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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 모터사이클 시베리아 횡단’ 탐험가 김현국

“‘헬조선’이라는 탄식에 머물지 말고, 넓은 대륙을 달리며 새로운 기회에 도전하라”

김성훈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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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국 탐험가
 
 
1996년 대학교를 갓 졸업한 한 청년은 모터사이클 한 대에 몸을 싣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1만2000km의 거리를 달려 시베리아를 횡단했다. 세계 최초로 모터사이클을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한 것이다. 대륙으로의 진출을 꿈꾸었던 20대 청년의 열정은 불혹의 나이를 넘긴 최근까지도 꺼지지 않았다. 그는 2014년에는 부산에서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 모스크바를 거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까지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2만6000km 육로왕복에 성공했다. 지난해 8월에는 일반인 바이커 9명과 함께 부산에서 러시아 바이칼 호수까지 이르는 7000km의 육로왕복을 마치고 돌아왔다. 주인공은 ‘당신의 탐험’ 대표이자 ‘세계탐험문화연구소’ 소장인 김현국(49) 탐험가다. 김 대표는 “청년들이 좁은 대한민국 안에서 경쟁하며 ‘헬조선’을 외칠 것이 아니라 기회의 땅인 유라시아 대륙으로 진출해야한다”고 했다. 이어 “통일을 말로만 떠들게 아니라 통일 이후 열려질 북방 육로로의 진출을 지금부터 준비해야한다”고 말했다.
 
그가 긴 여행을 시작한 이유

지난 2월 10일 그의 전남대학교 사무실 ‘이게 탐험가의 방이구나’ 싶었다. 시베리아 횡단 여정, 인생 여정을 들었던 7시간의 인터뷰가 순식간에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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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국 탐험가 사무실 벽면.

- 1996년 세계 최초로 모터사이클을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했다. 어떻게 도전하게 됐나.
“1987년 전남대 법대생으로 입학했다. 입학하자마자 6월 항쟁이 터졌다. 학과 공부보다 시위에 매진했다. 얼마 후 6·29선언이 있었고 대통령 직선제가 이뤄줬다. 승리감에 취해 있었는데 김영삼, 김대중 두 지도자가 후보 단일화를 하지 않으면서 노태우 씨가 당선이 됐다. 당시에 실망이 너무 컸다. 실망감에 매일 술을 먹다보니 어느 날 손을 떨고 있었다.”
 
그는 대학교 신입생 시절의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떨리는 손을 보니 고생하시는 어머니가 생각났다. 바로 군 입대를 했다. 군복무를 하던 1989년에 해외여행 자율화가 이뤄졌고 이어 1990년에 한·러 수교가 맺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인생이 역설적인 게 솔직히 노태우 대통령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북방정책 등 노 전 대통령의 정책으로 인해 내 인생이 바뀌게 됐다.”
 
- 그 때부터 탐험가로서의 삶을 꿈꾼건가.
“처음에는 단순히 학연, 지연, 혈연 익숙했던 모든 것에서 떠나 나 자신을 찾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1991년에 전역 후 먼저 일본을 15일간 다녀왔고 자신감을 얻어 인도에 갔다. 인도에서 1년 6개월씩 두 번 총 3년을 살면서 네팔, 티베트 지역까지 다녀왔다.”
 
- 여행을 통해 느낀 바가 있었나.
“인도 뭄바이에 도착해 처음에는 쓰레기장 같은 공항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다른 한편 도시 전체에 우리가 자랑하는 신라 석굴암 같은 유적들이 있는 것을 보면서 놀랐다. 우리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오만, 우물 안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또 인도에 여행 온 유럽 청년들을 만났다. 청년 시절에 각 나라를 다니며 얻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세련됨을 갖추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에서 네팔 국경을 넘을 때 입국심사대는 대나무 하나로 막혀있었고 국경은 실개천이었다고 한다. 남북한 사이의 꽉 막힌 휴전선과 비교가 돼 분단의 현실을 생각하고 통일을 소망하게 됐다고 말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했던 큰 아버지 무용담 들으며 시베리아에 관심
 
 
- 다음 여행지로 러시아를 택하게 된 이유가 있나.
“큰아버지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술만 먹으면 당시 이야기를 해줬다. 그래서 그런지 시베리아 땅에 관심이 갔다. 당시에 시베리아 하면 알려진 게 사회주의 종주국의 땅, 동토, 대자연 밖에 없었다. 러시아에 직접 가봐야겠다 생각하고 관련 자료를 찾는데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일본에서 만든 <세계를 간다-소련편> 책을 보고 러시아에 대해 공부했다.”
 
그는 러시아 소설가 겸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사할린 섬》을 읽으며 러시아의 매력에 빠져들게 됐다고도 말했다. 《사할린 섬》은 1890년에 체호프가 모스크바에서 출발, 시베리아를 횡단해 사할린 섬을 여행한 후에 작성한 현장 보고서다. 김 대표는 이른 아침 시베리아의 침엽수림에 앉아 대자연의 웅장함과 적막감을 느끼며 밀크커피를 마시는 꿈을 꾸게 됐다고 했다.
 
- 여행 경비는 어떻게 마련했나.
“막노동을 해서 벌었다. 러시아행 항공료는 《스포츠서울》과 《전남일보》에 러시아를 여행하며 고려인과 관련된 글을 연재하겠다고 약속하고 받아냈다. 약간의 경비와 비행기 표만 들고 무작정 떠났다.”
 
- 러시아에서의 첫 여정 쉽지 않았을 텐데.
“하바로브스크 공항에 내렸는데 막막했다. 그 때 한국인 사업가를 안내하러 나온 알료냐라는 푸쉬킨대 영문학과 여대생을 우연히 만났다. 알료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알료냐가 값싼 호텔도 알아봐주고 러시아 생활 내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사할린 출신의 고려인이었던 알료냐의 할아버지를 통해 고려인에 대한 정보를 얻어서 언론사에 보낼 글을 작성할 수 있었다.” 
 
- 러시아에서 어디서, 얼마나 체류했나.
“석 달간 지내다 왔다. 우연히 한국인 선교사님을 만나게 됐고 선교사님이 운영하는 신학교 안에서 머물렀다. 당시 선교사님이 전해준 말씀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러시아는 새로운 시장, 자원의 보고, 개척의 땅이야. 20세기에 마지막 남은 서부 개척지라고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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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바이칼 국립공원 앞에서.

즉석복권에 당첨된 돈으로 우연히 오토바이 산 것이 계기가 돼
 
 
- 러시아에 체류하며 모터사이클 시베리아 횡단을 계획한 건가.
“아니다.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다. 돌이켜보면 신의 이끄심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귀국 후 복학해서 전남대 후문에서 지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다 심심해서 즉석복권을 샀는데 100만원에 당첨됐다. 돈으로 무얼 할까 고민하다 오토바이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토바이를 사러 갔는데 오토바이 주인이 히피 스타일의 내 옷차림을 보더니 한 마디 했다. ‘자유롭게 보이는데 오토바이 타고 세계여행이나 가쇼.’ 그러고서 수업에 들어갔는데 평소에 나를 좋지 않게 보던 법대 교수님이 ‘김 군, 이제 또 어디에 갈 건가?’하고 물었다. 엉겁결에 ‘오토바이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할 겁니다’라고 답했다. 그런데 교수님이 평소와는 달리 호의적으로 반응하며 수업 끝나고 방으로 오라고 말했다.”
 
- 교수가 어떤 말을 했나.
“자녀들이 최근에 천리행군에 다녀왔는데 변화돼서 왔다고 했다. 그래서 여행 다니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베리아 횡단 기획서를 써오라 했다. 그래서 ‘대륙원정기획서’라는 이름으로 기획서를 제출했다.”
 
- 기획서 제출 후 어떤 일이 있었나.
“총장님과 전남대 법대 출신의 변호사 몇 분들,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소개해줬다. 그 때 만났던 분 중에 우윤근 주러시아 대사, 윤장현 광주시장, 장명국 내일신문 발행인이 있다. 전남일보 당시 편집국장이 아시아나 항공, 대림 자동차에 연결해줬다. 아시아나 항공 당시 부사장을 면담하고 비행기표 제공 및 오토바이 항공배달을 약속받았다. 대림 자동차에서 오토바이를, 금호 기업에서 비용 일부를 제공해줬다.”
 
- 러시아에 도착해서 어려움은 없었나.
“러시아 세관에서 오토바이를 내주지 않았다. 경찰들은 위험한 길이므로 무장군인과 함께 가되 숙식비를 제공하라 했다. ‘러시아는 되는 것도 없지만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라는 말이 있는데 3개월여를 애쓰며 기다린 끝에 러시아 정부의 허가를 받아냈다.”
 
1만2000km 목숨 건 시베리아 횡단
 
김 대표는 1996년 3월 중순에 러시아에 도착해 러시아 정부의 허가를 얻는 것을 포함 3개월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6월 중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만2000km의 대장정을 출발했다. 그는 4개월여를 달려 10월 중순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세계 최초로 오토바이 시베리아 횡단의 역사를 기록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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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유라시아 횡단 이후 열린 행사 포스터. 
 
- 1만2000km의 시베리아 횡단, 목숨을 건 여정이었을 텐데요.
“러시아에는 이런 말이 있다. ‘400km 이하 거리는 길이 아니다, 영하 40℃ 이상은 추위가 아니다, 40도 이하 술은 술이 아니다.’ 매우 힘든 여정이었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대륙에는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묵시적인 대륙의 법이 있다. 징기스칸은 말했다. ‘여행자에게 잠자리를 주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하라.’ 광활한 대륙에서는 누구나 언젠가는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나그네, 여행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시베리아 횡단을 마쳤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탐험가는 우리나라에서 직업군에도 없는 존재다. 그러나 결국 영원한 것 앞에선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세상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을 떠올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시베리아 횡단은 나에게 탐험가로서의 삶을 열어주었다.”
 
그의 시베리아 횡단 스토리는 노래로도 만들어졌다.
 
<나는 바이크 타고 시베리아에 간다>
김원중
 
나는 바이크 타고 시베리아에 간다 바이크 타고
길 위에 사람들 바이크를 앗으려하고 우-우-
나는 바이크 타고 시베리아에 간다 바이크 타고
숲 속의 짐승들 시퍼렇게 불을 켜고 나를 노리네
 
하여 나는 불빛 따순 마을로도 가지 못하고
숲의 품에도 들 수 없네
타고 가는 시간보다 메고 가는 길이 더 많은 이 길
 
그러나 이 길 두렵진 않아
눈물 흘리던 어머니 뿌리치며 떠나온 길
아 두려운 것은 더 두려운 것은
오던 길 돌아가 긴 줄에 서는 것
아 이 길 두렵진 않아 바이크 타고 시베리아 지난다
 
환경·질병·인권 메시지 안고 N-실크로드 대장정
 
김 대표는 1997년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3년간 생활하고 2000년 귀국해 N(New, Nomadic, Net)-실크로드 대장정을 준비하게 된다. N-실크로드 대장정은 전 세계 청년 300명이 1만4000km 실크로드를 횡단하며 이동구간에서 만나는 지구의 환경∙질병∙빈곤∙인권∙평화 문제 등을 전 세계에 알리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변화를 촉구하는 국제적 프로젝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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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실크로드 홍보 포스터.

- N-실크로드 대장정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1999년에 프랑스 미래학자의 책을 읽는데 ‘미래를 이끌어가는 것은 노마디즘(Nomadism)이다’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정보를 활용할 능력이 있고 인터넷만 할 수 있다면 전 세계 어디에 가도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바 디지털 노마디즘이다. 전 세계 청년들과 함께 실크로드를 횡단하며 지구촌 문제를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야겠다는 꿈을 갖게 됐다.”
 
N-실크로드 대장정은 단순히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것을 넘어 카스피 해 해양 오염 방지 캠페인, 중앙아시아 사랑의 집짓기 행사, 지구 사막화방지 고비사막 나무심기 행사 등 지구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이 포함돼 있었다.
 
- 준비과정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러시아에서 3년간 사업을 통해 벌었던 수억 원을 투자했다. 전 세계에 공문을 보내 젊은이들을 모집했다. 터키, 일본, 키르키즈스탄 등의 국가와 실질적인 프로젝트 논의가 이뤄졌고 노키아에서도 관심을 표했다. 주변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아니다’, ‘무모하다’는 말들이 있었지만 2001년 프로젝트 시작을 눈앞에 두게 됐다.”
 
- N-실크로드 대장정 프로젝트 성공하진 못했는데.
“2001년 8월 중순 사전답사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그 해 9월 11일에 미국에서 쌍둥이빌딩 테러가 일어나면서 모든 계획이 취소돼버렸다. 당시에는 ‘내가 징기즈칸보다 더 큰 업적을 내겠다’는 ‘광기와 열정’으로 일했는데 모든 게 한 순간에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 상심이 컸겠다.
“2002년에 다시 모스크바에 갔다. 2006년까지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민족우호대학 등에 머물면서 다시 사업을 했다. 광기와 열정의 시기에서 벗어나 ‘먼저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 되는 게 중요하겠구나’라는 자성(自省)의 시간을 보냈다.”
 
- 프로젝트를 다시 준비하진 않았나.
“2006년에 한국에 돌아와 전업탐험가로 활동하며 N-실크로드 대장정 프로젝트를 다시 준비하게 됐다. 2008년에는 《타이가에서의 만남》이라는 러시아 서적을 번역하기도 했다.”
 
- 결과적으로 프로젝트는 성공하지 못했는데.
“여러 난관에 부딪치며 중단하고 말았다. 한 동안 매우 힘든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중 2014년 한·러 무비자 협정이 맺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앞서 2010년에는 러시아 횡단도로가 다 닦였다는 소식도 들었다. 시베리아 횡단에 재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횡단 경험 담은 강연 통해 '헬조선'이라는 청년들에게 희망 전달할 것"
 
 
- 불혹을 넘긴 나이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텐데 새로운 목표라도 있었나.
“전 세계가 기회의 땅인 유라시아 대륙으로 진출하고 있다.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아시안 하이웨이 6번 도로는 한국-북한 구간 300km만 제외하고 모든 구간이 연결됐다. 내가 1996년 시베리아를 처음 횡단한 이래로 우리는 20여 년째 통일 이후에 유라시아 대륙으로 진출하는 이상만 이야기해왔다.
유라시아대륙의 시작이자 해양과 대륙을 연결하는 반도국가인 우리에게 연결 곧 다양한 물류라인을 확보하는 것은 생명줄과도 같다.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다는 생각, 나라도 이 길을 먼저 개척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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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유라시아 횡단 프로젝트 'AH6, 트랜스시베리아' 여정.
 
김 대표는 2차 횡단(2014년 6월 초~11월 초)에서 1차 횡단보다 더 먼 거리인, 시베리아를 횡단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후 유럽 북단까지 종단하는 2만5000km의 육로 왕복에 성공했다. 그는 탐험 자체가 목적이었던 1차 횡단과 달리 2차 횡단에서는 유라시아 대륙횡단도로 경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차량을 통한 물류운송이 기차와 배, 비행기 등 타 운송 수단과 비교해 어떤 경쟁력이 있는지 조사했다.
 
- 경로를 유럽까지 확장한 이유가 있었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은 지면이 해수면보다 낮아 땅도 안 좋고 자원도 없는 도시임에도 세계적인 도시가 됐다. 또 암스테르담 이남에 있는 로테르담은 유럽 최고의 물류 도시다. 우리나라의 롤모델이 될 수 있는 나라와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유럽 북단에 있는 노르웨이 트롬쇠는 해상운송을 10일이나 단축시키는 북해 항로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 올해에도 러시아에 다녀왔다고 들었다.
“부산에서 9명의 일반인 바이커들을 만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 호수까지 왕복하는 7000km의 여정을 다녀왔다. 일반인들도 2주간의 여정으로 블라디보스토크-바이칼 호수 경로를 다녀오는 투어를 계획하고 있다.”
 
- 앞으로의 계획은 뭔가.
“캠핑카 여행 시대가 왔는데 일반인들 누구나 유라시아 대륙을 육로로 체험할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싶다. 그리고 강연 및 번역 그리고 탐험 활동을 지속하고 지금까지 축적한 정보와 경험을 담은 책을 낼 계획이다.”

김 대표는 끝으로 “지하자원의 보고이자 68억명이 살고 있는 유라시아 대륙은 세계 육지 면적의 40%, 인구의 70%, GDP의 60%를 점유하는 최대 단일 대륙으로 21세기 마지막 개척지”라고 말했다. 그는 “통일의 날은 반드시 올 것이라며 우리 청년들이 ‘헬조선’이라는 탄식에 머물지 말고, 넓은 대륙을 달리며 새로운 기회에 도전하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글=김성훈 월간조선 기자

입력 : 2018.03.07

조회 : 9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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