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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장흥 여다지 해안에 위치한 한승원 문학 산책길.
남도(南道) 끝자락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서울에서 새벽기차를 타고 목포에 내려 장흥 가는 고속버스로 갈아탔다. 짙푸른 목포항을 가로질러 가는 버스 차창 너머로 아침 햇살이 내렸다. 영암과 진도를 거쳐갈 적마다 정차(停車)하는 문틈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다. 상강(霜降)의 아침은 이름처럼 쌀쌀했다. 산허리에서 피어오르는 흰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상념에 잠기기 쉬웠다. 옹기종기 모인 배추밭 둔덕들을 한참 지나 마침내 장흥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아직 정오가 이른 시각이었다.
장흥은 문향(文鄕)으로 유명하다. 고(故) 이청준 선생을 비롯해 한승원 소설가, 이승우 교수 등 유력 문인들이 장흥에서 나고 자랐다. 작가 한강의 부친(父親) 한승원 소설가가 교직생활을 마치고 일찌감치 터를 잡고 산 곳도 장흥군 안양면의 깊숙이 자리한 율산마을이다. 율산마을로 가려면 차로 15분 정도 이동해야 한다. 걸어서는 가기 힘들고 배차시간이 촉박한 마을버스를 타기에는 조심스럽다. 다행히 군청 측의 차량지원을 받아 제 시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리고 보니 북으로는 산세(山勢)가 아늑하고 남으로는 먼 바다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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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새가 핀 농로와 가을 추수를 마친 논밭. |
농로(農路)를 따라 남쪽 바다로 내려갔다. 동쪽 시골길에는 비닐하우스 가축(家畜) 농장이 진을 쳤고 서쪽 전답(田畓)에는 추수를 끝낸 짚단들이 베어진 채 도열해 있었다. 수평선까지 장사진(長蛇陣)을 친 듯 길은 하염없었다. 쇠잔한 억새가 고개를 내밀어 반겨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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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산마을에서 내려다본 남쪽 풍경과 여다지 해안의 득량만. |
일순 마주친 남해의 풍광(風光)은 지친 보폭을 저절로 잦아들게 만들었다. 인근 촌로(村老) 몇 분이 그물을 거둬들일 뿐 사방이 고요했다. 조심스레 다가온 작고 여린 파도소리가 귓전을 메웠다. 솟아난 포말이 이내 사그라졌다. 남도의 해풍은 시골의 지열(地熱)과 어우러져 청량했다. 조개무덤과 불거진 해초들이 발길에 채였다. 구둣발이 반쯤 묻히는 모래톱을 가로질렀다. 마치 물살의 포(脯)를 뜨듯 일렁이는 은빛 윤슬에도 바다는 침착했다. 서구(西歐) 나폴리의 축소판이자 장흥의 대표적인 절경(絶景), '여다지 해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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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쪽바다' 여다지 해안의 득량만. |
여다지 해안에는 한승원 문학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한승원 선생의 시비(詩碑)와 문학비(文學碑)가 해안을 따라 일렬로 늘어서 있다. 그 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수문해수욕장이 나온다. 여다지 해안에서 바라보는 바다 곳곳에는 조각섬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가까이로는 장재도, 멀리로는 소록도가 동쪽으로 득량도가 있다. 그래서 여다지 해안의 바다는 득량만으로도 불린다. 동남쪽 방향으로 흘러가면 고흥군이 나오기 때문이다. 한센병 환자들의 애환이 서린 작고 아름다운 섬 소록도. 그 길목을 중간에서 지키는 득량도는 tvN의 인기 예능프로그램 〈삼시세끼〉 어촌편 시리즈의 배경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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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다지 해안에 조성된 한승원 문학 산책로. 한승원 작가의 시비(詩碑)와 문학비, 정자 등이 세워져 있다. |
산책로를 걷다 보면 바닥에 돗자리를 깐 나무 정자(亭子)가 마련돼 있다. 잠시 앉아 경치를 바라보며 쉬기에 좋다. 조약돌이 가득한 길가를 따라가면 바위를 깎아 글씨를 새긴 한승원 선생의 시편(詩篇)들을 감상할 수 있다.
'벌거벗은 채 짙푸른 바다에 풍덩 / 빠져 죽은 다음 한 개의 물새알 되어 / 떠다니고 싶다는 그 여자와 / 뭉게구름 속에 새빨갛게 타는 / 노을처럼 사랑하다가 / 검은 댕기 두루미로 깨어나 장흥 안양 / 율산 여닫이 앞바다 바지락 밭에서 / 내내 한 다리로 물음표처럼 서 있곤 하다가 / 뒷산마루의 늙은 소나무 가지에 둥지를 틀고 / 살았으면 하는 / 그래 좋다 그 희망을 가져라 / 희망은 희망 없음으로부터 죽순처럼 솟는 것이다.' - 한승원, 〈희망〉 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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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다지 해안 앞바다에 떠 있는 조각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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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다지 해안 인근의 식당. |
바닷길 중턱에는 해변에 말뚝을 박아 밧줄로 묶은 조각배 한 척이 떠 있었다. 기자가 내려온 길 뒤쪽을 살펴보니 직접 물고기를 낚아 운영하는 식당 서너 곳이 있었다. 제일 가까이에 있는 곳은 조개백숙과 우럭매운탕으로 유명한 '미소' 식당이다.
돌아가는 길은 아까 본 억새밭과 무르익은 진홍빛 단풍이 배웅해 줬다. 꽃 없는 것들의 서걱대는 소리가 적막한 바다에 속삭인다. 모름지기 중추(中秋)에는 가을산이 명산이고 시월의 낙엽은 낭만의 상징이라지만 그 못지않게 가을바다도 푸근하다. 봄과 여름 내 숨 막히던 시간의 속도와 시대의 그늘을 씻을 수 있고, 차분히 앉아 첫눈의 기다림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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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쪽으로 펼쳐진 여다지 해안과 득량만. |
굳이 속세의 번뇌를 벗기는 '열반(涅槃)의 바다'라 찬탄치 않더라도 남해는 그곳, 그 자리에서 충분히 아름답다. 바닷물처럼 차오르는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늦가을을 그립게 부르고 있다.
글·사진=신승민 월간조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