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1·2차 살인 직후 현장 투입
 
  하경정은 당시 현장 수사팀장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여성 피살자들의 참혹하게 훼손된 시신과 피 냄새, 울부짖는 듯한 눈망울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범인도 못 잡은 놈이 일반 극장에 가자니 남들 이목도 있고 해서 조용히 자동차 극장에 가서 봤는데, 자꾸 그때가 생각나 내내 차 안에서 울었어』
 
  그가 화성사건 수사에 참여한 것은 1986년 1·2차 사건이 발생한 직후 당시 수원경찰서 형사계장(경위)으로 일하고 있을 때다.
 
  화성수사본부 1개 팀을 맡아 투입돼 9차 사건(1990) 때까지 수사를 하며 4건의 사체를 직접 수습했다.
 
  처음 그는 범인이 금방 잡힐 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범인 잡을 때까지 집에 안 가기로 작정하고 밤낮없이 동네를 헤매고 다녔는데, 그것이 시련의 시작이었다.
 
  수사본부에는 매일같이 용의자들이 불려 왔다. 그럴듯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고, 이러다간 안 되겠다 싶어 동네마다 다니며 농사일도 거들고 못 마시는 술도 한잔씩 나누며 사람들로부터 정보가 될 만한 얘기를 듣고 다녔다. 속이 타니 담배도 배웠다.
 
 
 
 화성과의 끈질긴 인연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피해자 유류품.

  도무지 진척이 없었다. 일이 안 풀리려니까 1988년 초에는 그의 부하들에게 조사를 받던 용의자가 숨졌다. 담당 형사 3명이 구속되고 그도 직위해제됐다.
 
  다 때려치우고 장사나 하려고 맘을 먹었지만 경찰 수뇌부는 3개월째 집에서 쉬고 있는 그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겠다』며 경기경찰국 강력주임으로 발령을 냈다. 그는 또 화성으로 갔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해 가을엔 가장 아끼던 부하가 뇌출혈로 쓰러져 불구가 됐다. 원인은 물론 과로였다. 하경정은 그 부하에게 평생 죄인이 된 셈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은 500만 관객을 돌파한 뒤 2003년 말부터 세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했고, 매스컴은 이를 더 이상 크게 다루는 일 없이 시들해졌다. 당시 「강력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를 연장하겠다」고 부산을 떨던 정치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하경정이 전북 임실서장으로 나가던 2004년 7월에 「살인의 추억 형사, 서장 되다」 정도의 소식기사가 나갔을 뿐이다.
 
  하경정과 화성의 인연은 참으로 질겼다. 화성사건이 일어난 그 지역에서 2004년 10월 여대생 노모(당시 21세)씨가 실종, 살해돼 또 한 번 「화성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싶더니, 2005년 7월 서장을 마치고 경기경찰청에 돌아온 하경정이 수사지도관으로 그 사건을 지휘하게 된 것이다.
 
  2005년 11월에는 9차 사건의 공소 시효가, 2006년 4월에는 10차 사건의 공소시효가 끝나게 돼 있다. 하경정은 2006년 6월 정년이었다.
 
  정년을 앞둔 「그때 그 형사」는 다시 화성에서 벌어진 실종·살해사건에 매달리고 있었다. 2005년 10월 어느 날, 기자는 하승균 경정을 찾았다.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화성 얘길 꺼내자 그는 자신을 「죄인」, 「패배자」라고 불렀다. 화성 얘기만 나오면 심한 자책감에 시달렸다.
 
  그는 연신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의 얼굴엔 화성에서 죽어 간 여성들, 그리고 그 여성들의 恨(한)을 풀어 주겠노라며 밤이슬을 맞고 헤매던 동료 형사들에 대한 한스런 추억이 모여드는 듯했다.
 
  『범인을 잡지 못한 형사는 죄인』이라던 하경정은 『지금도 잡고 싶고, 옷을 벗고 난 뒤에도 잡고 싶을 것』이라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못 잡았으면 잡아야 하는 것이 형사야. 형사는 그 이상도 이하도 생각할 필요가 없어. 잡아야지. 꼭 잡아야지』
 
  기자는 하경정과의 인터뷰 내용을 편지형식으로 再구성해 조선일보 2005년 10월31일자에 실었다. 하경정의 심정을 담은 부분을 일부 소개한다.
 
 
 
 하승균이 범인에게 보낸 편지
 

영화「살인의 추억」포스터.

 < 『악마』
 
  난 자넬 이렇게 부르네. 맘에 들지 모르지만 자네의 존재를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10여 년 전에 내가 붙인 이름이지.
 
  한 명인지 두 명인지, 아니면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자네, 혹은 자네들을 만나려고 난 그간 무던히도 애를 써 왔네. 자네 쪽에서는 그 반대였겠지만 말야.
 
  난 요즘 또다시 화성에서 일하네. 자네도 알는지 모르겠지만 작년 말 화성에서 귀가하던 여대생이 실종, 살해된 채 발견된 사건이 있었어. 그 사건이 여태 해결되지 않아 거기서 수사지도를 하고 있네.
 
  근데 말야. 참 질긴 악연이지. 여대생이 실종, 살해된 곳이 바로 그 동네야. 자네 혹은 자네들이 귀한 생명들을 무참히 짓밟고 다니던 그 동네. 수사본부도 그때 그 파출소 자리에 있다네.
 
  기분이 어떤가? 이제 자네를 잡아도 7차 사건까지는 「죄」를 물을 수 없네. 8차 사건 범인은 잡혔지만, 9차 사건의 공소시효도 다음달로 다가왔고 마지막 10차 사건은 내년 4월에 만료된다고 하네. 나도 내년(2006년) 6월이 정년이야. 지난(11월) 21일이 현직에서 맞은 마지막 경찰의 날이었던 셈이지.
 
  시효만료에 담당형사는 정년이라. 자네는 꼭 내 손으로 수갑을 채우려고 했는데 이제 그 수갑도 반납해야 해.
 
  1·2차 사건이 발생한 뒤 그러니까 1986년 12월 당시 수원경찰서 형사계장으로 있을 때 화성사건 수사본부로 차출돼 갔으니 내년이면 정말 꼭 20년이구먼.
 
  몇 달씩 집에도 안 들어가고 자네를 잡으려고 미친 놈처럼 다녔어. 마누라와 애들 생일은 몰라도 자네가 저지른 범행날짜와 시간, 형태는 아직도 줄줄 외우고 있네.
 
  내 부하는 과로로 쓰러져 지금까지 반신불수로 있고, 또 다른 부하들은 용의자를 무리하게 조사하다가 숨지게 하는 과오도 저질렀지. 나 역시 직위해제가 됐었고 말이야.
 
  그런 중에도 자네는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유유히 추가 범행들을 저질러 갔어. 왜 그랬나. 자네도 아마 이제 중년이 됐겠지. 자넨 성격이 무척 내성적이고 사교성이 없는 사람인데, 결혼은 했나? 아이들은 있어?
 
  자네가 죽인 사람 가운데는 70세가 넘은 노파도 있었어. 어머니 생각은 안 나던가. 갓 결혼한 새댁도 있었고, 꽃다운 스무 살 처녀와 앳된 여고생·여중생도 있었어.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 않던가.
 
  난 자네가 다녀간 곳에 나가 사체를 수습하며 분을 참을 수 없었어. 그러곤 자네를 잡으면 결코 법정에 세우지 않고 내 손으로 어떻게 하겠다고 다짐을 했지. 하지만 그러면 뭘 해. 난 결국 자넬 잡지 못했고 나를 바라보는 후배들이나 피해자 가족들에겐 평생 죄인으로 남게 됐네.
 
  난 요즘도 꿈을 꾸네. 자네가 저지른 악마와 같은 범죄. 알몸으로 묶인 채 난행을 당한 우리 누이, 동생, 딸들. 그리곤 또 꿈을 꾸지. 내일 당장이라도 자네 같은 악마에게는 공소시효라는 것이 없어져 내가 나간 뒤라도 우리 후배들이 자네를 잡아들이는 꿈을.
 
  그래 난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그렇지만 난 아직 화성에 있고 그만두는 날까진 자넬 찾아다닐 것이네. 그리고 그 망할 놈의 공소시효만 없다면 내가 없더라도 우리 후배들이 자넬 반드시 잡을 거야. 지금은 우리도 예전과 달라.
 
  부디 나보다 먼저 죽지 말게. 우리 꼭 만나야지. 안 그런가?>
 
 
 
 악마의 자취
 

태안읍 주민들이 治安 불안을 호소한 벽보.

  1986년 9월19일 오후 2시 태안읍 목초지. 스물여덟 살의 젊은 농부 유모씨는 풀밭에 널브러진 기이한 형상의 女體(여체)를 보고 놀라 소스라쳤다.
 
  하의는 벗겨져 없었고, 두 다리가 무릎이 굽어진 채 마치 X자를 그리듯 복부에 밀착된 모습이었다.
 
  인근 동네에 살고 있는 李모(71) 할머니의 시신이었다. 이 할머니는 이 동네로 시집온 딸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9월15일 새벽 6시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경찰 추정 범행 시간은 오전 6시20분쯤. 딸의 집을 나선 뒤 20분 만에 변을 당한 이 할머니는 범인에게 잡혀 풀밭까지 질질 끌려 간 듯 신발과 양말이 이동경로를 따라 벗겨져 있었으며, 갑작스런 변에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감당할 수 없었는지 주변엔 구토 흔적까지 흥건했다.
 
  범행 당일 기상은 맑음, 사인은 縊殺(액살: 손으로 목을 졸라 살해)에 의한 경부압박질사, 정액 반응 음성, 性폭행 확인 불능. 화성 악몽의 시작이었다.
 
  1차 이 할머니 사건 때만 해도 경찰은 인근 불량배나 우범자에 의한 단순 사건 정도로만 생각을 했다. 여성 노인을 상대로 한 범행 수법이 다소 「사이코적」이긴 했지만 그것이 연쇄살인의 시작일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다.
 
  더구나 다음번 악몽이 불과 한 달여만에, 그것도 1차 사건 발생장소에서 500m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리라곤 더더욱 생각지 못했다.
 
  1986년 10월20일 송탄에서 화성으로 맞선을 보기 위해 다니러 왔던 미혼여성 박모(25)씨가 오후 9시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변을 당했다.
 
  그녀의 시신은 3일 뒤인 10월23일 태안읍 농수로 안에서 옷이 모두 벗겨지고 性폭행 흔적이 남겨진 채로 발견됐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첫 장면으로 인용되기도 한 사건이었다. 이번에도 사인은 액살에 의한 경부압박질식사. 범행 당시 기상은 흐림.
 
 
 
 3차 살인에서 엽기 수법 본격화
 

첫 번째 살인사건이 있던 현장의 허수아비에는「너는 자주하지 않으면 사지가 썩는다」고 적혀 있다.

  엽기적 연쇄살인의 수법은 3차 사건 들어 본격화된다.
 
  1986년 12월12일 오후 7시쯤 수원에서 남편을 만난 뒤 먼저 화성 태안읍 집으로 돌아가던 신혼주부 권모(24)씨가 실종됐다. 그녀의 시신은 이듬해인 1987년 4월23일 1·2차 사건이 났던 지점에서 수백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는데, 팬티가 머리에 씌워져 있었고 입에는 거들과 스타킹으로 재갈이 물려 있었다.
 
  이번 사인은 손으로 목을 조른 액살이 아니라 스타킹으로 목을 죈 絞殺(교살)이었다.
 
  이 같은 범행수법은 그 뒤의 연쇄살인에서 유사하게 이어진다.
 
  1986년 12월14일, 3차 사건 피해자 권씨가 변을 당한 지 이틀 만에 수원에서 맞선을 보고 화성 정남면 집으로 돌아오던 미혼여성 이모(21)씨가 실종되었다. 그녀는 7일 만인 12월21일 집 근처 논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두 손은 입고 있던 블라우스로 결박이 된 상태였고, 스타킹으로 목이 졸렸으며, 얼굴에는 역시 피해자의 거들이 씌워져 있었다. 정액이 검출됐으나 판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산을 이용해 변태적 행위를 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뒷부분에도 언급하겠지만 3차 사건 이후부터는 수사본부가 대폭 확대되고 마을 방범에 투입된 경찰력이 보강돼, 범행 발생 지역인 태안 일대에는 『주민보다 경찰이 많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범인은 경찰을 철저히 비웃듯 며칠 만에 추가 범행을 저질렀다.
 
  1987년 1월11일 오후 1시쯤 전날 수원에서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실종된 여고생 홍모(18)양이 논바닥 짚단더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홍양이 친구와 오후 10시15분쯤 헤어져 태안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한적한 길을 이용해 집으로 돌아가다 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했다.
 
  두 손은 브래지어로 결박돼 있었으며, 입에는 양말로 재갈이 물려 있었고, 매고 있던 털목도리로 목이 졸려 있었다.
 
 
 
 범인에 가장 근접했던 7차 사건
 

화성 7차 살인사건 현장 증거물을 들고 있는 경찰.

  그 뒤에는 1987년 5월2일 오후 11시쯤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남편 마중을 나갔다 실종된 주부 朴모(29)씨가 7일 뒤인 5월9일 태안 야산에서 브래지어로 목 졸려 숨진 채 발견됐다.
 
  인근에서는 255mm 크기의 신발 자국이 나왔으나 판독이 어려웠고, 우산에서도 이렇다 할 지문이 나오지 않았다.
 
  1988년 9월에는 태안에서 20km 가량 떨어진 팔탄면에서 7차 사건이 발생했다. 9월7일 아들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을 돕다 귀가하던 주부 安모(54)씨가 실종된 다음 날 농수로에서 입에는 재갈이 물리고 입고 있던 상의로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됐다.
 
  피해자의 신체에서는 복숭아 조각 9개가 나왔다. 역시 뒷부분에 언급하겠지만 이 7차 사건은 경찰로서는 범인에게 가장 근접했던 사건으로 현재까지도 당시 수사진들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7차 사건 직후인 1988년 9월16일 발생한 8차 사건은 태안 가정집에 침입한 범인이 잠을 자고 있던 여중생 朴모(13)양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범인은 이듬해 경찰에 검거됐고, 나머지 사건과는 연관이 없는 것으로 결론 났다.
 
  그 후 2년여 뒤인 1990년 11월15일에는 학교를 마치고 귀가 중이던 여중생 金모(14)양이 실종됐다가 다음날 오전 스타킹으로 두 손과 두 발이 묶이고, 브래지어로 재갈이 물린 채 발견됐다. 범인은 이때 이미 숨진 피해자의 몸에 면도칼로 난행을 하고 신체에 볼펜과 도시락 포크, 수저 등을 삽입하는 엽기 행각을 벌였다.
 
  1991년 4월4일에는 전날 귀가 도중 실종된 권모(69) 할머니가 검은 천으로 목이 졸린 채 동탄에서 발견돼 화성 10차 사건을 기록했다.
 
  당시 경찰은 1~3차 사건 기간 중 화성경찰서장을 수사본부장으로 하고, 수사과장 밑에 경위를 팀장으로 하는 3개의 수사 실무팀과 1개의 관리반을 뒀다.
 
  엽기살인 행각이 이어지자 4차 사건부터는 수사본부를 대폭 확대해, 화성경찰서장을 전격 경질하고, 당시 경기경찰국 부국장(경무관)을 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으며, 6개의 수사팀과 각각 1개씩의 특별팀 및 관리팀을 설치했다.
 
  사건 초기인 1986년 화성서장 등 30명으로 구성됐던 수사본부는 1987년 63명으로, 1989년에는 114명으로 늘어났다.
 
 
 
 경찰 27만 명 동원한 총력 수사
 
  수사팀에는 경기도는 물론이고 충청도와 강원도 등지에서 차출된 유능한 경찰들이 배치됐다. 당시 화성경찰서 직원들이라면 경무과·교통과·방범과·내근 조사요원 등 누구를 막론하고 일과시간 이후에는 잠복근무에 투입되거나 수사를 도왔다.
 
  경찰력 동원 규모는 국내 단일 사건 역사상 최고로 기록될 정도다. 일반 경찰 27만 명, 여경 5600명, 전·의경 133만 명, 민간기동대 11만 명 등 연인원 200만 명이 수사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용의자로 오른 수사대상자가 2만1000명이었고, 지문대조 4만 건, DNA 감정 570건, 모발감정 180건 등 수사에 엄청난 정력을 쏟아부었다. 화성 연쇄사건을 수사하다가 다른 범행이 발각된 「부수 범죄 검거 실적」이 1500명에 이른다. 엄청난 물량을 투입한 저인망식 수사상황을 엿볼 수 있다.
 
  당시 형사들은 『죽기살기로 수사를 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유일하게 범인이 잡힌 8차 사건 때를 보면 당시 분위기를 잘 알 수 있다.
 
  8차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남성의 체모에서 다량의 티타늄과 염화칼슘 성분이 검출됐다. 당시 수사팀에 참여하고 있던 최모 형사는 이 체모를 단서로 화학물질을 많이 접하는 인근 공장 근로자들을 유력한 용의선상에 두고 수사에 나섰다.
 
  그의 생각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수사본부는 수사력을 동원, 수사 대상자 800여 명의 체모를 10가닥 이상씩 강제로 뽑아 일일이 검사했고, 농기구 용접수리공인 윤모(당시 22세)를 범인으로 체포하는 개가를 올렸다.
 
  7차 사건 때는 이보다 더한 노력과 정성이 투자됐다.
 
  1988년 9월8일 팔탄면 농수로에서 주부 安모(52)씨의 시신이 발견되자 경찰은 즉시 대대적인 탐문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용의자로 보이는 남자를 태웠다는 버스 운전기사와 안내원을 찾게 된다.
  
  
   얼굴 드러낸 犯人

 

화성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형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살인의 추억」.

  당시 화성 발안에서 수원 간 시외버스 노선을 운행하던 운전기사 강모(당시 43세)씨와 안내원 엄모(여·당시 22세)씨는 경찰에서 『사건 당일 오후 10시쯤 발안 터미널을 출발해 수원 방면을 10분(2km)쯤 가다 보니 24~27세 가량의 남자가 정류장도 아닌 곳에서 손을 흔들어 버스에 태웠다』고 진술했다.
 
  이 남자가 버스를 세운 곳은 피해자 安씨가 발견된 지점에서 400m 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운전기사 강씨는 『남자는 무릎까지 물에 젖어 있었으며, 운전석 맞은편 앞자리에 앉아 (자신에게) 라이터를 빌려 담배를 피웠기 때문에 유심히 얼굴을 봤다』고 경찰에 밝혔다.
 
  경찰은 마을에서 그 시간에 버스를 탄 사람이 없고, 비가 오지 않았음에도 옷이 젖어 있다는 건 농수로나 이슬 젖은 풀밭을 헤치고 나왔다는 증거라고 판단, 이들의 진술을 토대로 「스포츠형 머리에 신장 165~170cm 오똑한 코에 날카로운 눈매의 24~27세 가량의 남자」의 몽타주를 그려 전국에 수배했다.
 
  경찰은 20만 장의 수배전단을 배포했고, 『이 남자가 수원시 고등동 터미널에서 내렸다』는 버스 운전사 강씨 등의 진술에 따라 수원시 15개 洞과 화성군 6개面 남자 주민 5만 명에 대한 주민등록 사진을 운전기사 강씨와 안내원 엄씨에게 확인토록 하기도 했다.
 
  5만 명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기 위해 수사진은 여관방을 잡아 강씨와 엄씨를 데려다 놓고 몇 날 며칠 밤을 새워 대조작업을 벌였다고 한다.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하경정의 부하 중 한 사람은 과로에 의한 뇌출혈로 쓰러져 현재까지 불구로 살고 있다.
 
  유일하게 목격자가 확보됐던 이 사건에 경찰이 목숨을 걸고 매달렸음을 알 수 있다.
 
  하경정은 『7차 사건에서 경찰은 범인과 가장 가까이 접근했다』며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범인 검거에 실패했다』고 했다.
 
  몽타주를 확보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경찰이 범인과 인접했던 경우는 그전에도 있었다.
 
  화성사건의 유일한 생존 여성 金모(당시 45세)씨 사건에서다.
 
  1986년 11월30일 오후 9시, 3차 살인 사건 피해자가 실종되기 10여 일 전이었다. 그날 집에서 400m 떨어진 교회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던 金씨(피해자가 생존해 있기 때문에 자세한 장소를 밝히지 않는다)는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납치돼 인근 논둑으로 끌려갔다.
 
  범인은 金씨의 양말을 벗겨 두 손을 묶은 뒤 팬티를 벗겨 입에 재갈을 물리고 거들을 얼굴에 씌웠다. 전형적인 화성사건 수법이었다. 그 상태에서 金씨를 性폭행한 범인은 『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金씨는 『가방을 떨어뜨렸다』며 끌려온 방향을 가리켰다.
 
  순간 범인은 金씨가 지시한 방향으로 잠시 주의를 돌렸고, 金씨는 이 틈을 이용해 필사의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
 
  경찰이 金씨의 진술을 토대로 그린 범인의 윤곽은 나이 25~27세, 키 160~ 170cm 가량의 호리호리한 몸매, 저음의 목소리 소유자였다.
 
  당시 경찰은 범행수법이 똑같은 데다 그간의 피해자 소지품에서 현금이 발견되지 않았고, 이번에도 피해자에게 돈을 요구했다는 정황을 종합, 동일범 소행으로 보고 수사를 벌였지만 더 이상의 진척은 없었다.
 
  이 두 번이 경찰이 범인과 근접했던 경우였다.
 
  하지만 경찰이 『화성사건 범인을 잡았다』고 발표한 적은 여러 번이다.
 
  실제로 8차 사건의 범인은 잡혀서 현재 복역 중이다. 용의자로 검거됐던 사람이 현존하고 있거나 그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정확한 신상은 이 기사에 명시할 수 없다. 다만, 화성사건을 이해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기에 그 내용만큼은 자세히 서술해 두기로 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당시 수사본부는 화성 어느 동네에서 여자들을 상습적으로 性추행하고 다닌다는 제보를 받고 A씨를 9차 사건(1990년 11월15일 발생)의 범인으로 검거했다.
 
  9차 사건은 여중생 金모(14)양이 손과 발이 스타킹으로 묶인 채 숨진 사건으로 범인은 金양이 숨지고 난 뒤에도 면도칼로 가슴을 난자하고 볼펜과 포크 등을 신체에 삽입했던,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주요 장면으로 등장했었다.
 
  경찰은 A씨를 검거해 최종 자백을 받아 냈다.
 
  자신이 귀가 중인 金양을 납치해 재갈을 물리고 옷을 벗기고 팔다리를 묶고, 난행을 했다는 진술이었다. 당시 金씨의 최종 진술에 입회했던 경찰간부는 『범인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을 했다. 면도칼을 이용한 시신 난자, 볼펜과 포크를 이용한 난행 등 그의 진술은 분명 본인이 했던 일을 아주 세세하고 또렷하게 담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경찰 수뇌부는 『검거를 하고 초기에 조사를 했던 수사팀에서 가혹행위를 하며 진술을 강요했거나, 미리 진술할 내용을 알려 주는 先知識(선지식)을 줬을 수도 있다』며 일단 제동을 걸고 再조사 지시를 내렸다.
 
  그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신중을 기한 것이다. 경찰은 일단 확인된 단순 性추행 사건들만을 가지고 그를 구속한 뒤 검찰의 지휘를 받아 再수사했다.
 
  再수사 과정에서 A씨는 『범행 후 손에 피해자의 피가 묻어 현장에 있던 소나무 가지에 손을 문질러 피를 닦았다』는 추가 진술까지 내놓았다. 국과수가 현장에 내려와 감식한 결과 범행 현장 주변 소나무 가지와 잎에서 실제 혈액 반응이 나왔다.
 
  수사진도 전혀 몰랐던 사항이었다. 경찰은 이제 누구라도 A씨가 범인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길 한 달쯤. A씨는 진술을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범행을 시인했고 경찰도 이제는 됐다 싶어서 수사를 마치고 그를 검찰에 송치하려 했다.
 
  그런데 날벼락이 떨어졌다. 국과수 감정에서 「정액 등 이물질 없음 판정」까지 받은 피해자 金양의 옷가지를 검찰에 증거물로 보내기 위해 경찰서 캐비닛을 열고 나니, 직원 중 한 사람이 『이거 정액 아냐?』 라며 의문을 제기한 것이었다.
 
  수사본부는 발칵 뒤집혔다. 정밀 감식결과 아무것도 없다던 옷가지에서 정액이 그것도 밤알만 한 큼직한 크기로 묻어 있다니.
 
  再감식한 결과 정액이 맞았다. 그것도 용의자 A씨의 혈액형과 같은 정액. 그러나 경찰은 당시 이를 증거로 볼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치열한 내부 논란을 거쳤다.
 
  『자백까지 받아 낸 상황에서 정액을 정밀 분석한 결과, 용의자의 DNA와 일치하지 않을 경우 수사는 또다시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는 걱정과 『진술만 가지고는 재판에서 유죄를 인정받을 확률이 낮으니 확실한 물증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선 것이다.
 
  결국 경찰은 정액을 일본으로 보내 DNA 감정을 의뢰했다. 결과는 용의자의 것과 「불일치」였다.
 
  A씨는 곧장 풀려났고, 몇 년 전 간암으로 숨졌다.
 
  한 경찰 관계자는 당시를 떠올리며 『수십 명이 여러 단계를 거쳐가며 눈을 까뒤집고 봤을 텐데 왜 나중에 정액이 나왔는지 참으로 모를 노릇』이라고 한탄했다.
 
  
 과학수사의 전기가 된 화성 연쇄살인
 

아홉 번째 피해자가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범행을 당한 터널.

  또 하나의 「범인 검거」 사례는 그야말로 코미디 같은 경우다.
 
  4차 사건(1986년 12월14일)이 발생한 뒤 어느 심령술사가 수사본부를 찾아 왔다.
 
  그는 『갑자기 화성사건 범인 이름 「B」가 떠올라 사건 발생 동네에 가 보니 실제로 그 이름의 남자가 살고 있더라. 알아보니 B씨가 피해자 李모(21)씨를 쫓아다닌 적이 있었고, 사건 당일에도 그 남자를 李씨의 집 근처에서 봤다는 사람이 있다』라며 B씨가 범인인 이유를 30여 개나 적어 경찰에 제시했다.
 
  그럴듯했다. 그러나 역시 결정적 증거는 없었다. 당시 경찰이 심령술사에게 『증거가 없어 안 된다』고 난색을 표명하자 그는 『증거도 있다. 저기 야산에 가면 범인이 피해자의 손목시계와 반지를 묻어 놓은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정확한 지점까지 가리켰다.
 
  실제 피해자의 시계와 반지가 없어졌기 때문에 경찰은 심령술사에게 바싹 다가섰다. 그리곤 대대적으로 인원을 투입해 심령술사가 가리킨 지점을 파헤쳤다.
 
  반나절, 한나절. 아예 야산 하나를 모두 파헤치다시피 한 경찰은 그때서야 「이게 아니구나」를 느끼고 심령술사를 돌려 보냈다고 한다.
 
  수뇌부는 『과학수사를 해야지, 과학수사를』 하며 진흙 범벅이 돼서 돌아온 수사본부 직원들을 나무랐다.
 
  그리고 얼마쯤 지났을까?
 
  경기도가 아닌 다른 지역의 경찰서 형사들이 화성 4차사건의 범인을 잡았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범인은 다름 아닌 심령술사가 지목했던 B씨. 수사본부에서 외면을 당한 심령술사가 他지역 경찰에게 제보를 했고, 이 경찰서 형사들이 밤에 화성으로 와 B씨를 검거해 간 것이었다.
 
  확인 결과 「고문에 의한 자백」이었다. 대한민국 경찰의 위상이 또 한 번 땅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용의자 음모를 뽑아 8차 살인 해결
 

 

화성 연쇄살인사건 현장 모습.

  엄청난 노력도 소용없이 번번이 무산되고 마는 범인 검거의 꿈. 이런 상황 속에서 답답했던 경찰들이 무당집을 찾거나 심령술사들의 제보 한마디에도 관심을 기울였다는 건 맹목적인 미신 숭배가 아니라 애절함의 발로였다.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한 경찰관은 『한번은 윗분이 수사진을 모아 놓고 회의를 하다가 나에게 「너는 非과학적 수사를 담당해 보라」는 말을 했다』며 『영문을 몰라 대답을 머뭇거리고 있으려니 「소문난 무당집엘 좀 가보라」고 지시를 내려 용하다는 데는 안 가본 데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어느 무당은 「조선시대 화성에서 계모 슬하에 살다가 억울하게 죽은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의 혼이 범인들을 조정하고 있다」고 하기도 했고, 또 어느 무당은 「범행현장에 피해자 형상을 한 인형을 세워 두면 범인을 잡을 수 있다」고 했다』고 회고했다.
 
  거듭되는 수사의 난관 속에서 경찰은 당시 유능한 수사전문 간부들을 현장에 파견했으나, 번번이 별 소득을 올리지 못한 채 교체를 거듭했다.
 
  「영원한 수사반장」으로 불렸던 최중락(76) 前 경찰청 형사지도관 역시 1987년 당시 인천경찰청 수사과장으로 근무하다 화성에 파견됐지만 별다른 소득을 올리지 못했다.
 
  전문 골잡이들을 돌아가며 스트라이커로 세워 봤지만 골은커녕 일방적인 수세를 면치 못하는 형국이었다.
 
  경찰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화성사건 수사기간을 전후해 담당 형사들이나 용의선상에 올랐던 사람들이 돌연 죽음을 맞거나 사고를 당하는 액운까지 잇따랐다.
 
  4차 사건의 용의자로 떠올랐던 남자는 시름시름 앓다가 10년 전 죽었고, 7차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됐던 남자는 목을 매 자살했다.
 
  9차 사건의 경우 앞서도 얘기했던 A씨가 몇 년 전 간암으로 죽었고, 역시 용의자로 지목돼 조사를 받고 풀려난 또 다른 남자 2명은 각각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을 했거나 교통사고로 명을 달리했다. 10차 사건 때도 용의자로 연행됐던 사람이 투신자살을 했다.
 
  8차 사건 당시 범인의 음모를 뽑아 결정적 공을 세운 최모 순경도 훗날 초상집에 가다 교통사고로 명을 달리했다.
 
  사건에 참여했던 하경정의 부하가 뇌출혈로 쓰러진 것은 물론, 또 다른 당시 형사 이모(53)씨는 훗날 강도를 잡다 다쳐 두 다리를 쓰지 못한다.
 
 
 
 「朴기자」의 편지
 
  영화 「살인의 추억」 중 한 장면. 논바닥에서 또 한 명의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되자 송강호가 현장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감식반을 찾고 현장 보존을 한다.
 
  그러다 반장에게 하는 말 『기자 새끼들은 누가 이렇게 불렀어. 근데 그 박기자 새끼 안 왔나? 안 보이네. 박기자 그 ××새끼 안 보니까 속이 다 편하네』
 
  여기에 등장하는 「朴기자」는 지금도 현장에서 뛰고 있다. 영화가 끝난 뒤 자막에 영화제작에 자문을 한 것으로 등장하는 연합뉴스 경기북부지국장 박두호(53) 기자다.
 
  그는 사건 초기 취재기자로 화성사건과 인연을 맺은 뒤, 그 후 줄곧 화성사건이 터질 때면 관심을 가지고 취재를 해 온 화성사건의 또 다른 당사자다.
 
  그는 당시 수사상황을 가까이서 지켜본 심정을 정리해, 이 사건을 다시 취재 중인 기자에게 전해 왔다. 그의 글을 그대로 옮긴다.
 
 < 당시 수사는 우리나라 경찰 수사력이 모두 동원된 것이었다. 경기지방경찰청은 강력사건 수사경험에서 다른 지방청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 수사본부장도 경찰서장, 또는 지방경찰청 차장이 맡을 정도로 비중 있게 대응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은 시국사건에 경찰이 동원돼 화성사건 수사에 필요한 인원을 동원하지 못한 것처럼 표현했으나, 이는 당시 시국을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것일 뿐 실제와는 차이가 있다.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서장이 한 명씩 직위해제됐는데 집중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러나 수사기법은 지금과 큰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당시 국내에 유전자 감식 기술은 없었다. 고작 혈액형 정도를 추출할 수 있었다. 유전자 감식은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지만, 혈액형은 용의자 집단을 압축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차이가 크다.
 
  감식 기술의 유무는 현장조사의 「가이드 라인」이 된다. 검사를 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으면 유류물을 소중하게 확보하지만 검사를 못 하거나 검사가 있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경우 유류물을 확보할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할 수 있는 감식은 정액이나 모발에서 혈액형을 추출하는 정도였다.
 
 
 
 화성수사는 한국 과학수사기법의 발달史
 
  지금의 기준으로 당시 수사를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나라 과학수사기법의 발달사는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와 함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용의자에 대한 유전자 감식을 한 것이 비록 외국에 의뢰한 것이었지만 우리나라 범죄수사에서 유전자 감식 기법을 처음 적용한 것이었다.
 
  8차 사건은 모발 중성자 분석법이라는 기법을 처음 써 모발에 특정한 성분이 많이 함유됐음을 확인하고 용의자의 직업群을 압축해 검거할 수 있었다. 화성사건 범주에는 들지 않지만 화성사건 수사팀이 범인을 검거한 장안면 백골사건은 유골로 생전의 모습을 복원하는 「슈퍼임포스 기법」을 적용해 신원을 확인했는데 이것도 처음이었다.
 
  화성사건 수사팀은 사실 용의자를 3명 검거했다. 모두 자백했고 경찰은 구속영장을 신청했었다. 용의자 가운데 한 명은 구속영장 신청 전에 나와 단둘이 면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당시 용의자와 여러 가지 얘기를 하며 내가 「이 사건 범인이라면 무거운 형을 받는다. 지금이라도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라」고 일러 줬다. 그 용의자는 고개를 숙이고 『제가 잘못했습니다』고 했다.
 
  경찰이 신청한 구속영장을 검찰은 수사가 미진하다며 보강수사 명령했다. 용의자를 체포해야 하는 경찰과 공소유지를 해야 하는 검찰의 증거에 대한 견해 차이일지 모른다. 다른 용의자는 1시간 가량 수사관에게 자백하는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를 들었다. 듣기로는 임의성이 있어 보였다. 이 용의자는 유전자 감식에서 불일치로 나왔다>
 
 
 
 왜 범인을 못 잡았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기록과 수사진들의 회고, 언론보도 내용을 종합하면 당시 경찰로서는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 검거를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한 셈이다.
 
  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수사의지, 최고의 멤버로 구성된 수사본부, 엄청난 수의 용의자 등 조사대상자, 미신까지 동원한 처절한 검거 노력 등은 분명 경찰 역사상 가장 치열한 분투의 결과물이었다.
 
  범인이 아닌 생사람을 잡거나 가혹행위를 했거나 등의 과오들도 의욕이 지나칠 만큼 과했기 때문에 생긴 일일 수 있다.
 
  그럼 무엇 때문에 못 잡았나.
 
  경찰 내부의 화성 연쇄살인사건 감정기록을 살펴보면, 1차 사건 때는 「강간 확인 불능」이라고 명시돼 있고, 2·3·4차 사건 등 이후로도 「정액 양성(혈액형 판정 불능)」이라는 문구가 자주 등장한다.
 
  다만 9차 사건에 가서야 「정액 검출(B형)」이라는 문구가 등장하고, 10차 사건에서도 「정액 양성(B형)」이라는 피해자 시신 감정 결과가 나왔다.
 
  당시 감식 수준으로는 지금처럼 정액을 가지고 DNA 검사를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단지 피해자 몸에서 나온 정액을 가지고 혈액형을 식별할 수 있는 정도였는데, 남자의 정액이 여성의 질액과 혼합돼 화학반응을 일으켰거나, 다른 이유로 훼손됐을 경우에는 그나마도 불가능했다.
 
  이러다 보니 피해자 몸에서 정액이 나와 혈액형이라도 알 수 있었으면 다행이고, 그 이상의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DNA 검사기법이 본격 도입된 것은 1990년 10차 사건 때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경찰이 유력한 용의자로 A씨를 검거해 놓고 뒤늦게 피해자의 옷에서 정액이 나왔을 때였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는 유전자(DNA) 감식을 위해 샘플을 미국으로 보낸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 한국 경찰은 이를 일본에 의뢰를 했다.
 
  이때 경찰 수사를 지휘하던 검사는 당시 수원지검 강력부장으로 있던 김종빈 前 검찰총장이다. 그의 프로필에 「유전자 감식 기법을 수사에 최초로 도입했음」이라는 이력이 단골로 등장하는데 바로 화성 9차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아무튼 검찰 총수의 주요 이력에 등장할 만큼 당시로서는 DNA 검사가 획기적인 일이었다.
 
  처음 화성사건 발생 당시에는 국내에서는 DNA 검사법이 개발조차 되지 않았고, 초보적인 검사법도 1990년대 중반 이후에야 등장했다. 그나마도 초기 검사법은 변별력이 100분의 1 정도로 극히 떨어졌다.
 
  현재는 DNA를 작게 잘라 전기장치를 이용해 배열 모양을 분석하는 정밀 기술 등 분석 종류가 10여 가지에 이른다. 당시 두세 가지에 불과했던 분석 기술과는 하늘과 땅 차이를 보인다.
 
 
 
 9·10차 사건 용의자 DNA 국과수에 영구보존
 

화성 연쇄살인 사건일지 및 약도(자료: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