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일곱 살이던 그때, 나는 보잉 747기의 좌석에 앉아 있었다...........비행기가 착륙하자 금연 등(燈)이 꺼지고 기내의 스피커에서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떤 오케스트라가 감미롭게 연주하는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이었다. 그리고 그 멜로디는 언제나처럼 나를 어지럽게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세를 타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58세)의 소설 첫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일본에서 한 해(1988년)에 350만부라는 폭발적인 판매부수를 기록했던 〈노르웨이의 숲〉은 우리나라에서는 〈상실의 시대〉로 번역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오차(茶)노 미스(水)’를 찾아서

 이 〈상실의 시대〉에 ‘오차(茶)노 미즈(水)’의 얘기가 실감나게 나온다. ‘오차(茶)노 미즈(水)’는 우리말로 ‘오차 물’이란 뜻이다.

 “우리는 역에서 전철을 타고 ‘오차(茶)노 미즈(水)’까지 갔다. 나는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주쿠(新宿)에서 갈아탈 때 역의 스탠드에서 형편없는 샌드위치를 사 먹고, 신문의 잉크를 끓인 듯 역겨운 맛이나는 커피를 마셨다.
 일요일 아침 전철은 나들이하는 가족들과 커플들로 가득 차 있었다......‘미도리’만큼 짧은 스커트를 입은 여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오차(茶)노 미즈(水)’엔 무엇이 있지?」
「따라오기만 해요. 가보면 알 테니.」

일요일의 ‘오차(茶)노 미즈(水)’는 모의 테스트인지 예비 학교에서의 강습인지를 받으러 가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오랜만에 도쿄에 간 필자는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오차(茶)노 미즈(水)’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여 전차를 탔다. 도쿄 역을 지나 ‘간다(神田)’ 역에서 바꿔 탄 전차는 불과 몇 분 만에 ‘오차(茶)노 미즈(水)’ 역에 데려다 주었다.
 자그마한 역사(驛舍)는 시골의 간이역 같은 초라한 모습이었다. 방향 감각을 잃은 필자는 지도를 펴들고 두리번거리며 폭염 속을 서성이다가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신문의 잉크를 끓인 듯 역겨운 커피 맛’이 아니라 향기로운 커피 향이 코를 찔렀으며, 샌드위치의 맛도 좋았다.

오차(茶)노 미즈(水) 기념비

 JR ‘오차(茶)노 미즈(水)’ 역 앞에는 ‘오차(茶)노 미즈(水)’ 간판이 즐비했다. 오차(茶)노 미즈(水) 빌딩, 신오차(茶)노 미즈(水) 빌딩, 오차(茶)노 미즈(水) 병원 등이 마치 차 밭을 연상할 만큼 많았다.
 히지리바시(聖橋)를 등지고 언덕길을 따라 메이지 대학(明治大學)으로 이르는 길을 마냥 걸었다. 언젠가 자료에서 본 ‘오차(茶)노 미즈(水)’ 기념비를 찾기 위해서다.
파출소 앞에서 멈춰선 필자는 머뭇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순경 아저씨의 신세를 졌다.
“실례 합니다. 혹시 ‘오차(茶)노 미즈(水)’ 기념비에 대해서 아시는 지요?”
“글쎄요. 아! 저희 파출소 옆에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기념비라서 다소 실망을 하였다. 그래도 역사의 흔적이 묻어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대나무 통에서 끊어질듯 말듯 새어나오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임종을 앞둔 사람의 마지막 숨결처럼 가냘프게 이어지고 있었다.

‘오차(茶)노 미즈(水) 기념비-’

 이끼 낀 비석에는 ‘오차(茶)노 미즈(水)’에 대한 사연이 새겨져 있었다.
“명계(茗溪) 또는 소적벽(小赤壁)으로 불리던 문인묵객(文人墨客)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승지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소실된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에 이 비(碑)를 세웠다.”

 기록에 의하면 이 간다천(神田川)의 공사(外堀工事-해자)는 1615-1625년에 시행되었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여기에 있던 절(高林寺)의 경내에 용수(湧水)가 있었다. 이 물이 ‘오차(茶)노 미즈(水)’로서 장군에게 헌상되었다. 그때부터 ‘오차(茶)노 미즈(水)’의 지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학문(學問)의 거리

이 ‘오차(茶)노 미즈(水)’ 지역은 니콜라이 성당, 유시마(湯島) 성당 등  역사적인 건물들이 있어 역사의 거리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대체적인 인상은 학문의 거리다. 대학과 전문학교, 예비교(학원)가 밀집해 있으며 대학병원도 많이 있다.
그래서 일까?  소설〈상실의 시대〉에도 ‘오차(茶)노 미즈(水)’에서의 대화는 공부에 대한 내용이 많다.

“와타나베, 영어의 가정법 현재와 가정법 과거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있어요?”
“설명할 수 있을 거야.”
“그러한 게 일상생활 속에서 무슨 도움이 되나요?”
“구체적으로 무슨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그러한 게 사물을 보다 더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훈련이 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어.”

 실제로 이 거리에는 긴 역사를 가진 예비교(豫備校)와 전문학교가 즐비하다. ‘문화학원’이라는 전문학교는 창립 80년이 넘는 명문 예술학교다. 그리고 ’아테네프랑세‘라는 프랑스어학교는 9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명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거리를 ‘역사 있는 예비교와 전문학교 거리’라고도 한다.
요미우리(讀賣) 신문(2002. 11. 14)도 “오차(茶)노 미즈(水)에는 예비교, 전문학교, 대학이 근처에 산재해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단풍나무 거리’와 칠엽수 나무 거리‘에는 예비교와 전문학교가 밀집해 있다”고 보도 했다.

‘녹차(綠茶)여, 다시 만날 그날까지-’

일본 사람들은 대체로 차를 좋아한다. 그래서 지역별 특성을 내세운 차(茶)가 으뜸선물로 꼽힌다. 그 중에서도 도쿄와 가까운 후지산 근처의 시즈오카(靜岡) 차가 인기가 있다. 시즈오카(靜岡)는 일본 전체 차(茶)생산량의 약 절반가량을 생산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차의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차라도 ‘물(水)’이 좋아야 한다. 그래서 물이 좋았던 이지역의 이름, ‘오차(茶)노 미즈(水)’가 영원히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필자는 작가 한수산 씨가 최근 한 신문에 기고한 “녹차여, 다시 만날 그날까지”라는 글을 읽고 마음이 아팠다. “........이것만은 아니었으면 하는 뉴스를 접했다. 바로 ‘농약 녹차’ 소식이다. 최홍만의 무릎치기 한 방을 맞고 그냥 캔버스에 나가떨어진 기분이 이럴까 싶었다. 청정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는 차밭과 녹차에까지 농약이 살아 있었다니, 이건 아예 농약을 정성들여 우려서 마셨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오차(茶)노 미즈(水)’엔 무엇이 있지?”
거기엔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오차의 물’은 없었다. 그 대신 미래의 인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청정(淸淨)의 거리이자 학문의 거리로 자리한 것이다.

우리에겐 왜 이러한 거리가 없을까?
학문에까지 농약(?)이 뿌려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