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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덩샤오핑의 남순강화(1992년)./ 조선DB |
중국 역사가들은 마오쩌둥(毛澤東)을 ‘파(破)의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을 ‘입(立)의 지도자’라고 부른다. 마오쩌둥은 구질서를 깨뜨려 신중국을 세웠고, 덩샤오핑은 그 위에다 부강한 중국경제를 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정책으로 중국경제를 발전시켜 중국이 1990년대 초반부터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했고, 중국이 머지않아 미국을 제치고 경제대국 G1이 되는 데 견인차(牽引車) 역할을 한 정치가다. 그의 인기는 초고속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경제만큼이나 나날이 치솟고 있다.1)
어떤 삶을 살았는가?
덩샤오핑은 1904년 8월 22일 쓰촨성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초등교육을 마치고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쓰촨성의 충칭(重慶)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일생을 좌우하게 될 근공검학(勤工儉學)을 만나게 된다. 근공검학이란 근면하게 일하고 검약해서 공부한다는 뜻이다. 근공검학은 1차 대전 직후 노동력이 부족한 프랑스와 서구문물을 배우려는 중국 간에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중국이 도입한 제도다. 키 150㎝, 나이 16세의 덩샤오핑은 1920년에 근공검학단의 일원으로 프랑스로 떠났다. 그는 16세부터 22세까지 프랑스에 머물렀다. 프랑스는 전후 재건이 끝나고 노동력이 남아돌게 되자 근공검학단을 푸대접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1926년에 사회주의 혁명의 고향 소련으로 갔다. 그는 그해 소련에서 중국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했고, 소련에서 1년간 머물면서 모스크바 중산(中山)대학에서 공부하다가 1927년에 귀국했다.
귀국 후 덩샤오핑은 공산혁명에 참여하여 10년간 간부로 활동했다. 이 무렵 그는 마오쩌둥 중심의 국내파와 소련 유학파 간의 당권경쟁에 휘말려 투옥되었다. 그의 첫 번째 실각. 실각에서 풀려난 그는 대장정부터 1949년에 사회주의 중국이 건국될 때까지 군인으로서 눈부시게 활동했다. 그가 군대 60만 명을 이끌고 국민당 군대 100만 명과 싸워 승리한 화이하이 전투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이 공로로 그는 서남지방 4개성을 통치하는 당 제1서기에 올랐고, 서남지방의 실질적인 왕으로 군림했다.
문화혁명이 일어났다. 덩샤오핑은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장시성 난창시에서 1969년부터 3년간 야인생활을 했다. 그의 두 번째 실각. 만 65세 나이에 장시성 생산건설병단의 노동자로 하방(下放)당한 그는 트랙터 수리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책을 열심히 읽고, 500여 평의 집 마당을 날마다 40바퀴씩 돌며 체력을 단련했다. 경제가 파탄에 이르자 마오쩌둥이 1973년에 그를 복권시켜 피폐해진 중국을 되살리게 했다. 몇 년 후 그가 실각했을 때마다 도와준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1976년 1월 8일에 사망했다. 베이징 시민들은 천안문광장에 모여 저우언라이의 사망을 애도했다. 사인방(四人幇)2)은 추도회를 제한하고 저우언라이 추모 화환을 치워버렸다. 저우언라이 장례식장에서 조사를 읽은 후 그의 모습은 공식석상에서 사라졌다. 그의 세 번째 실각.
세 번째 실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76년 9월 9일에 마오쩌둥이 죽은 것이다. 이듬해 그는 세 번째로 복권되었다. 그는 1978년에 열린 중국 공산당 11기 3중전회(三中全會)를 통해 권력을 잡았다. 그는 마오쩌둥과 문화혁명에 대한 평가를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는 “천안문 광장에 마오쩌둥 초상화가 영원히 걸려 있을 것”이라는 말로 신중국 건설에 기여한 마오쩌둥의 업적을 인정하고, 자신이 그의 계승자임을 밝혔다.
어떤 비전을 가졌는가?
세 차례 실각 후 정권을 잡은 덩샤오핑은 중국을 가난으로부터 구하는 것이 과제였다. 그는 정권을 잡자마자 “가난이 공산주의는 아니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개혁·개방에 시동을 걸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아랫목이 따뜻해지면 윗목도 자연스럽게 따뜻해진다는 ‘선부론(先富論)’은 그가 추진한 개혁·개방정책의 로고로서 그의 비전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의 비전은 한 마디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공산주의에 시장경제를 덧칠하는 것’이었다.
그는 1970년대 어느 해 자유주의자 하이에크를 찾아가 중국이 굶어죽지 않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하이에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토지를 사유화하십시오.’ 그는 해외에 머무는 동안 프랑스에서는 자본주의를, 소련에서는 사회주의를 경험했다. 이런 배경 탓에 그는 정치는 사회주의, 경제는 자본주의라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1992년에 공산당 정식 강령으로 채택했다. 그는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1978년에 농업부문에서 시장경제를 실험한 후 개혁·개방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해갔다.
<1979년 미국을 방문한 덩샤오핑>
어떤 업적을 쌓았는가?
덩샤오핑이 1978년부터 추진한 네 가지 주요 개혁·개방정책을 요약한다.
➀ 인재 구하기
그는 인재부터 구했다. 덩샤오핑, 주룽지 전 총리, 롱이런으로 구성된 ‘개혁·개방의 삼총사’가 만들어졌다. 개혁·개방을 위해 덩샤오핑은 ‘총설계사’, 주룽지는 ‘집행자’, 롱이런은 ‘전도사’로 나섰다. 롱이런은 공산주의 국가 중국에 화교자본을 유치하는 데 선봉장이 되었다. 화교들은 공산국가 중국에 막대한 자본을 제공했다.
➁ 대내개혁 추진
이어 그는 곧바로 대내개혁을 단행했다. 농업부문부터 자본주의 색깔을 입혀갔다. 그는 종전의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농촌과 도시에 개체호(個體戶)라는 자영업을 도입했다. 개인의 이윤 동기를 자극한 이 정책은 성공했다. 생산성이 크게 오른 것이다. 문화혁명기에 ‘자본주의 찌꺼기’라는 비판을 받았던 개체호가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➂ 대외개방 추진과 특구 설치
이어 그는 개방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 미국, 일본과 수교부터 맺었다. 개혁·개방을 위한 정지작업을 마무리한 그는 개혁·개방의 상징인 특구를 설치했다. 특구설치는 ‘점 개방→선 개방→면 개방→전방위 개방’ 단계로 추진되었다. 전방위 개방을 끝으로 중국 대륙은 완전히 개방되었다.
➃ 해외자본 유치
중국이 개혁·개방을 단행하자 서구 자본은 해외직접투자(FDI) 형태로 중국으로 몰려들었다. 해외직접투자 유입은 개혁·개방이 추진된 1978년부터 쌓이고 쌓여 2013년에는 무려 9,567.9억 달러나 되었다. 이 엄청난 해외자본이 싼 임금, 낮은 토지 임대료와 한 데 어울려 중국을 세계의 생산기지, 세계의 수출본부로 만들었다.
중국경제의 위상
덩샤오핑은 1997년 2월 19일에 죽었는데, 죽기 전에 그는 중국이 경제력에서 50년 내에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 시기는 2045년경이 되지 않을까 추정된다. 그런데 그 시기가 앞당겨지고 있다. 무엇이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일까? 수출이다. 중국 수출은 2000년에 세계 수출의 3.9%를 차지했는데 2013년에는 11.3%로 증가했다. 중국은 2013년에 세계 1위의 수출 국가다. 미국이 2위. 물론 중국은 2013년에 무역규모도 4조1610억 달러로 3조9104억 달러의 미국보다 상당히 앞섰다. 그동안 중국에 유입된 9,567.9억 달러에 이르는 해외직접투자가 수출을 촉진시켜 중국경제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중국경제의 위상을 나타내는 몇 가지 지표를 정리한다.
•수출의 빠른 증가에 힘입어 중국은 1978∼2013년간 연평균 성장률이 9.8%로 세계에서 가장 높고, 또한 세계 역사상 가장 높다.
•고도성장의 결과 중국은 경제규모에서 2002년에 프랑스를 제치고 G5, 2005년에 영국을 제치고 G4, 2006년에 독일을 제치고 G3, 2009년에 일본을 제치고 G2가 되었다. 이런 추세라면 2027년경에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G1이 될 것 같다.3)
•고도성장의 결과 중국경제는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12년에 11.5%로, 22.3%의 미국에 이어 2위다. 중국은 이 비율이 1978년에 겨우 2.3%였다.
•중국은 1978년에 1인당 국민소득이 226달러였는데 2012년에 5,958달러로 증가했다.
덩샤오핑 평가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정책으로 중국을 경제대국의 길로 이끌었다. 그의 인기는 나날이 치솟고 있다. 2014년은 그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로 중국은 그의 출생을 다채로운 행사로 축하했다. 그러한 그도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 천안문 사건 때문이다.
반체제 물리학자 팡리즈가 1989년 1월 6일에 덩샤오핑에게 10년 전에 체포된 웨이징성의 특별사면과 모든 정치범의 석방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자극받아 33명의 젊은 지식인과 국내외 학자 42명이 공개서신에 동참했다. 이 무렵 후야호방이 심장병으로 쓰러져 4월 15일에 세상을 떠났다. 후야호방은 1987년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로 물러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억울하게 숙청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베이징 학생들은 4월 17일부터 후야호방을 애도하는 시위에 들어갔다. 시위는 많은 도시로 번져갔다. 덩샤오핑의 하야와 공산당 타도를 외치는 구호가 등장했다. 천안문 광장에는 수많은 시위대가 몰려들었다. 덩샤오핑의 입장은 단호했다.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정치적 안정이 중요하기 때문에 공산당 일당독재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문화혁명 때 홍위병에게 봉변을 당했었고, 그의 큰 아들은 홍위병의 고문을 견디다 못해 투신해 반신불수까지 되었었다. 덩샤오핑은 무력진압을 명령했다. 이로 인해 그는 서방세계와 중국 민주화 그룹으로부터 마오쩌둥보다 더 심한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천안문 사태는 아직도 중국의 민주화 불씨로 남아 있다.
한편 덩샤오핑의 소박한 삶과 유언은 오래오래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 그는 자식들에게 유산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그는 자식들에게 “내가 죽은 후에 너희들은 자신의 능력에 의지해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문선(文選) 세 권의 저작권료 100만 위안을 교육 사업에 기부했다. 그는 사후에 자신의 기념관을 세우지 말고, 동상도 만들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의 동상은 고향 쓰촨성 외에는 없다고 한다. 그는 나무를 많이 심으라고 당부했다. 그는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넌센스’라며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라고 유언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유언에 따라 각막과 장기는 기증하고, 유체(遺體)는 중국 301병원에 해부 연구용으로 내놓았다. 그는 화장되었고, 유골은 바다에 뿌려졌다. 일세를 풍미한 영웅치고는 소박하기 그지없는 마지막이었다.
각주
1) 박형기(2007), 『덩샤오핑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살림. 박동운(2008), 『CEO 정신을 발휘한 사람들』, 三英社.
2) 4인방은 다음과 같다―장칭(강청: 마오쩌둥 부인·중앙문혁소조 부조장·중앙정치국 위원), 장춘차오(장춘교: 부총리·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야오원위안(요문원: 중앙정치국 위원), 왕훙원(왕홍문: 당 부주석·중앙정치국 상무위원).
3) 박동운(2012), 『좋은 정책이 좋은 나라를 만든다!』, FKI미디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