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례가 드물 정도로 길었던 추석 황금연휴가 저물고 있다. 주말 지나 다음 주면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책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들이 서점가에 인기다. 문학의 계절, 가을은 아직 오고 있는 것이다. 산중의 잎맥을 붉게 적시고 강가의 물소리를 잘게 해 고즈넉이 중추(中秋)로 접어드는 시절. 연휴의 끝자락을 붙잡은 채 독서를 마치지 못한 이들을 위해 《월간조선》이 두 권의 책을 소개한다.

❶ 아쉬운 연휴 끝자락, 가을에 좋은 시집
- 유종인 《숲 시집》 (시인수첩, 2017)

유종인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이다. 자연에 소탈한 서정(敍情)과 고전적 품격의 형식이 어우러졌다. 속도와 소음으로 지쳐가는 시대, 시인은 숲의 내면과 자신의 자아를 합일시켜 그 속으로 들어가 호흡한다. 삼림욕(森林浴)을 하고나온 듯 묘사된 풍경과 섬세한 고백이 무구하다. 화자는 거울을 보듯 숲속의 만상(萬象)에 새겨진 슬픔의 내력을 더듬어가며 삶을 깨닫게 된다.

“시월은 / 하산(下山)하기 좋은 날 // 초록은 / 옥생각을 덜어 / 그 배낭에 오색(五色)을 꾸려 / 내려오고 // 우듬지보다 높은 데 / 맴돌던 잠자리는 / 쓰러진 비석의 음각 같은데 / 졸음 같은 / 곡비(哭婢) 같은 / 엎드림 // 쇠(衰)는 풀보다 / 이슬 봇짐을 진 풀잎보다 / 낮은 엎드림 / (후략)” - 시 <하산> 中

시인은 1996년 《문예중앙》으로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꾸준히 시작(詩作) 활동을 이어왔다.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되고,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으로도 등단했다. 시, 시조, 미술평론 등 각 예술장르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고전적 미학의 격조를 작품 속에 아로새겼다. 그에게 ‘숲’은 안온한 휴식의 처소를 넘어 생의 리듬을 복원하는 참다운 인식의 현장이 됐다.






❷ 아쉬운 연휴 끝자락, 가을에 좋은 소설  
- 이문열 《레테의 연가》 (둥지, 1996)

1983년 초판 출간 이래 개정판과 신판을 거듭하며 밀리언셀러 반열에 오른 저자의 장편소설이다. 저자의 여러 저술들 중 드물게 사랑의 감정과 관계의 진실에 집중한 연애소설이다. 작가는 그동안 부조리한 역사현실에 대한 정치(精緻)한 해석으로 여러 작품들을 통해 동시대 사회구조의 그늘과 맹점을 지적했다. 해당 소설에도 문제의식을 담았다. 그는 사랑의 본질을 탐색해나가며 당대 사회의 붕괴된 성(性) 규범에 대해 성찰을 촉구했다. 사랑의 심리와 도덕률 사이에서 번민하는 인간 본연의 고뇌를 묘파했다.

사랑과 성이 혼동되는 시대에 애정과 윤리의 가치를 논하며 근원적 물음을 던진다. 소설은 동료교사였던 화가 ‘민 선생’을 생각하는 20대 여성 ‘희원’의 일기로 서사를 꿰어나간다. 그들의 미묘한 관계에서 빚어지는 ‘사랑에 대한 담론과 가치관 탐색’이 중심 플롯이다. 한편 어느 논문은 ‘예술과 욕망의 중층적 관계’의 측면에서 작품을 연애소설이 아닌 예술소설로 해석하기도 했다. 단순히 두 남녀가 사랑의 진실을 함께 탐구한 수준을 넘어, 예술과 욕망의 세계에도 침투해 그 본질에 천착했다는 뜻이었다.

“비, 가을을 짙게 하는 비. 가로수 잎새들은 누렇게 물들고, 질퍽하게 떨어져 포도를 뒹굴고, 밟히고.

사진=책 표지 캡처.

그래, 먼저 그에게서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언제부터 물어 보리라 마음먹었지만 막상 만나기만 하면 깜박 잊어버리고 만 일이다. 바닷가에서 그렇게도 완강하던 그가 무슨 계기로 그 편지와 함께 이 도시로 돌아왔는가를.” - 소설 中 (이문열, <타오르는 계절>,《레테의 연가》, 둥지, 1996)

연휴는 흘러갔지만 계절은 곁에 남아있다. 생명과 사랑의 이야기를 간직한 시와 소설로 ‘가을의 감성’에 젖어보는 것은 어떨까.

글=신승민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