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괴롭히지 말라. 나는 혁명가가 아니다!”
⊙ “인간 최남선이 참회한다는 것은 나 자신도 이해하기 곤란한 문제”
⊙ “해방공간, 정치보다는 독립(통일)이 우선. 독립은 관념으로 해결할 수 없어”
⊙ “독립선언문안은 내가 기초했으나 그 활동으로 민족자결이 실현되리라 믿지 않았다”
金泰完 月刊朝鮮 기자
역설적이게도 한국 현대사의 해방(解放)공간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1890~1957) 선생에게 가장 불행한 시절이었는지 모른다. 젊은 시절, 전통 한시(漢詩)는 물론 창가, 신체시, 기행수필을 썼고 일제 치하 ‘조선학’을 제창하고 조선의 정체성을 탐구한 역사학자였던 그는 누구보다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열여섯, 《황성신문》에 ‘일화배척(日貨排斥)’을 주장하는 투고를 했다가 구류를 살았고 서른에는 3·1독립선언문을 기초했다는 이유로 2년8개월 형을 언도받으면서도 기개를 꺾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반겼던 해방 이후 그는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내야 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곧이어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면서 이듬해 육당은 세 번째 영어의 몸이 됐다. 독립된 국가 대한민국이 마련한 소급법(遡及法)에 의해서였다. 그의 나이 예순 무렵이었다.
《월간조선》이 소개하는 육당 인터뷰는 1948년 3월 3일자 《평화일보》에 실렸다. 해방 이후 세 번째 맞이한 삼일절을 기념하기 위한 기사였다. 당시 기자는 육당을 만나러 3월 1일 ‘서울 우이동 산장으로 찾아갔다’고 전하며 인터뷰 첫 질문부터 ‘기탄없는 귀하의 자기비판’을 요구하고 있다.
인터뷰 내내 육당은 시종 낮은 자세였다. “당신네들 저널리즘의 대상이 아니다”고 말하거나 스스로를 “세상에서 밀려나와 퇴촌(退村)·낙향(落鄕)한 자”라는 표현이 여러 대목 나온다. 또 육당의 행보에 대해 “어떤 이는 도피라고 하고, 어떤 이는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고 묻자, 그는 도피, 은거 모두를 부인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 같은 사람이 세상에 무슨 소용이 있겠다고… 자숙한다는 것도 그런 자격도 처지도 못되니 부당하다. 이제는 책이나 쓰려고 결심한 자이니 자숙이고 도피고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현재도 그러하고 장래도 그러한 도리밖에 없다. 춘원(春園) 같은 사람은 또 모르겠다.”
육당은 인터뷰에서 “삼일운동에 참여한 것은 민족윤리운동이지 정치운동이라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만약 정치운동으로 발전할 줄 미리 알았더라면 그 운동에 관여치 않았을 것이라는 점도 강조한다. 해방공간의 좌우이념 갈등에 대해서는 “우리 주변에 너무 관념적 정치가가 많다. 밭 갈고, 논 갈고, 공장의 기계를 돌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일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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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기념(記念) 특집(特輯)
독립선언문 기초자인 최남선씨에게 그 당시와 최근 심경에 대한 본사 탐방기
우리 민족이 거족적(擧族的)으로 자주독립의 성화(聖火)를 들고 세계에 그 용명(勇名)을 떨친 3월 1일도 해방 이후 세 번째 맞이했다. 해마다 이 위대한 민족궐기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는 있었으나 장소도, 의도도, 양식도 달랐었다. 그리고 이날을 계기로 부절(不絶)히 독립운동은 계속되고 있으나 이제껏 민족의 비원(悲願)은 달성되지 못하고 이 성(聖)스러운 ‘3·1 절’은 정치이념의 분열로 말미암아 그 해석도 필연적으로 일치되지 못하고 지하 백척(百尺)에서 혁명(革命) 선혈(先血)을 울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본사는 당시의 독립선언문 기초자(起草者)인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씨를 3월 1일 오후 1시 우이동 산장으로 찾아가 순연히 공명정대(公明正大)한 입장에서 그의 기탄없는 의견을 타진한 바 있었다. 실제로 그는 은거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나 가로(街路)에 범람하고 있는 그의 각종의 저서는 그의 사회적 활동이 맹렬한 것을 표명하는 좋은 예이며, 동시에 선언문 기초 이후의 육당의 행동과 심경을 타진하는 것도 무의미치는 않을 것으로 본사는 감히 그와의 일문일답기(一問一答記)를 소개하는 바이다. 사진은 최남선씨.
피로 물든 宣言文 공동 목적에 민족분열 없었다
기자 :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성서(聖書)라고까지 하는 3·1독립선언문과 그에 부수된 각종의 서한(書翰)을 기초한 이후 귀하의 행동에 대해 항간에는 각양각색의 해석과 추측이 있다. 이에 대한 기탄없는 귀하의 자기비판 여하는?
육당 : 나는 지금 당신네들 저널리즘의 대상이 안 될 것으로 나 자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세상에서 밀려들어와 있으면서 책권(冊卷)이나 써서 그날그날을 지나간다는 것을 잘 아는 처지들이 아닌가? 나는 얘기할 것도 없고, 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않으며, 용기도 없고, 말할 준비도, 재료도 없다. 세상에서 밀려들어와 낙향해서 사는 놈이 무슨 의견이 있겠는가.
3·1운동 선언문과 그에 부수된 사통(四通)의 서한을 작성한 것은 내가 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 운동을 달리 생각했던 까닭에 몸소 그 운동의 과정에서 같이 행동을 따르지는 않았었다. 지금 사통의 서한과 선언문을 생각할 때 현재로 보아서도 그리 적합지 않다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을 미루어 보아도 그 역사는 진보하는 듯하면서도 그 보조(步調)는 매우 지지(遲遲·매우 더디다는 뜻)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바다.
나는 삼일운동을 정치운동이나 혁명운동으로 체득(體得)지 아니한 까닭에 그 이후의 나의 행동에 대해 그 운동과 결부시켜 세간에서는 각양(各樣)으로 생각하고 있다 할지라도 나 자신 그에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나는 나대로 그 운동을 떠나서 나의 소신대로 행동했으며 여러 가지 스스로 반성하고 비판하는 점도 있으나 그 이후의 나의 행동을 3·1운동과 결부시킨다는 것은 큰 착오다.
정치활동보다 민족윤리운동으로 전개
기자 : 3·1독립선언문의 정기를 계승해 해내외(海內外)에는 혁명운동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문안기초 당사자인 귀하의 비혁명적 태도는 어떻게 조명돼야 한다고 생각하나?
육당 : 나는 원래 사회운동이라든지 정치운동에 흥미를 안 가진 성격인 고로 이러한 민족운동에 대해 나는 그것이 윤리운동이지 정치운동이라 보지 않는다. 그런 고로 3·1운동 재판 당시의 조서(調書) 문에도 나는 정치운동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조선 국민의 윤리운동으로 참여했다고 썼지만, 나는 3·1운동을 정치활동으로 안 본다. 조선사람이 일본통치를 받아 십년이나 되는 날까지 여러 가지 형식으로 일본에 대한 반박(反駁)의 심리를 발휘했지만 해외 각국은 그다지 그것을 인식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적 반박심을 표현할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일본정치에 만족하고 납득하고 있다는 것으로 보이니까, 이번 운동에 있어 독립이 실현될지 못 될지는 문제가 아니고 적어도 조선사람이면 일본에 대한 반박심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 해 그렇게 실천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정치운동으로 할 심산은 아니었다. 내가 정치적 의도하에 그리했다는 것은 그때도 없는 일이고, 그 후에도 없었고, 또 지금도 없다. 만약 정치활동으로 발전할 줄 알았다면 나는 도대체 그 운동에 관여치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러하거니와 그때도 일대(一大) 민족의 윤리운동으로 전개해야 우리 민족정신을 작흥(作興)시키며 그것으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기백(氣魄)을 보여야 한다는 나의 철없는 생각이었고, 지금도 그 철없는 생각은 변치 않고 있다. 내가 나를 비판한다면 나의 처세술이라고 할까? 일관한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가능한 한도에서, 가능한 기회를 포착해 나의 민족윤리운동을 실현하려 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나는 삼일운동을 그것대로 민족윤리운동으로 끝막은 것으로 생각하고 이상에 말한 나의 처세도(處世道)의 지침에 의해 가능타당하다고 생각한 방법으로 그 운동을 관찰해 왔던 것에 불과하기에 비혁명적 태도였던 것도 사실이며 그렇다고 해서 지금도 나의 신조를 굽히려고 하지를 않는다.
기자 : 현재에 있어 좌(左)는 좌대로 우(右)는 우대로 3·1독립선언문과 그 이후의 혁명정신을 계승 해석하고 있는데 귀하의 소견은?
육당 : 그 당시도 그러했지만, 그 운동을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천도교는 천도교대로 해석함에 있어 더욱이 운동의 성격을 민족윤리운동에 결부시키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좌익(左翼)은 좌익대로 어떤 해석을 할는지 모르고 우익(右翼) 역시 그러할 것이로되 나는 자고로 3·1운동을 민족윤리운동으로 생각하는 까닭에 별다른 의견이 없다. 나의 의견을 말하는 것은 삼가겠으나, 3·1운동은 윤리, 즉 민족정신의 정화(淨化) 앙양(昻揚)을 기초로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계승 체득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한다.
단군을 학술적으로 연구
민족정신 喚起에 전념
기자 : 단군과 신무천황(神武天皇·일본 신화시대 인물)이 형제간이라는 학설을 교묘히 날조했다고 세간은 귀하를 비난하는 측도 있다. 이에 대한 허심탄회한 귀하의 소견 여하는?
육당 : 단군과 신무천황을 형제간이라고 했다 하여 비난하는 점은 오해다. 이것은 우원(宇垣·우가키) 총독과 접촉할 때 단군을 학술적으로도 연구했고, 민족적으로도 항상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요컨대 조선민족의 정신을 어느 정도 세워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심경을, 기회를 봐서 조선신궁을 남산(南山)에다 만든 이상 그것을 헐어버릴 수 없는 일이니, 북한산 일대를 신성(神聖)으로 하여 단군신사를 건립하고, 그 단군신사를 중심으로 조선통치를 해 나가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원에게 여러 번 그런 안을 제출해 보았으나 늘 반대되고 말았는데—나로서는 조선민족의 정신을 환기시킬 수도 있으려니와 또 신도(神道)를 연구해 보니, 그런 기회도 있어 주장한 것이다.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까딱하다가는 몇백 년 계속될지 모르니 이렇게 해서라도 기형적(畸形的)이나마 우리 민족정신을 계승하자고 해서 생각한 것인데 요사이 그런 것은 다 빼고 그저 신무천황과 단군은 형제간이라고 했다고 하니 그것도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며, 구구하게 변명도 하지 않겠다. 다만 일본인이 우리 성신(聖神)을 자기 선조 신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라고 하는 언어도단적 단군 말살은 나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저지되었다 하겠다. 사람의 결부는 떼어 놓을 수 있으나 사람이 신을 마음대로 결부시킨다는 것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기자 : 귀하는 어찌하여 학병(學兵) 권유의 진두(陣頭) 활동을 담당하였던가?
육당 : 학병 문제가 나와서, 그 기한이 9월말에 되도록 불과 응모자가 입명(廿名·스무 명이란 뜻)에 지나지 않았다. 나중에는 총독에 대해 면목이 없게 되었다. 《경성일보(京城日報)》 사장과도 상담해 보고 또 경무국장과도 협의해 보았으나 다들 별신통한 도리가 없다 하니, 나로서도 당시 학병문제에 관하여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즉, 소기(小磯)가 화랑정신(花郞精神)을 부르짖는 데서, 이 부르짖는 민족자결이 연상되어 ‘옳지! 이 기회에 우리가 조선독립을 위해 군대훈련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8월말 경의 성적이 그 모양으로 9월에 들어가 ‘글’을 한껏 써서 《매일신보(每日申報)》에 보냈더니 그만 이것이 경무국 검열에 걸렸다. ‘글’ 내용은 조선민족이 화랑도의 정신을 발휘하여 학병에 나가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정성껏 썼는데 그만 게재 금지가 됐으니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당시 국민총력연맹에 있는 간우(簡牛)가 내 집을 찾아와서 하는 말이 “그 글을 보니 대단히 좋아 총독한테 권고해 신문에 실리도록 하였으니 그 취지에 ××(응답)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대답하여 “할 말은 그 ‘글’에서 다 썼으니 더 할 말이 없다”며 보냈다. 그가 다음날 또 찾아와서 하는 말이 “암만해도 응모자가 적어 청년을 동원하기 위한 행사를 하게 돼 국내 과거 혁명투사 모모씨가 강연하게 되었으니 당신도 해 주시오” 하길래 “나 같은 게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하면서 거부했다. 그 다음에 이자가 또 찾아와 “이번에는 일본에 가서 응모운동을 하게 되었으니 가 주시오” 하길래, 그때도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것은 신문에 다 발표했으니 할 말이 없다. 못간다”고 했더니 그 다음에 “모모씨도 동행하니 가라”고 강권하기에, 그런 말을 듣고 보니 그러지 않아도 학병에는 찬성이었고 하던 판이니까 어물어물하게 되자 열차표를 주선한다, 무엇 한다 해서 가게 결정짓고 말았다.
당시 세간에서도 2~3년이면 일본은 패망(敗亡)할 것이라는 예측들은 다들 하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만약 그날이 오게 되면 실권을 잡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되겠으니 그것은 젊은 청년 다수를 단병(單兵)으로 보내 군사훈련을 시킬 필요가 있다고 내 딴에는 생각했다. 적어도 사관학교를 나오고, 비행기 조종을 할 줄도 알고, 조직력과 전투력을 배우게 해야 된다고 말이다.
적어도 5000명은 보내 약 2000명은 죽는다 치더라도 3000명은 훈련해야 된다. 그러면 일대(一大) 세력(勢力)은 형성할 수 있으니 그것을 중심으로 마치 독일의 ‘나치스’를 조직하듯 해야 된다는 생각을 전제로 학병을 찬성했다. 그래서 결국 동경(東京)으로 떠나게 되어 막상 서울역에 나가 보니 동행한다는 혁명 요인 모모씨는 안 왔고 그러고 보니 차중(車中)에서 웅성웅성해서 나를 단장 격으로 정해 행동하기로 정하는 모양이니 부득이 면(免)치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 동경에 가기까지 하관(下關·시모노세키)과 대판(大阪·오사카)에서 한 번씩 연설하고 이광수(李光洙)는 경도(京都)로, 나는 동경으로 갔다. 동경에 가서는 “학생이면 누구든 찾아오너라. 와서 이야기해 보자”고 하면서 만났다. “그래, 너희들 젊은 사람이 가서 이 시국을 담당치 않으면 누가 하겠느냐. 이 기회는 우리가 군사훈련을 받고, 조직이라든가 전투법이라든가를 배우기에 가장 좋은 때다. 이 기회를 놓치면 또다시 못 얻는 기회다”라고 역설했다. 그러자 대원 중에는 내 말에 의혹을 가지고 “학병에 지원하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주구(走狗) 노릇 하는 것”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약 10일간 있는 동안에 몇백 명을 설득했다. 그리고 돌아왔더니 간우의 환영은 대단했다. 그래 간우보고 한 가지 말하기를 “학생들의 희망은, 나가기는 하겠으나 나갈 때 한번 마음껏 강연을 하겠다고 하니 주선하라”고 부탁했다.
결국 이것은 실현되지 못했지만—그러나 내가 동경에서 학생들에게 화랑도를 역설하고, 우리 민족이 일본반이탈(日本絆離脫)을 전제한 자율적 전투 제(諸) 기술을 체득하기 위해 지원하라고, 학생을 불온적(不穩的)으로 선동했다며 총독 관헌의 백안시(白眼視)도 상당했으나 나의 신념이었기에 부동(不動)했다. 그러한 경위로 내가 관계하는 건국대학은 한 사람을 내놓고는 다 출병했다. 나의 이런 주장도 결국은 일본이, 자의적이 아닌 전쟁에 돌진하게 되고, 세계역사는 일본에게 세계정복을 용서치 않는 한, 일본의 운명은 결정적으로 규정되리라 하는 데서 내 딴에는 자신을 가지고 출발했던 것이다. 일본은 최초 지나사변(支那事變·중일전쟁)을 불확대 방침 밑에 현지 해결코자 했으나 결국은 대세에 휩쓸려 큰일을 저지르고 말았으니 이제는 일본은 역사적 심판에 도달했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준비가 있어야겠다. 그 준비의 현실적 기회를 학병을 통해 군(軍) 능력을 체득케 함에 있다고 하기 때문이었다.
세계정세의 歸趨 여하는 역사가 판단한다
기자 : 세계의 금후(今後) 동향을 어떻게 보는가.
육당 : 《평화일보》도 딱하다. 나 같은 사람의 세계 정세 관찰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나는 이 문제에 세상에서 밀려 퇴촌(退村)한 자인데 …. 그래도 말하라면 대담 솔직히 나의 우견(愚見)을 이야기하겠다.
세계의 장래 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나는 역사적 귀추(歸趨)로 보아 응당 미소(美蘇)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세계 대세가 하루아침에 미소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인지는 예측하기 곤란하다. 인류사상을 역사적 과정으로 볼 때 자유주의와 통제주의는 적어도 30~40년은 대립 항쟁해 왔다. 러시아의 ‘데리미 코프스키’는 그의 소설에서 “신(神)들은 죽었다”며 이 항쟁관계를 구체적으로 표현했는데, 현재에 있어서 세계의 항쟁대립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다. 이 항쟁은 현 세계에 있어 일단은 급한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통제주의를 완전히 대표하는 것이 소련이고, 자유주의를 조금 꼬부라뜨려서 표현한 것이 미국이다.
이러한 대립이란 필연적으로 파탄을 초래할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즉 미소전쟁으로 결론지을 것이다. 미소가 아무리 자중(自重)한다지만 그것은 전부 일시적 책략(策略)에 지나지 않고 결국은 언제든지 한번 당면하고야 말 사실이다. 당면한 ‘발칸 문제’를 간단히 해결하고 동양의 조선 문제를 단단히 해결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단시간이지 영원한 해결책은 아닐 것이다. 이리하여 결국 미소전쟁이 시작되는데 그 결과는 현재로선 소련이 패배하고 미국은 승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이 원자탄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매우 유리할 것이다. 만약 시일이 오래 끄는 관계로 그동안 소련이 원자탄을 가지고 영토 안에 들어갈 수 있게 준비가 되는 날에는 미국 입장은 대단히 불리해질 것이다. 우리 예측대로 승리하고 난 미국은 어떻게 되겠는가?
카를 마르크스가 말한 내부 분열에 의한 파탄은 미국을 두고 한 말이라 볼 수 있다. 전 세계의 금과 은을 대부분 차지하고, 많은 물자로 풍부한 자급자족 생활을 하나 드디어는 자본주의의 자체 모순으로 인한 내부분열의 파탄으로 결말지을 것이니 그 단계가 지나고 나면 그때는 전 세계 문화가 좀 평등화하는 동시에 인류는 본질적으로 자기반성을 하는 시기가 오지 않는가. 역사적으로 고찰해서 그렇게 생각된다.
선언문안 起草 당시에 主見相違로 서명거절
기자 : 귀하는 어찌해 3·1독립선언문을 기초하면서 33인에 가담치 않았는가.
육당 : 나는 지금 말한 바와 같이 3·1운동을 민족윤리운동으로 체득하고 그 실천을 위해 이에 관한 여러 가지 문안을 기초한 것인 까닭에, 그 운동이 정치운동으로 의도와는 달리 추진됨에 따라 그 문안을 기초하면서도 서명치 않은 제일(第一)의 이유이며, 또 한 가지 이유는 민족적 거족적 민족윤리운동에 기독교나 천도교가 독점하며 중심이 되는 감이 농후하기에 서명을 거절했던 것이다.
문안은 내가 기초했으나 이 운동에는 나의 주관대로 참여한 것이지 결코 그 활동으로 민족자결이 실현되리라고는 믿지 않았던 것이다.
기자 : 귀하의 현재를 어떤 사람은 도피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때를 기다린다는 등의 해석이 구구한데 귀하의 현재나 장래에 처할 태도는 어떠한가?
육당 : 도피라는 것은 자격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지, 무자격한 사람은 세상에서 밀려났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책이나 만들어 그걸로 호구지책(糊口之策)도 할 겸, 세상에 공헌이 다소라도 될 수 있다면 망외(望外)의 영광이겠다. 그러니 내가 도피라든가 은거를 한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다. 다소나마 자신을 가지고 책장사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런 시골이 아주 편리하다는 점을 느낀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어느 날 손님 안 오시는 날이 없는데… 물론 그것은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름자가 잘 알려졌던 까닭이지만 하여간 나에게는 큰 부담이다.
나 같은 사람이 세상에 무슨 소용이 있겠다고… 자숙한다는 것도, 자숙해야 때를 씻고 다시 세상에 나가 자리를 차지할래야 그것도 필요하겠는데, 그런 자격도 처지도 못 되니 부당하다. 세간에서 그렇게 보는 것은 인간 최남선을 너무도 이름 석 자만 안 탓이다. 나라는 인간은 이제는 책이나 쓰려고 결심한 자이니 자숙이고 도피고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현재도 그러하고 장래도 그러한 도리밖에 없다. 춘원(春園) 같은 사람은 또 모르겠다.
기자 : 조선의 현재와 장래를 여하히 보는가?
육당 : 나같이 세상에서 밀려들어와 시골구석에서 책이나 쓰고 겨우 끼니나 때우는 자에게 무슨 의견이 있겠소. 또 있다손 치더라도 나 같은 존재가 무슨 말을 할 존재가 될 것인가. 오히려 이런 어려운 문제에 나 같은 존재의 의견을 게재하면 화(禍)가 될지 모를 것이나, 강청하니까 하는 말인데 나의 요새 소감을 말하겠다.
해방된 후에 이런 참혹한 상태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젠 3주년을 맞이하는데 이런 상태니 결국 우리는 결코 총명한 민족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성도 있고 비판도 있고 자성도 있어야 완전한 인격자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들은 그것이 부족한 것 같다. 삼일절 기념일만 해도 벌써 세 번째 맞이하는데 이 사태가 더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조선민족은 총명치 못하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주변에는 너무도 관념적 정치가가 많은 성싶다. 밭 갈고 논 갈고 공장의 기계를 돌리고 하는 것이 우선 급선무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것도 나의 어리석은 생각이고 한낱 철없는 생각일지 모른다. 이 작은 땅덩어리를 그나마도 미소 양국이 차지하고 있으니 답답할 따름이나 어떻게 해야 한다는 명제는 역사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고 나 같은 사람이 운운할 바 못 된다. 정치보다는 독립이 우선이나 독립은 관념으로서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뿐이다.
변태적인 과거를 참회
행동의 합리화를 안는다
기자 : 참회의 심경은 여하한가.
육당 : 나는 민족운동을 변태적(變態的)으로 이것저것 하기도 했고 그것에 대한 말도, 한 일도 많다. 사람이 참회하면 여러 가지 죄(罪)지은 일을 후회하고 반성하여 다시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일 텐데, 나에게는 나의 신조가 있어서 행동했고 그러하기에 근본적으로 인간 최남선이가 참회를 한다는 것은 나 자신도 이해하기 곤란한 문제이다. 참회할 만한 대역(大逆)도 대죄(大罪)도 범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행동의 전체가 옳은 것이라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내가 저지른 정도의 ××××(잘못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 인식하며 참회도 할 때가 ×××××(있을 것이다.) 나는 67세 때부터 ××(출판)에 흥미를 가지고 있어 ××××××(이제껏 그것에) 종사해 왔다. ××(그러)한 바와 같이 나는 3·1독립선언문을 정치혁명운동의 의도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했기에 한낱 출판×(업)이 도(徒)이지, 혁명가로 ××(참여)한 일도 없으며 타인도 그렇게 알 것이다. 3·1운동 당시의 재판 기록을 봐도 명확할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이 시점에 참회할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내 과거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려거나 혹은 숨기려 하지 않는다. 어느 때든 솔직히 말하겠다. 나의 ×××(문제가) 나오면 학병 권유가 나오는데 그것도 이야기한 것과 마찬가지다. 요사이는 오히려 저술가 혹은 작가로서 때를 만난 ××(상태)다. 자유롭게 쓰고 ×× 수 있는 까닭이다. 나를 괴롭히지 말기를 바란다. 최남선이란 석 자가 ×(혁)명가연(然)하게 세상에 말 되어진 탓에 여러 가지 문제를 ×××(낳았다.)⊙
⊙ “인간 최남선이 참회한다는 것은 나 자신도 이해하기 곤란한 문제”
⊙ “해방공간, 정치보다는 독립(통일)이 우선. 독립은 관념으로 해결할 수 없어”
⊙ “독립선언문안은 내가 기초했으나 그 활동으로 민족자결이 실현되리라 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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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泰完 月刊朝鮮 기자
역설적이게도 한국 현대사의 해방(解放)공간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1890~1957) 선생에게 가장 불행한 시절이었는지 모른다. 젊은 시절, 전통 한시(漢詩)는 물론 창가, 신체시, 기행수필을 썼고 일제 치하 ‘조선학’을 제창하고 조선의 정체성을 탐구한 역사학자였던 그는 누구보다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열여섯, 《황성신문》에 ‘일화배척(日貨排斥)’을 주장하는 투고를 했다가 구류를 살았고 서른에는 3·1독립선언문을 기초했다는 이유로 2년8개월 형을 언도받으면서도 기개를 꺾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반겼던 해방 이후 그는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내야 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곧이어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면서 이듬해 육당은 세 번째 영어의 몸이 됐다. 독립된 국가 대한민국이 마련한 소급법(遡及法)에 의해서였다. 그의 나이 예순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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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문 감옥에 수감될 무렵(1920년)의 육당 최남선. |
인터뷰 내내 육당은 시종 낮은 자세였다. “당신네들 저널리즘의 대상이 아니다”고 말하거나 스스로를 “세상에서 밀려나와 퇴촌(退村)·낙향(落鄕)한 자”라는 표현이 여러 대목 나온다. 또 육당의 행보에 대해 “어떤 이는 도피라고 하고, 어떤 이는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고 묻자, 그는 도피, 은거 모두를 부인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 같은 사람이 세상에 무슨 소용이 있겠다고… 자숙한다는 것도 그런 자격도 처지도 못되니 부당하다. 이제는 책이나 쓰려고 결심한 자이니 자숙이고 도피고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현재도 그러하고 장래도 그러한 도리밖에 없다. 춘원(春園) 같은 사람은 또 모르겠다.”
육당은 인터뷰에서 “삼일운동에 참여한 것은 민족윤리운동이지 정치운동이라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만약 정치운동으로 발전할 줄 미리 알았더라면 그 운동에 관여치 않았을 것이라는 점도 강조한다. 해방공간의 좌우이념 갈등에 대해서는 “우리 주변에 너무 관념적 정치가가 많다. 밭 갈고, 논 갈고, 공장의 기계를 돌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일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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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기념(記念) 특집(特輯)
독립선언문 기초자인 최남선씨에게 그 당시와 최근 심경에 대한 본사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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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년의 최남선. 1956년 무렵 병환 중인 그를 장손인 최학주(崔學柱)씨가 촬영했다. |
이에 본사는 당시의 독립선언문 기초자(起草者)인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씨를 3월 1일 오후 1시 우이동 산장으로 찾아가 순연히 공명정대(公明正大)한 입장에서 그의 기탄없는 의견을 타진한 바 있었다. 실제로 그는 은거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나 가로(街路)에 범람하고 있는 그의 각종의 저서는 그의 사회적 활동이 맹렬한 것을 표명하는 좋은 예이며, 동시에 선언문 기초 이후의 육당의 행동과 심경을 타진하는 것도 무의미치는 않을 것으로 본사는 감히 그와의 일문일답기(一問一答記)를 소개하는 바이다. 사진은 최남선씨.
피로 물든 宣言文 공동 목적에 민족분열 없었다
기자 :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성서(聖書)라고까지 하는 3·1독립선언문과 그에 부수된 각종의 서한(書翰)을 기초한 이후 귀하의 행동에 대해 항간에는 각양각색의 해석과 추측이 있다. 이에 대한 기탄없는 귀하의 자기비판 여하는?
육당 : 나는 지금 당신네들 저널리즘의 대상이 안 될 것으로 나 자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세상에서 밀려들어와 있으면서 책권(冊卷)이나 써서 그날그날을 지나간다는 것을 잘 아는 처지들이 아닌가? 나는 얘기할 것도 없고, 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않으며, 용기도 없고, 말할 준비도, 재료도 없다. 세상에서 밀려들어와 낙향해서 사는 놈이 무슨 의견이 있겠는가.
3·1운동 선언문과 그에 부수된 사통(四通)의 서한을 작성한 것은 내가 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 운동을 달리 생각했던 까닭에 몸소 그 운동의 과정에서 같이 행동을 따르지는 않았었다. 지금 사통의 서한과 선언문을 생각할 때 현재로 보아서도 그리 적합지 않다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을 미루어 보아도 그 역사는 진보하는 듯하면서도 그 보조(步調)는 매우 지지(遲遲·매우 더디다는 뜻)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바다.
나는 삼일운동을 정치운동이나 혁명운동으로 체득(體得)지 아니한 까닭에 그 이후의 나의 행동에 대해 그 운동과 결부시켜 세간에서는 각양(各樣)으로 생각하고 있다 할지라도 나 자신 그에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나는 나대로 그 운동을 떠나서 나의 소신대로 행동했으며 여러 가지 스스로 반성하고 비판하는 점도 있으나 그 이후의 나의 행동을 3·1운동과 결부시킨다는 것은 큰 착오다.
정치활동보다 민족윤리운동으로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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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강북구 우이동의 최남선 생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으며 터에 기념비만이 남아 있다. |
육당 : 나는 원래 사회운동이라든지 정치운동에 흥미를 안 가진 성격인 고로 이러한 민족운동에 대해 나는 그것이 윤리운동이지 정치운동이라 보지 않는다. 그런 고로 3·1운동 재판 당시의 조서(調書) 문에도 나는 정치운동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조선 국민의 윤리운동으로 참여했다고 썼지만, 나는 3·1운동을 정치활동으로 안 본다. 조선사람이 일본통치를 받아 십년이나 되는 날까지 여러 가지 형식으로 일본에 대한 반박(反駁)의 심리를 발휘했지만 해외 각국은 그다지 그것을 인식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적 반박심을 표현할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일본정치에 만족하고 납득하고 있다는 것으로 보이니까, 이번 운동에 있어 독립이 실현될지 못 될지는 문제가 아니고 적어도 조선사람이면 일본에 대한 반박심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 해 그렇게 실천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정치운동으로 할 심산은 아니었다. 내가 정치적 의도하에 그리했다는 것은 그때도 없는 일이고, 그 후에도 없었고, 또 지금도 없다. 만약 정치활동으로 발전할 줄 알았다면 나는 도대체 그 운동에 관여치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러하거니와 그때도 일대(一大) 민족의 윤리운동으로 전개해야 우리 민족정신을 작흥(作興)시키며 그것으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기백(氣魄)을 보여야 한다는 나의 철없는 생각이었고, 지금도 그 철없는 생각은 변치 않고 있다. 내가 나를 비판한다면 나의 처세술이라고 할까? 일관한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가능한 한도에서, 가능한 기회를 포착해 나의 민족윤리운동을 실현하려 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나는 삼일운동을 그것대로 민족윤리운동으로 끝막은 것으로 생각하고 이상에 말한 나의 처세도(處世道)의 지침에 의해 가능타당하다고 생각한 방법으로 그 운동을 관찰해 왔던 것에 불과하기에 비혁명적 태도였던 것도 사실이며 그렇다고 해서 지금도 나의 신조를 굽히려고 하지를 않는다.
기자 : 현재에 있어 좌(左)는 좌대로 우(右)는 우대로 3·1독립선언문과 그 이후의 혁명정신을 계승 해석하고 있는데 귀하의 소견은?
육당 : 그 당시도 그러했지만, 그 운동을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천도교는 천도교대로 해석함에 있어 더욱이 운동의 성격을 민족윤리운동에 결부시키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좌익(左翼)은 좌익대로 어떤 해석을 할는지 모르고 우익(右翼) 역시 그러할 것이로되 나는 자고로 3·1운동을 민족윤리운동으로 생각하는 까닭에 별다른 의견이 없다. 나의 의견을 말하는 것은 삼가겠으나, 3·1운동은 윤리, 즉 민족정신의 정화(淨化) 앙양(昻揚)을 기초로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계승 체득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한다.
단군을 학술적으로 연구
민족정신 喚起에 전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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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당 최남선이 기초한 3·1독립선언서. |
육당 : 단군과 신무천황을 형제간이라고 했다 하여 비난하는 점은 오해다. 이것은 우원(宇垣·우가키) 총독과 접촉할 때 단군을 학술적으로도 연구했고, 민족적으로도 항상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요컨대 조선민족의 정신을 어느 정도 세워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심경을, 기회를 봐서 조선신궁을 남산(南山)에다 만든 이상 그것을 헐어버릴 수 없는 일이니, 북한산 일대를 신성(神聖)으로 하여 단군신사를 건립하고, 그 단군신사를 중심으로 조선통치를 해 나가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원에게 여러 번 그런 안을 제출해 보았으나 늘 반대되고 말았는데—나로서는 조선민족의 정신을 환기시킬 수도 있으려니와 또 신도(神道)를 연구해 보니, 그런 기회도 있어 주장한 것이다.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까딱하다가는 몇백 년 계속될지 모르니 이렇게 해서라도 기형적(畸形的)이나마 우리 민족정신을 계승하자고 해서 생각한 것인데 요사이 그런 것은 다 빼고 그저 신무천황과 단군은 형제간이라고 했다고 하니 그것도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며, 구구하게 변명도 하지 않겠다. 다만 일본인이 우리 성신(聖神)을 자기 선조 신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라고 하는 언어도단적 단군 말살은 나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저지되었다 하겠다. 사람의 결부는 떼어 놓을 수 있으나 사람이 신을 마음대로 결부시킨다는 것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기자 : 귀하는 어찌하여 학병(學兵) 권유의 진두(陣頭) 활동을 담당하였던가?
육당 : 학병 문제가 나와서, 그 기한이 9월말에 되도록 불과 응모자가 입명(廿名·스무 명이란 뜻)에 지나지 않았다. 나중에는 총독에 대해 면목이 없게 되었다. 《경성일보(京城日報)》 사장과도 상담해 보고 또 경무국장과도 협의해 보았으나 다들 별신통한 도리가 없다 하니, 나로서도 당시 학병문제에 관하여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즉, 소기(小磯)가 화랑정신(花郞精神)을 부르짖는 데서, 이 부르짖는 민족자결이 연상되어 ‘옳지! 이 기회에 우리가 조선독립을 위해 군대훈련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8월말 경의 성적이 그 모양으로 9월에 들어가 ‘글’을 한껏 써서 《매일신보(每日申報)》에 보냈더니 그만 이것이 경무국 검열에 걸렸다. ‘글’ 내용은 조선민족이 화랑도의 정신을 발휘하여 학병에 나가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정성껏 썼는데 그만 게재 금지가 됐으니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당시 국민총력연맹에 있는 간우(簡牛)가 내 집을 찾아와서 하는 말이 “그 글을 보니 대단히 좋아 총독한테 권고해 신문에 실리도록 하였으니 그 취지에 ××(응답)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대답하여 “할 말은 그 ‘글’에서 다 썼으니 더 할 말이 없다”며 보냈다. 그가 다음날 또 찾아와서 하는 말이 “암만해도 응모자가 적어 청년을 동원하기 위한 행사를 하게 돼 국내 과거 혁명투사 모모씨가 강연하게 되었으니 당신도 해 주시오” 하길래 “나 같은 게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하면서 거부했다. 그 다음에 이자가 또 찾아와 “이번에는 일본에 가서 응모운동을 하게 되었으니 가 주시오” 하길래, 그때도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것은 신문에 다 발표했으니 할 말이 없다. 못간다”고 했더니 그 다음에 “모모씨도 동행하니 가라”고 강권하기에, 그런 말을 듣고 보니 그러지 않아도 학병에는 찬성이었고 하던 판이니까 어물어물하게 되자 열차표를 주선한다, 무엇 한다 해서 가게 결정짓고 말았다.
당시 세간에서도 2~3년이면 일본은 패망(敗亡)할 것이라는 예측들은 다들 하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만약 그날이 오게 되면 실권을 잡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되겠으니 그것은 젊은 청년 다수를 단병(單兵)으로 보내 군사훈련을 시킬 필요가 있다고 내 딴에는 생각했다. 적어도 사관학교를 나오고, 비행기 조종을 할 줄도 알고, 조직력과 전투력을 배우게 해야 된다고 말이다.
적어도 5000명은 보내 약 2000명은 죽는다 치더라도 3000명은 훈련해야 된다. 그러면 일대(一大) 세력(勢力)은 형성할 수 있으니 그것을 중심으로 마치 독일의 ‘나치스’를 조직하듯 해야 된다는 생각을 전제로 학병을 찬성했다. 그래서 결국 동경(東京)으로 떠나게 되어 막상 서울역에 나가 보니 동행한다는 혁명 요인 모모씨는 안 왔고 그러고 보니 차중(車中)에서 웅성웅성해서 나를 단장 격으로 정해 행동하기로 정하는 모양이니 부득이 면(免)치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 동경에 가기까지 하관(下關·시모노세키)과 대판(大阪·오사카)에서 한 번씩 연설하고 이광수(李光洙)는 경도(京都)로, 나는 동경으로 갔다. 동경에 가서는 “학생이면 누구든 찾아오너라. 와서 이야기해 보자”고 하면서 만났다. “그래, 너희들 젊은 사람이 가서 이 시국을 담당치 않으면 누가 하겠느냐. 이 기회는 우리가 군사훈련을 받고, 조직이라든가 전투법이라든가를 배우기에 가장 좋은 때다. 이 기회를 놓치면 또다시 못 얻는 기회다”라고 역설했다. 그러자 대원 중에는 내 말에 의혹을 가지고 “학병에 지원하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주구(走狗) 노릇 하는 것”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약 10일간 있는 동안에 몇백 명을 설득했다. 그리고 돌아왔더니 간우의 환영은 대단했다. 그래 간우보고 한 가지 말하기를 “학생들의 희망은, 나가기는 하겠으나 나갈 때 한번 마음껏 강연을 하겠다고 하니 주선하라”고 부탁했다.
결국 이것은 실현되지 못했지만—그러나 내가 동경에서 학생들에게 화랑도를 역설하고, 우리 민족이 일본반이탈(日本絆離脫)을 전제한 자율적 전투 제(諸) 기술을 체득하기 위해 지원하라고, 학생을 불온적(不穩的)으로 선동했다며 총독 관헌의 백안시(白眼視)도 상당했으나 나의 신념이었기에 부동(不動)했다. 그러한 경위로 내가 관계하는 건국대학은 한 사람을 내놓고는 다 출병했다. 나의 이런 주장도 결국은 일본이, 자의적이 아닌 전쟁에 돌진하게 되고, 세계역사는 일본에게 세계정복을 용서치 않는 한, 일본의 운명은 결정적으로 규정되리라 하는 데서 내 딴에는 자신을 가지고 출발했던 것이다. 일본은 최초 지나사변(支那事變·중일전쟁)을 불확대 방침 밑에 현지 해결코자 했으나 결국은 대세에 휩쓸려 큰일을 저지르고 말았으니 이제는 일본은 역사적 심판에 도달했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준비가 있어야겠다. 그 준비의 현실적 기회를 학병을 통해 군(軍) 능력을 체득케 함에 있다고 하기 때문이었다.
세계정세의 歸趨 여하는 역사가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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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년 11월 최남선이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 《소년》 창간호의 표지다. |
육당 : 《평화일보》도 딱하다. 나 같은 사람의 세계 정세 관찰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나는 이 문제에 세상에서 밀려 퇴촌(退村)한 자인데 …. 그래도 말하라면 대담 솔직히 나의 우견(愚見)을 이야기하겠다.
세계의 장래 정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나는 역사적 귀추(歸趨)로 보아 응당 미소(美蘇)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세계 대세가 하루아침에 미소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인지는 예측하기 곤란하다. 인류사상을 역사적 과정으로 볼 때 자유주의와 통제주의는 적어도 30~40년은 대립 항쟁해 왔다. 러시아의 ‘데리미 코프스키’는 그의 소설에서 “신(神)들은 죽었다”며 이 항쟁관계를 구체적으로 표현했는데, 현재에 있어서 세계의 항쟁대립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다. 이 항쟁은 현 세계에 있어 일단은 급한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통제주의를 완전히 대표하는 것이 소련이고, 자유주의를 조금 꼬부라뜨려서 표현한 것이 미국이다.
이러한 대립이란 필연적으로 파탄을 초래할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즉 미소전쟁으로 결론지을 것이다. 미소가 아무리 자중(自重)한다지만 그것은 전부 일시적 책략(策略)에 지나지 않고 결국은 언제든지 한번 당면하고야 말 사실이다. 당면한 ‘발칸 문제’를 간단히 해결하고 동양의 조선 문제를 단단히 해결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단시간이지 영원한 해결책은 아닐 것이다. 이리하여 결국 미소전쟁이 시작되는데 그 결과는 현재로선 소련이 패배하고 미국은 승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이 원자탄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매우 유리할 것이다. 만약 시일이 오래 끄는 관계로 그동안 소련이 원자탄을 가지고 영토 안에 들어갈 수 있게 준비가 되는 날에는 미국 입장은 대단히 불리해질 것이다. 우리 예측대로 승리하고 난 미국은 어떻게 되겠는가?
카를 마르크스가 말한 내부 분열에 의한 파탄은 미국을 두고 한 말이라 볼 수 있다. 전 세계의 금과 은을 대부분 차지하고, 많은 물자로 풍부한 자급자족 생활을 하나 드디어는 자본주의의 자체 모순으로 인한 내부분열의 파탄으로 결말지을 것이니 그 단계가 지나고 나면 그때는 전 세계 문화가 좀 평등화하는 동시에 인류는 본질적으로 자기반성을 하는 시기가 오지 않는가. 역사적으로 고찰해서 그렇게 생각된다.
선언문안 起草 당시에 主見相違로 서명거절
기자 : 귀하는 어찌해 3·1독립선언문을 기초하면서 33인에 가담치 않았는가.
육당 : 나는 지금 말한 바와 같이 3·1운동을 민족윤리운동으로 체득하고 그 실천을 위해 이에 관한 여러 가지 문안을 기초한 것인 까닭에, 그 운동이 정치운동으로 의도와는 달리 추진됨에 따라 그 문안을 기초하면서도 서명치 않은 제일(第一)의 이유이며, 또 한 가지 이유는 민족적 거족적 민족윤리운동에 기독교나 천도교가 독점하며 중심이 되는 감이 농후하기에 서명을 거절했던 것이다.
문안은 내가 기초했으나 이 운동에는 나의 주관대로 참여한 것이지 결코 그 활동으로 민족자결이 실현되리라고는 믿지 않았던 것이다.
기자 : 귀하의 현재를 어떤 사람은 도피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때를 기다린다는 등의 해석이 구구한데 귀하의 현재나 장래에 처할 태도는 어떠한가?
육당 : 도피라는 것은 자격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지, 무자격한 사람은 세상에서 밀려났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책이나 만들어 그걸로 호구지책(糊口之策)도 할 겸, 세상에 공헌이 다소라도 될 수 있다면 망외(望外)의 영광이겠다. 그러니 내가 도피라든가 은거를 한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다. 다소나마 자신을 가지고 책장사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런 시골이 아주 편리하다는 점을 느낀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어느 날 손님 안 오시는 날이 없는데… 물론 그것은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름자가 잘 알려졌던 까닭이지만 하여간 나에게는 큰 부담이다.
나 같은 사람이 세상에 무슨 소용이 있겠다고… 자숙한다는 것도, 자숙해야 때를 씻고 다시 세상에 나가 자리를 차지할래야 그것도 필요하겠는데, 그런 자격도 처지도 못 되니 부당하다. 세간에서 그렇게 보는 것은 인간 최남선을 너무도 이름 석 자만 안 탓이다. 나라는 인간은 이제는 책이나 쓰려고 결심한 자이니 자숙이고 도피고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현재도 그러하고 장래도 그러한 도리밖에 없다. 춘원(春園) 같은 사람은 또 모르겠다.
기자 : 조선의 현재와 장래를 여하히 보는가?
육당 : 나같이 세상에서 밀려들어와 시골구석에서 책이나 쓰고 겨우 끼니나 때우는 자에게 무슨 의견이 있겠소. 또 있다손 치더라도 나 같은 존재가 무슨 말을 할 존재가 될 것인가. 오히려 이런 어려운 문제에 나 같은 존재의 의견을 게재하면 화(禍)가 될지 모를 것이나, 강청하니까 하는 말인데 나의 요새 소감을 말하겠다.
해방된 후에 이런 참혹한 상태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젠 3주년을 맞이하는데 이런 상태니 결국 우리는 결코 총명한 민족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성도 있고 비판도 있고 자성도 있어야 완전한 인격자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들은 그것이 부족한 것 같다. 삼일절 기념일만 해도 벌써 세 번째 맞이하는데 이 사태가 더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조선민족은 총명치 못하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주변에는 너무도 관념적 정치가가 많은 성싶다. 밭 갈고 논 갈고 공장의 기계를 돌리고 하는 것이 우선 급선무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것도 나의 어리석은 생각이고 한낱 철없는 생각일지 모른다. 이 작은 땅덩어리를 그나마도 미소 양국이 차지하고 있으니 답답할 따름이나 어떻게 해야 한다는 명제는 역사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고 나 같은 사람이 운운할 바 못 된다. 정치보다는 독립이 우선이나 독립은 관념으로서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뿐이다.
변태적인 과거를 참회
행동의 합리화를 안는다
기자 : 참회의 심경은 여하한가.
육당 : 나는 민족운동을 변태적(變態的)으로 이것저것 하기도 했고 그것에 대한 말도, 한 일도 많다. 사람이 참회하면 여러 가지 죄(罪)지은 일을 후회하고 반성하여 다시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일 텐데, 나에게는 나의 신조가 있어서 행동했고 그러하기에 근본적으로 인간 최남선이가 참회를 한다는 것은 나 자신도 이해하기 곤란한 문제이다. 참회할 만한 대역(大逆)도 대죄(大罪)도 범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행동의 전체가 옳은 것이라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내가 저지른 정도의 ××××(잘못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 인식하며 참회도 할 때가 ×××××(있을 것이다.) 나는 67세 때부터 ××(출판)에 흥미를 가지고 있어 ××××××(이제껏 그것에) 종사해 왔다. ××(그러)한 바와 같이 나는 3·1독립선언문을 정치혁명운동의 의도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했기에 한낱 출판×(업)이 도(徒)이지, 혁명가로 ××(참여)한 일도 없으며 타인도 그렇게 알 것이다. 3·1운동 당시의 재판 기록을 봐도 명확할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이 시점에 참회할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내 과거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려거나 혹은 숨기려 하지 않는다. 어느 때든 솔직히 말하겠다. 나의 ×××(문제가) 나오면 학병 권유가 나오는데 그것도 이야기한 것과 마찬가지다. 요사이는 오히려 저술가 혹은 작가로서 때를 만난 ××(상태)다. 자유롭게 쓰고 ×× 수 있는 까닭이다. 나를 괴롭히지 말기를 바란다. 최남선이란 석 자가 ×(혁)명가연(然)하게 세상에 말 되어진 탓에 여러 가지 문제를 ×××(낳았다.)⊙
| [편집자 주] ×는 신문이 훼손돼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이다. 앞뒤 문맥을 살펴 괄호에 추정되는 문장을 부가했다 문장 표기는 현대어를 따랐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