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리뷰③] 순정하고 아름다운, 그 소녀 소년들, 청년들께, 그대들께 : 월간조선

정화진 시인의 3번째 시집 《끝없는 폭설 위에 몇 개의 이가 또 빠지다》를 읽었다.

기자가 대학 시절 그의 첫 시집 《장마는 아이들을 눈뜨게 하고》를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1990년대 초반 무렵이었다. 정화진 시인이 그리는 시의 문법은 여느 시인과 달랐는데 일반 독자가 다가서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세밀화로 그린 추상화라고 해야 할까. W. 워즈워스의 시론(詩論)을 잠시 빌리자면 ‘강렬한 감정의 자발적인 넘쳐남’이랄까. 하여튼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런 배경 위에서 3번째 시집을 만났다. (그리고 두 번째 시집과 세 번째 시집 사이의 간격이 28년이란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되었다.)

시인을 본 적도 만난 적도 없지만, 3번째 시집을 접하고 기자의 30년 전 대학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사람은 잘 안 변한다는데 그의 작품은 여전했다. 특이하게도 시집 뒷면 표사(表辭)에 시인의 이력이 적혀 있었다.

<1959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1986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장마는 아이들을 눈뜨게 하고』『고요한 동백을 품은 바다가 있다』가 있다.>

그리고 시집 첫 장 ‘시인의 말’을 읽었다.

<십수 년 저쪽의 무너지는 협곡과 일상의, 미래의, 피 묻은 붉은 협곡 사이를 잇는 다리를 놓으려고 늦은 새벽 등불을 켜곤 했다.

거미줄로 엮은 일야교(一夜橋), 아침이면 무너지고 없는 다리 아래로 그 잿빛 강물 위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오랫동안 숱한 사랑의 꽃다발을, 몸짓을, 문장을 보내주는 그대들께 눈짓 한번 제대로 주지 않았던 이 무정함. 다시 지어 입을 환희의 문장들, 채색 기둥 위에 빛나는 햇살과 고대 철학을 함께 공부하던 질풍노도의 빛나던 눈동자들, 그 눈부심이 없었다면 어두운 시의 자리로 돌아오기조차 어려웠으리라.

순정하고 아름다운, 그 소녀 소년들, 청년들께, 그대들께, 아침마다 다시 피어날 이슬 묻은 나팔꽃 다발을, 이 시집을, 드린다.>

가볍게 읽다가 자세를 고쳐 세우고 다시 읽는다. 기자의 머릿속에 ‘피 묻은 붉은 협곡’ ‘일야교’ ‘잿빛 강물’ ‘무정함’ ‘환희의 문장들’ ‘채색 기둥’ ‘어두운 시의 자리’ ‘순정하고 아름다운’ ‘이슬 묻은 나팔꽃’… 이들 말뭉치 속에 정화진 시의 비밀이 숨어 있을 것만 같다.

넌 왜 기웃대니?

멍든 눈자위를 하고

붉은 입술을 달고 가면을 쓴 채

왜 울고 있니? 미래야

길이 어두워 꽃을 보지 못했구나

해변은 가을 낙엽, 부서진 가옥들로 창백하구나

그이는 그 길 위에 주저앉아

섬만 보고 있네 바다는 본래 고체였잖아

넌 왜 이쪽을 아직 기웃대고 있는 거지?

해진 옷, 기울어진 길, 무너지는 집들이

새삼스러워 보이니?

우린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숲을 잃고 새떼를 먼저 망명지로 보냈잖니

-정화진의 시 ‘너는 길이 어두워 꽃을 보지 못했구나’ 부분

서시에 해당하는 ‘너는 길이 어두워…’를 읽는다. 4행 ‘왜 울고 있니? 미래야’에서 화들짝 놀라게 된다. 우리에게 하는 말 같았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이 멀다[日暮途遠]는 느낌이 들었다. 길섶 들꽃을 보지 못한 채 먼 길을 달려왔다. 대학을 떠난 지 30년이 되어간다. 30년…. 정말 믿을 수 없다.

이 시를 통해 지금 나의[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멍든 눈자위’ ‘붉은 입술’ ‘가면을 쓴 채’ ‘길 위에 주저앉아’ 있다.

퍼질러 앉아서 ‘해진 옷, 기울어진 길, 무너지는 집들’을 본다. 문득 지금 나는[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어디로 가야 할까? 이미 ‘해변은 짙은 가을’인데, 곧 겨울이 닥칠 텐데, ‘정처 없’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골목길을 돌아 돌아서 한번 더 돌아서 거기, 계시는 거죠?

거리는 비어 있고 조금씩 흙비는 내리지만

가늘게 부는 바람 작은 틈 사이에 보여요.

책장은 흔들리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지만

골목길을 돌아 돌아서 출렁 한번 더 돌아서

눈물방울 떨구고 걸어서라도 그곳까지 가야겠어요.

도시는 비어 있지만

가늘게 흔들리는 빛이 보여요.

새들은 나무 아래 쪼그려앉아 하얗게 울고 있지만

골목길을 돌아 그 옆길로 한번 더 돌아서 거기,

그곳에 계시는 거죠?

-정화진의 시 ‘거기, 계시는 거죠?’ 부분

시 ‘거기 계시는 거죠?’를 읽는다. ‘거기’가 과거에 다녀갔던 지점인지, 우리가 가야 할 곳인지 헷갈려서 다시 정독한다. 읽자니 ‘흔들, 울렁’한 기분이 들고 기시감처럼 익숙하지만 ‘다른 차원, 약간의 메스꺼움’이 느껴진다. 머릿속에서 어떤 이미지의 흔들림이 떠오른다. ‘커튼이, 치맛자락이, 책장이, 새들이, 긴 팔들이, 손가락이, 햇살이’ 움직이는 모습, 흔들리는 모습을 떠올려 본다. 어떤 변화가 감지되는 현상들이다.

그리고 ‘골목길을 돌아 그 옆길로 한번 더 돌아서 거기’란, 주저앉아 있는 지금 이 자리라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거기’란 바로 ‘여기’가 아닐까. 어쩌면 내가 원한 자리가 ‘여기’일까. ‘여기’까지 오기 위해 쉼 없이 뛰어왔으니까.

들판과 풀밭과 산맥을

건너왔나요?

그대는 발을 잃었나요?

울지 말아요.

그대에게 강의 노래를 들려드릴게요.

들꽃 한 다발은 어떠세요?

바람의 말을 들어보실래요?

들꽃 한 다발의 향기를

한 사람 구름 덩이를 마셔보실래요?

슬픔은 당나귀를 따라

강을 건너갔다 오곤 하겠죠.

그대, 울지 말아요.

느티나무에도 꽃이 피던걸요.

그대 허리께엔 라일락도

피어나네요.

고원의 풀밭에 누워 하늘을 봐요.

분홍 소금밭이나 터키 호수를

함께 걸어보는 건 어떨까요?

울지 말아요, 그대

비 오는 날 삽상한 바람 한 사발은

늙은 당나귀마저 싱긋 웃게 하겠지요.

우리 함께, 당나귀도 함께

풋풋한 풀잎 신발이라도

만들어보죠, 뭐

그대, 울지 말아요.

꽃다지 꽃다지 패랭이 패랭이

질경이 마타리

고언의 들꽃 한 다발

뭉클, 구름 위를 함께 걸어볼까요?

-정화진의 시 ‘그대, 울지 말아요’ 전문

시 ‘그대, 울지 말아요’를 읽고 위안을 얻는다. ‘강의 노래’가 들리는 것 같고 어느덧 ‘풋풋한 신발’이 차가운 내[우리] 발을 감싸는 것 같다. 시라는 것이 ‘감정처럼 유동하는 언어’로 이뤄졌음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이 시를 꺼내 소리 내어 읽어야겠다.

정화진의 언어는 색채, 이미지와 관련이 있고 모두 감정과 연결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시어들이 일상의 것들이지만 서로 연결되고, 꾸미는 표현들은 여전히 낯설고 생경하며 때로 수다스럽다.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아는 사람만이 갖는 생밤 같은 단단한 호소력이 시어에 담겨 있다. 그러나 각오를 하고 읽어서인지, 아니면 시인도 점점 나이가 들어서 인지 예전처럼 당혹스럽지는 않았다. 시인도 세월의 때[순치]가 묻은 것일까.

식물의 세계…… 영혼이 부옇게 이슬로 묻어 있는 길, 새벽길을 걸어온 그대들, 길을 잃었나요? 어디를 가려 하나요? 수맥을 따라 잠깐 찾아온 그녀, 머리를 빗겨주고, 머플러를 둘러주고 창밖까지 배웅했었어.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 시장의 좌판에서 만난 적이 있는 그녀, 낮게 앉아 있던 은화식물들, 달빛 기차 떠나네요. 그네들을 안아주고 안아주며 서러움들을 싣고, 안녕.

-정화진의 시 ‘은화식물들’ 부분

‘은화식물들’을 읽으며 다시 ‘떠남’에 대해 ‘이별’에 대해 생각한다. 과거의 환상과 추억의 매력에 사로잡혀 그[옛] 자리에 머무를 수 없었다. 도망친다기보다 살기 위해 떠날 수밖에 없다. 내가[우리가] 떠나올 때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내가[우리가] 떠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었다. 나룻배 주인과 가격을 흥정하며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는지…. 그래도 머무를 수 없었고, 떠나야만 했고,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많은 세월이 흘렀다.

사진=얼굴Ⅱ, 56×37cm, 오리건주 존 데이 화석층 국립기념물, 2010, 김인태 작가

그늘 사막 저쪽입니다.

곡식 창고 흔적이 남아 있었지요.

그 옆쪽으로 큰 우물 하나 있어요.

빈 우물입니다.

우물이 금빛을 뿜어올립니다.

바늘이 가득 꽃혀 있더군요.

바늘을 얻기 위해

마을 외곽에 줄 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없는 우물

옷을 지어 입을 일이 없어서인가요?

바늘을 누구 우물에 저렇게

가득 꽂아두었을까요?

실을 잣던 노인들은 모두 긴 밤을 지나

검은 강을 건너갔습니다.

그 마을은 사막 그늘 저쪽이구요.

이제 밤이 다시 찾아오지 않네요.

물고기들 우는 소리만

그늘을 뚫고 소금으로 솟구치고 있어요.

뒤바뀐 계절과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는 이도 없는 나라에

슬픔이라는 말은 사어가 되었습니다.

사막이 더 확장되었나봅니다.

비어 있는 마을이 있습니다.

바늘 가득 꽂힌 우물이 있는 마을이

빛을 토해내고

온몸에 바늘을 꽂고 사막으로

묵묵히 걸어간 사람들을 그대는 보았나요?

-정화진의 시 ‘온몸에 바늘을 꽂고 사막으로 묵묵히 걸어간 사람들’ 전문

이 시를 읽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사막이다. 무슬림의 사막, 스킨헤드족, 긴 귀의 둥근 귀걸이, 문신을 한 검은 피부의 부족이 떠오르고 그들이 파놓은 우물이 떠오른다. ‘바늘’은 ‘한 줄기 햇살’ 정도로 이해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늘’의 통념이 깨진다. 물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난, 아무도 살지 않은 마을의 빈 우물. ‘우물이 금빛을 뿜어올’리는 이미지와 ‘온몸에 바늘을 꽂’은 이미지랑 닮아있다. 어울릴 수 없는 두 이미지가 서로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이 시를 읽으며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 엎드려 기도하는 이가 떠올랐다. 새로운 인생의 갈망하면서 엎드려 인내하며 기도하는 사람들…. 기도가 끝나면 카펫을 둘둘 말아 겨드랑이에 끼고선 다시 길을 재촉하는 이교도들…. 그들을 비추는 햇살이 마치 온몸에 바늘을 꽂고 있는 모습과 같다.

이런 초현실주의적인 상상이 논리적 비약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이 시를 읽는 독자는, 이상하게도, 내면의 풍성함을 느끼리라.

먼 별을 지나 우주를 가로질러

몇 세기를 지나

짧은 머리 그녀가 잠시 왔었던 게다.

팔을 뻗어 길게 토닥토닥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줘야 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구나.”

토닥, 토닥, 북풍의 삼월

손가락이 길게 자라는

꿈을 꾸었다. 삼월의 마른 나뭇가지

저 안쪽

-정화진의 시 ‘삼월의 나뭇가지’ 부분

‘사막 속으로’ ‘온몸에 바늘을 꽂고’ ‘먼 별을 지나 우주를 가로질러’ 오랫동안 떠나왔다. 앞으로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지만, 지금 나의[우리의] 모습, 그러니까 ‘해진 옷, 기울어진 길, 무너지는 집들’이 새삼스럽지만, 시인은 이렇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겹따옴표로, “그동안 많이 힘들었구나”…. 이 말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위로받는 느낌이 든다.

오랜 세월 바람에 깎인 듯한 얼굴을 드러내며 미소 짓는

노인이 내게 내민 것은 말린 육포 조각이었다

그 조각들을 비어 있는 새장 속에 던져두었다

나는 다만 개들을 기르고 싶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내 집 개구멍으로는 털 빠진 오리 새끼나

병든 닭들이 드나든다

내가 떠나보낸 새들의 숲은 불탄 지 오래이다

-정화진의 시 ‘새장 속의 육포 조각’ 부분

다시 말하지만,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생피의 고깃덩어리가 될지언정, ‘육포 조각’으로 길들여지고, 순치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처음부터 결정된 인생이 없다는 것을 아니까. 모든 이야기는 실상 우연의 연속이라는 것을 나는, 우리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러니 멈출 수 없다. 기억을 떨치고 다시 등짐을 진 채 길을 떠나야 한다. 더 굳세게 길을 나서야 한다. 갤리선의 쇠사슬에 묶인 노예처럼 냅다 함성을 지르며 뱃머리를 저 망망대해로 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