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73세에 반도체사업에 도전하다

한국의 창업 CEO 5인①-이병철
  • 박동운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 교수
  • 업데이트 2015-02-04  10:18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본문이미지
삼성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
  한국은 반도체 생산 1등 국가다. 2014년에 반도체 메모리 부분에서 삼성전자는 세계시장 점유율 34.7%를 기록하여 단연코 이 부문 세계 1위다. 또 반도체 매출액은 2014년에 삼성전자가 382.73억 달러, 세계시장 점유율 10.9%로 인텔(499.64억 달러, 14.2%)에 이어 세계 2위다. 삼성과 SK를 합하면 2014년에 한국은 반도체 세계시장 점유율 15.4%로 세계 2위다.
 
세계 반도체시장에서 한국의 위상이 이렇게 높은 것은 고(故) 이병철 전 삼성 회장의 기여의 결과다. 대한민국은 자원이 없고 크기가 미국과 중국의 100분의 1에 불과한 작은 나라이지만 이병철 회장이 73세 때 반도체사업에 도전하여 반도체 세계 1등 국가가 된 것이다. 1986년 2월에 발간된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 『호암자전(湖巖自傳)』을 텍스트로 삼았다.
 
그런데 삼성전자의 반도체사업은 이병철 전 회장이 단독으로 추진한 것이 아니라 이건희 회장이 아버지 이병철 회장의 결단을 먼저 이끌어냈고, 뒤이어 1974년 ‘한국반도체’ 인수에 깊숙이 관여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고 한다.1)
  
무위도식하다 사업을 꿈꾸다
 
이병철은 1910년 경남 의녕군 정곡면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다. 그는 5년 가까이 서당(書堂) 공부를 하다가 11살에 진주의 지수보통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했다. 그의 재종형 하나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고향에 와 있었는데 그는 이병철에게 서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병철은 서울에 가서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냈다. 서울의 수송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그는 산술은 늘 상위권이었지만 석차는 50명 중 35등에서 40등을 오르내렸다.
 
그는 보통학교 과정을 빨리 끝내고 싶어 4학년을 마치고 부모님을 설득하여 중동중학에 입학했다. 3학년 가을,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는 중동중학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일본 유학을 결심했는데 어렵게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냈다.
 
그는 1930년 4월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했다. 2학기 말에 각기병(脚氣病)에 걸려 2학년 가을 조도전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했다. 진주의 지수보통학교, 서울의 수송보통학교와 중동학교로 이어지는 네 번째 중퇴. 이렇게 해서 그의 학업은 마감되었다. 그는 자신의 학력을 “졸업증서 없이 끝난 학업”이라고 썼다.
 
귀국 후 그는 허전한 마을을 달래고자 골패에 열중했다. “노름은 한밤중까지 계속되어 지칠 대로 지쳐서 달그림자를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무위도식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그가 전기(轉機)를 맞았다. “그날도 골패노름을 하다가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 밝은 달빛이 창 너머로 방 안에 스며들고 있었다. 달빛을 안고 평화롭게 잠든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문득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심정이 되었다. 너무 허송세월했다. 뜻을 세워야 한다. 잠자리에 들긴 했으나 그날 밤은 한잠도 이룰 수 없었다.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리고 뜻을 굳힌 것이 사업이었다. …. 사업에 투신하자.” 26세 때의 일이다.

삼성상회(三星商會)를 설립하다
 
그는 “어느 달밤 순간적으로 결단한 것”이지 사업을 오랫동안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사업 얘기를 듣고 “사업자금으로서는 대수로운 것이 못되었지만 먹고 살기에는 넉넉할” 정도의 사업자금을 대주었다.
 
그는 다른 두 사람과 합작으로 <협동정미소>를 차렸다. 1936년, 그의 나이 26세. 정미소 사업은 잘 되었다. 이 무렵 그는 트럭 20대로 운수회사도 경영했다. 이 두 사업으로 그는 얼마 후 “연수(年收) 1만석, 2백만 평의 대지주가 되었다.” 이어 그는 세 번째 사업으로 토지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세계적인 대공황에다 일본의 농민수탈정책으로 이농자가 속출해 땅값이 엄청 쌌다. 그런 처지에서 은행 융자가 쉬웠다. 은행융자로 매입대금을 전액 지불하고도 돈이 남았다. 그는 “김해평야의 경작이 가능한 전답은 한 평도 남기지 않고 사들이기로 작정하고 매물로 나와 있는 물건을 조사했다.” 그는 토지 투자를 부산·대구의 주택용지까지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재난이 닥쳤다. 어느 날 일본의 식산은행으로부터 일체의 대출이 중단된다는 통고를 받은 것이다. 중일전쟁을 앞두고 일본 정부가 취한 비상조치였다. 하루아침에 그가 쌓은 부는 모두 사라졌다. 다행히도 엄청난 부채는 갚을 수 있었다. 그는 “이 실패는 그 후의 사업경영에 다시없는 교훈이 되었다고” 썼다.
 
그로부터 반 년 후 그는 새로운 사업에 착수하기로 마음먹고 새로운 사업을 찾아 여행길에 올랐다. 그는 서울을 거쳐 만주의 여러 도시, 중국의 여러 도시로 발을 뻗쳐 2개월에 걸친 조사여행을 마쳤다. 이 여행에서 그는 청과물, 건어물, 잡화 등이 무역에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1938년 3월 1일, 28세 때 자본금 3만 원으로 대구에서 <三星商會> 간판을 걸었다. 그는 ‘三星’의 의미를 “‘三’ 은 큰 것, 많은 것, 强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다. ‘星’은 밝고 높고 영원히 깨끗이 빛나는 것을 뜻한다”고 썼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회사가 “크고 강력하고 영원하라―”고 기원했다.
 
이병철 이야기는 반도체에 있으므로 반도체사업으로 방향을 돌린다. 
 
본문이미지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의 기점인 울산 공업단지 부지를 시찰 중인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조선DB


반도체사업으로 눈을 돌리다
 
이병철의 기업가정신은 반도체 사업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湖巖自傳』은 <제8편>에서 반도체를 다루고 있다. 반도체사업에 관한 이병철의 기업가정신을 이야기한다.

삼성이 전 세계에 70여 개의 현지법인을 갖고, 총매출의 절반을 해외에서 거두던 시점에 이병철은 삼성의 미래를 염려했다. 그는 삼성의 발전을 확신하면서도 “긴요한 것은 왕성한 도전 정신과 끊임없는 노력정신에 의해 모든 분야에서 계속 선구적으로 신기축(新機軸)을 열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삼성이 “많은 위험이 뒤따르는” 반도체사업에 진출하여 “그 위험을 뛰어넘어 성공을 쟁취해야만 삼성의 내일이 열린다”고 확신했다. 그의 나이 73세 때의 결단이다.
 
1980년 이른 봄. 동경에 체제하고 있을 때 사무실로 찾아온 도엽수삼(稻葉秀三) 박사와 그는 일본산업의 방향 전환을 놓고 얘기를 나누었다.
 
“그렇다면 일본산업의 살길은 무엇이냐?” 이병철이 물었다.
“일본 기업은 반도체·컴퓨터·신소재·광통신·유전공학·우주·해양공학 등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기술 분야로의 전환을 도모하고 있고, 특히 반도체 및 그 주변의 기계공업에 치중해 왔다. 정부도 이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하여 전략산업으로 육성했다. 그 결과 수출은 획기적으로 늘고 외화수입은 급증했다. 일본의 살길은 바로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첨단기술산업에 달려 있다.” 稻葉 박사의 설명이었다.
 
반도체에 관심을 가진 이병철은 6년 전에 위암 수술을 받았지만 72세 때인 1982년에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그는 21년만의 미국방문에서 우리가 지금 전환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미국이 제2차 오일쇼크 후에 불황을 합리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산업조정을 일찍 끝낸 일본이 철강, 자동차 등에서 미국시장을 휩쓸고 있었지만 미국은 맞설 경쟁력을 잃고 있었다. 미국에서 각 분야 유수 기업들의 생산현장을 자세히 살피고 경영수뇌들의 고충을 직접 듣고 나서 얻은 교훈은 한국의 살길은 첨단산업의 시급한 개발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삼성은 해방 후와 동란 중에는 무역을 통해 물자조달의 기능을 맡았다. 휴전 후에는 수입대체산업을 일으켜 한국경제가 원조경제에서 자립경제로 전환하는 기틀을 잡는 데 누구보다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어 중화학공업의 건설로 기간산업(基幹産業)의 기반 조성에 몰두했다. 이제는 그것을 터전으로 삼아 첨단기술산업을 개척해야 한다고 그는 판단했다.
 
언제나 삼성은 새 사업을 선택할 때 항상 그 기준이 명확했다. 국가적 필요성이 무엇인가, 국민의 이해가 어떻게 되는가,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가 등이다. 이 기준에 견주어 현 단계의 국가적 과제는 ‘산업의 쌀’이며 21세기를 개척할 산업혁신의 핵인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그러나 난제는 워낙 크고 많았다. 과연 한국이 미·일의 기술수준을 추적할 수 있을까? 막대한 투자재원을 마련할 수 있을까? 혁신의 속도가 워낙 빨라 제품의 사이클은 2, 3년인데 그 리스크를 감당해낼 수 있을까? 미·일 양국이 점유하고 있는 세계시장에 뒤늦게 뛰어들어 경쟁에 이길 수 있을까? 고도의 기술두뇌와 기술인력 확보, 훈련은 가능할까? 입지조건도 까다롭지만 무엇보다도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 이내에 공장을 세울 수 있을까? 공장의 구조도 아주 특수해야 될 텐데 필요 시설과 전문건설용역은 확보할 수 있을까? 등등. 이런 열악한 여건에서 그는 결심했다―“누군가가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프로젝트다. 내 나이 73세, 비록 인생의 만기(晩期)이지만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어렵더라도 전력투구를 해야 할 때가 왔다.”
 
1982년 5월경. “수많은 미·일 전문가를 비롯하여 국내전문가들의 의견을 거의 다 들었다. 관계 자료는 손닿는 대로 섭렵했고, 반도체와 컴퓨터에 관한 최고의 자료도 얻었다. 그 결과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정부의 적극적인 뒷받침만 있으면 성공의 가능성이 있다”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본격적으로 반도체사업에 들어갔다.
 
∙1982년 10월 “삼성반도체에 내일을 걸고” 반도체·컴퓨터사업팀을 조직했다.
∙1983년 2월 동경에서 반도체투자의 단안을 내렸다.
∙1983년 3월 1년간에 걸친 기초조사와 검토 끝에 삼성의 반도체투자 계획을 공식으로 선언했다.
∙1983년 7월 미국 산타클라라에 기술개발 및 판매촉진을 위한 현지법인을 세웠다.
∙1984년 3월 말까지 64KD램의 양산 제1라인을 완성할 계획을 세웠다. 기술은 미국의 마이크론과 일본의 샤프에서 도입하기로 했다. 일본반도체업계는 한국에 대한 기술 제공에 반대했지만 기술 도입은 샤프의 호의로 이루어졌다. 기흥공장 부지는 반도체의 중요성을 인식한 정부의 배려로 확보되었다.
∙1984년 5월 17일 드디어 삼성반도체통신 기흥VLSI공장 준공식이 열렸다. 이로써 한국이 세계에서 미국, 일본에 이어 세 번째 반도체 생산국이 되었다.
∙1984년 9월 미국에 처녀 수출이 이뤄졌다.
∙1984년 10월 256K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미국과 일본의 전문가와 메이커들이 모두 “기적이라고 경탄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삼성전자는 2005년부터 반도체 메모리 부문에서 세계 1등자리를 지켜왔다.
본문이미지
1990년 7월 삼성전자 반도체 화성공장 기공식./<반도체 30년>. 조선DB


삼성이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면 삼성이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병철이 관계자들의 의견을 여덟 가지로 종합하여 답을 주었다. 그 가운데 첫 번째가 “첨단기술에 도전한 삼성의 확고한 기업가정신”이라고 이병철이 밝혔다.
 
이병철은 모험이 가득 찬, 그러면서도 강한 비전이 뒷받침된 기업가정신을 발휘했다. 기업가정신 없이 73세의 나이에 그처럼 큰 모험을 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병철의 거창한 계획을 놓고 정부는 실현 불가능한 사업이라고 고개를 저었지만 이병철은 끝내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여 한국이 반도체 세계 1등 국가가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기업가정신의 발로다.
 
그런데 ‘기업가정신’을 얘기하다 보니 북한이 떠오른다. 이병철은 1974년에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면서 반도체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준비를 했다. 1974년은 1인당 국민소득에서 남한(597달러)이 처음으로 북한(579달러)을 앞서기 시작한 해다. 그로부터 41년 후인 2015년의 모습은 어떠한가? 남한은 스마트폰 세계 1등 국가가 되어 있지만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1억 달러 어치의 휴대폰을 수입하는 정도다. 반도체 관련 이병철의 기업가정신이 이런 격차를 만들어냈다. 이는 곧 기업가정신이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자유시장경제의 힘이다.

삼성은 영원할까?
 
‘기업은 영원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이병철은 이렇게 썼다. “이에 대한 대답은 물론 ‘노’이다. 영원은커녕 짧으면 10년, 20년, 길어서 40년, 50년의 사이클로 소장(消長)하고 있다. 영고성쇠(榮枯盛衰)를 거듭하는 기업의 수명은 인간의 그것보다도 훨씬 짧고 덧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의 여로를 걷기 시작하지만 기업 또한 창업과 동시에 어느 날엔가는 쇠망의 위기에 직면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 이병철의 말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노키아를 생각하게 한다.
 
삼성 잘하라고 한 경고일 것이다. 삼성은 참으로 잘해 오고 있다. 삼성전자는 1968년 11월 8일에 일본 산요전기와 자본·기술합작 협정서에 조인하고, 같은 해 12월 30일에 삼성전자 창립 발기인회를 개최한 후 1969년 1월 13일에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렇게 출발한 삼성전자는 산요는 물론 소니, 토시바, 샤프 등을 제치고 현재 세계 1등 전자기업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삼성에 반도체 기술을 제공한 미국의 마이크론의 매출액은 2014년에 163.89억 달러로 382.73억 달러인 삼성의 43%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의 샤프는 비교도 안 된다. 삼성의 빛나는 성과다.
 
삼성전자는 스마트폰에서도 미국의 애플과 세계시장에서 선두를 놓고 격돌해오고 있다. “기업의 수명은 인간의 그것보다도 훨씬 짧고 덧없는 것”이라는 이병철 회장의 경고를 삼성은 깊이 새겨들어 ‘영원한 세계 1등 기업’ 자리를 지켜주어야 한다.

못 다한 이병철 이야기①: “기업은 자선단체가 아니다”
 
이병철의 기업관은 뚜렸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기업은 자선후생의 단체가 아니다. 이익을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익으로 종업원에게 충분한 급료를 지불하고,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고, 주주에게 배당을 지불하고, 그리고 재투자를 한다. 기업이 그 이익을 얻는 방법에는 적부(適否)의 문제가 있을지언정, 이윤추구 그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기업이 적자를 내게 되면 그것은 하나의 사회악이라 할 것이다. 자본·자재·사람 등 사회의 귀중한 자원이 낭비가 되기 때문이다. 기업부실화의 부담은 결국은 국민에게 돌아온다.”
 
이탈리아어에 ‘페카토 모르탈레(Peccato Mortale)’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용서받지 못할 죄’를 뜻한다. 이탈리아인들은 용서받지 못할 죄로 기업이 이익을 남기지 못하는 경우를 꼽는다. 기업인이 이익을 남기지 못하여 세금을 내지 못하고, 종업원들에게 임금을 주지 못하고, 나아가 처자식을 먹여 살리지 못하면 그것은 죄 중에서도 최악의 죄 곧, 용서받지 못할 죄가 된다는 것이다.
 
한 때 삼성전자는 6조 원이 넘는 순이익을 낸 적도 있다. 그 이익으로 삼성전자는 무엇을 했을까? 일자리를 만들었다. 삼성은 일자리를 가장 많이 만드는 기업이다. 일자리를 가장 많이 만드니 소득 증대에도 가장 많이 기여한다. 어떤 사람들은 삼성의 이 같은 기여를 인정하려 하지 않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   

못 다한 이병철 이야기②: 노비를 해방시키다
 
이병철은 자신의 낭인시대(浪人時代)를 회상하며 “흐뭇한 추억” 하나를 소개했다. 사업에 투신하려고 했던 무렵 자신의 제안으로 “집의 노비(奴婢)를 해방시킨 일”이다.
 
그의 집에는 노비가 5가구, 30명가량 있었다. 그는 “조도전 유학시절부터 이것은 인도에 어긋날뿐더러 사회발전에도 큰 장애 요인이 된다고 생각해 왔었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에 이들을 해방시킬 기회를 얻으려고 여러 모로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버지에게 “그들에게 자유를 주면 어떨까요?” 하고 건의했다. 아버지는 “뜻밖으로 선뜻 허락해주었다.” 미국은 애브러햄 링컨이 남북전쟁 중인 1863년에, 조선은 고종이 1894년에 노비제도를 폐지했다. 이병철은 26세 때인 1936년에 집의 노비를 해방시켰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조도전대학 시절에 한동안 탐독했던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받은 영향이 적지 않게 작용했던 것 같다”라고 썼다.
 
각주 
1) 삼성전자(1999), 『삼성전자 30년사』. 이 책에서 1999년에 삼성전자를 이끌었던 이학수 전 사장은 반도체산업 발전과 관련하여 이건희 당시 부회장의 기여를 자세히 밝혔다.
  • 스크랩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많이 본 뉴스
  • 세계속 코이카'
  • 배진영의 '어제 오늘 내일'
  • 김태완 'Stand Up Daddy'
  • 권세진 ‘별별이슈’
  • 정혜연 ‘세상 속으로’
  • 박희석 ‘시시비비’
  • 이정현 ‘블루오션을 찾아서’
  • 박지현 ‘포켓 저널리즘’
  • 하주희 ‘블루칩’
  • 이경훈 현장으로’
  • 김광주의 뒤끝
  • 백재호의 레이더
  • 고기정의 特別靑春
  • 슬기로운 지방생활
  • 이상곤의 흐름
  • 서봉대의 되짚기
  • 국제상인 장상인의 세계, 세계인
  • 취재본부는 지금’
  • 조갑제 기자의 최신정보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