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하드록 아티스트 Led Zeppelin, Black Sabbath, Jimi Hendrix

[阿Q의 ‘비밥바 룰라’] VH1's "100 Greatest Artists of Hard Rock" ⑩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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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음악전문 채널 VH1이 2006년 2월 6일 ‘하드 록의 위대한 예술가 100인’을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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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헤비메탈 음악 장르에 국한된 아티스트들이지만, 팝 역사에 빠질 수 없는 인물들이다. 100 명의 아트스트 중 10명씩 끊어서 10번에 걸쳐 소개한다.
 
1~10위는 말이 필요없다. 그 자체로서 전설이다. 대개가 그룹이다. 지미 헨드릭스만이 솔로로 이름을 알렸지만 그 역시 밴드에서 활동했다. 하드록이란 장르는 아무래도 기타와 베이스, 드럼을 통해 구현된다. 멤버들과 오랜 호흡을 통해 동지적 결속으로 표현되는 장르가 하드록인가 보다. 흥미로운 점은 멤버들의 교체가 거의 없는 밴드가 오래간다는 사실이다. 레드 제플린의 경우 드러머인 존 본햄이 사망하자 아예 밴드를 해체해 버렸다. 블랙 사바스는 보컬 오지 오스본이 이탈했으나 훗날 다시 복귀했다.
 
1.   Led Zeppelin 1944년 영국 미들섹스 주 헤스턴에서 태어난 지미 페이지(Jimmy Page)는 열두 살 무렵 스코티 무어(Scotty Moore)가 기타를 연주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Baby Let's Play House’를 듣고 감동받아 처음 기타를 잡았으며, 열네 살 때 스키플 밴드의 멤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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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
한때 아트 스쿨에서 미술을 공부하기도 했던 그가 1963년~65년 중에 영국의 록음악 계에서 최고의 스튜디오 기타리스트 세션맨으로 인정받게 되었는데, 대표적으로 더 후(The Who), 킹크스(Kinks),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 밴 모리슨(Van Morrison), 마리안느 페이스풀(Marianne Faithfull), 톰 존스(Tom Jones), 도노반(Donovan) 등의 앨범에 기타 연주자로 참가했다.
 
당시에 그는 디스토션과 피드백 테크닉 및 빠른 운지법 등을 심도있게 실험하고 연구하면서 자신만의 예술적인 기타 사운드를 확립해가는 중이기도 했다(특이한 것은, 이 당시 지미의 왕성한 활약상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고 지미 자신도 당시의 추억을 입 밖으로 거의 내지 않아, 이 시기는 ‘지미의 수수께끼 시대’라고 불림).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채롭게 명암이 섞인 기타 사운드로 스튜디오의 프로듀서들이 가장 선호하는 세션 기타리스트가 된 그는, 1965년 말에 (소위 영국의 3대 기타리스트인 Eric Clapton, Jeff Beck, Jimmy Page가 몸담게 되는) 블루스 록그룹 야드버즈(Yardbirds)에 에릭 클랩튼의 후임으로 가입할 것을 매니저 조르지오 고멜스키(Giorgio Gomelsky)에 의해 제안 받았으나, 세션맨으로 잘 나가던 이 때에는 일단 건강상 이유를 들어 거절하고 대신 어릴 적 친구인 제프 벡을 그 자리에 천거했다.
 
그러나 다음 해 6월에 결국 야드버즈에 폴 사무엘 스미스(Paul Samuel Smith)의 후임 베이시스트로 임시 가입하게 된다. 이후에야 원년 멤버로서 리듬 기타를 치던 크리스 드레자(Chris Dreja)가 베이스로 옮겨오면서 지미는 다시 기타리스트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로써 록 역사상 처음으로 제프 벡-지미 페이지의 강력하고 화려한 트윈 리드 기타 라인업이 출현하게 되었다. 참신한 사운드로 야드버즈는 코카콜라 광고에 출연하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 감독의 영화 에 등장할 정도로 폭넓은 인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66년 9월 롤링 스톤즈와의 미국 투어 이후 제프 벡이 건강 문제 등 일신상 사유로 야드버즈를 떠났으며 이후 4인조로 활동하며 지쳐가던 야드버즈는 결국 68년 7월 7일 런던의 루톤 공대(Luton College of Technology) 공연을 마지막 활동으로 해산하게 된다.

야드버즈의 해산 후, 밴드의 잔존 멤버로서, 소울과 블루스의 융합이라는 야드버즈의 음악적 이상을 더 모험적이고 다이나믹하게 확장하고자 했던 페이지가 밴드의 이름에 대한 권리 및 계약 의무를 인수하였는데, 당시에 여전히 야드버즈의 이름으로 스칸디나비아의 나라들에서 연주 여행을 해야 하는 법적 의무가 남아있는 상태였다. 지미가 68년 가을에 자신이 리더가 되어 새 밴드를 결성하려고 했으며, 야드버즈의 마지막 매니저로서 일해오던 듬직한, 거구의 친구 피터 그랜트(Peter Grant)가 그의 뒤를 봐주었다. 지미페이지가 새 밴드를 구상한다는 《 Disc & Music Echo》지의 광고를 보고 밴드에 처음으로 가담하려 한 이는 역시 당대에 잘 나가던 동료 세션맨이던 존 폴 존스(John Paul "JONESY" Jones, 이하 존스)였다. 전에도 페이지와 함께 녹음 세션을 한 바 있던 그는 정규 클래식 음악 교육을 제대로 받고, 베이스뿐만 아니라 피아노, 키보드 오르간 등 뭐든지 손에 쥐기만 하면 명연주를 펼칠 수 있는 다재다능한 인물이었으며 동시에 오르간의 저음부에 천착하던 일류 편곡자였다.
 
반면 그 이후에 접촉하여 가입한 미드랜드(Midlands) 출신인 보컬리스트 로버트 플랜트(Robert Plant)와 드러머 존 본햄(John Bonham)은 둘 다 업계에서 상대적으로 무명들이었는데, 페이지가 현명하게 그들의 재능 및 열정을 판단하였다. 애초에 지미 페이지는 보컬리스트로 테리 리드(Terry Reid)를 유력 후보로 염두에 뒀는데 솔로 지향적인 테리가 대신에 로버트 플랜트(Robert "PERCY" Plant, 이하 퍼시)를 추천하였단다.
 
소설 〈반지의 제왕〉에서 이름을 딴 밴드 홉스트위들(Hobbstweedle) 출신의 엘비스 록큰롤 매니아인 플랜트의 야생적인 고음역 샤우팅에 첫눈에 반해 페이지가 그를 보컬리스트로 영입하기로 결정했다. 드러머로, 지미 페이지는 윌슨(B. J. Wilson)을 영입하고자 했는데, 페이지에 의해 발탁된 플랜트는 전에 밴드 오브 조이(The Band Of Joy)에서 같이 활동했었던 존 본햄(John "BONZO" Bonham, 이하 본조)을 드러머로 강력하게 밀었다. 팀 로즈(Tim Rose)의 밴드에서 활동 중이던 그의 천부적인 극강의 드러밍 또한 페이지의 맘에 한눈에 들어 본햄도 스카우트되었다.

68년 8월에 본조가 가입함으로써 결국에 최종 라인업을 확정한 슈퍼세션급 테크니션 4인들이 여러 갈래의 이질적인 음악적 개성을 바탕으로 한 제각기 독특하고 쟁쟁한 최고의 음악적 기량들을 가지고 8월 15일 제라드 가(Gerrard Street)에서의 첫 리허설을 거쳐 의기투합하게 되었다(이들의 구성에 대해 후에 왕년의 비틀즈 4인 구성과의 비교가 따르기도 함). 또한, 이들에게는 밴드라는 하나의 덩어리 안에서 이런 차이점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지혜로운 노하우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양보와 조율의계속적 반복을 밴드로서의 통일된 사운드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그 각각의 개성이 조화롭게 균형된 사운드가 제플린 특유의, 전례 없는 야성미와 리듬감을 낳았다. 짜릿하게 고압전류에 연결된 듯 야성적인 블루스록 리프를 감칠맛나게 선보이는 페이지의 기타 및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을 연상케하며 거친 여성의 목소리 톤으로 내지르는 날카로운 금속 질감의 플랜트의 강력한 보컬이 앞장서지만, 섬세한 편곡자 존스의 풍성하고 밀도높게 감싸는 지원 사운드 및 마치 코끼리가 발걸음을 내딛는 듯한 본햄의 강력하고 묵직한 해머 드러밍 비트가 공간감을 창출하며 사운드를 적절하고도 안정적으로 받쳐줘, 전체로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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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석이 쓴 《레드 제플린 디스코그래피》
그리고 그 밴드는 멤버 변화 없이, 커다란 불화도 없이 10년 넘게 유지되며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여 음악적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네 명이 밴드명을, 야드버즈를 계승해 뉴 야드버즈(New Yardbirds)로 했는데 그것은 야드버즈에 대한 대단한 애착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주위의 흥행사들이 새로운 이름을 지어 출범할 경우 공연 홍보에 위험이 따른다는 의견이 있어, 흥행사들의 셈법을 신중하게 보수적으로 따르기로 한 것일 뿐이었다.
 
뉴 야드버즈가 곧바로 68년 9월의 2주 동안에, 이미 계약된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에서 공연 의무를 성공적으로 이행하였다. 이들은 몇 곡의 오래된 야드버즈 넘버 및 ‘Communication Breakdown’, ‘I Can't Quit You Baby’, ‘You Shook Me’, ‘Babe I'm Gonna Leave You’, ‘How Many More Times’ 같은 신곡을 연주했다.
영국으로 돌아온 뒤 68년 9월 말에, 밴드가 서부 런던의 올림픽 스튜디오로 들어가 데뷔 앨범 제작에 착수했고 그 와중에 드레자의 밴드명 사용 중지 경고 서한(cease and desist letter)을 받은 페이지가 밴드명을, 미친 개(Mad Dogs) 같은 걸 후보로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으로 개명하였다.
 
이후 그 밴드의 명의로 발표된 10장의 앨범들 모두가 록의 역사 그 자체가 되고 결국에 전설이 되었다. 레드 제플린의 음반 판매고는 전 세계적으로 2억 장 내지 3억 장으로 추산된다. (정유석이 쓴 《레드 제플린 디스코그래피》의 머리말에서 인용. 더 자세한 내용은 책으로 확인하세요.)
 
2.   Black Sabbath 1970년에 나온 영국 하드록 밴드인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의 데뷔앨범 《블랙 사바스》는 한국 나이로 올해 쉰이다. 으스스한 분위기, 어두운 내면이 묻어나올 것 같은 이 앨범은 커버 사진부터 음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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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앨범 《블랙 사바스》(1970)
낡은 주택의 버려진 뒷마당 같은 곳에 선, 검은 옷에 산발을 하고 피부는 백지장처럼 흰 여성이 등장한다. 비극을 응시하는 마법사와 닮았다. (그러나 앨범 커버를 찍은 현장은 영국 템스 강가, 물레방아가 있는 아늑한 곳이다. 사진을 기이하게 연출했을 뿐이다.)
 
  어쨌든 이 앨범에 ‘세계 최초의 헤비메탈 앨범’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당대 신통치 않거나 볼품없는 음악들에 대한 만가(挽歌) 같은 느낌을 준다. 혹자는 이 음악들이 인간의 사악함을 드러낸다고 하지만 신(神) 아래 사악하지 않은 인간이 없다면 내면의 아픈 새끼손가락일 것이다. 그런데 발매일이 ‘13일의 금요일’(1970년 2월 13일)이어서 많은 이의 입방아에 올랐다. 노이즈 마케팅을 한 것이다.
  
첫 곡 ‘블랙 사바스’와 두 번째 곡 ‘더 위저드(The Wizard)’, 앨범 A면 네 번째 곡인 ‘N.I.B’에서 보여준 기저 버틀러(Geezer Butler·베이스)와 토니 아이오미(Tony Iommi·기타)의 격렬하면서도 육중한 기타 연주는 이전의 록 음악에서 들을 수 없었다. 또 오지 오즈본(Ozzy Osbourne·보컬)의 동물적인 외침도 ‘레어 스테이크’를 씹는 것처럼 날것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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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사바스
이들의 사운드가 음산하게 들리는 것은 이유가 있다. ‘유리 지갑’ 때문이었다. 앨범 제작비가 없어 이틀 만에 뚝딱 만들었는데, 녹음 설정도 스튜디오가 아니라 라이브에 맞춰놓아야 했다. 기타리스트 토니의 말에 따르면, 1969년 10월 16일 단 하루 만에 거의 모든 녹음을 끝냈다. 녹음시간은 총 12시간. 이튿날 종소리나 천둥, 비 효과음을 추가한 것과 ‘N.I.B’에 더블 트랙(기타 솔로)을 추가한 것이 전부였다.
  
게다가 당시 토니는 손을 다쳐버렸다. 부득이 기타 줄을 반음 낮춰 E 플랫으로 튜닝했는데 그 때문에 기타 사운드가 더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우연치고는 묘하다.
이 앨범은, 어떤 행간(行間)이나 암시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공포와 어둠, 죽음 같은 것이 주제다. 지금은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지고 웃어넘기지만 1970년대 사람들에겐 이들의 퍼포먼스가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첫 곡 ‘블랙 사바스’는 교회 종소리가 들리고 폭풍우와 함께 블루스풍의 록 음악이 시작된다. 무거운 느낌을 주는 반복적인 리듬과 오지(오즈본)의 날 선 음성이 들린다. 그 음성은 전체 6분20초나 되는 긴 곡에 1분24초쯤 시작된다. 전주(前奏)가 짧은 요즘 음악과 매우 다르다. 노랫말은 이렇다.
블랙 사바스는 첫 앨범을 낸 바로 그해 발매한 두 번째 앨범 〈파라노이드(Paranoid)〉로 전설의 대열에 들어섰다. 그들을 추종하는 수많은 밴드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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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Jimi Hendrix 지미 헨드릭스는 1960년대말에 출현한 록 기타리스트들 중 가장 혁신적이고 영향력 큰 인물의 하나로 꼽히며, 찰리 크리스천(Charlie Christian) 이후 가장 중요한 일렉트릭 기타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또 기타를 전자 사운드의 동력원으로 사용한 선구적 인물이었다. 물론 그 이전의 록 연주자들도 피드백(feedback)과 디스토션(distortion)을 실험했었으나 그는 그러한 사운드 효과들과 다른 사운드 기법들을 아주 개성적인 체취로 자유롭게 변형, 발전시켰다. 그의 정형, 비정형의 기타 사운드를 가리지 않고 발휘되는 탁월한 연주솜씨는 많은 사람들이 모방해 왔다. 또 그의 이미지 즉, 어찌할 수 없을만큼 마력을 뿜어내는 사이키델릭 음악의 주술사로서의 이미지는 록계에 있어서는 하나의 원형이 되었다.

10대 시절 헨드릭스는 블루스 기타리스트 무디 워터스(Muddy Waters)와 비비 킹(B. B. King), 그리고 척 베리(Chuck Berry), 에디 코크란(Eddie Cochran)같은 록 연주자들의 레코드를 들으면서 기타를 독학했다. 고등학교에서는 밴드 활동을 한 그는 59년 미군에 입대했는데 61년 낙하산 사고로 불명예 제대한 뒤에는 지미 제임스(Jimmy James)라는 가명 아래 떠돌이 연주자로 일했다.

64년, 뉴욕시로 옮기기 전까지 그는 샘쿡(Sam Cooke), 비비킹,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 재키 윌슨(Jackie Wilson), 아이크 & 티나 터너(Ike & Tina Turner), 윌슨 피켓(Wilson Pickett) 등의 보조 연주를 해주었다. 뉴욕으로 간 그는 킹 커티스(King Curtis), 아이슬리 브라더스(Isley Brothers), 존 폴 하몬드(John Paul Hammond), 커티스 나이츠(Curtis Knight) 등과 클럽가에서 연주활동을 펼쳤다.

그는 65년에 자신의 밴드 Jimmy James & the Blue Flames를 결성, 그리니치 빌리지의 커피하우스를 돌며 연주했다. 그러던 중 애니멀스(Animals)의 채스 챈들러(Bryan James "Chas" Chandler)가 그를 발견, 66년 가을에 런던으로 데려갔고 이어서 베이스에 노엘 레딩(Noel Redding), 드럼에 미치 미첼(Mitch Mitchell)을 가입시켜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Jimi Hendrix Experience)를 출발시켰다.

이들의 첫 싱글 ‘Hey Joe’는 67년초, 영국 차트에서 6위에 올랐고 곧이어 ‘Purple Haze’와 데뷔앨범 《Are You Experienced?》가 등장했다. 그리고 헨드릭스는 런던 팝계에 흥분을 몰고온 존재가 되었다. 한편 미국에서도 헨드릭스 열풍에 대한 소식은 전해졌으나 67년 여름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Monterey Pop Festival)에 출연하기 전까지는 미국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앨범도 발매된 바 없다. 몬트레이 페스티벌에서의 연주는 헨드릭스가 그의 기타를 불태워 절정을 이루었으며 후에 영화 〈몬트레이 팝(Monterey Pop)〉으로 제작되었다.

이 공연으로 그는 수퍼스타가 되었다. Expericnce가 미국의 어머니들의 주장에 따라 몽키스(Monkees) 순회공연에서 제외되었다는 등 갖가지 이야기들은 지미 헨드릭스의 신화를 이루는 데 역활을 했으나 그 자신은 스스로를 스타라기 보다는 연주인으로 생각했다.

68년초 두번째 미국 순회공연을 개시한 직후부터 그는 격렬한 무대 연출을 그만두고 단순히 음악만을 연주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비평가들의 혹평은 그로 하여금 자신에게 있어 최선의 음악은 스튜디오와 클럽의 비형식적인 배경 아래서만 나올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고, 이에 헨드릭스는 뉴욕에 자신의 독자적인 스튜디오 일렉트릭 레이디랜드(Electric Ladyland)를 세웠다.

그는 음악적인 아이디어들을 실험하는데에 열중했으며 존 맥러프린(John McLaughlin), 래리 코리엘(Larry Coryel)l, 그룹 트래픽(Traffic) 등과 함께 잼을 벌였다. 특히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헨드릭스의 창의성을 존중하여 그와 녹음할 계획도 세운 바 있으며 밥 딜런(Bob Dylan)은 자신의 노래 ‘Like A Rolling Stone’, ‘All Along The Watchtower’, ‘Drifter's Escape’ 등을 헨드릭스가 녹음해준데 대한 보답으로 ‘All Along The Watchtower’를 헨드릭스 스타일로 연주하기도 했다.

68년말경 매니저인 채스 챈들러와 공동 매니저 마이클 제프리(Michael Jeffrey) 간에 의견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제프리는 헨드릭스가 전위적인 취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인데 결국 상황은 제프리의 우세로 돌아갔다.

당시 헨드릭스는 흑인 운동가들로부터 밴드 멤버들을 모두 혹인으로 해서 혹인 청중들을 상대로 연주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거리들은 Experience 내부에 이미 싹트고 있던 긴장상태를 심화시켜 69년초, 노엘레딩은 그룹을 떠나 팻 매트리스(Fat Mattress)를 결성하였다. 이에 지미는 군대시절의 친구 빌리 콕스(Billy Cox)를 대신 가입 시켰으나 얼마 안 있어 8월에 결국 Experience는 해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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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헨드릭스의 첫 앨범 《Are You Experienced?》(1967).

그후 헨드릭스는 우드스톡(Woodstock) 페스티벌에 일렉트릭 스카이 처치(Electric Sky Church)라는 이름의 비공식 합창단과 함께 출연했다. 그해 말, 그는 빌리 콕스, 그리고 예전에 함께 윌슨 피켓의 보조연주를 했던 버디 마일스(Buddy Miles, 당시 Electric Flag에 재적) 와 함께 전원 혹인으로 구성된 밴드 오브 집시(Band Of Gypsies)를 결성했다. 이들이 69년 신년 전야제로 뉴욕 필모어 이스트(Fillmore East)에서 벌인 데뷔 공연은 녹음되어 그들의 유일한 앨범으로 나오게 된다. 하지만 얼마 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벌인 공연도중 헨드릭스는 무대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몇 달 후 다시 공연을 벌였는데 이번에는 미치 미첼과 빌리 콕스와 함께였고 이들 3인은 헨드릭스의 독자적인 앨범으로는 마지막 작품인 《Cry Of Love》를 녹음했고, 70년 8월에 헨드릭스의 마지막 공연이었던 와이트섬(Isle Of Wight)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그 한 달 후 헨드릭스는 사망했다. 사인은 검시결과에 의하여 바르비투르산염 중독으로 구토하다가 질식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물론 자살에 대한 소문도 나돌았지만 모든 정황으로 보아 우연한 사고임이 확정적이었다.
그가 죽은 후 예전에 녹음해놓은 것은 한구절도 빠짐없이 모두 앨범으로 꾸며져나왔는데 모두 100장에 달했다.

고용 기타리스트로 일하던 시절부터 그가 벌인 실황공연, 잼 세션, 그리고 인터뷰나 대화까지 해적판이나 공식앨범으로 나온 이들 음반중에서 가장 주목을 끈 것은 앨런 더글러스(Alan Douglas)가 제작한 일련의 앨범들이었는데 이는 헨드릭스의 마지막 1년간 Electric Ladyland 스튜디오에서 혼자 연주한 것을 녹음한 것들이었다. 이 앨범들은 그가 헨드릭스의 재산 관리인측으로부터 허가를 맡아 어떤 트랙은 지우고 어떤 트랙은 더빙(dubbing) 하여 편집한 앨범들이었다. (《월간팝송》 기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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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AC/DC
AC/DC의 나이는 1974년에 결성됐으니 마흔일곱이다. 밴드의 리더 앵거스 영(Angus Young)은 지금 62세, 형인 말콤 영(Malcom Young)은 64세 일기로 2017년 사망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원로 밴드가 되었다.

호주 출신의 이 밴드는 레드 제플린이나 딥 퍼플과 다르다. 세련미나 고급스러움보다는 거칠고 대담한 메탈에 가장 가깝다고 할까. 블루스의 영향을 받아서 끊어질 듯하면서도 이어지는 열정과 코드 선율의 우아함, 절제미까지 갖추고 있다. 혹자(배철수)는 “8비트로 초지일관하는 단순 메탈의 마력, 언뜻 보면 별 특출한 것이 없는 듯 들리지만 가공하지 않은 생음악의 매력이 있다”고 말한다.
본 스콧(Bon Scott)의 거친 보컬과 늘상 반바지 교복을 입은 리드 기타리스트 앵거스 영과 그의 형 말콤 영의 기타 리프가 메탈 팬들의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군말하기 좋아하는 음악평론가들이나 팬들은 AC/DC의 ‘Highway to Hell’과 Led Zeppelin의 기념비적인 곡인 ‘Stairway To Heaven’을 곧잘 비교한다.
어째서 그럴까? 두 곡은 전혀 분위기가 다른데도 말이다.
한 곡은 완전한 하드록이다. 다른 곡은 부드럽기 그지없는 발라드다.
음악적으로 표현하자면 한 곡은 길고 부드러운 발라드(a long soft ballad)지만 다른 곡은 빠르고(uptempo) 강한 타격(hard-hitting)의 짧은 록 송(short rock song)이다. 그러나 두 곡이 서로 다르다는 점에서 보완적이라고 할까. ‘지옥/천국’, ‘고속도로/계단’ 식으로 말이다. 두 곡의 공통점은 많은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여전히 사랑받는 곡이라는 사실이다.
 
5.   Metallica 제임스 헷필드(James Hetfield, 보컬, 기타), 커크 해밋(Kirk Hammett, 기타), 로버트 트루히요(Robert Trujillo, 베이스), 라스 울리히(Lars Ulrich, 드럼)로 이뤄진 전설적인 밴드다. 1983년 1집 앨범 《Kill Em All》로 데뷔했다. 2009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6.   Nirvana 영국 BBC 방송은 지난 2019년 2월 20일 ‘우리가 커트 코베인을 아직도 사랑하는 6가지 이유’라는 인터넷판 기사를 통해 너바나와 커트 코베인의 인기를 이렇게 분석했다.

① 너바나는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로 시대를 앞섰다. ②커트 코베인은 빼어남의 전형일지 모르지만 그는 인기에 무심했다. ③그가 만든 음악은, 당대 세대에게 영감 받은 것이었다. ④너바나의 공연은 전설이었다. ⑤커트 코베인의 말은 지금도 울림이 있다(His words still resonate today). ⑥너바나의 마지막 앨범은 그들이 가야 할 길을 보여주었다(pointed the way forward).

 너바나는 그들의 사운드를 표방하는 수백만 개의 밴드를 탄생시켰다. ‘Smells Like Teen Spirit’을 연주할 때 집게손가락으로 현을 눌러 울리는 코드주법(일명 barre chords)은 기타를 처음 배우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배우게 된다. 하지만 생전 커트 코베인은 자신의 재능에 심드렁했다. 1991년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나는 너바나가 다른 이들의 노래를 배우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그렇게 밴드를 만들지 않았다. 우리는 충분히 좋지 않았고, 인내심을 가졌기에 우리는 그 에너지를 우리가 지닌 재능에다 쏟아부을 수 있었다. 당신이 학교에서 배우듯, 우리도 배움으로부터 나왔고 여전히 배움 속에 있다.”

  너바나는 해체되고 커트 코베인은 세상을 떠났으나 그들은 미국 록 음악 역사에 신화가 됐다. 마치 아무리 올라도 산정(山頂)이 안 보이는 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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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Van Halen 출신의 밴 헤일런 형제. 1968년 미국 LA에 정착. 1970년대 미국 헤비메탈을 부흥시키다! 리더 보컬이었던 데이비드 리 로스(David Lee Roth)가 1985년 탈퇴했다가 1996년 합류했다. 그러나 1년도 안 돼 다시 달퇴했으나 2007년 재합류, 지금까지 활동 중이다.

로스가 없을 때는 새미 해이거(Sammy Hagar)가 대신했다. 그는 1985~1996년 사이, 2003~2005년 사이에 반 헤일런의 리더 보컬을 맡았다. 로스와 해이거는 곧잘 비교가 되는데, 로스가 거칠고 헤비메탈적인 목소리를 지녔다면 해이거는 보다 서정적이며 음역대도 넓었다. 반 헤일런의 대중적인 팝 메탈 분위기와 해이거가 잘 맞았다고 할까.
 
현재 멤버는 에드워드(Eddie Van Halen. guitar, backing vocals), 알렉스(Alex Van Halen. drums), 볼프강(Wolfgang Van Halen. bass guitar, backing vocals), 그리고 데이비드 리 로스다. 이들을 대표하는 노래는 ‘Jump’(1984). 이 곡을 부를 때마다 로스가 늘 펄쩍펄쩍 뛰어야 했고 이후 ‘점프’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8.   The Who 더 후는 1960~70년대 무대 위에서 화끈한 사운드와 파격적인 퍼포먼스 등으로 젊은이들의 시선을 압도했다. 보컬 로저 달트리(Roger Daltrey)의 시종 계속되는 마이크 줄 돌리기는 이 밴드의 상징이 되었다.
 
기타를 치는 피트 타운센드(Peter Townshend)는 무대가 끝날 때마다 기타와 앰프를 부수곤 했다. 또 무릎 끓으며 미끌어지며 기타치기 등 폭발적인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키스 문(Keith Moon)의 거친 드럼 연주는 말할 것도 없고 피트는 영국 국기인 유니언 잭으로 자켓을 만들어 입고 다녔고 존 엔트위슬((John Entwistle. 베이스)은 군복 셔츠나 자켓을 입고 나와 록 역사상 최초로 밀리터리 룩을 선보였다.

 1960년대 말 청년들 사이에선 Don't Trust over Thirty, 죽 ‘서른이 넘는 이는 믿지 말라’는 말이 유행했다. 나이 든 기성세대를 거부하는 몸짓이었다.
그때 인기 있던 노래가 영국 밴드 더 후(The Who)의 노래 "My Generation"이었다.

이 곡은 1960년대 당시 젊인이들의 정신을 대변하는 곡이자 은 하드 록과 펑크 록의 시초로 거론되는 위대한 곡이다. 노랫말의 "I hope I die before I get old"는 더 후를 한 문장으로 함축하는 말이다.
 
세월이 흘러 두 멤버는 세상을 떠났고(키스 문는 1978년, 존 엔트위슬는 2002년), 로저와 피터는 70대 후반의 나이가 되었다. "늙기 전에 죽고 싶다"던 두 사람은 여전히 살아서 더 후의 명맥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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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건스 앤 로지스

9.  Guns N' Roses 건스 앤 로지스(Guns N' Roses). 총과 장미. 악동 액슬 로즈(Axl Rose)는 한때 ‘할리우드 로즈(Hollywood Rose)’의 보컬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잘나가던 ‘LA 건스(LA Guns)’와 1985년 결합하면서 밴드 이름을 ‘총과 장미’로 정했다.

얼마 후 ‘LA 건스’의 리더였던 트레이시 건스가 밴드를 탈퇴했지만 이름은 그대로 ‘건스 앤 로지스’였다. 뒤이어 기타리스트 슬래시(Slash·본명은 Saul Hudson)가 가세하면서 전설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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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앨범 《Appetite for Destruction》(1987)
이들의 첫 앨범 《파괴욕망(Appetite for Destruction)》(1987)은 록 역사상 최고의 데뷔앨범으로 손꼽힌다. 147주(3년 3개월) 동안 빌보드 차트에서 떠나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 헤비메탈이 본 조비(Bon Jovi) 같은 ‘팝 메탈’로 쇠락해 갈 때 이들은 강력한 헤비메탈에 ‘날것’ 그대로의 호소력으로 팬심(心)을 훔쳤다.

 특히 〈사랑스런 내 사람(Sweet Child O' Mine)〉의 인기는 1988년 강타한 허리케인이었다. 그해 8월 ‘몬스터즈 오브 록’에서 그들은 대선배 키스, 아이언 메이든, 데이비드 리 루스, 메가데스, 할로윈 등을 넉다운시켰다.

이 공연 후 〈Sweet Child O' Mine〉은 ‘빌보드 핫 100(Billboard Hot 100)’ 차트 1위(1988년 9월 10일)에 올랐다. 한 달도 안 돼 입소문이 났던 모양이다. 갑자기 전 세계가 건스 앤 로지스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웰컴 투 더 정글(Welcome to the Jungle)〉, 〈파라다이스 시티(Paradise City)〉를 동반 히트시키며 1집 앨범 《Appetite for Destruction》은 미국에서만 1800만 장, 전 세계적으로 3300만 장이 팔려 나갔다(1년 전에 앨범이 발매됐음을 감안하면 놀라운 결과다).
  
더블 앨범인 이들의 3집 《유즈 유어 일루전(Use your illusion) 1,2》(1991)은 건스 앤 로지스 최전성기의 마지막 리즈 시절을 확인할 수 있는 앨범이다. 1집이 힘으로 승부하는 메탈로 채워졌다면 2집은 발라드, 펑크, 클래식이 골고루 섞여 있다. 음악적으로 훨씬 성숙해졌다고 할까.

앨범커버는 독특하다. 라파엘의 작품 〈아테네 학당의 사람들〉 중 ‘두 명’을 발취했다. 왜 이 두 명에 주목했을까. 혹시 액슬과 슬래시가 아닐까.
이 앨범 중 〈돈 크라이(Don't Cry)〉와 〈노벰버 레인(November Rain)〉, 밥 딜런의 곡을 커버한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가 히트했다. 전자의 노래는 폭넓은 음역대를 막힘 없이 휘젓는 액슬의 보컬이 압권이고, 후자는 기타리스트 슬래시의 폭풍 기타연주가 압권이다.

전 세계 팝 보컬 중에서 액슬 로즈는 머라이어 캐리, 프린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톰 요크(라디오헤드의 리더싱어), 프레디 머큐리(그룹 퀸의 보컬리스트)와 함께, 아니 이들보다 가장 넓은 음역대를 지닌 것으로 조사됐다. 이 조사는 《허핑턴포스트 US》(2014년 5월 21일자)에 게재됐다.

슬래시는 ‘깁슨 레스폴’ 기타를 애용한다. 영국의 전설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지미 페이지(Jimmy Page)처럼 블루스를 기반으로 한 정통파 기타 연주자로 불린다. 지난 2010년 영국의 BBC가 선정한 ‘최근 30년간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 순위에서 레드 핫 칠리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 출신의 존 프루시안테(John Frusciante)에 이어 2위에 올랐다. 2011년 미국 음악잡지 《롤링스톤》 지가 선정한 세계 100대 기타리스트에서 6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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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키스
10.   KISS
 
Ace Frehley (리드 기타, 보켈) /1951. 4. 27/ 미국 뉴욕
Paul Stanley (리듬 기타) / 1952. 1. 20 / 미국 뉴욕
Gene Simmons (베이스) / 1949.8.25 / 이스라엘
Peter Criss (드럼) / 1947. 12.20/ 미국 뉴욕 (1980년 6월 Eric Carr로 교체)
 
음악의 여신으로부터 미움 대신에 사랑의 속임을 받는 키스는 웃는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가 하면, 성난 듯이 울부짖거나, 날뛰며 천장을 향해 불을 내뿜기도 하는 괴짜들이다. 4인조의 그들은 보위와 루 리드가 변화 무쌍한 얼굴의 그들을 초만원의 홀로 몰아넣던 시절인 1973년에 뉴욕의 중심부에서 시작하였다.
 
키스의 멤버들은 '가부키극' 과 '프랑켄시타인의 저주'의 최후편을 결합한 그들의 야단스런 분장이 실물보다 더 큰 느낌을 주기 위한 시도로서 능동적으로 고안된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인정하고 있다. 그들의 곡들은 환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들인데, 그들은 충분히 논리적이게도 그들의 무대 쇼와 인물은 그들의 음악을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야단스런 분장과, 불을 뿜는 베이스 연주자, 용 모양의 굽 높인 장화, 그리고 고양이 수염이 그들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키스가 처음 연주를 시작했을 때, 록계의 언론들은 일제히 메마른 탄성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보위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건 또 무엇인가? 퇴색되어 가는 디즈니랜드라고나 할까 그럼에 불굴의 키스는 공연 활동을 시작하여 공연, 또 공연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사실 한 주간의 7일 중에서 7일 동안 무휴의 강행군을 1년 반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그 결과, 언론에서 알지 못하는 것을 청중들은 알게 되었고, 첫번째의 두 앨범들은 수십만부씩 팔리게 되었다. 기반을 튼튼하게 구축한 그들은 또 세 개의 괴물 단지들인 ‘Dressed to Kill’ , ‘Alive’, ‘Destroyer’를 차례로 발표하였다. 그 앨범들은 차트에서 로케트처럼 치솟아 올랐으며, 모두 골드 수상 앨범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자의 두 앨범들은 플래티늄 수상 앨범들이 되었다. (백만부 이상이 판매됨).
 
1976년이 되자 키스의 열풍은 전국을 휩쓸며 키스광들을 만들어 놓았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언론의 눈치를 보며 따라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오히려 언론이 그들을 따라 다니 기에 바쁘게 된 것이었다. 《Rock And Roll Over》와 《Love Gun》은 모두 플래티늄 수상 앨범들이 되었다. 1976년부터 1977년 사이에는 ‘Beth’와 ‘Calling Dr. Love’로 처음으로 싱글 차트에서도 굳게 자리를 잡았다.
1977년에 키스 부대 (그들 광도들의 군단은 그렇게 불리었다.)는 그들의 궁극적인 소원을 달성하였다. 록 밴드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마블의 수퍼 히어로 만화책에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악마의 세력을 쫓아서 돌진하는 헐크나 스파이더 맨 등과 같은 마블 만화의 주인공들처럼 키스 멤버들의 경력을 픽션으로 꾸민 만화책의 초판이 1977년 여름에는 노변 매점에서 선을 보였다.
 
‘Larger than Life’, ’Fantasy Laden’, ‘More than Mortal’ 등이 키스로 알려진 돌연변이의 4인조를 모델로 한 책들이다. 1978년 이들은 《Double Platinum》이란 이름이 붙은 앨범을 발표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앨범은 플래티늄을 기록했다. 그 후 계속해서 세계 도시를 다니며, 순회 공연을 벌였고 1979년 6월 앨범 《Dynasty》를 발표한 뒤 이듬 해인 1980년 6월 《Unmasked》를 발매했고 동시에 드러머 피터 크리스가 탈퇴했고 대신 에릭 카가 가입했다.
 
새로운 드러머로 진용을 가다듬은 이들은 1982년 1월 앨범 《Music From The Elders》를 내놓아 자신들의 독창적인 메탈 사운드에 대한 집념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기타리스트인 에이스 프레이의 날로 심해지는 주벽은 더 이상 그룹과 활동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1983년 새로운 기타리스트 비니 빈센트로 대치되었다. 비니를 가입시킨 이들은 1983년 10월 이들의 14번째 음반인 《Lick It Up》을 발매함과 동시에 지금까지 마스크 속에 감추고 있던 본래의 얼굴을 공개하여 팬들을 놀라게 했다. (《팝 아티스트 대사전》 인용, 세광음악출판사,1986년 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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