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베풂의 미학 ④: 잘나가던 철강 사업을 접고 자선사업에 뛰어든 앤드루 카네기
  • 박동운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 교수
  • 업데이트 2014-08-01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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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

앤드루 카네기, 도서관·연구소·국제평화재단·상·대학 등의 설립에 베풀다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는 1901년에 4억8000만 달러를 손에 쥔 세계 최고의 부자였을 때, 그 해부터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17년 동안 전 재산의 90% 정도를 사회에 환원한 자선사업가다.
그는 열두 살 때 부모를 따라 스코틀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하자마자 먹고살기 위해 주급(週給) 1달러 20센트를 받고 일을 시작한 후 철강 사업에 성공하여 66세 때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그는 35세 때 자선사업을 계획했다가 66세 때에야 이를 실행에 옮겼다.
그는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The man who dies thus rich dies disgraced.)며 잘나가던 철강 회사를 처분한 후 평생 동안 쌓아올린 부를 도서관·연구소·국제평화재단·상·대학 등 설립에 아낌없이 베풀었다. 그는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베푼 사람이다.

앤드루 카네기는 누구인가?

앤드류 카네기는 1835년 스코틀랜드 던펌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대기업의 하청을 받아 사업을 하는 수공업 직조업자(織造業者)였는데,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된 직조기가 1847년 던펌린에 들어오자 하루아침에 가난뱅이가 되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되자 두 어린 아들의 장래를 위해 1848년 뱃삯 20파운드를 빌려 친척이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앤드루 카네기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12살의 나이에 주급 1달러 20센트를 받고 지하실에서 실 감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는 첫 주급을 받았을 때의 감회를 훗날 이렇게 썼다.

“나는 주급으로 1달러 20센트를 받았는데 그 때 나는 겨우 열두 살이었다. 내가 첫 주급을 받았을 때 나는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이루 말할 수 없다. 내가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었기 때문에 내 스스로 일해서 벌어들인 1달러 20센트! …부모님을 도울 수 있다니! …그 후로 수백만 달러가 내 손을 거쳐 갔다. 그러나 1달러 20센트로부터 얻은 그 순수한 기쁨은 후에 돈으로부터 얻은 어떤 기쁨보다도 더 컸다.”1)

앤드루 카네기는 철강 사업으로 돈을 벌었다. 그의 사업 내용을 개관한다.
 
•1848년 실 제조공장으로 옮겨 증기기관과 보일러를 돌보고 주급 2달러를 받았다.
•1850년 전신국에 취직하여 주급 2달러 50센트를 받았다. 능력을 인정받아 전신기사로 승진하여 월급 25달러를 받았다.
•1853년 새로운 통신기술을 사용한 덕분에 펜실바니아 철도회사 서부 지부 감독 토머스 스콧의 개인비서 겸 전신기사로 발탁되어 월급 35달러를 받았다.
•1856년 지역 은행가로부터 217달러 50센트를 빌려 우드러프 침대차 회사에 투자하여 2년 뒤부터 매년 5,000달러의 배당금을 받았다.
•1859년 펜실바니아 철도회사 피츠버그 지부 감독이 되어 연봉 1,500달러를 받았다.
•1861년 남북전쟁 때 북군을 위해 철도와 전신선을 연결하는 작업을 했다.
•1863년 철로 다리를 만들 것을 목표로 동업자들과 키스톤 교량회사를 세웠다.
•1864년 피츠버그에서 레일 제조회사를 세웠다.
•1865년 철도회사를 끝으로 월급쟁이 생활을 마감한 후 사업을 시작했다.
•1867년 유니언 제철소를 세웠다.
•1870년 선철 제조를 위해 루시 용광로를 세웠다.
•1875년 펜실바니아주 브래독에 최초의 강철 공장인 에드거 톰슨 공장을 세웠다.
•1886년 경쟁업체인 홈스테드 제강소를 사들였다.
•1887년 35세 때부터 사귀어 온 루이스 휫필드(38세)와 52세에 결혼했다.
•1892년 카네기 철강회사를 설립하여 곧 카네기 회사로 개칭했다.
•1899년 제강소 몇 군데를 합쳐 카네기 제강소를 설립했다.
•1901년 66세 때 자선사업을 하기 위해 잘나가던 철강 회사를 4억8000만 달러를 받고 J. P. 모건에 팔았다. 이로써 카네기는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자선사업가를 꿈꾸다
 
앤드루 카네기는 1868년 35세 때, 은퇴 후 연 수입 5만 달러로 생활하고 남은 돈은 자선사업에 쓴다는 계획을 편지로 써서 자신에게 부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사업에 쫓겼다. 그러다가 그는 1887년 54세 때 「부의 복음」이라는 글을 썼다. 이 글에서 그는 가난한 이민 소년이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고백했다. 이 글에서 그는 부자가 부를 어떻게 처분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깊이 생각했다. 그는 바람직한 부의 처분 방법으로 공공도서관, 병원, 공원, 오락시설, 수영장, 교회, 대학 등의 설립을 고려했다.

앤드루 카네기는 1901년 66세가 되던 해에 35세 때 계획했던 자선사업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부의 복음」 출간 후 나는 부를 축적하려는 노력을 그만두고 이 책의 가르침에 따라 살기로 결심했다. 부의 현명한 분배라는 훨씬 더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에 뛰어든 것이다. 회사 수익은 연간 4,000만 달러에 달했다. …. 후계자인 US 스틸 사는 우리 회사를 매입한 후 곧 연간 6,000만 달러의 순수익을 올렸다. 만약 우리가 사업을 계속하여 예정했던 대로 공장을 확장했더라면 그 해에 7,000만 달러를 벌어들였을 것이다.”2)

어떻게 베풀었는가?

대표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앤드루 카네기가 어떻게 베풀었는가를 정리한다.

•1881년 그는 맨 먼저 고향 스코틀랜드의 던펌린에 도서관을 기증했다. 그는 아버지가 고향 던펌린에서 얼마 안 되는 장서를 모아 불우한 이웃들에게 열람할 수 있도록 최초의 도서관을 세웠다는 것을 평생 자랑으로 여겼다. 또 그는 전보배달 소년으로 일할 때 토머스 스콧 감독이 400여 권의 장서를 자신 같이 불우한 소년들에게 개방한 것을 큰 은혜로 여겼다.
•1900년 카네기가 출연한 100만 달러와 피츠버그시가 기증한 토지를 기금으로 Carnegie Technical Schools가 설립되었는데, 그 후 몇 단계를 거쳐 1967년 Carnegie Mellon University가 탄생했다.
•1901년 525만 달러를 출연하여 뉴욕 시에 68개의 공공도서관과 분관을 세웠다. 얼마 후 브루클린 지역에 20개의 분관을 더 세웠다. 그는 평생 모두 2,507개의 도서관을 세웠는데, 무료 공공도서관을 ‘대중대학(people’s university)’이라고 생각했다.
•1902년 1,000만 달러를 출연하여 워싱턴에 카네기협회를 만들었다. 미국 대학의 연구 지원을 위해 출범한 이 기구는 1904년 의회의 의결을 거쳐 법인으로 발족했다.
•1902년 피츠버그 탄광 사고를 계기로 500만 달러를 출연하여 “동료를 구하려고 영웅적인 행동을 한 사람들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영웅기금을 조성했다.
•1905년 1,500만 달러로 대학 교수들의 노후를 위한 카네기교육진흥재단을 세웠다.
•1910년 평화를 위한 기금을 조성하여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을 설립했다.
•1911년 남은 돈 1억2500만 달러로 카네기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대학과 전문대학, 기술학교, 학문적인 목적의 연구·조사에 연구비를 지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로써 카네기는 1919년에 죽기 전 3억1100만 달러를 사회에 환원했다(필자 주: 이 액수는 『부의 복음』 편집자의 글을 인용한 것임).
 
자선사업가 앤드루 카네기는 자유시장경제의 산물

‘베풂’은 자유시장경제의 산물이다. 앤드루 카네기도 이를 입증한다. 먼저 그의 개인적인 특성을 정리한다.

•그는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잠시도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세상에는 카네기만큼 노력하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다.
•그는 쉬지 않고 저축했다. 그는 항상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지 않도록 돈을 관리했고, 나머지는 저축했다. 이런 사람들도 세상에는 수없이 많다.
•그는 저축한 돈으로 열심히 투자했다. 그는 철도회사 스콧 감독의 권유로 집을 담보로 500달러를 빌려 애덤스 익스프레스 주식을 샀다. 그는 10달러의 배당금을 받고나서 “내가 땀 흘리지 않고 자본을 통해 벌어들인 최초의 수입이었다. 나는 ‘유레카(eureka)3)! 여기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있다!’고 외쳤다”고 썼다. 투자를 통해 돈 번 사람들도 세상에는 수없이 많다. 
•그는 운이 좋았다. 그는 철도회사 직원이었을 때 침대차를 발명한 우드러프를 우연히 만나 지역 은행가의 도움으로 217달러 50센트를 빌려 침대차에 투자했다. 이로부터 그는 큰  돈을 벌었다. 운이 좋아 돈을 많이 번 사람들도 세상에는 수없이 많다.
•그는 돈 관리에 철저했다. 그는 한 번만 그렇게 했을 뿐 투기 목적으로 주식을 사거나 팔아본 적이 없다. 이런 사람들도 세상에는 수없이 많다.
•그는 목재 대신 처음으로 철로 튼튼한 교량을 만들기로 하고 키스톤 교량회사를 설립했다. 기업가정신을 발휘한 경우다. 이런 경우도 세상에는 수없이 많다.

이 같은 개인적인 특성 외에 앤드루 카네기가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활동했던 1880년대 전후 미국이 자유기업, 경쟁, 자유방임이 바탕이 된 자유시장경제였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나 성공하면 이익을 얻고, 실패하면 손해를 보고, 가문이나 종교나 국적이 아닌 성과만이 시금석인 시대’를 산 것이다. 실제로 그는 자유시장경제를 예찬했다. 그는 자유시장경제의 핵심 원리인 ‘경쟁’을 이렇게 묘사했다.

“사회가 경쟁의 법칙에 지불하는 가격은 … 크다. 그러나 생활환경을 개선한 놀랄만한 물질적 발전은 경쟁의 법칙이 가져온 것이기 때문에 이 법칙의 이익은 그 비용보다도 훨씬 더 크다. 경쟁이 자비롭건 자비롭지 않건, 우리는 경쟁에 관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경쟁은 바로 여기에 있고, 피할 수 없고, 대체재(代替財)를 발견할 수 없고, 개인에게는 가끔 가혹하지만 어디에서나 적자생존(適者生存)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인류를 위해 가장 좋다는 점이다.”4)      
 
각주
 
1) Carnegie, Andrew(1900), The Gospel of Wealth and other Timely Essays, ed., by Edward C. Kirkland, The Belknap Press of Havard University Press, 1962.
2) Carnegie, Andrew(1920), The Autobiography of Andrew Carnegie, Houghton Mifflin  Company. (박상은 역, 『강철왕 카네기 자서전 성공한 CEO에서 위대한 인간으로』, 21세기 북스, 2005.)
3) 이는 그리스어로, I have found it!(알았다!, 됐다!)이라는 뜻이다. 아르키메데스가 왕관의 금의 순도를 재는 방법을 발견했을 때 지른 소리라고 한다.  
4) 주 1)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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