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네 집―垈地 700坪에 建坪 100坪
박세리가 영국 브리티시 오픈에서 11언더로 감격적인 역전승을 하던 지난 8월6일 오후, 나는 충남 대전시 유성구에 있는 세리네 집을 찾았다. 유성고등학교 앞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세리네 집을 물었더니 주인이 앞 골목을 가리키면서 『저쪽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돌면 큰 집이 보인다』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정말 박세리와 그 가족은 큰 집에 살 만한 일을 했다. 다른 건 다 그만 두더라도, 이 가마솥 더위에 온 국민이 지쳐 나가떨어져 있을 때, 세리가 새벽에 보내온 낭보는 국민들을 벌떡 일어나게 만들었다. 이것만으로도 세리는 큰 집에 살고도 남을 만큼 「큰 일」을 했다.
『세리야, 정말 장하다!』
세리네 집(유성구 구암동)은 정말 컸다. 들어가는 입구에 「세리 인터내셔날(주)」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붙어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700평의 垈地 위에 커다란 집 두 채가 들어서 있었다. 지난해 말 경매로 나온 대전 지방법원장과 고등법원장 관사를 8억여 원에 낙찰받아 새로 꾸미고 또 일부는 새로 지었다는 것이다.
세리 아버지 朴峻喆(박준철·50)씨는 세리네가 살고 있는 아래채 정원에서 정원수 심는 걸 감독하다가 낯선 손을 맞았다.
우리는 세리네 집 거실에 자리잡고 앉았다. 건평 100평의 넓은 집이었는데 커다란 방 한 칸에는 세리가 타온 트로피로 가득했다. 세리가 집에 오면 자고 간다는 작은 방에선 더블 베드가 고단해졌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 金貞淑(김정숙·48)씨는 세리를 응원하기 위해 영국에 가 있었는데, 인터뷰하는 동안 내일(8월7일) 오후 4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한다는 전화가 왔다. 사실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계속 축하전화가 걸려와서 여러 차례 인터뷰를 중단해야 했다.
세리 아버지도 지난 밤을 꼬박 새웠다고 했지만 그런데도 힘이 펄펄 솟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날 새벽에 일어났던 세계적인 대사건부터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전날까지 9등이었는데 역전승할 줄 아셨어요?
『어제 세리가 나한테 혼 좀 났어요. 세리가 젤 싫어하는 말은 「네 직업이 뭐냐, 네가 아마추어냐, 네가 몇 살이냐」 이 세 가지예요. 나도 그 얘기를 할 때는 굉장한 각오를 가지고 합니다. 세리한테서 전화가 왔길래 대뜸 물었어요.
『우리는 靈的으로 통하는 사이』
「너 직업이 뭐냐?」 세리가 아무 말도 안해요. 「너 아마추어여? 너 몇 살이여」 그랬더니 세리가 듣기 싫었는지 「아빠 최선을 다 할게요」 그래요. 「승부사한테 2등은 필요 없어. 너 오늘 공격해. 내가 볼 때 네가 11언더만 치면 우승할 수 있어. 한 라운드에 10언더도 치는 놈이 오늘 5언더만 치면 되는데 그것도 못해. 17,18번 홀에서 무조건 스푼 잡지 말고 드라이버 잡어. 알았지? 투 온시켜서 버디 잡아야지. 다른 소리 말고 공격해!」 그러고서 대답도 듣기 전에 전화를 끊어 버렸어요』
세리는 마지막 라운드 경기를 위해 필드로 나갔고 아버지는 방으로 들어가 인터넷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인터넷으로 들어가 보니까 첫 홀에 이글을 했다라구! 이젠 됐다 했는데 9홀까지도 6등으로 7언더로 가고 있는 거요. 스코어가 줄지 않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더라구. 깃대를 어디다 꽂았나, 바람이 부나, 별별 생각이 다 났어요. 그렇게 걱정을 하고 있는데 TV중계가 시작됐어요.
그런데 10번 홀, 12번 홀에서 버디를 잡아서 9언더로 올라섰어요. 그땐 이겼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7번, 18번 홀에서 내 말대로 드라이버를 뽑더라구요. 결국 세리가 버디를 두 번 잡아 우승했지요』
―언제 우승을 예상했습니까?
『사실은 처음부터 이길 줄 알았어요. 세리 목소리가 미안해 하면서도 떠 있더라구요. 우리는 느낌으로 팍 통해요. 바로 전(7월 30일)에 자이언트 이글 클래식에서 잘 나가다 3등으로 내려앉을 때는 아무런 느낌이 안 와서 기대도 하지 않았지요. 우린 靈的(영적)으로 통하는 게 있어요』
경기가 끝나고 세리한테서 전화가 왔다고 한다.
『「아빠, 기분 좋지?」 그래요. 「좋은 건 말할 수 없지. 그러나 좋아할 거 없어. 들뜨지 마. 다음 경기 또 있잖아」 그랬더니 세리가 그래요. 「아빠, 아무리 그래도 기분 좋다구 좀 해!」 그래서 「잘했다. 그래 잘했다. 다음 경기장으로 빨리 갈 준비해라」 그러고 전화를 끊었지요』
박세리는 이번 대회에서 우승해서 21만 6000달러(2억 8000만원)의 상금을 받아, 올 시즌 상금 랭킹 1위를 달리게 됐다. 「올해의 선수」 타이틀도 목표로 삼게 됐다. 나비스코 클래식에서도 26세 이전에 우승하면 최연소 그랜드 슬램 목표도 달성하게 된다.
아버지 朴峻喆과 세리는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와서 영적으로 통하는 사이가 됐을까. 우리는 오늘이 있기까지 그들의 고난에 찬 역정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朴峻喆씨는 키가 172cm라고 하는데도 작달막해 보였다. 다부져 보이는 체격에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로 보나 충만한 에너지 그 자체였다.
그는 아버지 朴泰興(박태흥·44세에 작고)씨와 어머니 孟淑子(맹숙자·83) 여사의 4男 1女 중 막내로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평동 92번지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맹의섭)는 그가 어려서 조치원읍 읍장이었고 아버지는 평양 숭실전문을 나와 외할아버지 밑에서 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어디로 보나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났다. 우리가 그에 대해 풍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는 것처럼 「갱스터」나 건달로 빠질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을까.
복수심에 불타서 보낸 少年時節
―막내로 태어났으니 참 귀여움을 많이 받았겠네요.
그러나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닙니다. 귀여움을 못 받고 미움만 받았어요. 어머니가 절 낳다가 병이 들어서 굉장히 고생하셨대요. 그 후로도 많이 편찮으셔서 어머니도 절 미워하고 外家서도 미워하고…』
―미운 짓을 했겠지요.
『아니에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뭐든지 잘 했어요』
―무슨 운동을요?
『배구, 달리기, 씨름, 기계체조, 뭐든지 다 잘했어요. 전국체전에도 나가고. 초등학교 땐 죽 반장을 했고 전체 반장도 했어요』
―그거 참 이상하네!
『저랑 저 바로 위 형(준형)이랑 같이 있으면 아버님은 늘 제 형을 무릎에 앉혔어요. 저랑 준형이 형은 학교서 육상을 함께 했는데, 저는 항상 주전 멤버였고 형은 후보선수였어요. 그런데도 부모님은 형만 이뻐했어요. 씨름을 해도 내가 늘 두 살 위의 형을 이겼는데, 아버님은 이걸 또 싫어하셨어요.
아버님이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그러다 보니 家勢(가세)도 기울었어요. 그런 환경 속에서 형들한테 늘 맞아가면서 크게 됐지요. 그때 나는 늘 「내가 크면 저 형들을 가만히 안 놔두겠다」고 이를 악 물면서 컸어요.
어머니는 편찮으셔서 외갓집에 가 계시는 날이 많았고. 밥은 누나가 해 주었는데, 내가 운동을 많이 해서 밥도 많이 먹어야 했는데도, 형들 등쌀에 많이 굶었어요. 사흘을 굶어서 쓰러진 적도 있어요. 그래서 어려서는 복수심에 불타서 컸어요』
―대전으로는 언제 오셨던가요.
『조치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전 중앙중학에 배구 특기장학생으로 들어 왔어요. 저는 학교를 다 제 힘으로 장학금 받아서 다녔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를 한밭상고(지금의 중앙고)에 역시 배구 특기장학생으로 진학했는데 덩치가 커지니까 막 빗나가기 시작했어요』
그 무렵 그의 집도 대전으로 이사했다.
『고등학교에 오니까 키가 작아서 배구로 나가기도 힘들어졌어요. 외로움을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부모형제의 따뜻한 사랑이 없으니까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거칠게 놀게 됐어요. 그러니까 집에서도 더 싫어하고. 또 툭하면 경찰에 잡혀가니까 집에선 더 골칫거리로 여기고…』
―처음 경찰에 간 건 언제였어요?
『열일곱 살 때요. 친구들과 싸우다 보니까 상대방 이빨이 부러졌지요.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건달세계로 들어가게 됐지요. 저는 저 혼자 생존경쟁에서 이겨서 살아남아야 했어요. 집에 가봐야 다 싫어했으까요. 반겨 주는 사람이 없는 건 말할 것 없고, 참 부끄러운 얘기지만, 한 번은 집에 가보니까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어요. 나 몰래 이사간 거지요』
―저런! 이 게 무슨 소립니까?
『나는 정말로 다리 밑에서 주워 와서 키운 줄 알았어요. 나는 우리 형제가 아닌 줄 알았어요』
―지금 어머니나 다른 형제분들에 대한 복수심은 없으세요?
『지금은 다 수긍하죠. 그때 나를 똑똑하게 키우려고 그랬나 보다 생각하죠』
三星서 10億 받아 어머니께 5億 투자
그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얘기를 했다.
『삼성과 계약을 해서 10억원을 받았을 때 내가 제일 먼저 한 게 뭔지 아십니까? 절반을 딱 꺾어서 5억원으로 어머님 집을 지어드렸어요. 대전여상 뒤 선화동에 원룸 13개가 있는 집을 지어드리고 아래층에서 어머니 사시게 해드렸어요』
―세는 받아서 峻喆씨가 갖고?
『아니, 저는 그거 관여 안 해요. 어머니 쓰시라고 그냥 드린 겁니다』
―그것 참 효자네요! 그렇게 왕따를 당했는데.
『어머니가 형들 따라서 미국에 계셨는데 거기가 불편하시니까 나오고 싶으셨나봐요. 어머니가 미국 계실 땐 나오기만 하면 미국 자랑만 하시고 나한테는 늘 야단을 치셨어요.
「야 이놈아, 너는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꺼뜩하면 쌈만 하고, 치료비 얘기나 해쌌고, 사람들이 잡으러나 오고, 이놈아, 왜 불안하게 이런 생활을 하느냐, 너 땜에 내가 못 살겠다! 너는 이놈아 인제 끝났다!」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어머니, 내가 앞이 구만리 같아요. 인제 30댄데, 유리엄마(부인)랑 잘 살아 보려고 노력하고 있잖아요. 만나기만 하면 이렇게 절망적인 얘기만 하시는데, 세상을 열심히 살다보면 좋은 일도 있을 겁니다. 앞으로는 좀 희망적인 얘기를 하세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형님이나 누님이 어머님을 잘 모시기가 힘들어졌는지, 다시 한국에 나오고 싶어 하셨어요. 이런 때에 세리가 뜨고 우리가 살 게 된 거지요. 제가 좀 잘 해드리고 싶어도 어머니가 나한테 한 게 있으시니까 미안해 하실 게 아닙니까? 그래서 어머니가 한국에 나오셨을 때 내가 식당에 모셔놓고 여쭤봤어요.
「지금 어머니를 어떻게 해드리면 가장 편하시겠어요. 제가 보기에는 어머님이 친구들을 좋아하시니,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노시면서 자식들 눈치 안 보고 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어머니가 좋다고 하시면 제가 집을 하나 얻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처음에 방을 얻었다가 돈이 생겨서 집을 지어드린 거지요』
여기서도 그의 孝心을 엿볼 수 있다.
『가구도 아주 좋은 걸로 사드렸어요. TV도 크고 좋은 걸로 사드렸지요. 냉장고도 큰 걸로 사드렸어요. 신혼살림처럼 차려드렸지요. 노인들은 좋은 걸 사드리면 그 게 아까워서도 오래 살아요』
―부인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내가 스물한 살 때 열아홉 살짜리를 만났지요. 제가 배구할 때였어요. 세리엄마는 내가 잘 아는 대전여상 배구선수의 친구였어요. 대전여상은 한밭상고와 같은 재단이어서 연습도 같이 했지요. 그런데 세리엄마가 자기 친구인 대전여상 배구선수를 따라서 연습하는 데 왔더라구요. 그때 그만 첫눈에 반했어요. 그래서 대학 노트를 한 20권쯤 사줬지요』
―그게 언제였어요.
『고2 땐데, 그후 제가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가게 됐습니다』
―왜요?
『역시 싸움이 원인이죠. 친구들하고 싸웠는데 학교에서 퇴학을 시킨다고 해서 도망해 버린 거죠. 그걸로 학교생활은 끝난 겁니다』
서울 가서 떠돌이 생활을 1년쯤 하다가 스무 살 때 대전으로 돌아와 보니까 세리 엄마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됐는데 더 이뻐졌더라고 했다.
인연이 될 만한 사건이 금방 뒤따랐다.
『세리엄마랑 어디를 가는데 우리 사이를 반대하던 친구랑 시비가 붙어서 싸움을 하게 됐어요. 여자 앞에서 으쓱대면서 한 방 친 게 너무 세어서 이 친구가 쭉 뻗어버렸어요. 세리엄마도, 나도 상대가 죽은 줄 알았어요. 하도 놀래서 둘이 도망을 다녔는데, 이게 인연이 된 거지요』
―그 친구는 살아났습니까?
『다행히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세리엄마가 집에 안 들어가니까, 그 쪽 집에서 나를 죽이네 살리네 하다가 함께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둘은 3년 후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세리―「세계를 빛내리」에서 따온 이름
이렇게 살면서 첫딸 유리(29)를 낳았고 둘째로 세리(24)를, 그리고 막내로 애리(21)를 두게 됐다.
―누가 이렇게 우리말로 이름을 잘 지었습니까?
『우리 어머니가 지으셨어요』
―아니, 어머니가 애들은 사랑했나 봅니다.
『처음엔 양쪽 집에서 다 왕래를 안 했지요. 어머니도 나중에 왕래를 하시며 이름도 지어 주고 그랬어요. 어머니한테 물어 봤어요. 애들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나 하고. 유리는 맑게 자라라고, 애리는 애교가 있다고 그렇게 지었는데, 세리는 「세계를 빛내리」라는 뜻이래요. 참 기막히게 딱 들어맞았잖아요!』
―혹시 세리 가졌을 때 태몽 꾼 거 있어요?
『세리는 광주 단칸방에 가서 살 때 거기서 낳았어요. 광주 가서 막벌이 노동을 하며 사는데 병원에 갈 돈이 없어서 이웃에 있는 助産員(조산원) 불러다가 내가 받아내다시피 했어요. 배꼽도 내가 잘랐어요. 기저귀도 내가 다 빨았어요.
세리를 낳자마자 유성으로 돌아와서 유성호텔 뒤에 있는 솜틀칸에 와서 살았어요. 쪼끄만 방을 하나 들였는데 거기서 살았지요. 그때 세리가 홍역에 걸렸는데 얼마나 심하게 앓았던지 죽다 살아났어요. 열꽃이 하도 많이 나서 눈도 떠지지가 않더라구요. 훌륭하게 될 사람은 이렇게 아주 심한 시련을 겪는 거 같아요』
여기서 얘기가 제 자리를 찾아간다.
『광주에 살 땐데 하루는 밤엔 꿈을 꾸니까 가물치가 커다란 저수지에 가득하게 바글바글해요. 그 중에 무지무지하게 커다란 가물치가 있었는데, 야광처럼 파랗게 빛났어요. 그런데 그 큰 가물치가 악어처럼 발이 달려 있었어요. 이 커다란 가물치가 나무 있는 곳으로 움직이니까 그 수많은 조그만 가물치들이 고물거리며 일시에 큰 놈한테 새카맣게 몰려가는 겁니다. 깨어 보니 꿈이에요. 그래서 나는 세리가 사낸 줄 알았어요』
세리는 자랄 때도 비상했다.
『세리는 8개월 만에 걷기 시작했어요. 금방 뛰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약빠른지 몰랐어요. 유성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육상을 시켰더니 우승기를 쓸어오다시피 했어요』
―갈마 중학교를 졸업하고 왜 공주 금성여고로 진학했던가요.
『대전 체육고등학교에 가서 박세리를 받아달라니까 골프부가 없어서 받을 수가 없다는 거요. 그런데도 금성여고에선 세리를 스카우트하려고 열심이었구요』
그래서 지금도 공주시에선 공주 박물관 앞에 세리의 기념물을 해놓고 세리의 성적과 기록을 게시하며 「공주의 인물」로 크게 선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공주市는 세리네가 이사만 오면 기념공원을 만들 땅을 무상으로 주겠다고 제안하고 있다 한다. 이에 반해 대전市는 아주 무심해서 좀 섭섭한 구석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신접살림은 어떻게 시작했나요.
『7월쯤이었는데 유성 만년교 다리 옆 둑 밑에 군인 텐트를 치고 버너로 밥을 해먹으면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9월까지 살다가 유성에 어떻게 방을 하나 얻었어요』
―돈은 어떻게 벌었습니까?
『한번 살아보려고 온천장 사거리에서 군고구마 통을 놓고 담 밑에서 구두닦기를 시작했어요. 남한테 폐 안 끼치고 살아가는 게 사나이 길이라고 생각하고, 6개월 간 구두를 닦고 군고구마를 팔았는데, 겨울에 하도 추워서 동상에 걸려 오른손 검지 끄트머리를 잘랐어요. 그때부터 살아보자고 열심히 했는데…』
그게 제대로 안 됐단다.
『스물네 살 때쯤 유성 만년장 호텔 나이트 클럽 영업부장으로 스카우트됐어요. 그때 총지배인이 월급으로 9만 원을 받을 땐데 나는 13만 원을 받았어요. 그때 그런 생활을 하다 보니 집에 자주 못 들어가고 사우나에 가서 한숨 푹 자고 나이트 클럽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마흔 살만 넘겨라, 너는 큰일한다』
그때 정말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어느 날 새벽 5시쯤 옷을 벗고 탕 쪽으로 들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탈의실에 앉아서 나를 한참 보더니 「젊은이 이리 와봐」 그래요. 나는 기분이 좀 나빠서 「이거 뭐여, 스님이 새벽부터 왜그랴?」 그랬더니 스님이 「이리 와봐 이 사람아, 여기 앉아봐」 그래요. 내가 가서 앉았더니 「마흔 살만 넘겨. 앞으로는 좋은 일도 많이 하겠구먼. 공부를 좀더 했으면 정계로 나갈 텐데, 쯧쯧쯧, 마흔 살만 살면 좋은 일 있을 거여」이러는 거요.
첫 새벽에 이런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아주 나쁠 거 아뉴. 나는 탕으로 들어가면서 혼자 「별 미친 놈 다 봤네. 뭐 이런 게 있어!」 하고 중얼거렸어요. 그런 말을 듣고 들어가서 샤워를 하는데 머리털이 빳빳하게 서요』
그러고 나서 2∼3개월이 지났는데, 그 스님을 그 자리서 또 만났다.
『그 스님이 또 나를 자세히 보더니 「골격은 참 좋은데 머릿속에 들은 게 부족해 쯧쯧쯧. 부처님이 한 사람한테 다 주겠나. 이름도 남길 테고」 그래요』
그때 그 스님의 말이 朴峻喆씨의 머릿속에 지금까지도 깊게 각인돼 있다. 지금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적인 인물이나 선수는 분명히 미리 마련된 길을 따라 태어나고 성장하는 것 같아요. 그때 그 스님이 그려 준 그림이 지금 생각하면 소름끼치게 맞아요』
―그 길이 어떻게 열리던가요?
『세월이 흘렀지요. 싸우고, 때리고, 형무소 가고, 그러면 세리 쪼끄맸을 때 세리엄마가 안고 면회 오고…. 이런 짓을 했으니 이거 되겠어요. 이렇게 해선 안 되겠다 생각하고 유성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지요』
그의 말로는 그가 마음잡고 나서 복잡하던 유성이 잠잠해졌다고 한다.
『유성에 싸움이 없어졌어요. 대전과 유성이 서로 붙어 싸우고 했는데, 제가 유성에 자리잡고 살면서 그게 없어졌어요』
그러는 사이 그는 나이트 클럽에서 일하기도 하고, 오락실을 운영하기도 하며 살아왔다. 그 동안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많은 사업을 해 왔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은 소상하게 다 밝힐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철저하게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형편도 좀 좋아졌다.
『서른 살 때 23평짜리 아파트를 한 채 샀어요. 그걸 사놓고 1주일 동안 잠을 못 잤어요. 내가 아무 것도 없는 無의 상태에서 조금씩 모아서 아파트 한 채를 샀으니 얼마나 좋겠어요. 하도 좋아서 들어눴다 인났다(일어났다) 하느라고 1주일 간 잠을 못 잤어요』
이런 가운데 뭐니뭐니 해도 그에게 있어서 가장 획기적인 轉機는 세리가 골프채를 잡게 된 것일 게다. 그의 말로는 그것은 기막히고 극적인 사건이었다고 한다.
『내가 한국에서 맨날 쌈질만 하고 그러니까, 미국에 계시던 어머니가 이민 신청을 해놓으셨어요. 그런데 몇 년이 지난 후에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이민 비자가 나온 거요. 그땐 돈이 좀 있었지요. 가정을 잘 지키면서 애들을 잘 키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운영하던 오락실을 정리해 가지고 이민을 가기로 결심했지요』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골프 연습을 하다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을 텐데.
『스님 생각이 났어요. 내가 훌륭하게 돼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여기서는 맨날 싸움만 하고 형무소만 왔다갔다 하니 뭐가 되겠는가. 한번 환경을 바꿔보자 이런 생각이 들었지요. 내가 혼자 해답을 찾아야 되겠더라구요』
―그래 미국가선 살 만 하던가요?
『서른일곱 살 때 어머니, 누님, 형님이 있는 하와이로 갔는데, 가서 보니 친구들이 38구경 총을 주더라구요. 이제 그런데서 손떼고 점잖게 애들하고 살아보자고 미국에 왔는데, 또 총을 주니, 야 이거 또 이 길로 가야 하나…. 또 어려운 게, 미국에 가니 누가 알아 주는 사람이 없어요. 식당 가서 접시 닦아야 했어요. 그게 나한테는 안 맞잖아요』
그런데 하와이서부터 스님의 말이 맞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서른 두 살 때부터 골프를 시작했어요. 친구들이 맨 골프 얘기만 해요. 버디를 했네, 스리 퍼터를 했네… 내기 골프 얘기도 하고』
이때 박준철式 저돌성이 나타난다.
『밤 열두시에 골프 연습장에 가서 자는 사람을 깨우고 들어가 보니 문을 따준 사람이 프로(연습코치)였어요. 그때 그 사람한테 담뱃대 같은 것(드라이버)을 가지고 쥐는 방법에서부터 배우기 시작했지요. 거기서 4시간 반 동안 손이 다 까지도록 연습을 했어요』
이번에도 박준철式.
『날이 새고 바로 그날, 친구들한테 채를 빌려서 당장에 머리를 올렸어요』
―잘 맞던가요?
『저는 연습장과 똑같이 생긴 데서 치는 줄 알았어요. 누가 얘기해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가서 보니까 그물도 없고, 넓은 운동장 같은 잔디밭에 대고 치는 거요. 게다가 사람들이 죽 서서 쳐다보고 있잖아요! 나도 보통 배짱은 아닌데, 야, 겁나더라구요.
티 박스에 올라가서 티를 꽂고 공을 올려놓고 치려고 하는데, 가만히 보니까 못 맞추겠어요. 몸을 조금만 움직이고 딱 때렸더니, 맞았어요. 맞긴 맞았는데 슬라이스가 나서 없어진 거지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으스대며 가서 보니까 공이 없어졌더라구. 첫 판부터 내기를 했는데 150개는 쳤어요. 땅만 쳤으니 사방이 아프고 난리였지요. 주머니에 있던 60만원을 다 잃고 30만원은 외상을 했지요』
그날 그는 돈을 잃기는 했지만 새로운 발견을 했다.
『잘만 하면 한 달에 몇 천만원을 따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그날부터 죽자살자 연습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연습을 얼마나 했는지, 갈비뼈 세 대가 나갔어요. 지금도 엑스레이를 찍으면 갈비뼈 세 개가 엇비슷하게 붙어 있어요』
그런 맹연습의 결과 그는 기적을 연출해냈다.
『6개월 만에 싱글을 기록했어요. 79타를 쳤거든요. 저는 승부에 강해요. 그래서 그런지 내기를 하면 돈을 땄어요. 돈이 막 들어왔어요』
그런데 그는 또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나중에 내가 너무 잘하니까 손님이 없어졌어요! 내가 친구들한테 전화를 하면 서울에 가 있다고 그래요, 왜? 골프 치면 또 돈 잃으니까』
그때 그의 골프실력은 이미 대단해서 전국체전에 대전 대표선수로 출전하기까지 했다.
이럴 즈음에 그는 하와이로 이민을 가게 된 것이다. 스님의 말씀을 실현하는 것 말고도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이다.
『하와이 가면 친구들 돈좀 따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었지요. 그래서 접시 닦기를 때려치우고 본격적으로 내기 골프로 들어섰지요』
여기서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미국에선 연습장이 멀어서 집 근처에 있는 잔디밭에서 어프로치 연습을 했어요. 내가 친 공을 다시 주서(주워) 오다 보니까 귀찮아졌어요. 그래서 세리를 데리고 가서 같이 연습을 했는데, 8번 아이언을 주면서 저쪽 가서 내가 친 공을 이쪽으로 치라고 했어요. 그런데, 야 이거 참 신기하지! 세리가 툭툭 친 공이 나한테 와서 딱딱 떨어지는 거요. 그립 잡는 것도 「이렇게 하는 거야」 하고 딱 한 번 가르쳐 줬는데! 그때가 세리가 초등학교 3학년 때요.
그 채가 엄칭이(엄청나게) 억시고(억세고) 힘든 건데! 그게 벤 호간이었어요. 그걸 보고 내가 그 자리서 생각했어요. 골프는 내가 할 게 아니고 세리를 시켜야겠구나! 그래서 내가 물었어요. 「세리야, 재미있니?」 그러니까 「아빠, 재미있어」 그러는 거요. 됐다!』
그는 이때 세리를 키우기로 결심을 했다.
『세리는 어려서부터 운동을 다 잘했어요. 달리기도 잘하고, 멀리뛰기도 잘하고…. 어렸을 때 나를 보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이놈을 점 찍어놓고 있었지요. 중학교 때는 소년체전 나가서 투포환으로 우승했잖아요』
그때 변화가 일어났다. 세리 아버지가 미국에 더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귀국을 했던 것이다.
『그릇 닦으면서는 못 살겠더라구요. 돈내기 골프도 하루 이틀이지, 돈 따먹을 친구도 별로 없고…』
『세리 키우려고 내가 살았다』
그는 부인과 아이들을 하와이에 두고 혼자서만 한국으로 나왔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정말 일생일대의 큰 사건을 만난다.
그가 미국 가기 전에 데리고 있던 아랫사람들한테 칼부림을 당해 죽기 직전까지 간 것이다.
『서른여덟 살 때였어요. 귀국해서 친구네 가게(술집)에 들어가 앉아서 얘기하고 있는데, 그 오락실을 운영하던 애들 두 명이 들어와서 한 놈이 내 등허리를 흉기로 찔렀어요. 또 한 놈은 배를 향해 흉기를 들이 대고 찔러서 그걸 손으로 딱 잡았더니 내 손이 나가잖아요』
그는 말하면서 왼손 바닥을 보여 줬는데. 길게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그는 배와 왼쪽 허벅지의 끔찍한 상처도 보여줬다. 너무도 끔찍했던 그날의 사건은 듣는 것만으로 소름이 끼쳤다. 꼭 영화 「친구」에 나오는 것처럼 살벌하고 非인간적인 장면이 벌어졌던 것 같다. 도저히 글로는 쓸 수 없을 만큼 잔인한 사건이었다.
―왜 그 사람들은 그런 일을 했을까요?
『글쎄 저도 이해가 잘 안 가요. 그 오락실을 미국 가기 전엔 내가 운영했는데 그걸 뺏길까봐 그랬는지. 또 내가 돌아와 보니 유성에 조직이 다 돼 있었는데, 그 조직을 뺏길까봐 그랬는지』
대전지방에서는 당시의 그 사건이 돈과 관련이 돼 있었다는 얘기가 떠돌고 있었으나 본인은 자세하게 확인해 주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그후 어떻게 됐습니까?
『무기징역을 살게 됐는데 내가 힘을 써서 5년 살고 나왔어요』
이때 그는 스님의 예언을 떠올린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스님 말이 딱 맞잖아요. 「마흔 살만 넘겨라. 마흔 살만 살면 훌륭한 일을 할 거다」라고 했잖아요. 세리가 없었다면 나는 그때 죽었을 거요. 세리를 성공시키라고 내가 살아난 겁니다』
정말 그는 죽다가 살아났다.
『내가 非夢似夢(비몽사몽) 간에 병원으로 실려갔어요. 의사가 나를 보더니 피가 많이 빠져서 맥이 안 뛰니까, 흰 커튼을 치면서 「내일 아침에 장사 치를 준비를 하라」고 하더라구요. 그 말이 어렴풋이 들렸어요.
어떻게 살려보려구 가슴에 뭘 갖다대고 전기충격을 「탕」 하고 주더라구요. 그것도 생각이 나요. 그러면서 어떻게 수술을 받았는데, 죽지 않고 살아서 1주일 만에 깨어났지요. 그런 환자는 1000명에 하나 살기도 힘들다는 겁니다. 기적이지요, 기적!
이게 세리 때문에 내가 산 겁니다. 세리 키우라고.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죽었지 어떻게 살았겠어요. 내가 살아야 세리가 성장하니까』
그는 이렇게 굳게 믿고 있다.
『이게 우리가 볼 수 없는 세계지요!』
그러면서 아버지와 세리와의 관계도 급속도로 진전된다. 부인이 남편 소식을 듣고, 견디다 못해 3년 만에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귀국했던 것이다.
부인이 아이들 데리고 귀국
『병원에서 1년 있다가 퇴원했는데, 갑자기 골프가 치고 싶어서 아픈 몸을 이끌고 골프를 열심히 쳤어요. 그때 세리를 빨리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막 몰려왔어요』
그는 그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깨달았다고 했다.
『내가 세리 아니면 이름을 남기고 훌륭한 일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지요』
그러고 그는 덤프 트럭을 넉 대 사서 모래 장사에 뛰어들었다. 세리를 키울 돈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제대로 안 됐다.
『결국 손해만 보고 차 팔아서 좀 남은 것 가지고 세리한테 꼭 붙었지요』
세리는 엄마와 함께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왔다.
『내가 미국서 돌아올 때, 세리한테 「너 혼자 심심하면 이 골프채 가지고 놀아라」 하고 왔는데, 저 혼자 연습을 했던가봐요. 내가 금방 온 놈을 데리고 가르치면서 시켜보니까 기가 막히게 치더라구요!』
돌아와서도 세리는 초등학교 육상 선수였다. 단거리, 멀리뛰기, 투포환에 다 능했다. 세리는 유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전 갈마중학교 육상 특기생으로 진학했다.
『애가 운동을 하고 돌아오면 밤 10시가 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또 연습장에 가서 골프연습을 하는 겁니다』
中2 때 첫 출전한 주니어 대회서 3등
―그래 골프 코치할 실력이 되셨던가요?
『그때 무슨 교재가 있어야지요. 아놀드 파머, 벤 호간, 잭 니클라우스, 이런 선수들 테이프를 구해다가 밤새도록 내 머리 속에 넣어 가지고 세리한테 가르쳐 줬지요』
―잘 따라오던가요?
『잘 따라오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를 가르쳐 주면 두 개 세 개씩 따라오는데 미치겠더라구요』
그렇게 6개월을 보내고 본격적으로 매달려 고된 연습을 시켰다.
그리고 첫 번째 경기에 출전하게 됐다. 세리가 겨우 중학교 2학년 때 10월이었다.
『골프 다이제스트에서 주최하는 주니어 대회에 출전했는데, 서울 가서 다른 선수들 경기하는 걸 보니 숏 게임도 참 잘들 하더라구요. 그런데 세리가 거기서 3등을 한 거요!』
처음 출전해서 거둔 성적치고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그는 어느 정도 자신했다.
그러나 기량이 뛰어난 다른 선수들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때 유복한 여자선수들이 주니어대회를 주름잡고 있었다.
그는 한 수 배울 요량으로 1, 2등 한 선수들의 부모를 찾아서 인사를 했다.
『저, 박세리 아버집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가 자문자답한다.
『왜? 이상하게 생긴 놈이 꺼부정하게 입고 와서, 새까만 여자 애 앞세우고 제 딸이라고 하니, 코치 붙여서 떵떵거리고 다니는 사람들한테 그까짓 3등이 눈에 보이겠어요?』
무안을 당한 그는 여기서 이를 물었다.
『오냐, 두고 봐라. 머지 않아서 내가 들어서면 늬들은 문을 열고 엎드리게 될 것이여!』
그때부터 그는 수첩에 적기 시작했다.
『몇 월 며칠 나한테 서운하게 한 놈, 아무개 나쁜 놈, 아무개 버릇 고쳐줄 놈, 다 수첩에 적었어요. 이놈들 두고 보자! 내가 이렇게 이를 악물고 살아왔어요』
그는 대단한 성공이랄 수 있는 3등을 하고도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돌아와서 세리와 함께 피나는 연습을 했다.
『그러고 나서 겨울이 닥쳤는데, 세리가 얼마나 열심히 연습을 했는지 손이 얼어붙고 터져서 피가 났어요. 내가 맨소래덤을 발라 주며 말했어요. 「세리야, 이기자, 이겨야 산다!」 세리는 잘 참았어요』
지독하기로 말하면 세리는 아버지보다 더 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연습장에서 세리한테 연습을 시켜놓고, 「세리야, 아빠 친구 좀 만나고 올게. 아빠 올 때까지 여기서 연습하고 있어」 이러고 나가서 친구들하고 술 한 잔 하다가 깜빡 잊어버렸어요.
새벽 4시에 집에 가서 세리엄마한테 「세리 왔어? 자?」 했더니 「같이 나가구선 왜 나한테 물어요?」 하는 거야. 야, 이거 큰일났다. 정신없이 연습장에 가 보니까, 세리가 저쪽 구석에서 불 한 개 켜놓고, 그 추운 겨울에 굳은 손을 호호호 불면서, 글쎄 새벽 4시까지 연습을 하고 있는 거요! 내가 달려가서 세리를 붙들고 끌어안고 울었어요! 「세리야 미안하다. 세리야 잘못했다!」 그러면서 내가 막 울었어요』
이렇게 말하는 그의 눈도 젖어 있었다.
『그때 유성 골프 연습장에서 한 말이 있어요. 세리는 세계를 휘어잡는 선수가 될 거라는 말이 나왔어요. 골프장 관리인이 열 두 시가 돼도 세리가 안 가니까, 문 닫어야 된다면서 가라고 해도 세리가 안 가더래요. 아빠가 올 때까지 치고 있어야 된다면서요!』
세리가 아버지와 함께 굳은 결심을 하게 된 데는 까닭이 있다.
『세리가 아빠랑 함께 꼭 붙어서 연습을 하다 보니까, 아빠가 돈이 없어서 괄세받는 걸 다 본 겁니다. 그걸 보고 세리가 꼭 성공해야겠다고 이를 깨문 겁니다』
그 후 아버지와 딸은 꼭 미친 사람 같았다.
『내가 자다가 일어나서 헛소리도 하고 잠도 못 자고 하는 겁니다. 나도 세리도 너무 집착해서요. 자나깨나 아버지와 딸이 골프밖에 모르니까, 반은 미치더라구요. 공부해야지, 연습해야지, 그런데 돈은 없지, 시간도 없지…. 제일 답답한 게, 세리는 자꾸 따라오는데 내가 가진 게 별로 없는 거였어요. 실력도, 돈도…. 하도 내가 답답해 하니까 세리엄마가 그만 두자고 했어요. 애 잡고, 아빠 미치겠다구요』
공동묘지서의 야간 훈련
그러면서도 그는 주먹구구식으로 가르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체계적으로 튼튼한 체력과 백절불굴의 정신력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세리가 체력을 타고났어요. 그래도 다리에 힘을 더 길러야 된다고 생각했죠. 골프는 다리 힘이니까. 그래서 아파트 15층을 걸어 올라갔다가, 돌아서서 내려오지 않고, 올라가는 자세로 그대로 서서 내려오게 했습니다. 그게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몰라요. 무지무지하게 힘들어요. 그걸 반복시키니까 애가 반은 죽어요. 그래도 애가 불평 한 마디 안 했어요. 세리가 내 딸이지만 보통애가 아닙니다.
그런 운동을 하도 시키니까 다리가 굵어지면서 근육이 막 뽀개지는 겁니다. 세리가 제 다리를 보며 그래요.
「아빠, 이 다리 근육이 너무 한 거 아녀?」
내가 자신 있게 말했어요. 「그런 소리 마, 그건 황금의 다리여. 넌 그걸로 엄청난 선수가 될 거여. 걱정하지 마」 우린 이렇게 살아왔어요』
그는 또 정신력도 키워놔야 된다고 생각했다.
『골프엔 담력이 있어야 하니까. 간을 키워놔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유성 방동 저수지께 묘가 많은데, 거기 묘 옆 잔디에 텐트를 치고 세리와 함께 살았어요. 밤중에 내가 세리한테 샌드 웨지를 주며 「여기서 연습하고 있어라」 하고 친구 만나러 유성시내로 나오면, 세리가 아무도 없는 묘지에서 혼자 연습을 했어요. 그때 어린애가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내가 안 돌아가면 혼자 자야 했는데, 그때는 또 어땠겠어요.
세리한테 물어봤어요. 「안 무서우냐」고. 그랬더니 「처음엔 무서웠는데 나중엔 괜찮았어」 이러는 거야! 세리는 이런 걸 다 이긴 겁니다. 세리가 막판에 몰아쳐서 역전승을 하는 담력은 다 이런 데서 나온 겁니다!』
그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딸에게 가르쳐 주었다. 세리는 아빠의 가르침을 하나도 거역하지 않고 다 흡수했다.
아버지는 지금도 자신만만하다.
『세리가 미국에 가서 세계적인 유명한 코치 데이빗 레드베터에게 배우게 됐을 때, 내가 그 사람한테 말했지요. 「당신은 세리가 인정하는 선생님이니까, 이렇게만 말해 주시오. 너는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천부적인 몸과 정신을 가지고 태어났다. 자신감을 가져라. 이것만 말해 주시오. 그 말만 해주면 당신 역할은 끝난 것이오」
정말 레드베터가 세리한테 그 말을 해줬어요. 그래서 자신감을 갖고 미국을 제패하게 됐지요』
『경기에 지고 울 때 가슴 아팠다』
실전연습을 할 때도 악조건을 골라서 했다.
『눈오는 날, 비오는 날, 바람 세게 부는 날은 일부러 쉬지 않고 필드에 나가 연습을 했습니다. 유성 컨트리클럽에서 주로 연습을 했는데, 거기서도 처음엔 나를 미친 놈이라고 했어요. 「네가 무슨 세계를 제패하느냐」고. 맨날 내가 골프백 짊어지고 이런 날만 골라 세리 데리고 치고 다니니까 다들 우습게 봤지요. 나는 그때 생각했지요. 나쁜 조건에서 연습을 많이 해야 어떤 조건에서도 이길 수 있다고』
세리가 지금 악조건에서 더욱 잘 싸우는 건 이런 연습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中3 때 얘길 하고 있는데, 그때 어떻게 세계를 제패한다는 생각을 했습니까?
『나는 그 스님이 한 얘길 믿었어요. 네가 살면 행복한 날이 오고 좋은 일을 할 거라고 했으니까. 또 그때까지 그 말이 착착 맞아 들어오니까!』
―그 후에 그 스님 만났어요?
『아니오, 아직 못 만났어요. 한 번 만나 뵈었으면 좋겠어요』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요?
『왜요, 여러 번 했지요. 그런데 포기하려고 하면 세리가 하도 잘해서 그게 안 되더라구요. 그래서 포기하려구 했다가 힘을 얻고, 또 포기하려구 했다가 힘을 얻구 그랬지요』
그는 말끝에 버릇처럼 이런 말을 잘한다.
『우린 이렇게 살아왔어요』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언제 났어요?
『돈 문제가 제일 컸죠. 경기에 나가 싸우는데, 돈이 없어서 애는 경기하라고 하고, 나는 내려와 돈을 구하러 다니곤 했어요. 그럴 때마다 그만 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돈을 쪼끔 만들어서 올라가 보면 세리가 너무 잘 한 거예요!』
아버지는 딸의 마음을 안다.
『세리가 아버지 마음을 너무 잘 아니까, 우리 세리가 정말 최선을 다해서 공을 친 겁니다. 아버지 고생하는 것도 알고, 지가 공을 못 쳐서 성적이 나쁘면 끝장이라는 것도 알고 그러니까, 세리가 죽을 힘을 다해서 공을 친 겁니다』
―마음이 아팠을 때도 많았겠지요?
『세리가 돈이 없어서 절절 매며 구하러 다니는 아버지한테 효도하겠다며 최선을 다해서 경기를 했는데도 결과가 안 좋았을 때, 아버지한테 不孝했다며 내 품에 안겨서 울었을 때, 그때 내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어요! 세리는 제 맘에 안 차는 경기를 하면 눈이 붓도록 울어요. 아버지가 매달려서 뒷바라지하는 걸 보면 저한테도 너무나 감동적인 일이 많았는데, 그런 아버지가 너무 불쌍한 거야, 제가 경기에 져서…』
『돈 세다 손가락에 쥐나도록 벌겠다』
―돈이 그렇게도 없었나요?
『그럼요. 남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배가 고파도 밥을 못 먹을 때도 있었고, 남들은 호텔에서 잘 때 우리는 싸구려 여관에서 잤고. 그러면서 우리는 참 많은 얘기를 했어요. 희망에 넘치는 앞날 얘기도 하고, 이 어려움을 이기자는 얘기도 하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기도 하고. 내가 「세리야 걱정마, 내가 어떻게든 네 뒷바라지는 할게」 하면, 세리는 「아빠 걱정마, 내가 꼭 이길게」 하고, 우리는 이렇게 남남이 아니고 서로 분신이었어요. 이런 마음이 오늘 날 세계를 제패한 겁니다』
이렇게 고생하면서 골프를 칠 때의 서러움과 결의가 세리 가슴속에 아주 깊게 새겨져 있었던 듯싶다. 그 무렵 세리는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아버지가 전한다.
『「엄마, 걱정마. 내가 손에 쥐가 나도록, 셀 수 없을 만큼 돈을 벌어 줄 테니까」 세리가 이런 겁니다. 세리 엄마는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울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은 맞고 말았다. 어떤 인내심 강한 사람이 있어서 박세리가 벌어오는 돈을 손으로 세고 있을 것인가. 손에 쥐가 백 번 나도 다 못 셀 것이다.
우승하고도 돈이 없어 도망 다녀
『우리가 바람 불고 비오는 날 유성CC에서 연습을 할 때였어요. 내가 골프 백을 메고 그늘 집을 지나가는데, 친구들이 「야, 배고픈데 쟤(세리) 우동 한 그릇 먹여 보내. 너도 먹고」 그러더라구요. 그때 참 배가 고팠어요.
따끈한 우동 한 그릇 먹고 가고 싶은데도, 돈도 없는 데다 애들이 빈중거리는 게 보기 싫어서, 「세리야, 이런 거 이겨내야 돼, 그냥 가!」 그러고 찬비를 맞으며 계속 돌았는데, 그게 잘못이었어요. 세리가 몸살이 나서 1주일 동안 앓았잖아요. 이걸 보고 다른 사람들은 저놈 미친 놈이라구, 애 죽고 저 죽는다고 다 그랬어요』
그는 또 한 마디 보탰다.
『우린 이렇게 살았어요』
―그래, 우리나라는 어떻게 제패했던가요?
『중2 때 3등을 하고 나서 보니 실력이 참 많이 모자라더라구요. 우린 숏 게임에서 실력이 부족하더라구요. 그때까지 난 숏 게임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요. 파 퍼(4)에서 두 번 똑바로 쳐서 온 그린(On Green) 시켜 놓고 두 번에 넣든지 한 번에 넣든지 하면 되지 무슨 숏 게임이 필요하냐,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반듯하게 많이 내보내는 것만 연습을 시킨 거지요. 그런데 경기에 출전하면서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요. 숏 게임을 못해서 우승을 몇 번 놓쳤거든요. 그래서 숏 게임을 집중적으로 연습시켰지요』
이렇게 실력을 가다듬고 중3 때, 전국 중고연맹 회장배 경기에 출전했다.
『그 대회에 탁 가서 봉께 무슨 식이 진행되고 있었어요. 트로피 세 개가 책상 위에 놓여 있더라구요. 내가 우승컵을 집어들고 세리한테 그랬어요. 「세리야, 이거 있다가 우리가 가지고 갈 거다. 한 번 안아봐」 그때 뒤에 있던 사람들이 날보고 「미친 놈」이라는 거예요. 세리도 겁이 났던지 눈을 찡긋하며 「아빠, 얼른 갖다 놔, 안 돼 그거!」 그래요. 그래도 나는 태연하게 「있다 가져갈 거니까 미리 만져보면 어떠냐, 한 번 안아 봐」 그러니까 세리가 마지못해 얼른 한 번 안았다가 놓더라구요.
내가 그걸 보고 세리한테 말한 거요, 「우리가 연습한 대로만 하면 분명히 우승을 한다. 만약 우리가 이 컵을 못 가지고 가면 내 손가락 하나를 자르고 가겠다」 그러고 등을 툭툭 치고 세리를 경기에 내보냈지요』
―어린애한테 너무 부담을 준 거 아닙니까?
『나는 보이는 게 있으니까 그랬지요』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손가락을 자르게 될 것인가, 아니면 우승컵을 안고 돌아갈 것인가. 세리는 그가 생각한대로 경기를 너무 잘하고 있었다.
『전반 나인(9)을 퍼 언더(-4)로 넘어왔어요. 그런데 손가락 네 개를 위로 올려요. 퍼 오버(+4)란 뜻이거든요. 그래 내가 놀라서 「뭐가 그렇게 안 되냐?」 그랬더니 「아빠, 잘 돼. 퍼 언더야」 그래. 「억! 야 이놈아, 그럼 손가락을 밑으로 내려야지」 그러니까 세리가 웃더라구. 그런데 후반에 소심하게 쳐서 41타를 치는 바람에 73타가 됐어요. 그 이튿날도 똑같이 73타를 쳐서 통산 146타로 세리가 우승을 한 거 아니오!』
부녀는 뛸 듯이 기뻤다. 생애 처음으로 전국대회 우승을 한 것이다. 그리고 전날 안아보았던 그 우승컵을 아예 차지해 버렸다. 그러나 또 문제가 있었다.
『우승을 하고 나니, 여러 매스컴에서 다 와서 사진을 찍더라구요. 다른 부모 같으면 그날 모인 사람들하고 큰 잔치를 벌일 정도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분들 대접할 돈이 없어서 얘기하다 말고 둘이서 차를 타고 도망와 버리고 말았어요. 한 번 우승하면 몇 백만 원씩 돈이 들어가는데 내가 그 돈이 있어야지요』
―뒤에 후환이 없었어요?
『처음엔 기분이 안 좋아서 나를 싫어했지요. 나중엔 내 실정을 알고 이해해 줬고 또 많이 도와 줬어요』
그러고 나서 바로 열린 大農 주최 라일 앤 스코트 오픈에서 전체 프로들과 함께 역량을 겨루게 됐다. 당초 박세리는 이 대회에 나갈 수 없었는데, 중고연맹대회에서 중학생으로 당당히 우승하는 바람에 시드를 배정받아 그 덕으로 이 대회에 출전하게 됐다.
닭 날개 실컷 먹고 훨훨 날았다
『그때까지도 세리 실력을 제대로 평가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어쩌다 한 번 우승했겠지 하는 정도였어요. 나는 그 대회에 가서 라일 앤 스코트 모자를 하나 구해다가 세리한테 씌워 주고, 아줌마들한테 가서 라일 앤 스코트 티셔츠를 얻어다가 입혀 주며 어깨를 끌어안고 「세리야, 프로들하고 친다고 조금도 겁내지 마라. 너는 세계적인 프로가 될 거야.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네 발 밑에 무릎을 꿇을 거야. 네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게임을 하면 너는 우승을 할 거야」 이러고 내보냈어요』
첫날 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그런데도 세리가 전반에 36 이븐을 치고 1등으로 넘어오는 거요. 다른 사람들은 쓰리 오버(+3), 퍼 오버(+4)를 쳤는데. 비바람 불 때 연습한 효과가 나타난 거요!』
그런데, 그날 비가 너무 와서 경기가 취소됐다.
『속이 참 상했지요. 내가 세리를 붙들고 말했어요. 「세리야, 걱정마. 내일도 오늘처럼 치면 넌 베리 굿이야. 가자, 뭐 먹고 싶으냐」 그랬더니 닭 날개가 먹고 싶다는 거요. 나는 세리를 데리고 치킨 집에 가서 닭 네 마리를 시켜서 날개를 모두 떼어 세리한테 줬어요. 내가 물었지요. 「세리야, 너 웬 닭 날개를 그렇게 많이 먹니?」
세리가 웃으며 「아빠, 내가 이 날개 먹고 내일 훨훨 날 거야」 그러는 거요』
정말 그 이튿날 세리는 훨훨 날았다.
『이튿날, 원 언더(-1)로 세리가 1등으로 들어 왔어요. 사흘 하는 건데, 원재숙하고 同打가 돼서 연장전을 하게 됐어요. 내가 또 세리를 안고 말했지요. 「세리야, 원재숙이 너보다 한 수 아래야. 그거 알어 몰라?」 그러니까 「알어!」 그래요. 내가 등을 탁탁 치며 또 말했어요. 「자신 있게 치라구. 연습 스윙도 하지 말고 그냥 때려, 알았어! 남들이 박수를 치는 것도 신경 쓰지마」 그러고 연장전에 내보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원재숙이 스타여서 갤러리들이 따라다니며 박수를 쳤다고 한다. 반면 세리에겐 별로 관심들이 없었던 것이다.
연장전에 들어가서 원재숙이 먼저 치게 됐다. 세리가 다음에 쳤는데 비거리가 훨씬 더 많아서 세컨드 숏을 원재숙이 먼저 했다. 원재숙이 두 번째 볼을 날려 깃대 근처 3∼4m에 갖다 붙였다. 갤러리들의 박수가 요란했다.
다음은 세리의 차례였다. 아버지가 연습 스윙을 하지 말라고 해서 세리는 공을 노려보기만 하다가 탁 찍어 쳤다. 70m쯤 되는 거리였다. 공은 하늘 높이 솟았다가 깃대 70센티 근처에서 딱 멎었다. 그랬는데도 박수소리가 별로 없었다.
『나는 속으로 좋아하면서 세리한테 가서 「세리야, 네껀 바짝 붙었다」 고 했더니 「아빠, 아냐」 그래요. 왜냐하면 박수소리가 안 났으니까. 가서 보니 세리 볼이 붙어 있어. 세리가 좋았던지 막 뛰어갔어요. 내가 나지막하게 소리쳤지요. 「세리야, 천천히 가」 그 말을 듣고 세리가 뚜벅뚜벅 걸어갔어요. 원재숙은 버디 트라이에 실패했어요. 세리는 공을 툭 쳐서 홀에 집어넣더니 막 뛰어서 어디로 내빼는 거요. 자기가 이긴 줄도 모르고 17번 홀로 연장전하러 간다고 그런 거지요. 내가 달려가서 끌어안으며 말했어요. 「세리야, 어디 가. 네가 이겼어! 네가 이겼다구!」』
박세리는 이때 중학교 3학년으로 한다 하는 프로들을 무릎을 꿇게 하고 최연소 우승의 기록을 세운 것이다.
「寂然不動」 - 너무 기뻐 말라
그때부터 그는 한 단계 높은 교육을 시켰다.
『세리가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게 되니까 표정도 가르쳐야 했지요.
「우승을 했을 때 표정이 너무 많이 흔들리면 안 된다. 홀에서 공을 꺼내서도 너무 즐거워하면 안 된다.
寂然不動(적연부동) 알지?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기뻐도 기뻐하지 말고, 슬퍼도 슬퍼하지 말아라. 우승을 해도 잠시뿐, 내일의 경기가 또 너를 기다린다. 너무 들뜨지 말아라」
세리는 어려서부터 이렇게 배웠어요』
이제 보니 박세리가 우승한 다음 표정을 아끼는 까닭을 알겠다.
『딱 한 가지 못 가르친 게 있어요. 세리가 나한테 그래요. 「아빠가 다 잘 가르쳐 줬는데, 쉬는 걸 안 가르쳐 줘서 놀 줄을 모른다」는 거요. 나는 쉬는 시간에도 골프장 근처에 가서 그립을 쥐고 놀라고 했는데, 그게 아녔어요. 쉬는 게 아주 중요했어요. 시간이 나면 골프 이외에 무아지경에 빠질 수 있는 게 있어야 해요. 그런데 나는 세리한테 그걸 못 가르쳐 줬어요. 이제 그 걸 알고 「야, 쉴 땐 팍 쉬어」 해도, 안 배워서 못 쉬겠다는 겁니다. 시간이 나서 좀 쉴 때도 세리는 골프가방이 10m만 떨어져 있어도 불안해서 못 견뎌요』
그 다음부터 박세리는 승승장구했다. 명실공히 한국을 제패해서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어진 것이다. 불과 3년 만에 박세리는 한국의 무적 女장군이 된 것이다.
『한번 좀 느긋하게 밀어 줘 보시오』
박세리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아버지는 삼성물산(현재는 삼성전자 소속)과 협상을 계속했다.
『나는 1년 6개월 간 나 혼자서 협상을 계속했어요. 그때만 해도 남자 선수가 계약금으로 많아야 3500만원을 받았고, 여자선수는 1500만원밖에 못 받을 때였어요. 그런데 세리는 고3 졸업하면서 10억을 받은 거 아닙니까?』
―어떻게 그렇게 많이 받았어요. 상대방도 다 쟁쟁한 사람들일 텐데.
『나는 계속해서 세리는 미국으로 나가야 되고 세계를 제패할 것이다, 그걸 확실하게 믿고 한번 해보라고 했지요』
그는 혼자 일을 꾸려나가면서도 주도면밀했다.
『내가 계약기간은 10년으로 하되 5년 후에 再협의한다는 구절을 계약서에 넣었어요. 그거 안 넣었으면 큰 일 날 뻔했어요. 요즘도 이상한 얘기가 나오면 그 조문을 들이대지요. 삼성한테 섭섭한 게 자꾸 생겨요』
박세리가 미국에 가서 세계대회를 제패하기를 바라면서 결국 양측은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런데 또 곧 문제가 생겼다.
『세리가 미국 가서 5개월도 안 됐는데 삼성에서 들어오라는 거야. 5월까지 성적이 안 나니까, 경비 많이 들어간다구. 첨에 가자마자 프로 테스트에서 수석을 했지만, 프로경기에서 35위, 25위, 50위. 이렇게 성적이 저조하니까….
내가 서울로 올라가서 삼성한테 그랬어요. 「5년 안에만 세계대회에서 우승해도 성공한 거라고 한 게 언젭니까. 이렇게 하면 스폰서 자격 없어요. 우리는 LPGA 참피언십도 이길 수 있고, US 여자오픈도 이길 수 있어요. 한번 좀 느긋하게 밀어 줘 보시오」 그랬더니 「이런 소리 안 들으려면 한번 이겨 보라」는 거요. 그래? 우리도 이길 수 있다, 그러고 돌아왔지요』
유성으로 내려온 그는 세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리야, 이제 쫓겨오게 생겼다. 네가 지금 무슨 걱정이 있니? 아빠가 지금 너한테 가고 싶어도 언론들이 그 무식한 애비가 코치를 해서 지게 만들었다고 하는 바람에 못 가고 있는데, 그런 아빠 처지를 생각해서라도 네가 열심히 해야 할 게 아니냐!」 내가 세리 처지를 알지만 좀 무리하게 주문을 했어요』
메이저 대회 연속 우승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
그러고 며칠 만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수천 ㎞ 밖에서 보낸 아버지의 힘이 딸에게 용솟음치는 에너지로 전달된 것일까. 서로 분신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통한 것일까.
『그후 사흘 만에 「맥도널드 LPGA 챔피언십」이 열렸는데, 사흘째 치는 걸 보고 「이젠 끝났다」 하고 결정을 내려 버렸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사흘 치는 걸 보니까 너무 잘 맞아요. 맨날 호흡을 같이 했으니까 멀리서도 치는 것만 보면 다 알 수 있어요. 자, 우승이다, 그러고 신문 방송에 우승 소감 다 말하고 만세 부르는 모습도 다 찍고 세리한테 전화했어요. 「세리야, 이번에 우승했다. 벌써 TV 다 찍었다」 「아빠, 어떻게 알아」 「세리야 날 믿어. 너는 이번에 우승한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사흘째 마지막 퍼팅하는 걸 보고 알았어요. 안 들어갈 건데 들어가더라구요. 이제 氣만 불어넣으면 되겠구나 하고 내가 전화에 대고 자신감을 불어넣었더니 금방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어요. 나는 또 주문을 했지요. 「16번 홀에서는 무조건 우드로 쳐라, 투 온 안 시키면 안 돼!」 중계방송을 보니까 세리가 16번 홀에 가서 무조건 우드를 뽑더라구. 그러더니 투 온 시켜서 이겨버리더라구! 그러고 나니까 온 나라가 난리가 났어요』
세리가 L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고 나서 그는 삼성물산에 들어가 점잖게 말했다고 한다.
『「조금만 기다려 주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면서 「내가 지금 미국 가서 US 여자오픈에 우승하고 돌아올 테니 그때 원하는 걸 해주시오」 그랬지요』
―원하는 게 뭐였어요.
『US 여자오픈에 우승하고 돌아오면 100억원을 보너스로 달라고 그랬어요. 그쪽에선 어이가 없었겠지요. 우선 되지도 않을 US 여자오픈 우승 얘기도 그렇고, 100억원이란 거금도 그렇고. 그러나 나로서는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결국 삼성이 OK했지요』
그러고 그는 골프업계와 매스컴에, 『내가 세리랑 US 여자오픈 우승하고 돌아와서 100억을 받을 테니 두고 보라』고 광고(?)를 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두 달 뒤 7월에 대망의 US 여자오픈에서 당당히 우승을 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삼성물산에서 100억원(장기계약)을 받아냈다.
―우승할 줄 어떻게 알고 그렇게 큰 소리를 쳤던가요?
『우승할 때는 영감이 생겨요. 그런 말이 막 지껄여집니다. 반면에 아무리 잘 나가는 경기도 못 이길 땐 아무 말도 안 나와요』
US 여자오픈은 세리가 양말을 벗고 물에 들어가서 쳐 올린 샷으로 유명하다. 두 달 사이에 건져 올린 메이저 두 대회에서의 우승은 IMF 파동에 시달린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던 이른바 「IMF 우승」으로 유명하다.
그때 박세리가 역경을 딛고 마침내 승리한 것은 국가의 역경과 맞물려 커다란 의미를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세리의 우승 장면은 양희은의 상록수 가사에 실려 국가광고가 되어 全국민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메아리쳤다.
생각하면 박세리는 국가가 어려울 때마다 온 국민에게 서광을 비춰 주었다.
이때도 박세리 아버지 박준철씨는 일화를 가지고 있다.
『세리가 마침내 US 여자오픈에서 우승하게 됐을 때 중계 방송하던 카메라 팀이 뛰어들어오라고 했어요. 그 사람들도 감격스러운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거지요. 그래서 내가 뛰어들어갔는데, 우리나라 매스컴에서 뭐라고 그랬어요. 아버지가 무식해서 매너도 모르고 뛰어들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구 그랬잖아요. 나 참 못 살아요. 왜덜 그래유!』
작년의 無冠, 10勝보다 의미 커
세리는 화난 암사자처럼, 들불처럼 일어나 펄펄 뛰며 훨훨 타올랐다. 1998년 7월 한달에 US 여자오픈에 이어, 제이미 파크로 클래식, 자이언트 이글 클래식, 이렇게 3개 대회를 숨돌릴 겨를도 없이 휩쓸고 말았다.
그리고 1999년에도 세리는 4개 대회에서 트로피를 높이 들었다. 이렇게 세리는 4년 간 세계대회 12승이란 쾌거를 기록했고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만 우승하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해서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아쉽게도 2000년엔 상금은 많이 타냈지만 無冠에 머물고 말았다.
『작년에 내가 미국 가서 옆에 있었다고 해봐요. 또 그 엉터리 같은 아버지가 좋은 선수 버려놓는다고 했을 거요. 내가 세리를 그냥 놔둔 데는 다 이유가 있어요. 세리한테는 홀로서기할 시간이 있어야 해요. 말만 해도 그래요. 내가 옆에 있으면 맨날 한국말만 할 테니 영어가 늘겠어요. 지금은 영어를 곧잘 하잖아요』
―지금 홀로서기를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은 문제없어요. 사막에 갖다 놔도 모래 뒤집어쓰며 자고 나서 골프 칠 거요. 모래바람이 불어도 낙타 밑으로 들어가서 다리 붙들고 엎드릴 거요. 이제는 끝났어요. 어디 내놔도 문제없어요. 말도 잘 하고』
그는 無冠으로 보낸 작년을 의미 있게 평가한다.
『작년에 한 번도 우승 못한 게 10승 한 것보다 더 많은 걸 얻었어요. 본인의 가슴에 말할 수 없이 많은 걸 담았어요. 또 늘 부모들이 따라 댕기는 것도 문제가 있어요. 애 앞세워서 먹고 사는 것 같고, 또 굉장히 초라해 보이잖아요』
―一說에는 세리가 세계적 선수가 되고 나서, 아버지가 코치하는 방법과 달리 치고 싶어한다고도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유명해지다 보면 별 말이 다 많아요. 세리는 귀가 얇지 않아요. 선수는 단순명쾌해야지, 복잡하게 생각하면 안 돼요. 왔다갔다 하면 선수생활 못해요. 세리는 언제 어떤 일이 생기든 자기 위치는 잊어버린 적이 없어요』
―아버지가 카지노에 가서 돈을 잃었다면서요?
『그런 거 절대 없어요. 세리가 어떻게 번 건데 그런 걸 함부로 쓰겠어요』
―세리가 버는 돈은 어떻게 쓰나요?
『서울에 있는 변호사가 관리합니다. 한 푼도 헛되게 쓰지 않으려구 애를 씁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버셨어요?
『계산을 안 해봐서 잘 모르겠는데요』
―앞으로 하실 일은?
『내 일생을 세리한테 걸었는데 세리를 위한 사업을 열심히 해야지요』
―세리를 위한 사업이라니요?
『3년 전에 설립한 세리 인터내셔날(주)에서 집 주변에 있는 땅 9만여 평을 사서, 세리 골프 스쿨, 세리 기념관, 세리 공원 이런 걸 만들어서 대전市에 던져 주려고 합니다』
부모가 헌신해서 자식한테 감동 줘야
그는 현재 삼성전자의 상무로 재직중이고, 박세리는 과장으로 있다. 3년 전 설립한 세리 인터내셔날(주)의 사장은 둘째형인 박준성(58)씨가 맡고 있고, 부인 김정숙씨가 감사로 있다. 앞으로는 이 회사를 통해서 세리와 관련된 사업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너무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쳤다는 비판도 있는데….
『철광석이 용광로에서 녹지 않으면 어떻게 쇠가 되겠어요. 단련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강철이 되겠어요. 우선 부모가 선수가 돼야 하고, 자식한테 헌신해야 되고, 그래서 자식한테 감동을 줘야 해요. 또 부모와 선수가 마음으로 통해야 해요. 내가 만일 선수를 뽑는다면 우선 부모부터 보겠어요. 따라다니며 극성을 떤다고 좋은 선수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또 내가 못한 걸 자식한테 떠맡겨서 하게 하려고 하면, 자식은 삐뚤어지고 말아요. 내가 세리한테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쳤지만, 세리한테는 처방이 맞아서 성공한 거지요. 사람마다 진단을 잘 해야지요. 배 아픈데 두통약 주면 되겠어요?』
그는 또 인간교육에도 철저하다.
『선수는 자기 주변 정리를 잘 해야 합니다. 자고 일어난 자리도 말끔하게 정리돼 있어야 하고, 양말, 셔츠, 바지도 제 손으로 세탁해서 반듯하게 개어 놓아야 하고, 구두도 제 자리에 반듯하게 놓아두어야 해요. 승부사들은 주변이 항상 깨끗하고 잘 정리돼 있어야 해요. 세리 방에 들어가면 모든 게 반듯반듯하게 놓여 있어서 손 댈 게 없어요. 내가 철저하게 가르쳤거든요. 승부사들은 마음이 흐트러지면 안 됩니다』
이런 말을 듣다 보니, 흔히 건달로만 알려졌던 그가 달리 올려다 보였다. 놀라움은 계속된다.
『뭐든지 멀리 보고 굵은 선을 뚜벅뚜벅 따라가다 보면, 큰 게 보이게 마련입니다』
『약속한 걸 무덤 가서도 지키자』
그는 세리에 대한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기량이 최고라고 해서 최고 선수가 되는 건 아닙니다. 전반적인 수준이 따라가야지요. 그래서 지금 세리한테 고급영어를 가르치고 있어요. 그냥 슬랭 써가며 하는 저속한 영어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점잖은 지식인들이 쓰는 말을 가르치고 있어요. 또 식탁 매너도 가르칩니다. 포도주를 골라 마시는 법도 가르쳐요. 어떤 때 어떤 포도주를 마시는지. 세계를 제패하려면 다른 선수들보다 이런 면에서도 앞서가야 합니다』
그는 세리의 걸음걸이도 가르쳤다.
『전쟁터에 나갈 때 걸음걸이가 씩씩해야 상대방이 기가 죽는 것이지, 쫄랑쫄랑 걸으면 웃음거리만 되거든요. 그래서 세리한테는 표정 없이 뚜벅뚜벅 씩씩하게 걸으라고 가르쳤어요.
인터뷰할 때도 가볍게 하지 말고 표정 없이 묵직하게 할 말만 깨끗하게 하라고 가르쳤지요』
그는 내 의견을 물었다.
『세리가 경기할 때 TV에 나오면 든든하고 믿음직스럽지 않아요? 좋은 선수를 만들려면, 손톱 발톱은 물론이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듬어 줘야 해요. 좋은 것은 살려 주고, 나쁜 것은 사정없이 쳐 주고』
들으면 들을수록 아버지도 무서워졌고, 그 말을 철석같이 따라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장한 박세리도 무서워졌다. 어쨌든 그는 사람의 골격 만들기, 사람의 정신 만들기.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이미지 만들기, 이렇게 토털 인간 만들기에 썩 훌륭한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는 세리가 피나는 연습을 쌓던 유성 컨트리클럽 정문 앞, 대전시 유성구 복영동에 500평의 땅을 사서, 그곳에 10여 억원을 들여 5층짜리 레스토랑 건물을 짓고 있는데 지금 완공 단계에 있다. 그곳엔 오락실, 오리 고깃집, 레스토랑, 커피숍이 곧 들어설 예정이다. 그는 그곳에서 朴씨의 여러 형제와 처가권속들이 장사를 하며 먹고 살 수 있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처음 그 땅을 살 때만 해도 세리의 피땀이 어린 곳이어서, 그 자리에 세리 기념관을 세울 작정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세리 인터내셔날(주)이 있는 유성구 구암동에 세리에 관한 모든 것을 건설하기로 하면서 그 곳에 식당 건물을 짓게 됐다고 한다.
우리가 처음 만난 다음 날은 세리의 어머니가 영국에서 인천공항으로 늦게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래서 하루 건너 뛰고 8월 8일 아침에 그의 집에서 다시 만났다.
목수들이 집 귀퉁이 대문 옆에 뚝딱거리며 목조건물을 짓고 있었는데, 세리가 타온 트로피를 진열할 집을 짓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테라스에 자리잡고 얘기를 시작했다.
매미 소리와 못 박는 소리, 또 나무 자르는 전기톱 소리가 가끔 인터뷰를 방해했다.
―삼성과 계약조건에 세리가 세계대회에서 우승해서 상금을 받으면, 삼성측으로부터 똑같은 돈을 또 받을 수 있게 돼 있다죠?
『처음에는 상금의 100%를 받기로 했는데 세리가 우승을 하도 많이 하니까 삼성측에서 규정을 바꿔버렸어요.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면 1억원, 보통대회에서 우승하면 5000만원으로 내려버린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1억원밖에 못 받게 됐어요. 여기서 4400만원이 세금으로 나갑니다』
―세리가 고향 생각이 많이 나겠지요?
『2년째엔 향수병이 심해서 우리나라에 많이 오고 싶어했어요. 나는 세리와 많이 얘기했습니다. 우리가 약속한 걸 이 세상에서 다 못 지키면 무덤 속에 들어가서도 지켜야 된다구요』
―무슨 약속인데요?
『어려워도 표내지 말고,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우리가 목표로 한 자리에 서기까지는 너도 노력하고 또 나도 노력하자…』
―목표로 한 자리는 또 뭔데요?
『우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야 하고, 기네스 북에도 올라가야 하고, 명실공히 세계를 확실하게 제패해야 하고, 적어도 서른 살까지는 부지런히 운동을 해서 우리가 하기로 한 좋은 일의 토대를 마련해야 하지요』
『목표 달성 때까지 결혼 미룬다』
―어떤 사람들은 세리한테 중국인 남자친구가 생겨서 한 때 거기 빠져가지고 골프를 못 쳤다고 합니다만….
『남자친구가 하나 있어요. 홍콩 친군데 세리보다 두 살 더 많아요. 레드베터 스쿨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예요. 큰 부잣집 아들입니다. 그냥 친구로 있지요』
―결혼도 생각하나요.
『만약 세리가 결혼하면 부잣집 며느리가 돼서 행복하게 살겠지요. 사실 세리가 나와 함께 운동을 택한 것은 인간적으로는 불행의 길을 걷는 겁니다. 저 나이에 남자친구도 제대로 못 사귀고, 걸핏하면 매스컴에 두드려 맞고, 맨날 스트레스 받아가며 운동해야 하고. 그러나 지금 세리가 가는 길은 그런 평탄한 여자의 길이 아니잖아요』
―약속을 다 지키려면 결혼은 언제하나요.
『그것도 그래요. 「동생이 먼저 결혼한다고 해도 너는 흔들리지 말라」고 했어요. 우리가 한 약속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결혼도 미루자고 했지요』
―그거 참, 본인한테는 너무 가혹하잖아요.
『가혹하다기보다는 승부사의 운명입니다. 운명은 피해갈 수는 없는 겁니다. 세리는 그런 운명의 길을 선택했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지금 만약 세리가 결혼을 한다 칩시다. 그럼 운동은 전처럼 못할 겁니다. 그럼 개인적인 손실, 국가적인 손실, 세계적인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세리는 지금 그런 운명적인 길을 걷고 있어요.
세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은 골프 치는 겁니다. 앞으로 세리의 후손들이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세리의 얘기를 읽었을 때를 생각해 봐요. 그 거보다 더 훌륭한 일을 세리가 뭘로 할 수 있겠어요. 「네 이름 남기는 일은 그것밖에 없다. 너는 네 몸이 아니다」 이런 말을 누누이 했어요』
―결혼하고도 잘할 수 없나요?
『있어요. 미국에선 그런 선수도 있어요. 그러나 동양과 서양엔 문화의 차이가 있어요. 서양 사람들은 결혼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적게 받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그렇게 못해요. 반드시 흔들리고 정신집중을 못하게 돼요. 그러면 안 되는 거죠』
―세리가 불쌍하네!
『그렇게 볼 게 아니지유.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한 사람들은 자신을 버리고 헌신한 사람들이지, 다른 사람들처럼 잘 먹고 잘 산 사람이 아니지요. 독립 투사들도 보세요, 안 그런가. 피곤하다고 쉬고, 잘 했다고 쉬면 되겠어요. 세리가 경기를 잘 해서 우승을 하면 수많은 국민들이 열광하고 환호하며 좋아하지만, 게임에 지면 국민들이 한숨을 쉬잖아요』
세리는 꼭 귀국해서 나눠 주며 살 것
―세리 취미는 뭡니까?
『손에 들고 하는 오락기 있잖아요. 틈만 나면 그걸 합니다. 또 좀 시간이 나면 전자오락실에 가서 전쟁하는 거, 그런 거 좋아하구요』
―친구는?
『골프는 골치요. 혼자 외롭게 집착해야 하니까 골치 아프잖아요. 친구와 떠들면서는 못하는 거니까. 그래서 친구들과 놀 시간이 많이 없지요. 세리가 집에 오면 내가 어릴 때 같이 육상 하던 친구들을 막 찾아서 데려다 줘요. 그럼 세리가 참 좋아하지요. 그게 세리한테는 보약보다 더 좋은 거죠. 나하고 세리는 서로 눈빛만 보면 뭘 원하는지 서로 척 알아요』
―세리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고, 또 잘 하면 잘 할수록 우리한테서는 점점 멀어져서 결국 미국 사람되고 마는 거 아닌가 몰라요.
『아닙니다. 무조건 와야지요. 거기까진 내가 해결해 놔야지요. 세리가 세계적인 선수가 되려면 기량과 함께 다른 수준도 거길 따라가야지, 기량만 좋으면 잭 니클라우스 밖에 안 돼요. 벤 호간은 될 수가 없어요』
―그 둘이 어떻게 틀린데요.
『벤 호간은 돈벌이보다 사회에 좋은 일을 많이 했어요. 자기가 가진 좋은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 줬어요. 세리도 미국에 있으면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고, 기네스 북에 올라가고, 모든 걸 얻으면 귀국해서 세리가 가진 걸 나눠 줘야지요. 세리만큼 좋은 세계적인 선수도 발굴해서 길러내고, 또 복지사업도 더 좋은 일을 찾아서 많이 해야지요. 장학재단도 만들어야 하구요. 이런 사업을 다 세리 인터내셔날에서 할 겁니다』
―밖에서 돈을 계속 벌면 다음에 더 좋은 일 많이 할 수 있을 텐데.
『달도 차면 기웁니다. 은퇴도 화려할 때 해야 합니다. 세리도 일찍 돌아와서 새로운 포부를 펼쳐야지요. 세리도 이젠 베풀고 나눠 줘야지요. 그것까지 제가 만들 겁니다』
―세리네 미국 집은 어딨어요?
『플로리다 올랜도에 있는데 80만 달러 정도 줬어요. 2층에 방이 5개지요』
『세리야 정말 고맙다!』
세리 아버지 박준철씨는, 자기는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아서 온갖 정성을 다해 갈고 닦았다고 했다. 그래서 마침내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박준철은 가장 훌륭한 아버지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박세리 또한 가장 훌륭한 딸임에 틀림이 없다. 아버지의 어두웠던 과거도 이 대목에선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훌륭한 딸을 키우기 위해 가시밭길을 걸어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해서 훌륭한 아버지 역할을 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그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 역할은 과거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손엔 지금 억만금이 쥐어져 있기 때문이다.
―실례지만 세리랑 골프를 치면 실력이 어느 정도 돼요?
『나인(9)에 3∼4점 정도 받아야 돼요』
―도저히 못 당하겠어요?
『안 되죠. 세리는 인제 세계적인 선순데』
―세리야 말로 승어부(勝於父, 아버지를 이김) 했네!
『그래도 세리는 나랑 함께 치면, 아버지 기분 안 상하게 하려구 퍼터칠 때 좀 봐줘서 한 두세 점 이기게 해 주려고 노력하지요』
父女가 서로 그렇게 봐주고 이해하면서 골프를 치는 모습은 얼마나 정다울까. 나도 그런 딸이 있으면 도란도란 얘기하며 골프를 치고 싶다.
그러나 나는 세리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될 자신이 없다. 아니 내 딸은 결단코 그런 골프 선수로 만들지 않겠다. 그런데도 지금 내 입 속에선 이런 말이 맴돌고 있다.
『세리야, 정말 고맙다!』●
박세리가 영국 브리티시 오픈에서 11언더로 감격적인 역전승을 하던 지난 8월6일 오후, 나는 충남 대전시 유성구에 있는 세리네 집을 찾았다. 유성고등학교 앞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세리네 집을 물었더니 주인이 앞 골목을 가리키면서 『저쪽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돌면 큰 집이 보인다』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정말 박세리와 그 가족은 큰 집에 살 만한 일을 했다. 다른 건 다 그만 두더라도, 이 가마솥 더위에 온 국민이 지쳐 나가떨어져 있을 때, 세리가 새벽에 보내온 낭보는 국민들을 벌떡 일어나게 만들었다. 이것만으로도 세리는 큰 집에 살고도 남을 만큼 「큰 일」을 했다.
『세리야, 정말 장하다!』
세리네 집(유성구 구암동)은 정말 컸다. 들어가는 입구에 「세리 인터내셔날(주)」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붙어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700평의 垈地 위에 커다란 집 두 채가 들어서 있었다. 지난해 말 경매로 나온 대전 지방법원장과 고등법원장 관사를 8억여 원에 낙찰받아 새로 꾸미고 또 일부는 새로 지었다는 것이다.
세리 아버지 朴峻喆(박준철·50)씨는 세리네가 살고 있는 아래채 정원에서 정원수 심는 걸 감독하다가 낯선 손을 맞았다.
우리는 세리네 집 거실에 자리잡고 앉았다. 건평 100평의 넓은 집이었는데 커다란 방 한 칸에는 세리가 타온 트로피로 가득했다. 세리가 집에 오면 자고 간다는 작은 방에선 더블 베드가 고단해졌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 金貞淑(김정숙·48)씨는 세리를 응원하기 위해 영국에 가 있었는데, 인터뷰하는 동안 내일(8월7일) 오후 4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한다는 전화가 왔다. 사실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계속 축하전화가 걸려와서 여러 차례 인터뷰를 중단해야 했다.
세리 아버지도 지난 밤을 꼬박 새웠다고 했지만 그런데도 힘이 펄펄 솟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날 새벽에 일어났던 세계적인 대사건부터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전날까지 9등이었는데 역전승할 줄 아셨어요?
『어제 세리가 나한테 혼 좀 났어요. 세리가 젤 싫어하는 말은 「네 직업이 뭐냐, 네가 아마추어냐, 네가 몇 살이냐」 이 세 가지예요. 나도 그 얘기를 할 때는 굉장한 각오를 가지고 합니다. 세리한테서 전화가 왔길래 대뜸 물었어요.
『우리는 靈的으로 통하는 사이』
「너 직업이 뭐냐?」 세리가 아무 말도 안해요. 「너 아마추어여? 너 몇 살이여」 그랬더니 세리가 듣기 싫었는지 「아빠 최선을 다 할게요」 그래요. 「승부사한테 2등은 필요 없어. 너 오늘 공격해. 내가 볼 때 네가 11언더만 치면 우승할 수 있어. 한 라운드에 10언더도 치는 놈이 오늘 5언더만 치면 되는데 그것도 못해. 17,18번 홀에서 무조건 스푼 잡지 말고 드라이버 잡어. 알았지? 투 온시켜서 버디 잡아야지. 다른 소리 말고 공격해!」 그러고서 대답도 듣기 전에 전화를 끊어 버렸어요』
세리는 마지막 라운드 경기를 위해 필드로 나갔고 아버지는 방으로 들어가 인터넷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인터넷으로 들어가 보니까 첫 홀에 이글을 했다라구! 이젠 됐다 했는데 9홀까지도 6등으로 7언더로 가고 있는 거요. 스코어가 줄지 않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더라구. 깃대를 어디다 꽂았나, 바람이 부나, 별별 생각이 다 났어요. 그렇게 걱정을 하고 있는데 TV중계가 시작됐어요.
그런데 10번 홀, 12번 홀에서 버디를 잡아서 9언더로 올라섰어요. 그땐 이겼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7번, 18번 홀에서 내 말대로 드라이버를 뽑더라구요. 결국 세리가 버디를 두 번 잡아 우승했지요』
―언제 우승을 예상했습니까?
『사실은 처음부터 이길 줄 알았어요. 세리 목소리가 미안해 하면서도 떠 있더라구요. 우리는 느낌으로 팍 통해요. 바로 전(7월 30일)에 자이언트 이글 클래식에서 잘 나가다 3등으로 내려앉을 때는 아무런 느낌이 안 와서 기대도 하지 않았지요. 우린 靈的(영적)으로 통하는 게 있어요』
경기가 끝나고 세리한테서 전화가 왔다고 한다.
『「아빠, 기분 좋지?」 그래요. 「좋은 건 말할 수 없지. 그러나 좋아할 거 없어. 들뜨지 마. 다음 경기 또 있잖아」 그랬더니 세리가 그래요. 「아빠, 아무리 그래도 기분 좋다구 좀 해!」 그래서 「잘했다. 그래 잘했다. 다음 경기장으로 빨리 갈 준비해라」 그러고 전화를 끊었지요』
박세리는 이번 대회에서 우승해서 21만 6000달러(2억 8000만원)의 상금을 받아, 올 시즌 상금 랭킹 1위를 달리게 됐다. 「올해의 선수」 타이틀도 목표로 삼게 됐다. 나비스코 클래식에서도 26세 이전에 우승하면 최연소 그랜드 슬램 목표도 달성하게 된다.
아버지 朴峻喆과 세리는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와서 영적으로 통하는 사이가 됐을까. 우리는 오늘이 있기까지 그들의 고난에 찬 역정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朴峻喆씨는 키가 172cm라고 하는데도 작달막해 보였다. 다부져 보이는 체격에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로 보나 충만한 에너지 그 자체였다.
그는 아버지 朴泰興(박태흥·44세에 작고)씨와 어머니 孟淑子(맹숙자·83) 여사의 4男 1女 중 막내로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평동 92번지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맹의섭)는 그가 어려서 조치원읍 읍장이었고 아버지는 평양 숭실전문을 나와 외할아버지 밑에서 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어디로 보나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났다. 우리가 그에 대해 풍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는 것처럼 「갱스터」나 건달로 빠질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을까.
복수심에 불타서 보낸 少年時節
―막내로 태어났으니 참 귀여움을 많이 받았겠네요.
그러나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닙니다. 귀여움을 못 받고 미움만 받았어요. 어머니가 절 낳다가 병이 들어서 굉장히 고생하셨대요. 그 후로도 많이 편찮으셔서 어머니도 절 미워하고 外家서도 미워하고…』
―미운 짓을 했겠지요.
『아니에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뭐든지 잘 했어요』
―무슨 운동을요?
『배구, 달리기, 씨름, 기계체조, 뭐든지 다 잘했어요. 전국체전에도 나가고. 초등학교 땐 죽 반장을 했고 전체 반장도 했어요』
―그거 참 이상하네!
『저랑 저 바로 위 형(준형)이랑 같이 있으면 아버님은 늘 제 형을 무릎에 앉혔어요. 저랑 준형이 형은 학교서 육상을 함께 했는데, 저는 항상 주전 멤버였고 형은 후보선수였어요. 그런데도 부모님은 형만 이뻐했어요. 씨름을 해도 내가 늘 두 살 위의 형을 이겼는데, 아버님은 이걸 또 싫어하셨어요.
아버님이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그러다 보니 家勢(가세)도 기울었어요. 그런 환경 속에서 형들한테 늘 맞아가면서 크게 됐지요. 그때 나는 늘 「내가 크면 저 형들을 가만히 안 놔두겠다」고 이를 악 물면서 컸어요.
어머니는 편찮으셔서 외갓집에 가 계시는 날이 많았고. 밥은 누나가 해 주었는데, 내가 운동을 많이 해서 밥도 많이 먹어야 했는데도, 형들 등쌀에 많이 굶었어요. 사흘을 굶어서 쓰러진 적도 있어요. 그래서 어려서는 복수심에 불타서 컸어요』
―대전으로는 언제 오셨던가요.
『조치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전 중앙중학에 배구 특기장학생으로 들어 왔어요. 저는 학교를 다 제 힘으로 장학금 받아서 다녔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를 한밭상고(지금의 중앙고)에 역시 배구 특기장학생으로 진학했는데 덩치가 커지니까 막 빗나가기 시작했어요』
그 무렵 그의 집도 대전으로 이사했다.
『고등학교에 오니까 키가 작아서 배구로 나가기도 힘들어졌어요. 외로움을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부모형제의 따뜻한 사랑이 없으니까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거칠게 놀게 됐어요. 그러니까 집에서도 더 싫어하고. 또 툭하면 경찰에 잡혀가니까 집에선 더 골칫거리로 여기고…』
―처음 경찰에 간 건 언제였어요?
『열일곱 살 때요. 친구들과 싸우다 보니까 상대방 이빨이 부러졌지요.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건달세계로 들어가게 됐지요. 저는 저 혼자 생존경쟁에서 이겨서 살아남아야 했어요. 집에 가봐야 다 싫어했으까요. 반겨 주는 사람이 없는 건 말할 것 없고, 참 부끄러운 얘기지만, 한 번은 집에 가보니까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어요. 나 몰래 이사간 거지요』
―저런! 이 게 무슨 소립니까?
『나는 정말로 다리 밑에서 주워 와서 키운 줄 알았어요. 나는 우리 형제가 아닌 줄 알았어요』
―지금 어머니나 다른 형제분들에 대한 복수심은 없으세요?
『지금은 다 수긍하죠. 그때 나를 똑똑하게 키우려고 그랬나 보다 생각하죠』
三星서 10億 받아 어머니께 5億 투자
그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얘기를 했다.
『삼성과 계약을 해서 10억원을 받았을 때 내가 제일 먼저 한 게 뭔지 아십니까? 절반을 딱 꺾어서 5억원으로 어머님 집을 지어드렸어요. 대전여상 뒤 선화동에 원룸 13개가 있는 집을 지어드리고 아래층에서 어머니 사시게 해드렸어요』
―세는 받아서 峻喆씨가 갖고?
『아니, 저는 그거 관여 안 해요. 어머니 쓰시라고 그냥 드린 겁니다』
―그것 참 효자네요! 그렇게 왕따를 당했는데.
『어머니가 형들 따라서 미국에 계셨는데 거기가 불편하시니까 나오고 싶으셨나봐요. 어머니가 미국 계실 땐 나오기만 하면 미국 자랑만 하시고 나한테는 늘 야단을 치셨어요.
「야 이놈아, 너는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꺼뜩하면 쌈만 하고, 치료비 얘기나 해쌌고, 사람들이 잡으러나 오고, 이놈아, 왜 불안하게 이런 생활을 하느냐, 너 땜에 내가 못 살겠다! 너는 이놈아 인제 끝났다!」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어머니, 내가 앞이 구만리 같아요. 인제 30댄데, 유리엄마(부인)랑 잘 살아 보려고 노력하고 있잖아요. 만나기만 하면 이렇게 절망적인 얘기만 하시는데, 세상을 열심히 살다보면 좋은 일도 있을 겁니다. 앞으로는 좀 희망적인 얘기를 하세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형님이나 누님이 어머님을 잘 모시기가 힘들어졌는지, 다시 한국에 나오고 싶어 하셨어요. 이런 때에 세리가 뜨고 우리가 살 게 된 거지요. 제가 좀 잘 해드리고 싶어도 어머니가 나한테 한 게 있으시니까 미안해 하실 게 아닙니까? 그래서 어머니가 한국에 나오셨을 때 내가 식당에 모셔놓고 여쭤봤어요.
「지금 어머니를 어떻게 해드리면 가장 편하시겠어요. 제가 보기에는 어머님이 친구들을 좋아하시니,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노시면서 자식들 눈치 안 보고 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어머니가 좋다고 하시면 제가 집을 하나 얻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처음에 방을 얻었다가 돈이 생겨서 집을 지어드린 거지요』
여기서도 그의 孝心을 엿볼 수 있다.
『가구도 아주 좋은 걸로 사드렸어요. TV도 크고 좋은 걸로 사드렸지요. 냉장고도 큰 걸로 사드렸어요. 신혼살림처럼 차려드렸지요. 노인들은 좋은 걸 사드리면 그 게 아까워서도 오래 살아요』
―부인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내가 스물한 살 때 열아홉 살짜리를 만났지요. 제가 배구할 때였어요. 세리엄마는 내가 잘 아는 대전여상 배구선수의 친구였어요. 대전여상은 한밭상고와 같은 재단이어서 연습도 같이 했지요. 그런데 세리엄마가 자기 친구인 대전여상 배구선수를 따라서 연습하는 데 왔더라구요. 그때 그만 첫눈에 반했어요. 그래서 대학 노트를 한 20권쯤 사줬지요』
―그게 언제였어요.
『고2 땐데, 그후 제가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가게 됐습니다』
―왜요?
『역시 싸움이 원인이죠. 친구들하고 싸웠는데 학교에서 퇴학을 시킨다고 해서 도망해 버린 거죠. 그걸로 학교생활은 끝난 겁니다』
서울 가서 떠돌이 생활을 1년쯤 하다가 스무 살 때 대전으로 돌아와 보니까 세리 엄마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됐는데 더 이뻐졌더라고 했다.
인연이 될 만한 사건이 금방 뒤따랐다.
『세리엄마랑 어디를 가는데 우리 사이를 반대하던 친구랑 시비가 붙어서 싸움을 하게 됐어요. 여자 앞에서 으쓱대면서 한 방 친 게 너무 세어서 이 친구가 쭉 뻗어버렸어요. 세리엄마도, 나도 상대가 죽은 줄 알았어요. 하도 놀래서 둘이 도망을 다녔는데, 이게 인연이 된 거지요』
―그 친구는 살아났습니까?
『다행히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세리엄마가 집에 안 들어가니까, 그 쪽 집에서 나를 죽이네 살리네 하다가 함께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둘은 3년 후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세리―「세계를 빛내리」에서 따온 이름
이렇게 살면서 첫딸 유리(29)를 낳았고 둘째로 세리(24)를, 그리고 막내로 애리(21)를 두게 됐다.
―누가 이렇게 우리말로 이름을 잘 지었습니까?
『우리 어머니가 지으셨어요』
―아니, 어머니가 애들은 사랑했나 봅니다.
『처음엔 양쪽 집에서 다 왕래를 안 했지요. 어머니도 나중에 왕래를 하시며 이름도 지어 주고 그랬어요. 어머니한테 물어 봤어요. 애들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나 하고. 유리는 맑게 자라라고, 애리는 애교가 있다고 그렇게 지었는데, 세리는 「세계를 빛내리」라는 뜻이래요. 참 기막히게 딱 들어맞았잖아요!』
―혹시 세리 가졌을 때 태몽 꾼 거 있어요?
『세리는 광주 단칸방에 가서 살 때 거기서 낳았어요. 광주 가서 막벌이 노동을 하며 사는데 병원에 갈 돈이 없어서 이웃에 있는 助産員(조산원) 불러다가 내가 받아내다시피 했어요. 배꼽도 내가 잘랐어요. 기저귀도 내가 다 빨았어요.
세리를 낳자마자 유성으로 돌아와서 유성호텔 뒤에 있는 솜틀칸에 와서 살았어요. 쪼끄만 방을 하나 들였는데 거기서 살았지요. 그때 세리가 홍역에 걸렸는데 얼마나 심하게 앓았던지 죽다 살아났어요. 열꽃이 하도 많이 나서 눈도 떠지지가 않더라구요. 훌륭하게 될 사람은 이렇게 아주 심한 시련을 겪는 거 같아요』
여기서 얘기가 제 자리를 찾아간다.
『광주에 살 땐데 하루는 밤엔 꿈을 꾸니까 가물치가 커다란 저수지에 가득하게 바글바글해요. 그 중에 무지무지하게 커다란 가물치가 있었는데, 야광처럼 파랗게 빛났어요. 그런데 그 큰 가물치가 악어처럼 발이 달려 있었어요. 이 커다란 가물치가 나무 있는 곳으로 움직이니까 그 수많은 조그만 가물치들이 고물거리며 일시에 큰 놈한테 새카맣게 몰려가는 겁니다. 깨어 보니 꿈이에요. 그래서 나는 세리가 사낸 줄 알았어요』
세리는 자랄 때도 비상했다.
『세리는 8개월 만에 걷기 시작했어요. 금방 뛰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약빠른지 몰랐어요. 유성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육상을 시켰더니 우승기를 쓸어오다시피 했어요』
―갈마 중학교를 졸업하고 왜 공주 금성여고로 진학했던가요.
『대전 체육고등학교에 가서 박세리를 받아달라니까 골프부가 없어서 받을 수가 없다는 거요. 그런데도 금성여고에선 세리를 스카우트하려고 열심이었구요』
그래서 지금도 공주시에선 공주 박물관 앞에 세리의 기념물을 해놓고 세리의 성적과 기록을 게시하며 「공주의 인물」로 크게 선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공주市는 세리네가 이사만 오면 기념공원을 만들 땅을 무상으로 주겠다고 제안하고 있다 한다. 이에 반해 대전市는 아주 무심해서 좀 섭섭한 구석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신접살림은 어떻게 시작했나요.
『7월쯤이었는데 유성 만년교 다리 옆 둑 밑에 군인 텐트를 치고 버너로 밥을 해먹으면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9월까지 살다가 유성에 어떻게 방을 하나 얻었어요』
―돈은 어떻게 벌었습니까?
『한번 살아보려고 온천장 사거리에서 군고구마 통을 놓고 담 밑에서 구두닦기를 시작했어요. 남한테 폐 안 끼치고 살아가는 게 사나이 길이라고 생각하고, 6개월 간 구두를 닦고 군고구마를 팔았는데, 겨울에 하도 추워서 동상에 걸려 오른손 검지 끄트머리를 잘랐어요. 그때부터 살아보자고 열심히 했는데…』
그게 제대로 안 됐단다.
『스물네 살 때쯤 유성 만년장 호텔 나이트 클럽 영업부장으로 스카우트됐어요. 그때 총지배인이 월급으로 9만 원을 받을 땐데 나는 13만 원을 받았어요. 그때 그런 생활을 하다 보니 집에 자주 못 들어가고 사우나에 가서 한숨 푹 자고 나이트 클럽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마흔 살만 넘겨라, 너는 큰일한다』
그때 정말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어느 날 새벽 5시쯤 옷을 벗고 탕 쪽으로 들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탈의실에 앉아서 나를 한참 보더니 「젊은이 이리 와봐」 그래요. 나는 기분이 좀 나빠서 「이거 뭐여, 스님이 새벽부터 왜그랴?」 그랬더니 스님이 「이리 와봐 이 사람아, 여기 앉아봐」 그래요. 내가 가서 앉았더니 「마흔 살만 넘겨. 앞으로는 좋은 일도 많이 하겠구먼. 공부를 좀더 했으면 정계로 나갈 텐데, 쯧쯧쯧, 마흔 살만 살면 좋은 일 있을 거여」이러는 거요.
첫 새벽에 이런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아주 나쁠 거 아뉴. 나는 탕으로 들어가면서 혼자 「별 미친 놈 다 봤네. 뭐 이런 게 있어!」 하고 중얼거렸어요. 그런 말을 듣고 들어가서 샤워를 하는데 머리털이 빳빳하게 서요』
그러고 나서 2∼3개월이 지났는데, 그 스님을 그 자리서 또 만났다.
『그 스님이 또 나를 자세히 보더니 「골격은 참 좋은데 머릿속에 들은 게 부족해 쯧쯧쯧. 부처님이 한 사람한테 다 주겠나. 이름도 남길 테고」 그래요』
그때 그 스님의 말이 朴峻喆씨의 머릿속에 지금까지도 깊게 각인돼 있다. 지금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적인 인물이나 선수는 분명히 미리 마련된 길을 따라 태어나고 성장하는 것 같아요. 그때 그 스님이 그려 준 그림이 지금 생각하면 소름끼치게 맞아요』
―그 길이 어떻게 열리던가요?
『세월이 흘렀지요. 싸우고, 때리고, 형무소 가고, 그러면 세리 쪼끄맸을 때 세리엄마가 안고 면회 오고…. 이런 짓을 했으니 이거 되겠어요. 이렇게 해선 안 되겠다 생각하고 유성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지요』
그의 말로는 그가 마음잡고 나서 복잡하던 유성이 잠잠해졌다고 한다.
『유성에 싸움이 없어졌어요. 대전과 유성이 서로 붙어 싸우고 했는데, 제가 유성에 자리잡고 살면서 그게 없어졌어요』
그러는 사이 그는 나이트 클럽에서 일하기도 하고, 오락실을 운영하기도 하며 살아왔다. 그 동안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많은 사업을 해 왔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은 소상하게 다 밝힐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철저하게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형편도 좀 좋아졌다.
『서른 살 때 23평짜리 아파트를 한 채 샀어요. 그걸 사놓고 1주일 동안 잠을 못 잤어요. 내가 아무 것도 없는 無의 상태에서 조금씩 모아서 아파트 한 채를 샀으니 얼마나 좋겠어요. 하도 좋아서 들어눴다 인났다(일어났다) 하느라고 1주일 간 잠을 못 잤어요』
이런 가운데 뭐니뭐니 해도 그에게 있어서 가장 획기적인 轉機는 세리가 골프채를 잡게 된 것일 게다. 그의 말로는 그것은 기막히고 극적인 사건이었다고 한다.
『내가 한국에서 맨날 쌈질만 하고 그러니까, 미국에 계시던 어머니가 이민 신청을 해놓으셨어요. 그런데 몇 년이 지난 후에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이민 비자가 나온 거요. 그땐 돈이 좀 있었지요. 가정을 잘 지키면서 애들을 잘 키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운영하던 오락실을 정리해 가지고 이민을 가기로 결심했지요』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골프 연습을 하다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을 텐데.
『스님 생각이 났어요. 내가 훌륭하게 돼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여기서는 맨날 싸움만 하고 형무소만 왔다갔다 하니 뭐가 되겠는가. 한번 환경을 바꿔보자 이런 생각이 들었지요. 내가 혼자 해답을 찾아야 되겠더라구요』
―그래 미국가선 살 만 하던가요?
『서른일곱 살 때 어머니, 누님, 형님이 있는 하와이로 갔는데, 가서 보니 친구들이 38구경 총을 주더라구요. 이제 그런데서 손떼고 점잖게 애들하고 살아보자고 미국에 왔는데, 또 총을 주니, 야 이거 또 이 길로 가야 하나…. 또 어려운 게, 미국에 가니 누가 알아 주는 사람이 없어요. 식당 가서 접시 닦아야 했어요. 그게 나한테는 안 맞잖아요』
그런데 하와이서부터 스님의 말이 맞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서른 두 살 때부터 골프를 시작했어요. 친구들이 맨 골프 얘기만 해요. 버디를 했네, 스리 퍼터를 했네… 내기 골프 얘기도 하고』
이때 박준철式 저돌성이 나타난다.
『밤 열두시에 골프 연습장에 가서 자는 사람을 깨우고 들어가 보니 문을 따준 사람이 프로(연습코치)였어요. 그때 그 사람한테 담뱃대 같은 것(드라이버)을 가지고 쥐는 방법에서부터 배우기 시작했지요. 거기서 4시간 반 동안 손이 다 까지도록 연습을 했어요』
이번에도 박준철式.
『날이 새고 바로 그날, 친구들한테 채를 빌려서 당장에 머리를 올렸어요』
―잘 맞던가요?
『저는 연습장과 똑같이 생긴 데서 치는 줄 알았어요. 누가 얘기해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가서 보니까 그물도 없고, 넓은 운동장 같은 잔디밭에 대고 치는 거요. 게다가 사람들이 죽 서서 쳐다보고 있잖아요! 나도 보통 배짱은 아닌데, 야, 겁나더라구요.
티 박스에 올라가서 티를 꽂고 공을 올려놓고 치려고 하는데, 가만히 보니까 못 맞추겠어요. 몸을 조금만 움직이고 딱 때렸더니, 맞았어요. 맞긴 맞았는데 슬라이스가 나서 없어진 거지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으스대며 가서 보니까 공이 없어졌더라구. 첫 판부터 내기를 했는데 150개는 쳤어요. 땅만 쳤으니 사방이 아프고 난리였지요. 주머니에 있던 60만원을 다 잃고 30만원은 외상을 했지요』
그날 그는 돈을 잃기는 했지만 새로운 발견을 했다.
『잘만 하면 한 달에 몇 천만원을 따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그날부터 죽자살자 연습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연습을 얼마나 했는지, 갈비뼈 세 대가 나갔어요. 지금도 엑스레이를 찍으면 갈비뼈 세 개가 엇비슷하게 붙어 있어요』
그런 맹연습의 결과 그는 기적을 연출해냈다.
『6개월 만에 싱글을 기록했어요. 79타를 쳤거든요. 저는 승부에 강해요. 그래서 그런지 내기를 하면 돈을 땄어요. 돈이 막 들어왔어요』
그런데 그는 또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나중에 내가 너무 잘하니까 손님이 없어졌어요! 내가 친구들한테 전화를 하면 서울에 가 있다고 그래요, 왜? 골프 치면 또 돈 잃으니까』
그때 그의 골프실력은 이미 대단해서 전국체전에 대전 대표선수로 출전하기까지 했다.
이럴 즈음에 그는 하와이로 이민을 가게 된 것이다. 스님의 말씀을 실현하는 것 말고도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이다.
『하와이 가면 친구들 돈좀 따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었지요. 그래서 접시 닦기를 때려치우고 본격적으로 내기 골프로 들어섰지요』
여기서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미국에선 연습장이 멀어서 집 근처에 있는 잔디밭에서 어프로치 연습을 했어요. 내가 친 공을 다시 주서(주워) 오다 보니까 귀찮아졌어요. 그래서 세리를 데리고 가서 같이 연습을 했는데, 8번 아이언을 주면서 저쪽 가서 내가 친 공을 이쪽으로 치라고 했어요. 그런데, 야 이거 참 신기하지! 세리가 툭툭 친 공이 나한테 와서 딱딱 떨어지는 거요. 그립 잡는 것도 「이렇게 하는 거야」 하고 딱 한 번 가르쳐 줬는데! 그때가 세리가 초등학교 3학년 때요.
그 채가 엄칭이(엄청나게) 억시고(억세고) 힘든 건데! 그게 벤 호간이었어요. 그걸 보고 내가 그 자리서 생각했어요. 골프는 내가 할 게 아니고 세리를 시켜야겠구나! 그래서 내가 물었어요. 「세리야, 재미있니?」 그러니까 「아빠, 재미있어」 그러는 거요. 됐다!』
그는 이때 세리를 키우기로 결심을 했다.
『세리는 어려서부터 운동을 다 잘했어요. 달리기도 잘하고, 멀리뛰기도 잘하고…. 어렸을 때 나를 보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이놈을 점 찍어놓고 있었지요. 중학교 때는 소년체전 나가서 투포환으로 우승했잖아요』
그때 변화가 일어났다. 세리 아버지가 미국에 더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귀국을 했던 것이다.
『그릇 닦으면서는 못 살겠더라구요. 돈내기 골프도 하루 이틀이지, 돈 따먹을 친구도 별로 없고…』
『세리 키우려고 내가 살았다』
그는 부인과 아이들을 하와이에 두고 혼자서만 한국으로 나왔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정말 일생일대의 큰 사건을 만난다.
그가 미국 가기 전에 데리고 있던 아랫사람들한테 칼부림을 당해 죽기 직전까지 간 것이다.
『서른여덟 살 때였어요. 귀국해서 친구네 가게(술집)에 들어가 앉아서 얘기하고 있는데, 그 오락실을 운영하던 애들 두 명이 들어와서 한 놈이 내 등허리를 흉기로 찔렀어요. 또 한 놈은 배를 향해 흉기를 들이 대고 찔러서 그걸 손으로 딱 잡았더니 내 손이 나가잖아요』
그는 말하면서 왼손 바닥을 보여 줬는데. 길게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그는 배와 왼쪽 허벅지의 끔찍한 상처도 보여줬다. 너무도 끔찍했던 그날의 사건은 듣는 것만으로 소름이 끼쳤다. 꼭 영화 「친구」에 나오는 것처럼 살벌하고 非인간적인 장면이 벌어졌던 것 같다. 도저히 글로는 쓸 수 없을 만큼 잔인한 사건이었다.
―왜 그 사람들은 그런 일을 했을까요?
『글쎄 저도 이해가 잘 안 가요. 그 오락실을 미국 가기 전엔 내가 운영했는데 그걸 뺏길까봐 그랬는지. 또 내가 돌아와 보니 유성에 조직이 다 돼 있었는데, 그 조직을 뺏길까봐 그랬는지』
대전지방에서는 당시의 그 사건이 돈과 관련이 돼 있었다는 얘기가 떠돌고 있었으나 본인은 자세하게 확인해 주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그후 어떻게 됐습니까?
『무기징역을 살게 됐는데 내가 힘을 써서 5년 살고 나왔어요』
이때 그는 스님의 예언을 떠올린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스님 말이 딱 맞잖아요. 「마흔 살만 넘겨라. 마흔 살만 살면 훌륭한 일을 할 거다」라고 했잖아요. 세리가 없었다면 나는 그때 죽었을 거요. 세리를 성공시키라고 내가 살아난 겁니다』
정말 그는 죽다가 살아났다.
『내가 非夢似夢(비몽사몽) 간에 병원으로 실려갔어요. 의사가 나를 보더니 피가 많이 빠져서 맥이 안 뛰니까, 흰 커튼을 치면서 「내일 아침에 장사 치를 준비를 하라」고 하더라구요. 그 말이 어렴풋이 들렸어요.
어떻게 살려보려구 가슴에 뭘 갖다대고 전기충격을 「탕」 하고 주더라구요. 그것도 생각이 나요. 그러면서 어떻게 수술을 받았는데, 죽지 않고 살아서 1주일 만에 깨어났지요. 그런 환자는 1000명에 하나 살기도 힘들다는 겁니다. 기적이지요, 기적!
이게 세리 때문에 내가 산 겁니다. 세리 키우라고.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죽었지 어떻게 살았겠어요. 내가 살아야 세리가 성장하니까』
그는 이렇게 굳게 믿고 있다.
『이게 우리가 볼 수 없는 세계지요!』
그러면서 아버지와 세리와의 관계도 급속도로 진전된다. 부인이 남편 소식을 듣고, 견디다 못해 3년 만에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귀국했던 것이다.
부인이 아이들 데리고 귀국
『병원에서 1년 있다가 퇴원했는데, 갑자기 골프가 치고 싶어서 아픈 몸을 이끌고 골프를 열심히 쳤어요. 그때 세리를 빨리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막 몰려왔어요』
그는 그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깨달았다고 했다.
『내가 세리 아니면 이름을 남기고 훌륭한 일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지요』
그러고 그는 덤프 트럭을 넉 대 사서 모래 장사에 뛰어들었다. 세리를 키울 돈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제대로 안 됐다.
『결국 손해만 보고 차 팔아서 좀 남은 것 가지고 세리한테 꼭 붙었지요』
세리는 엄마와 함께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왔다.
『내가 미국서 돌아올 때, 세리한테 「너 혼자 심심하면 이 골프채 가지고 놀아라」 하고 왔는데, 저 혼자 연습을 했던가봐요. 내가 금방 온 놈을 데리고 가르치면서 시켜보니까 기가 막히게 치더라구요!』
돌아와서도 세리는 초등학교 육상 선수였다. 단거리, 멀리뛰기, 투포환에 다 능했다. 세리는 유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전 갈마중학교 육상 특기생으로 진학했다.
『애가 운동을 하고 돌아오면 밤 10시가 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또 연습장에 가서 골프연습을 하는 겁니다』
中2 때 첫 출전한 주니어 대회서 3등
―그래 골프 코치할 실력이 되셨던가요?
『그때 무슨 교재가 있어야지요. 아놀드 파머, 벤 호간, 잭 니클라우스, 이런 선수들 테이프를 구해다가 밤새도록 내 머리 속에 넣어 가지고 세리한테 가르쳐 줬지요』
―잘 따라오던가요?
『잘 따라오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를 가르쳐 주면 두 개 세 개씩 따라오는데 미치겠더라구요』
그렇게 6개월을 보내고 본격적으로 매달려 고된 연습을 시켰다.
그리고 첫 번째 경기에 출전하게 됐다. 세리가 겨우 중학교 2학년 때 10월이었다.
『골프 다이제스트에서 주최하는 주니어 대회에 출전했는데, 서울 가서 다른 선수들 경기하는 걸 보니 숏 게임도 참 잘들 하더라구요. 그런데 세리가 거기서 3등을 한 거요!』
처음 출전해서 거둔 성적치고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그는 어느 정도 자신했다.
그러나 기량이 뛰어난 다른 선수들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때 유복한 여자선수들이 주니어대회를 주름잡고 있었다.
그는 한 수 배울 요량으로 1, 2등 한 선수들의 부모를 찾아서 인사를 했다.
『저, 박세리 아버집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가 자문자답한다.
『왜? 이상하게 생긴 놈이 꺼부정하게 입고 와서, 새까만 여자 애 앞세우고 제 딸이라고 하니, 코치 붙여서 떵떵거리고 다니는 사람들한테 그까짓 3등이 눈에 보이겠어요?』
무안을 당한 그는 여기서 이를 물었다.
『오냐, 두고 봐라. 머지 않아서 내가 들어서면 늬들은 문을 열고 엎드리게 될 것이여!』
그때부터 그는 수첩에 적기 시작했다.
『몇 월 며칠 나한테 서운하게 한 놈, 아무개 나쁜 놈, 아무개 버릇 고쳐줄 놈, 다 수첩에 적었어요. 이놈들 두고 보자! 내가 이렇게 이를 악물고 살아왔어요』
그는 대단한 성공이랄 수 있는 3등을 하고도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돌아와서 세리와 함께 피나는 연습을 했다.
『그러고 나서 겨울이 닥쳤는데, 세리가 얼마나 열심히 연습을 했는지 손이 얼어붙고 터져서 피가 났어요. 내가 맨소래덤을 발라 주며 말했어요. 「세리야, 이기자, 이겨야 산다!」 세리는 잘 참았어요』
지독하기로 말하면 세리는 아버지보다 더 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연습장에서 세리한테 연습을 시켜놓고, 「세리야, 아빠 친구 좀 만나고 올게. 아빠 올 때까지 여기서 연습하고 있어」 이러고 나가서 친구들하고 술 한 잔 하다가 깜빡 잊어버렸어요.
새벽 4시에 집에 가서 세리엄마한테 「세리 왔어? 자?」 했더니 「같이 나가구선 왜 나한테 물어요?」 하는 거야. 야, 이거 큰일났다. 정신없이 연습장에 가 보니까, 세리가 저쪽 구석에서 불 한 개 켜놓고, 그 추운 겨울에 굳은 손을 호호호 불면서, 글쎄 새벽 4시까지 연습을 하고 있는 거요! 내가 달려가서 세리를 붙들고 끌어안고 울었어요! 「세리야 미안하다. 세리야 잘못했다!」 그러면서 내가 막 울었어요』
이렇게 말하는 그의 눈도 젖어 있었다.
『그때 유성 골프 연습장에서 한 말이 있어요. 세리는 세계를 휘어잡는 선수가 될 거라는 말이 나왔어요. 골프장 관리인이 열 두 시가 돼도 세리가 안 가니까, 문 닫어야 된다면서 가라고 해도 세리가 안 가더래요. 아빠가 올 때까지 치고 있어야 된다면서요!』
세리가 아버지와 함께 굳은 결심을 하게 된 데는 까닭이 있다.
『세리가 아빠랑 함께 꼭 붙어서 연습을 하다 보니까, 아빠가 돈이 없어서 괄세받는 걸 다 본 겁니다. 그걸 보고 세리가 꼭 성공해야겠다고 이를 깨문 겁니다』
그 후 아버지와 딸은 꼭 미친 사람 같았다.
『내가 자다가 일어나서 헛소리도 하고 잠도 못 자고 하는 겁니다. 나도 세리도 너무 집착해서요. 자나깨나 아버지와 딸이 골프밖에 모르니까, 반은 미치더라구요. 공부해야지, 연습해야지, 그런데 돈은 없지, 시간도 없지…. 제일 답답한 게, 세리는 자꾸 따라오는데 내가 가진 게 별로 없는 거였어요. 실력도, 돈도…. 하도 내가 답답해 하니까 세리엄마가 그만 두자고 했어요. 애 잡고, 아빠 미치겠다구요』
공동묘지서의 야간 훈련
그러면서도 그는 주먹구구식으로 가르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체계적으로 튼튼한 체력과 백절불굴의 정신력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세리가 체력을 타고났어요. 그래도 다리에 힘을 더 길러야 된다고 생각했죠. 골프는 다리 힘이니까. 그래서 아파트 15층을 걸어 올라갔다가, 돌아서서 내려오지 않고, 올라가는 자세로 그대로 서서 내려오게 했습니다. 그게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몰라요. 무지무지하게 힘들어요. 그걸 반복시키니까 애가 반은 죽어요. 그래도 애가 불평 한 마디 안 했어요. 세리가 내 딸이지만 보통애가 아닙니다.
그런 운동을 하도 시키니까 다리가 굵어지면서 근육이 막 뽀개지는 겁니다. 세리가 제 다리를 보며 그래요.
「아빠, 이 다리 근육이 너무 한 거 아녀?」
내가 자신 있게 말했어요. 「그런 소리 마, 그건 황금의 다리여. 넌 그걸로 엄청난 선수가 될 거여. 걱정하지 마」 우린 이렇게 살아왔어요』
그는 또 정신력도 키워놔야 된다고 생각했다.
『골프엔 담력이 있어야 하니까. 간을 키워놔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유성 방동 저수지께 묘가 많은데, 거기 묘 옆 잔디에 텐트를 치고 세리와 함께 살았어요. 밤중에 내가 세리한테 샌드 웨지를 주며 「여기서 연습하고 있어라」 하고 친구 만나러 유성시내로 나오면, 세리가 아무도 없는 묘지에서 혼자 연습을 했어요. 그때 어린애가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내가 안 돌아가면 혼자 자야 했는데, 그때는 또 어땠겠어요.
세리한테 물어봤어요. 「안 무서우냐」고. 그랬더니 「처음엔 무서웠는데 나중엔 괜찮았어」 이러는 거야! 세리는 이런 걸 다 이긴 겁니다. 세리가 막판에 몰아쳐서 역전승을 하는 담력은 다 이런 데서 나온 겁니다!』
그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딸에게 가르쳐 주었다. 세리는 아빠의 가르침을 하나도 거역하지 않고 다 흡수했다.
아버지는 지금도 자신만만하다.
『세리가 미국에 가서 세계적인 유명한 코치 데이빗 레드베터에게 배우게 됐을 때, 내가 그 사람한테 말했지요. 「당신은 세리가 인정하는 선생님이니까, 이렇게만 말해 주시오. 너는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천부적인 몸과 정신을 가지고 태어났다. 자신감을 가져라. 이것만 말해 주시오. 그 말만 해주면 당신 역할은 끝난 것이오」
정말 레드베터가 세리한테 그 말을 해줬어요. 그래서 자신감을 갖고 미국을 제패하게 됐지요』
『경기에 지고 울 때 가슴 아팠다』
실전연습을 할 때도 악조건을 골라서 했다.
『눈오는 날, 비오는 날, 바람 세게 부는 날은 일부러 쉬지 않고 필드에 나가 연습을 했습니다. 유성 컨트리클럽에서 주로 연습을 했는데, 거기서도 처음엔 나를 미친 놈이라고 했어요. 「네가 무슨 세계를 제패하느냐」고. 맨날 내가 골프백 짊어지고 이런 날만 골라 세리 데리고 치고 다니니까 다들 우습게 봤지요. 나는 그때 생각했지요. 나쁜 조건에서 연습을 많이 해야 어떤 조건에서도 이길 수 있다고』
세리가 지금 악조건에서 더욱 잘 싸우는 건 이런 연습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中3 때 얘길 하고 있는데, 그때 어떻게 세계를 제패한다는 생각을 했습니까?
『나는 그 스님이 한 얘길 믿었어요. 네가 살면 행복한 날이 오고 좋은 일을 할 거라고 했으니까. 또 그때까지 그 말이 착착 맞아 들어오니까!』
―그 후에 그 스님 만났어요?
『아니오, 아직 못 만났어요. 한 번 만나 뵈었으면 좋겠어요』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요?
『왜요, 여러 번 했지요. 그런데 포기하려고 하면 세리가 하도 잘해서 그게 안 되더라구요. 그래서 포기하려구 했다가 힘을 얻고, 또 포기하려구 했다가 힘을 얻구 그랬지요』
그는 말끝에 버릇처럼 이런 말을 잘한다.
『우린 이렇게 살아왔어요』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언제 났어요?
『돈 문제가 제일 컸죠. 경기에 나가 싸우는데, 돈이 없어서 애는 경기하라고 하고, 나는 내려와 돈을 구하러 다니곤 했어요. 그럴 때마다 그만 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돈을 쪼끔 만들어서 올라가 보면 세리가 너무 잘 한 거예요!』
아버지는 딸의 마음을 안다.
『세리가 아버지 마음을 너무 잘 아니까, 우리 세리가 정말 최선을 다해서 공을 친 겁니다. 아버지 고생하는 것도 알고, 지가 공을 못 쳐서 성적이 나쁘면 끝장이라는 것도 알고 그러니까, 세리가 죽을 힘을 다해서 공을 친 겁니다』
―마음이 아팠을 때도 많았겠지요?
『세리가 돈이 없어서 절절 매며 구하러 다니는 아버지한테 효도하겠다며 최선을 다해서 경기를 했는데도 결과가 안 좋았을 때, 아버지한테 不孝했다며 내 품에 안겨서 울었을 때, 그때 내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어요! 세리는 제 맘에 안 차는 경기를 하면 눈이 붓도록 울어요. 아버지가 매달려서 뒷바라지하는 걸 보면 저한테도 너무나 감동적인 일이 많았는데, 그런 아버지가 너무 불쌍한 거야, 제가 경기에 져서…』
『돈 세다 손가락에 쥐나도록 벌겠다』
―돈이 그렇게도 없었나요?
『그럼요. 남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배가 고파도 밥을 못 먹을 때도 있었고, 남들은 호텔에서 잘 때 우리는 싸구려 여관에서 잤고. 그러면서 우리는 참 많은 얘기를 했어요. 희망에 넘치는 앞날 얘기도 하고, 이 어려움을 이기자는 얘기도 하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기도 하고. 내가 「세리야 걱정마, 내가 어떻게든 네 뒷바라지는 할게」 하면, 세리는 「아빠 걱정마, 내가 꼭 이길게」 하고, 우리는 이렇게 남남이 아니고 서로 분신이었어요. 이런 마음이 오늘 날 세계를 제패한 겁니다』
이렇게 고생하면서 골프를 칠 때의 서러움과 결의가 세리 가슴속에 아주 깊게 새겨져 있었던 듯싶다. 그 무렵 세리는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아버지가 전한다.
『「엄마, 걱정마. 내가 손에 쥐가 나도록, 셀 수 없을 만큼 돈을 벌어 줄 테니까」 세리가 이런 겁니다. 세리 엄마는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울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은 맞고 말았다. 어떤 인내심 강한 사람이 있어서 박세리가 벌어오는 돈을 손으로 세고 있을 것인가. 손에 쥐가 백 번 나도 다 못 셀 것이다.
우승하고도 돈이 없어 도망 다녀
『우리가 바람 불고 비오는 날 유성CC에서 연습을 할 때였어요. 내가 골프 백을 메고 그늘 집을 지나가는데, 친구들이 「야, 배고픈데 쟤(세리) 우동 한 그릇 먹여 보내. 너도 먹고」 그러더라구요. 그때 참 배가 고팠어요.
따끈한 우동 한 그릇 먹고 가고 싶은데도, 돈도 없는 데다 애들이 빈중거리는 게 보기 싫어서, 「세리야, 이런 거 이겨내야 돼, 그냥 가!」 그러고 찬비를 맞으며 계속 돌았는데, 그게 잘못이었어요. 세리가 몸살이 나서 1주일 동안 앓았잖아요. 이걸 보고 다른 사람들은 저놈 미친 놈이라구, 애 죽고 저 죽는다고 다 그랬어요』
그는 또 한 마디 보탰다.
『우린 이렇게 살았어요』
―그래, 우리나라는 어떻게 제패했던가요?
『중2 때 3등을 하고 나서 보니 실력이 참 많이 모자라더라구요. 우린 숏 게임에서 실력이 부족하더라구요. 그때까지 난 숏 게임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요. 파 퍼(4)에서 두 번 똑바로 쳐서 온 그린(On Green) 시켜 놓고 두 번에 넣든지 한 번에 넣든지 하면 되지 무슨 숏 게임이 필요하냐,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반듯하게 많이 내보내는 것만 연습을 시킨 거지요. 그런데 경기에 출전하면서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요. 숏 게임을 못해서 우승을 몇 번 놓쳤거든요. 그래서 숏 게임을 집중적으로 연습시켰지요』
이렇게 실력을 가다듬고 중3 때, 전국 중고연맹 회장배 경기에 출전했다.
『그 대회에 탁 가서 봉께 무슨 식이 진행되고 있었어요. 트로피 세 개가 책상 위에 놓여 있더라구요. 내가 우승컵을 집어들고 세리한테 그랬어요. 「세리야, 이거 있다가 우리가 가지고 갈 거다. 한 번 안아봐」 그때 뒤에 있던 사람들이 날보고 「미친 놈」이라는 거예요. 세리도 겁이 났던지 눈을 찡긋하며 「아빠, 얼른 갖다 놔, 안 돼 그거!」 그래요. 그래도 나는 태연하게 「있다 가져갈 거니까 미리 만져보면 어떠냐, 한 번 안아 봐」 그러니까 세리가 마지못해 얼른 한 번 안았다가 놓더라구요.
내가 그걸 보고 세리한테 말한 거요, 「우리가 연습한 대로만 하면 분명히 우승을 한다. 만약 우리가 이 컵을 못 가지고 가면 내 손가락 하나를 자르고 가겠다」 그러고 등을 툭툭 치고 세리를 경기에 내보냈지요』
―어린애한테 너무 부담을 준 거 아닙니까?
『나는 보이는 게 있으니까 그랬지요』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손가락을 자르게 될 것인가, 아니면 우승컵을 안고 돌아갈 것인가. 세리는 그가 생각한대로 경기를 너무 잘하고 있었다.
『전반 나인(9)을 퍼 언더(-4)로 넘어왔어요. 그런데 손가락 네 개를 위로 올려요. 퍼 오버(+4)란 뜻이거든요. 그래 내가 놀라서 「뭐가 그렇게 안 되냐?」 그랬더니 「아빠, 잘 돼. 퍼 언더야」 그래. 「억! 야 이놈아, 그럼 손가락을 밑으로 내려야지」 그러니까 세리가 웃더라구. 그런데 후반에 소심하게 쳐서 41타를 치는 바람에 73타가 됐어요. 그 이튿날도 똑같이 73타를 쳐서 통산 146타로 세리가 우승을 한 거 아니오!』
부녀는 뛸 듯이 기뻤다. 생애 처음으로 전국대회 우승을 한 것이다. 그리고 전날 안아보았던 그 우승컵을 아예 차지해 버렸다. 그러나 또 문제가 있었다.
『우승을 하고 나니, 여러 매스컴에서 다 와서 사진을 찍더라구요. 다른 부모 같으면 그날 모인 사람들하고 큰 잔치를 벌일 정도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분들 대접할 돈이 없어서 얘기하다 말고 둘이서 차를 타고 도망와 버리고 말았어요. 한 번 우승하면 몇 백만 원씩 돈이 들어가는데 내가 그 돈이 있어야지요』
―뒤에 후환이 없었어요?
『처음엔 기분이 안 좋아서 나를 싫어했지요. 나중엔 내 실정을 알고 이해해 줬고 또 많이 도와 줬어요』
그러고 나서 바로 열린 大農 주최 라일 앤 스코트 오픈에서 전체 프로들과 함께 역량을 겨루게 됐다. 당초 박세리는 이 대회에 나갈 수 없었는데, 중고연맹대회에서 중학생으로 당당히 우승하는 바람에 시드를 배정받아 그 덕으로 이 대회에 출전하게 됐다.
닭 날개 실컷 먹고 훨훨 날았다
『그때까지도 세리 실력을 제대로 평가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어쩌다 한 번 우승했겠지 하는 정도였어요. 나는 그 대회에 가서 라일 앤 스코트 모자를 하나 구해다가 세리한테 씌워 주고, 아줌마들한테 가서 라일 앤 스코트 티셔츠를 얻어다가 입혀 주며 어깨를 끌어안고 「세리야, 프로들하고 친다고 조금도 겁내지 마라. 너는 세계적인 프로가 될 거야.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네 발 밑에 무릎을 꿇을 거야. 네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게임을 하면 너는 우승을 할 거야」 이러고 내보냈어요』
첫날 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그런데도 세리가 전반에 36 이븐을 치고 1등으로 넘어오는 거요. 다른 사람들은 쓰리 오버(+3), 퍼 오버(+4)를 쳤는데. 비바람 불 때 연습한 효과가 나타난 거요!』
그런데, 그날 비가 너무 와서 경기가 취소됐다.
『속이 참 상했지요. 내가 세리를 붙들고 말했어요. 「세리야, 걱정마. 내일도 오늘처럼 치면 넌 베리 굿이야. 가자, 뭐 먹고 싶으냐」 그랬더니 닭 날개가 먹고 싶다는 거요. 나는 세리를 데리고 치킨 집에 가서 닭 네 마리를 시켜서 날개를 모두 떼어 세리한테 줬어요. 내가 물었지요. 「세리야, 너 웬 닭 날개를 그렇게 많이 먹니?」
세리가 웃으며 「아빠, 내가 이 날개 먹고 내일 훨훨 날 거야」 그러는 거요』
정말 그 이튿날 세리는 훨훨 날았다.
『이튿날, 원 언더(-1)로 세리가 1등으로 들어 왔어요. 사흘 하는 건데, 원재숙하고 同打가 돼서 연장전을 하게 됐어요. 내가 또 세리를 안고 말했지요. 「세리야, 원재숙이 너보다 한 수 아래야. 그거 알어 몰라?」 그러니까 「알어!」 그래요. 내가 등을 탁탁 치며 또 말했어요. 「자신 있게 치라구. 연습 스윙도 하지 말고 그냥 때려, 알았어! 남들이 박수를 치는 것도 신경 쓰지마」 그러고 연장전에 내보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원재숙이 스타여서 갤러리들이 따라다니며 박수를 쳤다고 한다. 반면 세리에겐 별로 관심들이 없었던 것이다.
연장전에 들어가서 원재숙이 먼저 치게 됐다. 세리가 다음에 쳤는데 비거리가 훨씬 더 많아서 세컨드 숏을 원재숙이 먼저 했다. 원재숙이 두 번째 볼을 날려 깃대 근처 3∼4m에 갖다 붙였다. 갤러리들의 박수가 요란했다.
다음은 세리의 차례였다. 아버지가 연습 스윙을 하지 말라고 해서 세리는 공을 노려보기만 하다가 탁 찍어 쳤다. 70m쯤 되는 거리였다. 공은 하늘 높이 솟았다가 깃대 70센티 근처에서 딱 멎었다. 그랬는데도 박수소리가 별로 없었다.
『나는 속으로 좋아하면서 세리한테 가서 「세리야, 네껀 바짝 붙었다」 고 했더니 「아빠, 아냐」 그래요. 왜냐하면 박수소리가 안 났으니까. 가서 보니 세리 볼이 붙어 있어. 세리가 좋았던지 막 뛰어갔어요. 내가 나지막하게 소리쳤지요. 「세리야, 천천히 가」 그 말을 듣고 세리가 뚜벅뚜벅 걸어갔어요. 원재숙은 버디 트라이에 실패했어요. 세리는 공을 툭 쳐서 홀에 집어넣더니 막 뛰어서 어디로 내빼는 거요. 자기가 이긴 줄도 모르고 17번 홀로 연장전하러 간다고 그런 거지요. 내가 달려가서 끌어안으며 말했어요. 「세리야, 어디 가. 네가 이겼어! 네가 이겼다구!」』
박세리는 이때 중학교 3학년으로 한다 하는 프로들을 무릎을 꿇게 하고 최연소 우승의 기록을 세운 것이다.
「寂然不動」 - 너무 기뻐 말라
그때부터 그는 한 단계 높은 교육을 시켰다.
『세리가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게 되니까 표정도 가르쳐야 했지요.
「우승을 했을 때 표정이 너무 많이 흔들리면 안 된다. 홀에서 공을 꺼내서도 너무 즐거워하면 안 된다.
寂然不動(적연부동) 알지?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기뻐도 기뻐하지 말고, 슬퍼도 슬퍼하지 말아라. 우승을 해도 잠시뿐, 내일의 경기가 또 너를 기다린다. 너무 들뜨지 말아라」
세리는 어려서부터 이렇게 배웠어요』
이제 보니 박세리가 우승한 다음 표정을 아끼는 까닭을 알겠다.
『딱 한 가지 못 가르친 게 있어요. 세리가 나한테 그래요. 「아빠가 다 잘 가르쳐 줬는데, 쉬는 걸 안 가르쳐 줘서 놀 줄을 모른다」는 거요. 나는 쉬는 시간에도 골프장 근처에 가서 그립을 쥐고 놀라고 했는데, 그게 아녔어요. 쉬는 게 아주 중요했어요. 시간이 나면 골프 이외에 무아지경에 빠질 수 있는 게 있어야 해요. 그런데 나는 세리한테 그걸 못 가르쳐 줬어요. 이제 그 걸 알고 「야, 쉴 땐 팍 쉬어」 해도, 안 배워서 못 쉬겠다는 겁니다. 시간이 나서 좀 쉴 때도 세리는 골프가방이 10m만 떨어져 있어도 불안해서 못 견뎌요』
그 다음부터 박세리는 승승장구했다. 명실공히 한국을 제패해서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어진 것이다. 불과 3년 만에 박세리는 한국의 무적 女장군이 된 것이다.
『한번 좀 느긋하게 밀어 줘 보시오』
박세리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아버지는 삼성물산(현재는 삼성전자 소속)과 협상을 계속했다.
『나는 1년 6개월 간 나 혼자서 협상을 계속했어요. 그때만 해도 남자 선수가 계약금으로 많아야 3500만원을 받았고, 여자선수는 1500만원밖에 못 받을 때였어요. 그런데 세리는 고3 졸업하면서 10억을 받은 거 아닙니까?』
―어떻게 그렇게 많이 받았어요. 상대방도 다 쟁쟁한 사람들일 텐데.
『나는 계속해서 세리는 미국으로 나가야 되고 세계를 제패할 것이다, 그걸 확실하게 믿고 한번 해보라고 했지요』
그는 혼자 일을 꾸려나가면서도 주도면밀했다.
『내가 계약기간은 10년으로 하되 5년 후에 再협의한다는 구절을 계약서에 넣었어요. 그거 안 넣었으면 큰 일 날 뻔했어요. 요즘도 이상한 얘기가 나오면 그 조문을 들이대지요. 삼성한테 섭섭한 게 자꾸 생겨요』
박세리가 미국에 가서 세계대회를 제패하기를 바라면서 결국 양측은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런데 또 곧 문제가 생겼다.
『세리가 미국 가서 5개월도 안 됐는데 삼성에서 들어오라는 거야. 5월까지 성적이 안 나니까, 경비 많이 들어간다구. 첨에 가자마자 프로 테스트에서 수석을 했지만, 프로경기에서 35위, 25위, 50위. 이렇게 성적이 저조하니까….
내가 서울로 올라가서 삼성한테 그랬어요. 「5년 안에만 세계대회에서 우승해도 성공한 거라고 한 게 언젭니까. 이렇게 하면 스폰서 자격 없어요. 우리는 LPGA 참피언십도 이길 수 있고, US 여자오픈도 이길 수 있어요. 한번 좀 느긋하게 밀어 줘 보시오」 그랬더니 「이런 소리 안 들으려면 한번 이겨 보라」는 거요. 그래? 우리도 이길 수 있다, 그러고 돌아왔지요』
유성으로 내려온 그는 세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리야, 이제 쫓겨오게 생겼다. 네가 지금 무슨 걱정이 있니? 아빠가 지금 너한테 가고 싶어도 언론들이 그 무식한 애비가 코치를 해서 지게 만들었다고 하는 바람에 못 가고 있는데, 그런 아빠 처지를 생각해서라도 네가 열심히 해야 할 게 아니냐!」 내가 세리 처지를 알지만 좀 무리하게 주문을 했어요』
메이저 대회 연속 우승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
그러고 며칠 만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수천 ㎞ 밖에서 보낸 아버지의 힘이 딸에게 용솟음치는 에너지로 전달된 것일까. 서로 분신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통한 것일까.
『그후 사흘 만에 「맥도널드 LPGA 챔피언십」이 열렸는데, 사흘째 치는 걸 보고 「이젠 끝났다」 하고 결정을 내려 버렸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사흘 치는 걸 보니까 너무 잘 맞아요. 맨날 호흡을 같이 했으니까 멀리서도 치는 것만 보면 다 알 수 있어요. 자, 우승이다, 그러고 신문 방송에 우승 소감 다 말하고 만세 부르는 모습도 다 찍고 세리한테 전화했어요. 「세리야, 이번에 우승했다. 벌써 TV 다 찍었다」 「아빠, 어떻게 알아」 「세리야 날 믿어. 너는 이번에 우승한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사흘째 마지막 퍼팅하는 걸 보고 알았어요. 안 들어갈 건데 들어가더라구요. 이제 氣만 불어넣으면 되겠구나 하고 내가 전화에 대고 자신감을 불어넣었더니 금방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어요. 나는 또 주문을 했지요. 「16번 홀에서는 무조건 우드로 쳐라, 투 온 안 시키면 안 돼!」 중계방송을 보니까 세리가 16번 홀에 가서 무조건 우드를 뽑더라구. 그러더니 투 온 시켜서 이겨버리더라구! 그러고 나니까 온 나라가 난리가 났어요』
세리가 L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고 나서 그는 삼성물산에 들어가 점잖게 말했다고 한다.
『「조금만 기다려 주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면서 「내가 지금 미국 가서 US 여자오픈에 우승하고 돌아올 테니 그때 원하는 걸 해주시오」 그랬지요』
―원하는 게 뭐였어요.
『US 여자오픈에 우승하고 돌아오면 100억원을 보너스로 달라고 그랬어요. 그쪽에선 어이가 없었겠지요. 우선 되지도 않을 US 여자오픈 우승 얘기도 그렇고, 100억원이란 거금도 그렇고. 그러나 나로서는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결국 삼성이 OK했지요』
그러고 그는 골프업계와 매스컴에, 『내가 세리랑 US 여자오픈 우승하고 돌아와서 100억을 받을 테니 두고 보라』고 광고(?)를 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두 달 뒤 7월에 대망의 US 여자오픈에서 당당히 우승을 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삼성물산에서 100억원(장기계약)을 받아냈다.
―우승할 줄 어떻게 알고 그렇게 큰 소리를 쳤던가요?
『우승할 때는 영감이 생겨요. 그런 말이 막 지껄여집니다. 반면에 아무리 잘 나가는 경기도 못 이길 땐 아무 말도 안 나와요』
US 여자오픈은 세리가 양말을 벗고 물에 들어가서 쳐 올린 샷으로 유명하다. 두 달 사이에 건져 올린 메이저 두 대회에서의 우승은 IMF 파동에 시달린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던 이른바 「IMF 우승」으로 유명하다.
그때 박세리가 역경을 딛고 마침내 승리한 것은 국가의 역경과 맞물려 커다란 의미를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세리의 우승 장면은 양희은의 상록수 가사에 실려 국가광고가 되어 全국민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메아리쳤다.
생각하면 박세리는 국가가 어려울 때마다 온 국민에게 서광을 비춰 주었다.
이때도 박세리 아버지 박준철씨는 일화를 가지고 있다.
『세리가 마침내 US 여자오픈에서 우승하게 됐을 때 중계 방송하던 카메라 팀이 뛰어들어오라고 했어요. 그 사람들도 감격스러운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거지요. 그래서 내가 뛰어들어갔는데, 우리나라 매스컴에서 뭐라고 그랬어요. 아버지가 무식해서 매너도 모르고 뛰어들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구 그랬잖아요. 나 참 못 살아요. 왜덜 그래유!』
작년의 無冠, 10勝보다 의미 커
세리는 화난 암사자처럼, 들불처럼 일어나 펄펄 뛰며 훨훨 타올랐다. 1998년 7월 한달에 US 여자오픈에 이어, 제이미 파크로 클래식, 자이언트 이글 클래식, 이렇게 3개 대회를 숨돌릴 겨를도 없이 휩쓸고 말았다.
그리고 1999년에도 세리는 4개 대회에서 트로피를 높이 들었다. 이렇게 세리는 4년 간 세계대회 12승이란 쾌거를 기록했고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만 우승하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해서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아쉽게도 2000년엔 상금은 많이 타냈지만 無冠에 머물고 말았다.
『작년에 내가 미국 가서 옆에 있었다고 해봐요. 또 그 엉터리 같은 아버지가 좋은 선수 버려놓는다고 했을 거요. 내가 세리를 그냥 놔둔 데는 다 이유가 있어요. 세리한테는 홀로서기할 시간이 있어야 해요. 말만 해도 그래요. 내가 옆에 있으면 맨날 한국말만 할 테니 영어가 늘겠어요. 지금은 영어를 곧잘 하잖아요』
―지금 홀로서기를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은 문제없어요. 사막에 갖다 놔도 모래 뒤집어쓰며 자고 나서 골프 칠 거요. 모래바람이 불어도 낙타 밑으로 들어가서 다리 붙들고 엎드릴 거요. 이제는 끝났어요. 어디 내놔도 문제없어요. 말도 잘 하고』
그는 無冠으로 보낸 작년을 의미 있게 평가한다.
『작년에 한 번도 우승 못한 게 10승 한 것보다 더 많은 걸 얻었어요. 본인의 가슴에 말할 수 없이 많은 걸 담았어요. 또 늘 부모들이 따라 댕기는 것도 문제가 있어요. 애 앞세워서 먹고 사는 것 같고, 또 굉장히 초라해 보이잖아요』
―一說에는 세리가 세계적 선수가 되고 나서, 아버지가 코치하는 방법과 달리 치고 싶어한다고도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유명해지다 보면 별 말이 다 많아요. 세리는 귀가 얇지 않아요. 선수는 단순명쾌해야지, 복잡하게 생각하면 안 돼요. 왔다갔다 하면 선수생활 못해요. 세리는 언제 어떤 일이 생기든 자기 위치는 잊어버린 적이 없어요』
―아버지가 카지노에 가서 돈을 잃었다면서요?
『그런 거 절대 없어요. 세리가 어떻게 번 건데 그런 걸 함부로 쓰겠어요』
―세리가 버는 돈은 어떻게 쓰나요?
『서울에 있는 변호사가 관리합니다. 한 푼도 헛되게 쓰지 않으려구 애를 씁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버셨어요?
『계산을 안 해봐서 잘 모르겠는데요』
―앞으로 하실 일은?
『내 일생을 세리한테 걸었는데 세리를 위한 사업을 열심히 해야지요』
―세리를 위한 사업이라니요?
『3년 전에 설립한 세리 인터내셔날(주)에서 집 주변에 있는 땅 9만여 평을 사서, 세리 골프 스쿨, 세리 기념관, 세리 공원 이런 걸 만들어서 대전市에 던져 주려고 합니다』
부모가 헌신해서 자식한테 감동 줘야
그는 현재 삼성전자의 상무로 재직중이고, 박세리는 과장으로 있다. 3년 전 설립한 세리 인터내셔날(주)의 사장은 둘째형인 박준성(58)씨가 맡고 있고, 부인 김정숙씨가 감사로 있다. 앞으로는 이 회사를 통해서 세리와 관련된 사업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너무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쳤다는 비판도 있는데….
『철광석이 용광로에서 녹지 않으면 어떻게 쇠가 되겠어요. 단련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강철이 되겠어요. 우선 부모가 선수가 돼야 하고, 자식한테 헌신해야 되고, 그래서 자식한테 감동을 줘야 해요. 또 부모와 선수가 마음으로 통해야 해요. 내가 만일 선수를 뽑는다면 우선 부모부터 보겠어요. 따라다니며 극성을 떤다고 좋은 선수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또 내가 못한 걸 자식한테 떠맡겨서 하게 하려고 하면, 자식은 삐뚤어지고 말아요. 내가 세리한테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쳤지만, 세리한테는 처방이 맞아서 성공한 거지요. 사람마다 진단을 잘 해야지요. 배 아픈데 두통약 주면 되겠어요?』
그는 또 인간교육에도 철저하다.
『선수는 자기 주변 정리를 잘 해야 합니다. 자고 일어난 자리도 말끔하게 정리돼 있어야 하고, 양말, 셔츠, 바지도 제 손으로 세탁해서 반듯하게 개어 놓아야 하고, 구두도 제 자리에 반듯하게 놓아두어야 해요. 승부사들은 주변이 항상 깨끗하고 잘 정리돼 있어야 해요. 세리 방에 들어가면 모든 게 반듯반듯하게 놓여 있어서 손 댈 게 없어요. 내가 철저하게 가르쳤거든요. 승부사들은 마음이 흐트러지면 안 됩니다』
이런 말을 듣다 보니, 흔히 건달로만 알려졌던 그가 달리 올려다 보였다. 놀라움은 계속된다.
『뭐든지 멀리 보고 굵은 선을 뚜벅뚜벅 따라가다 보면, 큰 게 보이게 마련입니다』
『약속한 걸 무덤 가서도 지키자』
그는 세리에 대한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기량이 최고라고 해서 최고 선수가 되는 건 아닙니다. 전반적인 수준이 따라가야지요. 그래서 지금 세리한테 고급영어를 가르치고 있어요. 그냥 슬랭 써가며 하는 저속한 영어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점잖은 지식인들이 쓰는 말을 가르치고 있어요. 또 식탁 매너도 가르칩니다. 포도주를 골라 마시는 법도 가르쳐요. 어떤 때 어떤 포도주를 마시는지. 세계를 제패하려면 다른 선수들보다 이런 면에서도 앞서가야 합니다』
그는 세리의 걸음걸이도 가르쳤다.
『전쟁터에 나갈 때 걸음걸이가 씩씩해야 상대방이 기가 죽는 것이지, 쫄랑쫄랑 걸으면 웃음거리만 되거든요. 그래서 세리한테는 표정 없이 뚜벅뚜벅 씩씩하게 걸으라고 가르쳤어요.
인터뷰할 때도 가볍게 하지 말고 표정 없이 묵직하게 할 말만 깨끗하게 하라고 가르쳤지요』
그는 내 의견을 물었다.
『세리가 경기할 때 TV에 나오면 든든하고 믿음직스럽지 않아요? 좋은 선수를 만들려면, 손톱 발톱은 물론이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듬어 줘야 해요. 좋은 것은 살려 주고, 나쁜 것은 사정없이 쳐 주고』
들으면 들을수록 아버지도 무서워졌고, 그 말을 철석같이 따라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장한 박세리도 무서워졌다. 어쨌든 그는 사람의 골격 만들기, 사람의 정신 만들기.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이미지 만들기, 이렇게 토털 인간 만들기에 썩 훌륭한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는 세리가 피나는 연습을 쌓던 유성 컨트리클럽 정문 앞, 대전시 유성구 복영동에 500평의 땅을 사서, 그곳에 10여 억원을 들여 5층짜리 레스토랑 건물을 짓고 있는데 지금 완공 단계에 있다. 그곳엔 오락실, 오리 고깃집, 레스토랑, 커피숍이 곧 들어설 예정이다. 그는 그곳에서 朴씨의 여러 형제와 처가권속들이 장사를 하며 먹고 살 수 있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처음 그 땅을 살 때만 해도 세리의 피땀이 어린 곳이어서, 그 자리에 세리 기념관을 세울 작정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세리 인터내셔날(주)이 있는 유성구 구암동에 세리에 관한 모든 것을 건설하기로 하면서 그 곳에 식당 건물을 짓게 됐다고 한다.
우리가 처음 만난 다음 날은 세리의 어머니가 영국에서 인천공항으로 늦게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래서 하루 건너 뛰고 8월 8일 아침에 그의 집에서 다시 만났다.
목수들이 집 귀퉁이 대문 옆에 뚝딱거리며 목조건물을 짓고 있었는데, 세리가 타온 트로피를 진열할 집을 짓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테라스에 자리잡고 얘기를 시작했다.
매미 소리와 못 박는 소리, 또 나무 자르는 전기톱 소리가 가끔 인터뷰를 방해했다.
―삼성과 계약조건에 세리가 세계대회에서 우승해서 상금을 받으면, 삼성측으로부터 똑같은 돈을 또 받을 수 있게 돼 있다죠?
『처음에는 상금의 100%를 받기로 했는데 세리가 우승을 하도 많이 하니까 삼성측에서 규정을 바꿔버렸어요.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면 1억원, 보통대회에서 우승하면 5000만원으로 내려버린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1억원밖에 못 받게 됐어요. 여기서 4400만원이 세금으로 나갑니다』
―세리가 고향 생각이 많이 나겠지요?
『2년째엔 향수병이 심해서 우리나라에 많이 오고 싶어했어요. 나는 세리와 많이 얘기했습니다. 우리가 약속한 걸 이 세상에서 다 못 지키면 무덤 속에 들어가서도 지켜야 된다구요』
―무슨 약속인데요?
『어려워도 표내지 말고,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우리가 목표로 한 자리에 서기까지는 너도 노력하고 또 나도 노력하자…』
―목표로 한 자리는 또 뭔데요?
『우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야 하고, 기네스 북에도 올라가야 하고, 명실공히 세계를 확실하게 제패해야 하고, 적어도 서른 살까지는 부지런히 운동을 해서 우리가 하기로 한 좋은 일의 토대를 마련해야 하지요』
『목표 달성 때까지 결혼 미룬다』
―어떤 사람들은 세리한테 중국인 남자친구가 생겨서 한 때 거기 빠져가지고 골프를 못 쳤다고 합니다만….
『남자친구가 하나 있어요. 홍콩 친군데 세리보다 두 살 더 많아요. 레드베터 스쿨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예요. 큰 부잣집 아들입니다. 그냥 친구로 있지요』
―결혼도 생각하나요.
『만약 세리가 결혼하면 부잣집 며느리가 돼서 행복하게 살겠지요. 사실 세리가 나와 함께 운동을 택한 것은 인간적으로는 불행의 길을 걷는 겁니다. 저 나이에 남자친구도 제대로 못 사귀고, 걸핏하면 매스컴에 두드려 맞고, 맨날 스트레스 받아가며 운동해야 하고. 그러나 지금 세리가 가는 길은 그런 평탄한 여자의 길이 아니잖아요』
―약속을 다 지키려면 결혼은 언제하나요.
『그것도 그래요. 「동생이 먼저 결혼한다고 해도 너는 흔들리지 말라」고 했어요. 우리가 한 약속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결혼도 미루자고 했지요』
―그거 참, 본인한테는 너무 가혹하잖아요.
『가혹하다기보다는 승부사의 운명입니다. 운명은 피해갈 수는 없는 겁니다. 세리는 그런 운명의 길을 선택했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지금 만약 세리가 결혼을 한다 칩시다. 그럼 운동은 전처럼 못할 겁니다. 그럼 개인적인 손실, 국가적인 손실, 세계적인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세리는 지금 그런 운명적인 길을 걷고 있어요.
세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은 골프 치는 겁니다. 앞으로 세리의 후손들이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세리의 얘기를 읽었을 때를 생각해 봐요. 그 거보다 더 훌륭한 일을 세리가 뭘로 할 수 있겠어요. 「네 이름 남기는 일은 그것밖에 없다. 너는 네 몸이 아니다」 이런 말을 누누이 했어요』
―결혼하고도 잘할 수 없나요?
『있어요. 미국에선 그런 선수도 있어요. 그러나 동양과 서양엔 문화의 차이가 있어요. 서양 사람들은 결혼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적게 받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그렇게 못해요. 반드시 흔들리고 정신집중을 못하게 돼요. 그러면 안 되는 거죠』
―세리가 불쌍하네!
『그렇게 볼 게 아니지유.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한 사람들은 자신을 버리고 헌신한 사람들이지, 다른 사람들처럼 잘 먹고 잘 산 사람이 아니지요. 독립 투사들도 보세요, 안 그런가. 피곤하다고 쉬고, 잘 했다고 쉬면 되겠어요. 세리가 경기를 잘 해서 우승을 하면 수많은 국민들이 열광하고 환호하며 좋아하지만, 게임에 지면 국민들이 한숨을 쉬잖아요』
세리는 꼭 귀국해서 나눠 주며 살 것
―세리 취미는 뭡니까?
『손에 들고 하는 오락기 있잖아요. 틈만 나면 그걸 합니다. 또 좀 시간이 나면 전자오락실에 가서 전쟁하는 거, 그런 거 좋아하구요』
―친구는?
『골프는 골치요. 혼자 외롭게 집착해야 하니까 골치 아프잖아요. 친구와 떠들면서는 못하는 거니까. 그래서 친구들과 놀 시간이 많이 없지요. 세리가 집에 오면 내가 어릴 때 같이 육상 하던 친구들을 막 찾아서 데려다 줘요. 그럼 세리가 참 좋아하지요. 그게 세리한테는 보약보다 더 좋은 거죠. 나하고 세리는 서로 눈빛만 보면 뭘 원하는지 서로 척 알아요』
―세리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고, 또 잘 하면 잘 할수록 우리한테서는 점점 멀어져서 결국 미국 사람되고 마는 거 아닌가 몰라요.
『아닙니다. 무조건 와야지요. 거기까진 내가 해결해 놔야지요. 세리가 세계적인 선수가 되려면 기량과 함께 다른 수준도 거길 따라가야지, 기량만 좋으면 잭 니클라우스 밖에 안 돼요. 벤 호간은 될 수가 없어요』
―그 둘이 어떻게 틀린데요.
『벤 호간은 돈벌이보다 사회에 좋은 일을 많이 했어요. 자기가 가진 좋은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 줬어요. 세리도 미국에 있으면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고, 기네스 북에 올라가고, 모든 걸 얻으면 귀국해서 세리가 가진 걸 나눠 줘야지요. 세리만큼 좋은 세계적인 선수도 발굴해서 길러내고, 또 복지사업도 더 좋은 일을 찾아서 많이 해야지요. 장학재단도 만들어야 하구요. 이런 사업을 다 세리 인터내셔날에서 할 겁니다』
―밖에서 돈을 계속 벌면 다음에 더 좋은 일 많이 할 수 있을 텐데.
『달도 차면 기웁니다. 은퇴도 화려할 때 해야 합니다. 세리도 일찍 돌아와서 새로운 포부를 펼쳐야지요. 세리도 이젠 베풀고 나눠 줘야지요. 그것까지 제가 만들 겁니다』
―세리네 미국 집은 어딨어요?
『플로리다 올랜도에 있는데 80만 달러 정도 줬어요. 2층에 방이 5개지요』
『세리야 정말 고맙다!』
세리 아버지 박준철씨는, 자기는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아서 온갖 정성을 다해 갈고 닦았다고 했다. 그래서 마침내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박준철은 가장 훌륭한 아버지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박세리 또한 가장 훌륭한 딸임에 틀림이 없다. 아버지의 어두웠던 과거도 이 대목에선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훌륭한 딸을 키우기 위해 가시밭길을 걸어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해서 훌륭한 아버지 역할을 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그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 역할은 과거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손엔 지금 억만금이 쥐어져 있기 때문이다.
―실례지만 세리랑 골프를 치면 실력이 어느 정도 돼요?
『나인(9)에 3∼4점 정도 받아야 돼요』
―도저히 못 당하겠어요?
『안 되죠. 세리는 인제 세계적인 선순데』
―세리야 말로 승어부(勝於父, 아버지를 이김) 했네!
『그래도 세리는 나랑 함께 치면, 아버지 기분 안 상하게 하려구 퍼터칠 때 좀 봐줘서 한 두세 점 이기게 해 주려고 노력하지요』
父女가 서로 그렇게 봐주고 이해하면서 골프를 치는 모습은 얼마나 정다울까. 나도 그런 딸이 있으면 도란도란 얘기하며 골프를 치고 싶다.
그러나 나는 세리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될 자신이 없다. 아니 내 딸은 결단코 그런 골프 선수로 만들지 않겠다. 그런데도 지금 내 입 속에선 이런 말이 맴돌고 있다.
『세리야, 정말 고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