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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문화

화가 김병기와 사진작가 데이비드 던컨

- 6·25 격랑에 맞섰던 한미(韓美) 백일세 동갑

김형국  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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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6년생 김병기 화백, 101세의 나이로 예술원 회원 뽑혀
⊙ 김병기, 해방 후 북한에서 미술동맹 서기장 지내 … 피카소가 〈조선에 있었던 학살〉 그리자 결별 편지 보내
⊙ 6·25 전장 누빈 데이비드 던컨, 사진집 《이것이 전쟁이다(This is War!)》 통해 전쟁 고발
작품과 함께한 평창동 화실의 김병기 화백, 2016.
2016년 10월에 일본 도쿄의 TOM 갤러리에서 열린 화백의 개인전 팸플릿을 제작했던 지한파 일본 사진작가 후지모토 다쿠미(藤本巧)의 사진이다.
사람은 두 종류 시간대(時間帶)로 산다. 하나는 누구에게나 그 길이가 똑같은 ‘물리적 시간’이고, 또 하나는 그 살아 있는 시간이 개인적 또는 사회적으로 얼마나 보람인가의 ‘의미의 시간’이다. ‘백세시대’란 말은 사람들이 세상에 머무는 물리적 시간이 평균적으로 크게 늘었다는 말인데, 그렇게 늘어난 수명임에도 병석에서 세월만 죽일 양이면 무의미한 시간을 사는 셈이다.
 
  만(萬)에 한 사람 있을까 말까 한 백세인데도 아직 현역으로 활동하는 이가 있다면 물리적 시간과 의미의 시간이 함께하는 아주 희귀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얼마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뽑힌 1916년생 태경(台徑) 김병기(金秉騏) 화백이 주인공이다.
 
 
  1947년 월남
 
  2015년 봄, 한국 국적을 회복한 뒤로 그 창립에 관여했던 예술원에 들고 싶다는 말을 주위에 흘린 적 있었다. 미국생활 반세기였던 그와 그간 접촉이 없었던 동업자들 사이에서 그 높은 나이에 심신의 건강이 받쳐 줄 만한지, 염려의 소리도 들렸다.
 
  보통사람들의 통상적 예단과는 달리 무엇보다 올 초부터 《한겨레》 신문에 한 면 분량으로 〈한 세기를 그리다: 101살 현역 김병기 화백의 증언〉이 매주 절찬리에 연재되고 있음이 그 확실한 반증이 되어 주었다. 어릴 적은 물론이고 사회의식이 생긴 이래로 만나고 겪었던 지난 일을 컴퓨터처럼 기억하는 회고를 미술평론가가 채록(採錄)해서 정리하는 글인데, 6월 말 현재 20여 회가 연재된 시리즈는 연말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거기에 언제 적 사람인가 가물가물한 이상(李箱, 1910~1937) 기재(奇才) 시인이 죽음을 앞두었을 즈음의 도쿄 행적도 말하고 있었다.
 
  환도(還都) 직후 1954년에 문화보호법에 따라 예술원이 구성되는데, 이 일은 문화단체총연합회(이하 문총)가 주관했다. 문총은 미술·음악·연극·문학 등의 문화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한, 북한의 미술동맹과 문학동맹에 대적하는 대항마로 만든 조직이었다.
 
  공산주의에 혐오감을 느끼고 평양에서 1947년에 월남한 뒤로 사회의식이 남달랐던 김병기의 문총 출입은 자연스러웠다. 동란 중에 종군화가단을 실질적으로 이끈 부단장의 이력으로 소설가 김동리(金東里, 1913~1995) 등 문총 주동세력과 왕래가 잦았던 덕분이었다.
 
 
  60년 만에 이룬 예술원 회원의 꿈
 
황교안 전 국무총리의 김병기 화백 전시회 참관, 2016년 4월 23일.
화백과 대면하는 자리에서 황 전 총리는 광성중학 졸업생이라고 인사했다. 화백이 다녔던 평양의 미션스쿨 광성고보가 6·25 때 피란 와서 임시수도 부산을 거쳐 서울에 잡았던 중학교란 말이었다.
  예술원 창립을 앞두고 초대 회원을 뽑는 투표가 거행되었다. 그때 김병기는 서울 미대 학장 장발(張勃, 1901~2001)과 서예가 손재형(孫在馨, 1903~1981) 두 사람을 밀었다. 장발은 미술대학 바깥에는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기에 그즈음 서울대 미대 교수로 부임한 김병기가 그 학장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드높이려 했다.
 
  그때 서예가 예술인가 아닌가를 놓고 철부지 같은 의견도 분분했다. 그 지경에 ‘서화일치(書畵一致)’라 했던 우리 문화전통을 상기시키면서 서단(書檀) 밖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손재형을 적극 후원했다. 개인 인연도 한몫했다. 도쿄미술학교 한국인 세 번째 졸업생으로 고미술 수장가였던 당신 아버지 김찬영(金瓚永, 1889~1960)의 소장품 오동상자에 물목(物目)을 적던 일본말로 ‘하코가키(箱書)’였다.
 
  예술원 안의 미술 쪽 일반회원 수는 다섯으로 좁혀졌는데, 득표수로 맨 마지막이 조각가 윤효중(尹孝重, 1917~1967)이었다. 그렇게 그가 뽑힌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만들었던 전력으로 그 유세(有勢)가 대단했던 시절이었다. 그 다음 득표수가 김병기였으니 아슬아슬하게 떨어진 셈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 예술원 회원으로 뽑힌 것은 옛적 해프닝에서 갑년 60년도 더 지난 뒤에 비로소 이루어진, ‘대기만성(大器晩成)’ 회원으로 기록하게 되었다. 예술원 제도를 가진 나라들의 전례에 비춰서도 최고령 신입회원임이 분명할 것이다.
 
 
  100세 나이에 신작전(新作展)
 
김병기 백수연, 2016년 4월 9일 태평양시대위원회 강당.
화백의 백수 생일잔치로 김동길 교수 사무실에서 냉면파티가 열렸다. 단상 가운데의 화백이 축하 연주를 듣고 있다. 오른쪽은 당신의 서울대 시절 제자인 예술원 회원 윤명로(尹明老, 1936~)이다.
  사회 진출 늦둥이를 일컬어 ‘나이 예순에 능참봉(陵參奉)’이란 옛말도 있지만 우리 화단에서 위상을 확인해 주는 국립현대미술관(과천관)의 초대전 〈김병기: 감각의 분할〉도 우리식 나이 셈법으로 백수(白壽) 곧 구십구세이던 2014년 말에야 비로소 열렸다. 회고전이 끝나던 2015년 초, 미국생활 반세기를 정리하고 서울 평창동 화실을 근거로 제작에 몰두해 왔다.
 
  백세를 넘긴 상수(上壽)의 나이에도 건필(健筆)을 이어 가는 김병기야말로 최고령 현역이란 기록을 날로 경신하는 경이이다. 세계미술사상 미술 제작의 최고령 기록은 피카소이었지 싶다. 아흔둘로 타계했는데 죽기 한 해 전인 1972년에도 드로잉과 판화작업을 했다. 누구보다 피카소를 높이 평가했던 태경인데 적어도 그림 제작 연륜에선 그를 능가하고 있다.
 
  서울에 자리 잡고 한 해 뒤 2016년에 가나화랑에서 개인전(2016.3.25.~5.1)을 열었다. 만 백세인데도 회고전이 아닌 신작전이었다. 전시회 타이틀은 주제(主題)로 ‘바람이 일어나다’, 부제(副題)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 이름했다. 주제는 당신이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 한 구절 ‘바람이 일어나다. 살아야 한다’에서 따왔다. 분단과 6·25 등 생사 갈림길에서 오직 ‘살아야 한다’고 다짐했던 개인사의 대변이자, 이 이상으로 엄청난 변화의 바람 속에서 나라의 체통도 절대가난 등 갖가지 질곡을 압축적으로 이겨낸 끝에 참으로 당당해진 대한민국 현대사를 직접 목격한 감격을 대변하는 말로 십상이라 싶었기 때문이었다.
 
  부제 ‘백세청풍’은 오롯이 개인적 성취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이 사자성어가 개인적으로 그럴싸함은 글귀 가운데 ‘인간 세(世)’를 패러디해서 ‘나이 세(歲)’로 대신 읽고 나면 백살을 맞은 ‘청풍 김씨’ 당신이 지금도 매일같이 ‘맑은 바람’으로 그림을 제작하는 일상을 말함이었다.
 
  백세 전시회는 화단 바깥까지도 소문이 자자했다. 산골 맹산군 출신이나 같은 평남도 사람이라며 김동길(金東吉, 1928~) 논객도 개막전에서 축사를 했다. “내가 어쩌다 만났던 백세 인사들은 대부분 자리 보전 중이었는데, 이번엔 두 발로 꼿꼿이 서서 작업을 하고 있으니 경이가 따로 없다, 전시회 이름 하나로 백세청풍이라 했는데, 청풍의 맑은 바람 정도가 아니라 그 기상이 하늘을 치솟는 용의 기세라 백세비룡(百歲飛龍)이 분명하다.”
 
  그리고 경축의 뜻으로 당신의 애송시 조조(曹操)의 〈보출하문행(步出夏門行)〉 한 구절을 읊었다.
 
  〈천리마는 늙어 마구간에 매여서도/ 마음은 천리를 치닫듯/ 열사(烈士) 비록 늙어도/ 큰 포부는 가시지 않았다오.〉
 
  “화백이야말로 하늘을 높이 나는 용이 분명하다”고 치하했다. 손위 띠동갑에게 올리는 찬사가 그렇게 도저했다.
 
  전시 막바지에 황교안(黃敎安) 당시 국무총리가 전시장을 찾았다. 그 얼마 전에 현대자동차의 신차 론칭 자리에 현신했음을 본 한 식자가, 그렇다면 예술행사에도 출입하면 문화현창의 좋은 방편이라 했던 조언을 참고한 행보이지 싶었다.
 
 
  미술동맹 서기장 지내
 
〈조선에 있었던 학살〉(Massacre in Korea, 1951).
  고향 평양에서 해방을 맞았던 김병기는 직후 그곳 미술동맹 서기장으로 뽑혔다. 얼마 뒤 공산체제가 가동하는 그곳이 미술 창작의 불모지가 분명함을 직시, 통감했다. 이를테면 북한엔 흐린 날이 배경인 그림은 그릴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밝은 희망만 있는 나라에서 어찌 흐린 날이 있겠는가고.
 
  그 지경에서 ‘공산주의는 결코 아니다’는 확신이 굳어지자 어렵사리 월남했다. 얼마 뒤 6·25전쟁이 발발했다. 9·28 수복 때까지 숨어 지낼 동안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다. 1·4후퇴 지경에서 그 당장에 부산으로 피란했고 종군화가단의 부단장이 되었다. 활약상의 으뜸은 그때 피카소의 그림 행위가 부당함을 알리려 했음이었다. 발단은 공산주의자이던 피카소가 6·25동란의 발발과 그 잔혹을 미국에다 전적인 책임을 묻는다며 1951년 초 〈조선에 있었던 학살〉(Massacre in Korea, 1951)을 그려 냈던 사실을 김병기는 《타임》지를 읽고 알았다.
 
  피카소가 누구인가. 김병기가 그러했듯, 20세기 그림 지망생치고 피카소를 이정표로 삼지 않은 이는 없었다. 뿐 아니라 스페인 내전 때 공화파를 떼죽음시킨 파시스트들을 고발하는 뜻의 〈게르니카〉로 세계 휴머니스트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런 피카소가 실상과는 전혀 다르게 전화(戰禍)의 책임을 미군에 묻는, 원인과 결과를 뒤집는 역사 왜곡의 화의(畵意)는 참을 수 없었다.
 
 
  ‘굿바이 피카소’
 
  그때의 회고담이다. “피카소가 그린 그 그림은 미군 기계화 부대가 벌거숭이 우리 민중을 향해 총을 쏘는 장면이야. 내가 보기에는 극심한 선전미술이었어. 그래서 피카소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결별을 선언했지. 굿바이 피카소라고. 그런데 우표 값이 있나. 1952년 봄, 그냥 남포동 다방에서 시인, 화가들이 모인 가운데 편지를 낭독했지. 그랬더니 서울대에서 전갈이 온 거야. 다방에서 예술론을 하지 말고 교단에서 하라고. 그렇게 해서 서울대로 간 거지.”
 
  피카소에게 전해진 학살이란 1950년 10월 유엔군이 38선 넘어 북진했다가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하게 된 그 사이에 황해도 신천군에서 3만5000명을 학살했다는 북한 주장이 그 근거였다. 피카소에 대한 김병기의 비판은 한참 나중에 그림에 정통한 〈마당깊은집〉의 김원일(金源一, 1942~) 소설가가 진실을 확인해 주었다.
 
  피카소 일대기를 집필했을 정도로 그림 애호가인 소설가는 좌익이던 당신 아버지가 6·25때 인공 측에서 맹활약했던 가족사를 근거로 남북 이념대결을 주제로 적잖은 소설을 적었던, 그래서 ‘분단문학가’로 알려진 그가 방북 기회에 그 현장을 직접 가 본 것은 당연했다. 거기 ‘학살’을 기억한다고 만든 신천박물관에서 ‘미제의 만행’을 말하는 증거물을 보지 못했단다.
 
  〈그때 연합군이 신천을 점령하기 직전인 10월 13일 반공학생, 청년 기독교인 수백 명이 무장 봉기하여 인공 치하에서 당한 박해의 복수로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했다. … 전적으로 미군이 저지른 만행이라고 단정 지을 근거도 희박해 보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작전권이 미국에 있었으므로 미군의 묵인 아래 저질러졌다는 혐의는 있다.〉(《피카소》, 2004, 469쪽)
 
 
  종군 사진작가 데이비드 던컨
 
던컨 기증사진 전시회 알림판, 유엔평화기념관, 2017년 5월.
기증 사진작품 상설전시를 알리는 알림판이다. 알림판 문구 ‘이것이 전쟁이다’는 던컨이 펴낸 최초의 책 제목이었다. 사계의 호평을 받았던 책 수익금은 한국전쟁에서 그와 함께 돌아오지 못했던 미군병사들 추념하는 일에 썼다(David Douglas Duncan, One Life, A Photographic Odyssey, Harry Ransom Center, 1999). 언덕배기에 세워진 기념관은 부산 대연동의 부산박물관, 부산문화회관과 서로 이웃하고 있다. 그 아래로 유엔기념공원 곧 유엔군 묘지가 내려다보인다. 공원이라 이름할 정도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지의 하나다.
  6·25동란을 평생의 트라우마로 살아 온 김병기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그 비극 현장을 누볐던 종군 사진작가 던컨(David Douglas Duncan, 1916~)도 ‘한국전쟁’이 평생의 마음의 짐이었을 것이다. 전중(戰中)세대(war generation)가 겪었던 아픔을 담아 《이것이 전쟁이다(This is War!), 1951)》라는 사진집을 냈는데, 거기에 실렸던 사진 30점을 최근 유엔평화기념관에 기증해 주었다. 올 6·25를 기점으로 상설 전시될 사진에는 1950년 겨울,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장진호에서 후퇴하는 미 해병대 대열이 앞서 가는 트럭을 따라 걷는 정경인데 그 트럭엔 미군 시체가 도살된 소·돼지처럼 하나 가득 가로 놓인 장면도 있었다.
 
  미주리함에서 열렸던 일제의 항복식 등 태평양전쟁도 취재했던 던컨은 6·25 발발 직후 사진 잡지 《라이프》의 일본 주재 기자로 한반도 땅을 밟고는 6·25의 가장 큰 고비였던 흥남철수 작전도 종군했다. 한반도 임무가 끝난 뒤의 행적은 그의 전력에 비추어 언뜻 엉뚱했다. 바로 문제의 피카소를 찾았던 것. 종군작가의 ‘전설’ 카파(Robert Capa, 1913~54)가 그 명성이 하늘을 찌르던 피카소를 소개해 주었다.
 
던컨, 〈장진호에서 퇴각하는 미해병대 대열〉, 1950년 12월.
미국 제1해병사단의 후퇴행렬 앞에 전사자들을 실은 트럭이 앞서가고 있다. 1950년 말의 장진호 전투는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6·25전쟁에서 대한민국 생존을 지켜 낸 건곤일척의 싸움이었다. 함경도 장진호로 밀고 내려온 중공군 제9병단 12만여 명의 포위를 뚫은 사단이 그들의 남진을 지연시키면서 흥남을 통해 철수했다. 전투의 치열함은 인명피해가 말해 주는데, 중공군 사상자는 4만5000명 이상, 미 해병사단도 1만5000여 병력에서 무려 4500여 명이 전사했다. 엄청난 피해에도 불구하고 미 해병대가 중공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지체시킨 덕분에 그들이 38선을 돌파하며 유엔군을 추격할 때 9병단은 합류하지 못했다. 미 해병대의 역사적 자존심에 용납하기 어려운 후퇴였음에도 결과적으로 이후에 전세를 뒤집는 계기가 되었다며 그때 사단장이 “우리는 후방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후방으로 공격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만약 두 병단이 한꺼번에 남진했다면 ‘그 압력을 못 견딘 유엔군은 한국에서 전면 철수했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됐다면 대한민국이 이 땅에 존재할 수 있었을까?’(마틴 러스, 임상균 역, 《브레이크 아웃: 1950 겨울, 장진호 전투》, 2006)
  처참한 전장의 최전선을 누빈 만큼이나 그 대극(對極)인 예술을 사랑했음인지 카파는 20세기의 저명 예술가들과 가까웠다. 일례로 나치 치하 파리에 머물던 피카소를 그 패퇴 뒤인 1944년 9월 2일에 찾았고. 그때 승리의 팡파르인 양 트럼펫을 불던 피카소를 찍었다. 카파의 소개로 던컨이 피카소를 만난 것은 1953년, 화가가 나중에 두 번째 아내가 된 이혼녀 로크(Jacqueline Roque, 1927~86)를 처음 대면한 직후라고 그의 사진 자서전(Yankee Nomad, 1966)에 적었다.
 
  그 뒤 친분을 쌓고는 사진을 본격적으로 찍기 시작한 것은 1956년 초였다. 피카소의 신뢰는 그림 제작 상황을 화상 등에게 숨기고 있을 때도 던컨에게 알려줄 정도였다. 던컨은 찍은 사진으로 주제별로 무려 일곱 권의 피카소 관련 책을 출간했다. 사진작가라면 누구든 당대의 예술가를 기록하고 싶어한다지만 전장을 누볐던 사진 저널리스트가 피카소에 대한 기록에도 지성이었음은 인간성에 대한 철저한 배신인 전쟁을 직접 체험할수록 평화나 사랑 등 삶의 꿈을 그려 내는 화가에 대한 존경이 반비례로 늘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이었을까.
 
  전쟁의 20세기를 살아 낸 이들은, ‘전쟁 대 평화’라는 관용어처럼, 평화에 대한 갈구가 누구보다 강렬했다. 이 점에서 동서양을 달리 살아 온 김병기와 던컨 두 사람은 동갑, 피카소 사랑 말고도 오래 살다 보니 결국 얽힌 게 많았던 서로가 되어 있었다.⊙

입력 : 2017.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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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국의 미학산책

1942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미국 캘리포니아대 도시계획학 박사 / 서울대 교수,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 녹색성장위원회 초대 위원장 역임 / 《우리 미학의 거리를 걷다》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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