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태평양 미육군 00 부대에 근무하고 있는 한국계 미군 한00대령입니다. 다음 주 일본 후쿠오카를 방문하고자 합니다." 한국말 보다는 영어 발음이 훨씬 좋은 사람으로부터의 전화였다.
"제가 찾으려는 사람은 후쿠오카 출신의 한 군인입니다. 후쿠오카(福岡)를 잘 아신다고 소문난 장 선생께서 좀 도와주세요."
'한강에서 바늘 찾기'같은 주문이었으나 '후쿠오카(福岡)를 잘 안다'는 사실이 미국까지 소문난 것이 재미있기도 하여 그와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포로(捕虜)가 된 미군 장교
한국계 미군 한00대령은 2003년에 세상을 떠난 'Stephen Cromwell' 중장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란다.
미 제 19사단 수색중대의 소위였던 'Stephen Cromwell' 중장은 1943년, 뉴기니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는 전투 중 부상을 당해 불행하게도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捕虜)의 사전적 의미는 전시에 범죄에 의하지 않고 교전 상대국의 권력 내에 들어가게 되어 자유를 박탈당한 적국인(敵國人)이다. 제네바 협약에는 '전쟁포로는 어떠한 때에도 항상 인도적으로 대우받아야 하며 인간적 존엄성이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최근의 이라크 전쟁에서도 포로학대 문제가 이슈가 되어 국제적 여론을 들끓게 했다. 그 당시 포로였던 미군장교가 일본 군인으로 부터 어떠한 대우를 받았기에 그를 못 잊어 했을까? 그는 누구일까?
'Stephen Cromwell' 소위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일본 군인은 '기타모토 마사마치(Kitamoto Masamachi)' 소위였다. 27세의 기타모토(Kitamoto) 소위는 포로가 된 'Stephen Cromwell'소위를 극진하게 치료한 후 미군기지로 안전하게 돌려보냈다. 그러면서 자신의 흑백 사진 한 장과 주소를 적어 주었다. 전쟁이 끝난 후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메시지였다. 'Stephen Cromwell' 장군은 기타모토(Kitamoto) 소위의 사진은 잘 간직했으나 주소가 적힌 메모지는 잃어 버렸다.
'Stephen Cromwell'장군은 전쟁이 끝난 후 후쿠오카를 몇 차례 방문하였으나 군무에 바빠서 기타모토(Kitamoto)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찾아 감사인사를 전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단다. 'Stephen Cromwell' 장군은 눈을 감으면서 일본과 가까운 한국계 미군 부하인 한대령에게 유언을 남겼다.
"그가 살았다면 85세 쯤 될 것이다. 만약 그가 세상을 떠나고 없다면 가족들을 찾아서 이 사진을 돌려주어라. 그리고 '그 때 참으로 고마웠다'는 말을 꼭 전해다오." 그로부터 3년이 흘렀으니 기타모토(Kitamoto) 씨의 나이는 88세가 된 셈이다.
기타모토 마사마치(Kitamoto Masamachi)를 찾아라
필자는 후쿠오카의 친구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렸다.
'1943년 동남아에서 근무했던 규슈군사학교 출신의 일본 육군 제31사단(사단장; 佐藤幸德) 보병 제124연대 제2중대 소위 기타모토 마사마치(Kitamoto Masamachi)를 찾아라.'
'업무도 바쁜데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빼앗긴다'는 주변 사람들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필자는 드라마 같은 그들의 인생사를 풀어보려고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리 낙관적이지 못했다. 더구나 4월 14일 후쿠오카에 들어간다는 한00대령의 일정에는 도저히 맞출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규슈의 '전우회 겸 유족회'를 찾아 우여곡절 끝에 사무국장 우에무라(上村)씨와 전화 통화를 했다.
"글쎄요. 그 당시의 기록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고령자인 그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을 찾는데도 오랜 시간이 갈릴 것입니다. 찾는 대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사무국장 우에무라(上村)씨의 대답이었다. 후쿠오카에 살고 있는 필자의 친구들은 규슈의 유력 지방지인 서일본신문에 광고를 내자고 했다. 필자도 '그 방법이 좋겠다'고 말하고 한대령에게 연락했다. 한대령은 전쟁기념관이나 병적기록 보관소 같은 곳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런데 '일본말을 못해서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필자는 금방이라도 후쿠오카로 날아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일본의 파국 신호-뉴기니 전선'
<1943년 5월 11일부터 미·영 양국은 워싱턴에서 작전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영국이 주장한 유럽 전선 제일주의는 약간 흔들리고 태평양 지역에 대한 작전이 인정되었다. 이에 의하면 미국은 1943-1944년의 작전에서 마셜, 캐롤라인, 솔로몬, 비스마르크 제도에 대한 공략이 실시되고, 일본 점령하의 뉴기니·알류산 열도를 탈환하는 한편, 인도에서 중국에 이르는 항공수송의 증대, 미얀마 항공작전을 실시하였다.>
전쟁관련 자유 기고가인 심은식 씨가 '한국인의 눈으로 본 태평양전쟁'이라는 책에 기술한 내용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Stephen Cromwell' 소위와 기타모토(Kitamoto) 소위는 이 전투에서 만났을 것 같다. 기타모토(Kitamoto) 소위가 일본군의 전세가 불리함을 알고 인정을 베풀었을까? 그것은 오직 그만이 알 일이다.
아무튼, 일본군은 절망적 상황에서 최후 전술로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를 등장시켰다. 꽃다운 청년들을 죽음의 수렁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심은식 씨는 "이 가미카제는 일본인의 사무라이 정신의 발현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으나 비판도 많았다"고 했다.
< 3일전에 깨달은 삶의 미련
비가 내려 오늘 하루 더 사는 구나
내일 밤 귀신 되어 나오리라 벗을 위협
가엾구나 내 아이야 너도 죽다니
미국과 싸우는 놈이 재즈를 듣고
성인이 되자마자 특공대로다......
필승론, 필패론과 손을 맞잡아
승패는 우리들이 알바 아니지
부모 그리워, 그녀가 그립다고 구름에 고해>
일본 특유의 단가인 센류우(川柳) 형식으로 묘사한 특공대에 대한 우회적 비판이다(심은식). 죽음을 앞두고 두렵지 않을 사람 어디 있으랴. 이 글을 쓴 사람들은 모두 필리핀 해역에서 죽어갔단다.
이러한 젊은 군인들이 날아 남았다고 해도 지금은 90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다. 기타모토 마사마치(Kitamoto Masamachi) 소위가 과연 살아 있을까? 일본으로 부터의 소식을 기다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