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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경주 산책①] 잃어버린 신라, 경주를 찾아서 - 왕궁 월성(月城), 새로운 ‘핫플’ 월정교, 동궁과 월지

신간 《천년의 기억 우리들의 경주》 리뷰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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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를 맞아 1500년 고도(古都) 경주를 속속들이 둘러본 책이 나왔다. 여행작가 서명수가 쓴 천년의 기억 우리들의 경주(서고 )는 천년의 역사를 넘어 신비하고 색다른 비밀과 매력을 지닌 도시 여행기이다.

 

신라의 중심 서라벌은 삼국을 통일한 이후부터 오랫동안 한반도의 중심이자 세계의 주목을 받는 도시였다. 고구려 백제에 비해 보잘 것 없는 국력의 신라가 통일 후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멀리 서역까지 이름을 떨친 중심에 국제적인 도시 경주가 있었다.

 

8세기 경주는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 중국의 장안(長安),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바그다드와 더불어 번성한 도시였다. 유네스코는 지난 2000년 경주역사유적지구 5곳을 세계유산에 등재했다. 유네스코가 고대도시를 지구별로 묶어서 세계유산에 등재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다양한 불교 유적을 포함하고 있는 남산, 옛 왕궁 터였던 월성, 많은 고분이 모여 있는 대릉원, 불교 사찰 유적지인 황룡사, 방어용 산성이 위치한 산성이 이에 해당한다.

 

한가위를 맞아 출판사와 저자의 도움으로 3회에 걸쳐 천년의 기억 우리들의 경주를 소개한다. 아울러 보너스로 경북 안동 이야기도 2회에 걸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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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왕궁

 

 

경주의 밤은 불야성이다.

 

붉은 노을이 사라지고 어둠이 내리면 월정교에 조명이 켜진다. 첨성대는 네온사인처럼 반짝거리고 계림과 월성을 둘러싼 해자(垓字)에 비친 달빛이 경주의 어둠을 밝혀주는 시각이다. 대릉원과 건너편 노서동 고분들을 비추는 가로등은 신라시대로의 시간여행을 이끄는 표지판처럼 작동하기 시작한다. 은은한 빛의 향연은 야연회(夜宴會)의 개막을 알리는 듯 왁자지껄 북적거린다. 화려해보이는 경주의 밤은 동궁과 월지에서 절정을 맞는다.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을 경주로 초청해서 연회를 베풀면서 신라를 의탁하고자 부탁하던 천년사직의 종결무대가 동궁이었다. 천년왕국의 문을 닫는 애통한 그날도 경주는 불야성을 이뤘다. 황룡사 분황사 흥복사 등 왕사는 밤새법회를 열었고 서라벌은 대낮처럼 불을 밝혔을 것이다. 동궁과 월지에서 흘러나오는 풍악은 경주의 밤을 깨웠다.

 

신라는 전성기에 서울이 178936()였고, 1,360(), 55(), 35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 ...성 안에 초가집 한 채 없고 집의 처마와 담이 서로 닿아 있었으며, 노랫소리와 피리 부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였고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삼국유사)

 

호당 평균 4~5명으로 계산하더라도 (8세기)당시 경주는 상주인구가 70~90만 명에 이르는 대도시였을 것이다. 지금의 경주인구 24만 명보다 3~4배가 많은 국제도시였다. 당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이나 로마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번화했단 동아시아 중심이었다.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고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수도 서라벌(경주)3백여 년간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유럽과 아라비아 등 서역은 물론이고, 멀리 아프리카에서도 무역상들이 몰려왔다. 경주는 신라의 호족들 뿐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의 왕족과 호족들까지 경주로 불러들여 살게 했다. 진귀한 문물들로 경주는 호사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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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 월성(月城)

 

 

서라벌은 신라의 옛 이름이자 경주 그 자체이기도 했다. 서라벌의 중심은 당연히 궁성인 월성이었다. 월성은 신라 5대 파사이사금 시절 건축해서 6대 지마왕부터 56대 경순왕까지 무려 50대에 이르는 신라왕들이 살았던 왕궁이다. 궁궐의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겨서 월성 혹은 반월성이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월성은 지금 경주에 없다. 월성이 있던 자리에서 발굴 작업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다. 잃어버린 궁성,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내는 지난한 작업이다. 우리는 신라의 왕궁이 있었는 지 여부조차 몰랐고 그저 불국사와 대릉원과 첨성대를 보고 경주와 신라를 관광했을 뿐이다. 어쩌면 월성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신라 역사에 대한 오해와 편견의 단초가 됐을 지도 모른다. 경복궁과 베이징의 자금성을 본 적이 있다면 천년제국 신라의 궁궐이 얼마나 대단했을지 짐작이나마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대릉원지구 계림을 둘러싸고 복원된 해자들이 있다. 그리고 언덕 너머에는 남천이 흐르고 있다. 해자와 남천 사이 언덕이 바로 신라왕궁 '월성'이 있던 자리다. 월성이라는 이름을 차용한 원자력발전소가 자리한 '월성원전'은 경주시 양남면에 있지만 대릉원과 첨성대 그리고 동궁과 월지가 자리한 그곳이 월성이다.

 

문화재당국의 발굴작업이 끝나면 월성은 제대로 복원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남천을 가로질러 월성을 이어주는 월정교가 복원됨에 따라 찬란한 신라 문화의 편린들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궁궐발굴작업이 끝나지 않았고 궁궐은 전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월정교만 복원돼 다소 뜬금없이 느껴지기는 하다. 원효대사가 다리에서 떨어져 옷을 말리려고 궁궐에 머물다가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었다는 삼국유사의 고사 역시 기이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월성은 발굴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언덕만이 아니었다. 안압지로 불렸던 동궁은 물론이고 국립경주박물관이 있는 자리의 남궁까지 포함한다면 월성은 조선시대 경복궁과 비교하더라도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천년왕조의 몰락이후 쇠락을 거듭하던 월성은 몽골의 침략으로 대부분의 목조건물이 소실되었다.

 

천년월성을 복원한다면 우리는 이 궁궐에서 살았던 선덕여왕과 문무왕과 무열왕을 비롯, 우리가 기억하는 사극 속의 왕들은 물론이고 궁내에서 벌어진 이야기들까지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1,500년 전 서라벌을 누비고 다녔던 꽃같은 소년화랑들이 남긴 사랑과 청춘의 일기들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신라를 온전하게 기억해내는 법은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월성과 첨성대 그리고 흔적들을 통해 더듬고 추측하는 수밖에 없다.고분을 발굴하고 땅속을 파헤치고 세월을 견뎌낸 석조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그 때 경주는 더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선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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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관광의 새로운 핫플월정교

 

 

경덕왕 19(760) 축조된 월정교는 조선시대에 무너졌다는 기록을 남긴 다리였다. 2018년 복원돼 월성을 기억하고 삼국유사 속 원효대사의 고사를 기억하는 다리로 재탄생했다. 월정교가 기억하는 이야기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러브스토리 밖에 없을까. 월정교를 둘러싼 고사는 제대로 복원되지 않았다.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과 두 명의 여왕까지 배출한 신라왕조의 숨겨진 이야기는 월정교와 월성을 통해 그 단초를 드러낼 지도 모른다.

 

원효의 속성(俗姓)은 설씨(薛氏)이다... (원효가) 하루는 미친 듯이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기를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허락해 줄 것인가. 내가 하늘 고일 기둥을 찍을 터인데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 뜻을 알지 못했는데 이때 태종(무열왕)이 이를 듣고 이르기를 이 스님이 아마도 귀한 부인을 얻어 현명한 아이를 낳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라에 큰 인물이 있으면 그 이익이 막대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 요석궁에 과부가 된 (요석공주가 있었다. (왕은궁중의 관리에게 칙명을 내려 원효를 찾아 데리고 들어오라고 하였다. (원효가곧 남산으로부터 와서 문천교(월정교로부터 하류로 19m 떨어진 곳에 놓인 다리)를 지나던 원효가 일부러 물에 떨어져 옷을 적시니 관리들이 그를 궁으로 데려와 옷을 갈아입히고 말리게 하였다.

공주가 과연 임신하여 설총을 낳았다.” (삼국유사)

 

요석공주는 화랑 김흠운과 결혼했으나 그가 전사하는 바람에 과부가 되자 친정으로 돌아와 월성안의 '요석궁'에 머물고 있었다. 삼국유사가 전해주는 대목대목은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신라의 10현으로 불린 설총이 그 사랑의 결실이었다. 석양으로 물들고 조명으로 빛나는 월정교는 원효대사의 사랑을 기억하는 경주를 찾는 선남선녀들의 사진명소로 재조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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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과 월지

 

동궁은 월성의 확장판이다. 

 

천년왕국의 궁궐로 월성은 비좁았다. 삼국통일 완성 후 경주는 폭발적으로 인구가 늘어났다. 고구려와 백제의 귀족들이 속속 경주로 모여들었고 유민들까지도 왕성으로 이주했다. 이들이 기거할 새로운 궁성이 필요했다. 문무왕은 서둘러 동궁을 증축하고 바다를 닮은 연못까지 팠다. 동궁은 인접한 황룡사와 맞닿았다.

 

동궁과 월지가 완공된 후 신라 왕실은 당나라를 비롯한 각국에서 온 사신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었다. 달이 뜨는 밤마다 월지에선 달맞이 연회가 열렸을 것이다. 동궁과 월지는 서라벌의 밤을 밝히는 불야성이었다.

동궁과 월지는 예전 경주로 수학여행을 다녀 온 50~60대 이상의 장년들에겐 생소한 지명이다. 월성도 동궁도 7~80년대에는 없었다. 교복을 입고 수학여행을 다녀 온 세대들에게 경주는 왜곡되거나 축소된 경주와 신라의 기억만을 남겼다.

 

그 시절 동궁과 월지는 안압지로 불렸다. ‘기러기와 오리가 노는 연못이라는 뜻의 안압지(雁鴨池)로 불리면서 조선시대 이래로 동궁의 기억은 까마득히 잊혀진 셈이다.

 

사라진 왕궁과 사라진 역사는 복원되지는 않는다. 천년제국의 영광도 복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폐허위에서 사라지지 않은 역사가 던지는 낮은 목소리를 겸허하게 경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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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작가 서명수

입력 : 2023.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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