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리뷰] 방서현의 《내가 버린 도시, 서울》… 서울의 '네 개 동네'가 증언하는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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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도시 안에 네 개의 세상이 있다면?

 

방서현의 신작 소설 내가 버린 도시, 서울은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상징적으로 배치된 '똥수저 동네(달동네)', '흙수저 동네(주택가)', '은수저 동네(아파트 단지)', '금수저 동네(고급빌라촌)'. 이 네 동네는 단순한 지리적 구분이 아니라, 대한민국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구조를 가시화하는 메타포이다.

 

이 작품이 던지는 문제의식은 명확하다.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는 계급, 노력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구조적 불평등, 그리고 그 속에서 희미해지는 개인의 꿈. 소설은 한 아이의 눈으로 이 거대한 계급 사회 시스템을 바라본다. 동시에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는 정말 그런 것인가?

 

한 아이의 눈으로 본 '성 밖' 똥수저 동네

 

주인공 ''의 출발점은 지옥에 대한 인식이다. 길에서 주워진 아이, 부모 없는 고아, 달동네의 반지하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다. 작품의 시작 부분에서 주인공은 또래 아이들로부터 첫 낙인을 받는다.

 

"원래 고아 애들은 저래!"

"고아 주제에 까불긴!"

 

이 짧은 대사들은 한국 사회가 개인을 어떻게 판단하는지 보여준다. 능력이나 인성이 아니라, 출신과 배경으로 먼저 사람을 분류하는 메커니즘을 말한다. 놀림을 받은 아이는 숲으로 도망친다. 그곳에서만 평온함을 찾는다. 달동네의 숲은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그곳은 계급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자연의 세계, 경쟁 없는 순수함의 상징이다.

 

달동네에 대한 묘사는 사회적 낭만화가 얼마나 거짓인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TV 광고와 언론이 "이웃의 정이 남아 있는 서민 주거지"라고 미화하는 그곳의 현실은 "위생은 보장되지 않고, 밤마다 들려오는 욕설과 싸움 소리에 잠이 깨며, 아이들의 놀이 속에서도 폭력과 분노가 그대로 재현"되는 공간이다.

 

산꼭대기에 규격화된 집들이 섰고, 주민들은 모두가 같은 삶을 산다. A집의 화상 장애인, B집의 암 환자, C집의 알코올 중독자, D집의 무직자들. 이들이 모인 동네는 시간이 멈춘 듯 1970~80년대에서 정지되어 있다. 작가는 이를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정체의 느낌이자, 희망 없음의 증언이다.

 

불의 시련과 신의 손길 - 흙수저로의 전환

 

주인공의 인생을 바꾸는 사건은 극적이다. 단전, 그리고 화재.

 

"그날은 방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전등 스위치를 여러 번 다 켜도 마찬가지였다."

 

초가 켜지는 순간 방은 밝아지지만, 그 밝음도 잠시. "뭔가 타는 냄새"가 난다. 불은 순식간에 번진다. 그것이 달동네 삶의 전형성이다. 한 순간의 안정도 다음 순간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동네 주민 한 분이 불난 것을 보고 즉시 비상소화전으로 불을 껐고, 다른 주민들도 합세해 소화기로 신속하게 대응했다."

 

이 장면은 이 소설의 중요한 전환점이다. 달동네는 낭만화되지도, 완전히 악마화되지도 않는다. 거기에는 여전히 이웃과 연대가 있다. 그리고 언론의 보도로 익명의 기부자가 나타난다.

 

"화마가 모든 걸 앗아가 차가운 길 위에 나앉게 되었을 때 우리의 딱한 처지가 한 언론에 소개됐다. 그걸 본 한 익명의 기부자가 큰 액수의 성금을 우리에게 보내준 것이다."

 

행운이다. 하지만 이 행운이 구조적 변화를 의미하는가? 아니다. 주인공이 이사가는 곳은 '똥수저 동네'가 아닌 '흙수저 동네'일 뿐이다, 결국 서울의 하층부다. 반지하방. 곰팡이 핀 싱크대. 이곳도 여전히 어둡다.

 

그림으로 세상을 그리기 - 예술의 힘과 한계

 

주인공이 지옥을 탈출하는 유일한 방식은 그림 그리기이다. "하루에 30장 이상" 그린다는 주인공의 드로잉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투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가시화하려는 몸부림이다.

 

"우리 동네 주택가를 그린다. 자로 대략적인 비율만 표기하고 볼펜으로 직접 그린다. 볼펜의 강약을 조절해 나가고, 볼펜의 굵기와 힘에 의해 다양한 톤을 만든다."

 

이 세밀한 묘사는 주인공의 관찰력과 섬세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그림들에 "미래나 상상이 없다"는 언급은 처연하다. 예술이 현실을 초월하지 못한다는 것, 혹은 현실이 그토록 무거워서 예술도 현재에 갇혀 있다는 뜻이다.

 

아파트를 그리고 싶어 하는 주인공과 "꽃이나 나무를 그리지"라는 할머니의 대사는 상징적이다. 할머니는 현실을 초월하기를 바란다. 주인공은 현실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 둘 다 절박하다.

 

은수저 동네와의 마주침

 

주인공이 학교에서 영재로 불리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은수저 동네의 아파트 단지. 그곳은 "자연환경과 연계해 친환경 단지로 조성"되었고, "전철역과 백화점, 도서관, 종합병원" 등이 모두 갖춰져 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공원에서의 관찰이다:

 

"아파트 단지에는 공원이 조성돼 있다... 잔디밭에 토끼가 뛰놀고 있다. 사람들이 다가가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잔디밭에 앉아 있거나 돗자리를 펴고 누워 있다."

 

이는 단순한 공원이 아니다. 그곳은 안전하고, 아름답고, 여유 있는 삶의 상징이다. 주인공은 여기서 '학원'의 존재를 알게 된다.

 

"나는 갑자기 학원을 다니고 싶은 마음이 든다... 정말 학원에 다니고 싶다. 학원 다니고 싶은 마음이 하늘만큼 땅만큼 가득하다."

 

이 욕망은 개인적 욕심이 아니라, 사회적 배제의 경험이다. 학원에 안 다니면 "별종 취급당하고 대화에 끼일 수 없으며, 자칫하면 왕따를 당할 수 있다." 주인공은 이것을 명확히 인식한다.

 

"하지만 내게 학원이란 그저 멀리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 그것은 저 하늘의 달과 같은 존재다."

 

손에 닿지 않는 달. 이 은유는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금수저 동네의 현현 - 극과 극

 

그리고 마침내 주인공은 고급 빌라촌에 가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세상은 이렇다.

 

"저마다 개성과 특색이 있는 유로피안 양식의 품격 있는 빌라가 있는가 하면 지붕이 돋보이는 빌라, 대문이 예쁜 빌라, 감각적인 빌라, 대저택 같은 빌라, 창문이 커다란 빌라, 튼튼하고 웅장한 빌라 등이 있다."

 

주택가의 빌라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같은 친구 '단비'의 집:

 

"단비네 집은 방이 많았다. 대식구가 함께 살아도 다 못 쓸 정도로 곳곳에 방이 숨어 있다... 단비만 해도 자기 침실이 있고, 공부방과 악기방이 따로 있었다."

 

공부방의 책장에는 "교과서와 문제지를 비롯해 음악, 사회, 과학, 역사, 예술, 동화책 등 다양한 책이 비치"되어 있다. 책장이 장식품이 아니라 실제로 사용되는 교육 자원이다. 책상 위에는 "최신 컴퓨터와 아이패드, 에어팟"이 있다.

 

이 장면은 교육의 '불평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단비와 주인공은 같은 나이, 같은 학교에 다니지만, 그들이 접근할 수 있는 자원의 격차는 "외계와 지구 사이 거리"이다.

 

주인공은 이를 목격하고 "불현듯 생각이 밀려온다. 단비와 나 사는 세계가 완전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네 동네가 보이는 광경 - 시스템의 가시화

 

작품의 가장 강력한 장면은 네 동네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언덕이다:

 

"밖으로 나와 넓은 곳에서 보니, 네 동네가 눈에 다 들어온다. 그러나 그것은 극과 극을 이룬다... 창고 같은 달동네와 박스집 같은 주택가, 조각품 같은 아파트 동네, 왕궁 같은 고급 빌라촌."

 

주인공은 이 광경에서 깨닫는다:

 

"같은 시간대를 사는 동네인가란 의문이 들고, 스스로 벽을 쌓는다는 생각도 든다. 가만히 보면 동네에는 뭔가 알 수 없는 시스템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이것이 이 소설의 핵심 통찰이다. 도시의 불평등은 자연발생적이지 않다. 그것은 "작동이 완전히 멈추는 일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 숨은 시스템"이다. 도시계획, 교육 투자, 안보 시설, 상권 조성 등 모든 것이 계급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다.

 

숲속 호수에서의 장면은 이 소설의 철학적 정점이다. 호수는 "세모꼴 모양을 한 거대한 피라미드 감옥"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저마다 가진 자본에 따라 흙수저, 동수저, 은수저, 금수저 등 수저 계급으로 나뉘었으며... 사람들은 자기 계급을 유지하기 위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 칸이라도 더 오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요. 악착같이 경쟁하고 타인을 짓밟았죠. 피도 눈물도 없이 잔인하게."

 

이것은 현대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다. 능력주의와 경쟁의 신화 속에서, 실제로는 출발점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초등학교 때의 성적 우수는 사교육 격차가 벌어지는 중학교에서 무의미해진다. 성적으로는 올라도 '계급'은 올라갈 수 없다.

 

절망 속의 작은 저항 - 균열의 가능성

 

하지만 이 작품이 완전한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수저 계급론을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것을 '낮에 꾸는 백일몽', '진짜 세계가 아닌 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이미 균열이다.

 

이것은 저항의 또다른 방식이다. 총과 돌팔매로의 저항이 아니라, 개념의 전환이다. 수저 계급론을 "가상"으로 본다는 것은 그것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변할 수 있는 구성물이라는 뜻이다.

 

"더럽고 오염된 하천에서도 꽃이 핀다는 사실을 포착하는 눈, 누구도 짓밟지 않아도 되는 거대한 숲을 그려내는 상상력은, 소망이 금지된 도시 한복판에서 시작된 작은 저항이다."(문학평론가 최의진)

 

주인공의 그림 그리기, 상수리나무에 오르기, 숲속에서 호수를 찾기. 이 모든 것이 저항이다. 모두가 주어진 계급 위치를 받아들이는 와중에, 주인공은 다른 세상을 상상한다.

 

숲속 호수에서의 해방 - 또 다른 가능성

 

숲속 호수는 단순한 자연이 아니다. 그곳은 가능성의 공간이다:

 

"숲은 정말 울창해요.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 호밀처럼 가득 채우고 있어요... 숲은 푸르름이 넘칩니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을수록 머리가 시원하고 다리는 가벼워져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 있다.

 

"여기 숲속 세계는 그렇지 않아요. 수저 같은 게 없고 화폐 시스템도 존재하지 않아요. 당연히 피라미드 같은 것도 없고요. 그저 오솔길이 있고, 옹달샘이 있고, 메아리 소리가 있고 그리고 아득한 고요함이 있을 뿐이에요."

 

호수가 있는 그곳은 자본주의적 계급이 작동하지 않는 유토피아이다. 초현실적이지만 가능한 공간. 주인공이 호수 너머의 "오색구름"을 보는 것은 현실 너머의 세상을 각성하는 것이다.

 

"난 주먹을 꼭 쥐어요. 그리고 호수 너머로 뛰기 시작해요."

 

이 마지막 행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실로의 귀환? 도피? 아니면 변화의 시작?

 

화면 캡처 2025-12-17 051049.jpg

 

서울의 디스토피아화: 작가의 의도와 그 의미

 

2023년 개봉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지진으로 붕괴된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가 유일하게 남은 '유토피아'가 되면서 벌어지는 인간의 추악함을 그렸다. 건축물이라는 '콘크리트'는 안전을 약속했지만, 결국은 새로운 계급을 만들었다. 안에 있는 자와 밖에 있는 자의 극단적 분열.

 

방서현의 내가 버린 도시, 서울이 이 영화를 연상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둘 다 서울을 디스토피아로 상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방식과 의도는 상이하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극단적 상황에서의 인간 본성을 폭로하는 데 집중한다면, 내가 버린 도시, 서울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일상 자체가 이미 디스토피아임을 섬세하게 증거한다.

 

작가 방서현이 서울을 디스토피아로 상정한 것은 일시적 현상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그것은 도시의 구조 자체에 대한 진단이다. 달동네에서 금수저 동네까지, 네 개 동네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뉘어 있는 현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설계의 결과이다. 저자는 이를 명확히 인식한다.

 

"가만히 보면 동네에는 뭔가 알 수 없는 시스템이 존재하는 것 같다.

작동이 완전히 멈추는 일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 숨은 시스템이 있다."

 

'숨은 시스템'이 바로 디스토피아의 본질이다. 디스토피아란 외부적 재앙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정당화되는 불평등을 의미한다. 서울은 그렇게 작동한다.

 

저자의 선택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서울이 '글로벌 도시'이기 때문이다. OECD 선진국의 수도, 고층 빌딩과 최첨단 시설이 가득한 도시. 바로 그 '글로벌 도시' 속에 가장 원시적인 계급 체계가 작동한다는 역설이다.

 

"같은 시간대를 사는 동네인가란 의문이 들고, 스스로 벽을 쌓는다는 생각도 든다."

 

이것이 저자의 디스토피아 진단이다. 같은 도시에서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벽으로 나뉜 세계. 이것은 영화의 붕괴보다 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절망의 정도: 두 작품의 차이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공동체의 해체에 초점을 맞춘다. 아파트 단지라는 공동체가 생존 욕구 앞에 붕괴되고, 약자를 배제하는 새로운 '유토피아'를 만든다. 그것은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절망이다. 내가 버린 도시, 서울이 제시하는 절망은 더 구조적이다:

 

"초등학교 시절의 성취가 사교육과 환경의 격차가 본격화되는 이후의 삶에서도 계급 상승의 사다리가 될 수 있을지는 끝내 알 수 없다."(최의진 문학평론가)

 

주인공이 학교에서 영재라는 인정을 받아도, 학원에 못 가는 순간 그 성취는 무의미해진다. 노력과 능력이 더 이상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는 절망. 이것은 개인의 도덕적 실패가 아니라 시스템의 파괴력이다. 영화가 "인간은 본래 이렇게 이기적"이라고 선언한다면, 소설은 "시스템이 우리를 이렇게 만든다"고 증거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내가 버린 도시, 서울이 영화보다 더 희망적이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결말은 새로운 계급 질서의 형성을 보여준다. 붕괴와 재건의 악순환. 인간은 배우지 못한다. 하지만 방서현의 소설은 다르다. "모든 것이 이미 정해졌다고 믿는 대신, 그 믿음으로 작동하는 도시를 버리기로 결단하는 순간, 서울은 더 이상 완벽한 체계가 아니다." 이것이 절망과 희망의 경계선이다. 개인의 인식 전환이 시스템에 균열을 낸다는 신념이다. 소설 속 주인공이 한 것은 무엇인가? 학원의 달콤함과 아파트의 화려함에 취하지 않았고, 금수저 동네의 우월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숲에서 호수를 찾았고, 그곳에서 다른 세상을 상상했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붕괴된 건물 앞에서 무력해하는 동안, 소설의 주인공은 상상력의 무기를 들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본 후 소설 내가 버린 도시, 서울을 읽으면, 흥미로운 대조를 발견할 수 있다.

 

영화는 물리적 붕괴를 통한 진실의 노출을 보여준다. 지진이 일어나야 우리는 진실을 본다. 그전까지는 거짓의 평온함 속에 살았다. 소설은 일상 속의 붕괴를 지속적으로 증언한다. 지진을 기다릴 필요 없다. 이미 우리는 무너지고 있다.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소설의 주인공이 영화의 주인공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식이다. 영화의 아파트 주민들은 붕괴 이후에야 깨닫는다. "우리는 이렇게 나뉘어 있었구나." 그때는 이미 늦다. 폭력만 남는다. 소설의 주인공은 붕괴 이전에 깨닫는다. 상수리나무 위에서, 아파트 동네를 내려다보면서, 네 동네의 모습을 한 눈에 보면서. 그리고 그 인식이 또 다른 선택을 가능하게 한다.

 

작가의 메시지: 절망이 희망으로

 

흥미롭게도, 영화 제목 콘크리트 유토피아'콘크리트'와 소설의 도시 서울이 모두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영화의 콘크리트는 부서진다. 절망의 상징이 물리적으로 붕괴된다. 반면 소설의 콘크리트는 견딘다. 반지하방도, 다가구 주택도, 아파트도, 빌라도 모두 콘크리트로 지어졌고, 계속 견디고 있다. 그래서 더 무섭다. 하지만 주인공이 숲으로, 호수로 간 것은 콘크리트의 폭력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물리적으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으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소설 내가 버린 도시, 서울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 도시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

 

영화의 답은 "아니다. 절망적이다". 소설의 답은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상상할 수 있다". 이 미묘한 차이가 문학의 가치다. 절망도 절망이지만,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 상상력 그것이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은 비관이 아니다. 오히려 낙관의 선포이다. 도시를 버렸다는 것은 그 도시의 가치관을 거부했다는 뜻이고, 도시가 흔들린다는 것은 변화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영화가 물리적 지진으로 시스템의 붕괴를 보여준다면, 소설은 정신적 지진으로 그것을 예고한다. 개인의 각성이 모여 집단의 변화가 되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도시를 흔들 것이라는 신념이다..

 

이것이 작가 방서현의 메시지다. 절망 속의 희망과 현실 속의 저항이 내가 버린 도시를 새롭게 꿈꾸는 균열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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