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注 : 10월 30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제13회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시민강좌에서 발표한 글이다. 지난해 11월부터 시작된 시민강좌는 이날 13회 강좌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조갑제 대표는 지난 강연들의 핵심을 총정리했다. 그는 강연 말미에 "국법질서를 무시하고 자유민주주의를 폄하하고 반(反)헌법적이고 반국가적인 방향으로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개조 또는 변조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는 상황이다"면서 "이를 극복하는 방안에 대해 지난 1년간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물었더니 '나처럼 목숨을 걸어라! 자유는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다. 자유의 방파제 역할은 그만하고 자유의 파도가 되어 평양을 쓸어버려라! 나의 답은 간단하다. 적이 목숨을 걸고 달려드니 너도 목숨을 걸어야 게임이 될 것 아닌가'라는 메아리가 돌아왔음을 보고드린다"고 말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왜 지금 朴正熙(박정희)인가? 《월간조선》과 박정희기념재단은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지난 1년간 다각도로 박정희의 생애와 역사적 유산을 조명해 왔다. 특히 그의 딸이 탄핵되고 구속 재판을 받는 가운데서 진행된 강연회는 시대의 흐름을 역류하는 듯한 허탈감과 함께 박정희로부터 해답을 구하려는 절박감이 혼재하였다. 오늘의 길이 막힐 때 역사를 통하여 미래를 여는 새로운 길을 열려는 자세는 司馬遷(사마천)의 史記(사기) 정신이고 조지 오웰이 말한 권력투쟁의 수단으로서 역사해석의 접근법이기도 하다. 과거를 장악하는 자가 미래를 장악하는데 오늘을 장악한 자가 과거를 장악한다는 원리이다.
한국에서 오늘의 권력을 장악한 세력이 박정희 지우기에 열중하는 것은 역사 해석권을 악용, 미래의 권력까지 유지하려는 의도이다. 남북 대결은 민족사의 정통성과 삶의 양식을 놓고 다투는 타협이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이다. 선거로 출범한 대한민국만이 민족사적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데 남북한의 계급투쟁론자들은 이승만과 박정희를 부정해야만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이들의 시도가 실패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준 것이 1년간의 박정희 강좌였다. 이념, 경제, 안보, 외교, 교육, 새마을운동 등 여러 면으로, 입체적으로 들여다본 박정희는 너무나 단단하고 거대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구조이다. 민주주의로 위장한 계급투쟁론적 선동이나 민족주의로 위장한 인종주의적 공격으로 쉽게 무너질 건축물이 아니다.
문명건설세력의 챔피언
1. 朴正熙는 文明(문명)건설자이다. 삶의 진보로 정신의 풍요를 가져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든 사람이다. 그의 문명 건설 전략은 중국, 월남 등지에서 참고서가 되어 더 많은 인류를 문명 세계로 포섭하였다. 실천론에 보편적 성공원리가 들어 있었던 덕분이다.
2. 朴正熙는 管仲(관중)에서 비롯된 동양적 실용정치의 맥을 이은 經世家(경세가)였다. 주체적 實事求是論者(실사구시론자)였다. 사실과 현실에 입각하여 정책과 방향을 결정함에 있어서 항상 주체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주체적 실용정신이야말로 東西古今(동서고금)을 관통할 수 있는 만고불변의 정치적 성공 원리이다.
3. 朴正熙는 李承晩(이승만), 文武王(문무왕)과 함께 민족사의 가장 큰 인물이다. 최초의 민족통일국가를 완성한 문무왕, 최초의 국민국가를 세운 李承晩의 정통노선을 이어받은 그는 國力(국력), 즉 富國强兵(부국강병)의 측면에서 한국 역사상 가장 큰 나라를 만들었다. 오늘의 한국은 GDP 세계 13위, 세계 최장수국, 공업생산 및 수출 세계 5위, 세계 7위의 군사력, 그리고 세계적인 민주 복지국가인데 박정희의 기여가 결정적이었다.
4. 朴正熙는 인류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위대한 경영자였다. 최단 시간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다. 1961년의 한국은 最貧國(최빈국) 대열에 있었지만 지금의 한국은 最富國(최부국) 그룹에 있다. 그가 유신선포로 욕을 먹어가면서 추진하였던 중화학공업 건설은 일류강대국으로 가는 막차였다. 국력을 조직화하여 능률을 극대화한 그의 경영술엔 가정, 기업, 국가 등 모든 조직의 운영에 다 통용될 수 있는 간단명료한 원리가 있다. 이를 찾아내어 응용의 방법을 탐구하는 것이 박정희를 연구하는 한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좋은 제도와 조직을 만들어 국가운영에 항구적으로 기능하도록 한 그의 일하는 방식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5. 朴正熙는 超人(초인)이었다. 더러운 강물을 들이마셔도 영혼의 순수성을 잃지 않고 거대한 바다, 즉 새로운 시대를 빚어낸, 그러면서도 부끄럼 타는 초인이었다. 자신의 한을 민족의 한으로 승화시켜 수백 년간 잠자던 민족의 에너지를 대폭발시킨 사람이었다.
6. 朴正熙는 남자의 美學(미학)을 보여준 武士(무사)였다. 부인이 총을 맞았을 때, 그리고 자신이 총을 맞았을 때 보인 행동은 준비된 것도, 훈련된 것도 아닌 그의 삶의 총체적이고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체념한 듯 해탈한 듯하였다'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다. 한국에서 약 800년 만에 등장한 군인정권은 '교장 같은 장군' 덕분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근대화 혁명에 성공하였다.
7. 朴正熙는 前任者(전임자)와 後任者(후임자)를 잘 둔 행운아였다. 이승만이 지도한 자유민주주의 건국, 강군 건설, 교육확대, 한미동맹, 농지개혁이 박정희식 고도성장에 기반이 되었다. 그의 國政(국정) 노선을 부정하지 않고 계승, 발전시킨 全斗煥(전두환)이 있었기에 박정희는 더욱 빛난다.
8. 朴正熙는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다'고 말한 사람이지만 李承晩과 함께 가장 성공적인 근대화 혁명가이며 한국 민주주의의 두 건설자이다. 박정희는 민주주의의 우상화와 교조화를 거부하고, 한국의 역사적 현실에 맞추어 민주주의를 變容(변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자주적 민주주의자이다. 이승만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고 박정희는 집을 지었다. 민주주의의 3 요소인 안보, 자유, 복지의 인프라를 만든 두 분이다. 두 사람은 혁명가와 건설자를 겸한 사람이다. Revolutionary and Visionary였다.
9. 朴正熙 또한 실수나 결함이 적지 않은 인간이었다. 한글專用(전용) 정책은 한국어의 반신불수를 초래하여 국민교양의 붕괴를 재촉하고 있으며 名門(명문) 고교를 없앤 것은 국가 엘리트 양성의 통로를 막은 실수이다. 정규 육사 출신이란 물리적 후계자 그룹은 양성하였지만 한국적 민주주의 이념을 계승할 정치세력 육성에는 실패하여 좌익의 도전과 이에 따른 박정희 지우기를 부르고 말았다. 반면, 김일성은 한국의 민주화 흐름을 역이용, 민주투사로 위장한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꾀하였는데 이 전략이 1980년대에 적중하여 한 세대의 젊은이들을 좌경화시켰다.
10. 朴正熙는 조선조적인 士農工商(사농공상)의 신분차별을 타파하려 하였으나 신종 양반세력의 보복을 받았다. 그는 군인, 기업인, 과학 기술자를 새로운 역사 창조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세계를 무대로 雄飛(웅비)하도록 하였지만 조선조 양반세력의 후예들인 지식인 집단의 비판 앞에서 苦戰(고전)하였고 死後(사후)에는 그의 딸까지 이들의 보복에 희생되었다. 박정희는 위선적 지식인들을 守舊(수구)사대세력으로 규정, 경멸해 마지않았지만 이들은 때로는 미국식 민주주의자, 때로는 민중민주주의자로 행세하면서 자신들의 사대성을 감추고 박정희를 포위 공격하였다. 박정희는 말년에 미국, 북한, 남한 내 민주화 세력으로부터 3면 공격을 받았다. 비록 권력은 쥐고 있었지만 신종 양반 지식인 세력의 공격 때문에 권력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데 실패하였다. 박정희는 조선적 봉건 잔재와 싸우다가 戰死(전사)한 셈이다.
11. 朴正熙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통일의 여하에 따라서 좌우될 것이다. 적화통일이 되면 그는 중국의 장개석 정도의 평가를 받을 것이고, 자유통일로 귀결되면 레이건이나 진흥왕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12. 이젠 朴正熙를 우리 곁의 친구로 맞아들일 때이다. 망국, 식민지, 분단, 전쟁, 가난, 재건, 도약의 과정에서 국민과 함께 기뻐하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났던 그였다. 가장 낮은 데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오고 간 그의 삶은 특별하지 않은, 우리의 부모와 삼촌들이 겪었던 표준적 삶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우상이 아닌, 독재자도 영웅도 아닌 우리의 친구가 될 자격이 충분한 것이다.
13. 그가 꿈꾸었던 한국은 특권층을 몰아낸,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 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 독립된 한국'이었다. 이것이 소망일 뿐 아니라 생리라고 했다. 그는 가난을 스승이자 恩人이라고 불렀다. 박정희는 가난이란 스승 밑에서 배운 수백만의 同門(동문)이 건재하므로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가난을 이기는 이가 100명이라면 풍요를 이기는 사람은 한 명도 안 된다고 한다(토머스 칼라일). 가난의 제자들이 박정희의 영도하에서 건설한 '천국 다음 한국'을 가난의 기억이 없는 세대가 '헬 조선'이라 저주하고 이들이 주도권을 잡은 한국이다.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 속에서 生이 끝나기를 염원'하였지만 신종 양반 특권층의 의식화에 넘어간 부하가 쏜 배신의 총탄으로 생이 끝났으며 그의 딸은 선동 언론, 정치검사 및 판사, 제왕적 국회, 그리고 귀족노조가 작당한 촛불 狂風(광풍)의 희생자가 되어 지금 감옥에 있다.
14. 朴正熙가 만든 국민국가의 문명적 토대가, 민주와 민족의 이름으로 국가를 부정하는 남북한 좌익, 즉 계급투쟁 세력의 총공격에 직면한 지금 무슨 수로 진실 정의 자유를 지켜낼 것인가? 과연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는 自淨(자정)능력을 갖춘 것인가, 핵무장한 북한정권과 권력을 잡은 친북세력의 협공 속에서 대한민국은 반공자유민주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인은 자유통일·분단고착·적화통일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이런 물음에 박정희가 답을 내려주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너무 엄혹하고 국제정세는 유동적이다.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에 여러 번 목숨을 걸었다. 형은 우익 손에, 부인은 간첩 손에, 자신은 부하 손에 죽었고 딸은 신종 양반들 손에서 정치적으로 죽어가고 있다. 박정희는 아마도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처럼 목숨을 걸어라! 자유는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다. 자유의 방파제 역할은 그만하고 자유의 파도가 되어 평양을 쓸어버려라! 나의 답은 간단하다. 적이 목숨을 걸고 달려드니 너도 목숨을 걸어야 게임이 될 것 아닌가?"
박정희에게 1년 동안 물은 답은 결국 우리의 몫이라는 이야기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여러분의 생명을 걸 수 있습니까? 이는 나의 질문이기도 하다.◎
1. 朴正熙는 文明(문명)건설자이다. 삶의 진보로 정신의 풍요를 가져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든 사람이다. 그의 문명 건설 전략은 중국, 월남 등지에서 참고서가 되어 더 많은 인류를 문명 세계로 포섭하였다. 실천론에 보편적 성공원리가 들어 있었던 덕분이다.
2. 朴正熙는 管仲(관중)에서 비롯된 동양적 실용정치의 맥을 이은 經世家(경세가)였다. 주체적 實事求是論者(실사구시론자)였다. 사실과 현실에 입각하여 정책과 방향을 결정함에 있어서 항상 주체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주체적 실용정신이야말로 東西古今(동서고금)을 관통할 수 있는 만고불변의 정치적 성공 원리이다.
3. 朴正熙는 李承晩(이승만), 文武王(문무왕)과 함께 민족사의 가장 큰 인물이다. 최초의 민족통일국가를 완성한 문무왕, 최초의 국민국가를 세운 李承晩의 정통노선을 이어받은 그는 國力(국력), 즉 富國强兵(부국강병)의 측면에서 한국 역사상 가장 큰 나라를 만들었다. 오늘의 한국은 GDP 세계 13위, 세계 최장수국, 공업생산 및 수출 세계 5위, 세계 7위의 군사력, 그리고 세계적인 민주 복지국가인데 박정희의 기여가 결정적이었다.
4. 朴正熙는 인류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위대한 경영자였다. 최단 시간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다. 1961년의 한국은 最貧國(최빈국) 대열에 있었지만 지금의 한국은 最富國(최부국) 그룹에 있다. 그가 유신선포로 욕을 먹어가면서 추진하였던 중화학공업 건설은 일류강대국으로 가는 막차였다. 국력을 조직화하여 능률을 극대화한 그의 경영술엔 가정, 기업, 국가 등 모든 조직의 운영에 다 통용될 수 있는 간단명료한 원리가 있다. 이를 찾아내어 응용의 방법을 탐구하는 것이 박정희를 연구하는 한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좋은 제도와 조직을 만들어 국가운영에 항구적으로 기능하도록 한 그의 일하는 방식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5. 朴正熙는 超人(초인)이었다. 더러운 강물을 들이마셔도 영혼의 순수성을 잃지 않고 거대한 바다, 즉 새로운 시대를 빚어낸, 그러면서도 부끄럼 타는 초인이었다. 자신의 한을 민족의 한으로 승화시켜 수백 년간 잠자던 민족의 에너지를 대폭발시킨 사람이었다.
6. 朴正熙는 남자의 美學(미학)을 보여준 武士(무사)였다. 부인이 총을 맞았을 때, 그리고 자신이 총을 맞았을 때 보인 행동은 준비된 것도, 훈련된 것도 아닌 그의 삶의 총체적이고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체념한 듯 해탈한 듯하였다'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다. 한국에서 약 800년 만에 등장한 군인정권은 '교장 같은 장군' 덕분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근대화 혁명에 성공하였다.
7. 朴正熙는 前任者(전임자)와 後任者(후임자)를 잘 둔 행운아였다. 이승만이 지도한 자유민주주의 건국, 강군 건설, 교육확대, 한미동맹, 농지개혁이 박정희식 고도성장에 기반이 되었다. 그의 國政(국정) 노선을 부정하지 않고 계승, 발전시킨 全斗煥(전두환)이 있었기에 박정희는 더욱 빛난다.
8. 朴正熙는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다'고 말한 사람이지만 李承晩과 함께 가장 성공적인 근대화 혁명가이며 한국 민주주의의 두 건설자이다. 박정희는 민주주의의 우상화와 교조화를 거부하고, 한국의 역사적 현실에 맞추어 민주주의를 變容(변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자주적 민주주의자이다. 이승만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고 박정희는 집을 지었다. 민주주의의 3 요소인 안보, 자유, 복지의 인프라를 만든 두 분이다. 두 사람은 혁명가와 건설자를 겸한 사람이다. Revolutionary and Visionary였다.
9. 朴正熙 또한 실수나 결함이 적지 않은 인간이었다. 한글專用(전용) 정책은 한국어의 반신불수를 초래하여 국민교양의 붕괴를 재촉하고 있으며 名門(명문) 고교를 없앤 것은 국가 엘리트 양성의 통로를 막은 실수이다. 정규 육사 출신이란 물리적 후계자 그룹은 양성하였지만 한국적 민주주의 이념을 계승할 정치세력 육성에는 실패하여 좌익의 도전과 이에 따른 박정희 지우기를 부르고 말았다. 반면, 김일성은 한국의 민주화 흐름을 역이용, 민주투사로 위장한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꾀하였는데 이 전략이 1980년대에 적중하여 한 세대의 젊은이들을 좌경화시켰다.
10. 朴正熙는 조선조적인 士農工商(사농공상)의 신분차별을 타파하려 하였으나 신종 양반세력의 보복을 받았다. 그는 군인, 기업인, 과학 기술자를 새로운 역사 창조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세계를 무대로 雄飛(웅비)하도록 하였지만 조선조 양반세력의 후예들인 지식인 집단의 비판 앞에서 苦戰(고전)하였고 死後(사후)에는 그의 딸까지 이들의 보복에 희생되었다. 박정희는 위선적 지식인들을 守舊(수구)사대세력으로 규정, 경멸해 마지않았지만 이들은 때로는 미국식 민주주의자, 때로는 민중민주주의자로 행세하면서 자신들의 사대성을 감추고 박정희를 포위 공격하였다. 박정희는 말년에 미국, 북한, 남한 내 민주화 세력으로부터 3면 공격을 받았다. 비록 권력은 쥐고 있었지만 신종 양반 지식인 세력의 공격 때문에 권력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데 실패하였다. 박정희는 조선적 봉건 잔재와 싸우다가 戰死(전사)한 셈이다.
11. 朴正熙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통일의 여하에 따라서 좌우될 것이다. 적화통일이 되면 그는 중국의 장개석 정도의 평가를 받을 것이고, 자유통일로 귀결되면 레이건이나 진흥왕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12. 이젠 朴正熙를 우리 곁의 친구로 맞아들일 때이다. 망국, 식민지, 분단, 전쟁, 가난, 재건, 도약의 과정에서 국민과 함께 기뻐하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났던 그였다. 가장 낮은 데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오고 간 그의 삶은 특별하지 않은, 우리의 부모와 삼촌들이 겪었던 표준적 삶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우상이 아닌, 독재자도 영웅도 아닌 우리의 친구가 될 자격이 충분한 것이다.
13. 그가 꿈꾸었던 한국은 특권층을 몰아낸,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 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 독립된 한국'이었다. 이것이 소망일 뿐 아니라 생리라고 했다. 그는 가난을 스승이자 恩人이라고 불렀다. 박정희는 가난이란 스승 밑에서 배운 수백만의 同門(동문)이 건재하므로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가난을 이기는 이가 100명이라면 풍요를 이기는 사람은 한 명도 안 된다고 한다(토머스 칼라일). 가난의 제자들이 박정희의 영도하에서 건설한 '천국 다음 한국'을 가난의 기억이 없는 세대가 '헬 조선'이라 저주하고 이들이 주도권을 잡은 한국이다.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 속에서 生이 끝나기를 염원'하였지만 신종 양반 특권층의 의식화에 넘어간 부하가 쏜 배신의 총탄으로 생이 끝났으며 그의 딸은 선동 언론, 정치검사 및 판사, 제왕적 국회, 그리고 귀족노조가 작당한 촛불 狂風(광풍)의 희생자가 되어 지금 감옥에 있다.
14. 朴正熙가 만든 국민국가의 문명적 토대가, 민주와 민족의 이름으로 국가를 부정하는 남북한 좌익, 즉 계급투쟁 세력의 총공격에 직면한 지금 무슨 수로 진실 정의 자유를 지켜낼 것인가? 과연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는 自淨(자정)능력을 갖춘 것인가, 핵무장한 북한정권과 권력을 잡은 친북세력의 협공 속에서 대한민국은 반공자유민주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인은 자유통일·분단고착·적화통일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이런 물음에 박정희가 답을 내려주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너무 엄혹하고 국제정세는 유동적이다.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에 여러 번 목숨을 걸었다. 형은 우익 손에, 부인은 간첩 손에, 자신은 부하 손에 죽었고 딸은 신종 양반들 손에서 정치적으로 죽어가고 있다. 박정희는 아마도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처럼 목숨을 걸어라! 자유는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다. 자유의 방파제 역할은 그만하고 자유의 파도가 되어 평양을 쓸어버려라! 나의 답은 간단하다. 적이 목숨을 걸고 달려드니 너도 목숨을 걸어야 게임이 될 것 아닌가?"
박정희에게 1년 동안 물은 답은 결국 우리의 몫이라는 이야기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여러분의 생명을 걸 수 있습니까? 이는 나의 질문이기도 하다.◎
첨부자료 / 박정희가 꿈꾸었던 나라: 박정희 著 『국가와 혁명과 나』의 해설문
권력을 쥐고도 부패하지 않는 혼
근대화 혁명가로서 비장한 생애를 살다가 간 박정희(朴正熙)의 국가관, 혁명관, 인간관을 보여주는 박정희 저 『國家와 革命과 나』(1963년 9월 1일 향문사에서 초판 간행)를 34년 만에 다시 출간하는 이유는 이 책이 담고 있는 격정과 비전이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는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된 한국의 창건’을 소망했고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人情)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했다. 자주 독립된 한국의 창건은 자주적인 통일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미완성의 대업(大業)으로 남아 있다. 그는 부하의 권총에 의해서 생이 끝나고 지식인들에 의해 사후(死後) 격하를 당했으나 서민의 인정(人情)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 한국인의 가슴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박정희 시대 18년. 박정희 사후(死後) 18년을 다 거치면서 우리는 이 거목(巨木)이 드리우고 있는 큰 그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아낌없이 주고 간 이 나무를 좀 떨어진 자리에서 다소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이제는 그가 이 책에서 토로했던 포부를 이해하고 또 그의 성취와 비교해가면서 채점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혁명아 박정희의 인간을 그 숨결까지 느끼게 해준다. ‘폭우가 쏟아지는 야반 0시……’로 시작되는 서문과 ‘가난은 나의 스승이자 은인이다’로 시작되는 마지막 쪽 사이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먼저 분기(噴起)시킴으로써 잠자던 민족의 에너지를 분기시켰던 그의 인간됨을 알 수 있다. 18년 만에 세계 최빈국(最貧國)을 선진국의 문턱까지 끌어올려다 놓은 그의 지도력을 지탱한 것은 권력을 잡은 뒤에도 부패하지 않은 그의 혼이었던 것이다.
이 책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땀을 흘려라/돌아가는 기계 소리를 노래로 듣고……/2등 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 우리는 일을 하여야 한다. 고운 손으로는 살 수가 없다. 고운 손아 너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만큼 못살게 되었고 빼앗기고 살아왔다. 고운 손은 우리의 적이다.’
박노해 시인의 작품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의 저항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시가 국가원수의 저서에 실리게 된 사정은 이러하다. 『國家와 革命과 나』의 초고를 정리하는 데 있어서 박정희를 도와주고 있었던 박상길(朴相吉, 전 청와대 대변인, 水協 회장) 씨의 회고이다.
<그날도 장충동 공관에서 박 의장과 담론을 나눈 끝 무렵이었습니다. 화제는 아마도 박 의장이 겪었던 가난이었을 겁니다. 그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박 의장이 다른 방에 갔다가 오더니 좀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이런 게 하나 있는데 넣을 데가 있겠습니까’하고 메모지를 건네주는 거예요. 받아보니 친필로 쓰고 고친 흔적이 있었습니다. 거의 조판이 다 돼 있었던 책에 무리를 해서 끼워 넣었습니다. 다른 시인의 작품을 옮겨 적은 것인지, 그분 자신의 창작인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아마도 창작일 겁니다. 지방 출장 때의 체험에 근거한 시작(詩作)이 아닌가 합니다.>
박상길 씨는 자신이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을 도와서 이 책을 정리하던 때(1963년)의 이야기를 『나와 제3, 4공화국』이란 저서에서 공개한 적이 있었다.
<이즈음 의장의 일상은 보기에도 민망하리만큼 망쇄(忙殺) 하였지만 저술의 핵심을 잡기 위해서는 상당한 담론이 필요치 않을 수가 없었다. 대개의 경우 자정을 전후한 야반에 장충단 의장 공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내가 메모한 예정된 내용이나 때로 그분이 말하는 자유로운 의견들을 중심으로 대충 골간을 잡아 당초 세운 논술 구성 방향에 따라 써 내려갔다. 50장에서 100장 정도의 원고가 되면 의장 공관으로 직행하여 읽어보고 의견을 말하고 하였는데 바로 이 전후가 격동의 절정기였는지라 좀체로 차분하게 담론할 수가 없었다.
가다가는 돌발적인 사태, 정치적인 난제(難題) 등이 주제로 등장하여 혹은 진지, 혹은 흥분, 혹은 격정적이 되는 등 의외의 경우가 많았다. 이 같은 일들은 한 민족국가의 운명을 거머쥔 한 영도자의 스스럼없는 나상(裸像)을 보는 데서 역사의 엄숙, 민족의 비애, 국가의 어려움을 가슴에 느낄 수 있었고 이 절대한 파도와 맞선 한 운명적 인간의 순정, 정열, 비장, 결심 등을 그대로 읽을 수가 있었다. 나는 영원히 확신하고 있다. 이 이후 이분의 이름으로 몇 권의 책이 나온 바 있지만 이분의 철학.사상.정치.경제.문화.외교.사회관은 물론 하나의 인생관에 이르기까지 이만큼 정확한 바는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실용성과 주체성이 혁명의 논리
모든 성공한 혁명에는 논리와 철학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박정희 식 근대화 모델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 근대화 혁명을 가능하게 만든 논리로서의 철학을 말하는 사람은 적다. 이 책의 재출간이 갖는 가장 큰 의미는 박정희의 근대화 혁명사상에 대한 재조명일 것이다. 박정희 사상이 지금까지 별로 정리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자신의 논리를 어렵고 고상하고 정교하게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설적으로 투박하게 툭툭 여기저기 던져놓기만 했던 몇 줄의 글들을 다시 모아서 지나간 세월의 캔버스에 배열해놓으면 비로소 이 혁명아가 그리고 있었던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설계도, 그 밑그림이 나타나는 것이다.
박정희는 우리 민족사의 위대한 1급 지식인이자 사상가였고, 그 사상을 실천에 옮겨 민족이 처한 상황을 타파해간 혁명가였다. 삼국통일로써 우리 민족사에서 공간적인 현상 타파를 가져온 김유신(金庾信), 그리고 한글 창제로써 정신적인 현상 타파를 꾀했던 세종대왕과 같은 반열에 서게 될 당대의 대표적 사상가였다. 그는 청빈(淸貧)을 위선자와 패배자의 변명이라고 경멸하고 우리 민족의 숙명처럼 따라다니던 가난을 물리침으로써 민족사의 물질적인 제약을 타파해간 사람이다.
혁명가 박정희의 진정한 혁명성은 그가 생전에 자신의 혁명논리를 체계화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던 점에 있다. 혁명이 이념화되면 우상숭배로 전락하고 혁명을 타락시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어떤 주의나 학설의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그 어떤 주의나 학설도 거부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활용했던 실용성과 주체성이 그의 진정한 혁명논리였다. 그는 섣부른 이념이 없을 때 영구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혁명적 발상은 그 당시 한국의 지배층과 지식인들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민주주의는 신(神)이다’는 신앙에 도전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 책에서 한민당에 뿌리를 둔 해방 후의 정치세력을 민주주의의 탈을 쓴 봉건적 수구세력으로 규정했다. 그들 구정치인(舊政治人)이야말로 ‘덮어놓고 흉내낸 식의 절름발이 직수입 민주주의’를 맹신하는 사대주의자라고 단정하기도 했다. 그의 혁명적 역사관은 서구식 민주주의 맹신자들이야말로 조선시대의 당파싸움 전문가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위선적 명분론자라고 규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4·19와 5·16혁명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4·19혁명은 ‘피곤한 5천년의 역사, 절름발이의 왜곡된 민주주의, 텅 빈 폐허의 바탕 위에 서서 이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명제를 던졌고 이 명제에 해답하기 위한 ‘역사에의 민족적 총궐기’가 5·16이란 것이다. 4·19와 5·16을 동일선상에 놓는다는 것은 자유당과 민주당을 똑같은 봉건적 수구적 세력, 즉 근대화 혁명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4·19학생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혁명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
다수의 국민들과 지식인들이 자유당을 독재, 민주당을 민주세력으로 보고 있었던 데 대하여 박정희는 그런 형식논리를 거부하고 그들의 본질인 봉건성을 잡아채어 둘 다 역사 발전의 반동세력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 어디에도 합헌(合憲)정권을 무너뜨린 데 대한 죄의식과 변명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당시에 박정희가 이런 혁명적 시각을 자신의 신념으로 내면화하고 있었던 때문이다.
<불원(不遠)한 장래에 망국의 비운을 맛보아야 할 긴박한 사태를 보고도 인내와 방관을 미덕으로 허울 좋은 국토방위란 임무만을 고수하여야 한단 말인가. 정의로운 애국군대는 인내나 방관이란 허명(虛名)을 내세워 부패한 정권과 공모하고 있을 수는 도저히 없었다. 말하자면 5·16혁명은 이 공모를 거부하고, 박차고 내적(內敵)의 소탕을 위하여 출동한 작전상 이동에 불과하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박정희는 서구식 민주주의의 강제적 이식(移植)과 맹목적 추종을 비판했으나 자유민주주의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자주정신이 강한 그로서는 외래 정치사상을 부정하고 싶고 그리하여 민주주의란 이름이 붙지 않는 한국식 정치원리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지만 자신과 한국의 처지를 자각하고 있었다.
<엄격한 의미로서 혁명의 본질은, 본시 근본적인 정치사상의 대체와 사회 정치구조의 변혁을 뜻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런 점에 있어 한계가 제약되어 있고, 그 혁명의 추진에 각양(各樣)의 제동작용이 수반되고 있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함에는 벗어날 수가 없다. 민주주의의 신봉을 견지하는 한 여론의 자유를 막을 수는 없다. ‘토론의 자유’ 속에 ‘혁명의 구심력’을 찾아야 하는 혁명. 바로 이것이 본인이 추구하는 이상혁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힘이 들고 어려운 길이다.>
박정희 근대화 혁명이 성공한 요인은 유교의 실용성과 집단주의적 희생정신을 동원하여 이를 서구 자본주의의 시장원리에 연결시킴으로써 경쟁체제의 작동에 의한 영원한 자전력(自轉力)을 얻어냈다는 점에 있다. 동양과 서양문화의 장점을 뽑아내어 종합한 셈인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주체적 관점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자조-자립-자주-통일의 단계적 발전 전략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박정희의 국가 근대화 전략은 자조-자립-자주의 정신적 근대화 과정(이를 그는 주체의식의 확립혁명이며 인간 개조라고 했다)을 그 추진력의 원천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보겠다는 자조(自助)정신이 생겨야 자립경제가 건설될 수가 있고 자립경제를 기반으로 할 때만이 자주국방을 할 수가 있다. ‘자주국방능력이 없는 국가는 진정한 독립국가가 아니다’는 생각을 확집(確執)처럼 갖고 있었던 점에서 박정희는 우리 민족사에서 김유신과 가장 닮은 자주적 국가관의 소유자이다. 박정희는 국토통일도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을 건설한 다음에야 우리 주도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통일관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1976년 1월 24일 국방부를 연두순시한 자리에서, 미리 준비된 원고를 읽는 식이 아니라 자신의 소감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밝힌 내용이다.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찾아낸 녹음테이프에서 가감 없이 풀어본다.
<특히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논리를 이론적으로 여러 가지로 제시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공산주의를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왜냐. 우리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우리가 용납해선 안 된다. 공산당은 우리의 긴 역사와 문화, 전통을 부정하고 달려드는 집단이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만이 우리 민족사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하여 지켜가는 국가이다. 하는 점에 대해서 우리가 반공교육을 강화해야 하겠습니다. 공산당이 지난 30년간 민족에게 저지른 반역적인 행위는 우리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을 겁니다. 후세 역사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온 것은 전쟁만은 피해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이 분단 상태를 통일을 해야겠는데 무력을 쓰면 통일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번 더 붙어서 피를 흘리고 나면 감정이 격화되어 몇십년 간 통일이 또 늦어진다. 그러니 통일은 좀 늦어지더라도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고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참아온 겁니다. 우리의 이런 방침에 추호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그들이 무력으로 접어들 때는 결판을 내야 합니다. 기독교의 성경책이나 불경책에서는 살생을 싫어하지만 어떤 불법적이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침범할 때는 그것을 쳐부수는 것을 정의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누가 내 볼을 때리면 이쪽 따귀를 내주고는 때리라고 하면서 적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만 선량한 양떼를 잡아먹으러 들어가는 이리떼는 이것을 뚜드려 잡아 죽이는 것이 기독교정신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우리 동족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무력으로 쳐 올라갈 리야 없지만 그들이 또다시 6·25와 같은 반역적 침략을 해올 때에 대비하고 있다가 그때는 결판을 내야 합니다.
통일은 언젠가는 아마도 남북한이 실력을 가지고 결판이 날 겁니다. 대외적으로 내어놓고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미, 소, 중, 일 4대 강국이 어떻고 하는데 밤낮 그런 소리 해보았자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객관적 여건이 조성되었을 때 남북한이 실력으로 결판을 낼 겁니다. 그러니 조금 빤해졌다 해서, 소강상태라 해서 안심을 한다든지 만심을 한다든지 해서는 안돼겠습니다.>
봉건적 잔재와 싸우다가 戰死
박정희가 집권 3년째인 1963년에 『國家와 革命과 나』에서 피력한 조국 근대화란 목표와 자조정신-자립경제-자주국방-자유통일의 전략은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견지되었다. 전술, 정책적인 수정은 있었지만 본질적이고 전략적인 수정은 없었다는 사실을 지금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은 언어감각의 천재이고 화가는 색감(色感)의 천재이듯 영웅은 행동의 천재이다. 복잡하거나 절망적인 상황의 본질을 간단하게 파악한 다음 단순화된 목표와 전략에 일생을 투척하는 도박을 감행하는 사람들이 영웅이다. 영웅의 생애가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런 행동의 집중적 투자를 위해서는 생략하고 무시해야 할 인정, 사정, 과정, 때로는 인명의 희생 때문이다. 이런 영웅의 생애가 고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범인(凡人)은 살았을 때의 그를 알아주지 못하고 그가 죽고 나서는 그가 성취한 것들만 공짜로 즐기려하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죽음은 그가 혁명의 대상으로 삼았던 봉건적 잔재, 즉 사대주의, 위선적 명분론, 당파성과 그가 도전의 대상으로 삼았던 미국식 민주주의가 연대하여 그를 삼킨 결과라는 해석이 있다. 국내 민주화세력에 내재(內在)된 사대성과 명분성을 중시하는 시각이다. 1979년 10월 그는 미국의 인권 압력과 국내 민주화세력의 도전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다. 김영삼(金泳三) 신민당 총재가 『뉴욕 타임즈』와 한 기자회견이 미국의 내정간섭을 요청한 것이라 하여 화를 낸 박정희는 김 총재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하게 되었고 이는 부마(釜馬)사태의 한 요인이 되었다. 이런 정치적 불안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권부(權府) 깊숙한 곳에서 갈등이 빚어지고 드디어 김재규(金載圭)는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게 된다. 이 김재규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한 여러 요인 가운데는 차지철(車智澈)에 대한 증오심과 차 실장을 편드는 박정희에 대한 원한 이외에 민주화세력으로부터의 영향과 미국의 어떤 작용을 상정할 수 있다.
김재규는 10월26일 밤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라고 중얼거리면서 궁정동 식당으로 들어가 총을 쏘았고 법정에서는 박정희가 사력(死力)을 다해서 추진한 자주국방 정책을, 한미(韓美) 안보협력체제를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김영삼을 조선조의 양반정치 전통을 이어받은 사대적 정치인으로 보았고 김영삼은 박정희를 인권탄압을 자행하는 독재자로 보았다. 미국과 국내의 지식인, 학생세력은 김영삼 편을 들었다. 박정희의 지지 기반은 '침묵하는 서민대중'이었다. 이들 속에서 박정희는 항상 영웅이었다.
1997년 9월 2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