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福)을 긁어모으는 갈퀴

  •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 업데이트 2009-01-05  12:55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새해 새아침에 신사(神社)를 찾은 일본인이 9,800여 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일본 국민 모두가 신사를 찾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유인즉, 어려운 경제 상황에 처한 현실을 신(神)의 힘을 빌어 돌파구를 찾아보자는 심리가 알게 모르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처럼 새해 첫날 아침 신사(神社)나 절에 가서 참배하는 관습적인 행사를 일본에서는 하츠모우데(初詣)라고 한다. 하츠모우데(初詣)란 어떻게 유래된 것일까?


일본에는 예로부터 '도시코모리(年蘢り)'라는 말이 있었다. 이는 섣달 그믐날 밤부터 설날 아침까지 신사나 절에 묵으면서 기도를 하는 것을 말한다. 기도는 한 집안의 가장이 했고, 이때의 신은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모시는 조상신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도시코모리(年蘢り)'는 섣달그믐날(大晦日: 오오미소카)의 '죠야모우데(除夜詣)'와 설날아침의 '간지츠모우데(元日詣)'로 분리되었었는데, 훗날 '간지츠모우데(元日詣)'에 어원을 둔 하츠모우데(初詣)'가 탄생하게 되었다.

일본은 신사(神社)의 나라


그렇다면 새해에 하츠모우데(初詣)를 하면서 한 해를 열어가는 일본인과 신사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한양대 일본언어문화학부 박규태 교수는 일본인의 신사 참배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했다.


<일본인들은 '하츠모우데(初詣)'라 해서 정초에 신사를 참배하면서 한 해의 시작을 기념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또한 '세츠분(節分)'이라 불리는 입춘 전날에도 액풀이를 위해 신사를 참배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은 인생의 중요한 매듭마다 신사를 참배합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일정기간이 지난 다음 모친과 조모가 아기를 안고 신사를 참배하여 건강한 발육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이를 '오미야마이리(御宮參)'라 합니다.>


이어서 박규태 교수는 '일본은 곧 신사(神社)의 나라다'고 단정 지었다. 일본 전국적으로 12만 개의 신사가 있는데, 신사는 곧 일본인의 의식 속에 살아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신사는 마츠리(祭)라 불리는 신도적 축제의 중심공간으로 기능해 왔습니다. 마츠리(祭)의 나라 일본을 신사(神社)의 나라라고 바꾸어 말해도 좋을 듯싶습니다.>
이처럼 일본인과 신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상의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운명이라는 갈퀴, 그리고 구마데(熊手)


"운명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사람 자신이 운명을 무겁게 짊어지기도 하고, 가볍게 짊어지기도 할 뿐이다. 운명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약한 것이다. 내가 약하면 운명은 그만큼 무거워 진다. 비겁한 자는 운명이라는 갈퀴에 걸리고 만다." 고대 로마제정기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의 말이다. 그의 말대로 오늘날의 인간들은 비겁(?)하게도 무거운 운명이라는 고난의 갈퀴에 걸리고 말았다.


갈퀴를 일본에서는 구마데(熊手)라고 한다. 구마데(熊手)는 대쪽 끝을 갈고리 모양으로 구부려서 부채 살처럼 펼친 후 자루를 붙여서 만든 농기구를 말한다. 우리의 농촌에서도 거의 사용되지 않는 갈퀴가 일본에서는 복을 불러 모으는 도구로 쓰인다고 한다. 일본의 농촌에서도 이러한 구마데(熊手)가 사용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구마데(熊手)는 어디에 쓰일까?
매년 11월 닭날(酉日)에 '오오도리신사(驚神社)'의 제례 때 서는 장이 있는데, 이때에 복을 긁어모은다는 갈퀴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의 물건이 팔린다고 한다.


"아니, 아직 이것도 모르시다니! 십일월에 있는 닭날(酉日)에 오오도리신사로 사람들이 다투어 짊어지고 갈 갈퀴(熊手)를 만드는 준비를 하는 것이오. 알겠소?"
 
메이지 시대의 여류 작가 히구치 이치요(樋口奈津, 1872-1896)의 소설. '해질 무렵 무라사키'에 나오는 갈퀴(熊手) 이야기다.


일본의 요미우리(讀賣) 신문은 '신년을 앞두고 전국 유수의 산지인 나라시(奈良市)의 한 협동조합에는 갈퀴(熊手)를 사려는 사람들의 주문이 쇄도했다'고 보도(12/18)했다. 개당 2,000엔-5,000엔에 팔리는 이 갈퀴(熊手)는 신년을 맞아 맨션 등에 장식을 하는 행운을 비는 엔기모노(緣起物)이다. 오뚝이, 손짓하는 고양이 인형, 복을 긁어모으는 갈퀴 등이 바로 엔기모노(緣起物)에 해당된다.


나라긴키 에비스협동조합 이사장인 사카카미 마사카즈(坂上雅一)씨는 "경기가 어려운 상황이지만, 어두운 뉴스는 이제 사양합니다. 갈퀴(熊手)로 복을 긁어모아야-"면서 조합원들이 만든 엔기모노(緣起物)를 홍보했다. (요미우리신문)

국가의 번창과 쇠퇴


얼마 전 주간조선에서 '용하다'는 역술인들을 찾아가 국운을 점쳤다고 한다. 오죽 답답했으면 정책 책임자들을 찾아 인터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역술인들에게 물었을까? 이 보도에 의하면 한 역술인은 "기축년(己丑年)은 화개(華蓋)의 운세다"고 했다. '화려(華)함을 덮는(蓋) 운으로 경기 침체가 심화될 것'이라는 말이다. 유명 역술인들의 의견을 종합한 분석도 그럴듯하다. "경제 응급/ 부동산·증시 꽁꽁/ 남북관계 경색"이다.


'고단한 세월 잠시 쉬어가는 기분으로 읽어 보시라'는 기사이었지만, 필자는 참으로 무거운 기분으로 읽었다. 부동산 시장과 증권시장이 일 년 내내 꽁꽁 얼어붙는다면, 산소 호흡기를 떼어야 할 기업과 개인이 봇물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신(神)에게 매달려보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을까?

새해의 일출을 보면서 소원을 빌기 위해 동해안으로 모인 인파가 예년보다 많은 수 백 만 명이었다는 것도 이해가 간다. 이들은 떠오르는 태양과 바다를 향해 목이 터져라 외쳤을 것이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유치환 선생의 '그리움'이라는 시다. 이 시구(詩句) 속에는 사랑의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애절하게 담겨 있지만, 국민들의 한 숨 섞인 목소리도 녹아 있을 법하다.


독일의 모룽겐(Morungen)이라는 작은 마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헤르더(J. G. Herder, 1744-1803)는 18세 때 칸트의 강의를 듣고 지리학·인류학·비판적 연구에 흥미를 가졌다고 한다. 훗날 그는 문학뿐만 아니라 독일의 철학사상과 정치사상, 동유럽의 국민성 발전에 이르기까지 크게 영향력을 미쳤다. 그가 쓴 '인류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념'이라는 저서에 새해를 맞아 되새겨 볼만한 구절이 있다.


"국가는 번창하고 쇠퇴한다. 그러나 쇠퇴한 국가는 더 아름다운 꽃은커녕 새로운 꽃조차 피우지 못한다. 문명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완벽해지지는 않는다."


지난 역사를 밟고 넘으며 호언장담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인간들의 무력함에 대한 일갈(一喝)이다. 그의 말대로 많은 국가가 번창과 쇠퇴를 되풀이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지금 번창과 쇠퇴 중 어느 쪽일까? 요즈음의 상황으로 미루어보면 후자인 듯싶다. 이러다가는 아름다운 꽃은 고사하고 하찮은 꽃 한 송이도 피우지 못할 것 같다.


기축년(己丑年) 새해가 밝았으나 어두운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 복(福)을 긁어모은다는 갈퀴라도 내걸어야 할 판이다.

  • 스크랩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많이 본 뉴스
  • 세계속 코이카'
  • 배진영의 '어제 오늘 내일'
  • 김태완 'Stand Up Daddy'
  • 권세진 ‘별별이슈’
  • 정혜연 ‘세상 속으로’
  • 박희석 ‘시시비비’
  • 이정현 ‘블루오션을 찾아서’
  • 박지현 ‘포켓 저널리즘’
  • 하주희 ‘블루칩’
  • 이경훈 현장으로’
  • 김광주의 뒤끝
  • 백재호의 레이더
  • 고기정의 特別靑春
  • 슬기로운 지방생활
  • 이상곤의 흐름
  • 서봉대의 되짚기
  • 국제상인 장상인의 세계, 세계인
  • 취재본부는 지금’
  • 조갑제 기자의 최신정보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