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長崎) 역에서 육교를 건너 비탈길을 오르면 역사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조그마한 공원을 만날 수 있다. 다름 아닌 일본 26성인(聖人)의 순교지다. 이곳은 자신의 종교와 관련이 없더라도, 우매(愚昧)한 권력자의 폭거(暴擧)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눈물겨운 발자취를 인지할 수 있어 한 번쯤은 가볼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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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 프로이스' 선교사의 기념비 |
실제로 일본에 기독교를 처음 전파(1549년)한 사람은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o de Xavier, 1506-1552)'이다. 그는 1550年 8월에 나가사키의 히라도(平戸)에 들어가서 선교활동을 했다. 아무튼, 일본의 기독교는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신부들의 추방령이 내려졌고, 1597년 2월 5일 마침내 대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命)에 의해 바로 이곳 나가사키(長崎)의 '니시자카(西坂)' 언덕에서 가톨릭신부·신도 등 26명이 무참하게 처형됐던 것이다. '히데요시(秀吉)'는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한 일 외에도, 신앙을 이유로 '처형의 명(命)'을 내린 '일본 최초의 권력자'라는 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42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오늘날도 그 불명예를 씻지 못한 채 여전히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받고 있다. 그래서 역사는 무서운 것이다.
오사카(大阪)·교토(京都) 등지에서 붙잡혀
이 26성인(聖人)은 일본인이 압도적으로 많은 20명, 스페인인이 4명, 포르투갈과 맥시코인 각 1명이다. 일본인 성인에는 12살, 13살, 14살의 어린이가 3명이나 들어 있다. 최초 24명은 이미 교토(京都)와 호리가와(堀川) 거리(通)에서 왼쪽 귀불이 잘린 상태였다. '히데요시(秀吉)'는 당초 이들의 코와 귀를 베라고 했으나, 부하들의 배려로 귀불만 잘린 것이다. 이들이 처형당하기 위해 나가사키로 오는 과정도 험난했다. 오사카(大阪)·교토(京都)를 출발해서 나가사키(長崎)까지 도보로 1,000km를 끌려왔던 것이다. 그들을 돕기 위해 따라오던 '베드로'와 '프란시스코'가 체포돼 24명과 합류하는 불운을 당했다.
| 26성인 '나가사키에의 길'에 대한 설명문 |
처형장은 나가사키(長崎)의 '니시자카(西坂)' 언덕- 그날따라 안개가 자욱했다. 사람들의 마음도 안개 속에서 앞을 가늠하지 못했다. '히데요시(秀吉)'의 수하들은 나가사키 시민들의 동요(動搖)가 두려워 외출금지 명령까지 내렸다. 그러나, 힘의 논리는 한계가 있었다. 4,000명이 넘는 군중이 몰려들어 순교자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특히, 전설처럼 들리는 '루도비코 이바라기'의 마지막 모습이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내 십자가는 어디에 있나요?"
2명의 숙부와 함께 순교한 '루도비코 이바라기'는 '자신의 몸을 의탁할 십자가는 어디에 있느냐?'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향해 뛰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철부지 소년의 행동 그대로다. '이바라기'는 십자가에 묶인 후에도 몸과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천국(天國), 예수, 마리아"라고 말하면서 기뻐했다는 것이다(나가사키의 길).
가톨릭교도(敎徒)의 공식 순례지
| 26성인의 조각상 |
후일 이들의 유해는 많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수습돼 '일본 최초의 순교자'라는 이름하에 세계 곳곳으로 보내졌고, '루이스 프로이스(Luis Prois)' 신부 등이 로마 교황청에 보고해 1862년 6월 8일 로마 교황청의 '비오(Pius) 9세'에 의해서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이어서 1950년, 로마 교황청 '비오(Pius) 12세'는 가톨릭교도(敎徒)의 공식 순례지로 지정했다.
수 백 년이 흐른 1981년 2월 26일 오후 3시 20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는 이곳 순교지(殉敎地)를 방문했다. 그날은 전 날부터 내린 눈으로 '니시자카(西坂)' 공원은 온통 하얀 눈(雪)으로 뒤덮인 은세계(銀世界)였다. 교황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깊은 기도를 했다. 기도를 마친 다음 교황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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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 순례지' 기념석 |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 니라'의 요한복음 12장 24절의 말씀처럼, 26성인은 죽음을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 다. 이 언덕에서 성인(聖人)들은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나가사키의 길).
그렇다. 26성인은 결코 죽지 않았다. 420년 전의 어둡던 시절에 이미 세계인을 향해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드높이 외쳤다. 이들의 염원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높이 5.6m, 폭 17m의 조각품도 세워졌다.
이 조각품은 성인 추대 100년을 기념하는 날 26성인 기념관과 함께 세워진 기념비다. 기념관의 설계자는 와세다 대학 출신의 건축가 '이마이 켄지(今井兼次, 1895-1897)'씨였고, 기념상은 도쿄예술대학교 출신의 세계적인 조각가 '후나코시 야스다케(舟越保武, 1912-2002)'씨가 4년 반에 걸쳐서 완성했다.
조각품에 새겨진 다리를 들고 수직으로 서있는 성인들의 모습은 '다 같이 찬송가를 부르며 승천(昇天)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했다. 조각품의 26성인들이 모두 정장(正裝)을 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남루한 복장의 초라한 모습이었고, 왼쪽 귀불이 잘린 상태로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 마르코 제8장 34절의 성경말씀 |
이 기념비에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성경말씀(마르코 제8장 34절)이 오롯이 새겨져 있다.
빈센트 권을 찾아서...
필자와 전남대 역사탐방팀(단장: 황상석 박사)은 26성인 기념관에 들어가 '빈센트 권(Vicent Caun)'의 기록을 찾았으나, 한국인 순교자 명단 리스트만 받았을 뿐 아무런 소득도 올리지 못했다. 물론, 시간이 짧았던 탓도 있었다. 기념관에서 한국인 수녀님들과 잠시 마주쳤으나 말을 걸 기회를 포착하지 못해 '옷깃을 스치는 인연'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기록에 의하면 '빈센트 권'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붙잡혔다. 그런데, 그를 일본으로 데려간 사람은 스페인 신부 '세스페데스(Gregorio de Céspedes, 1551-1611)'다. 그는 천주교도였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의 요청으로 임진왜란 때 조선에 들어왔다. 기록상으로 조선을 최초로 방문한 서양인이다.
'세스페데스(Céspedes)' 신부를 따라 일본에 간 '빈센트 권'은 신학교에 입학해 선교사 수업을 받았다. 당시 일본에는 나가사키에서 1593년 3백여 명이, 1594년에는 2천명 이상의 조선인이 세례를 받았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이 돈을 모아 나가사키에 '성 로렌조'라는 이름의 조선인 성당을 건립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은 조선포로라는 비참한 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일본을 천하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도 1612년 기리스탄 금지령을 발표한 이후 지속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했다.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일본에서 포교에 매진하던 '빈센트 권'은 나가사키 시마바라(島原)에서 체포돼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니시사카(西坂) 언덕에서 46세의 나이로 화형 당했다. 1626년 6월 20일의 일이다(KBS의 역사 스페셜).
천주교인이 된 조선인 포로들
필자는 이러한 내용을 뒷받침하는 사실을 하나 찾았다. '26성인 기념관 홈페이지'에 들어 있는 '파시오(Pasio)' 신부의 '규슈 지역 조선인에 관한 편지(1594년 10월 20일자)'이다. 편지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규슈(九州)지방에는 많은 조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본인과 치른 전쟁(임진왜란)에서 일본인에 의해 포로가 된 것입니다. 조선인은 사려가 깊고 우리의 성스러운 신앙을 받아들일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므로 관구장 '페드로 고메스'께서는 중국인이 사용하는 것과 동일하며, 일본에서도 사용되는 그들의 언어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을 찾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일본어를 습득한 후에 가톨릭 교리를 잘 배우고, 그들의 언어로 그것을 요약하며 기도문을 조선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로 인해 조선인이 가톨릭 교리를 쉽게 습득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올해 2천명이상의 조선인이 세례를 받을 정도로 대단한 수확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이해력이 높고 하느님과 우리의 성스런 신앙에 대해 즐거이 들으며, 이해하기 어려운 점과 의문점을 제시합니다. 그 결과 조선인에게 가톨릭 교리를 가르칠 때 참가하는 일본인들이 "조선인이 우리의 성스런 신앙을 받아들일 때, 일본인에게 어떤 점에서도 뒤지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그들은 실로 대단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으며, 의문점과 질문이 나오고 그들이 그 의문을 해결하는 것에 대해 칭찬하고 있습니다.>
| 26성인 조각상을 찾는 일본 학생들과 전남대 역사탐방팀의 일부 |
원폭(原爆)의 도시 나가사키(長崎)는 참으로 많은 사연과 문화와 역사를 안고 있는 곳이다. 일행들과 함께 니시자카(西坂) 26성인 기념상을 내려오려는 순간, 많은 일본 학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몇 몇 학생들은 "내 십자가는 어디에 있나요?"를 되뇌며, 12세의 성인 '루도비코 이바라기'의 조각상(像)에 카메라의 렌즈를 맞추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