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帝 고등계 형사, 蔡萬植의 ‘하이칼라 머리’를 한줌이나 잘라”
金泰完 月刊朝鮮 기자

한국문학은 20세기 현대사의 구조적 모순을 비유와 상징의 언어로 표현한 결과물이다. 사실, 해방공간을 견뎌 낸 한국문인들의 창작(創作)과 절절한 체험은 세계문학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 국권(國權)을 잃었고 말과 글, 이념과 풍속의 갈등을 겪었으며 해방 후 동족상잔(同族相殘)과 전쟁, 여기다 가난과 독재, 산업화와 민주화의 세례를 압축적으로 체득(體得)해야 했다.
지금은 폐간된 옛 잡지를 펼쳐보면 시대를 풍미한 당대 문인들의 이야기가 여전히 살아 숨을 쉬고 있다. 때론 궁벽하고 구차하며 의뭉스럽지만 현대사를 버텨 낸 ‘민얼굴’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지금은 기억조차 바랬지만, 시간의 먼지를 탈탈 털어내 문인들의 실화(實話)를 발굴해 소개한다.
소설가 최태응(崔泰應·1906~1998)이 《여성계》 1958년 12월호에 쓴 <고(故) 채만식 선생의 인간과 문학>을 보면 채만식은 자신의 소설에 등장하는 작중 인물처럼 능청맞고 의뭉스럽다. 두 사람은 오래 교우(交友)한 사이다.
<태평천하>와 <탁류>, <레디메이드 인생>를 쓴 소설가 채만식(蔡萬植·1902~1950)은 평소 주변들 사이에서 “건방지고 교만, 오만 무쌍하며 도도하다”는 말을 곧잘 들었다. 그러나 그가 가는 곳마다 ‘수상쩍게 생긴’ 청년들이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혀서 “선생님”으로 받들고 따랐다. 일제(日帝) 고등계 형사들이 그런 그를 밉게 볼 수밖에 없었다.
1937년 일제가 ‘국민총력운동’이라는 명목하에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머리를 박박 깎아야 한다는 ‘삭발령’을 내렸다. 채만식은 어느 날 문학청년 대여섯 명과 어느 유지(有志)의 사랑방에서 문학과 역사, 민족 이야기를 하며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그때 고등계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뭐 하는 사람들이야, 모두?”
무슨 큰 범죄 현장이나 덮치는 양 아래 뒷문을 열어 제치고 손전등을 번쩍거리며 달려드는 사복 형사들이 흙 묻은 신발로 방바닥을 더럽히며 소리를 질렀다.
채만식은 천천히 술잔을 내려놓고 이렇게 말했다.
“노형들이야말로 뭐 하는 사람이길래 이렇게 예의를 무시하고 떠드는 거요?”
오히려 당당한, 안하무인(眼下無人) 격인 채만식의 언변과 태도에 앙칼지게 생긴 형사 하나가 달려들더니 악담을 퍼붓고 조그마한 가위를 꺼내들고 어이없게도 선생의 ‘하이칼라 머리’를 움켜쥐고 한줌이나 자르고 말았다. 훗날 채만식은 이렇게 말했다.
“허허허, 그러니 꼴이 흉해서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이렇게 상고머리로 올려 깎아 버렸지. 세상에….”
채만식의 너털웃음이 귀에 들리는 듯하다.
金八峯과 관상쟁이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의 실질적인 지도자이자 기자·시인·소설가·평론가로 이름을 알린 김팔봉(金八峯·본명 金基鎭·1903~1985)이 1934년 가을에 《청년조선(靑年朝鮮)》이라는 잡지를 창간할 무렵의 일이다. 팔봉은 그 잡지를 들고 함경북도 웅기(雄基)로 가서 축하광고를 모금해 볼까 하는 마음을 먹었었다.
비슷한 시기, 잡지 《삼천리(三千里)》를 창간했던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1901~1958)이 함북 나진(羅津)의 지주들에게서 수천 원의 광고료를 받아 냈다는 사실이 팔봉의 귀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1929년 서울에서 창간된 《삼천리》는 취미·시사 중심의 월간지로 김동환과 김동인 이광수(李光洙) 염상섭(廉想涉) 정지용(鄭芝溶) 등 당대 최고의 필진이 참여했었다.
팔봉은 함북 출신의 최창익(崔昌益·1895~1957)에게 길안내를 맡기기로 하고, 불일간(不日間) 서울을 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최창익은 훗날 무정(武亭), 김두봉(金枓奉) 등과 함께 조선독립동맹에서 활동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다.
두 사람은 떠나기에 앞서 순전히 심심풀이로 왕십리의 한 관상쟁이를 찾아갔다. 이 작자는 팔봉의 얼굴을 한참 보더니 “큰 재수가 있을 그런 기운이 얼굴에 있다”는 것이었다. 팔봉은 “내가 함북 지방엘 갈 예정인데 그곳에 가서 돈을 얼마나 벌어 오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적지 않은 돈을 얻어 오게 될 것이니 염려 말고 갔다오라”는 것이었다.
과연 그의 말처럼 팔봉은 웅기, 나진에서 5000여 원의 축하 광고료를 벌어가지고 서울로 돌아왔었다. 당시 5000원이면 큰돈이었다. 팔봉은 그 돈으로 우선 인쇄소를 운영키로 하고, 9포인트 활자를 주조(鑄造)했다. 그러던 중 왕십리의 관상쟁이를 다시 찾아갔다.
“당신 말과 같이 이번에 적지 않은 돈을 벌어 왔는데, 그 돈으로 인쇄소를 하나 차릴 작정입니다. 인쇄소가 잘될까요?”
관상쟁이는 일언지하에 그만두라고 말리는 것이었다. 팔봉이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그 돈을 그냥 가만히 가지고 있지 아무 일도 착수하지 말라며 “인쇄소를 설비(設備)해 놓았댔자 며칠 안 가서 그냥 없어지고 말 것”이라는 부언(附言)까지 하는 것이었다.
팔봉은 관상쟁이의 말을 듣지 않고 그냥 인쇄소를 차렸다. 애당초 관상쟁이를 찾은 것이 심심풀이였기 때문이다.
1934년 12월 1일에 인쇄소를 개업했는데 뜻밖에 엿새 뒤인 7일 새벽에 경기도 경찰부 형사들이 팔봉의 집을 급습했다. 그 후 70여 일 동안 서울과 전주의 유치장에 머물다 가까스로 석방되어 서울로 돌아왔는데, 이미 인쇄소는 최창익의 동생이 제 맘대로 처분한 뒤 줄행랑을 친 상태였다. 말하자면 관상쟁이의 예언이 적중한 셈이었다.
그 후 최창익은 어떻게 됐을까. 관상쟁이는 최창익에게 “당신한테는 돈 대신 여자가 생길 징조가 농후하다”고 말했었는데, 팔봉이 경찰에 잡힌 뒤 2주 동안 동대문 유치장에 있다가 전주로 압송(押送)됐을 무렵, 최창익은 허정숙(許貞淑·1902~1991)과 눈이 맞아 금강산으로 밀월여행을 떠났으니 이 역시 관상쟁이 예언이 적중한 셈이었다. 일제시대, 자유연애주의자로도 유명한 허정숙은 여성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로 1948년 4월의 남북협상에 북측의 여성계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팔봉은 그 뒤 한번도 관상쟁이를 찾지 않았다고 한다. 한때 마르크시즘을 열렬히 신봉했던 유물론자(唯物論者) 팔봉이 《수필(隨筆)》 1961년 6월호에 관상쟁이 이야기를 쓴 이유는 뭘까.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미신이라고 식자(識者)가 비웃는 여러 일들이 허망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나는 아직도 해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전혀 허망한 짓거리라 한다면, 어째서 내가 당한 것처럼 그의 예언이라는 것이 쇳소리가 날 만큼 들어맞는 것일까? 이같이 적중시킨 무수히 많은 예언을 과학적으로 부정할 이론을 나는 아직 듣지 못했다. 아마 나는 이 문제를 내가 죽는 날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죽을려나 보다. …>
잡지 《野談》과 金東仁
대한(大寒)을 앞둔 1936년 1월 20일 《신인문학(新人文學)》 기자가 《야담(野談)》이란 잡지를 창간한 소설가 김동인(金東仁·1900~1951) 선생을 찾아갔다. 그의 사무실은 서울 종로3가 덕원(德元)빌딩 3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1935년 12월 동인이 창간한 《야담》은 자신이 자본을 직접 대고 편집을 하고 글을 써서 돈벌이를 하려 했던 잡지였다. 당대 최고 소설가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은 잡지였다. 그 무렵 김동인은 살기 위해 “소설이든 야담이든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써서 지면을 메워야”(문학평론가 趙東一) 했다.
기자는 시종 《야담》을 ‘취미 잡지’로 폄훼하며 ‘지금까지 문예잡지를 만든 문인이 수두룩하지만 취미와 오락 잡지를 만든 사람은 아마 김동인씨 한 사람일 것’이라 비꼰다.
<…덕원빌딩에 발을 들여놓으니 눈앞에 《야담》 2월호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층층마다 ‘야담사는 이리로!’라는 목판(木版)이 붙어 있는 것은 우리 같은 얼간이 기자의 내방을 고려해서일 것이다, 하고 쓸데없는 혓바닥을 놀리면서 사무실로 들어갔다.…>(《신인문학》 1936년 3월호)
—(기자) 잡지를 하니 감상이 어떻습니까?
(김동인) “감상, 별 다른 것은 없지요.”
—바쁘시지요?
“네, 어떻게 바쁜지 원고(原稿) 한 장 못 쓰지요. 편집을 하네, 발송을 하네, 편지를 정리하네, 여가가 있어야지요.”
—지금 사원은 몇 분이나 됩니까?
“네 사람이지요. 사무원 두 사람에 ‘뽀이’ 한 사람하고, 나까지 넷이지요.”
—사원이 부족하겠는데요?
“부족합니다. 몇 사람 더 둬야겠어요.”
기자는 비꼬는 질문을 던진 뒤 동인의 태도를 이렇게 묘사했다.
<…씨(氏·김동인)는 담배 한 대를 꺼내서 입에 물면서 이와 같은 대화에는 별로 흥미를 못 느끼는 듯 시선을 천장에 옮긴다. 일찍이 기자는 담화 중에 김씨가 상대편의 얼굴을 별로 쳐다보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으므로, 그의 시선이 천장으로 옮겨진 것에 하등 관심을 갖지 않았다. …>
—그런데 선생은 문예작품은 쓰지 않고 야담 같은 것을 늘 쓰시는데 그건 또 무슨 주견(主見) 아래서 그러십니까?
“문예작품을 읽는 사람은 아마 2000만명 중에 단 100명밖에는 못될 것이며,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놀랄 만큼 적을 것입니다.”
—만약에 선생의 말씀 같이 순문예 작품을 이해하는 사람이 그렇게 적다고 가정한다면 신문잡지에서 늘 떠드는 대중(大衆)의 반응 같은 것을 어떻게 여기십니까?
“….”
“시인들은 아주 말씀이 아니겠군요!”
—사회에서 떠든다는 것이, 무엇보다 문예작품을 읽는다는 좋은 증거가 아닐까요?
“가령 일본 내지(內地)의 문단을 보더라도, 초기에는 정화물(情話物)이 대중의 흥미를 끌었고, 그 후는 대중소설이 대중의 독서열을 굉장히 높인 뒤, 차차 문예물을 대중이 이해하게 되었어요. 말하자면 대중소설은 대중의 초기 독서물(讀書物)이고, 문예작품은 대중의 후반기의 독서물입니다. …일본 내지 문단에 대중의 이해를 받지 못하고 가엾게 죽은 사람도 있어요. 명치(明治) 연대에 순문예작품을 썼기 때문에 생활고에 쪼들려서 결국은 죽고 말았지요. …”
일본 문단의 작가가 순문학을 고집하다 ‘생활고에 쪼들려 죽고 말았다’고 말한 대목은 김동인 자신의 처지를 빗댄 것이다. 한마디로 먹고살기 위해 《야담》을 창간했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조선문학도 대중소설에서 재발견해야만 된다는 말씀입니까?
“…아직 조선사람은 문예작품을 읽을 만한 정도에 이르지 못했지요. 우선 조선사람에게 많이 읽힐 글을 써야만 될 것입니다.”
—조선의 소설가가 그만큼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시인들은 아주 말씀이 아니겠군요!
“허허허.”
기자는 동인의 웃음소리를 듣고 이렇게 적었다.
<…여기까지 와서 씨(氏)는 그 호화로운 웃음을 웃는다. 씨가 문예작품을 안 쓰고 대중소설만 쓰는 심리를 기자는 비로소 알았다. 따라서 《야담》이라는 괴상한 잡지를 낸 주지(主旨)도 판명된 셈이다. …>
두 사람의 날 선 대화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잡지를 만드시니 자연히 대외적 관계가 복잡하고 문인들과의 교제도 달라지지요?
“뭐 순수한 잡지인 만큼 그렇게 다난(多難)할 것도 없지요.”
—이번 호에는 별로 안 쓰셨더군요. 역시 시간관계입니까?
“네, 아주 붓대를 쥘 새가 없어요. 자기 잡지에 글을 쓰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잡지나 신문에 글 쓸 수가 있어야지요.”
김동인이 창간한 《야담》은 수지가 맞지 않아 1937년 6월 운영권을 타인에게 넘겼다. 《야담》은 1945년 2월까지 발행됐는데, “판매를 위해 질을 낮출 대로 낮추고, 일본의 야사, 야담류를 마구 수록했다”(趙東一)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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