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청와대 홍보수석 시절의 조기숙 교수와 1894년 고부민란이 일어난 원인인 만석보의 옛 터에 세워진 유지비. 사진=조선DB,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4일 중국 베이징에서 발생한 중국측 경호원들의 한국기자 집단폭행 사건과 관련해 "경호원에게 맞는 것도 자랑스럽게 받아들여라"는 사견을 SNS에 올린 조기숙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는 과연 어떤 학자일까.
조 교수는 1959년생으로 한성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아이오와대학교와 인디애나대학교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원, 노무현대통령당선자 취임사 준비위원, 이화여대 국제정보센터 소장 등을 역임했다.
노무현 정권 당시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비서관으로 일했다. 이후 인천대를 거쳐 현재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6년 11월호 《월간조선》은 당시 조기숙 교수의 증조할아버지가 구한말의 대표적 탐관오리인 조병갑(趙秉甲) 고부군수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노무현 정권 때였던 당시 《월간조선》 보도로 인해 '탐관오리 후손이 청와대 고위직에 올랐다'는 파문이 일었다.
조기숙 교수의 증조부(曾祖父)인 조병갑의 실체는 《국사대사전(國史大辭典)》에 자세히 나와 있다.
〈조선 고종(高宗) 때의 탐관오리. 1893년(고종 30년) 고부(古阜) 군수로서 만석보(萬石洑)를 수축할 때 동원시킨 군민에게 임금도 주지 않고 터무니없이 수세(水稅)를 징수해 총 700여 섬을 횡령·착복했고 또 군민에게 황무지를 개간시키고 강제로 세미(稅米)를 징수하여 사복(私腹)을 채웠었다.
이 밖에 태인(泰仁) 군수를 지낸 자기 아버지 조규순(趙奎淳)의 비각(碑閣)을 세우기 위해 군민으로부터 금전을 착취하고 부민(富民)에게 억지로 죄명을 씌워 불법 착복하는 등 갖은 탐학(貪虐)을 자행(恣行)했다.
이에 격분한 농민들은 군수의 불법에 항의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전주로 몰려가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에게 애소하였으나 감사는 이를 수리하지 않았을 뿐더러 도리어 그 대표자를 잡아 가뒀다.
이리하여 1894년(고종 31년) 2월에 1000여 명의 군중이 만석보 남쪽에 집합하여 제방을 끊고 읍내로 들어가 관아를 습격, 무기를 빼앗고 불법 징수한 세곡을 원주인에게 돌려보내니 조병갑은 몰래 도망하였으나 후에 파면되고 귀양 갔다. 조병갑의 이러한 학정에 대한 반발로써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이에 격분한 농민들은 군수의 불법에 항의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전주로 몰려가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에게 애소하였으나 감사는 이를 수리하지 않았을 뿐더러 도리어 그 대표자를 잡아 가뒀다.
이리하여 1894년(고종 31년) 2월에 1000여 명의 군중이 만석보 남쪽에 집합하여 제방을 끊고 읍내로 들어가 관아를 습격, 무기를 빼앗고 불법 징수한 세곡을 원주인에게 돌려보내니 조병갑은 몰래 도망하였으나 후에 파면되고 귀양 갔다. 조병갑의 이러한 학정에 대한 반발로써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高宗) 31년 2월 15일조를 보면 조병갑(趙秉甲)의 연표가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조병갑(趙秉甲)은 1887년 8월 6일 당시 43세에 김해(金海) 부사로 와서 1889년 2월 10일까지 약 1년 6개월 동안 부임했다. 이어 1889년 2월 10일에 충북 영동 현령으로 발령받았지만, 2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자신과 조선 왕조에 운명의 장소가 된 고부(古阜)에 군수로 부임하게 된다.
군수로 발령받은 지 3개월 후 모친(母親)의 별세로 군수직을 사퇴한다. 조병갑(趙秉甲)은 3년간의 모친상(母親喪)을 마치고 1892년 5월에 고부 군수로 재임용된다. 그는 1893년 11월 30일 익산 군수를 거쳐, 전국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던 1894년 1월 9일 고부 군수로 다시 기용됐다.
부임한 지 한 달을 조금 넘긴 2월 15일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시위대는 동학농민(東學農民)혁명을 일으켰으며, 조병갑(趙秉甲)은 이를 피해 고향집이 있던 공주 근처에서 은둔했다.>
군수로 발령받은 지 3개월 후 모친(母親)의 별세로 군수직을 사퇴한다. 조병갑(趙秉甲)은 3년간의 모친상(母親喪)을 마치고 1892년 5월에 고부 군수로 재임용된다. 그는 1893년 11월 30일 익산 군수를 거쳐, 전국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던 1894년 1월 9일 고부 군수로 다시 기용됐다.
부임한 지 한 달을 조금 넘긴 2월 15일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시위대는 동학농민(東學農民)혁명을 일으켰으며, 조병갑(趙秉甲)은 이를 피해 고향집이 있던 공주 근처에서 은둔했다.>
동학군 유족 후손들에게 공식 사죄한 조 교수
조병갑은 고부군에 대한 학정으로 동학혁명을 촉발한 장본인이다. 2006년 12월 9일 당시 조기숙 교수는 충남 공주유스호스텔에서 동학농민혁명군 유족들과 시민단체 회원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동학농민혁명 112주년 기념 유족의 밤’ 행사에 참석해 공식 사과했다.
당시 조 교수는 “조상을 대신해 늦게나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당사자인 조상이 유족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어야 하나 너무나 많은 세월이 흘렀다. 언론에 (조병갑의 증손녀란 사실이) 보도되기 전에 유족들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려고 했는데 진작에 찾아뵙지 못해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또 “조상의 잘못을 사죄하는 차원에서 최근 몇 달 동안 매일 아침 108배를 하고 있다. 여러분의 한이 풀릴 때까지 (108배를) 계속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당시 일부 유족들은 “조병갑의 증손녀란 신분이 뒤늦게 드러나 어쩔 수 없이 형식적인 사과를 한 것 아니냐”며 못마땅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월간조선 뉴스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