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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고동 (2)'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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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범으로 투옥되었던 시인 김지하의 석방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두 차례나 참가하였다는 미술 평론가 '하리우 이치로(針生一郞)' 씨는 "한국이 고대로부터 여러 문화를 일본에 수출한 것은 알려져 있지만, 가까운 장래에 한국에서 일본에 '혁명'을 수출하는 날이 올 것을 나는 믿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군정에서 민정으로, 그리고 완전한 민주화로 기나긴 우회로를 거치기는 했지만, 한국은 착실한 전진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측의 수신 장치가 부러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쇠약해진 자민당의 장기 독재에조차 아직도 종지부를 찍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앞으로도 한국 미술에서 배워야 할 것은 실로 많을 것이다"고 했다. 민중미술이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한 바가 컸다는 것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민중미술 · 그 후 - 현대에 살아 쉼 쉬는 리얼리즘 미술

 

우리의 민중미술도 1990년 이후 국내외의 정치·경제면의 변화에 따라 약세를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예술가도 사회의 일원인 이상 사회로 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예술가의 입장으로서 작품을 통해 발언하고자 하는 작가도 일정 수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제 4 코너에 들어서자 강홍구의 '전쟁 공포 시리즈(1-4)'가 전시되어 있었다. 강릉 경포 해수욕장에서 모래성을 쌓으며 놀고 있는 아이들의 평화스러운 모습 뒤에 멀리 잠수함(합성)이 떠 있는 것과, 서울 시내에서 미사일이나 비행기가 폭발하는 작품이 암시하는 것은 우리의 주변에서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전쟁에 대한 공포감을 암시하는 작가의 의도가 깊게 깔려 있었다. 고승우의 '철인 3종경기와 삼각의 서(書) 2005', 구본주의 '혁명은 단호한 것이다', 김정헌의 '잡초와 조선전쟁의 기억 2003', 노순택의 '야릇한 공', 노원희의 '수목장의 불안' 등도 우리의 사회상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박영균의 '광장의 기억'은 한 눈으로 보아도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의 열광적인 모습을 담고 있었다. 이 작품은 붉은 티셔츠를 입고 서울 시청 앞 광장에 모여 응원하는 군중들을 건물 옥상에서 바라보는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었다. 그의 얼굴엔 민주화투쟁의 군중과 월드컵 응원 군중을 오버랩 시켜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정아의 ‘튼살’은 현대 여성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출산에 대한 부담감을 보여 주었고, 배영환의 ‘청춘’은 그룹 ‘산울림’이 노래한 '청춘'의 가사를 정제와 탈지면으로 써넣은 작품이었다.

 

<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영가가 구슬퍼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 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 거야 ........>

 

이어서 신학철의 ‘한국현대사-갑돌이와 갑순이’가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꼴라주 형식의 벽화기법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전시장의 한 쪽 벽면을 다 메워버렸다. 작품의 길이가 20 미터나 된다니 그럴 수밖에.....120호 16점의 이 작품은 한 눈으로 볼 수 없는 파노라마(?)였다. 그리고, 작품이 연대적 순서를 따르지 않았으며, 구성도 서로 뒤엉켜 시간적 순서와 공간적 위치를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자유분방했다.

 

  필자는 그림을 따라 몇 차례 왕래하면서 작품의 웅장함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평범한 갑돌이와 갑순이를 통해서 한국현대사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평화로운 시골 풍경에서부터 피난행렬, 달동네, 군부집권, 시위, 부동산 투기, 환경문제 등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의 실존인물들을 그려 넣어 생동감을 더해 주었다. 신학철의 또 다른 작품인 ‘오사마 빈 라덴’도 눈길을 끌었으며, 이 명복의 ‘도살’은 공포감을 유발할 만큼 섬뜩하기도 하였다.
조습의 ‘습이를 살려 내라’, 최민화의 ‘개 같은 내 인생’에 이어서 조경숙의 ‘진혼굿 시리즈’는 관람객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다.

일본의 민중들은 어떠했을까?

 

  필자의 취재와 사진 촬영을 도와 준 이 미술관의 학예과장 구로다 라이지(黑田雷兒, 46세) 씨는 “한국 민중미술의 본격적인 전개를 5공화국 군사정권이 시작된 1980년부터 1987년 민주항쟁의 승리까지로 본다”고 나름대로 정의를 내렸다. 실제로 한국의 민중미술은 1980년 젊은 작가들의 동인 모임인 ‘현실과 발언’이 창립되면서부터 미술사의 한 흐름을 형성했다. 그리고 1985년 민족미술협의회가 생겨났고, 인사동에 독자적인 전시공간이 마련될 만큼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구로다(黑田) 씨는, “전후 일본의 최대 시민운동을 든다면, 역시 1960년대의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반대운동이다”고 했다. 이 운동에 커다란 역할을 한 분트(공산주의자 동맹)의 서기장 ‘시마 시게오(島成郞)’는 안보투쟁에 대해 ‘일본의 정치사 또는 대중운동사에 있어서 가장 큰 규모의 민중이 직접 정치운동에 나섰던 사건으로, 민중이 일시적이나마 직접 정치운동에 나선 사건’이라고 했다."

 

'민중미술의 함성 예감은 관객의 몫'

 

한국예술종합학교 심광현 교수는 “미술작품들은 시대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거기에는 지속되는 시간 속에 '주름 접힌(folded)' 수많은 문제들, 열망들, 정서들과 지각들이 ‘질료적’으로 ‘펼쳐져(unfolded)'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이 전시회에서 선보이는 80년대의 민중미술과 그 전사의 작품들은 반전된 괴리를 증언하는 물질적 증거로 남아 있다. 이런 역사의 증언에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과거의 문제제기를 읽어내고, 새로운 문제들에 도전할 또 다른 민중미술의 함성을 예감하는 것은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다”고 했다.
 우리의 민중미술은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기획전시회인 <민중미술 15년 전>을 계기로 제도권으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았으나 비판도 뒤따랐었다.
민중미술이 발전하는 길은 무엇일까? 사회변혁이나 정치노선에 휘말리지 말고 예술적 기능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술의 가치가 물질적 보상을 받는 것은 바람직 하지만, 예술이 자본의 하위 개념이 되어버리는 단계까지 온 오늘날의 현상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루프'의 서진석 디렉터(조선일보 2008. 1. 22)의 말이 백번 옳다고 본다. 예술의 가치는 거래되는 돈이 아니라 예술 그 자체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입력 : 2008.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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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팬택전무(기획홍보실장) 동국대 행정학과/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석사)/인하대 언론정보학과대학원 박사(수료). 육군 중위(ROTC 11기)/한국전력/대우건설 문화홍보실장(상무)/팬택 기획홍보실장(전무)/경희대 겸임교수 역임. 현재 JSI파트너스 대표/ 부동산신문 발행인(www.renews.co.kr) 저서:홍보, 머리로 뛰어라/현해탄 波高 저편에/홍보는 위기관리다/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우리가 만날 때마다 무심코 던지는 말들/오타줄리아(공저) 기타:월간조선 내가 본 일본 일본인 칼럼 215회연재/수필가, 소설가(문학저널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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