讀)을 했으니까요. 그 亂中(난중)에 그래도 제일 잘한 게 국어하고 영어였어요』
다시 군대 얘기로 돌아간다.
『그때 비원에 병사구사령부가 있었지요. 1950년 12월18일 오전 10시까지 오라고 해서 거길 갔지요. 눈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안 주고 기다리게 하다가 오후 다섯 시는 돼서 어둑어둑해졌는데 어디로 가자고 해요』
그 당시엔 차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비원에서 출발해서 덕소→ 양평→장호원→수안보→문경새재→경산→청도→대구까지 14일간을 걸어서 갔다. 목적지는 대구 동인초등학교에 있던 제10교육대였다. 그들은 훈련도 받기 전에 녹초가 돼 있었다.
『저녁 때 교육대에 들어가니까 찌그러진 양재기에다 밥을 퍼서 깍두기를 팍 얹어 주는데, 야, 생전에 그렇게 맛있는 밥을 처음 먹어 봤어요』
그는 거기서 20일 동안 훈련을 받았다. 그는 지금도 그때 받은 군번을 외고 있다.
『제 군번이 0183900입니다』
그리고 전방으로 배치되기 직전에 군의관이 와서 「전방에 못 갈 놈 손들라」고 했다. 그때 그가 손을 번쩍 들었다. 군의관이 「왜 못 가느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치질이 굉장히 심합니다』
원래 치질증세가 있었는데다 추위 속에 심한 훈련을 받아 그 부위가 얼어 터져서 상당히 괴로웠다고 한다. 군의관이 말했다.
『까 봐!』
그는 엉덩이를 까 보였다.
그는 그때를 회상한다.
『피가 엉겨 붙어서 엉망이었지. 目不忍見이거든. 군의관이 발길로 엉덩이를 뻥 차더니 그 자리서 생각하지도 않은 제대증을 줬어요. 그래서 2등병으로 군대생활 20일을 했습니다』
美軍과 함께 砲彈雨 속에서 전투
그후 그는 거지가 됐다. 집에서 가져간 돈도 다 썼고, 대구엔 인척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1·4 후퇴로 오산까지 내려왔던 UN군이 다시 올라가, 서울 집을 향해 거지 행각을 하며 걸어갔다. 배가 고프면 농가의 사립문을 열고 『밥 좀 주세요』하고 구걸했다. 『밥 없어!』하고 쫓아내는 집도 많았다.
그렇게 걸어서 1951년 2월쯤 말죽거리까지 왔다. 거기엔 미군 3사단 10포병대가 있었다. 근처에 가니 먹다 버린 깡통들이 많았다. 그는 깡통들을 들고 정신없이 퍼 먹었다. 그때 지나가던 미군들이 뭐라고 했다. 그래서 그가 대꾸한 말이 이런 것이었다.
『아이 엠 어 스쿨 보이(I am a school boy.)』
미군들은 거지가 영어하는 걸 보고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게 내가 생전 처음 써먹어 본 영어요. 학교서도 영어는 괜찮게 했지만 그래도 입을 뗄 수 있었던 것은 6·25 덕분입니다. 피란을 못 하고 9·28 수복까지 석 달간을 서울 종로 4가에 있는 나이 많은 조카사위의 서재에서 숨어 지냈는데, 그 서재에 오노 게이지로(小野圭次郞)의 영문법 책이 있었어요. 밖엔 못 나가니까 그 책을 아주 열심히 집중적으로 공부했는데 그게 효과를 본 겁니다』
―그래 처음 해 보는 영어회화가 잘 통하던가요?
『책에서 본 대로 構文을 만들어 가면서 영어를 하니까, 미군들이 「영어를 곧잘 한다」고 해요』
그리고 여기서 그의 운명이 바뀐다.
『미군들이 나를 데리고 가더니 거지 같은 옷을 다 벗기고, 씻기고, 디디티(DDT)를 뿌리고 그래요. 그러더니, 군복에 UN 점퍼까지 가져다 입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포병대 전방 관측반 사병한테 내가 걸린 겁니다. 그 관측반이 장교, 선임하사, 무전병, 이렇게 세 명으로 돼 있었는데, 내가 그 무전병한테 걸려서 20㎏이나 되는 무전기를 짊어지고 다니게 된 겁니다』
―아니 치질 때문에 국군에서 제대했다면서요?
『치질은 목욕도 하고 약도 바르고 하니까 좀 좋아졌어요』
―싸울 만했어요?
『괜찮았어요. 최전방에서 군번 없는 전투병이 된 거지요. 전방으로 올라가면서 을지로 6가에 있던 우리 집에 가보니, 어머니는 어디로 피난 가셨고, 36권짜리 세계문학전집이 여기저기 팽개쳐져서 똥이 묻고, 엉망이 돼 있더라구요』
그후 그는 미군 포병 관측반을 따라 최전방에서 전투를 하며, 청량리→창동→의정부→동두천으로 北上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군이 전방관측을 잘 못 했어요. 미군이 한국군 9사단에 파견돼서 한국군을 도와 준 거죠. 그 관측반에서 나는 무전기를 메고 따라다니며 전투를 한 거지요. 요즘 좌익들이 들으면 진짜 개노릇 했다고 할지도 모르지요』
통역장교가 되어 두 번째 군대생활
그들은 1951년 5월에 강원도 평창·대화·현리 지구로 갔다. 거기서 그들은 그 유명한 현리 포위 속에 갇히게 됐다. 그의 부대는 거기서 千辛萬苦(천신만고) 끝에 빠져나와 마침내 죽을 구멍으로 들어갔다. 그 유명한 철의 삼각지대로 간 것이다.
『철원, 평강, 금화를 잇는 철의 삼각지대로 가서 9사단과 같이 백마고지 쟁탈전을 했습니다. 하루에 두세 번씩 올라갔다 쫓겨 내려오는 일이 계속 됐지요. 나는 이렇게 1951년 1월부터 11월3일까지 최전방에서 砲彈雨 속에서 싸웠습니다. 백마고지가 395고지였는데 국군이 지키고 있었고, 바로 앞에 1m 높은 396고지를 중공군이 차지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11월3일 그들은 바로 옆에 좀 낮은 281고지로 再배치돼서 갔다. 그들은 거기서 결정적인 순간을 맞았다.
『한밤에 조명탄이 터졌는데, 고지에서 밑을 내려다보니까 야, 뭐가 밑에서 오물오물 몰려서 올라오는데, 그게 다 중공군이야! 가만히 보니까 무기도 없고, 수류탄만 몇 개씩 가지고 있어요. 이거 큰일 났어요. 미군들은 그걸 보고 벌써 겁먹고, 「우리는 여기서 포로로 잡혀갈 테니, 여기 미국 사람 있다고 알려 주고 너 혼자 튀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냅다 내튀는데 바로 그때 중공군이 던진 수류탄이 꽝 하고 터졌어요.
앞을 보니까 시커먼 놈이 보여서 총검으로 콱 찌르고 내튀었어요. 나한테 수류탄을 던진 중공군 같았어요. 그러고 정신없이 뛰는데, 뒤에서 나한테 총을 쏘는데 한 방도 안 맞습디다. 그런데 한참 도망가다 보니까 내 갈비뼈 밑에서 피가 아주 많이 나왔어요(그는 옷을 들추고 상처 부위를 보여 줬다). 수류탄 파편에 갈비뼈 아래, 겨드랑이, 이런 델 네 군데나 맞았어요』
갈비뼈 밑의 파편은 그후 15년 동안이나 박혀 있다가 저절로 빠져나왔다고 한다.
『피를 흘리며 도망쳤지요. 얼음이 지핀 임진강을 건너가지고 9사단 대대 치료소에까지 가서 실신했습니다. 깨어 보니 포천 제5이동외과 병원에 누워 있더라구요. 거기서 40일 입원 치료를 받고 나왔지요』
나중에 보니 같이 싸우던 9사단 중대장과 전우들이 다 죽고 아무도 없었다. 그는 여기서 또 한 번의 轉機(전기)를 맞이한다.
『병원에서 나오는데 미군 포병대의 중대장이 나한테 소개장을 써주면서 「서울에 가면 MIC(軍 정보부대)가 있는데 통역시험을 보라고 해요. 지금 강북 삼성병원(옛 경교장)이 있던 자리에 MIC가 있었는데 거길 가서 시험을 봤더니 2급 통역으로 합격됐습니다. 그게 1952년 2월쯤이었지요』
그래서 그는 서울 중구 회현동에 있던 美 308 방첩대(CIC)에 가서 출판물 번역을 하게 됐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서울 시내 나가면 병역 미필자로 잡혀가는 겁니다. 제대증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데, 중공군과 싸우고 부상하는 바람에 옷을 다 찢어 버려서 그걸 잊어 버렸단 말입니다. 지금 같으면 병무청에 가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그땐 병사구사령부 본부가 대구에 있었는데, 우선 민간인은 한강도 건널 수 없었고, 그때 戰時(전시)라 그런 기록이 정리돼 있었는지도 모를 땝니다』
그러다가 그는 병역미필자로 청진동에 있던 서울지구 병사구사령부로 잡혀갔다. 거기서 그는 뜻밖에 병사구사령부 직원으로 일하고 있던 서울공업학교 동기동창을 만났다. 그 친구는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 통역장교 시험을 보라고 권했다.
그래서 그는 친구의 권유대로 통역장교 시험을 치르게 됐고, 그 시험에 합격해서 1953년 9월23일부로 통역장교가 됐다. 대구 동천비행장 옆에 있던 고급부관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고 육군 중위로 임관했다. 그 사이에 휴전이 됐다.
『이렇게 제가 두 번 軍복무를 했습니다. 통역장교 군번은 225581입니다』
통역장교가 돼서도 그는 9사단에 배속됐다. 거기서 27사단, 1군 사령부, 국방대학원을 거쳐, 1955년 통역장교에서 정훈병과로 병과를 바꾸게 됐다.
『그 무렵 내가 문학소년의 기질을 발휘해서 「思想界」에 글을 몇 번 쓰게 됐지요. 수필도 쓰고 모차르트에 관한 글도 썼는데, 그때 정훈차감이던 이영치 대령이 그걸 봤어요. 李대령도 가끔 「思想界」에 글을 썼거든요.
그분이 나를 불러서 「정훈장교가 될 용의가 없느냐」 해서 「대학 나온 사람들이 정훈장교를 하는데 저는 학력이 없습니다」 했더니, 괜찮다면서 미국 가서 교육받고 오라고 해서 또 시험을 쳐서 미국 정훈학교로 갔습니다. 거기 가서 7∼8개월 정훈 실무교육을 받고 병과를 정훈으로 바꿔서 정훈학교 교관이 됐지요』
드디어 조선일보 기자가 되다
그러다가 1958년 朴正熙 소장이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이었을 때 그 밑에 있던 번역위원회에 가서 정훈에 관한 교본을 번역하게 됐는데, 그는 거기서도 기를 펼 수가 없었다.
『거기 가 보니까 내 학력이 제일 초라해요. 다들 대학 출신이더라구요. 그때 EBS 사장을 하던 朴興壽씨가 거기 같이 있었어요. 거기 있던 장교 하나가 「사회에 나가서 뭐 하겠느냐」 해서 「글을 쓰고 싶다」고 했더니 「그럼 신문기자가 돼야 하는데, 그러자면 대학을 나와야 하니 대학에 진학하라」고 합디다. 그래서 1958년 건국大(야간) 국문학과에 입학해서 1962년에 졸업했지요』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습니까?
『그랬지요. 1960년 제대 前에 조선일보에 시험을 봤는데 1차는 합격을 했어요. 그런데 2차 면접 보러 가기 전에 5·16이 일어나서 못 갔지요』
그는 1964년에 軍에서 육군 대위로 제대해서 유솜(USOM) 농정과에 취직했다. 입사시험으로 토플(TOEFL)을 봤는데 거기서도 1등을 했다. 월급도 꽤 괜찮았다. 육군 대위 월급(7700원)의 두 배나 줬다. 출장비도 그만큼 줬다. 그러나 미국 사람을 따라다니는 게 영 신명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정훈차감 이영치 대령한테 찾아가서 사정을 말했다.
찾아가서 『「재미도 없고, 신문사엘 좀 가고 싶은데, 이젠 나이도 넘고(31세) 큰일났습니다」했더니, 「어, 그래? 그럼 휘(鮮于煇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장)한테 한 번 가보자」 그래요. 鮮于국장이 대령 출신으로 이영치 대령하고 정훈 1기 동기생이었거든요』
그는 李대령 뒤를 따라 조선일보 편집국으로 가서 鮮于煇 당시 국장을 만났다. 鮮于국장은 그의 이력서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경력이 괜찮구먼요. 여기 봉급이 적은데 할라우?』
『얼만데요?』
『9000원이오』
―정훈장교보다는 좀 낫군요.
『그렇지만 거기서는 먹는 것, 입는 것, 다 주잖아요. 그런데도 단순 계산을 해 보니 많은 것 같아서 얼른, 「하겠습니다」 그랬어요』
그때 초임기자가 월급으로 6000원을 받았다. 그는 3년 경력을 인정받고 들어간 셈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1964년 7월에 조선일보 기자가 됐다.
越南 특파원으로 또 한 번 죽을 고비
그는 외신부에 근무하다가 1966년에 越南특파원으로 나가게 됐다.
―특파원은 어떻게 가시게 됐습니까?
『그때 인기가 없었어요. 다 안 가겠다고 해서 내가 지원을 한 겁니다』
―체질에 맞으셨겠네요. 군대도 잘 알고….
『비교적 그랬죠. 거기서도 難攻不落(난공불락)의 베트콩 근거지인 메콩 델타를 미군과 越南 합동군이, 지금 아프간처럼, 헬리콥터를 타고 공수해 들어가는데 내가 끼었습니다. 거기서 죽을 뻔했지요. 그때의 기사가 조선일보에 실렸는데, 커다란 제목이 「본사 특파원 危機一髮(위기일발)」이었지요. 아 헬리콥터가 그 전투하는 한복판에 우리를 내려 놓고 가버리잖아요. 거길 빠져나오느라고 죽다 살았지요. 네 시간 동안 전투를 치렀는데 6·25 때도 그렇게 치열한 전투는 없었어요』
이때 시끄러워서 내쫓았다던 손녀(2)와 손자(1)가 그들의 부모와 함께 들어왔다. 서울 근교에 사는 아들 내외가 일요일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온다고 했다. 조용하던 집안이 순식간에 왁자지껄 와당퉁탕 해서, 우리는 그 사이 부인이 차려 준 점심을 먹고, 그의 서재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韓·日史 관련 책들이 가득했다. 이사하면서 아직 상자에서 풀지 못한 책도 많았는데, 그 상자 겉에는 그 안에 들어 있는 책이나 자료의 목록이 자세하고 꼼꼼하게 붙어 있었다. 그것으로도 그의 성격의 단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우선 그 자료들에 대해 설명했다.
『내가 언젠가 이걸(한국논단) 그만두고, 韓日關係史를 살펴보면서, 韓國民 自省論을 쓰려고 일본에 가서 이렇게 자료를 모은 겁니다. 복사비만 400만원이 더 들었어요』
여기서 그의 역사론이 나온다.
『우리 역사 교육을 보면 근현대사를 독립운동사 중심으로 가르치는데, 난 이게 잘못됐다고 봐요. 의문이 생기지 않아요? 왜 그렇게 독립운동 잘하고 애국자가 많은데 나라가 그 모양이 됐느냐고. 나는 나라가 그 모양이 된 건 절대로 지도계층이 잘못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책꽂이에서 「日韓合邦秘史」를 뽑아왔다.
『내가 이걸 2만5000엔을 주고 샀는데 일본의 浪人 우치다 료헤이가 쓴 거요. 여기 보면 당시 우리나라 팔도의 한다 하는 유지들이 돈을 걷어서 바치면서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겨 달라고 한 내용이 다 나와요. 이걸 다 쓰면 사방에서 또 고소한다고 덤벼들지도 몰라요』
―이제 그런 거 그만하면 어때요?
『글쎄, 정치하는 사람들이 권력에 대한 욕심이 많듯이 나는 아는 것도 부실한데다 글도 잘 못 쓰는데, 의욕은 무지하게 앞서거든요. 이것뿐만 아니라 「金大中 의혹」도 쓰고 싶어요. 내년에 칠순을 기념해서 그 동안 쓴 것 가운데 괜찮은 것을 골라 책으로 내고 싶기도 하고』
집 빼앗기고도 氣가 살아서 당당해
그는 1961년 통역장교 시절에 부인(權五壽)을 만나 결혼했다.
『집사람은 내가 건국大 다닐 때 동급생이었던 여학생의 친구였어요. 소개로 만났지요』
그들은 「思想界」 사장이었던 張俊河씨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가끔 「思想界」에 글을 쓴 것이 인연이 되어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이번에 집까지 빼앗겼으니, 부인께 참 미안하셨겠네요.
『참 불행 중 다행으로 저 사람이 나하고 생각이 같아요. 괜한 짓을 해서 그런 일을 당했다든가 하는 소리를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어요. 어떻게 보면 평생 동지지요. 저런 반려를 만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지요』
그와 오랫동안 조선일보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김윤곤(63·논설위원 역임)씨는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가정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으면서도 부인이나 가족에 대해 조금도 미안하다는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일본의 明治維新 때 보면 그때 국가에 헌신했던 사람들이 가족 같은 것은 우습게 알았다」면서, 그렇게 당했으면서도 오히려 氣가 살아서 더 당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위로 딸 셋을 두고 네 번째로 아들을 두었다.
『내 자식 가운데 좌경한 놈은 한 놈도 없어요』
그로서는 큰 자랑거리일 것이다.
다시 옛날로 얘기가 돌아간다.
그는 1967년 월남에서 돌아온 후 국방부 출입을 4년간 한 다음 다시 외신부로 돌아가 근무하다가, 일본 게이오(慶應)대학 신문연구소에 가서 공부하게 됐다.
그때 그는 일본 열도를 돌아다니며, 일본이 다시 군사대국이 되는 걸 염려하는 장문의 연재기사를 조선일보에 썼는데, 뒤에 그 기사가 「벚꽃은 피려는가」라는 단행본으로 엮어져 나왔다.
게이오 대학에 1년간 가 있는 동안, 그는 유감 없이 실력을 발휘했다.
『400자 원고지로 125장이나 되는 논문을 일본말로 썼어요. 「일본의 신문 사설에서 본 한국관」에 대해서 썼습니다. 게이오대학 설립자인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論吉)가 당시 時事新報라는 신문을 내고 있었는데, 그 사설의 한국관계 논조하고 내가 가 있을 1975년 당시의 아사히(朝日)신문 사설 논조하고 비슷하더라 말입니다. 후쿠자와가 脫亞入歐論(아시아를 벗어나서 유럽의 대열에 들어가자는 논리)을 펴 가면서, 중국과 한국을 먹고 대륙에 진출하자는 주장을 폈었지요. 이 논문이 나중에 게이오 대학에서 나오는 신문연구소 연보에 실렸는데, 그게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고 해요』
『조총련 취재에 물불 안 가려』
거기서 그는 「상당히 충실한」 1년을 보냈다고 한다. 그는 돌아와서 외신부에 2년간 근무했다. 이때의 얘기를 김윤곤씨는 이렇게 말한다.
『조선일보 편집국 내에서 1960∼70년대에 영어와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면서 縱橫無盡(종횡무진)으로 뛰는 민완기자는 李度珩형 선배가 유일했다고 볼 수도 있지요. 외신부에 근무할 때 도끼만행 사건이 일어났는데(1976년 8월18일) 李선배는 사회부 출입처인 판문점으로 달려가서 세계적인 특종을 했습니다. 그때 金日成이 북한 인민군총사령관의 자격으로 유엔군 사령관에게 사과서신을 보냈는데 이걸 특종 보도해서 세계의 언론들이 다 받았지요』
1978년 2월28일 駐日 특파원으로 발령받았다. 당시 그는 외신부 차장이었다.
그는 3월에 일본 도쿄에 부임했다. 거기서 그는 7년 동안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이 실력을 100% 발휘했다.
『나는 말이 자유자재로 되니까 일본 신문에 의존하지 않고 여기저기 쑤시고 다녔지요. 그랬더니 기자실이 바짝 긴장하게 됐지요』
그때의 일을 당시 일본에서 함께 한국일보 특파원으로 근무했던 宋孝彬(68)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駐日 특파원들이 가장 기피하던 곳이 조총련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조총련에 접근하는 것이 두렵고 어렵고 했지요. 그런데 李度珩씨는 조총련 취재에도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어요. 무슨 대회가 열리면 그 본부에까지 쫓아가서 취재했지요. 기자는 초청하지 않았다면 기자가 초청받고 다니느냐면서, 막아도 막 뚫고 들어갔습니다. 그 바람에 조용하던 특파원 세계에 난리가 나곤 했지요』
다시 李度珩씨에게 질문을 던진다.
―특파원 시절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교과서 파동이었지요. 그건 내가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1981년 9월에, 중학교 역사 교과서를 쓴 東京대학의 어떤 교수가, 나한테 교과서와 원고를 가지고 와서, 「당신은 한국 사람이니까 내가 쓴 게 맞는지, 문부성에서 고쳐 쓴 게 맞는지 한 번 보라」고 해요.
원고를 보니까, 「한국인이 강제로 동원돼서 신사참배를 했고, 일본어를 국어로 쓰라고 강제했고, 강제로 징용·징병을 했다」고 씌어 있어요. 그런데 문부성은 「강제로 한 일이 없다, 자발적으로 했다」, 이렇게 고쳤더란 말입니다』
그는 「큰 건」 하나 잡았다고 생각하며 기사를 서울로 보냈는데 서울에서는 그때만 해도 일본 교과서에 관한 感이 별로 없어서, 기대보다 작게 1면 4단 기사로 처리했다.
『내가 야단야단을 하고 소리소리 질렀는데도 일과성으로 끝나고 말았어요』
그 이듬해 6월22일, 일본 신문들이 새로 바뀐 교과서를 들춰 보고 「일본이 중국에 侵略을 했는데, 進出로 썼다」고 크게 보도했다.
『난 그때 또 신바람이 나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기사를 보냈는데, 이번엔 숫제 조선일보엔 나가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어디 다른 신문에 쪼그맣게 나갔던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그걸 보고 사설을 썼어요. 이렇게 되니까 서울에 주재하던 일본 기자들이, 한국인들이 들고 일어났다고 기사를 보냈고, 또 중국에서도 「進出」건을 붙들고 늘어져서, 문제가 一波萬波로 커졌지요. 그렇게 되자 나도 본격적으로 교과서 문제를 들춰내서 문제를 삼았습니다.
이게 계기가 돼서, 그때 崔秉烈 편집국장이 연재를 하자고 해서 「일본을 알자」 시리즈를 싣기 시작했죠. 이런 분위기 때문에 조선일보가 주동이 돼서 독립기념관을 만들자고 했고 또 모금운동을 했지요』
결국은 그가 일으킨 교과서 문제가 독립기념관 건립까지 이어진 것이다.
駐日 특파원 李度珩의 전성시대
이런 일련의 활동으로 그는 뜻하지 않는 상도 받았다.
『1983년 내가 일본에 있는데 중앙대학교에서 제정한 승당 언론상(보도부문) 수상자로 결정됐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는 그 이전(1978년)에 제1회 관훈언론상을 받았고, 이듬해(1984년)엔 일본 라디오 단파사 제정 단파 아시아 상을 받았다.
―駐日 특파원 시절이 「李度珩의 전성시대」였던 것 같군요.
『그렇지요. 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그는 그밖에도 얻은 게 너무 많았다고 한다.
『일본 가서 보니 내 자신이 너무나 일본을 모르면서도 아는 척을 했어요. 일본 가서도 책을 참 많이 읽었는데, 보면 볼수록 일본을 제대로 알기가 어려웠어요. 또 反日은 쉬운데 克日은 참 어렵다는 것도 알았지요. 그 어렵다는 심정을 표현하는 책을, 일본에서 특파원을 만 7년 하는 동안에 일본어로 세 권 썼어요』
―네? 일본어로?
『네, 1982년에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걸 일본어로 일본서 출판했는데 그게 「한국인이 보는 일본(1984년, 공저)」이지요. 21刷나 찍었습니다 이걸로 일본서 단파 아시아賞을 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출판이 됐지요』
그는 또 「일본의 한국 보도는 믿을 수 없다(1980년)」도 7刷나 찍었는데, 이것은 신문에 연재하지 않고 직접 일본어로 쓴 것이다. 이 책은 게이오大에서 쓴 논문이 바탕이 됐다.
그는 「서울로 보내는 도쿄통신」도 일본어로 써서 일본서 출판했다(1984년). 이 책은 서울에서도 「동경통신」이란 이름으로 출판됐다.
그는 서울에서 우리말로도 「벚꽃은 피려는가(1974년)」, 「흑막, 한일 외교교섭 비화(1986년)」, 「일본, 다시 보고 생각한다(1988년)」 같은 일본관계 책을 냈고, 최근엔 「건국의 아버지 李承晩(2001년)」을 펴냈다.
그는 1985년까지 일본에서 7년간 있으면서 부국장 대우까지 승진했다. 귀국해서 부국장으로 승진, 논설위원실로 가서 1992년까지 또 7년간 논설위원으로 재직했다.
『논설위원실에 가서 일본 관계 전문으로 일할까 했더니 그게 잘 안 됩디다. 남북 관계, 군사안보 관계에다 환경 문제에까지 사설을 쓰다 보니까 잡탕이 돼서 안 되겠어요. 그래서 다시 일본에 가서 韓日관계 책을 쓰기 위한 준비를 했던 거지요(1992∼1993)』
「行動하는 良心」 對 「行動하는 良心」
―전에 사시던 집은?
『종로구 청운동 1번지 벽산 빌리지 83坪짜리 집에 살았습니다』
―집 뺏기고 나오던 날 심경이 어떠셨어요.
『사실 집사람한테 신세 많이 지고 삽니다. 나는 우왕좌왕하다가 여관에 가서 잤어요. 思無邪(사무사:마음에 사악한 생각이 없음)지요. 그러나 자기 뜻대로 사는 게 그리 쉽지는 않다, 내가 쉽지 않은 길을 택한 거다, 이렇게 생각할 때 후회는 없지요』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성격이 참 유별나다고 말한다. 그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등장하는 말들이 「원칙주의자」, 「보수 우익」,「 트러블 메이커」, 「싸움꾼」 같은 단어들이다. 그를 지칭하는 이 단어들엔 그의 장점과 단점이 混在해 있다.
그와 「한국논단」을 함께 출범시켰던 前 보사부 장관 宋貞淑 여사(65)는 그를 이렇게 평했다.
『1980년 이후에 세상이 어지러워지면서 모두 자기 빛깔을 감추게 됐는데 이분은 자기 빛깔을 감추지 않고 더욱 선명히 드러냈습니다. 그런 면에선 나도 같아 서로 의기투합했지요.
또 그분은 너무 엄격해서 같이 사는 분들이 성가시겠다고 생각될 때가 있어요. 한 번은 각社 논설위원들이 일본에 함께 가게 됐는데, 그때 보니까 어떤 분한테 예의를 안 지킨다고 막 야단을 치는 겁니다. 저렇게까지 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어요. 그분은 자기 잣대에 맞지 않으면 참지를 못하는 것 같았어요. 아주 원칙주의에 철저하지요. 말인즉 옳은데 자꾸 그러면 남들에겐 골치 아프고 대하기 싫다는 인상을 줄 수 있지요. 이게 큰 약점일 겁니다』
宋孝彬씨도 같은 말을 한다.
『우리가 글로 앉아서 비판하는 건 잘하는데 행동하는 건 잘 못 해요. DJ가 말한 「행동하는 양심」은 별로 없어요. 그런데 李度珩씨는 행동하더라구요. 저항에 대해 굽힘이 없어요. 우린 웬만하면 손들고 말지만』
그러니까 「행동하는 양심」 對 「행동하는 양심」인 셈이다. 다시 李度珩씨에게 질문을 던진다.
대통령 취임 후 발행부수 우수수
―지금 하시는 일이 좀 외롭지 않으세요. 지원군도 좀 있었으면 좋겠고, 「한국논단」도 좀 많이 나갔으면 좋겠고, 보수 우익이라는 사람들이 원망스럽지는 않으세요.
『그런 건 없고, 이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孤立無援(고립무원)하도록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나 하나를 두고 집중적으로 고소·고발을 해서 배상금을 물리게 합니다. 이담에 재판에 또 져서 배상금을 물게 되면 난 파산선고를 하게 되고 그러면 난 인격적으로 없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만들려는 겁니다. 反共, 反金大中 논객 하나를 없애버리는 게 이 사람들 목표요』
―「한국논단」은 어떻게 출발했습니까?
『일본의 산케이 신문처럼 확실하게 보수 우익의 목소리를 내는 매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1989년에 벽산그룹을 비롯한 7개 기업이 중심이 돼 가지고 주식회사로 출발한 거지요. 그 다음에 대한민국의 한다 하는 기업들이 다 들어 왔었지요.
그때 나는 아직 조선일보에 있을 때니까 梁好民 선생을 사장으로 모시고 출발한 겁니다. 그러다가 1992년에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1993년부터 사장이 됐는데, 그 동안에 자본금을 많이 까먹어서 인수받은 돈이 4억9000만원밖에 안 됐어요』
그후 그는 자본금을 8억원까지 늘리고, 잡지 발행 부수도 2만5000부까지 올렸다. 여기까지는 잘 왔는데 그만 1997년 대통령 선거와 사상검증 토론을 고비로 곤두박질을 한다.
『金大中 대통령이 취임하면서부터 急轉直下(급전직하)요. 부수가 매달 우수수 떨어졌지요, 또 광고주도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지금 주주도 대기업은 다 나갔어요』
―광고주는 왜 떨어져 나갔지요?
『무서워서 누가 광고를 내요. 지금 광고주가 딱 세 군데요. 조선일보, 조광인쇄, 월간조선』
―물론 적자겠지요?
『한 달에 잡지 내는 데 나가는 돈이 1200만원쯤 됩니다. 우리 집사람이 수금원이오. 총판에 한 달에 몇 번씩 돌아다니면서 10만원도 받아오고, 20만원도 받아오고, 이렇게 걷어 오는 돈이 700만원쯤 됩니다』
―500만원은 어떻게 메웁니까?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찾아다니며 도와 달라고 구걸을 합니다. 저 사람(부인)은 수금해서 700만원을 걷어 오고, 나는 구걸해서 500만원을 걷어 오고, 이래 가지고 매달 때워 나갑니다』
―빚도 많지요?
『조광인쇄에 6000만원 빚이 있는데 이걸 더는 늘지 않게 하려고 별의별 애를 다 쓰고 있지요』
―옷도 사 입고 밥도 먹어야 하는데, 그 돈은 어디서 나옵니까?
『애들이 여럿이니까 조금씩 도와 주나…, 나는 잘 몰라요. 저 사람이 꾸려 나가니까. 또 생활비도 별로 안 들어요. 난 65세 넘어서 전철 타면 공짜니까 교통비도 별로 안 들고』
―속 편하게 「한국논단」 그만둬 버리시지요.
『그만둘 수 없지요. 증거도 남겨야 되고…. 또 5000명 독자에 대한 신의도 있고, 100만원 200만원 도와 준 사람에 대한 보답을, 말로만 反독재, 反부정하지 말고 책으로 해야지요.
또 이렇게 골치 아프고 복잡한 일을 할 만한 사람이 바보 같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사실 나도 코에서 단내가 나서 몇 사람한테 떠넘기려고 해 봤는데, …없어요』
―이런 일을 하면 「공산화」를 막을 수 있습니까?
『조선노동당이 벌써 반세기 동안을 당 강령과 헌법에 따라 남조선 적화를 위해서 조직적으로 노력을 해 왔습니다. 그 결실이 지금 이 정부 들어서서 맺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 혼자 힘으론 難攻不落이야! 힘들어요!』
―이래저래 안 될 바엔….
『그렇지만 안 할 수가 없어요. …동조자는 있으니까』
『나는 너무 원칙주의자』
―자신의 단점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너무 지나치게 원칙주의잡니다. 10월31일 역대 관훈클럽 총무들이 중국 上海(상해) 구경 간다고 합디다. 나도 가자고 하길래 안 간다고 했어요. 관훈클럽에서 공짜로 금강산 구경시켜 준다고 가자는데 안 갔어요. 백두산 가자는 것도 안 갔어요』
―上海에는 왜 안 가셨어요?
『중국이 한국 마약사범 사형시켰잖아요. 기분 나쁘잖아요. 내가 왜 거기 가서 한 푼이라도 보태줘요? 애국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나는 이것도 애국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에 관한 인물 DB(데이터 베이스)에, 존경하는 인물이 李承晩으로 돼 있어서 물어 봤다.
―李承晩 前 대통령은 어떻게 존경하게 됐습니까?
『내 군대 있을 때도 李承晩 한 번도 안 찍었네! 「한국논단」 형편이 괜찮을 때 6월호를 내게 됐는데, 그때 마침 대학생들 의식 조사한 걸 보니까, 李承晩에 대한 평가가 金日成만도 못하더라구요.
그래서, 이거 안 되겠다, 생각하고 梨花莊에 가서 자료를 좀 내놓으라고 했더니, 엄청난 자료를 내놔요. 그걸 사흘 간 섭렵하면서, 이분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이 탄생도 못 했을 것이고, 이분이야말로 몇 세기에 한 번 날까말까한 위인이란 결론을 얻었어요』
이때의 자료가 「건국의 아버지 李承晩」(2001)이란 책으로 나왔다.
『죄 지은 자 법정에 세우겠다』
우리는 이튿날인 11월5일, 서울 마포구 마포동 한신빌딩 901호에 있는 한국논단 사무실에서 다시 만났다. 사무실은 한강과 여의도가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썩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7∼8평쯤 돼 보이는 방안은 옹색하기 그지 없었다.
방안이 온통 책더미로 가득차 있어서 손님인 내가 앉을 자리도 없었다. 자원봉사나 다름없는 동료 朴花珍 편집대표와 다른 직원 한 명이 앉아서 일을 보고 있었다. 나는 조그만 의자에 겨우 비집고 앉아 얘기를 나눴다. 내가 사무실을 둘러보며 안됐다는 표정을 짓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처음 여기 들어올 땐 이 옆방 하고 두 칸을 사서 들어왔어요. 그것도 좁아서 신문로 널찍한 데로 갔다가 DJ 정권 들어서면서 쫄딱 망해 가지고 다시 여기로 오면서 옆방을 팔았어요. 그후에 그래도 부족해서 이 방도 팔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방에 세들어 있는 겁니다』
―경력을 보니 한때 민주평통 자문위원도 하셨군요.
『閔寬植씨가 언론계 대표로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갔는데, 金大中 대통령 들어서면서, 나하고 맞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작년(2000년) 내 생일(6월20일)을 기해서 탈퇴하고 성명을 내고 아주 관계를 다 끊었습니다』
우리는 세 번째로 11월8일 서울 마포 「한국논단」 근처의 식당에서 만났다.
―대충대충 좀 살아보시지요? 그만 하라면 그만 하고.
『내가 참지 못하는 구석이 있어요. 내가 볼 때 불의라고 생각되고 의혹이 생기는 것은 반드시 기록을 하고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논단」이 그런 걸 기록하는 증겁니다. 그런 걸 가지고 있다가 이담에 밝혀야지요. 그리고 국민과 납세자에게 죄지은 자들을 언젠가는 법정에 세워야 합니다. 편하게 사는 법과 어럽게 사는 법이 있는데 나는 편하게 사는 법을 몰라요』
얘기를 마치고 헤어져서 한참을 걸었는데 뒤에서 李度珩 사장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나를 불러 세웠다.
『우리 가족 얘기는 쓰지 마세요. 나 때문에 시달리고 불이익을 당하면 안 되니까』
내가 잠시 멍 하니 쳐다보고 있으니까 그가 덧붙였다.
『내가 지금 지하세계에 살고 있는 지하인간 같아요』
173㎝의 단단한 체구, 언제나 꼭 맞는 옷을 입고 다니는 신사가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니 宋貞淑 여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생긴 대로 사는 걸 어느 정도 허용하고, 자기 의지에 의해 행동하는 것에 대해 평가해 주고 받아들여 주면 참 좋겠는데, 지금은 정말 그렇지 못한 사회 같아요』
정말 그렇게 성숙한 사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