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되는지 모르지만 교보문고에 가보니 문학잡지가 적지 않다. 이들 잡지에 등장하는 시인과 소설가 수만 더해도 수백 명이 넘을 것이다.
이 잡지 발행인 겸 편집인은 황금알 출판사 金永馥씨다. 주간은 시인 김영탁씨다. 창간사를 보니 이런 표현이 나온다.
<…청춘은 생물학적으로 타자적인 희생을 전제로 합니다. 정의와 남을 위해 스스로 던지는 것이 청춘의 본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남을 위해 희생하고 몸을 던지고 아낌없이 줄 때 청춘은 바로 재생되고 다시 청춘은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청춘의 에너지를 가장 많이 지니고 있는 시인들은 어쩌면 선택받은 자일지도 모릅니다. 시인들이 청춘을 자각하고 실천할 때 청춘의 마음가짐으로 눈감을 때까지 시를 쓴다면, 그것이 청춘이고 청춘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청춘찬가’는 시를 쓰는 일이 청춘을 위한 행위라고 강조한다. 다소 진부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시를 읽는다는 것은 영혼의 피륙을 짜는 일과 같다. 감수성 짙은 학생들에게 시를 읽혀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도 필요하다. 시를 읽으면 어떨 때는 울고 싶어지고 껄껄 웃고 싶어지며 차분하게 누구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지기도 한다. 때론 그냥 혼자 내버려두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늘 예사로이 보이는 전신주와 가로등과 서 있는 차가, 검은 하늘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시를, 섬세한 감수성을 만지듯, 읽어야 한다.
창간호에 시를 보낸 시인들을 보니 쟁쟁하다. 창간호라서 신경을 쓴 모양이다. 김종길 유안진 천양희 문효치 박남철 고재종 문인수 황학주 강세환 정숙자 조용미 이승욱 이정록 곽효환 김민정 조성자 민경환 이정원 서효인 시인이 각 두 편의 시를 게재했다. 내가 좋아하는 김민정 시인의 시 ‘남편이라는 이름의 남의 편’을 옮겨 적는다.

남편이라는 이름의 남의 편
김민정
베레모를 썼기 때문에 나는 그를 이해한다. 베레모를 썼기 때문에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 그제는 베레모가 내게 와 거짓말을 했고, 어제는 베레모가 그녀에게 가 하루를 보냈다. 베레모가 없다고 해서 나는 내버려진 마음인 게 아니다. 베레모가 있다고 해서 그녀는 원앙이 놓여 있던 속옷 서랍인 게 아니다. 베레모는 오늘 주문한 캔버스를 기다리며 모과를 딴다. 베레모는 늘 그랬듯 붓을 빨 적에 모과차 주전자가 끓고 있기를 바란다. 집 안 가득 모과 향기 푹 퍼지자 베레모는 전화기를 찾는다. 창밖에 저물고 있는 한 일생, 남자라고. 베레모가 전화를 했기 때문에 그녀가 미친 여자처럼 벨을 누른다. 베레모가 전화를 했기 때문에 나는 미친년처럼 인터폰을 받는다. 거추장스러운 손님에게 무모하게 베푸는 친절, 이러지 말자 하면서도 나는 모과차 석 잔을 내온다. 내가 모과차 속에 비친 그녀를 눈 속 깊이 삭히는 동안, 그녀가 모과차 속에 비친 나를 뱃속 깊이 삼키는 동안, 베레모는 멍하니 창밖을 본다. 저기에 뭔가를 두고 온 것 같아, 사무치는 어떤 육신 같은 거. 베레모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운다. 밝고 그럼 충분했지 싶을 만큼의 얼핏 눈물 같은 거. 그리고 우리들의 둥근 유방을 찾는다. 베레모에게 한 쪽씩 물린 젖이 된 우리들은 의문한다. 하여 살자는 것이 쾌락인가, 쾌락이 삶인가, 속고 속이고 속으면 속편할 레퍼토리, 우리는 이제 그렇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