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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치

김구 선생 묘소를 국립현충원으로 옮기자고?

효창원은 김구 선생이 3의사 묘역으로 직접 낙점... 국립현충원이 생기기 전에는 사실상의 국립묘지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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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민주연구원장은 218일 기자회견에서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권의 뿌리를 백범 김구 선생에게서 찾아야 한다면서 "김구를 비롯해 효창원에 있는 윤봉길, 이봉창, 안중근(가묘) 등의 묘를 국립현충원에 옮겨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원장은 김구 선생 등을 효창원에 모신 것이 국립현충원에 모신 것보다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는 효창원에 그분들을 모시게 된 역사적 경위에 대한 무지의 소치다.

 

효창공원(효창원)은 원래 조선 22대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무덤이 있던 곳이다. 효창원 앞 송림 안에는 만리창(萬里倉)이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인근에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이 일대는 일본인 거주지가 됐다. 1895년 을미사변 때에 일본 낭인배들이 출발한 곳도 이 일대였다.

1924년 경성부는 효창원의 일부인 81460평을 공원용지로 책정, 효창공원을 열었다. 문효세자의 묘는 1944년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으로 옮겨졌다.

이곳에 독립운동가인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義士)의 묘와 안중근 의사의 허묘가 들어선 것은 1946년의 일이었다. 일본에 있던 세 의사의 유해를 국내로 모셔온 김구 선생의 노력 덕분이었다. 194677일 세 의사는 국민장(國民葬)으로 이곳에 모셔졌다. 장례식에는 이승만, 김구, 오세창, 이시영 등 우익 민족주의 진영 인사들은 물론, 여운형, 공산당 대표 등도 참석했다. 이 일을 김구는 이렇게 기록했다.

<장례식에 임하여 봉장위원회(奉葬委員會) 책임자들이 묏자리를 널리 구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결국 내가 직접 잡아 놓은 용산 효창원 안에 매장하였다. 그것은 서울(漢城) 역사 이래 처음 보는 장례식이었다. 미군정 간부들도 전부 참석하였으며, 미국 군인도 호위차 같이 출동하겠다는 것을 이것만은 중지시켰다. 그러나 조선인 경관은 물론 지방 각지에 산재한 육-해군 경비대까지 집합하고, 각 정당 단체와 교육기관이며 각 공장 부문 일반 인사들이 총출동하여 태고사로부터 효창원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어, 전차, 자동차 등 각종 차량과 일반 보행까지 일시 정지하였다. 슬픈 곡조를 연주하는 음악대를 선두로 사진반 기자는 사이사이에 늘어섰고, 그다음은 제전을 드리는 화봉대(花峰隊), 창공에 흩날리는 만장대(輓章隊)가 따랐고, 그 뒤 여학생대가 3의사 상여를 모시니, 옛날 국왕 인산(因山) 때 이상으로 공전의 대성황을 이루었다.

장지에는 제일 앞머리에 안중근 의사의 유골을 봉안할 자리를 비워 놓고, 그 아래로 세 의사의 유골을 차례로 모셨다. 당일 임석한 유가족의 애도하는 눈물과 각 사회단체의 추도문 낭독으로 해는 빛을 잃은 듯하였다. 사진반 촬영으로 장례식을 마쳤다.>

 

아직 대한민국이 정식으로 들어서기 전이라서 그렇지 사실상 국장(國葬)’이었고, 효창원은 사실상의 국립묘지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일제가 조선왕조 세자의 무덤을 옮기면서 조성한 공원에 항일독립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의사들을 모신 것은 그 자체로 극일(克日)의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1948년에는 임정 주석 이동녕 선생, 군무부장 조성환 선생, 비서장 차리석 선생의 유해가 이곳 효창공원에 모셔졌다.

따라서 1949626일 김구 선생이 흉탄에 돌아가신 후, 선생을 이곳에 모시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김구 선생도 자신의 지시를 받고 일제와의 싸움에 나섰던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들의 묘소, 평생의 동지였던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선생의 묘소가 있는 곳에, 자신이 그 의사들을 위해 점지했던 땅에 자신이 묻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했을 것이다.

동작동 국립묘지(국립현충원)가 생기기 전인 당시로서는 이곳에 김구 선생을 모시는 것은 최고의 예우였다. 국군묘지가 생긴 것은 1957, 국군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된 것은 1965년이었다. 김구 선생 서거 후 당시 이승만 정부는 장의위원회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이곳 효창공원을 김구 선생의 장지(葬地)로 결정했다.

김구 선생을 효창원에 모신 것은 그분을 홀대해서가 아니었다. 그분이 효창원에 모셔진 것이나 지금까지 그분의 묘소가 효창원에 있는 것은 그 나름의 역사성이 있는 것이다. 이미 69년 동안 효창원에 잠들어 계신 김구 선생을 이 정권의 정통성 만들기를 위해 번거롭게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일까

입력 : 2018.02.19

조회 : 3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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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 ‘어제 오늘 내일’

ironheel@chosun.com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2000년부터 〈월간조선〉기자로 일하면서 주로 한국현대사나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 왔습니다. 지난 70년 년 동안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2012년 조국과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45권의 책을 소개하는 〈책으로 세상읽기〉를 펴냈습니다. 공저한 책으로 〈억지와 위선〉 〈이승만깨기; 이승만에 씌워진 7가지 누명〉 〈시간을 달리는 남자〉 등이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제가 읽은 책들을 소개하면서 세상과 역사에 대한 생각을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댓글달기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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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일파 (2018-04-07)   

    김구 섬생님의 뜻에 따라 효창원에 믇히신걸로 알고 있는데 옮기려는 저의가 진정 뭔지. 우리나라 수도에 효창원이 있으므로 시민들에게 더 인지가 되고 정신이 계승하는데 유리하다. 효창원 을 공원으로 만들어 격 떨어뜨리는 걸 시작한건 일제시대때부터 시작된건데 이승만때는 운동장까지 만들어 지고 지금은 아예 무덤을 옮기자고 하네. 아직도 일제만행은 끝나지 않고 진행중인것만 같다.

  • 후앙 (2018-02-20)   

    정확한 지적입니다. 그 역사적인 의미를 먼저 알고 나서 신중히 접근해야 할 사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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