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국문학 논문을 써도 그의 글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한국의 대표적 문학평론가인 김윤식 서울대 국문과 명예교수가 25일 8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고인은 앞서 세상을 떠난 김현 서울대 불문과 교수와 함께 평단에서 쌍벽을 이루며 '한국의 4대 평론가'(김현, 김윤식, 김우창, 유종호)로 활약했다. 학술서, 비평서, 산문집, 번역서 등 생전 200권이 넘는 책을 집필하는 등 문단에서 '다산(多産)의 상징'으로 불렸다. 자유로운 창작의 경향이 강한 시인이나 소설가와 달리, 엄밀한 학술 연구에 매진해야 하는 비평가가 수백권의 저서를 남긴 경우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장석주 작가는 책 《나는 문학이다》에서 "한국 근·현대 문학 연구에 대한 그의 집요한 탐구욕과 생산적 글쓰기가 없었다면 한국 근·현대 문학 연구의 볼륨은 형편없이 얇았을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고종석 소설가는 "김윤식이라는 이름은 동사 '쓰다'의 주어처럼 보인다"고 말한 바 있다.
고인은 매일 200자 원고지 20장씩 글을 썼다. 그는 "하루 20매란, 말하자면 내 건강의 리듬 감각"이었다고 했다. 독서량도 풍부했다. 한 편의 글을 쓰려면 10배의 글을 읽어야 한다는 게 평소 지론이었다. 끝까지 집필 수단으로 원고지를 고집하던 그는 인용해야 할 대목이 있으면, 책의 해당 페이지를 도려내 원고지에 붙였다. 일부분을 잘라낸 책은 아까워하지 않고 버렸다. 나중에 필요하면 다시 산다고 했다. 그래야 한 편의 글, 한 권의 책을 다시 귀하게, 새롭게 읽고 공부할 수 있다고 했다. 그에게 글은 일이자 취미이자 삶의 전부였다.
한국의 대표적 문학평론가인 김윤식 서울대 국문과 명예교수가 25일 8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고인은 앞서 세상을 떠난 김현 서울대 불문과 교수와 함께 평단에서 쌍벽을 이루며 '한국의 4대 평론가'(김현, 김윤식, 김우창, 유종호)로 활약했다. 학술서, 비평서, 산문집, 번역서 등 생전 200권이 넘는 책을 집필하는 등 문단에서 '다산(多産)의 상징'으로 불렸다. 자유로운 창작의 경향이 강한 시인이나 소설가와 달리, 엄밀한 학술 연구에 매진해야 하는 비평가가 수백권의 저서를 남긴 경우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장석주 작가는 책 《나는 문학이다》에서 "한국 근·현대 문학 연구에 대한 그의 집요한 탐구욕과 생산적 글쓰기가 없었다면 한국 근·현대 문학 연구의 볼륨은 형편없이 얇았을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고종석 소설가는 "김윤식이라는 이름은 동사 '쓰다'의 주어처럼 보인다"고 말한 바 있다.
고인은 매일 200자 원고지 20장씩 글을 썼다. 그는 "하루 20매란, 말하자면 내 건강의 리듬 감각"이었다고 했다. 독서량도 풍부했다. 한 편의 글을 쓰려면 10배의 글을 읽어야 한다는 게 평소 지론이었다. 끝까지 집필 수단으로 원고지를 고집하던 그는 인용해야 할 대목이 있으면, 책의 해당 페이지를 도려내 원고지에 붙였다. 일부분을 잘라낸 책은 아까워하지 않고 버렸다. 나중에 필요하면 다시 산다고 했다. 그래야 한 편의 글, 한 권의 책을 다시 귀하게, 새롭게 읽고 공부할 수 있다고 했다. 그에게 글은 일이자 취미이자 삶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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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교수가 자택에 마련된 서재에서 책을 꺼내오고 있다. |
고인은 사료에 근거한 문헌 연구를 중시하면서도 현장비평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60년대부터 빼놓지 않고 월간, 계간 문예지에 수록된 신작과 단행본 신간들을 정독, 비평해왔다. 신인 작가들의 작품도 찾아 읽었다. 현역 작가 중 유명세에 오른 김애란 소설가도 그의 호평을 받았다. 비평의 역사, 방법론 등을 연구한 비평, '메타비평'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다. 최근까지 고령의 나이에도 반년간 문예지 《한국문학》, 계간 문예지 《문학동네》 등에 '월평' '계평' 형식으로 글을 썼다.
소설 연구 전문가였던 고인은 학자이기 전에 언론인처럼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발바닥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자평하는 이유다. 관계자 증언 채록과 문헌 참조는 물론 사료 발굴에도 힘썼다. 그렇게 나온 결실 중 대표적 연구서가 바로 《이광수와 그의 시대》 《김동리와 그의 시대》이다. 이광수 평전은 30년 세월이 걸렸다. 친일 이력과 보수 이념 탓으로 작품성을 저평가받던 문단 거목들을 다시 불러냈다. 작가 개인의 작품세계를 단순히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당대의 사건, 인물, 사상 등을 총체적으로 파악한 역저로 꼽힌다. 고인은 생전 이광수 평전을 쓸 때의 비화를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지속적인 쓰기가 가능하려면 물론 먼저 자료 수집이 충분히 돼야 합니다. 내가 일본에 가서 이광수 자료를 찾아 헤맨 것도 그 때문이었지요. 그 헤맴 끝에 《개조(改造)》 잡지에서 일본어로 된 「만 영감의 죽음」을 찾아들었을 때, 아, 이제는 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계획된 여정을 남겨 놓고 세밑에 부랴부랴 다시 돌아온 겁니다. 그리고는 정초부터 썼어요. 쭉 써 가는데, 4월이 되면서 붓방아를 찧었지요. 자료 조사가 미진했던 겁니다. 춘원이 빛날 때가 아니라 어두울 때, 춘원이 뻗어갈 때가 아니라 주춤거릴 때, 그를 붙잡아 준 사람을 찾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설 연구 전문가였던 고인은 학자이기 전에 언론인처럼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발바닥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자평하는 이유다. 관계자 증언 채록과 문헌 참조는 물론 사료 발굴에도 힘썼다. 그렇게 나온 결실 중 대표적 연구서가 바로 《이광수와 그의 시대》 《김동리와 그의 시대》이다. 이광수 평전은 30년 세월이 걸렸다. 친일 이력과 보수 이념 탓으로 작품성을 저평가받던 문단 거목들을 다시 불러냈다. 작가 개인의 작품세계를 단순히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당대의 사건, 인물, 사상 등을 총체적으로 파악한 역저로 꼽힌다. 고인은 생전 이광수 평전을 쓸 때의 비화를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지속적인 쓰기가 가능하려면 물론 먼저 자료 수집이 충분히 돼야 합니다. 내가 일본에 가서 이광수 자료를 찾아 헤맨 것도 그 때문이었지요. 그 헤맴 끝에 《개조(改造)》 잡지에서 일본어로 된 「만 영감의 죽음」을 찾아들었을 때, 아, 이제는 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계획된 여정을 남겨 놓고 세밑에 부랴부랴 다시 돌아온 겁니다. 그리고는 정초부터 썼어요. 쭉 써 가는데, 4월이 되면서 붓방아를 찧었지요. 자료 조사가 미진했던 겁니다. 춘원이 빛날 때가 아니라 어두울 때, 춘원이 뻗어갈 때가 아니라 주춤거릴 때, 그를 붙잡아 준 사람을 찾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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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교수의 자택 내부에 자리한 서재 겸 집필실. |
그래서 춘원이 위태로울 때 안식을 찾던 홍지동 산장, 봉선사 근처를 글이 써지지 않을 때마다 돌아보고 기웃거렸는데, 거기서 춘원의 삼종제 이학수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글을 쓸 수 있었는데, 유월이 되니까 또 막히는 거지요. 총독부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이광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또 누군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생각으로 집필을 중단하고 한 달 동안 도서관에 파묻혔습니다.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를 다시 뒤지기 시작했지요. 그리고는 이 신문들의 사장이자, 총독부 고문이었던 아베와의 관계를 찾아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광수의 후기 행적이 다시금 선명해질 수 있었지요."
대부분의 소설 평론가들이 진보 성향의 《창비》 그룹에 속해 냉소적인 현실비판적 평론에만 치중해온 것과 달리, 고인은 서사의 미학을 기준으로 작품성을 평가해왔다. 기존 평론가들이 하나의 작품을 두고 이념적 시각으로 분석해왔다면, 고인은 소설의 미적 구조와 주제의식에 대해 방대한 사료를 토대로 연구해왔다. 그에게 '실증주의 문학가'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 이유다. 1973년 김현과 공저한 책 《한국문학사》가 이러한 고인의 문학 정신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은 과거의 문학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지만, 이 책이 충격하기를 요망하는 것은 오히려 오늘날의 문학이다. 문학에 대한 경멸과 백수(白手)에 대한 조소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어져 가고 있어 보이는 지금, 인간 정신의 가장 치열한 작업장인 문학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자기 각성의 몸부림이다. 문학이 없는 시대는 정신이 죽은 시대이다. 문학은 한 민족이 그곳을 통해 그들의 아픔을 재확인하는, 언제나 터져 있는 상처와도 같은 것이다.>
대부분의 소설 평론가들이 진보 성향의 《창비》 그룹에 속해 냉소적인 현실비판적 평론에만 치중해온 것과 달리, 고인은 서사의 미학을 기준으로 작품성을 평가해왔다. 기존 평론가들이 하나의 작품을 두고 이념적 시각으로 분석해왔다면, 고인은 소설의 미적 구조와 주제의식에 대해 방대한 사료를 토대로 연구해왔다. 그에게 '실증주의 문학가'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 이유다. 1973년 김현과 공저한 책 《한국문학사》가 이러한 고인의 문학 정신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은 과거의 문학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지만, 이 책이 충격하기를 요망하는 것은 오히려 오늘날의 문학이다. 문학에 대한 경멸과 백수(白手)에 대한 조소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어져 가고 있어 보이는 지금, 인간 정신의 가장 치열한 작업장인 문학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자기 각성의 몸부림이다. 문학이 없는 시대는 정신이 죽은 시대이다. 문학은 한 민족이 그곳을 통해 그들의 아픔을 재확인하는, 언제나 터져 있는 상처와도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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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조선일보와 인터뷰 중인 김윤식 교수. |
권영민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책 《한국현대문학대사전》에서 고인에 대해 "김윤식 교수의 비평은 엄청난 저술과정 자체로서 한국 문단을 압도하고 있다. 그가 내놓은 저서가 200여종을 훨씬 넘는데, 모두가 한국문학의 해석과 평가를 위해 바쳐진 것임은 물론"이라며 "이러한 저술작업에서 그가 주목하고자 했던 것은 한국문학에서 '근대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그가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모든 작가들에게 던졌던 것이며, 한국문단과 학계에 내놓은 명제이기도 하다"고 했다.
정홍수 문학평론가는 "고인의 근대문학 연구는 일제강점기 이후 나라 잃은 설움을 극복하고 주체적인 근대국가로 성장하는 정신적 자존심을 회복하는 과정이었다"고 평했다. 고인이 생각한 근대는 이념, 계층, 세대 갈등 속에서 개인의 입신과 국가의 발전을 위해 분투해나가는 시민들의 성장 과정이었다. 그는 책 《한국현대문학사》에서 이렇게 밝혔다.
"한국문학사는 한국근대문학사이다. 이런 명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많은 우여곡절과 논의가 요망되겠거니와, 이런 논의의 중심부에 놓이는 것이 바로 '근대(성)'이다. 대체 근대란 무엇인가. 이런 물음에는 사회과학 쪽에서는 어느 수준에서 정리된 해답을 내놓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국민국가 만들기, 경제적으로는 자본제 생산양식의 완성과정이 그것이다. 국민국가라든가 자본제 생산양식의 본질, 곧 발생 근거라든가 그 전개과정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근대를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는 데, 이 논의의 복잡성이 있다."
정홍수 문학평론가는 "고인의 근대문학 연구는 일제강점기 이후 나라 잃은 설움을 극복하고 주체적인 근대국가로 성장하는 정신적 자존심을 회복하는 과정이었다"고 평했다. 고인이 생각한 근대는 이념, 계층, 세대 갈등 속에서 개인의 입신과 국가의 발전을 위해 분투해나가는 시민들의 성장 과정이었다. 그는 책 《한국현대문학사》에서 이렇게 밝혔다.
"한국문학사는 한국근대문학사이다. 이런 명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많은 우여곡절과 논의가 요망되겠거니와, 이런 논의의 중심부에 놓이는 것이 바로 '근대(성)'이다. 대체 근대란 무엇인가. 이런 물음에는 사회과학 쪽에서는 어느 수준에서 정리된 해답을 내놓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국민국가 만들기, 경제적으로는 자본제 생산양식의 완성과정이 그것이다. 국민국가라든가 자본제 생산양식의 본질, 곧 발생 근거라든가 그 전개과정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근대를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는 데, 이 논의의 복잡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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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김윤식 교수가 책을 읽고 있다. |
고인의 직간접적인 가르침으로 작가, 학자가 된 경우도 많다. 소설가 권여선, 김탁환, 문학평론가 서영채(서울대 교수), 정홍수, 권성우(숙명여대 교수), 류보선(군산대 교수), 신수정(명지대 교수) 등이 그 제자들이다. 권성우 평론가는 25일 밤 페이스북에 "대학수업이란 진정 이런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만들던 선생님의 그토록 열정적이며 압도적으로 매력적인 강의, 지적 호기심을 한껏 자극하는 저서들을 접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좋은 문학비평을 쓰고 싶었다"며 "정말 위대하고 거대했던 한 시대가 저무는 느낌이다"라고 썼다.
1936년 경남 진영에서 태어난 고인은 마산상업고,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동(同)대학원에서 국문학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2년 월간 문예지 《현대문학》에 〈문학사방법론 서설〉이 추천돼 문단에 나왔다. 1968년 서울대 교양과정부 전임강사로 임용된 후, 1975년 국문학과로 교수로 재직, 2001년 정년 퇴직할 때까지 교단을 지켰다. 대학교수 외에 대한민국 예술원 문학분과 회장, 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 일본 도쿄대학교 비교문학연구소 외국인 연구원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1976), 《한일근대문학의 관련양상신론》(1984), 《한국근대문학사상사》(1986), 《이광수와 그의 시대》(1986), 《한국근대소설사연구》(1986), 《우리 소설과의 만남》(1986), 《이상(李箱) 연구》(1987), 《염상섭 연구》(1987), 《임화 연구》(1989), 《한국현대현실주의소설연구》(1990), 《한국근대문학사상연구》(1994), 《박경리와 토지》(2009) 등이 있다.
1936년 경남 진영에서 태어난 고인은 마산상업고,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동(同)대학원에서 국문학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2년 월간 문예지 《현대문학》에 〈문학사방법론 서설〉이 추천돼 문단에 나왔다. 1968년 서울대 교양과정부 전임강사로 임용된 후, 1975년 국문학과로 교수로 재직, 2001년 정년 퇴직할 때까지 교단을 지켰다. 대학교수 외에 대한민국 예술원 문학분과 회장, 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 일본 도쿄대학교 비교문학연구소 외국인 연구원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1976), 《한일근대문학의 관련양상신론》(1984), 《한국근대문학사상사》(1986), 《이광수와 그의 시대》(1986), 《한국근대소설사연구》(1986), 《우리 소설과의 만남》(1986), 《이상(李箱) 연구》(1987), 《염상섭 연구》(1987), 《임화 연구》(1989), 《한국현대현실주의소설연구》(1990), 《한국근대문학사상연구》(1994), 《박경리와 토지》(200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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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6월 10일 조선일보사 편집국 회의실에서 동인문학상 최종심을 하고 있는 심사위원들의 모습. (사진 왼쪽부터) 김화영 고려대 교수, 김윤식 서울대 교수, 소설가 이문열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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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교수가 자택 한 쪽에 걸린 포스트잇 메모지들을 가리키고 있다. 메모지에는 본인의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
현대문학신인상과 한국문학작가상, 대한민국문학상을 시작으로 1989년 제1회 김환태문학평론상, 1991년 제2회 팔봉비평문학상, 2002년 제10회 대산문학상 평론부문상, 2003년 제7회 만해대상 학술부문상, 2011년 제20회 수당상 인문사회부문상 등을 수상했다. 2016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고인은 과거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인은 과거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직도 젊은 작가들의 문학 월평을 월간지에 쓰지 않소. 쓰려면 최소한 작품당 세 번씩은 읽어야 해. 월간지 두 개와 계간지 다섯 개를 빼놓지 않고 봅니다. 그러면서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이런 공부를 했구나 알게 되지."
(요즘 젊은 후배들은 선생처럼 많이 읽지는 않는 것 같은데 못마땅하지는 않냐는 질문에) 전혀. 우리에게는 우리의 필연이, 그들에게는 그들의 필연이 있소. 우리는 읽는 게 양식이었지만, 요즘 사람들은 다른 양식이 있겠지. 뒷방 늙은이가 관여하고 가르치는 건 염치 없는 일. 나는 다만 내 일을 할 뿐이오."
고인은 2001년 서울대 교수 퇴임 기념 고별 강의에서 "인간으로 태어나서, 문학을 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했다. 제자, 작가들은 27일 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추모식을 열었다. 발인은 28일 오전 7시다.
글=신승민 월간조선 기자
사진=조선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