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郭在九의 文靑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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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을 지나는 모든 시간들 중 단 한 초를 허비하지 않고 詩의 바다에,
그 시간들을 온전히 부리고 싶었다.

●「용광로처럼 詩의 정수를, 쇳물을 녹여 내리라」는 뜻의 詩 동인 「용광」 만들어
● 공부는 뒷전, 詩에 정진 … 오직「詩의 신」덕분에 지방 국립大 입학
● 조르바·고흐·강은교·나해철 …「광기」와「죽음」그리고 유년의 기억
● 1980년 5월 광주의 체험이 詩를 변화시켜
●「사평역에서」로 신춘문예 당선…

郭在九
1954년 전남 광주 출생. 전남大 국문과 졸업.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詩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 오월시 동인. 현재 순천향大 교수. 시집 「사평역에서」, 「전장포 아리랑」, 「한국의 연인들」, 「서울 세노야」 등. 동화집 「아기 참새 찌구」,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자장면」 등. 산문집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 「곽재구의 포구기행」 등이 있다.

고교 시절 어느 늦가을 만난「데친 사과」

  

고등학교 1학년 늦가을이었다. 교정의 늙은 은행나무 아래에서 나는 박몽구라는 이름을 지닌 한 친구를 소개받았다. 얼굴 가득 마른버짐이 피어 있는 녀석이 내게 얘기했다.
 
  『詩를 열심히 쓴다고 들었다. 우리 함께 동인하자』
 
  녀석이 내민 건조한 손을 잡은 채 나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녀석의 입에서 튀어나온 「동인」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머릿속에서 「창조」·「폐허」·「백조」·「시문학」과 같은 동인 이름들이 떠올랐고, 그것들은 모두 우리 문학사에서 쟁쟁한 발자취를 남긴 작가 詩人들의 영역으로 내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녀석은 처음 만난 내게 대뜸 동인 활동을 하자고 얘기했던 것이다. 바람에 날리는 은행잎을 보며 나는 작가나 詩人이 아닌 사람도 동인을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녀석은 주머니를 부석부석 뒤지더니 다 구겨진 종이 한 장을 내게 건넸다. 반 쪽만 남은 16절 갱지였다. 그 갱지 위에 개미보다 훨씬 작은 연필 글씨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비뚤비뚤하고 볼품없는 글씨들이었으나 전체적인 행들의 윤곽이 내겐 단단한 질서와 자유로움의 탄력으로 다가왔다.
 
  그때까지 나는 詩란 원고지에 쓰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 구겨진 갱지 위에 연필로 꼼지락꼼지락 써 내려간 녀석의 詩는 동인보다 더 큰 충격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날 나는 녀석의 詩篇(시편)들과 함께 밤을 지새웠다. 아니 「앓았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불 안 땐 늦가을 방이 장작불 내리 사흘 지핀 겨울 구들처럼 뜨거웠다.
 
  「데친 사과 빛의 얼굴을 하고/여자가 풍경의 그늘 속으로 사라진다」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녀석의 詩 구절이다. 지금은 감정의 치기조차 느껴지는 구절들이 고등학교 1학년 감수성 짙을 대로 짙은 가슴 한쪽에서 신기로 받아들여졌다. 「데친 사과 빛」이라니…. 어떻게 사과를 데칠 수 있다는 말인가. 오래 뒤에 세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과로 파이를 만들고, 수프를 만들어 먹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무렵의 내겐 「데친 사과 빛」이라는 것은 상상력 밖의 풍경이었다. 풍경의 그늘 속으로 사라지는 여자의 여운 또한 가슴 설레는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습작 시절, 그리고 책읽기
 

1975년 전남大 캠퍼스에서 고교동문 詩人 나해철과 함께.

  그날 이후 나의 습작 시절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정확히 녀석의 詩는 나보다 두 단계 혹은 세 단계 앞서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와의 동인 활동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단계를 축소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하루 시집 한 권, 일주일에 문학평론집 한 권 이상을 읽어 내는 것이 그 무렵 내가 정한 독서량이었다. 학교 도서관의 시집들을 한 학기 만에 다 읽어 치웠으며, 시립도서관의 藏書(장서)들을 읽기 시작했다.
 
  시립도서관의 한 사서는 겨울 내내 책 읽기에 몰입한 내 모습을 기특하게 여겨 외부 대출 금지의 관행을 깨고 내가 집에 가서도 책을 읽을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책을 읽으며 눈이 왔고, 봄이 오고, 꽃이 피고, 장대 같은 비가 내렸다. 1년의 시간이 지난 뒤 나는 비로소 몇 편의 詩를 녀석에게 보여 줄 수 있었다. 그중에 「고호」라는 詩가 있었다.
 
 < 나는 안마사
  흰눈처럼 펄펄 零下를 만나면
  수은주의 높이에서 또 얼마쯤
  귀를 자르는
  겨울 밤>
 
  그 詩는 지난 겨울의 내 책읽기를 써 내려간 것이었다. 한데와 다를 데 없는 꽁꽁 언 방에서 손을 부비며 녀석의 詩와의 간격을 좁히려 책장을 넘기는 참담한 내 노력이 숨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무렵 몽구의 詩는 나에게 좋은 스승이 되었다.
 
  여름에 몽구와 나는 나해철과 함께 「용광」이라는 이름의 詩 동인을 만들었다. 용광로처럼 詩의 정수를, 쇳물을 녹여 내리라는 의미가 들어 있었다.
 
  「용광」에서의 詩 토론은 격렬했다. 관행적으로 그 토론은 「이것도 詩냐」는 결론에 이르렀고, 단 한 줄의 詩句(시구)도 살아남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느 날, 그날은 몽구의 詩 발표가 있던 날이었다. 양재학원 칠판에 적힌 녀석의 詩를 우리는 격렬히 비판했고, 녀석은 가방 안에서 군용 대검을 꺼내 들었다. 『다 죽여 버리겠다』고 한바탕 소란이 나고 그 소란의 쓸쓸하고 따뜻한 울림만큼 우리들의 詩 쓰기는 조금씩 성장해 나갔다.
 
  詩가 무엇인지, 그것이 사랑인지 고통인지, 꿈인지 혁명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우리는 詩 속으로 함몰해 갔고 그 시간들은 행복했다. 예비고사와 본고사가 함께 있던 그 시절 몇몇 친구들이 내 진학을 걱정했지만 詩 외엔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나는 친구들의 참고서 안 표지에 詩들을 써 주며 학교 식당에서 자장면을 얻어먹기도 했다.
 
  학기 초에 친구들은 대부분 열댓 권씩의 입시용 참고서들을 구입했다. 녀석들은 내 책상 위에 그 참고서들을 수북이 쌓아 놓았고, 그 안 표지에 나는 생각이 나는 대로 詩들을 써 내려갔으며 자유연상으로 써 내려간, 詩도 아닌 詩들을 그들은 아껴 가며 읽어 주었다.
 
 
 
 대학 시절, 고흐의 광기에 매료
 
   그렇게 지낸 내가 대학입시에 합격하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이후 교과서 한번 제대로 보지 않고 지방의 국립대학에 합격했으니 그 모든 이유를 「詩의 神(신)」의 은덕으로 돌릴 수밖에.
 
  대학에 입학하던 그해 봄 내가 이 지상에서 사랑했던 몇 개의 이름들이 있었다. 희랍인 「조르바」와 네덜란드人 「고흐」, 「강은교」와 「나해철」이 그 이름들이었다. 조르바와 고흐, 국적도 다르고 살았던 시기와 배경도 다르지만 둘은 공통점을 지녔다. 「광기」였다.
 
  그 무렵 나는 「광기」라는 말을 사랑했다. 「열정」이라는 세련되고 고상한 느낌의 말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스무 살의 나이는 고상함이나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었다. 「광기」라는 단어 곁에 앉아 있으면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힘들이 몸의 곳곳에서 솟구쳐 올랐다.
 
  어느 날엔 교정의 라일락 꽃향기를 맡던 내게 그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이봐, 얼빠진 친구. 내가 지상에서 가장 사랑한 단어는 포도주와 여자지. 이 둘이 있어 세상이 얼마나 신나고 아름다운지 몰라. 이 둘은 나를 춤추게 하지. 詩를 쓰겠다면 여자와 포도주처럼 나를 춤추게 하는 詩를 써 봐. 네 자신과 세상을 춤추게 하는 詩를 써 보라구」
 
  나는 그로부터 「춤」이라는 단어를 처음 배웠다. 세상의 모든 생령들과 풍경들을 들뜨게 하는 춤, 라일락 꽃향기처럼 은은하게 봄 지평 멀리멀리 스며 나가는 눈부신 언어들의 춤.
 
  「고흐」라는 이름은 그보다 더 친숙했다. 조르바가 허구 속의 인물이라면 고흐는 역사 속의 실존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고교 시절 스승 몽구의 詩를 따라잡기 위해 내가 가장 열망하고 열독했던 인물이 그였다. 그 무렵 나는 그를 위해 열 편 이상의 연작詩를 쓰기도 했다. 그는 무시로 나를 찾아왔다.
 

1991년 광주 가톨릭센터에서 만나 지금까지 활동 중인 시동인-빛부리. 지난 1월 네팔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다녀왔다. 앞줄 왼쪽부터 최윤진·강현옥·김귀례·정금자·곽재구, 뒷줄 왼쪽부터 최영옥·한희원·박영복.

 
 
 고흐를 위한 詩
 
  「이봐, 詩 쓰는 데 두 개의 귀를 지닐 필요가 있어? 그건 사치야, 하나로도 충분하다구.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쪽 귀를 선물해 봐」
 
  그는 내게 한 장의 그림을 보여 주었다. 잘 익은 밀밭 위로 까마귀 떼들이 날아올랐다.
 
  「뭔가 좀 다르지 않아?」
 
  그가 내게 물었다.
 
  「달라. 날아오르는 까마귀들의 율동보다도 언덕 위를 오르는 보리밭의 술렁거림이 훨씬 크게 느껴져」
 
  「바로 그거야. 이 까마귀들은 모두 한 쪽 귀가 없어. 한쪽 귀를 잘라 냈지. 보리밭의 춤은 그 까마귀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거야. 잘 봐, 보리밭뿐만이 아냐. 바람과 햇살과 구름, 하늘의 푸른빛까지 모두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춤을 추고 있어. 광기를 가져 봐. 그러면 너의 詩가 상처받은 모든 영혼들을, 그들의 슬픈 꿈을 위로할 수 있어.
 
  이봐, 내가 한쪽 귀를 자른 건 그놈이 미워서가 아니야. 오히려 난 그놈을 끔찍이 사랑하지. 아끼고 사랑하는 것에 집착하지 마. 오히려 평범하고 못생긴 것들의 영혼에 집착을 해. 위로란 그런 것이지. 그게 바로 너의 詩라구」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두 친구가 이야기한 「춤」과 「광기」가 「자유」라는 말의 변용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강은교와 유년의 기억
 
   강은교의 詩篇들은 내게 「죽음」의 의미로 다가왔다. 生의 소실점까지 다가갔다가 돌아온 그의 詩篇들에는 죽음의 냄새가 짙게 스며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죽음의 세례를 받는 詩 속의 풍경들은 차분하고 고요했다.
 
  나는 강은교의 詩가 지닌 이 이해할 수 없는 적막과 고요를 사랑했다. 어쩌면 그 고요는 나를 위한 것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이 지난 며칠 뒤 담임선생님은 모두에게 장래 희망을 물었다. 그때 나는 『소설가』라고 답변했다. 『소설가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그가 다시 물었고, 나는 『세상의 모든 아이들에게 아름답고 신비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라고 답변했다.
 
  다음날부터 그는 학교로 가는 길에 우리 집에 들러 자전거 짐받이에 나를 싣고 학교로 갔다. 그가 소설가 지망생이었다는 사실을 뒤에 알았지만 그 행복한 추억 이후 내 삶은 반대편으로 기울어졌다. 그 무렵 정형화된 한 삶의 풍경이 내 곁에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싸움은 거의 매일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그날은 심각했다. 두 분이 生과 死를 논할 양으로 격렬하게 엉겼고 어머니가 위험했다. 보다 못한 내가 부엌 삽으로 아버지의 등을 내리쳤고 나는 담장에 던져졌으며 싸움은 영원히 끝났다. 얼마 뒤 나는 시골의 먼 친척집에 보내졌고 몇 년 동안 학교에 다니는 대신 꼴머슴을 살았다.
 
  나는 강은교의 詩들에서 풍경들이 자신의 공포와 숙명을 고즈넉하게 감싸 안는 것을 보았으며 그런 풍경들에서 연민을 느꼈다. 그곳에서 나는 내 유년의 냄새를 맡았다. 살아 있지만 죽어 있는 것 같고, 죽어 있지만 문득 깨어 있는 것 같은 풍경의 그리움을.
 
 
 
 나해철과 만난 生에서 가장 따뜻하던 시절
 
   나해철과 나는 고교 동창으로 만났지만 대학 1학년 시절 더 가까워졌다. 생래적으로 따뜻한 성품을 지닌 그는 고교 적부터 중증의 결핵을 앓았다. 「마이엠브톨」, 「파스」, 「하이드라짓드」와 같은 약 이름을 그로부터 알았다. 의대에 진학한 그와 나는 대학 1, 2년 시절을 함께 보냈다.
 
  매일 두세 시간씩 시간을 맞추어 캠퍼스의 숲 속에 들러 함께 詩를 쓰고 서로의 작품을 교환해 읽었다. 제목 하나를 서로 정하고 아카시아 꽃향기가 번지는 농과대학의 실습림에서 서로 떨어져 詩를 쓰다가 두 시간쯤 후 다시 만나 서로의 詩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시간들. 그 시간이 내 生에 있어서 가장 따뜻하고 빛났던 시간임을 지금 안다. 한 주먹씩의 알약을 그가 식후에 먹는 것을 바라보던 나는 함께 결핵에 걸리기 위해 그의 코앞에 내 코를 들이대고 잠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런 나를 해철의 부모는 자식처럼 여겼는데, 초겨울에 입대하면서 나는 미리 쓴 신춘문예 당선 소감을 해철의 아버님에게 맡겼다.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해철이 집으로 해놓고 만약 어떤 신문사에서 연락이 오거든 이 편지를 집 앞 우편함에 넣어 달라고 그의 부친에게 부탁드렸던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세상이 詩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 집 저 집 떠돌며 비럭잠을 잔 뒤 아침에 집을 나서면 골목 어귀는 햇살들로 눈이 부시다. 제 집에서 따뜻하게 잠을 잔 뒤 맞이하는 아침 햇살과 떠돌이 잠을 잔 뒤 마주치는 아침 햇살은 눈부심의 정도가 다르다. 나는 팔과 어깨와 이마 위에 쏟아지는 햇살을 보며 내가 앞으로 써야 할 詩들이 얼마나 따스하고 눈부셔야 하는지 생각했다.
 
  골목을 나서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그 바람을 깊게 들이키면 문득 비럭잠을 잔 쓸쓸함 같은 것이 지워지는 것이었다. 나는 바람이 내가 앞으로 써야 할 詩들이 얼마나 부드러운 감촉을 지녀야 하는지, 얼마나 촉촉한 음악으로 모든 사물의 표피를 적셔야 하는지 그 상징이라 생각했다.
 
  밤이 되면 하늘에 별들이 빛났다. 나는 별들을 보며 걸었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써야 할 詩들이 얼마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지녀야 하는지,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신비한 꿈을 지녀야 하는지 그 상징으로 생각했다. 그 무렵 내게 욕망이 하나 있었다. 당연히 詩와 한 뿌리를 이루는 욕망이었다. 그 욕망은 하루 86400초 모두가 살아 숨쉬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었다. 내 곁을 지나는 모든 시간들 중 단 한 초를 허비하지 않고 詩의 바다에 그 시간들을 온전히 부리고 싶었던 것이다. 새소리를 들으면 새소리의 詩를 쓰고 싶었고, 나팔꽃을 보면 나팔꽃의 詩를 쓰고 싶었다. 깍두기를 먹을 때면 깍두기의 詩를, 바흐를 들을 때면 바흐의 詩를, 공중화장실에서는 공중화장실의 詩를 쓰고 싶었다.
 
  당연히 꿈속에서는 꿈의 詩를 썼다. 꿈속의 詩가 얼마나 아련하고 아득한 향수를 지니는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詩들은 사라진다. 세수를 하고 담배를 피우고 별을 바라보아도 詩들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날 밤 다시 잠자리에 들면 거짓말처럼 어제 쓴 詩가 한 줄씩 자막처럼 떠오른다. 그리고 그날 밤 다시 그 詩의 제2편을 쓰게 되는 것이다.
 
 
 
 5월 光州에서
 
   1979년 초여름 제대를 했다. 나해철의 어머니가 꼭 갚으라며 빌려 준 5만원으로 나는 10개월짜리 사글셋방 하나를 얻고 연탄 100장과 20kg 정부미 두 포대를 들여놓았다. 대숲으로 둘러싸인 조선말기에 지어진 「청음정」이라는 정자의 방 한 칸이었다.
 
  나는 그 방에서 여름과 가을 내내 원없이 詩를 썼다. 그리고 한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고통과 광기, 희망과 허무의 빛이 적당하게 빛나는 전형적인 신춘문예 스타일의 詩였고, 나는 그 시편들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해 12월 하순 신문사에서 연락은 끝내 오지 않았고, 나는 처음으로 내 生에서 절망을 느꼈다. 그 어떤 악몽의 순간에도 나는 「절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적이 없었다. 바람으로 불어 만드는 유리병처럼 삶이 위태로울 때 「절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그 유리병은 깨지게 마련이다. 詩가 나를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찾아왔고, 해가 바뀌었다.
 
  1980년 봄이 왔다. 5월 광주에서의 폭력은 詩 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도 찾아왔다. 청음정은 전남대학의 캠퍼스에 바로 붙어 있었고, 5월 18일 아침 나는 며칠 동안 세수를 하지 않은 장발의 몰골로, 무릎이 튀어나온 작업복에 운동화 뒤축을 구겨 신은 채 공수부대원들이 진을 치고 있는 전남대 정문을 빠져나왔다.
 
  그들은 나를 전혀 학생으로 여기지 않았고, 어디 한데 잠을 잔 걸인 정도로 여기는 눈치였다. 아침에 삶의 행운이 있었고, 오후에 불행이 있었다. 시가지에서는 이미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 벌어져 있었고, 저물녘에 청음정으로 가기 위해 농대의 무너진 담장을 들어서던 나는 한 무리의 공수부대원에게 둘러싸여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구타를 당했다.
 
  그날 내가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팀장 격인 한 젊은 중위의 덕분이었다. 비몽사몽인 내가 그를 향해 『장교님, 저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살려 주세요』라고 얘기했고 그가 제지했다. 무릎 관절이 다 찢긴 채 나는 기어서 청음정으로 돌아왔으며 온몸에 안티프라민을 바르고 붕대를 감은 채 마을 노인이 건네주는 똥물을 마셨다. 骨濕(골습)이 밴 데 즉효라는 것이었다.
 
  그 5월 이후 내 詩는 변했다. 그 이전까지 나는 모더니즘 계통의 詩를 썼다. 김수영과 송욱, 김춘수와 강은교의 詩들의 얼개가 내 詩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해 12월 신춘문예 철이 왔을 때 신춘문예에 다시 응모하지 않으리라던 생각을 바꾸게 한 친구는 신옥식이다.
 
  길에서 만난 그는 『신춘문예 응모는 모든 문학청년들의 의무』라는 말을 내게 했고, 오래 전부터 그의 자취방 신세를 자주 졌던 나는 가슴이 뭉클해지며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동해안 여행길에서. 왼쪽부터 최두석·곽재구·도종환·나해철 詩人들과 함께.

 
 
 투고 사실조차 잊어버렸던 신춘문예
 
  그해 5월 이후 거의 詩를 쓰지 않았던 나는 그동안 내가 썼던 詩들을 일일이 풀어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밀고 다듬고 사포질한 詩들의 모습이 적당히 반짝거리고 화사했으나 그것들이 나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핍진한 삶의 냄새가 구체적으로 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詩가 될 수 없으리라는 생각도 함께 찾아왔다.
 
  고통받는 모든 풍경들과 시간들을 위해 따뜻한 위로가 될 수 있는 詩, 한 줄 희망이 될 수 있는 詩….
 
  나는 몇 편의 詩를 신문사에 응모했고 어느 순간 내가 신춘문예에 응모한 사실조차 잊고 지냈다. 그해 크리스마스 직전 외숙모가 『신문사에서 전화가 왔다』며 『내일 아침 9시에 연락을 다시 하겠다』는 말을 듣고도 나는 아침 8시에 집을 나왔다.
 
  그 당시 나는 외삼촌의 집에 더부살이를 했다. 저녁에 집에 들어섰을 때 외숙모는 다시 『신문사에서 전화가 왔다』며 『내일 아침 9시에 꼭 통화를 원한다』고 했다. 이튿날 아침 9시 전화가 왔고, 내 이름을 확인한 그는 『신춘문예 응모하셨죠』라고 물었다. 신춘문예…. 거짓말처럼 기억이 없었다. 그가 『詩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었다』고 거듭 얘기했을 때야 비로소 내가 신춘문예에 응모한 사실을 떠올렸고, 그렇게도 간절히 기다렸던 시간들이 비로소 찾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1980년대 詩人은 행복했다
 
   상금 50만원을 받아 그동안 신세진 모든 친구들에게 밥과 술을 샀다. 해철의 어머님께도 붉은 내복 한 벌을 선물해 드렸다. 빌린 5만원을 갚자 어머니는 당신이 이 돈을 받으려고 빌려 준 것이 아니라 내가 쑥스러워할까 봐 꼭 갚으라는 말을 덧붙인 것이라 말씀하셨다.
 
  1980년대의 한국 현실 속에서 詩를 쓰고 살며, 나는 그동안 너무나도 많은 행복감을 우리 역사와 이웃들로부터 받았다. 그 시대를 건너며 나는 억압과 소외의 개념을 익혔으며 「자유」와 「정의」라는 더욱 큰 인식의 틀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詩가 좋은 詩이며 어떤 詩가 따뜻한 詩인가에 대한 생각 또한 그들로부터 받은 선물인 셈이다.
 
  동시대를 살았다는 것만으로 이런 과분한 선물을 받아도 좋은 건지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앞으로 내가 쓸 詩들이 궁핍한 우리 역사의 남은 현실과 여전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해 한 줌 바람, 한 소쿠리의 햇살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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