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최고의 사치스러운 일’

  •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 업데이트 2008-12-26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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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은 '소바(蕎麥)'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에는 '소바'와 관련한 사연들이 많다. 일본의 '소바'는 우리의 메밀을 말한다. 필자에게도 메밀- 하면 떠오르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요즈음처럼 추운 겨울 밤 늦은 시각에 ‘찹쌀 떡! 메밀 묵!’ 하며 어두운 골목길을 파고드는 애잔한 목소리다. 그리고, 고교 시절 감동을 안겨주었던 이효석님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이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로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새하얀  메밀밭과 소박한 시골 마을, 가난한 장돌뱅이들의 유랑(流浪)이 연상되는 정감어린 소설이다.


일본에서도 오래 전 '소바'에 얽힌 소박한 동화(童話)로 열도를 눈물로 얼룩지게 했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한 그릇(一杯)의 '가케소바'


일본의 대중적인 음식을 든다면 우동, 스시, 덴뿌라 등이지만, '소바'도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중적 기호 식품이다. 본디 '소바'는 길게 뽑은 메밀국수를 별도의 국물에 와사비, 파, 무즙 등을 넣어서 후룩후룩 소리를 내면서 먹는다. '소바'의 종류도 수 없이 많으나, 대표적인 것이 '가케소바' '자루소바' '모리소바' 등이다. 대발을 깐 네모난 나무그릇에 담는 것을 '모리소바'라 하고, 그릇 대신 대나무발이나 작은 소쿠리에 올려서 내오는 것을 '자루소바'라고 한다. 하지만, 옛날 에도(江戶) 사람들은 성격이 급해서 '소바'를 아예 국물에 말아서 먹는 방법을 고안했었다. 이것이 바로 '가케소바(掛蕎麦)'이다.


이러한 '한 그릇의 가케소바'라는 제목으로 '구리 료헤이(栗良平, 1954- )'라는 작가가 한 편의 동화를 썼다. 이 동화는 '가케소바'에 얽힌 가난한 한 가족의 이야기를 엮어 일본인들의 가슴 속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되면 '소바' 집은 일 년 중 가장 바쁠 때다. 가게 문을 닫을 즈음에 한 여자가 두 명의 아이와 함께 들어왔다.


 "저-'가케소바' 1인분만 주문할 수 있을까요?"
 세 사람은 이마를 맞대고 '소바' 한 그릇을 먹는다.
 "어머니도 드세요."
 아이는 한 가닥의 '소바'를 집어 어머니의 입안에 넣어준다........>


아버지의 교통사고로 매달 5만 엔 씩 배상금을 갚아야 했던 어머니는, 각자가 '소바' 한 그릇씩을 사먹을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해가 가면서 세 명이 2인분의 '소바'를 시킬 수 있었다........... 가게 주인은 연말 밤늦은 시간이 되면 2번 테이블 위에 <예약석>이라는 팻말을 올려놓고 그들을 기다렸다. 그런데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그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가게 주인은 내부 수리를 하면서도 2번 테이블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


"언젠가는 그 세 사람이 올지 모릅니다. 그때 이 테이블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이 이야기가 손님들에게 알려져 2번 좌석은 ‘행복의 테이블’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가케소바' 3인분-


<그로부터 몇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해 마지막 날의 일이다. 가게에서는 전통적인 풍습인 ‘해 넘기기 소바'를 먹은 후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새해의 첫 신사(神社) 참배를 가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10시 반 쯤 되자 정장 차림의 두 청년이 들어왔다. 뒤를이어 한 부인이 들어와서 머리를 숙이며 두 청년 사이에 섰다.


"가케소바 3인분을 주문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14년 전 셋이서 '소바' 한 그릇을 주문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때 한 그릇의 '소바'에 용기를 얻어 세 사람이 힘을 보태며 열심히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장남은 의사가 되어 교오토(京都)대학 병원의 소아과에 근무하게 되었으며, 동생은 은행원이 되었다.


"저희들은 지금까지의 인생 가운데서 최고로 사치스러운 일을 계획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12월 마지막 날. 이 가게에 와서 '가케소바' 3인 분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가게 주인은 얼굴을 눈물로 적시면서, "가케소바- 3인 분" 하고 목이 메었다.>


어머니는 열심히 일하고, 아이들은 신문팔이를 했다. 200엔 정도의 '가케소바' 한 그릇을 세  사람이 나누어 먹으면서도 그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가게 주인은 말없이 면(麵)을 덤으로 주면서 해마다 그들을 기다렸다. 평범하지만, 서민들의 삶이 애틋하게 녹아있는 내용이다. 3인분의 '가케소바'를 주문하는 일이 생애 최고의 사치스런 일이라니..........

‘소바’를 먹는 이유는?


이 동화는 1989년. 일본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공명당(公明黨) 소속인 '오오쿠마 오히코(大久保直彦)' 의원이 전문을 낭독하여 심금을 울렸던 작품이다. 그 후 이 작품은 영화화되어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인 '구리 료헤이(栗良平, 1954- )'에게 문제가 생겼다. 작가의 대학 졸업장이 허위로 밝혀졌으며, 그가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사기행각을 벌이다가 경찰에 체포 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동화에 감동하고, 영화에 매료되어 손수건을 적셨던 동심(童心)들이 큰 상처를 입었을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그릇(一杯)의 가케소바'가 <우동 한 그릇>으로 변신(?)하여 서점가를 누볐다. 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일본인들이 한 해를 보내면서 먹는 ‘소바’의 의미가 '우동'으로 와전(訛傳)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이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소바'를 먹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늘고 긴 '소바'처럼 수명을 늘리고 재산을 길게 유지하라는 것과, '소바' 즉, 메밀(蕎麥)은 하루 밤 풍우(風雨)에 쓰러져도 이튿날이면 ‘똑바로 일어선다’는 속설(俗說)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필자는 '수명과 재산을 늘리는 의미의 소바'보다는 '풍우(風雨)에 굴하지 않는 소바'가 더 마음에 든다. '밥 한 그릇'을 온 가족이 나누어 먹어야 하는 한파(寒波)의 세밑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쓰러질 만큼 지치고 어려운 한 해이었지만, 새해에는 모두가 똑바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풍우에도 끄떡없는 산허리의 메밀(蕎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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