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철도가 잘 발달된 나라다. 1892년 첫 개통된 신바시(新橋)-요코하마(橫浜) 노선을 시작으로 일본의 철도는 빠르게 늘어났으며, 이와 더불어 온천 여행도 급속도로 발전 하였다. '세키도 아키코(關戶明子)' 군마대학 교수는 <근대 투어리즘과 온천>이라는 책에서 일본의 온천 여행 확대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근대 일본의 투어리즘은 전국적인 철도망의 형성과 함께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1920년-1930년에 걸쳐 등산·하이킹·스키·해수욕·피서 등의 인기가 치솟았으며, 이러한 사회풍조 속에서 온천은 엘리트 지식인이나 도시의 중산층 뿐 만아니라 농민에서 근로자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아무튼 일본은 화산지대인 까닭에 전국 어느 곳을 가도 온천수가 넘쳐난다. 필자는 얼마 전 틈을 내어 유명 관광지가 아닌 산골 마을의 한적한 온천을 찾았다. 너무나 눈에 익은 하카다(博多)역에서 도마뱀처럼 짧은 '유후인 모리(森)'라는 초록색 JR열차를 탔다. 이름표는 특급이었지만 내용은 완행열차 수준이었다. 기차는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역 구내의 선로를 용케도 통과하여 목적지를 향해 줄달음쳤다. 기차 길 주변의 풍경이 우리의 농촌과 다를 바 없었으나 정리정돈이 잘 되어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파릇파릇 싹이 돋은 논과 밭에 봄기운이 감돌았고, 어린아이 머리만한 노란 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한 시간 반 쯤 강을 건너고 산을 돌자 초라한 작은 역사(驛舍)가 눈에 들어왔다. 기차에서 내리자 "환영. 아마가세 온천"이라는 한글 안내판이 필자를 반가이 맞이했다.

강변의 조용한 온천 마을

아마가세(天ヶ瀬) 온천(温泉)은 오이타(大分) 현에 속하지만 후쿠오카에서 가까운 편이다. 이 온천은 약 1300년 전인 천무시대(678-686)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길이 56㎞에 달하는 구스천(玖珠川) 변에 늘어선 작은 온천장들이 온천마을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마가세(天ヶ瀬)는 구스천(玖珠川)을 끼고 있는 노천탕(露天風呂)이 유명하다. 강 주변에 7개소의  노천탕이 있다. 단돈 100엔(1300원)이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온천이다. 강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온천욕을 즐기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강물 흐르는 소리를 일본어로 '세세라기(せせらぎ)'라고 한다.

<아- 아- 산다는 것은 여행 같은 것 끝이 없는 이 길
사랑하는 사람 옆에 데리고 꿈 찾으면서
비가 내린 진흙탕 길일지라도
언젠가는 또 다시 맑은 날이 올 것 이니까(중략)

아- 아-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평온하게
이 몸을 맡기고 싶어

아- 아-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언제까지나
맑은 물 흐르는 소리(せせらぎ)를 들으면서>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일본인들의 가슴속에 전설처럼 살아있는 유명 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 Hibari, 1937-1989)의 노래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1977년 NHK 1위곡)'이 연상되었다.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뜨거운 온천수에 몸을 담그다보면 고단한 삶의 번거로움이 저절로 달아난다.
강줄기를 따라 가면 높이 20m의 폭포가 하나 있다. 이 폭포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뱀에 대한 전설이 강물과 함께 흐르고 있다. 그 옛날 아마가세 폭포에 큰 뱀이 한 마리 살고 있었는데 수시로 논밭에 나와 농작물을 파헤치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지나가던 스님이 이를 보고 불경을 외우던 중 이 뱀의 몸에 나쁜 충(虫)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몸이 괴로운 뱀이 참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가운데 농민들에게 피해를 입혔던 것이다. 스님은 뱀의 몸속에 들어있는 충(虫)을 제거해 주었다. 그 후 이 마을에는 평온이 깃들었다. 사람 사는 데는 모두 그럴듯한 전설이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차에 몸을 실었다.

산장(山莊) 덴스이(天水)

산허리를 돌아 좁은 산길을 달리던 차는 눈 깜빡할 사이에 산장의 주차장에 필자를 내려놓았다.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와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려 왔다.
계곡의 개천을 끼고 자리한 이 산장은 1만 여 평의 대지에 전통적인 고옥(古屋)이 들어서 있다. 특이한 것은 프론트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집채 만 한 바위였다. 바위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둔 채로 집을 지었다고 했다. 주인의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인지 건축가의 뛰어난 발상인지 모르겠지만, 그 착상이 마음에 와 닿았다. 산장의 종업원은 "이 바위가 바로 덴스이(天水)를 지키는 수호신입니다"고 했다.
객실 수가 21개인 이 산장은 일일 수용인원을 65명으로 한정한다. 평일에는 다소 여유가 있지만, 주말은 2-3개월 전에 예약이 마감된다고 했다. 이 산장의 특징은 대형 목욕탕 외에 자연 속에 묻혀 있는 노천탕이다. 발아래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온천욕을 즐길 수 있어 더욱 매력적이다.
필자는 반쯤은 노천탕인 '히노키 탕(노송나무 욕조로 만든 온천)'을 선택했다. 한 가족만이 즐길 수 있는 작은 온천에는 말 그대로 뜨거운 물이 철철 넘쳐흘렀다. 밖의 공기가 남은 겨울의 한기를 몰고 왔으나 탕 안은 뜨거웠다. 작은 울타리 옆에 백매(白梅)와 홍매(紅梅)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고, 짓궂은 바람이 미처 피우지 못한 꽃잎을 흩날리게 했다. 마치 흰 눈과 붉은 눈이 내리는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그 옆에는 키가 큰 사잔카(さざんか/ 애기동백)가 한 그루 버티고 있었다. 동백 꽃 과인 이 사잔카(さざんか)는 가을의 마지막으로부터 겨울에 걸친 추운 시기에 꽃을 피운다. 야생꽃은 부분적으로 희미한 복숭아 색을 섞은 흰색인데 비해, 재배되는 원예 품종의 꽃색깔은 빨강, 하양, 핑크 등 여러 가지다. 이 꽃의 중국식 한자 표기는 산다화(山茶花)다. 사잔카(さざんか)의 이름은 산다화(山茶花)의 본래의 읽기인 '산사카(山茶花)'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사잔카(さざんか)의 야토(宿)'라는 후쿠오카 출신 가수 '오오카와 에이사쿠(大川榮策, 1948- )'의 노래도 유명하다.

"붉게 피어도 겨울의 꽃/ 피어도 쓸쓸한 사잔카 피는 여관/ 둘이서 피어도 겨울의 꽃/ 봄은 언제나 오려나/ 사잔카 피는 여관"

산장(山莊) 덴스이(天水)는 가족이 같이 이용할 수 있는 가족탕도 5개나 있다. 가족탕은 각각 특징을 달리하고 있어 특히 인기가 있다. 숙박 객은 이용 시간 예약만 하면 언제든지 무료로 이용할 수가 있다.
이 산장의 수질은 단순온천이나 '여러 가지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서 그 효능을 명기했다.
<신경통. 근육통. 관절통. 오십견. 운동마비. 만성소화기병. 치질. 피로 회복. 건강증진.....>

성천의 물(holy water)과 광천수(mineral water)

온천수의 효능은 실제로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온천의 문화사>라는 책(설혜심 저)을 빌어 온천의 탄생과 효능을 간단하게 짚어본다. 온천장의 탄생은 중세를 통해 지속되어온 모든 계층의 레저에 대한 추구, 특히 순례(pilgrimage)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기존 성천을 중심으로 온천이 발달한 것이다. 온천의 탄생은 결국 종교개혁 이후 사회전반의 세속화 과정이었다. 그리고, 온천수의 효능에도 나름대로 역사적인 근거를 토대를 하고 있다.
"중세 사람들은 성천의 물(holy water)이 신이 내린 은총의 매개체로 신성에 의한 치유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후 영국에 급속히 도입된 르네상스 과학은 성천의 물을 광천수(mineral water)라 재명명하는 한편 물속에 들어있는 광물질의 성분이 질병을 치유한다고 주장하였다."
설 박사의 주장대로 온천의 개념상의 변화는 이윤추구를 정당화하는 세속화의 흐름을 타고 다각적인 상업 활동을 전개하는 집단적 레저 타운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가운데 온천장은 건전한 레저문화 중심에서 상업적 ․ 향락적인 측면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온천욕은 광천수(mineral water)에 몸을 맡기고 번잡한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려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휴식 속에서 내일을 위한 도약을 다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먹고 마시는 일에 열중하다보면 더욱 가중된 피로를 안고 돌아올 수가 있다.
음주가무(飮酒歌舞)에서 벗어나 서로 자숙하는 분위기가 일본 온천의 기본적인 매너다. 일본의 온천 여행은 이러한 매너를 익히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건전한 휴식은 건강한 내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