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에 흠뻑 빠진 일본인 이야기 : 월간조선

"칼끝에 바람 일어라 눈발처럼 잘게 회(膾)치고,
또 막걸리 불러와 함께 거나하게 취하여,
손뼉 치며 곡산(鵠山) 달 아래 길이 노래하노라."

고려 시대 문인 이규보(李奎報, 1168-1241) 선생의 막걸리 예찬이다. 선생은 '막걸리의 색깔이 하얗다'는 의미로 '백주(白酒) 또는 백료(白醪)로 불렀다'고 한다. <한국인에게 막걸리는 무엇인가>(정혜경․김미혜)에 들어 있는 이야기다. 이 책은 '막걸리를 과거의 유물로만 인식한다면 그 열풍은 금방 사라질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전통 속에서 현대 과학의 기술력으로 만들어낸 술이 막걸리다'는 것이다.

'막걸리 마시러 갑시다'

3년만에 한국에 온 오쓰보 시게다카 씨

지나치게 전통주에 포커스(focus)를 맞췄을까. 한동안 떠들썩하던 막걸리 열풍이 언제부터인가 식어버린 듯싶다. 그런데, 그 열풍을 이어가고(?) 있는 일본인이 있다.

일본 규슈(九州)에 살고 있는 '오쓰보 시게다카(大坪重隆․76)'씨다. 지난 주 그가 3일(6/7-6/9) 동안 한국을 찾았다. 특별한 방문 목적은 없었다. 개인적인 한국 관광이었으나 굳이 이유를 댄다면 '막걸리 마시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크게 여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샐러리맨 출신인데도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멋쟁이 할아버지다.

인천공항에 마중나간 필자에게 그가 던진 첫마디.

"목이 마릅니다. 시원한 생(生) 막걸리 마시러 갑시다."

"그렇지 않아도 근처 신도시에 예약을 해두었습니다. 배가 고프실 것 같아서 가까운 곳에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은 시간 공항 신도시에 있는 한 식당에 도착했다. 막걸리와 해물 파전을 시켰다.

"야! 역시 살아 있습니다. 일본에서 느낄 수 없는 진정한 막걸리의 맛입니다. 특히, 산미(酸味)가 일품입니다."

막걸리를 마신 후 미소짓는 오쓰보 씨

막걸리의 유통기한을 꼼꼼히 살피는 오쓰보 씨

막걸리 맛을 제대로 알고 하는 오쓰보(大坪)씨의 말이다. 그리고, 해물 파전에 대한 평가도 일품이었다.

"해물 파전이 막걸리와 딱 어울리죠. 기가 막힌 조합입니다. 이러한 맛을 일본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가 없습니다."

'사는 곳(居場所)'과 '나갈 곳(出番)'의 즐거움

저녁 식사도 전통적인 한국 식당에서 했다. 일본 관계 업무를 하는 후배들과 함께한 자리였다.

"또 막걸리 불러와 함께 거나하게 취하여..."

이규보(李奎報) 선생의 노랫말처럼 거나하게 취하지는 않았으나 분위기는 사뭇 무르익었다.

새로운 막걸리에 도전하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이 있죠? 올해 저의 나이가 70을 훌쩍 넘은 76세입니다. "

'오쓰보(大坪)'씨는 원로답게 필자를 비롯한 동석자들에게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여생(餘生)에 대해 짤막하게 말했다.

"일본의 유명한 평론가의 말입니다만, 인생 100년-'사는 곳(居場所)'과 '나갈 곳(出番)'이 있다는 것이 즐거운 일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외출할 곳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면서 스스로 찾아낸 '나갈 곳(出番)'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어를 배우는 일이었다.

"매주 목요일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서 문화센터에 갑니다. 한국인 여선생님과 10여 명의 학생들에게 둘러싸여서 한국어를 배우는 일이 최고의 즐거움입니다. 최고령 학생인 저에게 있어서는 젊은 사람들과의 세대 간 교류가 있어서 더욱 좋습니다."

술은 용기를 주는 것일까. 술잔이 몇 순배 더 돌자 '오쓰보(大坪)'씨는 그동안 터득한 한국어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서 우리말로 술을 권했다.

"자! 마십시다. 오늘 취해봅시다."

막걸리 병을 들고 술을 권하는 오쓰보 씨-와인잔이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동석자 모두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고 막걸리 한잔을 죽 들이켰다. 그러면서 '요즈음처럼 더운 여름날 일본에서 일반인들을 상대로 막걸리 캠페인을 벌여보면 어떻겠느냐?'는 개인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고, 일본의 사케(酒)가 한국에서 지나치게 비싸게 팔리고 있는 점도 지적했다.

"주세(酒稅)의 기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는 못합니다만, 기업 이윤을 줄이고 세금을 낮춰서 한국인들이 보다 싼 가격으로 일본의 사케(酒)를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이 또한 중요한 민간교류라고 생각합니다."

민간교류가 중요해

한국 소설을 산 오쓰보 씨

필자가 본란에 소개(2014년 2월)했던 후쿠오카의 '나들이 회(會)'가 올해로 27주년을 맞고 있다. 서일본신문사 임원 출신인 '사카구치 다카요시(坂口隆義·73)'씨가 회장을 맡고 있다. 공식 명칭은 <일한교류하카다회>이나 일명 <나들이 클럽>이라고 한다. 오쓰보(大坪)씨는 <나들이 클럽>의 고문직을 맡고 있다. 이 또한 그에게 있어서 '나갈 곳(出番)'의 즐거움이다.

오쓰보(大坪)씨는 한국을 떠나기 전 교보문고에 들러서 한국 소설책을 샀다. 그가 두꺼운 소설책을 읽으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읽으려고 도전하는 용기가 대단했다. 그는 서점을 나서다가 다시 발길을 돌려서 한국어 선생과 지인들을 위해 몇 권을 더 샀다.

한국을 떠나면서 그가 남긴 한마디.

"한일관계는 정치적으로만 풀리지 않습니다. 양국인(兩國人)들의 진실 되고 인간적인 교류가 바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