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문학평론가, 가요연구가인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가 첫 에세이집을 펴냈다. 그간 여러 매체에 틈틈이 발표한 에세이를 모은 것이다. 

그동안 70여권의 저서를 발간했는데 첫 에세이집이라니…. 물론 가요 에세이, 기행 에세이 등을 펴내기도 했었다. 그러나 내면의 고백을 담은 수필집은 처음이다.

“내가 시인이 된 것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기 때문이다. 내 나이 불과 첫돌이 되기도 전인 10개월 무렵에 어머니는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나셨다. 6.25 전쟁 피란 중에 태어난 나는 어머니의 얼굴도 모르고 목소리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동순 교수의 《나에게 보내는 격려》

그럼에도 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노래를 불러도 어머니 테마의 노래만 즐겨 불렀고 시를 써도 늘 어머니 이미지를 떠올리며 작품의 상상력을 불러 일으켰다. 첫 에세이집 제목(《나에게 보내는 격려》)도 수식어 ‘어머니가’가 생략돼 있다. 

삶의 도정에 지쳐 돌아온 저녁, 어머니께서는 아들의 가슴속에서 나직이 말씀하신다, 이렇게.

“얘야 기운을 잃지 말아라. 너의 주인은 바로 너란다. 기운을 잃은 너를 위해 격려와 위로를 보내 주어라.”

이런 어머니의 말씀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이 교수는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어 고단하고 힘든 몸을 다시 일으켜 스스로에게 격려와 박수를 보낸다. 이 모든 행동이 스스로 하는 것 같지만 실은 이 교수 속에 있는 어머니께서 시켜서 하는 일이란다.

기자는 이 교수의 ‘어머니론’에 공감하면서 <내 성장의 요람>이라는 에세이를 독자에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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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성장의 요람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모여앉은 자리에서 어쩌다 출신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그만 자신이 없어지던 적이 있었다. 나의 출신 지역이 경상도요, 그중에서도 내가 살아온 50년 가까운 시간 속에서 거의 절반을 보낸 곳이 바로 대구이기 때문이다. 고향 이야기가 나오면 마땅히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그것을 소개할 수 있어야 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처럼 고향에 대해서 목을 움츠리도록 만들어 버렸던가? 그것은 다름 아닌 60년대 초반 이후 거의 30년 이상을 계속되어 오는 경상도 사람에 의한 정권의 독점과 전횡, 그로 말미암은 타지역 사람들의 심한 심리적 위화감 따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객지에서 십 년을 넘게 살아 보았으나 타관 사람들은 나를 경상도 출신이라고 짐짓 경이원지(敬而遠之)하는 바람에 마음은 여전히 이향인인 것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 시절 어쩌다 볼 일이 있어 대구를 다녀올 적이면(이 교수는 충북대 교수로 1981~1990년까지 재직했다. 이 글은 충북대 교수시절 쓴 글로 보인다. - 편집자 주) 지난날 친분을 맺고 지내던 사람들마저 ‘이제 당신은 오래전에 충청도 사람이 되었으니까’라는 투의 표정으로 대해 속으로 적잖이 당황하였다. 대구 출신의 지배자가 정권을 장악하고 난 뒤에 당시 내가 살고 있던 지역의 사람들은 걸핏하면 ‘당신은 왕도(王都)사람’, 혹은 ‘막강한 TK 출신’이라는 말을 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말속에 숨어있는 모종의 비아냥거림과 싸늘한 냉소를 내가 모를 리 없었다.

고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발붙이고 정붙이고 그럭저럭 살다 보면 거기가 곧 고향이라는 수월한 생각에 나도 익숙해지면 좋으련만 쉽게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 탓인지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것을 어찌하랴. 이런 처지로 인하여 나는 경상도 사람으로도 충청도 사람으로도 대접받지 못하고, 결국 어정쩡하게 실향민 의식마저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앞산에서 바라본 대구 모습이다. 사진=대구시

나의 안태(按胎) 고향은 경북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이라는 곳이다. 윗대로부터 약 400여년 이상을 살아온 이곳에서 내가 태어나던 무렵은 6·25의 포성이 하늘을 찢고, 동족의 가슴을 할퀴어대던 역천(逆天)의 시절이었다. 부농으로서 평생을 빼앗긴 조국의 광복에 헌신하신 조부 이명균 선생의 아홉 아드님 중에 일곱째로 태어난 아버지 현경씨는 조부 별세 후 얼마 되지 않은 땅뙈기를 부쳐오던 평범한 농민이었다. 서흥 김씨와 혼인하여 4남 2녀를 낳았으나, 첫째와 셋째는 병으로 일찍 죽었다. 어머니 서흥 김씨는 장질부사에 걸려 요즘에 그 흔한 페니실린 주사도 한 대 못 맞아보고, 전란 중에 세상을 떠났는데, 어머니의 나이 마흔셋, 내가 첫돌을 꼭 한 달 앞두고 있을 때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다음 해인 1953년에 아버지와 우리들 4남매는 고향집을 그대로 둔 채 대구로 이사했다. 이것이 대구와의 첫 인연이었고, 내 나이 불과 네 살 때였다.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 스물두 해를 대구에서 붙박고 살았다. 이 지역에서 초·중·고를 거쳐 대 까지 나오고, 교직생활을 하고 결혼까지 하였으니, 대구는 그동안 나를 따뜻하게 보듬고 키워준 어머니의 요람과 다를 바 없다.

왼쪽부터 대구 금호강 하중도, 수성못, 대구스타디움의 단풍, 대구 칠곡 옻골마을(경주 최씨 종가) 사진=대구시

처음 이주해서 짐을 푼 곳은 칠성동 종합운동장 서쪽 출입문 앞 도로변으로 철공소 비슷한 공장 옆에 곁달린 방이었던 것 같다. 당시 의 공설운동장은 지금처럼 잘 갖추어진 시설이 아니라, 그냥 흙무더기만 토성처럼 둥그렇게 쌓아 올려놓은 황량한 벌판이었는데, 바로 옆에는 미군부대가 주둔해 있었다고 한다. 작은누나는 나를 등에 업 고 자주 그것으로 가서 정문을 지키는 미군 병사가 장난삼아 던져주는 껌, 초콜릿 따위를 주워 먹었다. 그곳에서 한두 해를 살다가 수창 동 수창국민학교 북문 뒤편에 있는 낡은 일본식 목조 이층의 어느 한 켠을 얻어서 옮겨갔다. 그곳은 당시 주민들이 ‘전매료(專賣寮)’라는 일본식 명칭으로 부르던 전매청 하급 직원들의 관사로서, 우중충한 적산 건물의 분위기가 흡사 난민수용소를 방불케 했다. 아버지, 형, 큰누나 등 셋이 전매청에 취직해서 다녔고, 아직 10대 소녀인 작은 누나가 주로 집안 살림을 돌보았다. 한 가정의 온전한 중심이어야 할 어머니가 안 계신 집안의 정서적 균형은 참으로 말이 아니었다.

대구 시내 전경. 사진=대구시

그런 가운데서도 부친은 나를 위해 정몽주, 원천석, 길재, 이색 등 고려말 충신의 시조를 큰 글씨로 쓴 족자를 방벽에 여러 개 걸어두셨다. 긴긴 겨울밤 아버지와 함께 누워서, 아버지가 한 줄을 읽으면 나는 뜻도 모르고 따라 외웠다. 이렇게 외운 시조가 내 나이 다섯 살 때 근 50여 수는 실히 되었을 것이다. 여름날 밤, 무더위에 잠을 설치는 동네 사람들이 전매료 옆 공터의 원목 더미 위에 부채를 들고 나와 밤늦도록 앉아 있었다. 그들은 나를 앞자리에 세워놓고, 어린 것이 맹랑하게도 시조를 줄줄 외는 모습을 즐기곤 했다. 지금 내가 이른바 문학을 빌미로 밥을 먹을 수 있게 된 것도 더듬어 보면 이때의 경험이 한 싹이 되지 않았을까. 이 무렵 새어머니랍시고 두어 사람이 번갈아 들어와 우리 집안을 온통 쑥대밭으로 휘저어 놓고 달아나 버렸다. 하나는 아편을 몰래 상습적으로 맞는 중독자였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신분을 숨긴 사기 전과자였다. 아편쟁이 계모는 가족들이 아무도 없는 틈에 나를 잔인하게 학대했다. 어느 날 그녀는 무서운 얼굴로 나를 이층 목조계단 위에서 아래로 거칠게 밀어서 쓰러뜨렸다. 나는 지금도 그때 그녀의 야차 같은 검붉은 얼굴이 한번씩 악몽처럼 떠올라서 소스라칠 때가 있다. 집안에 굴러다니던 미군 전투식량 종이박스를 구석에 갖다 놓고 그 안에 들어가 웅크리고 숨죽이면 그렇게 편안했다.

대구 도시철도 3호선(모노레일) 사진=대구시

수창동에서 취학 연령이 되어 일곱 살에 수창국민학교에 들어갔는데 입학식이 열린 곳은 달성공원 부근의 공설 뿌루장(풀장)이었다. 그 후 남산파출소 옆을 잠시 거쳐 서내동(지금의 종로국민학교 서편 골목 안)의 몹시 낡은 한옥으로 옮겨갔는데, 이 집의 큰 마당 앞에는 빈 목조 창고가 하나 있었다. 어느 날 이 창고 앞에 가리개가 세워지고, 내부가 새로 꾸며지더니 낯선 남녀들이 무시로 드나들면서 음악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어린 나는 가리개 밑으로 몸을 구부려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돌아가는 무수한 발목들을 보면서 야릇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이때 들려오던 음악은 우리 집의 오래된 진공관식 자석 라디오에서 <정오의 가요> 시간이면 들려오던 바로 그 가락이었다. 그것이 남인수, 백년설, 황금심, 장세정, 고복수, 송민도, 나애심 등의 가수가 부르던 유행가였음을 안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여기서 한두 해를 살았던가. 우리 가족은 그후 가장 오래 살게 된 태평로 3가로 집을 사서 이사했다. 수창국민학교에서 집으로 가자면 학교 뒷문에서 도원동 길로 곧장 빠지는 길이 가장 빨랐다. 노동회관 옆 골목으로 잠시 올라가면 경부선 철도가 나오고, 건널목 없는 철둑 길을 조심스럽게 가로질러서 왼편의 금성 이발소 쪽으로 이삼백 미터쯤 철길 따라 걸어가면 벽오동나무 한 그루가 높이 솟은 한옥이 보였다. 이곳에서 겪은 철도 연변의 기억도 내 유소년 시절의 중요한 경험들이다.

이 경부선 철도 연변의 어느 날 오후, 나는 특별열차의 맨 뒤칸에 앉아서 손을 흔들며 지나가던 이승만 대통령의 하얀 머리카락을 보았다. 또한 이마에 태극기를 질끈 동여매고서 노래를 합창하며, 또 더러는 울면서 군용열차에 실려 지나가던 무수한 병사들의 모습을 보았고, 생활고를 못 이겨 달리는 기차에 투신한 어느 늙은 노동자의 무참하게 부서진 주검도 보았다. 미군부대 뒤의 철조망과 맞닿은 철도 연변의 명아주풀 더부룩한 시궁창에서 양공주가 낳아 몰래 버렸다는 인형처럼 쬐그만 갓난아기의 앙징스런 주검도 보았다. 이 모든 파노라마들은 지금 나에게 지난 시간들의 역사적 배경과 결부되어서 지극히 생생하고 소중한 체험들로 되살아난다.

결국 다시 돌아가 살고 싶은 애틋한 그리움이나 애타는 향수가 그 흘러간 시간들 속에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생애의 상당한 구간인 스물두 해를 보낸 대구의 모든 것이 어찌 나에게 소중하지 않으랴.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던 생활도 천천히 돌이켜보니 열 손가락을 헤아린다. 내 30대의 피와 땀과 눈물을 온통 쏟뜨리던 곳. 나의 아이들이 자라서 장차 다른 곳에 가서 살게 된다면 그들은 청주를 제 고향으로 그리워하며 살겠지.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평생을 보낼지라도 여전히 내 태어난 경상도의 상좌원 마을과, 또한 나를 길러준 어머니 같은 대구를 여전히 그리워하며 살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대구’에게 나직이 부탁한다. 그대는 내가 유랑시절의 베토벤처럼 ‘고향이여, 아름다운 나의 땅이여!’라고 항상 떳떳하고도 자랑스럽게 그대를 기릴 수 있도록, 꿈결에도 왈칵 솟구치는 애틋함으로 떠오를 수 있도록 지난날의 그 터무니없는 착각과 미몽과 답답한 보수성을 거두고 다시 옛날의 그 높은 기품으로 태어나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