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로 온 국민들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에다 참사의 원인을 제공한 유병언씨 일가의 도피로 온 국민들은 분노를 억누르기 어려웠다. 필자의 경우, 두 달 남짓 글 한 줄 쓸 수 없었다. 세월호 참사 두 달이 지난 6월 15일 현재 ‘세월호 안전성금’이 1,016억 원(개인 113억 원, 기업 903억 원)이나 모여 국민들은 흐뭇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세월호 침몰 사고의 피해자 보상과 수습비용이 6,000억 원 이상이 되리라고 하는데, 안전성금 1,016억 원은 적은 액수가 아니다. 이는 대한민국이 온정이 넘쳐나는 나라임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 수 없다. 이를 계기로 필자는 멈췄던 손을 다시 자판기로 옮겨 <베풂의 미학>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진정한 베풂이란 어떤 것인가?, 무엇이 베풂의 기반인가?, 누가 베풀었는가?’를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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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 엥겔스의 후계자로 러시아 공산당 및 소비에트 연방국가를 창설한 레린. 1919년 5월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연설하는 레닌의 모습. / 조선DB |
기독교는 ‘자발적’ 베풂을 강조
누가 뭐라고 말해도 베풂의 원조는 기독교다. 기독교는 출발부터 베풂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여 년 동안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에 광야에서 일어난 일이다. 지도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각자의 소유 가운데서 주님께 바칠 예물을 가져 오십시오. 바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주님께 예물을 바치십시오. 곧 금과 은과 동과, … 그 밖의 보석들입니다.” (출애굽기 35:5-9)
이는 3,450여 년 전에 모세가 하나님의 성막(聖幕)을 짓는 데 필요한 자재를 헌납받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한 내용이다. 모세의 말 가운데 관심을 끄는 것은 “바치고 싶은 사람은 …”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하나님을 위한 헌납의 경우에도 ‘자발적’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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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십계'에서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있다. |
공산주의가 기독교와 비슷하다고?
공산주의를 기독교와 비슷하게 보는 목사들이 있다. 그 근거는 신약성경 사도행전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었다.”(행 2:44-45)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행 4:32-35)
인용은 기독교 초기 교회의 탄생 과정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초기 교회의 공동체 형성 과정에서는 공유(公有)와 공용(公用)이 바탕이 되었다.
그런데 앞의 두 인용을 살펴보면, 이는 칼 마르크스 사상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주창(主唱)했다―“능력 있는 사람으로부터,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to each according to his needs, from each according to his ability). 이 말은 곧, ‘능력 있는 사람들로부터 빼앗아서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눠 준다’는 뜻이다. 이런 논리로 마르크스는 ‘공유(公有), 공용(公用), 공산(共産), 평등분배’를 내세워 공산주의를 주창했다. (성경에서는 공동 생산을 뜻하는 공산(共産)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공산주의를 기독교와 비슷하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
기독교의 베풂은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
그러나 기독교는 마르크스의 주창과는 다르게 가르친다.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낼 구제금을 마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롬 15:26-27)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하고,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서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고후 9:7)
기독교는 남을 위한 베풂은 ‘바치고 싶은 마음’과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는 베풂과 관련하여 흔히 언급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즈(noblesse oblige)’와는 거리가 멀다. ‘사다리 꼭대기에 오른 사람의 의무’라는 뜻을 가진 ‘노블레스 오블리즈’는 평등주의를 실현하려는 공산주의처럼 ‘강요된 베풂’의 성격을 띄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남을 위한 베풂은 ‘강요된 베풂’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는’ ‘자발적 베풂’이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강요를 바탕으로 평등주의를 실현하려는 공산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성경에는 ‘굶어죽는 사람’ 이야기가 없다
죽음 가운데 가장 비참한 죽음은 ‘굶어죽는 죽음’이라고 한다. 뼈만 앙상한 채 곧 목숨이 끊어질 것 같은 아프리카 어린이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죽음에 이르는 가난은 찾아볼 수 없다. 왜 그럴까? 기독교는 베풂, 자발적 베풂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가장 가난한 계층인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라고 여기저기서 가르친다. 두 가지 내용을 인용한다.
“당신들이 사는 성 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십시오.”(신 14:29)
“당신들이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곡식 한 묶음을 잊어버리고 왔거든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가지 마십시오. 그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에게 돌아갈 몫입니다.”(신 24:19)
기독교의 가르침이 이럴진대 성경에 못 먹어 굶어죽는 사람 이야기가 있을 턱이 있겠는가!
기독교의 ‘베풂 정신’이 복지정책을 불러와
기독교의 ‘자발적 베풂’이 복지정책을 불러왔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영국에서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라 9세기경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최일도 목사의 밥퍼운동’ 같은 구빈(救貧)운동이 교구 중심으로 일어나 수 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그런데 기독교의 구빈운동은 근로 능력이 있는 사람들조차 거지로 만들어 베풂의 대상이 되게 했다. 이 결과 구빈운동은 14세기에 들어와 구빈법(救貧法, The Poor Law) 제정으로 이어졌다. 구빈법은 각 지방의 교구 내에서 그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되, 근로 능력이 있는 거지를 징벌하려는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그 후 19세기 초에 이르러 경제·사회 여건 변화로 빈민층이 급격히 증가하자 영국은 1834년에 신(新)구빈법을 제정했다. 신구빈법의 취지는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근로를 통해 생활을 영위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1870년대 후반에 불황으로 실업이 급증하고, 1880년대에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이 대두하자 영국은 새로운 각도에서 빈곤문제를 바라보게 되었다. 이 결과 구빈법은 1929년에 폐지되었고, 1944년에 베버리지 경의 권고에 따라 기존 제도를 모두 흡수한 포괄적인 복지정책 곧, ‘국민보험법’이 제정되었다. 이로 인해 영국은 오래 동안 ‘영국병’에 시달렸다.
어떻든 세계 최초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복지정책은 ‘고아와 과부를 도우라’는 성경 말씀에 그 뿌리가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