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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부패 스캔들로 망명길 오른 후안 카를로스1세는 누구인가?

1981년 쿠데타 때는 "내 시체 위에서 쿠데타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며 민주헌정 수호....2012년 이후 1000억원대 비자금 조성, 외도로 추락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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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2월 23일 오후 5시. 레오폴드 칼보 소텔로 신임 수상에 대한 인준 투표가 진행 중이던 스페인 국회 의사당에 일단의 경찰군(스페인 등 남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있는 군과 무장경찰의 중간쯤 되는 부대. 보안군, 헌병 등으로도 번역됨. 당시 국내 언론에는 민병대로 표기되었음) 병력이 난입했다. 이들은 “움직이면 쏜다!”고 외치면서 기관총을 천장에 난사했다. 아돌포 수아레스 전 수상, 소텔로 신임 수상, 펠리페 곤잘레스 사회노동당 당수, 산티아고 카리요 공산당 당수 등은 공포에 질려 숨을 죽였다. 
무장병력의 지휘관인 안토니오 테헤로 몰리나 중령이 나타났다. 그는 6년 전 세상을 떠난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의 추종자였다. 테헤로 중령은 국회의장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면서 “쿠데타가 성공했다. 발렌시아군구(軍區) 사령관 헤이메 밀란스 델 보시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군사정권이 수립됐다”고 선언했다. 같은 시간, 이들의 상관인 보시 장군은 자신의 관할 구역 내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병력을 출동시켜 주요 시설들을 점거했다.
스페인이나 라틴아메리카에서 흔히 보던 쿠데타가 다시 발생한 것이다. 때는 36년간 스페인을 철권통치했던 독재자 프랑코 총통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프랑코 사후(死後) 막 걸음마를 떼고 있는 스페인 민주주의는 이렇게 해서 다시 압살(壓殺) 당할 지경에 처했다.

하지만 여기서 반전(反轉)이 일어났다. 국왕인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쿠데타를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원래 쿠데타 세력은 테헤로 중령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면 군부(軍部) 수뇌부와 왕궁에서 근무하는 군 장교들이 후안 카를로스 1세를 설득, 국회의사당에 국왕이 나와서 쿠데타 지지 선언을 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쿠데타에 가담한 장교들은 후안 카를로스 1세에게 프랑코 총통 사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바스크분리주의자들의 테러, 지방 분리주의 대두, 정치인들의 무분별한 정쟁(政爭)으로 국가의 존립과 안보가 위기에 처했다면서 쿠데타 지지를 요청했다. 하지만 후안 카를로스 1세는“스페인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헌법상의 임무를 끝까지 다하겠다”면서 이렇게 일갈했다.
“귀관들은 내 시체 위에서 쿠데타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전국의 주요 군 지휘관들에게 전화를 걸어 쿠데타에 단호히 반대한다는 자신의 뜻을 전하고, 쿠데타에 동조하지 말라고 엄명(嚴命)했다. 여차하면 쿠데타에 동조하려고 했던 많은 지휘관들이 국왕의 단호한 의지를 접하고 난 후 국왕과 합헌정부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이렇게 군부의 동요를 차단하고 난 후, 후안 카를로스 1세는 군 수뇌부를 대동하고 군복 차림으로 국영TV에 나와 “합참의장을 비롯한 주요 군 지휘관들은 합헌정부에 충성하고 있다”고 밝히고 국민들에게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국왕의 이런 단호한 결의 앞에 쿠데타세력은 눈 녹듯 녹아버렸다. 발렌시아군구 사령관 보시 장군은 자신의 병력 출동은 공공안녕질서를 위한 것이었다고 변명하면서 병력을 철수시켰다. 당초 바스크테러리스트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는 줄 알고 테헤로 중령을 따라 나섰던 경찰군 병력도 속속 투항했다. 결국 테헤로 중령도 투항했다. 상황이 종료된 후 국회의사당을 나선 의원들은 환호하는 군중들 앞에서 “자유 만세!” “민주주의 만세!”를 외쳤다.
이렇게 해서 스페인의 역사를 후퇴시킬 뻔 했던 쿠데타 시도는 무산되었다. 이후 스페인의 민주주의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사실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쿠데타에 그렇게 단호하게 반대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후안 카를로스 1세를 그 자리에 앉힌 사람이 바로 독재자 프랑코 총통이었기 때문이다.
1931년 알폰소 13세가 퇴위한 후 스페인은 공화국이 됐다. 군부와 극우 파시스트 팔랑헤당, 왕당파(카를리스타)의 지지를 얻어 내전(內戰)에서 승리한 프랑코는 국체(國體)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은 채 철권통치자가 됐다. 프랑코는 1948년이 되어서야 자신의 사후에는 왕정(王政)으로 돌아간다는 후계구도를 마련하고 알폰소 13세의 손자인 후안 카를로스를 차기 국왕으로 내정했다. 당시 열 살이던 후안 카를로스는 귀국해서 사관학교에 입교, 후계자 수업을 밟기 시작했다.
1973년 6월 프랑코 총통은 해군 제독 출신인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를 수상에 임명했다. 프랑코는 후안 카를로스는 명목상의 국왕에 앉히고, 블랑코에게는 실권(實權)을 넘겨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해 12월 블랑코 수상이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폭탄테러로 사망하면서 프랑코의 구상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1975년 11월 20일 프랑코 총통이 사망했다. 이틀 후 후안 카를로스1세가 국왕으로 즉위했다. 국내외의 많은 이들이 젊은 국왕이 36년간 이어져 온 프랑코 독재의 강고한 틀을 깨기 어려울 것으로 보았다. 국왕이 수상으로 임명한 아돌포 수아레스도 프랑코 치하에서 국영방송 사장을 지냈던 구(舊)시대의 인물이었다. ‘혹시나’하면서 새 국왕에게 기대를 걸었던 이들은 ‘역시나’하면서 실망했다.
하지만 후안 카를로스 1세와 아돌포 수아레스 콤비는 조용히 민주화의 길을 밟기 시작했다.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공산당을 합법화했으며 1977년에는 41년만에 자유총선을 실시했다. 1978년에는 새로운 민주헌법을 공포했다.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있었다. 특히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테러, 카탈루냐 등에서의 분리주의 대두, 경제난 등은 수아레스 정부에게 큰 부담이 됐다. 프랑코주의의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군부는 수아레스를 우유부단하다고 비난했다. 결국 수아레스가 사임하고 그 후임을 선출하던 날 쿠데타가 발생했던 것이다. 

단호한 의지로 쿠데타를 진압한 이후 후안 카를로스1세는 ‘스페인 민주주의의 아버지’ ‘국부(國父)’로 추앙받았다. 18세기 후반 이래 실정(失政)과 추문(醜聞), 독재로 민심과 이반되었던 스페인 왕실은 모처럼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됐다.
그러던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추락하기 시작한 것은 2012년부터였다. 당시 그는 아프리카 보츠와나에 코끼리 사냥여행을 하러 갔다가 부상을 당했다. 글로벌 금융-재정위기로 국민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 국왕은 호화판 외유(外遊)를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국민들은 분노했다. 2013년에는 막내인 크리스티나 공주 부부의 공금 횡령 스캔들이 터졌다. 결국 후안 카를로스 1세는 2014년 6월 아들인 펠리페 6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退位)했다. 하지만 스캔들은 끝나지 않았다.
2018년 8월에는 10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 돈세탁을 했다는 폭로가 터졌다. 스페인 기업이 수주한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메디나 고속철도 건설 대금 2억1000만유로(약 2715억원)의 지급 지연에 대한 중재 대가로 사우디로부터 8000만유로(약 1035억원)를 받은 뒤 그 돈을 사촌 명의 스위스 계좌에 넣어 돈세탁을 했다는 것이다. 모로코의 부동산을 차명(借名)으로 매입했다는 스캔들도 함께 나왔다. 
이런 사실을 폭로한 사람은 다름 아니라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내연녀(內緣女)였던 독일 여성 자인-비트겐슈타인이었다. 그녀는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나와 결혼하려고 소피아 왕비와 이혼을 하려 했는데, 사우디로부터 받은 돈을 위자료로 쓰려 했다”고 주장했다. 2012년 보츠와나 코끼리 사냥 여행에 동행했던 사람도 그녀였다. 망신살이 뻗친 것이다.
이후 2년여 동안 자신과 왕실을 향한 따가운 시선을 감내해 왔던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이러한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최근 망명길에 올랐다. 8월 3일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아들 펠리페 6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왕실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현재 카리브해의 도미니카공화국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의 국부, ‘스페인 민주주의의 아버지’에게는 너무나 초라한 말로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추락하게 만들었을까? 혹시 ‘스페인에 민주주의를 갖다 준 나는 무슨 일이든 해도 된다’ ‘국민들이 이렇게 나를 사랑하고 존경하는데 이런 정도의 잘못은 국민들이 넘어가 주겠지’라고 하는 자만(自慢), 아니 교만이 그를 실족(失足)하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도 현직 국왕의 아버지, 스페인에 민주주의를 갖다 준 전(前) 국왕을 향해 거침없이 수사의 칼날을 겨누는 스페인을 보면, ‘스페인의 민주주의는 살아있다’. 

입력 : 20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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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 ‘어제 오늘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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