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항상,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은 과거 우리의 선배들이 피흘려 싸우지 않았더라면 오늘 북한 주민의 저 비극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듯이 오늘 우리가 이 기회를 놓치고 또 한 세대를 보내버리면 북한 주민의 저 참상이 내일 우리의 아들 딸들의 모습이 아니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설사 어찌 어찌 해서 그러한 비극적 종말은 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 민족의 역사는 세계사의 흐름에 낙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綜合安保」 시대
정보화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고전적 國家安保(국가안보)의 의미가 달라지고 있다. 정보사회의 전략 환경이 엄청나게 변화해서, 국가안보도 이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메커니즘에 의해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국가안보는 대체로, 군사력을 기본으로 하되 외교적 역량이 또 한 축을 이루고, 그 외 다른 요소들이 일종의 배경을 형성하는 형태였다. 이제는 그러한 요소 외에 경제는 물론 지식(정보), 과학기술, 그리고 문화와 같은 다양한 기능과 요소가 존재하며 이들을 다함께 한눈으로 보고 분석, 총체적으로 대책을 강구해야만 하는 綜合安保(종합안보)의 시대가 된 것이다. 국가안보가 군인들만의 과업이 아니라 국가전체, 온 국민의 과업이 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종전과 같은 냉전체제는 무너졌다고 하지만, 미국의 세계경찰국가화, 중국의 초강대국화, 러시아의 와신상담, 일본의 영향력 증대와 더불어 남북한으로 이어지는 6각 구도는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다. 여기에 북한 미사일이나 핵문제까지 끼어들면 그것은 바로 한반도의 아마겟돈 상황을 뜻한다고 우려하는 이들이 있다.
이러한 시대적 특수 상황하에서 우리가 나라의 안전을 지키고, 민족번영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해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절대로 전쟁은 막아야 한다.
우리가 또다시 6·25와 같은 동족상잔의 민족적 비극을 겪게 된다면 이제는 인류 역사의 主流(주류)에서 영원히 배제된 미미한 민족으로 도태되어 버리고 다시 살아남을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외의 다양한 군사적 도발들도 막아야 한다. 그래야 경제도 살 수가 있고 국가의 사회적 문화적 역량도 길러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정말로 민족통일을 서둘러야 한다. 단순히 우리 민족의 염원이라는 감상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강대국 위주의 제한 주권시대요, 민족이라는 단어가 단순한 情緖(정서)상의 의미를 넘어서, 국제사회 생존 단위의 하나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이 시대에 한민족이 살아남으려면 그 길밖에 없다.
우리 민족의 통일노력에는 몇 가지 大前提(대전제) 조건, 지켜야 할 원칙이 있어야 한다.
첫째는 또다시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둘째는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인류가 현재까지 찾아낸 최선의 체제라고 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반드시 수호되고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셋째 궁극적으로는 우리 민족의 번영과 복지의 확충에 기여하는 형태의 통일이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이 세 가지 원칙에 충실하자면 우리의 통일은 勝者(승자)는 있어도 敗者(패자)는 없는, 설사 敗者가 있더라도 그 손실과 충격을 최소화하는 그런 통일이 바람직하다. 이른바 윈윈(win-win)게임 형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만 統一(통일)의 후유증을 최소화하고 통일과정에서 폭발적으로 분출할 민족적 에너지를, 21세기를 헤쳐나가, 한민족의 번영하는 새 시대 개척의 에너지로 직결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 전쟁을 억제해야 한다는 이것부터가 별로 쉽지가 않다. 우리는 그동안에도 군사력을 정비하고 안보태세를 강화하는 등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정책은 주로 「너 죽고 나 살기」 식의 이데올로기적 대결 위주의 정책이었고 그것만으로는 북한의 무력 도발을 100% 억제할 수가 없었다.
6·25 이후 북한의 전면 남침은 없었지만, 1·21 사태, 울진·삼척 공비사건, 아웅산 테러, KAL기 폭파, 강릉 잠수함 침투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참아서 그렇지, 전쟁을 선포해도 좋을 사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어설픈 강경론이 더 위험
왜 그랬을까? 성공만 한다면 얻을 수 있는 열매가 너무 커서 그러한 모험을 억제할 만한 손실을 찾기가 거의 불가능했다는 데 있을 것 같다. 손실을 인식시키려면 단호하고 철저한 응징 보복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했으니 북한의 크고 작은 도발이 이어진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 모른다.
그러니 북한의 내외상황과 체제, 지도층의 성격 등에 비추어 보면 그동안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불안정하나마 그런 대로 평화가 유지되어 온 그 자체가 이상하게 보일 지경이다. 특히 언제든 金正日 집단이 체제 유지의 한계상황에 이르는 절망적 상태로 밀렸을 때를 상상해 보면 그 도박적 남침을 억제할 만한 손실(loss)이라는 것이 과연 있기나 할지 의문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1994년 핵 위기 때는 카터 덕분에 전쟁을 면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페리 보고서에도 신경을 곤두세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1994년도의 경우 설사 미국이 북한의 핵 시설을 공격했다고 해서 전면전쟁으로 이어졌을 것이냐 하는 데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럴 때는 오히려 움츠러들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 우리가 충분히 대비하고 있을 그런 경우는, 설사 전면전이 된다 하더라도, 큰 어려움 없이 승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마 군인의 입장에서 제일 염려스러운 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치밀하게 잘 精製된 계획도 없이 막연히 봉쇄다, 압박이다 목소리만 높이는 「어설픈 강경론」일 것이다. 그럴 경우 막다른 골목에 이른 북한이 취할 행동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軍의 능력과, 효율적인 韓美(한·미) 연합체제에 비추어, 어떤 형태의 도발이든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승리할 수 있을 것으로 믿지만 저들의 先制(선제)일격을, 그것도 기습적으로 당할 경우는 결코 간단치가 않다. 전투는 군인이 하는 것이지만, 전쟁은 국민이 하는 것이다. 전투적 승리는 군인의 전투의지와 역량에 달려 있지만, 전쟁의 승리는 국민의 안보의지와 태세에 달려 있는 것이다.
방심하고 있는 우리 국민의 머리 위에, 느닷없이 대규모 항공 폭격과 화학 가스가 포함된 長射程(장사정) 야포, 미사일들이 쏟아져 내리고, 수만의 특수부대가 여기저기 곳곳에 흩뿌려질 때, 우리의 사회질서와 전쟁수행 체제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지, 그것부터가 의문스럽다. 그럴 경우에는, 최초 일격이 자칫 전쟁 전반을 결정적 파국으로 몰아갈 가능성도 없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일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할 것이다.
햇볕정책은 和戰 양면작전으로 이해해야
이같은 선제공격의 의지까지를 포함한 과감한 결단이 아니라면, 주한 러시아대사 아파나시에프가 『통일을 정말 원하거든 햇볕을 두 배로 쪼여주라』고 한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햇볕정책이든 포용정책이든, 일단은 저들의 무력도발 의지를 어루만지고 관심을 돌리게 해보는 것도 방법일 수가 있는 것이다. 개구리도 뜨거운 물에 집어넣으면 금방 튀어나와 버리지만, 냉수에 넣어놓고 서서히 가열하면 그대로 죽는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방법이 반드시 북한의 戰意(전의)를 약화시키고 그 銳氣(예기)를 무디게 하며 효과적인 전쟁 억제 방책이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아니지만, 예부터 현명한 전략가는 그 참뜻이 어디에 있든 통상은 和戰, 강·온 양면의 이중적 접근법을 활용해 왔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리도 국가 대전략을 수행함에 있어 어느 한 가지 수단에만 의존해 온 데 대해서는 다시 한번 심사 숙고하고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북한마저 항상 和戰 양면전략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주로 군사력에만 의존한 대결 위주의 단순하고 외로운 접근법이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非효율적이었던가 하는 것은 6·25 이후 지금까지의 북한의 挑發史가 증명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포용정책으로 북한의 도발의지와 예기를 둔화시키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군사대비태세를 더욱 튼튼히 하고 韓美안보협력 체제도 강화해 나가는 따뜻한 포용과 튼튼한 안보가 조화, 균형을 이루는 문자 그대로 안보와 포용의 병행정책을 시도해 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위협을 궁극적으로 종결하고 21세기 새로운 한민족의 시대를 열어나가는 첫 관문이 통일인데 그 통일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무력통일은 힘으로 한쪽 체제를 격멸해서 정치적 통일을 먼저 이룬 다음 그 주민의 머리 위에 강제로 원하는 체제를 덧씌워서 단일 국민으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고, 평화통일은 먼저 단일 국민을 만든 후에 그 역순을 밟아나가는 방법이다.
평화통일 정책은 바로 후자, 즉 화해와 협력을 통해서 평화롭게 공존 공영하면서 자연스럽게 북한도 우리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받아들이게 하고, 그럼으로써 마침내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자는 것이다. 물론 그러다 보면 시간도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통일의 부작용을 없애는 현명한 길이라는 것이 정부의 생각인 듯하다.
그런데 어떤 통일도, 특히 평화통일의 기회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오는 법이다. 우선 우리 자체 內의 통일 역량을 충분히 축적하고 확충해야 한다.
전투는 군인이 하지만 전쟁은 국민이 한다
통일 역량을 기르고 확충한다는 말은 산업 경제적 역량을 더욱 발전시키며, 통일 과업에 관한 汎국민적 공감대를 확산해서 사회적 정치적 역량을 기를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민족의 융합이 가능하도록 문화와 삶의 방식 그리고 사고의 통합 등을 위한 준비도 잘해서 통일을 위한 나라의 기본 역량을 확충하는 것 등을 뜻한다.
그중에서도 기본적인 것은 역시 안보 역량을 기르고 그 체제를 再정비하며 그 태세를 튼튼히 하는 일이고, 안보 태세 再정비의 핵심은 국민의 확고한 국가 방위의지, 안보의지를 끊임없이 북돋워 주고 提高(제고)하는 데 있다. 원래 어느 나라에서나 국민의 국가 방위의지는 그 나라 방위역량의 생명이다. 그것은 물질력이 목제의 칼집이라면 정신력은 날이 시퍼렇게 선 칼날이라는 클라우제비츠적 관점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전투는 군인이 하는 것이지만 전쟁은 국민이 하는 것이라는 보편적 진리에 근거해서 하는 말이다. 하기야 국민이 스스로 수호하고 지킬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국가라면 이미 존재할 가치조차 없는 국가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범국민적 방위 의지의 提高와 함께 韓美 연합방위태세, 韓美 안보우호협력 체제도 더욱더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원래 튼튼한 「韓美 안보협력 체제」는 「국민의 확고한 반공안보의지」 및 그런대로 강력한 「국군의 군사대비태세」와 함께 한국 안보 3大 지주의 하나로 기능해 왔는데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것이 급선무인 현시점에서 보면, 韓美 안보협력 체제야말로 우리 안보의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국군의 군사적 대비태세 역시 언제나 빈틈이 없어야 하고 그 역량도 통일상황에 맞게 再정비 강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는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 국민들 중에는, 심지어는 상당한 수준의 일부 사회 지도층 인사들까지도 남북 頂上회담이 이루어지고 나니까 당장 군비통제, 국방비 감축부터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회담이 성공적으로 잘 진행되더라도,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軍의 경계 태세는 오히려 더 날카로워져야 하고 우리의 총체적 안보 대비 역량도 더욱 강화 확장되어야 할지 모른다.
우리가 약하면 상대는 對話하지 않는다
일단 남북간의 문이 열리면 평화적인 것은 물론이지만 온갖 反평화적인 것, 국가안보 위협요소, 사회 교란요소들도 함께 넘나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안보 태세가 확고하고 튼튼해야 북한을 대화의 자리로 이끌어 낼 수도 있다. 북한이 최근 남북 頂上회담에 응하게 된 것도 연평해전을 통해서 증명된 바와 같이 오로지 군사력에만 의존한 무력 적화통일 전략의 한계를 느낀 때문일지도 모른다. 군사적 대결로 문제 해결이 어렵고 그것이 저들에게 유리하지 않다고 느낄 때 대화와 평화를 들고 나오는 것은 오랫동안 공산주의자들이 활용해 온 和戰兩面 전략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가 나라를 방위하는 데는 외국의 도움을 빌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민족 통일을 이루는 데는 우리 스스로의 힘 이외에는 기대할 곳이 없다. 그것은 1950년 한국동란의 결과를 통해 이미 뼈저리게 경험하고 확인한 사실이다.
바로 이 때문에 6공화국 당시 「한국 방위의 한국화」를 내세워 自主국방, 自力 국방태세를 갖추기 위해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작은 메아리조차 남기지 못하고 말았다.
통일을 추진할 수 있는 군사적 체제를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1990년대 초 우리는 제2창군의 기치를 내걸고 이른바 8·18 사업으로 알려진 국군의 일대 軍구조 개혁을 시도한 바 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의 평화 아닌 평화 속에서 행정 위주로 변질된 軍의 조직체계를 작전과 전투 위주로 개혁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최고 상급 지휘통제 체제를 단순화시켜 軍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것이기도 했지만, 핵심은 어디까지나 유사시 우리 자신의 독자적인 전쟁수행 체제, 자주적인 국가 방위 임무 수행체제를 확립하려는 데 있었다.
내세운 명분은 미래의 주한미군의 지위 변동 가능성 등 한국 방위의 한국화 추세에 대비한다고 했지만, 내심은 통일 정책의 일환이었다. 당시 북방정책으로 북한에 대한 중국과 舊소련의 지원을 차단하고 북한에 대해서는 남북 고위급회담 등을 통한 개방정책을 추진하면서 통일이 가능한 유사시기에 대응할 수 있는 군사적 대비태세를 함께 갖추려는 제법 웅장한 꿈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큰 꿈은 軍 내부의 이해 부족과 소극적인 자세, 그리고 특히 언론에서의 엉뚱한 오해로 용두사미가 되고 말았다. 원래 이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방대한 국방부, 각군 본부 등의 최상층 조직이 대폭 축소되고 계급구조도 下向(하향) 조정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軍 내부에서의 거부감은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작전통제권 단일화 작업 실패는 유감
軍의 거부감과 반발을 여론의 힘으로 설득하고 대응하려 하고 있었는데 천만 뜻밖에도 언론에서 이것이 당시 모 육군참모총장을 통합군사령관으로 승진시켜서 친위 쿠데타를 하려는 기도라는 턱도 없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반대하는 바람에 용두사미로 끝나고 지극히 불완전한 성과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도 내내 가슴에 남는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연합사로부터 평시 작전통제권을 찾아오고 계룡대에다 각군 본부 대신 合參(합참)과 연합사를 함께 위치시키려 했던 시도도 같은 맥락에서 추진된 사업이었다. 合參과 연합사의 위치를 再조정하려 했던 것도 냉철한 이성으로 국가 백년대계를 내다보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평화통일을 추구하려면 반드시 이루어졌어야 할 사업이었지만 이해당사자들의 거부감과 반발이 너무도 커서 실패하고 말았다.
다행히 평시 作統權(작통권)은 불완전하지만 비슷하게나마 뜻한 바대로 되어서 지난번 연평해전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실무 부서에서는 그 깊은 뜻과 意志에 대한 주의 깊은 省察(성찰)이 없이 협상을 쉽게 포기하는 바람에,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로 찾아온 당시 주한 美 대사 및 리스카시 연합사 사령관과 마주앉아 어렵사리 최종 담판을 마무리지었던 기억이 난다. 만약 이때 이나마도 되찾지 못했더라면 지난번 연평해전時에 융통성 있고 기민한 작전지휘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통상 과거의 경험에 종속되어 오늘의 군사력이 내일도 그대로 효율적일 것처럼 생각하거나, 통일과정에서의 軍의 역할과 모양은 생략한 채 통일 후의 軍 구조 연구를 즐기고 마치 그것이 장기 기획의 전부인 것처럼 간주해 버리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이런 경우들은 그 어느 것이든 軍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을 수가 있다. 자칫 軍의 발전을 정체시키거나 非현실적인 연구를 위한 연구로 시종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시기에 반드시 필요한 형태의 적정한 군사력을 준비할 수 없게 만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적어도 가까운 미래를 포함한 오늘 우리의 안보 현실은 여전히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의 위협에 직면해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또 그러면서도 장차 있을지도 모를 통일戰役(전역), 혹은 평화통일 과정에서 軍의 사명과 역할도 고려해야만 한다. 그리고 바로 이 통일戰役, 특히 평화통일 과정에서 필요한 軍은 그 구조와 전력의 성격들이 매우 특이한 형태로 고안되고 준비되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이런 다양한 가능성에 두루 대비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통일환경 만들려면 聯美, 親러, 得中, 友日이 필수
안보태세의 강화 못지않게 국민적 공감대의 확산을 통한 정치적 사회적 통일역량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다. 무릇 모든 정부의 시책은 국민의 공감대 위에 서 있어야 추진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동족간 이념 경쟁의 성격이 배제될 수 없는 남북문제, 특히 통일정책의 경우는 먼저 국민의 일치된 마음과 내부의 안정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상존하는 소위 인민해방전략의 위협을 극복하면서 통일정책도 여유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蔣介石(장개석) 총통이 제국주의 일본의 외침에 시달리면서도 먼저 국내 안정을 확립한 후에 일본의 침략에 대응한다는 「先 국내안정 後 對日(대일) 항전」 개념을 고수하다가 서안사변으로 그 정책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중화민국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던가 하는 역사적 사실은 他山之石(타산지석)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對北(대북)정책도 그 정책의 효용성 못지않게 정책 방향에 대한 범국민적인 이해와 일치된 공감대의 뒷받침 여부가 오히려 더 중요할 수가 있다. 이것이 효율적인 對北정책의 개발 못지않게 국민의 공감대 획득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까닭인 것이다.
한편 우리의 통일문제는 한반도의 문제인 동시에 국제문제이고 그렇기 때문에 통일을 위해서는 국제적인 안보환경의 조성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통일에 이상적인 국제적 통일환경을 만들려면 「聯美, 親러, 得中, 友日」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그 중심이 되고 제일 중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韓美관계,「聯美」라고 하는 과제이다. 한국 안보에 있어서는 生存(생존)의 문제이건 통일의 문제이건 미국과의 우호협력관계, 강력하고 튼튼한 韓美 안보협력 체제가 중요하다는 것은 어제 오늘 거론된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에 있어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억제하는 결정적인 세력으로서의 미국의 중요성은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당분간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이제 북한의 무력남침 위협이 없어졌으니(아니면 줄고 있으니) 주한미군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하는 주장이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남북관계와 韓美관계는 제로 섬(Zero Sum Game)이라고 서슴없이 단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韓美 우호관계와 최근의 남북관계 발전은 밀접한 상호 보완관계에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 오랫동안 우리의 튼튼한 국가안보 3大 지주의 하나로 기능해 온「韓美 우호협력 관계」가 잘 뒷받침되어 확고한 안보태세가 확립되어야만 남북관계도 보다 여유롭게 그러면서도 더욱 적극적이고 폭넓게 추진해 나갈 수가 있을 것이고, 그와 동시에 남북관계의 건전한 발전은 보다 합리적이고 균형잡힌, 미래 지향적 韓美 우호관계 발전의 바탕을 형성해 줄 것이다.
한반도 통일과정에 있어서도 외교, 군사,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우리의 통일을 실질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또한 한국이 아무리 통일되고, 통일 이후 국력이 강화되어도 짧은 시간 내에 하나의 독자적 세력으로 自立하기란 쉽지 않다. 이 경우에도 여러 가지 차원에서 미국보다 더 안전하고 확실한 전략적 제휴 파트너를 찾을 수는 없다고 본다. 일본마저도 그러한 인식하에 美日 안보협조체제를 강화해 나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이 韓美관계의 위상을 좀 끌어내리고 韓中관계를 끌어올려서 어느 정도의 균형을 이루려 하고 있고, 그 때문에 미국이 은근히 불편해 하고 전통적인 韓美 우호관계가 동요되고 있다는 일부 우려가 나오고 있다.
실제로 얼마 전 만났던 美 CSIS(국제전략문제연구소·Center for Strategic & International Studies) 랄프 코사(Ralph Cosa)는 한국이 지나치게 중국을 의식한다고 우려했다.
『달라이 라마는 온 세계가, 심지어 몽골까지 받아들이고 있는데도 한국은 중국이 「허용치 않는다」고 거부하고 있고 韓美日(한·미·일) 안보협력 체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하면 중국이 싫어할 것이라고 주저한다. 언제부터 한국이 이렇게 중국의 눈치를 보게 된 건지 모르겠다. 아마도 주한미군의 철수를 전제해 놓고 그 이후의 안보를 중국에 의존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반도에서 美·中의 비중이 달라져 가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는 것이었다.
중국은 北韓을 더 중시한다
이런 오해만은 풀어주어야겠다 싶어 설명을 했다.
『한국의 안보에는 두 가지 과제가 있다. 하나는 생존문제고 하나는 통일문제다. 중국과의 관계는 통일을 전제로 해서 중요한 것이고 미국과의 관계는 생존문제와 직결된다. 통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차원에서 중국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정도이지 現 단계에서 안보는 물론 경제·문화 등 모든 면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미국과 비교될 수는 없다. 한국이 지금 어떻게 미국과 중국을 바꿀 생각을 할 가능성이 있겠는가. 처음부터 비교가 안 된다』
랄프 코사는 물론 같이 있던 美 대사관 친구들이 다같이 좋은 지적이라면서 일단은 웃고 돌아갔는데, 최근 CSIS와 더불어 공동연구를 많이 한다는 어느 저명한 교수는 CSIS에서는 한국이 이미 국가안보의 방향을 중국 중심으로 돌려 잡았다는 결론을 내려놓고 있다고 한다. 우려할 일이다.
최근 주한미군과 우리 국민 사이에 전개된 다양한 심리적 갈등의 저변에도 이러한 미묘한 변화가 양측의 마음가짐에 준 영향이 적지 않은 듯하다. 한국 국민의 마음에 주한미군의 역할과 기여에 대한 이해와 공감은 줄어드는 반면 주한미군은 그들 나름대로 이러한 분위기를 피부로 느끼면서 불필요한 오해를 양산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말이다.
그 대신 중국과의 관계는 매우 부드러워진 것 같다. 최근 중국을 방문하는 한국 관리들에 대한 중국측의 환대는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될 정도로 융숭하다. 중국의 전통적인 손님 접대 방식이 그렇다는 말도 하지만 어쨌든 `1999년 趙成台(조성태) 국방부장관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는 물론이요, 지난 10월 필자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도 그 성의 있는 접대는 놀랄 정도였다.
외국 국방대학교 총장에게 중국 국방대학교 학생들에 대한 강의 기회를 준 것부터가 파격적이라 하는데, 여기에 장군 및 부성장급 등 최고위 과정 학생들까지 다 참여시켰다거나, 지호전 국방부장이 1시간 이상 오랜 시간을 할애해서 환담을 나눈 일 등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현지 주변의 반응이었다.
실제로 駐韓 중국대사가 가끔 내정간섭과 다름없는, 외교관으로서는 폭언에 가까운 발언으로 우리 국민의 자존심을 할퀴는 일이 더러 있지만 그 외에는 서로의 신뢰와 우호관계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우리 합참의장, 해군총장 등이 연속 중국을 방문하고 고위 군사교육관계자들 간의 교류도 늘어나는 등 마치 군사분야에서도 韓·中간의 新時代가 열리는 듯한 분위기마저 있다.
러시아의 對北 접근 경계해야
그러나 냉철히 살펴보면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기본 인식은 아직은 명확하다. 적어도 당분간은 중국 입장에서 한국의 비중이 북한보다 높아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저들의 외교적 전통이나 중국 현지에서 느끼는 남북한에 대한 공식적 처우의 차이, 그리고 이른바 三步走라는, 중국의 미래를 위한 국가 대전략 차원에서의 남북한 및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이해관계의 평가 등 어느 측면에서 보건 과거 신생 중국이 세계 GNP의 절반을 생산하던 세계 초강대국 미국과 일대 결전을 벌이게 했던 소위 「脣亡齒寒(순망치한)」的 中·北(북중)간 戰略的(전략적) 이해관계는 별로 변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최근 북한과 美·日의 접근에 대해 겉으로는 환영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속앓이를 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일이고, 필자가 지난 10월16일 중국 국방대학교에서 초청 강의를 할 때에도 중국 학생장교들이 빈번하게 질문한 가장 큰 관심사 역시 한국의 주한미군에 대한 정책방향이나, 미국의 NMD (National Missile Defense=국가 미사일 방어망), TMD(Theutre Missile Defense=지역 미사일 방어망) 추진에 대한 한국의 입장에 관한 것들이었다.
러시아와의 관계는 오히려 좀 쉬울 수가 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주한 러시아대사 아파나시에프는 『통일한국의 출현은 극동지역을 안정시켜 러시아의 안보에 유리하고, 시베리아의 개발을 촉진시킬 것이며, 경제적으로도 상호보완 관계이어서 러시아는 국익을 지키면서 한국의 통일을 지원할 것』이라고 했고, 모스크바의 한 연구소에서는 『러시아는 통일한국으로부터 얻을 것은 많아도 잃을 것은 없다』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러시아가 1999년 한국 정부의 애소에도 불구하고 십수명의 탈북 난민들을 중국으로 쫓아보내서 결국은 북한 정부의 손에 넘겨주는 냉혹한 조처를 취하고 북한과의 관계를 대폭 개선하고 있다.
지난 12월 초 서울을 방문한 안토니 토르쿠노프(Antony Torkunov) 러시아 국제관계대학 총장은 金正日 국방위원장이 2001년 초 봄쯤 러시아를 방문할 것이고 러·북관계는 점차 더욱 발전되어갈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러다 보니 탈북 난민들의 송환 직후 아파나시에프의 말은 좀더 시니컬한 데가 있었다.
『(한·러 간 수교) 초기에는 서로 간에 어떠한 환상이 존재했었던 듯한데, 이제 서로 현실을 직시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하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주변 4강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가장 순수하게 한국의 통일을 공감해 줄 수 있는 나라가 러시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30억 달러의 차관까지 제공해 가며 국교를 수립하고 관계 개선을 위해 공을 들여온 나라가 러시아인 것이다. 또 러시아는 그 이후 어쨌든 나름의 약속을 지켜서 오랫동안 북한에 대한 군사적 지원만은 자제해 온 나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이 러시아로 하여금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위상을 높이고 한국에 대한 외교적 지렛대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러·북관계를 개선시켜야겠다는 구차한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는지 조금은 의아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4者 회담 추진에 대한 러시아의 소외감이라든가, 여러 가지 러시아 나름의 국익차원의 계산이 있었겠지만 좀더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지금도 事大交隣은 필요하다
우리 통일외교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의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 전략적 이해관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갖고 있는 중국의 마음을 얻어내는 것, 得中하는 것이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닐 것이고, 뿐만 아니라 서로 대립 갈등관계에 있는 주변 나라와도 두루 적대시해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주변 각 나라들과의 개별적 우호관계보다 동북아에서의 多者間 안보협조체제의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예컨대 동북아에서도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 지역안보협조체제인, NATO와 같은 多者間 협조체제를 구축한다면 상당히 항구적인 국가안보 대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차원에서 안보관계 전문가들 중에는, 우리나라의 전통적 생존전략이었던 事大交隣 정책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객관적으로, 21세기 초반 美·中 간의 경쟁속에서 우리가 自衛(Self-defense) 역량을 확보할 수는 없으니, 미국과는 견고한 안보동맹을 유지하는 事大관계를, 나머지 러·중·일과는 긴밀한 우호협력관계를 유지하는 交隣관계를 추구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주변국과의 교린관계가 잘되면, 미국과의 딜링에서 우리가 희생하고 양보할 자주성의 범위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한다. 이래야만 정말로 우리나라의 미래 안보가 튼튼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유가 어디에 있건 이런 주변 4강국들도 포용정책에 대해서만은 다같이 환영하는 입장이다. 어쩌면 내심으로는 나라마다 제각기 다소의 차이는 있을 법도 하지만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반대할 수가 없는, 혹은 반대할 필요가 없는 성격의 정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이 어려운 통일외교를 헤쳐나갈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보게 되는 것이다.
南北관계의 본질은 경쟁관계
우리가 평화통일을 이루려면 무엇보다도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확산되어야 하며 남북한 온 한민족이 단일국가 단일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도 평화적으로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장기적 안목하에서 대전략을 세워 계획적이고 집요하게 추구해야 할 對북한 통일정책의 기본 방향일 것이다.
그런데 같은 시간 북한도 그들 나름대로 공산주의 체제를 한반도 전체에 확산시키고 전체 한민족을 공산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우리보다도 훨씬 더 적극적이고 그들이 활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려 들 것이다. 결국 우리는 북한과 또 다른 형태의 경쟁, 어쩌면 또 다른 형태의 전쟁이나 다름없는 게임을 전개하고 또 게임에서 승리해야 하는 것이다.
하기야 기본적으로 통일이라는 과제를 놓고 보면 모든 남북관계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경쟁관계일 수밖에 없다. 남북간의 모든 관계와 행위, 武力爭鬪는 물론이요 화해와 협력 심지어 평화를 위한 노력조차도, 궁극적으로는 南은 南대로 北은 北대로 서로가 상대방 주민의 마음을 얻고 어느 체제가 인간의 삶과 국가운영에 더 효율적인 방식인가를 인식시키기 위한 하나의 경쟁이자 게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통일한국의 체제를 결정하는 엄청난 경쟁이요 게임인 셈이다.
우리의 평화통일 정책도 이 특성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단지 폭력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에 의한 게임일 뿐이다. 평화적 방법이라야만 이 통일 게임을 勝者뿐인 윈윈 게임으로 이끌 수 있다는 차원에서 보면 이 방법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그리고 최선의 길일지 모른다. 6·15 선언도 따지고 보면 이 게임을 평화적으로 하자는 약속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평화적인 방법이 옳고 바른 길임에는 틀림없지만 군사적인 방법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현명한 정책과 정교한 정책수행의 지혜 그리고 강인한 의지가 뒤따라야 한다. 무엇보다도 아직은 북한이 무력 적화통일 의지를 포기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고 앞으로도 무력을 有用한 통일 방법으로 활용할 개연성이 있음을 고려하면서 對北 통일정책을 수행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북한통치체제는 배제 대상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對북한 정책의 불가피한 이중성이다. 민족 통일을 위한 세 가지 대전제를 두고 생각해 보면 북한의 통치체제는 어차피 배제되고 해체되어야 할 대결의 대상인 반면 모든 북한 주민 그 자체는 새로운 세기를 함께 개척해 나가야 할 화합과 협력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통일 노력도 바로 이 이중성을 고려하여 북한 통치체제에 대응한 국가통합의 노력과, 북한 주민을 향한 민족융합의 노력으로 구분된 두 가지 접근법으로 병행 추진되어야 한다.
국가 통합의 노력을 어떻게 전개해야 하는가. 여기서 그 수많은 아이디어와 수단들을 모두 거론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그것이 일단 북한 사회의 개방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어느 독재국가나 독재적 통치는 통상 정보통제에 기반을 두는 법인데 북한도 거기서 예외가 아니었다. 북한의 주민 통치방식은 정보통제로 북한 주민의 눈과 귀를 막아놓고 앞에서는 金日成의 카리스마로 끌고 나가면서 軍이나 사회 안전부 같은 국가적 폭력장치로 뒤에서 두드려 밀어나가는 형태로 통치해 왔던 것이다.
金德弘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북한은 『국가권력으로 조직화된 폭력과 사상적 독재를 잘 조합해서 군사 봉건주의라고나 할 완벽한 개인 군사독재체제』를 형성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만큼 더 철저한 정보통제에 근거하여 유지가 가능한 것이다.
그 정보통제 체제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북한 사회를 개방시키는 길밖에 없고, 북한 사회를 개방시키기 위한 효율적인 방법의 하나가 제6공화국 당시의 對北 개방정책이요, 지금의 햇볕정책의 아이디어인 셈이다.
이것이 무조건 불가능한 접근이라고 폄하할 수 없는 것은 이 개방의 길은 어차피 북한 스스로를 위해서도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좀 깊이 생각해 보면 그 길이 설사 체제유지에 다소 심각한 모험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가야 할 길인 것이다.
민족융화정책은 국가통합정책보다 중요
뿐만 아니라 이 시대는 군사력과 외교력뿐만 아니라, 경제 과학기술은 물론, 문화와 지식 등이 다같이 국가안보의 기능요소가 되는, 아니 지식과 정보가 오히려 더 중요한 국가안보 기능요소가 되는 「종합안보」의 시대이다. 오직 군사력에만 의존하는 국가안보는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舊소련도 견디지 못하지 않았는가. 북한도 이러한 21세기 정보화 사회의 특성을 이해하고 여기에 대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무작정 문을 닫아 걸고 군사력만 강조하면서 폐칩된 생활을 지속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며 어떤 방법으로든 미래사회의 새로운 환경에 효율적으로 적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개혁과 개방의 물결을 무조건 기피할 일이 아니라 체제의 특성을 고려하면서 그 효과를 달성할 수 있는 지혜롭고 창조적인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북한이 우리 한국과의 진지한 대화와 긴밀한 상호 협력을 통해서만이 그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포용정책은 북한 고위 당국자들에게는 한편으로는 위험한 칼날이 될 수 있는 동시에, 저들이 이제야 말로 換骨奪胎(환골탈태)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21세기의 삶을 정상적으로 살아 나갈 수 있는 마지막이자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북한 주민에 대한 통일 노력, 즉 국민 대화합, 민족융합정책의 수행은 국가 통합정책보다도 더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북한 주민들의 통일에 대한 거부감이나 불안감을 해소 또는 최소화하고, 나아가 직접 북한 주민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북한 주민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설사 북한체제가 붕괴되고 북한 지역이 無主空山(무주공산)이 되어도 그것이 민족통일로 연결된다는 보장이 없다. 동독 주민들이 서독과의 통합을 희망하지 않았더라면 독일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더 인내하고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오히려 남북관계가 너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데 대해 적지 않은 국민들이 당황해 하고 우려하고 있는 듯하다.
일반적으로 느끼고 있는 우리 국민의 의문과 불안은 대략 「남북관계 개선이 좋긴한데 너무 급하다, 너무 일방적으로 주기만 한다, 또한 그러면서 무엇 때문에 매일 끌려 다니기만 하는가, 더욱이 저들이 과연 무언가 달라지는 게 있기는 있는가, 북한은 하나도 변함이 없는데 우리만 국론분열과 안보체제의 동요를 초래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안보태세가 동요되고 韓美 관계까지 좀 묘하게 되어가니 이러다가 우리 사회가 자칫 잘못되는 게 아닌가, 북한은 여전히 赤化통일론을 굳게 하고 있고 金正日이가 통일 대통령까지 되겠다고 하는데 이러다가 장차 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등이다.
하루아침에 북한 바뀌기 바라는 것은 지나치다
그러한 우려의 저변에는 북한이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합의한 「평화적 경쟁」이라는 약속, 평화준수라는 기본 룰을 무시하고 무력 赤化 통일전략을 병행하고 있으며 혹시 우리 정부가 북한의 그러한 이중성을 가볍게 보다가 자칫 실수하는 것은 아니냐 하는 불안감이 내재하는 듯하다. 이러한 불안과 의구심들에 대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이해는 하지만 우리 체제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자신감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북한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만 변하고 있다고 우려하지만, 솔직히 통일의 기본방향을 놓고 보면 북쪽은 물론 우리도 변한 것이 없음은 마찬가지이다. 북한이 적화통일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우리는 언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포기한 적이 있으며 또 그것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북한이 적화통일 전략을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음을 수없이 강조하고 불만스러워 하지만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이루어진 몇 번의 대화로 북한이 저들 나름의 정책 기본방향이자 대전략을 포기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지나치다.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면 그런 사고 방식이야말로 정말 순진하고 나이브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북한이 이른바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적화통일을 위한 「연방제」로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단지 지금 이 시점에 그 문제부터 먼저 명확히 하자고 들면 서로 만나고 대화하는 것부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단은 북한으로부터 초기 단계 연방제안을 우리의 연합제안이나 비슷하다고 얼버무려 두고 있는 것이라고 양해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이것을 거부한다면 과거와 같은 남북 대결정책의 지속 이외에는 방법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미리부터 자기 체제를 포기할 것이며 또 게임도 해보기 전에 항복선언이나 다름없을 체제 포기를 말할 수 있겠는가.
남북관계의 진전이 너무 빠르다거나 끌려 다닌다거나 하는 우려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남북관계는 지금까지 진폭이 점차 커져가는 사인(Sign) 커브를 그려왔는데, 지금은 7·4 남북공동성명 때나 1992년 고위급회담 때보다 그 폭이 다소 클 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는, 또 우리 평화통일정책의 안정된 추진을 위해서는 가급적이면 가능할 때, 북한이 되돌아갈 수 없는 일정한 한계를 넘겨놓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우리 사회의 적응력이 생각 이상으로 뒤떨어져 있거나 통일정책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확보하고 일체감을 형성할 수 있는 정치 지도자들의 지도력이 미흡하다면 그에 대한 고려는 별도로 해야 할 것이다.
6·15 남북공동선언과 그 이후의 관계 발전이 준, 남과 북 양측 주민에 대한 충격도 양측 모두에게 다같이 엄청나게 크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만 영향을 준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개방사회이니까 그 충격을 직접 고스란히 받고 있고 그 영향도 적나라하게 눈에 보이는 반면 북한은 그에 관한 정보를 최대한 여과시켜서 내보내는 데다가 통제사회이니까 그 영향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親北 이념 확산은 心腹之患…
적극 대처해야
어차피 이런 과정은 같이 겪을 수밖에 없다. 바로 이것이 과거와는 또 다른 형태의 평화적 경쟁의 일부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런 정도의 충격은 충분히 흡수할 수가 있고 또 일부 부작용과 혼란이 있다 하더라도 논쟁하고 공론화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해소될 수 있지만 북한 체제는 일단 한 번 충격을 받으면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물론 최근 한국 사회 內에서의 이념적 혼란이 너무 크고, 공개된 혹은 사회 곳곳에 침투한 채 숨어 있는 親北勢力(친북세력)이 너무 확산되고 있으며 그 영향력이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다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많다. 실제로 진보요 혁신이요 하면서 知的 참신함을 자랑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결과적으로는 북한 체제를 고무시키고 우리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신념을 동요하게 만드는 데 집중되고, 또 이런 논리들이 TV나 매스컴에서 각광을 받으며 예상 외로 많은 젊은이들로부터 공감을 얻고 떠받들어지고 있음을 본다.
적지 않은 사회의 중견 혹은 지도층에서도 북한체제에 대한 공감까지는 아닐지라도 북한의 위협에 대한 인식은 엄청나게 약화되고 있음에 당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반대로 자유민주주체제에 대한 신념은 냉전적 思考로,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수호를 위해 노력하는 인사들은 극우 보수 반동으로 매도되며, 심지어 이를 위해 좀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인사들, 특히 북한체제의 허상을 벗겨서 한국사회에서 親北이념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백주 대낮에 테러나 다름없는 핍박을 받는 해괴한 경우까지 발생했다.
親北 공산세력에 대한 우려가 결코 杞憂(기우)가 아니며 그들이 우리 사회의 心腹之患(심복지환)이 되어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 사회 내의 理念문제에 대해 우리 모두가 좀더 진지하고 깊은 관심을 갖고 적극적이면서도 철저하게 대응해야 할 때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심과 노력을 전제한다면 이 문제 때문에 남북 관계의 발전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북한과의 체제 경쟁적 차원에서 본다면 아직은 좀더 여유를 가지고 대응해도 될 것이라고 믿는다. 단지 우리 사회에 대한 위협에는 그에 따른 대응책의 강구를 병행해야 할 것이라는 어려움은 있겠지만 이런 정도의 어려움은 남북 간의 모든 문제, 모든 정책 수행에 있어서 똑같이 겪어야 될 어려움이 아닐까 싶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오히려 이런 혼란을 겪고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모든 과정들이 결국은 우리 사회를 더욱 성숙시켜서 장차 본격적인 통일경쟁 시대의 승리자가 되게 하고, 장차 세계화의 시대, 지구촌의 시대에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건강한 힘을 길러주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특히 남북 군사회담은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지혜롭고 효율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여러 가지 채널로 진행중인 남북 회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평화와 화해 협력이 남북관계의 두 축이요, 두 개의 수레바퀴와 같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아는 사항인데 평화라는 한쪽 수레바퀴는 구르지 않고 다른 한쪽 수레바퀴만 열심히 굴러가려 하는 모양은 결코 자연스럽지가 않다.
북한의 체제는 인민무력부와 정무원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서 아무리 장관급 회담이나 경제 분야 교류가 잘되고 우리 국정원과 김용순 라인이 잘 가동되어도 그것이 바로 군사 회담의 발전으로 연계되기는 어려울 수가 있다. 우리는 흔히 인민무력부가 정무원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민무력부는 정무원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정도로 이해해 왔지만, 북한 군부의 인식은 사뭇 다른 듯하다. 오히려 북한의 체제적 중심은 군부로서 그들이 정무원보다도 한 차원 높이 앉아 있고 정무원은 그들을 옹위하고 떠받드는 지원기구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오죽하면 지난번 김용순 방문시 남북 국방장관회담 개최를 「환영한다」는 식으로 표현했겠는가. 그러니 군사회담을 잘 이끌어 내고 발전시켜 나가려면 군사분야에서의 별도 노력이 필요하다. 미국과도 군사적 채널의 협의를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하고 러시아와도 협조하며 나아가 필요하다면 北京(북경)의 지호전 국방부장을 활용해서 북한을 설득한다든가 하는 등의 적극적인 방법으로 저들을 이끌어 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싸움
또 협상과정 그 자체도 좀더 여유 있게 그러나 끈질기게 계획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 북한은 소수 「회담 전문가」 그룹에 회담의 기획, 운영 등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다. 이찬복 중장은 몇 십 년 판문점에만 있었고 1992년 회담 때의 박림수가 지금도 앉아 있다. 문자 그대로 프로인 것이다. 그 반면 우리는 항상 새로운 인물이 새로운 개념을 가지고 새로운 방법으로 접근한다. 자칫 잘못하면 프로와 아마추어의 대결이 되기 쉬운 것이다.
북한이 오랜 시간의 경험을 가진 소수 전문가 집단으로 나온다고 보면 우리는 잘 조직된 시스템과 우수한 인재들의 팀플레이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자면 결국 남북 군사회담에 관한 우리의 대비 체제와 준비는 가급적 빨리 그리고 획기적으로 再정비·강화되어야 한다. 지난번 장관회담 참여의 경험으로 보면 회담의 기획, 전략, 운영, 지원, 對外협조 관계 등 모든 면에서 대폭적인 조직의 정비와 개혁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국방부에서 합참차장 제도의 부활을 시도하다가 국방장관회담이 언제 열릴지, 특히 군사위원회가 언제 구성될지도 모르는 판에 무슨 대장 진급인가, 爲人設官 아니냐 하고 언론에서 들고 일어나고 국회에서까지 문제가 되는 바람에 없었던 일로 취소되고 말았다.
그러나 남북 군사회담을 안 한다면 모르지만 어차피 해야 할 것이고 해야 한다면 시급히 국가 대전략 차원에서 큰 안목을 갖고 진짜 인재를 모으고 시스템을 재정비해서, 북한을 어떻게 이끌어 내고 회담을 어떻게 운영하며 무엇을 어떻게 합의해 낼 것인가, 또 회담 후에는 미국, 중국 등 주변국에는 어떻게 설명하고 그 회담의 효과를 어떻게 극대화할 것인가 등에 대한 계획을 잘 세워, 철저히 대비할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적어도 반년 이상의 준비 기간은 소요될 것이다.
북한이 달라지기는 달라졌다
북한은 수십 년 준비해 오고 있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이 남북 군사회담장이라고 하는 곳은 총소리만 나지 않을 뿐 또 하나의 戰場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남북 군사회담이라고 하는 평화적 싸움터에서 평화적 戰爭에 승리하려면 바로 이 싸움터에 맞는 준비와 노력을 해야 한다. 이 평화적 전쟁의 결과도 血戰에서의 승패 이상으로 우리 민족의 운명에 중요한 영향을 줄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정책적 입장이나 태도가 달라졌느냐 하는 문제는 아직 확정적으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계제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듯이 지금까지는 주로 말뿐이고, 행동이 믿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뒤따라 온 것이 아닌데다가 특히 안보, 군사문제에 있어서는 진전이 더욱 늦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라졌다고 볼 수 있는 근거도 더러 있다.
적어도 이번 협상에 임하는 북한의 태도 그 자체는 과거와는 확실히 달라졌다. 솔직히 1992년 남북 고위급회담時의 북한의 태도는 무언가 합의하고 이루려는 것보다는 그저 말싸움이나 하러 나왔을 뿐인데, 이번에는 그래도 제법 진지한 면모가 있었고 태도도 유연했다(그때는 우리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그래서 몇 가지 합의 사항도 만들어 냈다. 그것을 제대로 실천할 것인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지만, 과거처럼 합의의 내용이 화려하지 않은 대신 실천 가능성은 높다고 본다.
북한을 일상적으로 상대하고 있는 남북관계 실무담당자들도 저들의 태도가 무언가 변하고 있다는 말들은 곧잘 한다. 무엇보다도 불필요한 「억지」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특히 한국을 한번이라도 방문했던 사람들은 완연히 다르고 심지어 판문점 남측 지역이라도 한번 밟아본 사람은 무엇이 달라도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더 저들을 이끌어 내고 저들의 눈을 뜨게 해주고 귀를 열어주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곧잘 북한의 태도가 경직되어 있다고 강조하고 또 그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이번 회담에서 보면 우리 역시 그리 유연하고 합리적인 것만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필자가 판문점에서 북한 김일철 부장을 영접할 때 경례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좋아하던데 이 경례문제만 해도 그렇다. 우리는 敵將에 대한 경례는 항복의 표시라느니, 국민정서가 용납하지 않는다느니 등 별별 이유들 때문에 그 누구도 북한 대표들은 물론 김일철에게도 경례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북한 장성에게 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서인지 삼성장군인 내게도 경례하는 군인이 별로 없었다. 좀 민망할 때도 있었을 정도다.
그 반대로 북한측은 일부 대령들이 우리 장관님에게 경례를 하고 북한 대표팀이 돌아갈 때 판문점에 영접 나왔던 북한의 어느 대좌도 내게 경례를 하고 들어갔다. 일부 국방부 기자들 중에는 국제관례에 따라야 한다고 하고 심지어는 의장행사까지 해주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는데도 말이다.
물론 군인의 경례란 민간인들의 일상적 인사와는 좀 성격이 다른 측면이 있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만남의 예의 표시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더욱이 武人이란 결투를 앞두고도 서로 예의부터 표시하는 법이고, 또 이때는 싸우자고 오는 것이 아니라 웃고 잘 지내자고 오는 사람들이 아닌가. 이들에게 결례를 한 셈이니 우리가 저들에게 큰소리 칠 것도 별로 없다는 말도 일리가 있는 것이다.
부시 등장은 남북관계에 도움될 수도
2000년 말 조명록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미국을 방문하고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金正日과 함께 호전적인 것으로 유명한 북한의 집단체조를 관람하는 등 美·北관계가 급진전되면서 남북관계가 소강 상태에 빠지는 것처럼 보였는데 여기에 대한 분석도 사람마다 조금씩은 달랐다.
비관적인 견해는 북한이 처음부터 경제관계는 한국을 이용하되, 안보관계는 미국과 직거래하려고 하는, 그래서 이른바 通美封南 정책을 추진해왔으니, 이제 美·北관계가 저렇게 개선되면 우리 남측과의 관계 개선 노력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추정이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미국이 對한반도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있기 어려운 일이다. 물론 근본적으로 미국은 한반도의 안정(Stablility)을, 한국은 넓은 의미에서의 안전(Security)을 추구하기 때문에 韓美간의 안보상 국가 이익이 완전히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현 단계에서 미국이 남·북한을 바꾸어서 잃을 것은 많아도 얻을 이익은 별로 없다고 본다. 그러니 적어도 당분간은 그런 가능성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다가 부시 행정부의 등장이 확실시되면서 이번에는 정반대되는 이유로 남북관계의 지연과 교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공화당의 對한반도 대응양식이 민주당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페리 보고서를 두고도 부시의 참모들은 클린턴 행정부가 화해 중심의 1단계에만 중점을 두고 견제 중심의 2단계에 대해서는 준비할 의사조차 갖고 있지 않다고 비난하고 있고, 민주당은 金大中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해 철학적으로 동조하고 있지만 공화당은 그저 현실적 代案이 없어서 바라보고만 있는 상태라고 차별화하고 있다. 이런 시각은 국내외 학자들 사이에 큰 차이가 없는 듯하다.
장기적으로는 역시 위에서 말한 일반적인 우려가 더욱 현실적일 듯하다. 어떤 在美 학자는 부시 정부가 한국에 대해 북한의 군사력을 증강시킬 가능성이 있는 조치, 예를 들면 현금이 북한 정부로 흘러 들어가는 조치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엄격히 자제해 줄 것을 요구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어찌되었건 북한에 대한 새로운 부시 정부의 시각과 정책이 클린턴의 그것과는 달라질 것이 거의 틀림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부시 행정부의 등장도 클린턴 정부하에서의 美·北 관계개선과 같이 반드시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어느 한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단기적으로는 오히려 긍정적일 수도 있다.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버리게 하고 적어도 당분간은 더 한국 정부에 대한 의존(이용한다고 생각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이 불가피함을 인식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새해의 남북관계는 순탄치만은 않을 것
그런데다가 북한의 태도 역시 변화하고 있는 조짐이 있다. 사실 6·15 남북공동성명 이후 북한 金正日 위원장 입장에서는 나름으로 상당한 모험을 시작한 셈인데 그가 과연 앞으로 얼마나 끈질긴 인내심을 가지고 남북대화를 지속할 것인가 하는 데는 상당한 의문이 있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비롯한 최근 북한측의 태도와 행보를 보면 이미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피곤해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없지 않다.
이런 여러 가지 사항들이 겹칠 때 앞으로의 남북관계는 상당한 진통과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럴 때 북한이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부시 정부와 한국 정부 간의 북한에 대한 시각차를 해소시켜 준다면 상당한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도 별로 기대하기 어렵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모스크바에서는 金正日 위원장이 2001년 초 봄에는 러시아를 방문할 것으로 믿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金正日의 2001년 초 서울 답방은 불가피하게 많이 늦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북한이 對南관계를 조절하려고 무언가 계산을 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적지 않은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남북관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한국 內에서는 북한 당국자들의 신뢰성 문제가 또 다시 제기될 것이고 한국 정부의 對北정책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는 더욱 엷어져 갈 것이며 다시 한번 국민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
어쨌든 장·단기 어느 측면에서 보건 앞으로의 남북관계가 지난 한 해처럼 순풍에 돛 단 듯이 잘 진행되어 갈 것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남북관계의 발전에 많은 것을 의존해 온 정부로서는 매우 어려운 시기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러나 민족통일을 앞당기려면 어차피 남북관계는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데는 변함이 없고 정부는 장기적인 안목하에 더욱 더 적극적으로 남북관계를 유연하게 지속적으로 잘 이끌어 나갈 필요가 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국가와 민족의 먼 미래를 보는 길고 큰 안목과 창조적인 지혜가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가 있다. 본질적인 문제이면서도 숨겨져 있는 더 큰 문제인데 그것은 북한의 변신 노력이 성공하면 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안보상 우리가 경계하고 유의해야 할 과제는 더욱 더 커질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金正日 위원장이 이번엔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하는 듯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 모험이 과연 성공할 것인가 하는 데 많은 의문이 남는다.
어떤 경우도 우리 안보태세 더욱 강화해야
그동안에도 북한은 자본주의 바람은 막으면서 실리만 취한다는 부분적, 제한적 개혁, 소위 방충망식 개방을 시도해 왔었지만, 크게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번에도 아직은 북한의 개방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설사 개방하고 개혁하려 한다고 해서 과연 「무엇을」 「얼마나」 이룰 수 있을지 명확히 알 수가 없다. 黃長燁씨를 비롯한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頂上회담을 하면서도 정치적 사회적으로는 그 폐쇄성을 철저히 유지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설사 다소 적극적으로 개혁 개방 정책을 유지해 나가려 한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남북간의 경쟁적 본질은 변함이 없을 것이고 이런 평화적 형태의 경쟁이 어느 체제에게 더 유리하겠는가는 불문가지이기 때문이다. 북한체제는 전쟁을 위한 체제이지, 평화적인 경쟁을 위한 체제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다가 지금 저들은 유치원 때부터 「美帝의 각을 뜨자」고 교육하면서 세계 인류의 모든 악의 화신처럼 선전하던 「美 제국주의자」들까지 끌어들이고 있으니 과연 그 엄청난 충격을 제대로 관리해 낼 수 있을지 그것부터가 의문이다.
더욱이 북한에서는 하나에서 열까지 金正日의 직접 지시나 결심이 있어야 된다는데, 정작 金正日은 군사위원장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단순히 지배하고 있을 뿐, 직접 관장하지는 않는다 하니, 그런 체제와 그런 자세로 무엇을 이루어 낼 수 있겠는가. 또한 근본적으로 舊소련을 붕괴시킨 정보화의 물결을 북한이 과연 성공적으로 극복해 낼 수가 있을 것인가. 아직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요, 낙관하기 어려운 것들뿐이다.
이러니 잠시는 몰라도 결국은 또다시 체제유지의 한계상황에 부딪치게 될 가능성이 많아 보이는데, 이때 북한이 무엇을 하려 할 것인가? 이것이 마지막까지 남는 우려의 실체인 것이다. 결국 과거부터 우리가 우려해 온 진짜 위협은 아직도 상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안보와 포용의 二重 전략 병행
우리가 군인으로서 우려하는 점도 바로 이런 것들이다. 철저한 개인 군사독재체제하에서 저들의 지도자가 지금까지 알려져 온 바와 같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인간적 특성을 두루 갖추고 있고 손쉬운 승리까지 믿고 있다고 하면 절대 절명의 결정적인 때에 무력남침으로 「乾坤一擲(건곤일척)」의 일대 도박을 시도하려 들지 않겠느냐 하는 우려인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포용정책과 튼튼한 안보의 실질적인 병행을 거듭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의 미래 안보를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데서 오히려 안심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종합적으로 잘 살펴보면 우리에게 있어 이 21세기는 문자 그대로 엄청난 도전과 시련, 그리고 거대한 민족사적 기회와 희망이 혼재하는 지극히 복잡하고 역동적인 시대이다.
그러나 미래는 기다리고 맞이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만들고 가꾸어 나가는 자의 것이라고 한다. 도전과 위협은 철저히 극복하고 희망과 기대는 반드시 성취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21세기 통일번영의 새 시대 문턱에 서 있는 현 시점 포용정책의 아이디어 자체는 우리가 민족의 미래를 위해 일단 한번은 제대로 시도해 보아야 할 방법이라는 것만은 틀림이 없을 듯하다.
21세기 정보사회의 안보환경에 비추어 보아도 어차피 이제는 군사 일변도, 대결 일변도의 정책은 再검토되어야 할 때가 되었고, 국가 대전략의 큰 차원에서 보면「안보와 포용의 병행」이라고 하는 이중적 접근이 더욱 효과적이고 합리적일 것이라는 것은 대체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단지 거듭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 안보와 포용정책의 「균형」, 그 「병행추진」의 의지와 안목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남북관계의 본질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통일정책 수행에 있어서의 대전제가 되는 원칙에 대한 신념이다. 상황이 힘겹고 혼란스러울수록 더욱 더 본질을 살피고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모름지기 큰 지혜는 바른 길, 正道에 있고 개인이건 국가이건 바른 길이야말로 큰길, 大道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량 압도적이어야 불공정 게임에서 이긴다
더욱이 지금의 이 통일 게임은 다소 불공정하고 어느 한편에 편파적인 룰과 규정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일부에서는 그 불공정성, 불공평성이 너무 과하다는 불평도 있고 심지어 그 때문에 승패가 억울하게 잘못 뒤바뀌면 어떻게 하나 하고 불안해 하는 사람들도 없다. 그러나 어차피 이 게임은 그 속성상 어느 정도의 불공정성, 편파성은 양해해 줄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게임 자체가 진행될 수 있는 그러한 게임이다. 그래서 더욱 더 인내와 끈기 그리고 포용정책이 강조되고 있는 게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게임이 비록 평화적인 싸움이고 다소의 불공정성을 감수해 준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 게임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아무리 평화적인 전쟁, 평화적 게임에 있어서는 우리 체제가 북한 체제보다 상대적으로 유리하고 효율적이라 하더라도 이 큰 게임에서 만에 하나라도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쩌면 오늘의 바로 이 싸움이 우리 민족의 미래 운명을 결정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소는 일방적으로 불리할 수도 있는 불공정한 룰과 편파적인 게임 운영을 감수하면서 승리를 일구어 내려면 우리의 전략적 지혜와 정부의 체제, 그리고 게임 운영의 역량면에서는 북한을 일방적으로 압도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더욱 더 국민의 공감대를 다져서 汎국민적 의지를 하나로 모으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해서 흔들림이 없게 해야 한다. 군사적 대비태세에도 소홀함이 없게 하며 韓美 안보협력체제도 튼튼하게 관리하는 등 안보태세도 끊임없이 점검하고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은 과거 우리의 선배들이 피흘려 싸우지 않았더라면 오늘 북한 주민의 저 비극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듯이 오늘 우리가 이 기회를 놓치고 또 한 세대를 보내버리면 북한 주민의 저 참상이 내일 우리의 아들 딸들의 모습이 아니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설사 어찌 어찌 해서 그러한 비극적 종말은 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 민족의 역사는 세계사의 흐름에 낙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1945년 경남 거창 출생. 육사·서울대 외교학과·美 육군대학원 졸업. 맹호사단장·수도군단장·1군 부사령관·국방대 총장역임. 盧泰愚 정부 시절 남북고위급회담 군사분과위 차석대표, 2000년 남북 국방장관 회담 차석대표 역임. 저서로 「生動하는 軍을 위하여」 「21세기 한국안보」 등.
金熙相 장군은 육사 24기 출신으로서 한국군의 대표적인 학구파 전략전문가이자 지휘관 경력 또한 연대장, 사단장, 군단장 등 빠짐이 없다. 盧泰愚(노태우)의 6공화국 때와 金泳三(김영삼)의 소위 문민정부 시절 6년에 걸쳐 청와대 국방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818계획 등 군 구조개편을 주도했고 율곡사업 등 무기도입 사업에도 관계했다. 하나회(사조직)에 들어오라는 권유를 뿌리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시절엔 지역성을 타파하고 공평한 인사에 노력했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또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으며 盧泰愚 정부 시절의 남북고위급 회담 때 군사분과위원회의 차석대표, 지난해 남북 국방장관회담 때는 차석대표로 일했다.
정보화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고전적 國家安保(국가안보)의 의미가 달라지고 있다. 정보사회의 전략 환경이 엄청나게 변화해서, 국가안보도 이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메커니즘에 의해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국가안보는 대체로, 군사력을 기본으로 하되 외교적 역량이 또 한 축을 이루고, 그 외 다른 요소들이 일종의 배경을 형성하는 형태였다. 이제는 그러한 요소 외에 경제는 물론 지식(정보), 과학기술, 그리고 문화와 같은 다양한 기능과 요소가 존재하며 이들을 다함께 한눈으로 보고 분석, 총체적으로 대책을 강구해야만 하는 綜合安保(종합안보)의 시대가 된 것이다. 국가안보가 군인들만의 과업이 아니라 국가전체, 온 국민의 과업이 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종전과 같은 냉전체제는 무너졌다고 하지만, 미국의 세계경찰국가화, 중국의 초강대국화, 러시아의 와신상담, 일본의 영향력 증대와 더불어 남북한으로 이어지는 6각 구도는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다. 여기에 북한 미사일이나 핵문제까지 끼어들면 그것은 바로 한반도의 아마겟돈 상황을 뜻한다고 우려하는 이들이 있다.
이러한 시대적 특수 상황하에서 우리가 나라의 안전을 지키고, 민족번영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해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절대로 전쟁은 막아야 한다.
우리가 또다시 6·25와 같은 동족상잔의 민족적 비극을 겪게 된다면 이제는 인류 역사의 主流(주류)에서 영원히 배제된 미미한 민족으로 도태되어 버리고 다시 살아남을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외의 다양한 군사적 도발들도 막아야 한다. 그래야 경제도 살 수가 있고 국가의 사회적 문화적 역량도 길러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정말로 민족통일을 서둘러야 한다. 단순히 우리 민족의 염원이라는 감상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강대국 위주의 제한 주권시대요, 민족이라는 단어가 단순한 情緖(정서)상의 의미를 넘어서, 국제사회 생존 단위의 하나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이 시대에 한민족이 살아남으려면 그 길밖에 없다.
우리 민족의 통일노력에는 몇 가지 大前提(대전제) 조건, 지켜야 할 원칙이 있어야 한다.
첫째는 또다시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둘째는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인류가 현재까지 찾아낸 최선의 체제라고 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반드시 수호되고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셋째 궁극적으로는 우리 민족의 번영과 복지의 확충에 기여하는 형태의 통일이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이 세 가지 원칙에 충실하자면 우리의 통일은 勝者(승자)는 있어도 敗者(패자)는 없는, 설사 敗者가 있더라도 그 손실과 충격을 최소화하는 그런 통일이 바람직하다. 이른바 윈윈(win-win)게임 형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만 統一(통일)의 후유증을 최소화하고 통일과정에서 폭발적으로 분출할 민족적 에너지를, 21세기를 헤쳐나가, 한민족의 번영하는 새 시대 개척의 에너지로 직결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 전쟁을 억제해야 한다는 이것부터가 별로 쉽지가 않다. 우리는 그동안에도 군사력을 정비하고 안보태세를 강화하는 등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정책은 주로 「너 죽고 나 살기」 식의 이데올로기적 대결 위주의 정책이었고 그것만으로는 북한의 무력 도발을 100% 억제할 수가 없었다.
6·25 이후 북한의 전면 남침은 없었지만, 1·21 사태, 울진·삼척 공비사건, 아웅산 테러, KAL기 폭파, 강릉 잠수함 침투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참아서 그렇지, 전쟁을 선포해도 좋을 사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어설픈 강경론이 더 위험
왜 그랬을까? 성공만 한다면 얻을 수 있는 열매가 너무 커서 그러한 모험을 억제할 만한 손실을 찾기가 거의 불가능했다는 데 있을 것 같다. 손실을 인식시키려면 단호하고 철저한 응징 보복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했으니 북한의 크고 작은 도발이 이어진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 모른다.
그러니 북한의 내외상황과 체제, 지도층의 성격 등에 비추어 보면 그동안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불안정하나마 그런 대로 평화가 유지되어 온 그 자체가 이상하게 보일 지경이다. 특히 언제든 金正日 집단이 체제 유지의 한계상황에 이르는 절망적 상태로 밀렸을 때를 상상해 보면 그 도박적 남침을 억제할 만한 손실(loss)이라는 것이 과연 있기나 할지 의문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1994년 핵 위기 때는 카터 덕분에 전쟁을 면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페리 보고서에도 신경을 곤두세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1994년도의 경우 설사 미국이 북한의 핵 시설을 공격했다고 해서 전면전쟁으로 이어졌을 것이냐 하는 데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럴 때는 오히려 움츠러들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 우리가 충분히 대비하고 있을 그런 경우는, 설사 전면전이 된다 하더라도, 큰 어려움 없이 승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마 군인의 입장에서 제일 염려스러운 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치밀하게 잘 精製된 계획도 없이 막연히 봉쇄다, 압박이다 목소리만 높이는 「어설픈 강경론」일 것이다. 그럴 경우 막다른 골목에 이른 북한이 취할 행동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軍의 능력과, 효율적인 韓美(한·미) 연합체제에 비추어, 어떤 형태의 도발이든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승리할 수 있을 것으로 믿지만 저들의 先制(선제)일격을, 그것도 기습적으로 당할 경우는 결코 간단치가 않다. 전투는 군인이 하는 것이지만, 전쟁은 국민이 하는 것이다. 전투적 승리는 군인의 전투의지와 역량에 달려 있지만, 전쟁의 승리는 국민의 안보의지와 태세에 달려 있는 것이다.
방심하고 있는 우리 국민의 머리 위에, 느닷없이 대규모 항공 폭격과 화학 가스가 포함된 長射程(장사정) 야포, 미사일들이 쏟아져 내리고, 수만의 특수부대가 여기저기 곳곳에 흩뿌려질 때, 우리의 사회질서와 전쟁수행 체제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지, 그것부터가 의문스럽다. 그럴 경우에는, 최초 일격이 자칫 전쟁 전반을 결정적 파국으로 몰아갈 가능성도 없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일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할 것이다.
햇볕정책은 和戰 양면작전으로 이해해야
이같은 선제공격의 의지까지를 포함한 과감한 결단이 아니라면, 주한 러시아대사 아파나시에프가 『통일을 정말 원하거든 햇볕을 두 배로 쪼여주라』고 한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햇볕정책이든 포용정책이든, 일단은 저들의 무력도발 의지를 어루만지고 관심을 돌리게 해보는 것도 방법일 수가 있는 것이다. 개구리도 뜨거운 물에 집어넣으면 금방 튀어나와 버리지만, 냉수에 넣어놓고 서서히 가열하면 그대로 죽는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방법이 반드시 북한의 戰意(전의)를 약화시키고 그 銳氣(예기)를 무디게 하며 효과적인 전쟁 억제 방책이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아니지만, 예부터 현명한 전략가는 그 참뜻이 어디에 있든 통상은 和戰, 강·온 양면의 이중적 접근법을 활용해 왔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리도 국가 대전략을 수행함에 있어 어느 한 가지 수단에만 의존해 온 데 대해서는 다시 한번 심사 숙고하고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북한마저 항상 和戰 양면전략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주로 군사력에만 의존한 대결 위주의 단순하고 외로운 접근법이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非효율적이었던가 하는 것은 6·25 이후 지금까지의 북한의 挑發史가 증명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포용정책으로 북한의 도발의지와 예기를 둔화시키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군사대비태세를 더욱 튼튼히 하고 韓美안보협력 체제도 강화해 나가는 따뜻한 포용과 튼튼한 안보가 조화, 균형을 이루는 문자 그대로 안보와 포용의 병행정책을 시도해 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위협을 궁극적으로 종결하고 21세기 새로운 한민족의 시대를 열어나가는 첫 관문이 통일인데 그 통일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무력통일은 힘으로 한쪽 체제를 격멸해서 정치적 통일을 먼저 이룬 다음 그 주민의 머리 위에 강제로 원하는 체제를 덧씌워서 단일 국민으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고, 평화통일은 먼저 단일 국민을 만든 후에 그 역순을 밟아나가는 방법이다.
평화통일 정책은 바로 후자, 즉 화해와 협력을 통해서 평화롭게 공존 공영하면서 자연스럽게 북한도 우리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받아들이게 하고, 그럼으로써 마침내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자는 것이다. 물론 그러다 보면 시간도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통일의 부작용을 없애는 현명한 길이라는 것이 정부의 생각인 듯하다.
그런데 어떤 통일도, 특히 평화통일의 기회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오는 법이다. 우선 우리 자체 內의 통일 역량을 충분히 축적하고 확충해야 한다.
전투는 군인이 하지만 전쟁은 국민이 한다
통일 역량을 기르고 확충한다는 말은 산업 경제적 역량을 더욱 발전시키며, 통일 과업에 관한 汎국민적 공감대를 확산해서 사회적 정치적 역량을 기를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민족의 융합이 가능하도록 문화와 삶의 방식 그리고 사고의 통합 등을 위한 준비도 잘해서 통일을 위한 나라의 기본 역량을 확충하는 것 등을 뜻한다.
그중에서도 기본적인 것은 역시 안보 역량을 기르고 그 체제를 再정비하며 그 태세를 튼튼히 하는 일이고, 안보 태세 再정비의 핵심은 국민의 확고한 국가 방위의지, 안보의지를 끊임없이 북돋워 주고 提高(제고)하는 데 있다. 원래 어느 나라에서나 국민의 국가 방위의지는 그 나라 방위역량의 생명이다. 그것은 물질력이 목제의 칼집이라면 정신력은 날이 시퍼렇게 선 칼날이라는 클라우제비츠적 관점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전투는 군인이 하는 것이지만 전쟁은 국민이 하는 것이라는 보편적 진리에 근거해서 하는 말이다. 하기야 국민이 스스로 수호하고 지킬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국가라면 이미 존재할 가치조차 없는 국가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범국민적 방위 의지의 提高와 함께 韓美 연합방위태세, 韓美 안보우호협력 체제도 더욱더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원래 튼튼한 「韓美 안보협력 체제」는 「국민의 확고한 반공안보의지」 및 그런대로 강력한 「국군의 군사대비태세」와 함께 한국 안보 3大 지주의 하나로 기능해 왔는데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것이 급선무인 현시점에서 보면, 韓美 안보협력 체제야말로 우리 안보의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국군의 군사적 대비태세 역시 언제나 빈틈이 없어야 하고 그 역량도 통일상황에 맞게 再정비 강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는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 국민들 중에는, 심지어는 상당한 수준의 일부 사회 지도층 인사들까지도 남북 頂上회담이 이루어지고 나니까 당장 군비통제, 국방비 감축부터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회담이 성공적으로 잘 진행되더라도,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軍의 경계 태세는 오히려 더 날카로워져야 하고 우리의 총체적 안보 대비 역량도 더욱 강화 확장되어야 할지 모른다.
우리가 약하면 상대는 對話하지 않는다
일단 남북간의 문이 열리면 평화적인 것은 물론이지만 온갖 反평화적인 것, 국가안보 위협요소, 사회 교란요소들도 함께 넘나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안보 태세가 확고하고 튼튼해야 북한을 대화의 자리로 이끌어 낼 수도 있다. 북한이 최근 남북 頂上회담에 응하게 된 것도 연평해전을 통해서 증명된 바와 같이 오로지 군사력에만 의존한 무력 적화통일 전략의 한계를 느낀 때문일지도 모른다. 군사적 대결로 문제 해결이 어렵고 그것이 저들에게 유리하지 않다고 느낄 때 대화와 평화를 들고 나오는 것은 오랫동안 공산주의자들이 활용해 온 和戰兩面 전략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가 나라를 방위하는 데는 외국의 도움을 빌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민족 통일을 이루는 데는 우리 스스로의 힘 이외에는 기대할 곳이 없다. 그것은 1950년 한국동란의 결과를 통해 이미 뼈저리게 경험하고 확인한 사실이다.
바로 이 때문에 6공화국 당시 「한국 방위의 한국화」를 내세워 自主국방, 自力 국방태세를 갖추기 위해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작은 메아리조차 남기지 못하고 말았다.
통일을 추진할 수 있는 군사적 체제를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1990년대 초 우리는 제2창군의 기치를 내걸고 이른바 8·18 사업으로 알려진 국군의 일대 軍구조 개혁을 시도한 바 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의 평화 아닌 평화 속에서 행정 위주로 변질된 軍의 조직체계를 작전과 전투 위주로 개혁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최고 상급 지휘통제 체제를 단순화시켜 軍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것이기도 했지만, 핵심은 어디까지나 유사시 우리 자신의 독자적인 전쟁수행 체제, 자주적인 국가 방위 임무 수행체제를 확립하려는 데 있었다.
내세운 명분은 미래의 주한미군의 지위 변동 가능성 등 한국 방위의 한국화 추세에 대비한다고 했지만, 내심은 통일 정책의 일환이었다. 당시 북방정책으로 북한에 대한 중국과 舊소련의 지원을 차단하고 북한에 대해서는 남북 고위급회담 등을 통한 개방정책을 추진하면서 통일이 가능한 유사시기에 대응할 수 있는 군사적 대비태세를 함께 갖추려는 제법 웅장한 꿈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큰 꿈은 軍 내부의 이해 부족과 소극적인 자세, 그리고 특히 언론에서의 엉뚱한 오해로 용두사미가 되고 말았다. 원래 이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방대한 국방부, 각군 본부 등의 최상층 조직이 대폭 축소되고 계급구조도 下向(하향) 조정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軍 내부에서의 거부감은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작전통제권 단일화 작업 실패는 유감
軍의 거부감과 반발을 여론의 힘으로 설득하고 대응하려 하고 있었는데 천만 뜻밖에도 언론에서 이것이 당시 모 육군참모총장을 통합군사령관으로 승진시켜서 친위 쿠데타를 하려는 기도라는 턱도 없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반대하는 바람에 용두사미로 끝나고 지극히 불완전한 성과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도 내내 가슴에 남는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연합사로부터 평시 작전통제권을 찾아오고 계룡대에다 각군 본부 대신 合參(합참)과 연합사를 함께 위치시키려 했던 시도도 같은 맥락에서 추진된 사업이었다. 合參과 연합사의 위치를 再조정하려 했던 것도 냉철한 이성으로 국가 백년대계를 내다보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평화통일을 추구하려면 반드시 이루어졌어야 할 사업이었지만 이해당사자들의 거부감과 반발이 너무도 커서 실패하고 말았다.
다행히 평시 作統權(작통권)은 불완전하지만 비슷하게나마 뜻한 바대로 되어서 지난번 연평해전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실무 부서에서는 그 깊은 뜻과 意志에 대한 주의 깊은 省察(성찰)이 없이 협상을 쉽게 포기하는 바람에,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로 찾아온 당시 주한 美 대사 및 리스카시 연합사 사령관과 마주앉아 어렵사리 최종 담판을 마무리지었던 기억이 난다. 만약 이때 이나마도 되찾지 못했더라면 지난번 연평해전時에 융통성 있고 기민한 작전지휘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통상 과거의 경험에 종속되어 오늘의 군사력이 내일도 그대로 효율적일 것처럼 생각하거나, 통일과정에서의 軍의 역할과 모양은 생략한 채 통일 후의 軍 구조 연구를 즐기고 마치 그것이 장기 기획의 전부인 것처럼 간주해 버리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이런 경우들은 그 어느 것이든 軍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을 수가 있다. 자칫 軍의 발전을 정체시키거나 非현실적인 연구를 위한 연구로 시종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시기에 반드시 필요한 형태의 적정한 군사력을 준비할 수 없게 만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적어도 가까운 미래를 포함한 오늘 우리의 안보 현실은 여전히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의 위협에 직면해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또 그러면서도 장차 있을지도 모를 통일戰役(전역), 혹은 평화통일 과정에서 軍의 사명과 역할도 고려해야만 한다. 그리고 바로 이 통일戰役, 특히 평화통일 과정에서 필요한 軍은 그 구조와 전력의 성격들이 매우 특이한 형태로 고안되고 준비되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이런 다양한 가능성에 두루 대비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통일환경 만들려면 聯美, 親러, 得中, 友日이 필수
안보태세의 강화 못지않게 국민적 공감대의 확산을 통한 정치적 사회적 통일역량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다. 무릇 모든 정부의 시책은 국민의 공감대 위에 서 있어야 추진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동족간 이념 경쟁의 성격이 배제될 수 없는 남북문제, 특히 통일정책의 경우는 먼저 국민의 일치된 마음과 내부의 안정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상존하는 소위 인민해방전략의 위협을 극복하면서 통일정책도 여유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蔣介石(장개석) 총통이 제국주의 일본의 외침에 시달리면서도 먼저 국내 안정을 확립한 후에 일본의 침략에 대응한다는 「先 국내안정 後 對日(대일) 항전」 개념을 고수하다가 서안사변으로 그 정책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중화민국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던가 하는 역사적 사실은 他山之石(타산지석)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對北(대북)정책도 그 정책의 효용성 못지않게 정책 방향에 대한 범국민적인 이해와 일치된 공감대의 뒷받침 여부가 오히려 더 중요할 수가 있다. 이것이 효율적인 對北정책의 개발 못지않게 국민의 공감대 획득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까닭인 것이다.
한편 우리의 통일문제는 한반도의 문제인 동시에 국제문제이고 그렇기 때문에 통일을 위해서는 국제적인 안보환경의 조성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통일에 이상적인 국제적 통일환경을 만들려면 「聯美, 親러, 得中, 友日」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그 중심이 되고 제일 중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韓美관계,「聯美」라고 하는 과제이다. 한국 안보에 있어서는 生存(생존)의 문제이건 통일의 문제이건 미국과의 우호협력관계, 강력하고 튼튼한 韓美 안보협력 체제가 중요하다는 것은 어제 오늘 거론된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에 있어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억제하는 결정적인 세력으로서의 미국의 중요성은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당분간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이제 북한의 무력남침 위협이 없어졌으니(아니면 줄고 있으니) 주한미군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하는 주장이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남북관계와 韓美관계는 제로 섬(Zero Sum Game)이라고 서슴없이 단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韓美 우호관계와 최근의 남북관계 발전은 밀접한 상호 보완관계에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 오랫동안 우리의 튼튼한 국가안보 3大 지주의 하나로 기능해 온「韓美 우호협력 관계」가 잘 뒷받침되어 확고한 안보태세가 확립되어야만 남북관계도 보다 여유롭게 그러면서도 더욱 적극적이고 폭넓게 추진해 나갈 수가 있을 것이고, 그와 동시에 남북관계의 건전한 발전은 보다 합리적이고 균형잡힌, 미래 지향적 韓美 우호관계 발전의 바탕을 형성해 줄 것이다.
한반도 통일과정에 있어서도 외교, 군사,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우리의 통일을 실질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또한 한국이 아무리 통일되고, 통일 이후 국력이 강화되어도 짧은 시간 내에 하나의 독자적 세력으로 自立하기란 쉽지 않다. 이 경우에도 여러 가지 차원에서 미국보다 더 안전하고 확실한 전략적 제휴 파트너를 찾을 수는 없다고 본다. 일본마저도 그러한 인식하에 美日 안보협조체제를 강화해 나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이 韓美관계의 위상을 좀 끌어내리고 韓中관계를 끌어올려서 어느 정도의 균형을 이루려 하고 있고, 그 때문에 미국이 은근히 불편해 하고 전통적인 韓美 우호관계가 동요되고 있다는 일부 우려가 나오고 있다.
실제로 얼마 전 만났던 美 CSIS(국제전략문제연구소·Center for Strategic & International Studies) 랄프 코사(Ralph Cosa)는 한국이 지나치게 중국을 의식한다고 우려했다.
『달라이 라마는 온 세계가, 심지어 몽골까지 받아들이고 있는데도 한국은 중국이 「허용치 않는다」고 거부하고 있고 韓美日(한·미·일) 안보협력 체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하면 중국이 싫어할 것이라고 주저한다. 언제부터 한국이 이렇게 중국의 눈치를 보게 된 건지 모르겠다. 아마도 주한미군의 철수를 전제해 놓고 그 이후의 안보를 중국에 의존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반도에서 美·中의 비중이 달라져 가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는 것이었다.
중국은 北韓을 더 중시한다
이런 오해만은 풀어주어야겠다 싶어 설명을 했다.
『한국의 안보에는 두 가지 과제가 있다. 하나는 생존문제고 하나는 통일문제다. 중국과의 관계는 통일을 전제로 해서 중요한 것이고 미국과의 관계는 생존문제와 직결된다. 통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차원에서 중국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정도이지 現 단계에서 안보는 물론 경제·문화 등 모든 면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미국과 비교될 수는 없다. 한국이 지금 어떻게 미국과 중국을 바꿀 생각을 할 가능성이 있겠는가. 처음부터 비교가 안 된다』
랄프 코사는 물론 같이 있던 美 대사관 친구들이 다같이 좋은 지적이라면서 일단은 웃고 돌아갔는데, 최근 CSIS와 더불어 공동연구를 많이 한다는 어느 저명한 교수는 CSIS에서는 한국이 이미 국가안보의 방향을 중국 중심으로 돌려 잡았다는 결론을 내려놓고 있다고 한다. 우려할 일이다.
최근 주한미군과 우리 국민 사이에 전개된 다양한 심리적 갈등의 저변에도 이러한 미묘한 변화가 양측의 마음가짐에 준 영향이 적지 않은 듯하다. 한국 국민의 마음에 주한미군의 역할과 기여에 대한 이해와 공감은 줄어드는 반면 주한미군은 그들 나름대로 이러한 분위기를 피부로 느끼면서 불필요한 오해를 양산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말이다.
그 대신 중국과의 관계는 매우 부드러워진 것 같다. 최근 중국을 방문하는 한국 관리들에 대한 중국측의 환대는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될 정도로 융숭하다. 중국의 전통적인 손님 접대 방식이 그렇다는 말도 하지만 어쨌든 `1999년 趙成台(조성태) 국방부장관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는 물론이요, 지난 10월 필자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도 그 성의 있는 접대는 놀랄 정도였다.
외국 국방대학교 총장에게 중국 국방대학교 학생들에 대한 강의 기회를 준 것부터가 파격적이라 하는데, 여기에 장군 및 부성장급 등 최고위 과정 학생들까지 다 참여시켰다거나, 지호전 국방부장이 1시간 이상 오랜 시간을 할애해서 환담을 나눈 일 등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현지 주변의 반응이었다.
실제로 駐韓 중국대사가 가끔 내정간섭과 다름없는, 외교관으로서는 폭언에 가까운 발언으로 우리 국민의 자존심을 할퀴는 일이 더러 있지만 그 외에는 서로의 신뢰와 우호관계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우리 합참의장, 해군총장 등이 연속 중국을 방문하고 고위 군사교육관계자들 간의 교류도 늘어나는 등 마치 군사분야에서도 韓·中간의 新時代가 열리는 듯한 분위기마저 있다.
러시아의 對北 접근 경계해야
그러나 냉철히 살펴보면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기본 인식은 아직은 명확하다. 적어도 당분간은 중국 입장에서 한국의 비중이 북한보다 높아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저들의 외교적 전통이나 중국 현지에서 느끼는 남북한에 대한 공식적 처우의 차이, 그리고 이른바 三步走라는, 중국의 미래를 위한 국가 대전략 차원에서의 남북한 및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이해관계의 평가 등 어느 측면에서 보건 과거 신생 중국이 세계 GNP의 절반을 생산하던 세계 초강대국 미국과 일대 결전을 벌이게 했던 소위 「脣亡齒寒(순망치한)」的 中·北(북중)간 戰略的(전략적) 이해관계는 별로 변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최근 북한과 美·日의 접근에 대해 겉으로는 환영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속앓이를 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일이고, 필자가 지난 10월16일 중국 국방대학교에서 초청 강의를 할 때에도 중국 학생장교들이 빈번하게 질문한 가장 큰 관심사 역시 한국의 주한미군에 대한 정책방향이나, 미국의 NMD (National Missile Defense=국가 미사일 방어망), TMD(Theutre Missile Defense=지역 미사일 방어망) 추진에 대한 한국의 입장에 관한 것들이었다.
러시아와의 관계는 오히려 좀 쉬울 수가 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주한 러시아대사 아파나시에프는 『통일한국의 출현은 극동지역을 안정시켜 러시아의 안보에 유리하고, 시베리아의 개발을 촉진시킬 것이며, 경제적으로도 상호보완 관계이어서 러시아는 국익을 지키면서 한국의 통일을 지원할 것』이라고 했고, 모스크바의 한 연구소에서는 『러시아는 통일한국으로부터 얻을 것은 많아도 잃을 것은 없다』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러시아가 1999년 한국 정부의 애소에도 불구하고 십수명의 탈북 난민들을 중국으로 쫓아보내서 결국은 북한 정부의 손에 넘겨주는 냉혹한 조처를 취하고 북한과의 관계를 대폭 개선하고 있다.
지난 12월 초 서울을 방문한 안토니 토르쿠노프(Antony Torkunov) 러시아 국제관계대학 총장은 金正日 국방위원장이 2001년 초 봄쯤 러시아를 방문할 것이고 러·북관계는 점차 더욱 발전되어갈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러다 보니 탈북 난민들의 송환 직후 아파나시에프의 말은 좀더 시니컬한 데가 있었다.
『(한·러 간 수교) 초기에는 서로 간에 어떠한 환상이 존재했었던 듯한데, 이제 서로 현실을 직시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하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주변 4강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가장 순수하게 한국의 통일을 공감해 줄 수 있는 나라가 러시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30억 달러의 차관까지 제공해 가며 국교를 수립하고 관계 개선을 위해 공을 들여온 나라가 러시아인 것이다. 또 러시아는 그 이후 어쨌든 나름의 약속을 지켜서 오랫동안 북한에 대한 군사적 지원만은 자제해 온 나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이 러시아로 하여금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위상을 높이고 한국에 대한 외교적 지렛대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러·북관계를 개선시켜야겠다는 구차한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는지 조금은 의아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4者 회담 추진에 대한 러시아의 소외감이라든가, 여러 가지 러시아 나름의 국익차원의 계산이 있었겠지만 좀더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지금도 事大交隣은 필요하다
우리 통일외교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의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 전략적 이해관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갖고 있는 중국의 마음을 얻어내는 것, 得中하는 것이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닐 것이고, 뿐만 아니라 서로 대립 갈등관계에 있는 주변 나라와도 두루 적대시해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주변 각 나라들과의 개별적 우호관계보다 동북아에서의 多者間 안보협조체제의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예컨대 동북아에서도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 지역안보협조체제인, NATO와 같은 多者間 협조체제를 구축한다면 상당히 항구적인 국가안보 대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차원에서 안보관계 전문가들 중에는, 우리나라의 전통적 생존전략이었던 事大交隣 정책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객관적으로, 21세기 초반 美·中 간의 경쟁속에서 우리가 自衛(Self-defense) 역량을 확보할 수는 없으니, 미국과는 견고한 안보동맹을 유지하는 事大관계를, 나머지 러·중·일과는 긴밀한 우호협력관계를 유지하는 交隣관계를 추구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주변국과의 교린관계가 잘되면, 미국과의 딜링에서 우리가 희생하고 양보할 자주성의 범위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한다. 이래야만 정말로 우리나라의 미래 안보가 튼튼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유가 어디에 있건 이런 주변 4강국들도 포용정책에 대해서만은 다같이 환영하는 입장이다. 어쩌면 내심으로는 나라마다 제각기 다소의 차이는 있을 법도 하지만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반대할 수가 없는, 혹은 반대할 필요가 없는 성격의 정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이 어려운 통일외교를 헤쳐나갈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보게 되는 것이다.
南北관계의 본질은 경쟁관계
우리가 평화통일을 이루려면 무엇보다도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확산되어야 하며 남북한 온 한민족이 단일국가 단일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도 평화적으로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장기적 안목하에서 대전략을 세워 계획적이고 집요하게 추구해야 할 對북한 통일정책의 기본 방향일 것이다.
그런데 같은 시간 북한도 그들 나름대로 공산주의 체제를 한반도 전체에 확산시키고 전체 한민족을 공산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우리보다도 훨씬 더 적극적이고 그들이 활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려 들 것이다. 결국 우리는 북한과 또 다른 형태의 경쟁, 어쩌면 또 다른 형태의 전쟁이나 다름없는 게임을 전개하고 또 게임에서 승리해야 하는 것이다.
하기야 기본적으로 통일이라는 과제를 놓고 보면 모든 남북관계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경쟁관계일 수밖에 없다. 남북간의 모든 관계와 행위, 武力爭鬪는 물론이요 화해와 협력 심지어 평화를 위한 노력조차도, 궁극적으로는 南은 南대로 北은 北대로 서로가 상대방 주민의 마음을 얻고 어느 체제가 인간의 삶과 국가운영에 더 효율적인 방식인가를 인식시키기 위한 하나의 경쟁이자 게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통일한국의 체제를 결정하는 엄청난 경쟁이요 게임인 셈이다.
우리의 평화통일 정책도 이 특성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단지 폭력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에 의한 게임일 뿐이다. 평화적 방법이라야만 이 통일 게임을 勝者뿐인 윈윈 게임으로 이끌 수 있다는 차원에서 보면 이 방법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그리고 최선의 길일지 모른다. 6·15 선언도 따지고 보면 이 게임을 평화적으로 하자는 약속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평화적인 방법이 옳고 바른 길임에는 틀림없지만 군사적인 방법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현명한 정책과 정교한 정책수행의 지혜 그리고 강인한 의지가 뒤따라야 한다. 무엇보다도 아직은 북한이 무력 적화통일 의지를 포기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고 앞으로도 무력을 有用한 통일 방법으로 활용할 개연성이 있음을 고려하면서 對北 통일정책을 수행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북한통치체제는 배제 대상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對북한 정책의 불가피한 이중성이다. 민족 통일을 위한 세 가지 대전제를 두고 생각해 보면 북한의 통치체제는 어차피 배제되고 해체되어야 할 대결의 대상인 반면 모든 북한 주민 그 자체는 새로운 세기를 함께 개척해 나가야 할 화합과 협력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통일 노력도 바로 이 이중성을 고려하여 북한 통치체제에 대응한 국가통합의 노력과, 북한 주민을 향한 민족융합의 노력으로 구분된 두 가지 접근법으로 병행 추진되어야 한다.
국가 통합의 노력을 어떻게 전개해야 하는가. 여기서 그 수많은 아이디어와 수단들을 모두 거론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그것이 일단 북한 사회의 개방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어느 독재국가나 독재적 통치는 통상 정보통제에 기반을 두는 법인데 북한도 거기서 예외가 아니었다. 북한의 주민 통치방식은 정보통제로 북한 주민의 눈과 귀를 막아놓고 앞에서는 金日成의 카리스마로 끌고 나가면서 軍이나 사회 안전부 같은 국가적 폭력장치로 뒤에서 두드려 밀어나가는 형태로 통치해 왔던 것이다.
金德弘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북한은 『국가권력으로 조직화된 폭력과 사상적 독재를 잘 조합해서 군사 봉건주의라고나 할 완벽한 개인 군사독재체제』를 형성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만큼 더 철저한 정보통제에 근거하여 유지가 가능한 것이다.
그 정보통제 체제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북한 사회를 개방시키는 길밖에 없고, 북한 사회를 개방시키기 위한 효율적인 방법의 하나가 제6공화국 당시의 對北 개방정책이요, 지금의 햇볕정책의 아이디어인 셈이다.
이것이 무조건 불가능한 접근이라고 폄하할 수 없는 것은 이 개방의 길은 어차피 북한 스스로를 위해서도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좀 깊이 생각해 보면 그 길이 설사 체제유지에 다소 심각한 모험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가야 할 길인 것이다.
민족융화정책은 국가통합정책보다 중요
뿐만 아니라 이 시대는 군사력과 외교력뿐만 아니라, 경제 과학기술은 물론, 문화와 지식 등이 다같이 국가안보의 기능요소가 되는, 아니 지식과 정보가 오히려 더 중요한 국가안보 기능요소가 되는 「종합안보」의 시대이다. 오직 군사력에만 의존하는 국가안보는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舊소련도 견디지 못하지 않았는가. 북한도 이러한 21세기 정보화 사회의 특성을 이해하고 여기에 대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무작정 문을 닫아 걸고 군사력만 강조하면서 폐칩된 생활을 지속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며 어떤 방법으로든 미래사회의 새로운 환경에 효율적으로 적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개혁과 개방의 물결을 무조건 기피할 일이 아니라 체제의 특성을 고려하면서 그 효과를 달성할 수 있는 지혜롭고 창조적인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북한이 우리 한국과의 진지한 대화와 긴밀한 상호 협력을 통해서만이 그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포용정책은 북한 고위 당국자들에게는 한편으로는 위험한 칼날이 될 수 있는 동시에, 저들이 이제야 말로 換骨奪胎(환골탈태)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21세기의 삶을 정상적으로 살아 나갈 수 있는 마지막이자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북한 주민에 대한 통일 노력, 즉 국민 대화합, 민족융합정책의 수행은 국가 통합정책보다도 더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북한 주민들의 통일에 대한 거부감이나 불안감을 해소 또는 최소화하고, 나아가 직접 북한 주민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북한 주민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설사 북한체제가 붕괴되고 북한 지역이 無主空山(무주공산)이 되어도 그것이 민족통일로 연결된다는 보장이 없다. 동독 주민들이 서독과의 통합을 희망하지 않았더라면 독일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더 인내하고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오히려 남북관계가 너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데 대해 적지 않은 국민들이 당황해 하고 우려하고 있는 듯하다.
일반적으로 느끼고 있는 우리 국민의 의문과 불안은 대략 「남북관계 개선이 좋긴한데 너무 급하다, 너무 일방적으로 주기만 한다, 또한 그러면서 무엇 때문에 매일 끌려 다니기만 하는가, 더욱이 저들이 과연 무언가 달라지는 게 있기는 있는가, 북한은 하나도 변함이 없는데 우리만 국론분열과 안보체제의 동요를 초래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안보태세가 동요되고 韓美 관계까지 좀 묘하게 되어가니 이러다가 우리 사회가 자칫 잘못되는 게 아닌가, 북한은 여전히 赤化통일론을 굳게 하고 있고 金正日이가 통일 대통령까지 되겠다고 하는데 이러다가 장차 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등이다.
하루아침에 북한 바뀌기 바라는 것은 지나치다
그러한 우려의 저변에는 북한이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합의한 「평화적 경쟁」이라는 약속, 평화준수라는 기본 룰을 무시하고 무력 赤化 통일전략을 병행하고 있으며 혹시 우리 정부가 북한의 그러한 이중성을 가볍게 보다가 자칫 실수하는 것은 아니냐 하는 불안감이 내재하는 듯하다. 이러한 불안과 의구심들에 대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이해는 하지만 우리 체제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자신감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북한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만 변하고 있다고 우려하지만, 솔직히 통일의 기본방향을 놓고 보면 북쪽은 물론 우리도 변한 것이 없음은 마찬가지이다. 북한이 적화통일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우리는 언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포기한 적이 있으며 또 그것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북한이 적화통일 전략을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음을 수없이 강조하고 불만스러워 하지만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이루어진 몇 번의 대화로 북한이 저들 나름의 정책 기본방향이자 대전략을 포기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지나치다.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면 그런 사고 방식이야말로 정말 순진하고 나이브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북한이 이른바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적화통일을 위한 「연방제」로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단지 지금 이 시점에 그 문제부터 먼저 명확히 하자고 들면 서로 만나고 대화하는 것부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단은 북한으로부터 초기 단계 연방제안을 우리의 연합제안이나 비슷하다고 얼버무려 두고 있는 것이라고 양해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이것을 거부한다면 과거와 같은 남북 대결정책의 지속 이외에는 방법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미리부터 자기 체제를 포기할 것이며 또 게임도 해보기 전에 항복선언이나 다름없을 체제 포기를 말할 수 있겠는가.
남북관계의 진전이 너무 빠르다거나 끌려 다닌다거나 하는 우려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남북관계는 지금까지 진폭이 점차 커져가는 사인(Sign) 커브를 그려왔는데, 지금은 7·4 남북공동성명 때나 1992년 고위급회담 때보다 그 폭이 다소 클 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는, 또 우리 평화통일정책의 안정된 추진을 위해서는 가급적이면 가능할 때, 북한이 되돌아갈 수 없는 일정한 한계를 넘겨놓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우리 사회의 적응력이 생각 이상으로 뒤떨어져 있거나 통일정책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확보하고 일체감을 형성할 수 있는 정치 지도자들의 지도력이 미흡하다면 그에 대한 고려는 별도로 해야 할 것이다.
6·15 남북공동선언과 그 이후의 관계 발전이 준, 남과 북 양측 주민에 대한 충격도 양측 모두에게 다같이 엄청나게 크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만 영향을 준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개방사회이니까 그 충격을 직접 고스란히 받고 있고 그 영향도 적나라하게 눈에 보이는 반면 북한은 그에 관한 정보를 최대한 여과시켜서 내보내는 데다가 통제사회이니까 그 영향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親北 이념 확산은 心腹之患…
적극 대처해야
어차피 이런 과정은 같이 겪을 수밖에 없다. 바로 이것이 과거와는 또 다른 형태의 평화적 경쟁의 일부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런 정도의 충격은 충분히 흡수할 수가 있고 또 일부 부작용과 혼란이 있다 하더라도 논쟁하고 공론화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해소될 수 있지만 북한 체제는 일단 한 번 충격을 받으면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물론 최근 한국 사회 內에서의 이념적 혼란이 너무 크고, 공개된 혹은 사회 곳곳에 침투한 채 숨어 있는 親北勢力(친북세력)이 너무 확산되고 있으며 그 영향력이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다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많다. 실제로 진보요 혁신이요 하면서 知的 참신함을 자랑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결과적으로는 북한 체제를 고무시키고 우리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신념을 동요하게 만드는 데 집중되고, 또 이런 논리들이 TV나 매스컴에서 각광을 받으며 예상 외로 많은 젊은이들로부터 공감을 얻고 떠받들어지고 있음을 본다.
적지 않은 사회의 중견 혹은 지도층에서도 북한체제에 대한 공감까지는 아닐지라도 북한의 위협에 대한 인식은 엄청나게 약화되고 있음에 당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반대로 자유민주주체제에 대한 신념은 냉전적 思考로,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수호를 위해 노력하는 인사들은 극우 보수 반동으로 매도되며, 심지어 이를 위해 좀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인사들, 특히 북한체제의 허상을 벗겨서 한국사회에서 親北이념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백주 대낮에 테러나 다름없는 핍박을 받는 해괴한 경우까지 발생했다.
親北 공산세력에 대한 우려가 결코 杞憂(기우)가 아니며 그들이 우리 사회의 心腹之患(심복지환)이 되어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 사회 내의 理念문제에 대해 우리 모두가 좀더 진지하고 깊은 관심을 갖고 적극적이면서도 철저하게 대응해야 할 때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심과 노력을 전제한다면 이 문제 때문에 남북 관계의 발전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북한과의 체제 경쟁적 차원에서 본다면 아직은 좀더 여유를 가지고 대응해도 될 것이라고 믿는다. 단지 우리 사회에 대한 위협에는 그에 따른 대응책의 강구를 병행해야 할 것이라는 어려움은 있겠지만 이런 정도의 어려움은 남북 간의 모든 문제, 모든 정책 수행에 있어서 똑같이 겪어야 될 어려움이 아닐까 싶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오히려 이런 혼란을 겪고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모든 과정들이 결국은 우리 사회를 더욱 성숙시켜서 장차 본격적인 통일경쟁 시대의 승리자가 되게 하고, 장차 세계화의 시대, 지구촌의 시대에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건강한 힘을 길러주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특히 남북 군사회담은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지혜롭고 효율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여러 가지 채널로 진행중인 남북 회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평화와 화해 협력이 남북관계의 두 축이요, 두 개의 수레바퀴와 같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아는 사항인데 평화라는 한쪽 수레바퀴는 구르지 않고 다른 한쪽 수레바퀴만 열심히 굴러가려 하는 모양은 결코 자연스럽지가 않다.
북한의 체제는 인민무력부와 정무원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서 아무리 장관급 회담이나 경제 분야 교류가 잘되고 우리 국정원과 김용순 라인이 잘 가동되어도 그것이 바로 군사 회담의 발전으로 연계되기는 어려울 수가 있다. 우리는 흔히 인민무력부가 정무원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민무력부는 정무원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정도로 이해해 왔지만, 북한 군부의 인식은 사뭇 다른 듯하다. 오히려 북한의 체제적 중심은 군부로서 그들이 정무원보다도 한 차원 높이 앉아 있고 정무원은 그들을 옹위하고 떠받드는 지원기구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오죽하면 지난번 김용순 방문시 남북 국방장관회담 개최를 「환영한다」는 식으로 표현했겠는가. 그러니 군사회담을 잘 이끌어 내고 발전시켜 나가려면 군사분야에서의 별도 노력이 필요하다. 미국과도 군사적 채널의 협의를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하고 러시아와도 협조하며 나아가 필요하다면 北京(북경)의 지호전 국방부장을 활용해서 북한을 설득한다든가 하는 등의 적극적인 방법으로 저들을 이끌어 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싸움
또 협상과정 그 자체도 좀더 여유 있게 그러나 끈질기게 계획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 북한은 소수 「회담 전문가」 그룹에 회담의 기획, 운영 등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다. 이찬복 중장은 몇 십 년 판문점에만 있었고 1992년 회담 때의 박림수가 지금도 앉아 있다. 문자 그대로 프로인 것이다. 그 반면 우리는 항상 새로운 인물이 새로운 개념을 가지고 새로운 방법으로 접근한다. 자칫 잘못하면 프로와 아마추어의 대결이 되기 쉬운 것이다.
북한이 오랜 시간의 경험을 가진 소수 전문가 집단으로 나온다고 보면 우리는 잘 조직된 시스템과 우수한 인재들의 팀플레이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자면 결국 남북 군사회담에 관한 우리의 대비 체제와 준비는 가급적 빨리 그리고 획기적으로 再정비·강화되어야 한다. 지난번 장관회담 참여의 경험으로 보면 회담의 기획, 전략, 운영, 지원, 對外협조 관계 등 모든 면에서 대폭적인 조직의 정비와 개혁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국방부에서 합참차장 제도의 부활을 시도하다가 국방장관회담이 언제 열릴지, 특히 군사위원회가 언제 구성될지도 모르는 판에 무슨 대장 진급인가, 爲人設官 아니냐 하고 언론에서 들고 일어나고 국회에서까지 문제가 되는 바람에 없었던 일로 취소되고 말았다.
그러나 남북 군사회담을 안 한다면 모르지만 어차피 해야 할 것이고 해야 한다면 시급히 국가 대전략 차원에서 큰 안목을 갖고 진짜 인재를 모으고 시스템을 재정비해서, 북한을 어떻게 이끌어 내고 회담을 어떻게 운영하며 무엇을 어떻게 합의해 낼 것인가, 또 회담 후에는 미국, 중국 등 주변국에는 어떻게 설명하고 그 회담의 효과를 어떻게 극대화할 것인가 등에 대한 계획을 잘 세워, 철저히 대비할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적어도 반년 이상의 준비 기간은 소요될 것이다.
북한이 달라지기는 달라졌다
북한은 수십 년 준비해 오고 있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이 남북 군사회담장이라고 하는 곳은 총소리만 나지 않을 뿐 또 하나의 戰場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남북 군사회담이라고 하는 평화적 싸움터에서 평화적 戰爭에 승리하려면 바로 이 싸움터에 맞는 준비와 노력을 해야 한다. 이 평화적 전쟁의 결과도 血戰에서의 승패 이상으로 우리 민족의 운명에 중요한 영향을 줄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정책적 입장이나 태도가 달라졌느냐 하는 문제는 아직 확정적으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계제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듯이 지금까지는 주로 말뿐이고, 행동이 믿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뒤따라 온 것이 아닌데다가 특히 안보, 군사문제에 있어서는 진전이 더욱 늦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라졌다고 볼 수 있는 근거도 더러 있다.
적어도 이번 협상에 임하는 북한의 태도 그 자체는 과거와는 확실히 달라졌다. 솔직히 1992년 남북 고위급회담時의 북한의 태도는 무언가 합의하고 이루려는 것보다는 그저 말싸움이나 하러 나왔을 뿐인데, 이번에는 그래도 제법 진지한 면모가 있었고 태도도 유연했다(그때는 우리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그래서 몇 가지 합의 사항도 만들어 냈다. 그것을 제대로 실천할 것인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지만, 과거처럼 합의의 내용이 화려하지 않은 대신 실천 가능성은 높다고 본다.
북한을 일상적으로 상대하고 있는 남북관계 실무담당자들도 저들의 태도가 무언가 변하고 있다는 말들은 곧잘 한다. 무엇보다도 불필요한 「억지」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특히 한국을 한번이라도 방문했던 사람들은 완연히 다르고 심지어 판문점 남측 지역이라도 한번 밟아본 사람은 무엇이 달라도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더 저들을 이끌어 내고 저들의 눈을 뜨게 해주고 귀를 열어주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곧잘 북한의 태도가 경직되어 있다고 강조하고 또 그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이번 회담에서 보면 우리 역시 그리 유연하고 합리적인 것만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필자가 판문점에서 북한 김일철 부장을 영접할 때 경례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좋아하던데 이 경례문제만 해도 그렇다. 우리는 敵將에 대한 경례는 항복의 표시라느니, 국민정서가 용납하지 않는다느니 등 별별 이유들 때문에 그 누구도 북한 대표들은 물론 김일철에게도 경례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북한 장성에게 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서인지 삼성장군인 내게도 경례하는 군인이 별로 없었다. 좀 민망할 때도 있었을 정도다.
그 반대로 북한측은 일부 대령들이 우리 장관님에게 경례를 하고 북한 대표팀이 돌아갈 때 판문점에 영접 나왔던 북한의 어느 대좌도 내게 경례를 하고 들어갔다. 일부 국방부 기자들 중에는 국제관례에 따라야 한다고 하고 심지어는 의장행사까지 해주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는데도 말이다.
물론 군인의 경례란 민간인들의 일상적 인사와는 좀 성격이 다른 측면이 있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만남의 예의 표시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더욱이 武人이란 결투를 앞두고도 서로 예의부터 표시하는 법이고, 또 이때는 싸우자고 오는 것이 아니라 웃고 잘 지내자고 오는 사람들이 아닌가. 이들에게 결례를 한 셈이니 우리가 저들에게 큰소리 칠 것도 별로 없다는 말도 일리가 있는 것이다.
부시 등장은 남북관계에 도움될 수도
2000년 말 조명록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미국을 방문하고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金正日과 함께 호전적인 것으로 유명한 북한의 집단체조를 관람하는 등 美·北관계가 급진전되면서 남북관계가 소강 상태에 빠지는 것처럼 보였는데 여기에 대한 분석도 사람마다 조금씩은 달랐다.
비관적인 견해는 북한이 처음부터 경제관계는 한국을 이용하되, 안보관계는 미국과 직거래하려고 하는, 그래서 이른바 通美封南 정책을 추진해왔으니, 이제 美·北관계가 저렇게 개선되면 우리 남측과의 관계 개선 노력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추정이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미국이 對한반도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있기 어려운 일이다. 물론 근본적으로 미국은 한반도의 안정(Stablility)을, 한국은 넓은 의미에서의 안전(Security)을 추구하기 때문에 韓美간의 안보상 국가 이익이 완전히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현 단계에서 미국이 남·북한을 바꾸어서 잃을 것은 많아도 얻을 이익은 별로 없다고 본다. 그러니 적어도 당분간은 그런 가능성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다가 부시 행정부의 등장이 확실시되면서 이번에는 정반대되는 이유로 남북관계의 지연과 교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공화당의 對한반도 대응양식이 민주당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페리 보고서를 두고도 부시의 참모들은 클린턴 행정부가 화해 중심의 1단계에만 중점을 두고 견제 중심의 2단계에 대해서는 준비할 의사조차 갖고 있지 않다고 비난하고 있고, 민주당은 金大中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해 철학적으로 동조하고 있지만 공화당은 그저 현실적 代案이 없어서 바라보고만 있는 상태라고 차별화하고 있다. 이런 시각은 국내외 학자들 사이에 큰 차이가 없는 듯하다.
장기적으로는 역시 위에서 말한 일반적인 우려가 더욱 현실적일 듯하다. 어떤 在美 학자는 부시 정부가 한국에 대해 북한의 군사력을 증강시킬 가능성이 있는 조치, 예를 들면 현금이 북한 정부로 흘러 들어가는 조치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엄격히 자제해 줄 것을 요구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어찌되었건 북한에 대한 새로운 부시 정부의 시각과 정책이 클린턴의 그것과는 달라질 것이 거의 틀림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부시 행정부의 등장도 클린턴 정부하에서의 美·北 관계개선과 같이 반드시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어느 한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단기적으로는 오히려 긍정적일 수도 있다.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버리게 하고 적어도 당분간은 더 한국 정부에 대한 의존(이용한다고 생각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이 불가피함을 인식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새해의 남북관계는 순탄치만은 않을 것
그런데다가 북한의 태도 역시 변화하고 있는 조짐이 있다. 사실 6·15 남북공동성명 이후 북한 金正日 위원장 입장에서는 나름으로 상당한 모험을 시작한 셈인데 그가 과연 앞으로 얼마나 끈질긴 인내심을 가지고 남북대화를 지속할 것인가 하는 데는 상당한 의문이 있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비롯한 최근 북한측의 태도와 행보를 보면 이미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피곤해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없지 않다.
이런 여러 가지 사항들이 겹칠 때 앞으로의 남북관계는 상당한 진통과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럴 때 북한이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부시 정부와 한국 정부 간의 북한에 대한 시각차를 해소시켜 준다면 상당한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도 별로 기대하기 어렵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모스크바에서는 金正日 위원장이 2001년 초 봄에는 러시아를 방문할 것으로 믿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金正日의 2001년 초 서울 답방은 불가피하게 많이 늦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북한이 對南관계를 조절하려고 무언가 계산을 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적지 않은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남북관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한국 內에서는 북한 당국자들의 신뢰성 문제가 또 다시 제기될 것이고 한국 정부의 對北정책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는 더욱 엷어져 갈 것이며 다시 한번 국민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
어쨌든 장·단기 어느 측면에서 보건 앞으로의 남북관계가 지난 한 해처럼 순풍에 돛 단 듯이 잘 진행되어 갈 것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남북관계의 발전에 많은 것을 의존해 온 정부로서는 매우 어려운 시기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러나 민족통일을 앞당기려면 어차피 남북관계는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데는 변함이 없고 정부는 장기적인 안목하에 더욱 더 적극적으로 남북관계를 유연하게 지속적으로 잘 이끌어 나갈 필요가 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국가와 민족의 먼 미래를 보는 길고 큰 안목과 창조적인 지혜가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가 있다. 본질적인 문제이면서도 숨겨져 있는 더 큰 문제인데 그것은 북한의 변신 노력이 성공하면 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안보상 우리가 경계하고 유의해야 할 과제는 더욱 더 커질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金正日 위원장이 이번엔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하는 듯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 모험이 과연 성공할 것인가 하는 데 많은 의문이 남는다.
어떤 경우도 우리 안보태세 더욱 강화해야
그동안에도 북한은 자본주의 바람은 막으면서 실리만 취한다는 부분적, 제한적 개혁, 소위 방충망식 개방을 시도해 왔었지만, 크게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번에도 아직은 북한의 개방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설사 개방하고 개혁하려 한다고 해서 과연 「무엇을」 「얼마나」 이룰 수 있을지 명확히 알 수가 없다. 黃長燁씨를 비롯한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頂上회담을 하면서도 정치적 사회적으로는 그 폐쇄성을 철저히 유지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설사 다소 적극적으로 개혁 개방 정책을 유지해 나가려 한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남북간의 경쟁적 본질은 변함이 없을 것이고 이런 평화적 형태의 경쟁이 어느 체제에게 더 유리하겠는가는 불문가지이기 때문이다. 북한체제는 전쟁을 위한 체제이지, 평화적인 경쟁을 위한 체제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다가 지금 저들은 유치원 때부터 「美帝의 각을 뜨자」고 교육하면서 세계 인류의 모든 악의 화신처럼 선전하던 「美 제국주의자」들까지 끌어들이고 있으니 과연 그 엄청난 충격을 제대로 관리해 낼 수 있을지 그것부터가 의문이다.
더욱이 북한에서는 하나에서 열까지 金正日의 직접 지시나 결심이 있어야 된다는데, 정작 金正日은 군사위원장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단순히 지배하고 있을 뿐, 직접 관장하지는 않는다 하니, 그런 체제와 그런 자세로 무엇을 이루어 낼 수 있겠는가. 또한 근본적으로 舊소련을 붕괴시킨 정보화의 물결을 북한이 과연 성공적으로 극복해 낼 수가 있을 것인가. 아직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요, 낙관하기 어려운 것들뿐이다.
이러니 잠시는 몰라도 결국은 또다시 체제유지의 한계상황에 부딪치게 될 가능성이 많아 보이는데, 이때 북한이 무엇을 하려 할 것인가? 이것이 마지막까지 남는 우려의 실체인 것이다. 결국 과거부터 우리가 우려해 온 진짜 위협은 아직도 상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안보와 포용의 二重 전략 병행
우리가 군인으로서 우려하는 점도 바로 이런 것들이다. 철저한 개인 군사독재체제하에서 저들의 지도자가 지금까지 알려져 온 바와 같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인간적 특성을 두루 갖추고 있고 손쉬운 승리까지 믿고 있다고 하면 절대 절명의 결정적인 때에 무력남침으로 「乾坤一擲(건곤일척)」의 일대 도박을 시도하려 들지 않겠느냐 하는 우려인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포용정책과 튼튼한 안보의 실질적인 병행을 거듭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의 미래 안보를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데서 오히려 안심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종합적으로 잘 살펴보면 우리에게 있어 이 21세기는 문자 그대로 엄청난 도전과 시련, 그리고 거대한 민족사적 기회와 희망이 혼재하는 지극히 복잡하고 역동적인 시대이다.
그러나 미래는 기다리고 맞이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만들고 가꾸어 나가는 자의 것이라고 한다. 도전과 위협은 철저히 극복하고 희망과 기대는 반드시 성취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21세기 통일번영의 새 시대 문턱에 서 있는 현 시점 포용정책의 아이디어 자체는 우리가 민족의 미래를 위해 일단 한번은 제대로 시도해 보아야 할 방법이라는 것만은 틀림이 없을 듯하다.
21세기 정보사회의 안보환경에 비추어 보아도 어차피 이제는 군사 일변도, 대결 일변도의 정책은 再검토되어야 할 때가 되었고, 국가 대전략의 큰 차원에서 보면「안보와 포용의 병행」이라고 하는 이중적 접근이 더욱 효과적이고 합리적일 것이라는 것은 대체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단지 거듭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 안보와 포용정책의 「균형」, 그 「병행추진」의 의지와 안목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남북관계의 본질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통일정책 수행에 있어서의 대전제가 되는 원칙에 대한 신념이다. 상황이 힘겹고 혼란스러울수록 더욱 더 본질을 살피고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모름지기 큰 지혜는 바른 길, 正道에 있고 개인이건 국가이건 바른 길이야말로 큰길, 大道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량 압도적이어야 불공정 게임에서 이긴다
더욱이 지금의 이 통일 게임은 다소 불공정하고 어느 한편에 편파적인 룰과 규정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일부에서는 그 불공정성, 불공평성이 너무 과하다는 불평도 있고 심지어 그 때문에 승패가 억울하게 잘못 뒤바뀌면 어떻게 하나 하고 불안해 하는 사람들도 없다. 그러나 어차피 이 게임은 그 속성상 어느 정도의 불공정성, 편파성은 양해해 줄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게임 자체가 진행될 수 있는 그러한 게임이다. 그래서 더욱 더 인내와 끈기 그리고 포용정책이 강조되고 있는 게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게임이 비록 평화적인 싸움이고 다소의 불공정성을 감수해 준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 게임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아무리 평화적인 전쟁, 평화적 게임에 있어서는 우리 체제가 북한 체제보다 상대적으로 유리하고 효율적이라 하더라도 이 큰 게임에서 만에 하나라도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쩌면 오늘의 바로 이 싸움이 우리 민족의 미래 운명을 결정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소는 일방적으로 불리할 수도 있는 불공정한 룰과 편파적인 게임 운영을 감수하면서 승리를 일구어 내려면 우리의 전략적 지혜와 정부의 체제, 그리고 게임 운영의 역량면에서는 북한을 일방적으로 압도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더욱 더 국민의 공감대를 다져서 汎국민적 의지를 하나로 모으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해서 흔들림이 없게 해야 한다. 군사적 대비태세에도 소홀함이 없게 하며 韓美 안보협력체제도 튼튼하게 관리하는 등 안보태세도 끊임없이 점검하고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은 과거 우리의 선배들이 피흘려 싸우지 않았더라면 오늘 북한 주민의 저 비극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듯이 오늘 우리가 이 기회를 놓치고 또 한 세대를 보내버리면 북한 주민의 저 참상이 내일 우리의 아들 딸들의 모습이 아니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설사 어찌 어찌 해서 그러한 비극적 종말은 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 민족의 역사는 세계사의 흐름에 낙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1945년 경남 거창 출생. 육사·서울대 외교학과·美 육군대학원 졸업. 맹호사단장·수도군단장·1군 부사령관·국방대 총장역임. 盧泰愚 정부 시절 남북고위급회담 군사분과위 차석대표, 2000년 남북 국방장관 회담 차석대표 역임. 저서로 「生動하는 軍을 위하여」 「21세기 한국안보」 등.
金熙相 장군은 육사 24기 출신으로서 한국군의 대표적인 학구파 전략전문가이자 지휘관 경력 또한 연대장, 사단장, 군단장 등 빠짐이 없다. 盧泰愚(노태우)의 6공화국 때와 金泳三(김영삼)의 소위 문민정부 시절 6년에 걸쳐 청와대 국방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818계획 등 군 구조개편을 주도했고 율곡사업 등 무기도입 사업에도 관계했다. 하나회(사조직)에 들어오라는 권유를 뿌리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시절엔 지역성을 타파하고 공평한 인사에 노력했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또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으며 盧泰愚 정부 시절의 남북고위급 회담 때 군사분과위원회의 차석대표, 지난해 남북 국방장관회담 때는 차석대표로 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