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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에는 두 명의 여왕이 있다. 퀸 엘리자베스와 그룹 퀸을 말한다. |
미국의 음악전문 채널 VH1(Video Hits One)이 2010년 9월 10일 위대한 아티스트 100명( 100 Greatest Artists of All Time )을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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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하자면 "록(로큰롤) 시대에 위대한 100인 아티스트"(100 Greatest Artists of the Rock Era)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혹은 "지난 60년 동안 가장 위대한 팝 스타100인"(100 Greatest Pop stars of the Last 60 Years)
1998년 발표한 리스트를 업 데이트한 순위다. 비평가와 음악산업 종사자들이 투표에 참여했다. 20년 가까이가 지난 순위지만, 당대 팝 아티스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어 즐겁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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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Marvin Gaye 1939년 4월 2일 生~1984년 4월 1일 歿. 1960년대 모타운에서 가장 인기있는 싱글 아트스트. 초기의 가스펠 스타일 레코딩에서 그의 부드럽고 감각적인 테너 보이스를 강조한 팝 성향이 다분한 사운드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1971년 앨범 《What's Going On》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흑인 아티스트 최초의 컨셉트 앨범. 도시의 타락, 생태계 위기, 그리고 영적인 부패를 지적하면서도 설교처럼 들리지 않게 표현했다. 70년대까지도 모타운에 남아 있으면서도 여전히 인기를 유지하던 몇 안 되던 모타운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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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빈 게이 |
마지막 라이브 투어를 마친 그는 부모님의 집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아버지와 심하게 다퉜고. 1984년 4월 1일 아버지의 총에 사망했다. 아버지(Marvin Gaye Sr.)는 정당방위라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비자발적인 과실치사로 유죄판결을 받을 것이라고 말을 바꾸었다.
마빈 게이는 사후 3년 뒤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괴로운 삶에서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한 게이는 계속해서 그의 비전과 범위, 예술성을 세계무대로 가져왔다. 숨지기 몇 해전부터는 즐거움을 위한 음악을 만들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 그들이 느끼는 것을 먹일 수 있도록 녹음한다. 누군가 나쁜 시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녹음을 했으면 좋겠다."
"Let's Get It On," "Sexual Healing", "I Heard it Through the Grapevine" 같은 곡을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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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2. 가운데가 보노. |
19 U2 ‘최고의 록 그룹, 올해의 앨범, 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노래’ 등으로 스물두 번이나 그래미상을 수상했고, 2005년에는 ‘로큰롤 명에의 전당’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U2의 리드 싱어인 보노의 개인적인 수상과 훈장 목록도 밴드의 히트곡 목록 못지않다. 그는 세 번이나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고, 영국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2005년에는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이 되었다. 2010년에는 아프리카의 가난과 질병을 퇴치하기 위해, 애쓴 공로를 인정받아 ‘인도주의 지도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화려한 수상 경력, 명성과 부. 보노는 그 모든 것을 얻었다. 그러나 이 세계 최고의 록 스타에게는 성공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래서 보노는 겸손할 수 있었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에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목소리로 청중들을 사로잡을 때든 아프리카의 정의와 치유를 위해 분투할 때든, 보노는 소외된 이들과 조화를 갈망하는 이들의 챔피언이다.
“제가 바라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를 다루는 사회 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나서, 저 같은 사람이 주도하는 일이 더 이상 특별한 일로 주목받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은, 록 스타가 아니라 사회 운동이 보편화되고 활발해지기를 소망합니다.” (킴 워시번이 쓴 《U2 보노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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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핑크 플로이드 |
18 Pink Floyd 핑크 플로이드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서구 대중문화의 근간이 뿌리내리고 있는 현대적 삶의 어두운 면을 정치사회적, 철학적 맥락에서 광범위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 안에는 소외의 본질과 이유, 존재의 형이상학, 부조리, 인지, 정체성 그리고 예술적, 상업적인 진정성의 본질이 담겨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광기도 있다.
록 음악 팬들은 흔히 핑크 플로이드를 ‘프로그레시브 록’이라는 특정 장르의 밴드라고 여긴다.
그러나 특정 장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대중예술의 선도자로서 서구 문화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듣는 이를 불안과 불편으로 밀어 넣는 그들의 음악이 어떻게 압도적인 숭고미를 성취하는지, 그 답은 단순히 ‘들리는 음악을 듣는 것’을 넘어, 음악적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사유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특정 장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대중예술의 선도자로서 서구 문화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듣는 이를 불안과 불편으로 밀어 넣는 그들의 음악이 어떻게 압도적인 숭고미를 성취하는지, 그 답은 단순히 ‘들리는 음악을 듣는 것’을 넘어, 음악적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사유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핑크 플로이드”라는 이름을 단순히 역사상 가장 많은 앨범을 팔아치운 난해한 음악가들로 정의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1960년대 전복적 반문화의 폭발, 그 중심부로부터 탄생한 핑크 플로이드는 특유의 음악적 실험과 문학적 알레고리로 가득한 가사를 통해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철학적, 사회적 메시지를 던져왔다.
그들의 첫 정규 앨범은 1967년에 발매된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이다. 시드 바렛이 중심이었던 당시의 핑크 플로이드는 착란과 몽상의 이미지들을 뒤섞어 음악적 실험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작업했다. 그러나 시드의 탈퇴 이후 로저 워터스가 밴드를 이끌면서 자본주의의 착취와 소외, 인간 실존과 타자성에 대한 고찰을 하나의 견고한 음악적 콘셉트 아래 배치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The Dark Side of the Moon》《Wish You Were Here》 《Animals》《The Wall》《The Final Cut》등이 그때 나온 음반들이다. 워터스는 1985년 밴드를 탈퇴했고, 이후 핑크 플로이드는 데이비드 길모어를 중심으로 《A Momentary Lapse of Reason》 《The Division Bell》《The Endless River》를 발매하며 최근까지도 곡 작업과 투어를 계속해왔다. (조지 A. 라이시가 쓴 《광기와 소외의 음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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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디 머큐리 |
17 Queen “한 남자의 여린 그림자가 보여. 겁쟁이, 겁쟁이……”
Live Aid에서는 10억 명을 홀리더니, 자신의 생일파티에서는 구석에 숨었던 프레디. 당당한 페르소나(가면) 뒤에 여린 자아를 숨기고 무대를 장악했던 ‘위대한 연기자’
독특한 음색, 당당한 무대매너, 세련된 스타일링, 강렬한 사운드, 아름다운 가사……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 1946년 9월 5일 生~1991년 11월 24일 歿)가 전설이 된 이유는 수십 가지를 열거할 수 있지만, 사후 20년이 넘도록 젊은이들을 매료시키는 이유는 그의 진정성에 있다. 데뷔 이래로 줄곧 따라다닌 대중의 뜨거운 환호와 평단의 차가운 혹평들…… 그 엄청난 괴리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야 하는 프레디로서는, 고독과 불안이 지독할수록 견뎌내기 위한 당당함의 페르소나도 커져야 했을 것이다. “나는 전설이 될 것이다!”라고 외치는 오만할 정도의 자신감은 “모든 비난과 변명은 결국 내게로 향해.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하지” 하는 여리고 연약한 자아를 견뎌내기 위한 가면이었는지도 모른다.
“최상을 바라며 최고를 향해 나아가기. 그게 내가 이 일을 해나가는 유일한 방법이야.”
“쇼는 계속되어야 해! (내 삶이 멈추더라도)”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음악’에 담아내려고 끝까지 밀어붙인 프레디. 그랬기에 ‘퀸’의 멤버들은 그가 죽어서도 불사조가 되어 날아오를 수 있게 든든한 둥지가 되어 주었고, 우리는 영혼을 꿰뚫는 그의 노래와 삶을 지독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라이 토마스, 슌 오헤이건이 쓴 《프레디 머큐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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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돈나 |
16 Madonna 마돈나는 1981년 솔로 활동을 한 대중음악 가수 겸 여배우로 당시 남성 주도의 1980년대 가요계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1991년까지 그녀는 미국에서 21개의 톱10 히트곡을 달성했고 세계적으로 7000만 장 이상의 앨범을 판매했다. 2008년 1월, 그녀는 《Forbes》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 음악가로 선정되었다.
마돈나 루이스 베로니카 키코네(Madonna Louise Veronica Ciccone)는 1958년 8월 16일 미국 미시건의 베이(Bay) 시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탈리아 이민자(Silvio "Tony" Ciccone), 어머니는 프랑스계 캐나다인(Madonna Fortin)이었다. 아버지는 엑스레이 기술자, 어머니는 무용수였다.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마돈나는 출생위치가 위와 아래를 모두 챙겨야하는 중간자리여서 그런지 와일드한 성격(the sissy of the family)을 가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마돈나는 출생위치가 위와 아래를 모두 챙겨야하는 중간자리여서 그런지 와일드한 성격(the sissy of the family)을 가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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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치 보이스 |
15 The Beach Boys 비치 보이스는 1961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결성된 5인조 록 밴드.
브라이언 윌슨(Brian Wilson·1942∼), 데니스 윌슨(Dennis Wilson·1944∼1983), 칼 윌슨(Carl Wilson·1946∼1998) 삼형제가 주축인데 브라이언 윌슨이 리더다. 1960년대 중반 그들의 성공이 절정에 달했을 때, 브라이언은 계속된 히트곡을 내놔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렸다.
그들의 라이벌인 비틀스는 마르지 않은 샘처럼 히트곡을 쏟아내던 시절이었다. 계속 서핑 노래(surf songs)를 작곡해야 한다고 압박이 윌슨 형제들을 녹다운시켰다.
그런 과정(브라이언은 곡을 완성하기까지 수개월이 걸렸다.)을 거쳐서 나온 곡이 바로 "Good Vibrations". 1966년 10월 싱글로 발매되었다. "I Get Around", "Help Me, Rhonda"와 더불어 세번째 미국 차트 1위를 안기며 100만 장 이상이 팔려 나갔다. 비치 보이스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곡 중의 하나다.
14 Nirvana 인조 얼터너티브 록밴드 너바나는 1989년 1집 앨범 《Bleach》로 데뷔했다.
기타와 보컬을 맡았던 커트 코베인( Kurt Cobain. 리더 싱어, 기타. 1967년 2월 20일 生~1994년 4월 5일 歿)과 크리스 노보셀릭( Krist Novoselic. 베이스) 그리고 2집부터 함께한 데이브 그롤(Dave Grohl. 드럼)로 구성된 이들은 헤비메탈을 밀어내며 펑크록의 부활과 함께 새로운 인디문화를 연 선구자적 밴드이다.
앨범 《Nevermind》의 성공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최고의 밴드자리에 올라섰을 때, 팀의 정신적 지주였던 커트 코베인은 27살 나이로 생의 마침표를 찍으면서 해체와 함께 그들은 전설로 남는다. 1993년 MTV 비디오상(최우수 얼터너티브 비디오 부문)을 수상했다.
13 The Who 더 후는 1960~70년대 무대 위에서 화끈한 사운드와 파격적인 퍼포먼스 등으로 젊은이들의 시선을 압도했다. 보컬 로저 달트리(Roger Daltrey)의 시종 계속되는 마이크 줄 돌리기는 이 밴드의 상징이 되었다.
기타를 치는 피트 타운센드(Peter Townshend)는 무대가 끝날 때마다 기타와 앰프를 부수곤 했다. 또 무릎 끓으며 미끌어지며 기타치기 등 폭발적인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키스 문(Keith Moon)의 거친 드럼 연주는 말할 것도 없고 피트는 영국 국기인 유니언 잭으로 자켓을 만들어 입고 다녔고 존 엔트위슬((John Entwistle. 베이스)은 군복 셔츠나 자켓을 입고 나와 록 역사상 최초로 밀리터리 룩을 선보였다.
키스 문(Keith Moon)의 거친 드럼 연주는 말할 것도 없고 피트는 영국 국기인 유니언 잭으로 자켓을 만들어 입고 다녔고 존 엔트위슬((John Entwistle. 베이스)은 군복 셔츠나 자켓을 입고 나와 록 역사상 최초로 밀리터리 룩을 선보였다.
1960년대 말 청년들 사이에선 Don't Trust over Thirty, 죽 ‘서른이 넘는 이는 믿지 말라’는 말이 유행했다. 나이 든 기성세대를 거부하는 몸짓이었다.
그때 인기 있던 노래가 영국 밴드 더 후(The Who)의 노래 "My Generation"이었다.
이 곡은 1960년대 당시 젊인이들의 정신을 대변하는 곡이자 하드 록과 펑크 록의 시초로 거론되는 위대한 곡이다. 노랫말의 "I hope I die before I get old"는 더 후를 한 문장으로 함축하는 말이다.
세월이 흘러 두 멤버는 세상을 떠났고(키스 문는 1978년, 존 엔트위슬는 2002년), 로저와 피터는 70대 후반의 나이가 되었다. "늙기 전에 죽고 싶다"던 두 사람은 여전히 살아서 더 후의 명맥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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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비드 보위와 밥 말리 |
12 David Bowie 1947년 1월 8일 生~2016년 1월 10일 歿. 데이비드 보위가 살았더라면 올해 꼭 일흔 네번째 생일을 맞았을 것이다.
양쪽 눈의 색깔이 다르고, 색소폰을 잘 불었던 그는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즈음에 발표한 곡이자 지금까지도 그의 대표곡으로 인정받는 "스페이스 오디티(Space Oddity)"로 일약 스타가 됐다. 이 노래가 실린 앨범 《데이비드 보위 (also released as Space Oddity)》로 자신의 히트곡 "히어로스(Heroes)"(1977)처럼 ‘영웅’이 됐다.
보위가 무효로 만든 것은, 난센스, 허위, 뒤떨어진 사회적 의미들, 전통들, 특히 계급과 성에서 우리를 구속한 정체성의 늪이다. 보위의 노래들은 이 온갖 의미들이 얼마나 깨어지기 쉬운지 밝히며 다시 만들어 낼 능력을 우리에게 준다. 그의 노래들은 변화할 수 있는 우리 능력이, 그의 능력처럼, 무한할 수 있다는 믿음을 우리에게 준다. (사이먼 크리츨리가 쓴 《데이비드 보위 : 그의 영향》 중에서)
11 Bob Marley 1945년 2월 6일 生~1981년 5월 11일 歿. 자메이카 출신 가수이자 음악가, 작곡가. 밥 말리는 레게 음악의 세계 대사였다. 생전 2000만 장 이상의 음반을 팔았다. 소위 제3세계 출신 중 성공한 최초의 국제적인 슈퍼스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