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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조선DB |
미국의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은 국무회의 도중 코를 쿨쿨 곤 대통령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그는 최근에 들어와 부동의 인기 1위인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다음으로 인기가 치솟고 있다. 왜 그럴까? 그가 ‘미국인 모두가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아가는 나라 미국’을 만들었고, ‘세계인 모두가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 세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1)
어떤 삶을 살았는가?
로널드 레이건은 1911년 2월 6일 일리노이주 탐피코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알코홀 중독자여서 일자리를 자주 잃고 여기저기 이사 다녔지만 그의 어머니는 그를 상냥하고 도덕적이며 낙관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키웠다. 그는 1931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일리노이주의 한 라디오 방송국 스포츠 해설가로 취직했다. 그는 경기장에서 실제로 경기를 보는 것처럼 분위기를 살려 방송하는 바람에 인기를 얻어 영화배우가 되었다. 그는 영화 <사랑은 방송 중>을 시작으로 1964년에 배우생활을 마칠 때까지 53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레이건은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영화배우조합장으로 일하면서 일류 배우들이 수입의 80% 이상을 세금으로 빼앗기는 것을 보고 분통을 터뜨렸다.2) 그는 조합원들의 단체교섭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조합내 공산주의의 침투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20년 이상 루스벨트를 선전하고 다녔고, 루스벨트가 4선을 하는 데도 일조했다. 그는 1948년 선거에서 민주당의 트루먼을 지지했고, 1950년 캘리포니아 상원의원 선거에서 공화당 리처드 닉슨의 반대편에 섰다. 그러다가 그는 제너럴일렉트릭 대변인이었을 때 진보 성향의 민주당을 버리고 보수 성향의 공화당으로 돌아섰다.
레이건은 1962년에 공화당원으로 등록하여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 닉슨을 지지했다. 그는 1964년에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배리 골드워터를 지지하는 연설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연설에서 레이건은 커져만 가는 미국 정부의 규모와 간섭을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또 미국인과 미국 기업에 대한 과중한 세금을 줄여 미국경제를 살리겠다고 약속했다. 나아가 제국주의적 공산주의는 반드시 해체되어야 하고, 자신이 그 일을 하겠노라고 약속했다. 그 연설 덕분에 레이건은 하루아침에 전국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정치 신인 레이건은 1966년에 3선 경력의 민주당 에드먼드 브라운 캘리포니아 주지사에게 도전하여 압승을 거뒀고, 연임되었다. 이어 그는 대통령에 도전했지만 닉슨과 포드에게 후보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1980년 드디어 기회가 왔다. 레이건은 70세 나이에 다시 한 번 대통령에 도전했다. 권력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16년 전 자신이 국민에게 약속한 정책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그는 현직 대통령 지미 카터를 압도적으로 물리치고 40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재선되었다. 레이건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많은 나이에 대통령에 당선되어(69년 349일) 가장 오래 살다가(93년 119일) 2004년 6월 5일 알츠하이머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로널드 레이건의 비전(1): ‘작은 정부 만들기’
레이건의 비전은 ‘작은 정부 체제에서 미국 국민 모두가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아가는 나라 미국’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1981년 1월 21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미국이 당면한 문제를 이렇게 진단했다―“정부는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정부 자체가 문제입니다.” 뉴딜정책 이후 민주당 존슨 정부의 복지프로그램인 ‘풍요한 사회’를 거쳐 팽창일로를 걸어온 거대한 미국 정부가 국민으로 하여금 국가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레이건의 진단이었다. 의존하는 국민 수가 많을수록 국가는 더 많은 돈을 쓰게 되고, 늘어난 예산을 맞추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을 거두게 되어 궁극적으로 거대한 미국 정부가 개인의 자유와 기업 활동을 방해한다고 그는 믿었다. 또 거대한 미국 정부가 거대한 재정적자를 낳게 된다고 그는 믿었다. 뿐만 아니라 늘어난 통화는 인플레이션을 불러와 물가를 불안하게 만든다고 그는 믿었다. 결국 거대한 미국 정부가 미국경제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라고 그는 믿은 것이다.
레이건은 거대한 미국 정부를 작은 정부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간섭보다는 자유, 집단보다는 개인, 분배보다는 성장, 의존보다는 자치를 강조했다. 레이건은 이것이 바로 미국과 미국인이 추구해야 할 가치관이라고 믿었다. 그는 미국이 이 길을 가게 되면 미국 국민 모두의 자유가 보장되고, 미국이 또다시 번영하는 나라가 되리라고 확신했다. 이러한 미국이 바로 레이건이 제시한 비전이었다. 레이건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1981년 2월 18일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경제계획을 발표했다.
첫째, 그는 1982년도 연방예산 414억 달러 삭감을 요구했다. 삭감의 주 대상은 민주당 존슨 정부의 ‘풍요한 사회’ 건설로 인해 지나치게 확대된 사회복지프로그램이었다.
둘째, 그는 3년 동안 해마다 10%씩 모두 30%의 소득세 삭감과 기업의 투자 활성화를 위한 투자세액공제와 감가상각을 요구했다.
셋째, 그는 기업 활동 활성화를 위해, 기업이윤을 축소시키고 경제성장을 둔화시키는 각종 정부규제 완화 및 철폐를 요구했다.
넷째, 그는 인플레이션과 금리를 안정시키기 위해 통화공급 증가 완화를 요구했다.
레이건은 자신이 제시한 이 같은 경제개혁 프로그램―정부지출 삭감, 감세, 규제 완화 및 철폐, 통화 긴축―을 “미국의 새로운 시작: 경기회복을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불렀다. 레이건의 경제철학은 곧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라는 말로 불리게 되었다. 이를 본 따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대통령들도 ‘노믹스’ 시리즈를 내놓았다.
로널드 레이건의 비전(2): ‘냉전 끝내기’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2002년에 출간된 저서 『국가경영』(Statecraft)3)의 첫 쪽에서 이렇게 썼다―“이 책을 로널드 레이건에게 바친다. 세계는 그에게 너무나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이는 레이건 대통령이 냉전을 종식시켜 세계를 핵전쟁의 위협으로부터 구해낸 것에 대한 감사를 나타낸 표현이다. 대처도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정치세계에 뛰어들면서부터 레이건은 공산주의는 없어져야 할 세력이라고 믿었다. 그는 젊어서 영화배우조합장으로 일할 때 조합내 공산주의의 침투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대통령이 되어 그는 1979년 12월에 벌어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강하게 비판한 후 아프가니스탄을 돕기 시작했다. 그는 공산주의 세력을 꺾기 위해 유럽에 중성자 핵무기를 설치했다. 그가 취한 핵심조치는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전략방어계획(SDI: Strategic Defence Initiative; 날아오는 적의 미사일을 우주공간에서 낚아채는 방어시스템 구축)인 미사일 방어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소련의 장군들과 지도자들로 하여금 미국과 더 이상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어떤 업적을 남겼는가?
작은 정부 실현을 보자. 작은 정부 실현을 위해서는 재정지출과 조세를 삭감해야 한다. 레이건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그렇게 했다. 그 결과 1980년대 이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까지 미국 정부규모(GDP에 대한 정부총지출 비율)는 줄곧 35% 안팎에 머물러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작았다. 이는 1981년 정권을 잡은 후 작은 정부를 실현하려는 레이건 대통령의 비전이 가져온 결과다. 이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세계경제 호황기인 1992년부터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까지 OECD 정부규모 평균치는 1992년 42.4%에서 2007년 39.9%로 2.5%포인트 감소했다. 같은 기간 정부규모가 증가한 나라는 한국을 비롯하여 일본, 룩셈부르크, 포르투갈, 스위스 다섯 나라뿐이고, 한국 외에는 증가폭이 작다. 특히 세계에서 정부규모가 가장 큰 나라인 복지국가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를 보자. 1992~2007년 16년간 정부규모 감소 추세를 보면, 스웨덴은 69.4%에서 51.4%로 18.0%포인트 감소, 노르웨이는 56.1%에서 41.2%로 14.9%포인트 감소, 핀란드는 62.0%에서 47.4%로 14.6%포인트 감소. 이 같은 추세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선진국들은 그동안 작은 정부를 실현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노력해 왔다. 이는 로널드 레이건의 기여다. 레이건은 세계를 개조한 정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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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2012년 7월 14일 처음 공개된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동상(오른쪽)과 요한 바오로 2세 전 교황 동상 앞을 행인들이 지나고 있다. 폴란드인들은 현대사의 두 거인이 공산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며 이들을 존경하고 있다.<조선일보DB> |
세계를 핵전쟁에서 벗어나게 한 전략을 보자. 레이건은 공산주의 세력을 꺾기 위해 미사일 방어 프로그램을 계획했다. 처음에는 소련 지도자들의 분노와 불안이 폭발했지만 점점 변하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미국과의 경쟁을 포기하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레이건은 처음에는 소련과의 정상회담을 거절하다가 곧 능숙한 외교관으로 변신하여 소련의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만났다. 이 회담은 공산주의 붕괴의 서막으로 입증되었다. 레이건이 1987년 베를린에서 고르바초프에게 “이 장벽을 허물어 버리시오”(Tear down this wall) 하고 놀랄만한 요구를 했을 때 사람들은 이를 공허한 희망으로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목표를 향한 레이건의 전략은 적중했다. 동서냉전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1989년 11월 9일 무너졌고, 드디어 자유세계의 적인 소련도 무너지고 말았다. 이 결과 마거릿 대처가 쓴 대로, ‘세계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어 레이건에게 너무나 많은 빚을 지게 된 것이다.’
어떤 평가를 받는가?
레이건은 대통령이 되어 한 가지만 빼고 국민에게 한 약속을 모두 지켰다고 평가받는다. 그 한 가지란 국방비 증액으로 인한 ‘재정적자 미해결’이었다.
레이건은 죽고 없지만 그의 영향력은 미국과 미국인의 마음에 뚜렷이 남아 있다. 레이건이 살아 있을 때인 1998년 미국 사람들은 워싱턴국립공항을 레이건 워싱턴국립공항으로 이름을 바꿨다. 2001년 미 해군은 새로 진수한 항공모함의 이름을 ‘USS 로널드 레이건 호’로 명명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에 이 같은 영광을 준 것은 해군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 걸쳐 많은 연방 빌딩이 레이건과 레이건을 연상시키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레이건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11년, 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 4일을 전후해 레이건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행사를 가졌다. 헝가리 의회는 2011년 6월 28일 회의를 열어 다음날 부다페스트의 미국 대사관 앞 자유의 광장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체코는 프라하에서 2011년 6월 30일 미 대사관 앞거리를 ‘로널드 레이건 거리’로 개명하는 행사를 벌였다. 영국은 2011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맞춰 런던 그로브너 광장에서 레이건의 동상 제막식을 가졌다. 레이건은 세계를 개조한 정치가다.
각주
1) 김형곤, 『로널드 레이건 가장 미국적인 대통령』, 살림, 2007. 박동운(2008), 『CEO 정신을 발휘한 사람들』, 三英社.
2) 1960년대에 미국의 소득세 최고세율은 80%를 넘었다.
3) Thatcher, M.(2002), Statecraft. (김승욱 역(2003), 『국가경영』, 작가정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