焦土의 詩
具常(1919~2004) 시인. 평론가. 본명은 常浚. 함남 원산 출생. 일본대학 졸업. 1947년 ‘응향’ 사건으로 월남, 전후에 씌어진 그의 시는 역사의식과 존재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됨. 시집으로 <구상시집><초토의 시> 등이 있음.
판잣집 유리딱지에
아이들 얼굴이
불타는 해바라기마냥 걸려 있다.
내려 쪼이던 햇발이 눈부시어 돌아선다.
나도 돌아선다.
울상이 된 그림자 나의 뒤를 따른다.
어느 접어든 골목에서 걸음을 멈춘다.
잿더미가 소복한 울타리에
개나리가 망울졌다.
저기 언덕을 내려 달리는
소녀의 미소엔 앞니가 빠져
죄 하나도 없다.
나는 술 취한 듯 흥그러워진다.
그림자 웃으며 앞장을 선다.
***
焦土의 詩 8
- 적군 묘지 앞에서
具常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워있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묻어 떼까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마음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이곳에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삼십 리 면
가로막히고
무주 공산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으로 흘러 가고,
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 나는 광주 산곡을 헤매이다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
毛允淑(1910~1990) 호는 嶺雲. 1910년 함경남도 원산(元山)에서 태어나 함흥에서 자랐다. 1931년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35년 경성제국대학 영문과 선과(選科)를 수료했다. 이 시는 6.25전쟁이 한창인 1950년 8월에 쓰여졌다고 알려졌다. 1951년에 간행된 시집 <풍랑(風浪)>에 수록되어 있고 그후에도 여러 시집에 실려 있으며, 총 12연 90행으로 구성돼 있다. 6ㆍ25전쟁 때,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숨어 지내던 경기도 광주 근처 산골에서 국군의 시체를 보고 썼다고 시작 메모에서 밝혔다.
산 옆의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런 유니포옴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구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죽음을 통곡하며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원수가 밀려오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숨지었노라
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대 내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피 속엔 더 강한 혼이 소리쳐
나는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과 가시 숲을
이순신(李舜臣) 같이, 나폴레옹 같이, 시이저 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 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같이 모스크바 크레믈린 탑까지
밀어 가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나르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노라.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죽음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지어 넘어진 이 얼굴의 땀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 주고
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해 주지 않는가!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시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날으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레 숨지었노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 이슬 내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저 가볍게 날으는 봄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날으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일러 다오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 다오.
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겁하다.
둘러 싼 군사가 다 물러가도 대한민국 국군아! 너만은
이 땅에서 싸워야 이긴다, 이 땅에서 죽어야 산다.
한 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 다시 오지 않으리라.
보라, 폭풍이 온다 대한민국이여!
이리와 사자 떼가 강(江)과 산(山)을 넘는다.
내 사랑하는 형과 아우는 서백리아 먼 길에 유랑을 떠난다.
운명이라 이 슬픔을 모른 체하려는가?
아니다, 운명이 아니다 아니 운명이라도 좋다.
우리는 운명보다 강하다! 강하다!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
그 억센 팔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
싸울 곳에 주저 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
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 일으켜라.
조국을 위해선 이 몸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 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 가도
나는 즐거이 이들과 함께 벗이 되어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이 골짜기 내 나라 땅에 한 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운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런 유니포옴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구나.
가슴에선 아직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죽음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 나이팅게일 : 지빠귀과의 새로 휘파람새와 비슷함. 밤꾀꼬리.
* 서백리아 : 시베리아.
***
아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아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다 같은 고향 땅을 가고 오건만∥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천 리 길∥꿈마다 너를 찾아 꿈마다 너를 찾아 삼팔선을 헤맨다.
- <가거라 삼팔선>(1948년 이부풍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리∥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오는 몸∥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꿈에 본 내 고향>(1953년, 박두환 작사, 김기태 작곡, 한정무 노래)
미아리 눈물 고개∥울고 넘던 이별 고개∥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아빠를 기다린다∥어린 것은 잠이 들고∥동지 섣달 기나긴 밤 북풍 한설 몰아칠 때∥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을 하오∥십 년이 가도 백 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울고 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단장의 미아리 고개>(1955년,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이해연 노래)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목을 놓아 불러 봤다 찾아를 봤다∥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홀로 왔다.
-<굳세어라 금순아>(1953년, 강사랑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임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옵기에∥이 몸은 돌아서서 눈물을 감추었소∥가신 길에 내 갈 길도 임의 길이요∥바람 불고 비 오는 어두운 밤길에서∥홀로 가는 이 가슴에 즐거움이 넘칩니다.
-<아내의 노래)(1951년, 유호 작사, 손목인 작곡, 심연옥 노래)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 자라.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전우야 잘 자라>(연도 미상,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
구상은 누구보다 먼저 적지 서울로 돌아왔다. 6.25 사변을 통해서 가장 전쟁의 정면에서 살아온 작가로서는 구상과 선우휘로 대표된다. 하나는 종교적 인간애, 하나는 민족적 인간애를 전쟁을 통해서 실현했다. 9월 28일 수복 1주일 전 구상은 국방부 정훈국 서울지역 보도대장으로서 정훈장교와 사병을 대동하고 인천만에 왔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그는 바다 위에서 보았다. 개항 이래의 인천 전체가 화염과 연기에 싸인 거대한 초토화 함포사격이었다.
9월 15일 상륙이 실현되자 그는 인천에 도착해 포격에도 불구하고 단 한 군데의 인쇄소가 남아있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국방부가 뿌려 오던 대적진 전단 <勝利>를 <승리일보>로 개칭 창간했다.
그것은 정식으로 정부에 등록된 신문이 아니라 인천 상륙의 감격 때문에 한 일선을 달리는 시인에 의해서 창간된 것이다.
그는 그것을 아직 수복되지 않은 서울에 뿌렸다. 미군 수송기를 타고 가서 적의 대공 포탄을 무릅쓴 장거였다. 요컨대 수도 서울의 장류 시민을 위안하고 격려하며 사태 발전을 미리 알리기 위한 것이다.
9월 21일 그는 경인가도를 치열한 전투력을 가지고 서울로 진격하는 UN군과 한국 해병대, 육군과 함께 선발대로 갔다. 서울 입성 이후 그는 신문을 속간했고 그 신문사의 편집국장이 되고 국방부 정훈국에 소속된 비공식 간부였다. 서울의 잔류 작가들도 경황이 없을 때였다. 서울에 온 뒤 그의 아내와 아들을 먼저 찾지 않고 문교부 예술과장을 하다가 자취를 감춘 薛昌洙를 먼저 찾았다. 그의 신문에 구인 광고를 내었다. 그가 해방 직후의 원산에서 응향 필화사건으로 월남했을 때 진주의 한 시인 설창수가 보낸 장문의 편지에 의해서 그들은 형제를 결의한 사이였다. 폐결핵을 앓는 구상, 월남 직후의 가난에 시달리는 구상을 돈을 거두어 보내기도 한 설창수였기 때문이다. 그는 공주 마곡사에 은식하고 있다가 서울로 와서 구상과 만나 얼싸안고 흐느꼈다. 그를 찾은 뒤에야 구상은 가족을 찾아보았지만 郭鍾元과 함께 봉직한 아내의 상명여고 사택은 폭격기에 의해 흔적도 없었다. 그는 가족이 죽은 것으로 단정하고 술을 마셨다. 그러나 그러한 슬픔을 그는 감추고 있었다.
서울 시청 앞 고려문화사에서 정신 이상이 완치되지 않은 채 대구에서 부산으로 가 있던 徐廷柱를 만나고 金素雲을 만났다. 그들과 그의 신문사에서 어울렸다.
대전, 대구로 피난하면서 정보부 촉탁으로 있었던 그는 대북 지하 신문 <烽火>를 찍는 일도 계속하고 대민간지 <북한특보>도 주관했다.
그런 전시의 일 속에서 그는 서정시와 전쟁시를 쓰고 있었다. 그는 이제까지의 종군을 서울에서 매듭짓고 그의 고향 원산에 빈손으로 갈 수 없는 문학적 자괴에 의해서 고향에 가는 의미를 찾았다.
그의 이름을 그대로 딴 처녀시집 <구상>을 인쇄, 지형을 떠 놓았을 때, 죽은 줄 알고 있었던 아내와 아들을 서울 퇴계로에서 해우했다. “나는 군과 함께 행동할테니 너는 아이와 함께 너희대로 살 궁리를 하라”는 고별사를 남기고 6.25사변과 함께 떠난 남편을 다시 만났던 것이다. 그해 10월 10일이었다.
문학소녀 구혜영과 함께 군복 차림의 구상이 걸어가고 있을 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 허 참!
- 충청도 광덕에 가 있었어요. 식모 할머니 집에 있었어요.
그들 부부는 감격적인 해후에도 겨우 이런 말밖에 없었다. 그들의 사랑은 이런 경지에 너무나 빨리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가족과 함께 시멘트 포장 종이를 깔아서 방을 만든 바라크에서 다시 살기 시작했다.
수복 직후 구상은 잔류 작가의 부역 행위를 단죄하는 모윤숙, 김동리, 조연현의 사상 점검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잔류파의 부역 행위를 군부나 경찰당국의 입장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었고 그들이 부역한 것은 서울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수동적인 이유에 대한 확신, 만약 그들에게 좌익 성분이 농후하더라도 그것을 문학적인 설득 윤리로 우익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 무엇보다도 부역 행위 자체에 결정론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는 확신이 그에게 있었다.
무엇보다도 한 시인으로서의 구상은 작가가 작가를 처단할 수 없다는 문학 외적 윤리감각이 강했던 것이다. 훨씬 뒤에 그의 성격이 포괄적으로 나타난 일로는 친일파 작가, 남로당 계열의 보도연맹 계열의 작가를 우익작가와 합해서 종군 작가단을 만든 일이다. 그는 인민재판까지 받았던 金八峯과 자경한 鄭飛石 박영준 들을 광범위하게 망라했던 것이다.
그는 틀림없이 참형 당했을 형 具대준 베드로 神父의 영전에 그리고 그의 어머니에게 바치려고 시집을 찍으려 했다. 원산行 군용 수송기편의 스케줄까지 짰다. 그는 빈손으로 고향에 갈 수 없었다. 그가 38선을 넘어온 이유는 문학에 있다. 전쟁 시대라 하더라도 그는 고향에 문학적 업적이 없이는 갈 수 없었다. 시집 한 권을 가지고 가려고 진격하는 부대로부터 처져서 흥분을 억제했던 것이다. 그의 생각만이었다면 서울이 수복되자 그 길로 고향에 진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 때문에 월남했는데 어떻게 문학 없이 고향에 가겠는가. 그는 이렇게 침착했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불행이나 다름없는 침착이었다.
그러나 그가 시집을 인쇄하려고 할 때 다시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끝내 고향에 대한 실향민으로서 돌아선 것이다. 한 젊은 시인의 향수는 시 자체에서만 심화됐을 뿐이다.
- 고은의 <1950년대> 중에서
***
해질 무렵을 기다려 나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신촌을 향해 걸었다. 이화대학 김활란 총장이 만일 집에 계시다면 함께 어디로든 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모습이나마 보고서 자살이라도 하자는 것이 나의 의도였다. 어서 바삐 나의 삶을 종결지어 버리려는 조급한 감정에 나는 사로잡히고 말았다. 큰 길을 부득불 건너야 되므로 나는 가슴을 조여 가며 거리 한 가운데를 지났다. 저물어가는 어느 길목에 다달았을 때, 백명이 넘을 듯한 포로가 된 국군병사들을 몰아 세워놓고, 잔인하게도 다발총을 쏘아대는 현장을 우연히 목도하게 되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 눈앞이 망막하다. 참을 수 없는 분노에 가슴이 터지도록 저리고 아프다. 아들을 구출할 한줄기 힘도 없는 자신을 서글피 여기며, 쓰러져 가는 그들에게, 나는 진정 명복을 기원하며 걸음을 재촉하였다. 나 역시 저 놈들에게 발각된다면 저 꼴이 되리라 생각하니 부르르 전신이 떨린다. 원한의 눈물을 머금고 쓰러지는 국군병사들을 구출할 사람들은 이미 강 너머로 물러섰으니, 그들 앞에는 오직 암담한 주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중략)…
나는 연명할 수 있는 날까지 이 산중에서 배겨보려 하였으나 결국은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수일이 지나자 이곳을 지나는 피난민들 잎에서, 여기 숨어있는 나를 잡으려고 내무반원이 동원되어 수색중이라는, 몸서리나는 소식이 전달되었다. 이제는 정말로 죽을 날이 다가온 듯 구슬픈 생각이 든다.
어지러운 마음을 가다듬으며 살길을 궁리하였다. 앞으로는 넓은 강이 가로 놓였으니 남행은 단념하고서 차라리 서울 시내로 뚫고 들어가 예와는 반대 방향인 동대문 밖으로 피신해봄이 한 묘책인 상 싶어졌다. 그러나 동대문까지 가자면 도심 지대를 돌파해야만 될 터이니 수배중인 이 몸이 무사할 리가 없을 께다. 7월 15일로 기억된다. 그 산중에서 보름을 지낸 나는 나를 도와주고 나를 보호해 줄 이가 없으나 그렇다고 그 놈들에게 걸려들기는 싫었다. 나를 잡으려고 총칼을 겨누고 있다는 그들에게 나는 용감히 대적하여 싸울 결심이 났다. 살아나자는 충동은 강렬한 본능이다. 쇠약한 두 주먹에는 자꾸만 뜨거운 땀이 고인다.
-모윤숙의 <고난의 90일>중에서
***
그냥 ‘피란기’가 아니라, 인민군의 ‘모윤숙을 잡아라!’라는 명제가 걸린, 그 당사자의, 생가를 건, 시인의 체험기이거니와, 시인은 이 충격을 가슴에 묻어둘 수 없었다. 인간 본성이 이를 거역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시인은 구제당할 수 있다.
시를 씀으로써 그는 ‘막힌 기억’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다. 노래함으로써 또는 새김으로써 그는 자기를 가두고 자기를 부식시키는 주박을 깨뜨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막힌 기억’이 저쪽 冥府의 세계에로 그를 이끌어갈 수조차 있다. 시라든가 예술이란 무엇이겠는가. 주박, 귀신, 명부의 세계와 이승, 이성으로 표상되는 이른바 문화의 세계를 가르는 그 사이에 놓인 지대를 가리킴인 것, 문화의 시계 이쪽으로 넘어서기 위해 발돋움하는 그런 지대에 놓인 모종의 환각이기에 그것은 공동환상의 범주에 가깝다. 시인이 노래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출했다 함은 이런 문맥에서이다.
-김윤식의 <내가 살아온 20세기 문학과 사상> 중에서
1950년 11월 8일. 모윤숙 시인이 공산치하에서 어떻게 서울에서 탈출해 인근 야산에서 생활했는지에 대해 증언하는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