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사에서 작가, 사전 편찬자로 ‘세 번째 인생’
⊙ 노인정신의학 전문가… 망상과 회상에서 ‘노년의 언어’를 찾다
⊙ “단어는 감자다” 어원을 캐는 사람… 수작업으로 만든 1600쪽의 벽돌
⊙ 名文의 조건은 “내용이 분명하고, 흐름이 자연스러우며, 독자를 배려하고, 자기 생각을 정확히 표현한 글”
⊙ “언어는세계 평화를 꿈꾸는 정신과 의사의 마지막 처방전”(《지구촌 사전》)
李元澤
1947년생. 서울대 의과대학 졸업, 미국 오하이오 의대 정신과 수료, Harbo–UCLA 신체정신과 수료, 미국 정신과·노인정신과 전문의 취득 / 미국 웨스턴대 정신과 임상 부교수, 재미시인협회 이사장, 한미번역문학가협회 회장 역임 / 미주펜문학상(시) 수상
⊙ 노인정신의학 전문가… 망상과 회상에서 ‘노년의 언어’를 찾다
⊙ “단어는 감자다” 어원을 캐는 사람… 수작업으로 만든 1600쪽의 벽돌
⊙ 名文의 조건은 “내용이 분명하고, 흐름이 자연스러우며, 독자를 배려하고, 자기 생각을 정확히 표현한 글”
⊙ “언어는세계 평화를 꿈꾸는 정신과 의사의 마지막 처방전”(《지구촌 사전》)
李元澤
1947년생. 서울대 의과대학 졸업, 미국 오하이오 의대 정신과 수료, Harbo–UCLA 신체정신과 수료, 미국 정신과·노인정신과 전문의 취득 / 미국 웨스턴대 정신과 임상 부교수, 재미시인협회 이사장, 한미번역문학가협회 회장 역임 / 미주펜문학상(시) 수상
- 지난 2023년, 기자와 만난 이원택.
1970년대 초, 한국에서 의대를 졸업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의사 가운보다 펜을 더 좋아했고, 사람의 병만큼이나 사람의 말을 궁금해 했다.
1971년 의대를 졸업한 뒤 군 복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간 이원택(李元澤·78)은 그로부터 반세기 동안, 한 손엔 청진기를, 다른 손엔 펜을 놓지 않고 살아왔다.
의사로서, 작가로서, 그리고 어학사전 편찬자로서 그의 궤적은 한국인 이민 1세대의 치열한 기록이자, 언어로 인간을 이해하려는 한 인생의 ‘평생 실험’이었다.
가난 속의 출발, 그리고 문학의 꿈
이원택은 1947년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에서 시골 초등학교 교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8형제 중 네 명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남은 넷 가운데 장남인 그는 일찍이 가족의 희망이었다.
“아버님은 장남만큼은 꼭 공부를 시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고 믿으셨지요.”
12살이 되던 해, 그는 홀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복중·고를 거쳤다. 전세방을 전전하던 중·고교 시절, 고달픈 현실을 견디게 해준 것은 책이었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교내 백일장에서 입선하며 문예반 활동을 시작했고, 고등학교 때는 서울시내 여섯 개 학교의 문학소년·소녀들이 모인 ‘썰물’이라는 동아리를 직접 만들어서 글쓰기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의 열정이 향한 곳은 처음부터 문학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 글이나 쓴다는 건 불효(不孝)였다.
이원택은 “아버님의 뜻을 따라 고3 때 진로를 의대로 바꿨다”면서 “그때부터 제 인생은 문학과 의학 사이의 줄타기였다”고 회상한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그는 3년간 육군 군의관으로 복무한 뒤, 더 큰 세계를 향해 길을 떠났다. 1975년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의 마콤(Macomb) 병원에서 시작했다. 당시 디트로이트는 범죄율이 높기로 악명 높았다. 범죄율은 인구 10만 명당 6800건으로, 살인과 강도 비율 모두 미국 주요 도시 중 최상위 수준이었다. 차가 없어 새벽마다 버스로 출퇴근했다. 주머니에는 늘 20달러 한 장을 넣고 다녔다.
“혹시 권총이 배에 닿을 때 내놔야 할 목숨의 속전(贖錢)이었죠. 디트로이트 도심 한가운데에 방 두 칸짜리 월세 80달러 아파트를 얻었을 땐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바퀴벌레들과 동거했지만, 내 인생 첫 독립이었으니까요.”
그는 오하이오 메디컬 칼리지(Medical College of Ohio)에서 정신과 과정을 마친 뒤, 1980년 Harbor–UCLA에서 신체정신의학(psycho–somatic medicine)을 수료했다. 그러나 연구의 세계는 냉혹하기만 했다.
“돈벌이는 안 되고 사람 진이 빠지더군요.”
노인정신과 의사가 되다
이원택은 과감히 병원을 나와 캘리포니아 롱비치에 개인 진료실을 열었다. 그때부터 그의 전문은 ‘노인정신의학(geriatric psychiatry)’이었다.
“40년 전부터 노인 시대가 올 것을 예견했지요. 다만 노인은 자주 오다가 금세 사라진다는 점은 계산에 없었습니다.”
그는 환자의 ‘말’을 가장 중요한 진단 도구로 여긴다.
“환자가 ‘정상인가요?’ 묻는다면 ‘정상입니다’라고 해야 하고 ‘이상 없나요?’라고 하면 ‘이상이 있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같은 의미의 질문이라도 단어 선택 속에는 환자의 불안과 기대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정신의학은 문학처럼, 사람의 언어를 해독(解讀)하는 일입니다.”
그는 오랜 세월 노인을 진료하며 ‘생각의 병집’이라 부른 현상을 관찰했다.
“대뇌 피질은 생각하는 갈대가 아닙니다. 생각할수록 골이 깊어지는 수렁이지요.”
망상과 회상, 그 미세한 경계선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안다.
“어느 할머니는 위층 할아버지가 자기를 괴롭힌다며 하소연했지요. 잠들만하면 화장실 물을 내린다고요. 하지만 그건 관심의 표현이었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감정을 비난으로 바꿔 자기 도덕성을 방어하는 거지요.”
이원택의 진료 철학은 ‘공감 이전의 이해’다. 말이 곧 병이고, 언어의 결을 따라가면 마음의 상처가 드러난다.
“언어에는 맥박이 있습니다. 문장의 박동을 들어야 진짜 진단이 가능하지요.”
그는 노인 환자들을 통해 ‘망상과 회상’의 심리 연구에 파고들었다.
“할머니가 손녀의 말 한마디(‘할머니, 나 오늘 엄마랑 자장면 사 먹고 왔는데, 엄마가 할머니한테 말하지 말라고 그랬다’) 때문에 며느리를 의심하고, 음식에 독이 들었다며 계란만 먹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피해의식이 노년의 마지막 방어 기제입니다.”
노인성 망상은 대체로 ‘피해’를 중심에 둔다. 사회적 고립, 신체적 불편, 기억의 불안이 합쳐지면 현실과 허구가 뒤섞인다.
“그런 망상은 2년 이상 지속되면 약물이나 상담으로도 고치기 어렵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한번 굳으면 깊이 파입니다.”
‘회상의 언덕’
반면 회상은 노년의 가장 건강한 방어라고 그는 설명한다. 과거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단순한 집착이 아니라 자존의 회복이라는 것. 흔히 듣는 ‘소싯적에’라든가 ‘왕년에’라는 말은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보다는 노인들이 사용해야 어울린다. 첫사랑의 추억을 미화하는 것과 같이 “왕년에~” 하고 나오는 부분은 대부분 과장되었거나 극적으로 각색되어 있다.
그는 자주 여성 노인 환자들한테서 “우리는 50년간 일심동체(一心同體)로 살았다”는 말을 듣곤 하는데, 가족들에 의하면 그녀의 남편은 젊은 시절부터 아주 폭군에다가 그 부부는 항상 언쟁만 했던 경우가 더러 있다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과거를 통해 현재 자신의 위치를 정립시킬 필요가 느는데 이는 나이가 들수록 이러한 회상의 만족을 공유하거나 알아주는 상대방이 필요하기 때문이란다.
연구에 의하면 회상 작용이 활발한 사람일수록 노년의 인생에 만족감을 갖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노인정신과에서는 이와 같은 회상의 허구성을 치료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과거에 힘들여 성취해 온 업적들이나 자신들의 역할을 어쩌면 불안할지도 모르는 미래에 대한 방패로 재무장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그래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실보다는 그 사실을 어떻게 순화하고 미화하는가가 중요하다. 즉 “역사적 허구에서 서술적 진실을 창조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가 설명을 이어 갔다.
“앞서 말한 그 할머니 환자는 파란만장한 자신의 결혼 생활을 미화함으로써 자기 인생의 가치를 재정립하고, 또한 손주들을 포함한 가족들에게 자기의 역할을 인정받게 됨으로써 ‘회상의 언덕’을 넘어선 것이죠. 세월이 지나 먼 훗날 생각할 때 ‘매일같이’ 말다툼을 했다는 의미는 ‘일심동체’로 살았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요? 저는 그 할머니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회상하면서 우리가 회상의 언덕을 넘을 때에 비로소 진실을 말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치매에 걸리면 속내가 드러난다”
이원택은 치매 병동에서 매일 인간의 본질을 보곤 했다. 사위가 오지 않으면 “아직 그 사내랑 같이 사니?” 묻는 어머니, 손녀를 며느리로 착각해 “새 장가 갔냐?” 묻는 어머니.
기억이 사라지면, 맨 마지막 필터링을 거친 후에는 감정만 남는다.
“딸 가진 어머니는 딸이 해로하기를, 아들 가진 어머니는 아들의 씨앗이 번성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본능이지요.”
그는 이어 말한다.
“성인이라 해도 치매에 걸리면 속내가 드러납니다. 그게 나쁜 게 아닙니다. 인간이란 본래 그렇게 단순한 존재입니다.”
기자는 그의 저서들을 두루 읽었다. 장난기 가득한 최면술 같기도 하고, 총천연색 군무(群舞) 속 언뜻 지나치기 쉬운 보석처럼, 행간에 진실·진의·사랑·아픔을 담으려 애쓴 흔적이 보였다.
2007년부터 2018년까지 《만화경(萬華鏡)》 《요지경(瑤池鏡)》 《무아경(無我境)》 《혼미경(昏迷鏡)》 《신비경(神秘鏡)》 《분광경(分光鏡)》 등 여섯 권의 저서를 발표했으며, 2014년에는 에세이 글쓰기 방법론을 담은 《수필을 중심으로 한 메타 라이팅》이란 참고서도 출판했다.
기자는 며칠 동안 《메타 라이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방대한 독서 편력이 감지되었다.
그가 말하는 ‘명문(名文)’은 이렇다.
“아무리 해박한 지식을 나열하고 미사여구로 치장을 해도 ‘내용’이 없으면 한낱 ‘잡문’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흐리멍텅하지 않고 일목요연해야 바쁘신 독자 제위께 누를 끼치지 않을 것 아닌가요. 글쓰기는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생각하며 무엇을 원하는가를 반영하는 일입니다. 나타내고자 하는 생각과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 바로 명문이죠. 무릇 글은 구름 가듯 물 흐르듯 쓰고, 그 속뜻은 알기 쉬워야 해요.”
환갑을 넘어 다시 펜을 들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저는 중학교 때 내털리 우드한테 홀딱 반해 커서 미국에 가서 서양 여자를 얻는 꿈을 꾼 적이 있는데, 당시 할리우드에 그녀와 똑같이 생긴 배우지망생들이 수십 명이나 몰려들었으나 감독들이 ‘우리는 내털리 우드 한 명이면 족하다’며 다 따돌렸다고 하죠. 영화와 마찬가지로 모든 글은 새로운 맛이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사람들이 눈꼴 썩혀 가며 책을 파고들겠습니까?”
그의 시각은 랠프 왈도 에머슨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세상이 너를 끊임없이 바꾸려 할 때 자기 자신으로 남는 것이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To be yourself in a world that is constantly trying to make you something else is the greatest accomplishment).”
그는 의사로 자리를 잡은 뒤에도 글을 포기하지 않았다. 환갑을 넘기며 다시 펜을 들었다.
그는 수필(2010년 《문학예술》), 시(2012년 《한국문인》), 평론(2015년 《미래시학》)으로 잇따라 등단하며 장르를 넘나드는 필력을 과시했다.
“원래 욕심이 많았어요. 30년 의사질에 좀 먹고살 만하게 되니까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싶더군요. 그래서 환갑을 계기로 그동안 돈 때문에 못 갔던 작가의 길을 걸어가 보기로 하였죠.”
소설은 엄두가 안 나서 수필을 쓰기 시작했는데, “수필은 어중이떠중이 다 쓰는 것 같아서” 좀 고상하게 시인 티를 덧대기로 했다. 그런데 평론을 하는 분들이 그가 쓴 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트집을 잡는 것이었다. 아니꼽기도 해서 “에라~ 나도 평론가가 되어 보자”고 억지로 등단을 했지만 수필이 적성에 맞았다고 고백한다.
‘문학과 과학을 접목시킨, 소설식 사전’
“저도 예술적 머리를 타고났겠지만 그동안 과학(정신과 의사)을 하느라 다 망가졌어요. 그러면 ‘문학과 과학을 한번 접목시켜 봐? 내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식 사전은 어떨까’ 하고 생각했지요.
중국의 사마천(司馬遷)은 역사와 문학을 섭렵했습니다. 48세에 인위적으로 거세(去勢)를 당했는데 저는 68세쯤 자연적으로 궁형(宮刑)이 찾아와서 양기가 모두 대갈통으로 올라오더군요. 《사기》는 본기(本紀)·표(表)·서(書)·세가(世家)·열전(列傳)을 포함해 총 130편, 52만 6500여 자(字)에 이르지만, 이보다 2000년 후에 나온 ‘이원택 사전’은 더 나아야 되겠지요.”
그래서 올해 2월 《이원택의 영–한 지구촌 사전》을 펴냈다. 이미 영한사전을 세 차례나 낸 적이 있다. 2024년 3월 《이원택의 영–한 신세대 사전》, 2022년 8월 《이원택의 미–한 원형 사전》, 2021년 《이원택의 미–한 변형 사전》 등이다. 정신과 의사인 그가 영한사전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지구촌 사전》 보도자료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몽땅 다시 쓴 파격적 사전, 공평한 표제어 선택, 속 시원한 어원 풀이, 살아 있는 역동적 사전, 한 사람이 쓴 독창적 사전, 초강력 전천후 사전, 고차원 입체적 사전, 앞서가는 미래형 사전, 다목적 교육용 사전, 수출용 명품 사전, 한국어 등 동양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로 가야 빠릅니다.
한국 최초의 어원 및 대조어 사전!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이원택은 이 사전을 만들기까지 평생 흘린 땀 이상을 쏟아냈다. 미국에서 영어로 마음고생을 했던 경험이, 다른 이들이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돕고 싶은 마음으로 이어져 사전 편찬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말이다.
“제가 미국에 처음 와서 인턴 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수련의 책임자가 자기 방으로 불러 처음에는 나를 칭찬하는 것 같더니, 그다음은 우물우물하는데 도통 감이 안 잡혔습니다. ‘We like you very very much, we need you here, but…’, 나중에 알고 보니 ‘영어가 통하지 않으니 1년 후에 다시 오라’는 말이었죠. 미국인 특유의 우회 화법을 쓰기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껌뻑이고 있으려니까 이 양반이 ‘Did you get it?’이란 말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귀가 안 뚫렸어도 세 번씩이나, 그것도 또박또박 묻는 말을 못 알아듣는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재빨리 한국식 문법으로 해석하고 ‘Did you give me something?’으로 되받아 물었더니 그 친구, 한쪽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냥 나가 보라고 하더군요. 결국 1년간 방과 후에 일주일에 세 번씩 영어 강습소를 다닌다는 조건으로 쫓겨나지는 않았지만 처참한 신세였었지요.”
‘알아들었냐’고 묻는 ‘get’을 무엇인가를 받았냐고 묻는 것으로 돌려서 해석해서 ‘당신이 나에게 뭔가를 주었었나요?’라고 되물은 에피소드는 어쩌면 고차원적인 유머러스한 표현으로 상황을 모면한 기싸움일 수도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선생은 그 순간 자기 자신이 자랑스럽지 않았다.
“원어민 선생보다, 큰소리로 외치는 연습 필요”
그 후 5년간의 혹독한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여러 병원을 옮겨 다녔다. 외국에서 사춘기까지 자란 사람들은 발음이 원주민같이 매끄러울 수가 없는 법이다.
“그들의 억양이 익숙하지 않아서 어디에 악센트가 있는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죠. ‘I will love you forever’라고 할 때 제일 중요한 단어가 forever이고 액센트는 ever에 있어요. 그래서 저는 단어 발음을 한글로 표시하고 굵은 활자로 써서 강하게 발음하려 애썼지요. 원어민 선생을 유치원부터 모셔 오는 것보다, 큰소리로 표제어를 되풀이해서 외쳐 보는 것이 훨씬 경제적일 것입니다.”
“사전은 말의 묘지가 아니다”
그의 사전은 기존의 영어사전과 전혀 달랐다. ‘표제어 중심’이 아닌 ‘맥락 중심’, ‘정의(definition)’보다 ‘사람의 입’에서 쓰이는 실제 언어를 중시했다.
“사전이란 건 말의 묘지(墓地)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생물이지요. 말은 사람처럼 진화하고, 문화와 함께 숨 쉬니까요.”
그는 사전 편찬 중에 여러 금기어와 마주쳤다.
“신문을 읽다가 ‘nips’라는 단어를 처음 봤어요. 한 쇼 제작자가 한인 여성 언론인 Mina Kims를 예로 들어 썼다가 논란이 됐죠. 방송에서 자주 쓰이고, 언뜻 뜻이 불분명해 실어야 했지만 원고는 이미 넘긴 뒤였습니다.”
그는 그 단어의 기원을 추적했다. “2차대전 후 일본에 진주한 미군들이 ‘Nippon’ 여성을 조롱하며 만든 속어였죠. 젖가슴이 너무 작아서 한 번 쓰고 버린다는 뜻이었습니다. 큰 사전들은 이런 단어의 뿌리를 숨깁니다. 불편하고 위험하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런 현실이야말로 기록해야 할 역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판단은 분명했다.
“말의 폭력을 숨기면 역사가 지워집니다. 표현의 위험보다 중요한 건 언어의 진실입니다.”
그의 사전은 어원(語源) 중심으로 구성됐다.
“단어는 감자와 같습니다. 뿌리를 캐면 주렁주렁 새 줄기가 달립니다.”
그는 linon(그리스어)→linum(라틴어)→linen(게르만어)→line(영어)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liner·linear·linger·long·longevity·length·longitude·lounge가 모두 연결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사전에서 소개하는 다른 단어를 예로 들면, 망각을 의미하는 ‘amnesia’는 같은 그리스어 어근에서 파생된 ‘amnesty’로 이어진다. Amnesty는 ‘과거의 범죄를 잊고 용서한다’는 의미에서 특별사면을 뜻한다. 사전에서 amnesia 다음에 amnesty를 배치한 것은 이 때문이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단어들의 줄기를 따라가며 어원의 뿌리를 이해하게 된다. 어원 찾기의 일환으로 라틴어에서 파생된 스페인어까지 독학을 해서 작년에는 기초 스페인어 교재 《이원택의 맛보기 스페인어》를 세상에 내놓기도 했다. 여든을 바라보는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이해 없이 외우면 잊습니다. 그러나 뿌리를 알면 언어는 기억 속에서 자랍니다. 어려운 길이 결국 쉬운 길입니다.”
사전 집필은 외로운 싸움이었다. 원고는 볼펜으로 종이에 썼고, 타자와 교정은 비서와 아르바이트생이 맡았다. “컴퓨터를 몰라 다 수작업이었어요. 마침표 하나, 대문자 하나까지 직접 확인했습니다.”
교정은 다섯 번, 여섯 번 반복됐다.
“이를 잡다 보면 서캐가 보이듯 오자가 나오고 또 나왔습니다.”
출판사 교섭도 쉽지 않았다. 전자사전이 주류가 된 시대에 종이사전을 낸다는 건 무모했다. “출판사들이 ‘당신 혼자 무슨 사전을 쓰겠냐’ 하더군요.” 결국 소규모 출판사 ‘지식과감성’과 손잡았다. 코로나 시기였지만, 그 덕분에 오히려 집필에 집중할 수 있었다.
“환자도 줄고, 모임도 줄고, 오로지 사전만 남았지요. 전화위복(轉禍爲福)이었습니다.”
‘상생’과 ‘지구촌’
그는 인공지능(AI) 번역의 발전을 인정하지만 회의적인 시각도 갖고 있다.
“AI는 문법을 처리하지만 인간의 숨결은 읽지 못합니다. 컴퓨터는 칩으로 되어 있지만, 인간의 감정은 액체입니다. 지식은 운반할 수 있지만, 감성은 복제할 수 없습니다.”
그의 사전은 이런 시대에 대한 작은 저항이었다. 《지구촌 사전》의 첫머리는 ‘상생’, 마지막 표제어는 ‘지구촌’이다. 그 사이를 잇는 주제는 ‘배움’이다.
“언어의 경계가 사라지는 시대일수록, 자기 언어의 뿌리를 지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한국어의 혼과 감정이 세계 언어 속에서 섞이고 빛나야 합니다.”
그는 《지구촌 사전》을 ‘K–브랜드의 언어 인프라’라 부른다.
“한국이 전 세계에 드라마와 음악을 수출하듯, 언어도 수출해야 합니다. 이 사전은 단순한 어학서가 아니라 한국어를 세계어 속에 심는 씨앗입니다.”
‘K–브랜드의 언어 인프라’
그는 정부 차원의 지원을 촉구한다.
“국가가 산업에 투자하듯 언어에도 투자해야 합니다. 세계 잼버리에 쏟은 예산의 1%만 써도 30년 후엔 ‘국가 브랜드 가치’로 천 배는 남을 겁니다.”
유머도 여전하다.
“이 책 정가는 3만 5000원입니다. 국내에서는 인쇄비, 해외에서는 문화외교비죠. 외국 친구에게 한 권 선물하면, 머리가 든 친구라면 틀림없이 좋아할 겁니다.”
이원택은 단어를 단순히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자와 유머 섞인 대화를 나누며 소통한다. ‘아포스티유(apostille)’를 보자. 사전적 의미는 ‘추인, 방주(傍註), 공문서의 국외 인증’으로, 1961년 국제협약에 따라 관인(官印)이나 서명의 진위를 확인해 발급하는 증서다. 그런데 설명 끝에 이런 문장이 붙는다. ‘자기네들이 인정해 준 것을 믿지 못하고 재확인시켜 주는 이율배반적이고도 번거로운 절차’. 독자가 방금 속으로 중얼거렸을 법한 말을 편찬자가 그대로 받아 적은 듯하다. 이렇게 그는 사전 곳곳에 이런 지적 위트를 숨겨 놓았다.
이원택의 사전은 언어학서이자 일기장이자 자서전이다. 그가 기록한 단어 하나하나에는 의사로서의 청진, 작가로서의 사유, 이민자로서의 고독이 함께 묻어 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사람을 고치는 일을 하면서 동시에 언어를 고치는 일을 했습니다. 말이 병이기도 하고, 치료제이기도 하니까요.”
그는 의사이자 작가로서, 인간의 언어를 탐구했다. 언어는 문화의 DNA이자 기억의 저장소다.
“말이 사라지면 생각도 사라집니다. 언어는 인간의 뇌와 같아요. 세포가 죽어 가도, 조금만 살아 있으면 다시 회복됩니다.”
백 년 뒤 지구촌의 언어가 어떻게 변하든, 그는 한국어가 그 중심에 한 자리를 차지하길 바란다.
“한국어→동양어→세계어로 이어지는 흐름에 한국어를 섞어 넣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그는 덧붙인다.
“남의 말을 타도하자는 게 아니라, 함께 가자는 뜻이지요. 그게 바로 ‘윈윈(win–win)’입니다.
요즘 미국에서 K–푸드로 인기있는 ghimbap(김밥)의 ghim은 한국인 김여익이 최초로 양식을 한 데서 연유했다고 하고, K–컬처의 gat(갓), gut²(굿), samalnori(사물놀이) 등도 세계어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습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약자인 ‘케데헌’이란 한국어도 조만간 OED나 웹스터에 등장할 겁니다. 아직까지 편자한테 K–D–H로 할까 Ke–De–Hun으로 할까 그 스펠링을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사전의 궁극 목표는 ‘세계 평화’”
그의 작업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치유하려는 정신과 의사의 또 다른 진료였다. 그가 《지구촌 사전》을 ‘처방 사전’이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구촌 사전》의 궁극적 목표는 월드 피스(world peace)입니다. 웃긴다고 하시겠지만, 저는 그 말이 진심입니다. 정신과를 오래 하다 보니 드디어 맛이 간 걸까요? 하하하.”
A4 용지보다 살짝 작은 크기, 총 1600 페이지로 된 두께 6cm, 벽돌 한 장 무게 2.5kg으로 한 손에 들기 버거운 이 사전에는, 이원택의 반세기에 걸친 열정과 숨결, 언어를 대하는 묵직한 비장함이 농밀하게 스며 있다. 그것은 종이의 경계를 넘어, 한 인간이 세계와 우주를 마주한 자리에서 열어 둔 ‘영혼의 창문’이 아닐까.
“저는 원래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사전을 쓰는 것이 욕심이었습니다만, 제 사전을 읽어 보고 ‘말 되네!’ 하며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고자 합니다.”⊙
1971년 의대를 졸업한 뒤 군 복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간 이원택(李元澤·78)은 그로부터 반세기 동안, 한 손엔 청진기를, 다른 손엔 펜을 놓지 않고 살아왔다.
의사로서, 작가로서, 그리고 어학사전 편찬자로서 그의 궤적은 한국인 이민 1세대의 치열한 기록이자, 언어로 인간을 이해하려는 한 인생의 ‘평생 실험’이었다.
가난 속의 출발, 그리고 문학의 꿈
이원택은 1947년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에서 시골 초등학교 교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8형제 중 네 명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남은 넷 가운데 장남인 그는 일찍이 가족의 희망이었다.
“아버님은 장남만큼은 꼭 공부를 시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고 믿으셨지요.”
12살이 되던 해, 그는 홀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복중·고를 거쳤다. 전세방을 전전하던 중·고교 시절, 고달픈 현실을 견디게 해준 것은 책이었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교내 백일장에서 입선하며 문예반 활동을 시작했고, 고등학교 때는 서울시내 여섯 개 학교의 문학소년·소녀들이 모인 ‘썰물’이라는 동아리를 직접 만들어서 글쓰기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의 열정이 향한 곳은 처음부터 문학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 글이나 쓴다는 건 불효(不孝)였다.
이원택은 “아버님의 뜻을 따라 고3 때 진로를 의대로 바꿨다”면서 “그때부터 제 인생은 문학과 의학 사이의 줄타기였다”고 회상한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그는 3년간 육군 군의관으로 복무한 뒤, 더 큰 세계를 향해 길을 떠났다. 1975년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의 마콤(Macomb) 병원에서 시작했다. 당시 디트로이트는 범죄율이 높기로 악명 높았다. 범죄율은 인구 10만 명당 6800건으로, 살인과 강도 비율 모두 미국 주요 도시 중 최상위 수준이었다. 차가 없어 새벽마다 버스로 출퇴근했다. 주머니에는 늘 20달러 한 장을 넣고 다녔다.
“혹시 권총이 배에 닿을 때 내놔야 할 목숨의 속전(贖錢)이었죠. 디트로이트 도심 한가운데에 방 두 칸짜리 월세 80달러 아파트를 얻었을 땐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바퀴벌레들과 동거했지만, 내 인생 첫 독립이었으니까요.”
그는 오하이오 메디컬 칼리지(Medical College of Ohio)에서 정신과 과정을 마친 뒤, 1980년 Harbor–UCLA에서 신체정신의학(psycho–somatic medicine)을 수료했다. 그러나 연구의 세계는 냉혹하기만 했다.
“돈벌이는 안 되고 사람 진이 빠지더군요.”
노인정신과 의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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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의과대학 졸업식 당시. 학사모를 쓴 이원택이 부모님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
“40년 전부터 노인 시대가 올 것을 예견했지요. 다만 노인은 자주 오다가 금세 사라진다는 점은 계산에 없었습니다.”
그는 환자의 ‘말’을 가장 중요한 진단 도구로 여긴다.
“환자가 ‘정상인가요?’ 묻는다면 ‘정상입니다’라고 해야 하고 ‘이상 없나요?’라고 하면 ‘이상이 있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같은 의미의 질문이라도 단어 선택 속에는 환자의 불안과 기대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정신의학은 문학처럼, 사람의 언어를 해독(解讀)하는 일입니다.”
그는 오랜 세월 노인을 진료하며 ‘생각의 병집’이라 부른 현상을 관찰했다.
“대뇌 피질은 생각하는 갈대가 아닙니다. 생각할수록 골이 깊어지는 수렁이지요.”
망상과 회상, 그 미세한 경계선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안다.
“어느 할머니는 위층 할아버지가 자기를 괴롭힌다며 하소연했지요. 잠들만하면 화장실 물을 내린다고요. 하지만 그건 관심의 표현이었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감정을 비난으로 바꿔 자기 도덕성을 방어하는 거지요.”
이원택의 진료 철학은 ‘공감 이전의 이해’다. 말이 곧 병이고, 언어의 결을 따라가면 마음의 상처가 드러난다.
“언어에는 맥박이 있습니다. 문장의 박동을 들어야 진짜 진단이 가능하지요.”
그는 노인 환자들을 통해 ‘망상과 회상’의 심리 연구에 파고들었다.
“할머니가 손녀의 말 한마디(‘할머니, 나 오늘 엄마랑 자장면 사 먹고 왔는데, 엄마가 할머니한테 말하지 말라고 그랬다’) 때문에 며느리를 의심하고, 음식에 독이 들었다며 계란만 먹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피해의식이 노년의 마지막 방어 기제입니다.”
노인성 망상은 대체로 ‘피해’를 중심에 둔다. 사회적 고립, 신체적 불편, 기억의 불안이 합쳐지면 현실과 허구가 뒤섞인다.
“그런 망상은 2년 이상 지속되면 약물이나 상담으로도 고치기 어렵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한번 굳으면 깊이 파입니다.”
‘회상의 언덕’
반면 회상은 노년의 가장 건강한 방어라고 그는 설명한다. 과거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단순한 집착이 아니라 자존의 회복이라는 것. 흔히 듣는 ‘소싯적에’라든가 ‘왕년에’라는 말은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보다는 노인들이 사용해야 어울린다. 첫사랑의 추억을 미화하는 것과 같이 “왕년에~” 하고 나오는 부분은 대부분 과장되었거나 극적으로 각색되어 있다.
그는 자주 여성 노인 환자들한테서 “우리는 50년간 일심동체(一心同體)로 살았다”는 말을 듣곤 하는데, 가족들에 의하면 그녀의 남편은 젊은 시절부터 아주 폭군에다가 그 부부는 항상 언쟁만 했던 경우가 더러 있다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과거를 통해 현재 자신의 위치를 정립시킬 필요가 느는데 이는 나이가 들수록 이러한 회상의 만족을 공유하거나 알아주는 상대방이 필요하기 때문이란다.
연구에 의하면 회상 작용이 활발한 사람일수록 노년의 인생에 만족감을 갖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노인정신과에서는 이와 같은 회상의 허구성을 치료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과거에 힘들여 성취해 온 업적들이나 자신들의 역할을 어쩌면 불안할지도 모르는 미래에 대한 방패로 재무장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그래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실보다는 그 사실을 어떻게 순화하고 미화하는가가 중요하다. 즉 “역사적 허구에서 서술적 진실을 창조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가 설명을 이어 갔다.
“앞서 말한 그 할머니 환자는 파란만장한 자신의 결혼 생활을 미화함으로써 자기 인생의 가치를 재정립하고, 또한 손주들을 포함한 가족들에게 자기의 역할을 인정받게 됨으로써 ‘회상의 언덕’을 넘어선 것이죠. 세월이 지나 먼 훗날 생각할 때 ‘매일같이’ 말다툼을 했다는 의미는 ‘일심동체’로 살았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요? 저는 그 할머니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회상하면서 우리가 회상의 언덕을 넘을 때에 비로소 진실을 말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치매에 걸리면 속내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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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재미 문인들과 함께 《수필을 중심으로 한 메타 라이팅》 출간 기념회를 가진 이원택(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
기억이 사라지면, 맨 마지막 필터링을 거친 후에는 감정만 남는다.
“딸 가진 어머니는 딸이 해로하기를, 아들 가진 어머니는 아들의 씨앗이 번성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본능이지요.”
그는 이어 말한다.
“성인이라 해도 치매에 걸리면 속내가 드러납니다. 그게 나쁜 게 아닙니다. 인간이란 본래 그렇게 단순한 존재입니다.”
기자는 그의 저서들을 두루 읽었다. 장난기 가득한 최면술 같기도 하고, 총천연색 군무(群舞) 속 언뜻 지나치기 쉬운 보석처럼, 행간에 진실·진의·사랑·아픔을 담으려 애쓴 흔적이 보였다.
2007년부터 2018년까지 《만화경(萬華鏡)》 《요지경(瑤池鏡)》 《무아경(無我境)》 《혼미경(昏迷鏡)》 《신비경(神秘鏡)》 《분광경(分光鏡)》 등 여섯 권의 저서를 발표했으며, 2014년에는 에세이 글쓰기 방법론을 담은 《수필을 중심으로 한 메타 라이팅》이란 참고서도 출판했다.
기자는 며칠 동안 《메타 라이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방대한 독서 편력이 감지되었다.
그가 말하는 ‘명문(名文)’은 이렇다.
“아무리 해박한 지식을 나열하고 미사여구로 치장을 해도 ‘내용’이 없으면 한낱 ‘잡문’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흐리멍텅하지 않고 일목요연해야 바쁘신 독자 제위께 누를 끼치지 않을 것 아닌가요. 글쓰기는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생각하며 무엇을 원하는가를 반영하는 일입니다. 나타내고자 하는 생각과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 바로 명문이죠. 무릇 글은 구름 가듯 물 흐르듯 쓰고, 그 속뜻은 알기 쉬워야 해요.”
환갑을 넘어 다시 펜을 들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저는 중학교 때 내털리 우드한테 홀딱 반해 커서 미국에 가서 서양 여자를 얻는 꿈을 꾼 적이 있는데, 당시 할리우드에 그녀와 똑같이 생긴 배우지망생들이 수십 명이나 몰려들었으나 감독들이 ‘우리는 내털리 우드 한 명이면 족하다’며 다 따돌렸다고 하죠. 영화와 마찬가지로 모든 글은 새로운 맛이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사람들이 눈꼴 썩혀 가며 책을 파고들겠습니까?”
그의 시각은 랠프 왈도 에머슨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세상이 너를 끊임없이 바꾸려 할 때 자기 자신으로 남는 것이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To be yourself in a world that is constantly trying to make you something else is the greatest accomplishment).”
그는 의사로 자리를 잡은 뒤에도 글을 포기하지 않았다. 환갑을 넘기며 다시 펜을 들었다.
그는 수필(2010년 《문학예술》), 시(2012년 《한국문인》), 평론(2015년 《미래시학》)으로 잇따라 등단하며 장르를 넘나드는 필력을 과시했다.
“원래 욕심이 많았어요. 30년 의사질에 좀 먹고살 만하게 되니까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싶더군요. 그래서 환갑을 계기로 그동안 돈 때문에 못 갔던 작가의 길을 걸어가 보기로 하였죠.”
소설은 엄두가 안 나서 수필을 쓰기 시작했는데, “수필은 어중이떠중이 다 쓰는 것 같아서” 좀 고상하게 시인 티를 덧대기로 했다. 그런데 평론을 하는 분들이 그가 쓴 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트집을 잡는 것이었다. 아니꼽기도 해서 “에라~ 나도 평론가가 되어 보자”고 억지로 등단을 했지만 수필이 적성에 맞았다고 고백한다.
‘문학과 과학을 접목시킨, 소설식 사전’
“저도 예술적 머리를 타고났겠지만 그동안 과학(정신과 의사)을 하느라 다 망가졌어요. 그러면 ‘문학과 과학을 한번 접목시켜 봐? 내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식 사전은 어떨까’ 하고 생각했지요.
중국의 사마천(司馬遷)은 역사와 문학을 섭렵했습니다. 48세에 인위적으로 거세(去勢)를 당했는데 저는 68세쯤 자연적으로 궁형(宮刑)이 찾아와서 양기가 모두 대갈통으로 올라오더군요. 《사기》는 본기(本紀)·표(表)·서(書)·세가(世家)·열전(列傳)을 포함해 총 130편, 52만 6500여 자(字)에 이르지만, 이보다 2000년 후에 나온 ‘이원택 사전’은 더 나아야 되겠지요.”
그래서 올해 2월 《이원택의 영–한 지구촌 사전》을 펴냈다. 이미 영한사전을 세 차례나 낸 적이 있다. 2024년 3월 《이원택의 영–한 신세대 사전》, 2022년 8월 《이원택의 미–한 원형 사전》, 2021년 《이원택의 미–한 변형 사전》 등이다. 정신과 의사인 그가 영한사전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지구촌 사전》 보도자료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몽땅 다시 쓴 파격적 사전, 공평한 표제어 선택, 속 시원한 어원 풀이, 살아 있는 역동적 사전, 한 사람이 쓴 독창적 사전, 초강력 전천후 사전, 고차원 입체적 사전, 앞서가는 미래형 사전, 다목적 교육용 사전, 수출용 명품 사전, 한국어 등 동양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로 가야 빠릅니다.
한국 최초의 어원 및 대조어 사전!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이원택은 이 사전을 만들기까지 평생 흘린 땀 이상을 쏟아냈다. 미국에서 영어로 마음고생을 했던 경험이, 다른 이들이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돕고 싶은 마음으로 이어져 사전 편찬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말이다.
“제가 미국에 처음 와서 인턴 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수련의 책임자가 자기 방으로 불러 처음에는 나를 칭찬하는 것 같더니, 그다음은 우물우물하는데 도통 감이 안 잡혔습니다. ‘We like you very very much, we need you here, but…’, 나중에 알고 보니 ‘영어가 통하지 않으니 1년 후에 다시 오라’는 말이었죠. 미국인 특유의 우회 화법을 쓰기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껌뻑이고 있으려니까 이 양반이 ‘Did you get it?’이란 말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귀가 안 뚫렸어도 세 번씩이나, 그것도 또박또박 묻는 말을 못 알아듣는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재빨리 한국식 문법으로 해석하고 ‘Did you give me something?’으로 되받아 물었더니 그 친구, 한쪽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냥 나가 보라고 하더군요. 결국 1년간 방과 후에 일주일에 세 번씩 영어 강습소를 다닌다는 조건으로 쫓겨나지는 않았지만 처참한 신세였었지요.”
‘알아들었냐’고 묻는 ‘get’을 무엇인가를 받았냐고 묻는 것으로 돌려서 해석해서 ‘당신이 나에게 뭔가를 주었었나요?’라고 되물은 에피소드는 어쩌면 고차원적인 유머러스한 표현으로 상황을 모면한 기싸움일 수도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선생은 그 순간 자기 자신이 자랑스럽지 않았다.
“원어민 선생보다, 큰소리로 외치는 연습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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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미국 유학길에 오르기 전, 김포공항에서 가족들과 함께한 이원택(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
“그들의 억양이 익숙하지 않아서 어디에 악센트가 있는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죠. ‘I will love you forever’라고 할 때 제일 중요한 단어가 forever이고 액센트는 ever에 있어요. 그래서 저는 단어 발음을 한글로 표시하고 굵은 활자로 써서 강하게 발음하려 애썼지요. 원어민 선생을 유치원부터 모셔 오는 것보다, 큰소리로 표제어를 되풀이해서 외쳐 보는 것이 훨씬 경제적일 것입니다.”
“사전은 말의 묘지가 아니다”
그의 사전은 기존의 영어사전과 전혀 달랐다. ‘표제어 중심’이 아닌 ‘맥락 중심’, ‘정의(definition)’보다 ‘사람의 입’에서 쓰이는 실제 언어를 중시했다.
“사전이란 건 말의 묘지(墓地)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생물이지요. 말은 사람처럼 진화하고, 문화와 함께 숨 쉬니까요.”
그는 사전 편찬 중에 여러 금기어와 마주쳤다.
“신문을 읽다가 ‘nips’라는 단어를 처음 봤어요. 한 쇼 제작자가 한인 여성 언론인 Mina Kims를 예로 들어 썼다가 논란이 됐죠. 방송에서 자주 쓰이고, 언뜻 뜻이 불분명해 실어야 했지만 원고는 이미 넘긴 뒤였습니다.”
그는 그 단어의 기원을 추적했다. “2차대전 후 일본에 진주한 미군들이 ‘Nippon’ 여성을 조롱하며 만든 속어였죠. 젖가슴이 너무 작아서 한 번 쓰고 버린다는 뜻이었습니다. 큰 사전들은 이런 단어의 뿌리를 숨깁니다. 불편하고 위험하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런 현실이야말로 기록해야 할 역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판단은 분명했다.
“말의 폭력을 숨기면 역사가 지워집니다. 표현의 위험보다 중요한 건 언어의 진실입니다.”
그의 사전은 어원(語源) 중심으로 구성됐다.
“단어는 감자와 같습니다. 뿌리를 캐면 주렁주렁 새 줄기가 달립니다.”
그는 linon(그리스어)→linum(라틴어)→linen(게르만어)→line(영어)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liner·linear·linger·long·longevity·length·longitude·lounge가 모두 연결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사전에서 소개하는 다른 단어를 예로 들면, 망각을 의미하는 ‘amnesia’는 같은 그리스어 어근에서 파생된 ‘amnesty’로 이어진다. Amnesty는 ‘과거의 범죄를 잊고 용서한다’는 의미에서 특별사면을 뜻한다. 사전에서 amnesia 다음에 amnesty를 배치한 것은 이 때문이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단어들의 줄기를 따라가며 어원의 뿌리를 이해하게 된다. 어원 찾기의 일환으로 라틴어에서 파생된 스페인어까지 독학을 해서 작년에는 기초 스페인어 교재 《이원택의 맛보기 스페인어》를 세상에 내놓기도 했다. 여든을 바라보는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이해 없이 외우면 잊습니다. 그러나 뿌리를 알면 언어는 기억 속에서 자랍니다. 어려운 길이 결국 쉬운 길입니다.”
사전 집필은 외로운 싸움이었다. 원고는 볼펜으로 종이에 썼고, 타자와 교정은 비서와 아르바이트생이 맡았다. “컴퓨터를 몰라 다 수작업이었어요. 마침표 하나, 대문자 하나까지 직접 확인했습니다.”
교정은 다섯 번, 여섯 번 반복됐다.
“이를 잡다 보면 서캐가 보이듯 오자가 나오고 또 나왔습니다.”
출판사 교섭도 쉽지 않았다. 전자사전이 주류가 된 시대에 종이사전을 낸다는 건 무모했다. “출판사들이 ‘당신 혼자 무슨 사전을 쓰겠냐’ 하더군요.” 결국 소규모 출판사 ‘지식과감성’과 손잡았다. 코로나 시기였지만, 그 덕분에 오히려 집필에 집중할 수 있었다.
“환자도 줄고, 모임도 줄고, 오로지 사전만 남았지요. 전화위복(轉禍爲福)이었습니다.”
‘상생’과 ‘지구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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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파주 탄현면의 고향집에서. |
“AI는 문법을 처리하지만 인간의 숨결은 읽지 못합니다. 컴퓨터는 칩으로 되어 있지만, 인간의 감정은 액체입니다. 지식은 운반할 수 있지만, 감성은 복제할 수 없습니다.”
그의 사전은 이런 시대에 대한 작은 저항이었다. 《지구촌 사전》의 첫머리는 ‘상생’, 마지막 표제어는 ‘지구촌’이다. 그 사이를 잇는 주제는 ‘배움’이다.
“언어의 경계가 사라지는 시대일수록, 자기 언어의 뿌리를 지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한국어의 혼과 감정이 세계 언어 속에서 섞이고 빛나야 합니다.”
그는 《지구촌 사전》을 ‘K–브랜드의 언어 인프라’라 부른다.
“한국이 전 세계에 드라마와 음악을 수출하듯, 언어도 수출해야 합니다. 이 사전은 단순한 어학서가 아니라 한국어를 세계어 속에 심는 씨앗입니다.”
‘K–브랜드의 언어 인프라’
그는 정부 차원의 지원을 촉구한다.
“국가가 산업에 투자하듯 언어에도 투자해야 합니다. 세계 잼버리에 쏟은 예산의 1%만 써도 30년 후엔 ‘국가 브랜드 가치’로 천 배는 남을 겁니다.”
유머도 여전하다.
“이 책 정가는 3만 5000원입니다. 국내에서는 인쇄비, 해외에서는 문화외교비죠. 외국 친구에게 한 권 선물하면, 머리가 든 친구라면 틀림없이 좋아할 겁니다.”
이원택은 단어를 단순히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자와 유머 섞인 대화를 나누며 소통한다. ‘아포스티유(apostille)’를 보자. 사전적 의미는 ‘추인, 방주(傍註), 공문서의 국외 인증’으로, 1961년 국제협약에 따라 관인(官印)이나 서명의 진위를 확인해 발급하는 증서다. 그런데 설명 끝에 이런 문장이 붙는다. ‘자기네들이 인정해 준 것을 믿지 못하고 재확인시켜 주는 이율배반적이고도 번거로운 절차’. 독자가 방금 속으로 중얼거렸을 법한 말을 편찬자가 그대로 받아 적은 듯하다. 이렇게 그는 사전 곳곳에 이런 지적 위트를 숨겨 놓았다.
이원택의 사전은 언어학서이자 일기장이자 자서전이다. 그가 기록한 단어 하나하나에는 의사로서의 청진, 작가로서의 사유, 이민자로서의 고독이 함께 묻어 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사람을 고치는 일을 하면서 동시에 언어를 고치는 일을 했습니다. 말이 병이기도 하고, 치료제이기도 하니까요.”
그는 의사이자 작가로서, 인간의 언어를 탐구했다. 언어는 문화의 DNA이자 기억의 저장소다.
“말이 사라지면 생각도 사라집니다. 언어는 인간의 뇌와 같아요. 세포가 죽어 가도, 조금만 살아 있으면 다시 회복됩니다.”
백 년 뒤 지구촌의 언어가 어떻게 변하든, 그는 한국어가 그 중심에 한 자리를 차지하길 바란다.
“한국어→동양어→세계어로 이어지는 흐름에 한국어를 섞어 넣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그는 덧붙인다.
“남의 말을 타도하자는 게 아니라, 함께 가자는 뜻이지요. 그게 바로 ‘윈윈(win–win)’입니다.
요즘 미국에서 K–푸드로 인기있는 ghimbap(김밥)의 ghim은 한국인 김여익이 최초로 양식을 한 데서 연유했다고 하고, K–컬처의 gat(갓), gut²(굿), samalnori(사물놀이) 등도 세계어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습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약자인 ‘케데헌’이란 한국어도 조만간 OED나 웹스터에 등장할 겁니다. 아직까지 편자한테 K–D–H로 할까 Ke–De–Hun으로 할까 그 스펠링을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사전의 궁극 목표는 ‘세계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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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 가운을 입은 이원택. 노인정신과 의사로 평생을 살아왔다. |
“《지구촌 사전》의 궁극적 목표는 월드 피스(world peace)입니다. 웃긴다고 하시겠지만, 저는 그 말이 진심입니다. 정신과를 오래 하다 보니 드디어 맛이 간 걸까요? 하하하.”
A4 용지보다 살짝 작은 크기, 총 1600 페이지로 된 두께 6cm, 벽돌 한 장 무게 2.5kg으로 한 손에 들기 버거운 이 사전에는, 이원택의 반세기에 걸친 열정과 숨결, 언어를 대하는 묵직한 비장함이 농밀하게 스며 있다. 그것은 종이의 경계를 넘어, 한 인간이 세계와 우주를 마주한 자리에서 열어 둔 ‘영혼의 창문’이 아닐까.
“저는 원래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사전을 쓰는 것이 욕심이었습니다만, 제 사전을 읽어 보고 ‘말 되네!’ 하며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고자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