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 생일선물로 마련했던 파텍 필립 시계의 상상도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세상을 떠난 지 40주년이다. 해마다 10.26을 전후한 시기가 되면, 일각에서 김재규에 대한 재(再)평가 주장이 솔솔 나온다. 김재규 자신도 10.26 후 법정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며 자신의 행위를 ‘민주화를 위한 국민혁명’이라고 강변했다. 과연 그걸까?
1979년 8월 하순 어느날, 주(駐)제네바 대표부에 근무하던 남 모 서기관(후에 안기부 해외정보국장 역임)은 서울의 중앙정보부 본부로부터 전문(電文)을 한 장 받았다. 당시 제네바 대표부 대표는 얼마 전 타계한 노신영 전 국무총리였다.
전문은 “일요일 오전 10시에 취리히 공항에 도착하는 KAL기 편으로 긴급문서를 보내니, 기장으로부터 직접 문서를 수령해 결과를 보고하라”는 내용이었다. 남 서기관은 제네바에서 300km 떨어진 취리히 공항으로 가서 공항의 KAL 사무소장으로부터 서류 봉투 하나를 받았다. 서류 봉투 안에는 세계적인 명품(名品)시계 제작업체인 파텍 필립사(社)에서 제작한 회중시계 사진과 함께 편지가 한 장 들어 있었다. 편지는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의 김모 행정비서관이 쓴 것이었다.
“사진과 같은 회중시계를 파텍 필립사나 피아제사에 주문하되, 11월 중순까지 물건이 서울에 도착해야 한다. 회중시계는 18K로 하고, 시계 전면(前面)과 후면(後面)의 도안은 나중에 보내겠다.”
남 서기관은 다음날 아침, 파텍 필립사와 피아제사를 차례로 방문했다. 파텍 필립사 영업 담당자는 난색을 표명했다. 시계의 금형(金型)을 새로 제작해야 하고, 시계 표면의 조각과 부속품 제작을 장인(匠人)들이 수작업으로 해야 하는 데다, 시계를 만들고 나서 한국의 기후와 습도 등을 고려해 한 달 동안 시험 가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최소한 6개월 전에는 주문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반면 피아제사는 “시간이 너무 빠듯하지만, 한국과의 거래 관계 등을 고려해 시계를 제작하겠다”고 했다. 당시 피아제사는 김포공항 면세점에서 영업을 하고 있었고, 피아제사 극동담당자는 남 서기관과 친분이 있었다.
남 서기관은 이런 시실을 본부에 보고했다. 하지만 다음 일요일 시계 도안과 함께 도착한 김갑수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의 편지는 ‘받드시 파텍 필립이어야 한다’고 못 박고 있었다. “시계 제작 문제는 김재규 부장님의 각별한 관심사항이니 차질 없이 처리하라. 시계는 반드시 파텍 필립사에서 제작하되, 기일 내에 서울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라”는 엄명이었다.
‘도대체 어떤 시계이기에...’라는 생각으로 시계 도안을 열어 보는 순간, 남 서기관은 그 시계가 박정희 대통령 생일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회중시계 덮개에 봉황 문양(紋樣)의 대통령 문장(紋章)이 새겨지고, 가운데에는 훈장을 패용(佩用)한 박정희 대통령의 반신상 사진이 들어가도록 도안되어 있었다. 회중시계 뒷면 좌우 양쪽에는 여러 개의 무궁화가, 가운데에는 ‘근축 탄신 1979’라는 글씨가 새겨지게 되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생일은 음력으로 9월 30일이었지만, 양력 11월 14일을 생일로 쇠고 있었다/)
남 서기관은 “순간 ‘어떤 놈이 이런 걸 선물할 생각을 했나’ 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위에서 시키는 일이니 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역겨웠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런 것을 받고 좋아한다면, 박 대통령도 말기 증상을 보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술회했다.
다음날 아침, 남 서기관은 파텍 필립사 영업담당 책임자를 다시 찾아가 통사정을 했다. 영업담당자는 그가 안 되어 보였는지 장인 한 사람을 불렀다. 그는 남 서기관의 설명을 듣고, 도안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이 시계 제작에만 전념하게 해 준다면, 기일 내 제작이 가능하다. 시간 외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시계 제작을 주문할 때 일정 액수의 보증금을 내게 되어 있었다. 파텍 필립사에서는 남 서시관이 외교관 신분이라는 점을 감안, 제네바대표부 명의의 작업요청 공한으로 보증금을 대신하도록 편의를 봐 주었다. 공한이라야 ‘작업을 의뢰한다’는 취지의 문건을 작성한 후 제네바대표부 관인(官印)을 날인(捺印)하는 것이었다. 제네바대표부 소속 외교관이지만 중앙정보부에서 파견된 남 서기관은 노신영 대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10월 중순 파텍 필립사에서 송장(送狀·Invoice-제작비용 청구서)을 보내왔다. 시계 가격은 당시 가격으로 1만9000달러, 남 서기관의 1년 치 봉급과 각종 수당을 합친 금액과 맞먹는 액수였다. 남 서기관은 며칠 후 외교행낭 편으로 송장을 한국으로 발송했다. 그게 현지 시간으로 1979년 10월 26일 오전이었다. 한국에서는 삽교천 방조제 준공행사를 마치고 돌아온 박정희 대통령이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궁정동 안가 만찬을 지시하고, 차 실장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그 지시를 전달하고, 김재규 부장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궁정동 안가 인근에서 저녁식사를 하자고 전화를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제네바 현지 시각으로 10월26일 오후 9시경, 영국 BBC 방송이 “서울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는 긴급 뉴스를 내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재규 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남 서기관은 기가 막혔다. ‘그렇게 대통령에게 아부하려던 사람이...’
남 서기관은 그날 한잠도 못 잤다. 시계의 송장은 서울로 발송했는데, 시계를 주문했고, 시계 값을 내야 할 김재규 부장은 대통령 시해범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10월29일 월요일 아침 (제네바 현지시각), 남 서기관은 처음 자신에게 시계 관련 서신을 보냈던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의 김 모 행정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필립 파텍에 맡긴 시계 제작을 취소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자, 김 비서관은 “그래야 할 것 같다. 죄송하다”고 했다. 남 서기관은 모르고 있었지만, 당시 중앙정보부는 부장 뿐 아니라 부(部) 전체가 ‘대통령 시해범’으로 낙인 찍혀 국장급 이상 간부들은 모조리 보안사령부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있던 참이었다.
10월 30일 아침 남 서기관은 파텍 필립사 영업책임자를 찾아갔다. 영업책임자는 대뜸 “당신이 온 이유를 안다. 시계 제작을 취소하러 온 것 아니냐”면서 “뉴스를 보고 회중시계 도안의 인물이 피살된 박정희 대통령임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박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조의(弔意)를 표한 후 “이 문제는 내일 열리는 이사회에서 논의하겠다”고 했다.
11월1일 남 서기관을 만난 그는 “이사회에서 국가적 재난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기 때문에, 당신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기로 했다”고 했다. 남 서기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영업 책임자가 말을 이어갔다.
“이사회 결정 이후 회중시계를 제작하던 장인에게 작업 중단을 지시했다. 그는 ‘내가 만든 시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고, 이제 마무리 작업만 하면 된다. 일과 시간 후에 개인적으로 작업을 계속해 시계를 완성하겠다’고 한다. 장인들이 좀 독특한 사람들이다.”
영업책임자는 제작 중인 시계를 가져와서 보여줬다. 시계는 마무리 손질만 조금 남은 상태였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유가족이나 측근들 가운데 이 시계를 구입할 만한 사람이 혹시 있느냐”고 물어봤다. 영업책임자는 “한국에서 구입해 갈 사람이 없으면, 완성된 시계를 우리 회사의 시계 박물관에 전시할 생각이다. 시계박물관에 전시되면 역사적인 물건이 되어 나중에 비싸게 팔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남 서기관은 가슴이 철렁했다. ‘한국 대통령의 생일 선물로 주문했던 것인데, 대통령이 암살되는 바람에 주인을 찾지 못하고 파텍 필립사 시계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는 게 세상에 알려지면 나라 망신이고, 돌아가신 박 대통령에게도 누가 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개인 돈을 들여서라도 사들이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고가(高價)였다.
몇 달을 혼자서 끙끙 앓던 남 서기관은 이듬해 봄 출장을 온 국제정보국장과 독대(獨對), 이 사실을 보고 했다. 국장은 10.26사태 후 사기가 저하된 해외요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유럽에 나온 참이었다. 남 서기관은 “나라와 박정희 대통령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중정(中情)이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런 엄청난 일이 있었나”라며 깜짝 놀란 국장은 “이는 역사적 사건의 물증이 되는 만큼 반드시 해결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1980년 4월10일경, 중정 본부에서 반가운 소식이 왔다. “회중시계를 구입하기로 결정했으니, 가격과 물품 인수 가능 일자를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남 서기관은 파텍 필립사 영업 책임자를 찾아가 시계를 인수하겠다고 했다.
남 서기관은 몇 달만에 큰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1주일 후 ‘날벼락’이 떨어졌다. 중정에서 “시계 구입을 보류하기로 했으니, 파텍 필립사에 가서 이 사실을 통보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것이다. 남 서기관은 그 사실을 파텍 필립사에 알리지도 못하고, 며칠간 술을 마시며 혼자 앓았다.
남 서기관은 몰랐지만, 이는 그 무렵 중앙정보부장 서리(署理)로 취임한 전두환 당시 국군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이 “이미 집행하기로 결정된 지출이라도 일정금액 이상인 경우 재(再)결재를 받아 집행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닷새쯤 지나서 중정에서 “시계를 구입하기로 결정됐고, 대금을 보내겠다”는 연락이 왔다. 남 서기관은 파텍 필립사에 시계값을 전해주고 그해 7월 귀국했다.
전두환 장군이 중정부장 서리로 취임하기 전 중앙정보부장 대리를 지냈던 윤일균 전 중앙정보부 차장은 “1980년 봄 국제정보국장이 ‘김재규 부장 시절, 파텍 필립사에 박정희 대통령 생신 선물로 시계를 발주했다가 인수하지 못해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보고해서, 처리한 기억이 난다”고 증언했다.
문제의 파텍 필립 시계는 박정희 대통령의 유족들에게 전달됐다고 한다. 하지만 유족들은 ‘흉물스러운 시계라 잘 보관하지 않았고,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다’고 밝혔다. 육영수 여사와 박정희 대통령을 오래 모셨던 김두영 전 대통령 비서관은 “박정희 대통령께 생일에 양말 한 켤레도 선물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면서 “김재규 부장이 그런 호화시계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드렸다가는 불벼락을 맞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박 대통령이 차시던 세이코 시계는 요즘 가격으로 하면 10만원 짜리 쯤 됐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고급 공무원들이 롤렉스 시계 등 고급 시계를 차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긋이 노려보셨다”면서 “그런 고급 시계로 박 대통령의 환심을 사려 했으니, 김재규가 미련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윤일균 전 중앙정보부 차장도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잃어가던 김재규 부장이 박 대통령의 환심을 사기 위해 대통령 탄신일에 맞추어 특별히 주문 생산한 회중시계를 선물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근검절약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그런 선물을 받고 기뻐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거금을 들여 박 대통령의 생신선물을 하려고 했던 김재규가 과연 민주화를 위해 박대통령을 시해한 ‘의사(義士)라고 할 수 있겠나”라면서 “파텍 필립 시계는 김재규씨가 마지막 순간까지 박정희 대통령의 환심을 사려 애썼다는 증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5월 김재규가 부대장으로 근무했던 군 부대에 그의 사진이 다시 걸렸다. 국방부는 '군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차원의 조치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일부에서는 이를 ’김재규 복권‘의 일환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거두지 않고 있다. ’김재규 복권‘의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나올 때, 그가 주문했던 파텍 필립 시계가 그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
* 이 기사는 월간조선 2005년 3월호에 실렸던 기사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