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 속으로 빠지는 '김정남 암살' 재판 : 월간조선

북한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의 암살 사건이 북한인 용의자 없이 재판이 진행되면서 미궁으로 빠지고 있다.

AP통신을 인용한 23일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김정남 암살 사건을 수사 중인 말레이시아 경찰은 "암살을 주도한 북한인 4명이 없다고 해서 현재 재판을 받고 있는 동남아시아 피고인 2명에 대해 편견을 갖고 수사를 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완 아지룰 체 완 아지즈 말레이시아 경찰 당국자는 22일 말레이시아 샤알람 고등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이번 사건에서 살인을 저지른 범인은 피고인들이기 때문"이라며 "말레이시아 경찰은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를 통해 북한인 4명에 대한 수배 명령을 내린 바 있다"고 말했다. 북한인 4명을 추적하기 위한 경찰의 조치가 부족했고 수사가 이들의 증언 없이 진행돼 불완전했다는 피고 측 변호인단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베트남 국적 출신 피고인 도안 티 흐엉(30)과 인도네시아 출신 피고인 시티 아이샤(25)는 지난해 2월 13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김정남의 얼굴에 ‘VX(맹독성 신경작용제)’를 발라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이들의 변호인단은 피고인들이 희생양에 불과하며, 이들은 북한인들의 '몰래카메라 출연 제의'에 속아 범행에 동참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피고 측 변호인단은 "말레이시아 경찰 당국이 수사에 편견을 갖고 제대로 임하고 있지 않다"며 "김정남을 죽일 의도가 없다는 피고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내용을 철저히 조사하지 않았다"고도 말했다.

변호인단은 흐엉이 김정남의 얼굴에 VX를 발랐을 당시 그의 행동이 '공격적'이었다는 완 아지룰의 증언도 문제 삼았다. 인간행동 전문가도 아닌 완 아지룰의 용어 선택이 수사에 편견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는 2018년 3월 20일 김정남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베트남 국적 피고인 도안 티 흐엉 측 변호인이 법원에 제출한 비디오를 공개했다. 사진=WSJ 홈페이지 캡처

흐엉을 변호하고 있는 살림 바시르 변호사는 "공항 폐쇄회로(CCTV) 영상을 보면 흐엉은 김정남에게 접근하기 전 자신의 머리를 만졌고 김정남에게 VX를 바르고 난 뒤에는 멀리 떨어진 화장실에서 손을 씻었다"며 "이는 손에 독을 묻힌 걸 안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고 말했다.

흐엉의 또 다른 변호사인 나란 싱은 "진짜 범인들은 떠났고, 그들은 피고인들을 데리러 오거나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며 "지금 피고석에 있어야 할 사람은 북한인 4명"이라고 말했다. 김정남 암살을 지시한 것으로 보이는 북한인 4명은 범행 직후 출국해 북한으로 돌아간 것으로 확인됐다.

일각에서는 변호인단의 주장처럼 흐엉과 시티에게 뚜렷한 범행동기가 없어 보이기 때문에 법원이 이들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는 외교 문제로도 번질 수 있다. 무죄로 보이는 피고인들에게 유죄 선고를 내릴 경우 그들의 국가인 베트남·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간의 관계가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유죄를 선고하지 않는다면 국제적인 관심을 끌어모은 이번 암살이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츄핑 말레이시아대 국제외교학 교수는 "피고인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지 못하면 말레이시아의 평판은 추락할 것"이라며 "말레이시아는 한국에게도 만족스러운 결론이나 설명도 주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김정남 암살 직후 북한으로 도주한 4명이 북한이 보낸 정보요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과의 관계도 문제다.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말레이시아와 북한은 김정남 암살 사건을 계기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말레이시아가 암살 배후로 북한을 지목하자 북한은 즉각 반발했다. 북한은 용의자 4명을 구금하라는 인터폴의 통보를 포함해 모든 수사에 협조하지 않고 있으며 모든 혐의를 부정하고 있다.

강철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 대사는 암살 사건 직후 "말레이시아 경찰 수사 결과는 믿을 수 없다. 한국과 결탁한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해 말레이시아 정부와 국민의 분노를 샀다. 이후 말레이시아는 북한과의 비자면제협정을 파기하고 강철 대사를 추방 조치했다. 당시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는 북한과의 외교 단절도 거론했다.

북한은 평양에 거주하는 말레이시아 외교관 등 9명을 인질로 삼으며 말레이시아를 압박했다. 이에 말레이시아는 이정철(46) 등 북한인 2명을 증거불충분의 이유를 들어 석방했고, 김정남 암살 사건과 관련된 북한인 용의자 모두를 놓치게 됐다. 당초 김정남의 시신과 그의 아들 김한솔과의 유전자 대조도 북한의 인도 요구에 무산됐다.

글=김성훈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