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高 출신들의 大選 도전 실패에 대해, “특정 학교의 특성 때문에 대선에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
⊙ “北核 포기 가능성 희박. 비핵화 조치 없이 제재 해제 안 돼”
⊙ 조용하고 성실한 ‘基督 학생’… “고교 3년 동안 한 번도 욕한 적 없어”
⊙ 사법연수원 기간에 수도침례신학교 3학년 야간부에 편입. 1983년 2월 졸업
⊙ 별명이 ‘미스터 국보법’… DJ 정권 시절인 1998년 《국가보안법 해설》 펴내
⊙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검사장 승진 두 차례 좌절 “시련이면서 성장의 기회였다”
⊙ 문재인 정부의 ‘과거사 재판’, “현재와 미래를 올곧게 하는 취지인지 의문”
⊙ “박정희 대통령 업적, 후손들이 꼭 기억하고 계승해야”
⊙ “北核 포기 가능성 희박. 비핵화 조치 없이 제재 해제 안 돼”
⊙ 조용하고 성실한 ‘基督 학생’… “고교 3년 동안 한 번도 욕한 적 없어”
⊙ 사법연수원 기간에 수도침례신학교 3학년 야간부에 편입. 1983년 2월 졸업
⊙ 별명이 ‘미스터 국보법’… DJ 정권 시절인 1998년 《국가보안법 해설》 펴내
⊙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검사장 승진 두 차례 좌절 “시련이면서 성장의 기회였다”
⊙ 문재인 정부의 ‘과거사 재판’, “현재와 미래를 올곧게 하는 취지인지 의문”
⊙ “박정희 대통령 업적, 후손들이 꼭 기억하고 계승해야”
- 사진=조현호
황교안(黃敎安·62) 전 총리를 만났다. 지난 2월 12일 서울 여의도 대하빌딩 5층에서다. 만남에 대한 기대에 비한다면 아쉬운 만남이었다. 우리는 다음을 기약했고 많은 질문을 서면으로 대체했다. 서면에 대한 답도 아쉬웠다. 예컨대 기자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 탄핵소추의결서의 증거로 제출된 검찰 공소장도 함량 미달이었다고 대통령 변호인단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최서원(최순실)의 공소장에는 최서원의 행위를 적시하는 가운데 간간이 ‘대통령과 공모하여’라는 문구만 들어가 있을 뿐, 막상 대통령이 구체적으로 어떤 위법을 저질렀는지 불분명하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신원(伸冤)이 필요하다고 보시는가요? 박 전 대통령의 명예가 회복되는 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황 전 총리는 이 질문에 “도리는 다했다”고 에둘러 말했다. 이 밖의 몇몇 질문에는 무응답이었다. 다음 만남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인간 황교안’에 대한 탐험을 시작하자. 그는 1957년생이다. 본적은 서울 용산구 서계동 33-192.
6·25 발발로 황해도 연백에서 피란 온 가정의 여섯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황대복)는 이런저런 막노동일을 하다가 말년에는 서울 만리재 고개 근처 서부역 앞 중림동에서 고물상을 했다. 어머니(전칠례)를 상징하는 것은 쪽 진 머리였다. 마흔셋에 황교안을 낳았으니 누가 보면 어머니라기보다 할머니에 가까웠으리라.
어린 시절, 황교안을 따라다닌 수식어는 조용하고 성실한 ‘기독(基督) 학생’이었다. 경기고(72회)를 나왔는데 고(故) 노회찬 의원,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동창이다. 고교 3년 내내 반장을 맡았다.
― 6남매 중 막내인데, 막내여서 좋은 점과 나쁜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막내였지만, 가난한 고물상 집에서 자라 첫째처럼 또래보다 빨리 철이 들고 자랐습니다. 외모나 언행에서 또래보다 조숙하고 신중하다는 얘기를 듣곤 했어요. 막내인데도 막내티가 별로 나지 않았다고 하니까요.”
― 성격은 아버지를 많이 닮으셨나요? 어머니를 많이 닮으셨나요.
“두 분 성격이 섞여 있습니다. 스스로를 평가하는 게 이상합니다만, 외향과 내향적인 면 모두를 지닌 것 같아요. 친구 중 한 명이 제가 ‘고교 3년 동안 한 번도 친구들에게 욕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한 것이 기억에 남아요.”
경기고 3년 내내 반장, 총학생회장, 학도호국단 연대장까지
황교안은 경기고 총학생회장에 출마해 당선됐다. 친구 이종걸은 언젠가 “황교안은 학도호국단 단장으로서 항상 교련복을 입고 절도 있는 생활을 하던 모범생”이라고 회고했다. 노회찬은 “고교 시절 나는 유신 반대 유인물을 뿌리고 다녔고, 황교안은 학도호국단장이었다. 황교안은 그때나 지금이나 가치관이 변한 게 없다”고 했다.
그런데 총학생회가 폐지되면서 황교안의 신분은 총학생회장에서 학도호국단 연대장으로 바뀌었다. 경기고는 황교안이 졸업하던 1976년 2월 종로구에서 강남구 삼성동으로 교사를 이전했다. 이때 황교안은 이삿짐 트럭 행렬 중 맨 앞 차량에 탑승해 교기를 들고 서 있었다고 동기들은 전한다.
― 혹시 경기고 다니실 때 반에서 몇 등을 하셨나요.
“등수를 직접 말씀드리기는 그렇고, 당시 반장은 성적 상위 10% 정도의 학생들이 맡았고, 3년 내내 반장을 했다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 경기고 출신들이 그간 대선에 나섰다가 모두 낙마한 이유가 뭘까요.
“특정 학교의 특성 때문에 대선에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연, 학연에 의존하기보다 국민 모두에게 사랑받는 정치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황교안에게 닥친 첫 시련은 대학입시였다. 서울대 법대 입시에서 낙방한 것이다. 이듬해 두 번째 도전에서도 서울대 법대의 관문을 못 넘었다. 당시 후기였던 성균관대 법학과에 77학번으로 입학했다.
그는 자신에게 첫 시련을 안긴 대입 제도를 어떻게 생각할까. 물론 그 당시 본고사와 지금의 수능시험은 엄연히 다르다. 황 전 총리는 “학벌주의 혁신”을 얘기했다.
“대입 문제는 우리 교육의 또 다른 현실입니다. 대입과 공교육 간 연관성은 관점에 따라 다양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혁신적인 접근으로 대입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합니다. 입시 위주 교육의 근본 원인은 우리 사회가 능력 중심이 아닌, 스펙 위주 평가시스템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총리 재직 시절, 국정과제의 하나로 ‘능력 중심 사회’를 추진한 바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공부도 모두 열심히 해야 한다”
혹시 서울대 법대 낙방이 병역 면제의 사유였던 피부병(담마진) 탓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황 전 총리는 고교 때나 재수할 때는 피부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했다.
“군대에 가지 않은 것이 아니고, 질병으로 인해 부득이 못 간 것입니다. 병역의 의무를 마치지 못한 것에 대해 국가와 국민에게 빚진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대학 들어가면서부터 담마진이라는 피부병이 생겨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있을 정도로 고통을 겪었어요.
의혹을 제기하는 분들은 365만명 중 4명만이 면제 대상이라고 하는데, 제가 앓은 ‘고도’ 담마진은 2002년 (병무청 전산화) 이후 총 200명이 넘게 면제 판정을 받은 질환입니다. 그 후 17년간 꾸준히 병원 진료와 약물치료를 받았고, 다행히 증상이 호전되어 재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던 1981년 사법고시에 합격해 검사가 되었다.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신학을 공부하겠다”고 평소 기도했다고 전한다.
실제로 사시 합격 후 사법연수원 기간에 수도침례신학교 3학년 야간부에 편입해 1983년 2월 졸업했다. 그는 어느 글에서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가 나를 바꾸었다’고 했다. 주일학교 선생님의 말씀은 이랬다.
“신앙생활도 공부도 모두 열심히 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에서도 세상에서도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말이 “내 삶의 첫 번째 전환점”이라고 했다. 이후 공부도 신앙도 열심이었다. 1998년 기독교계 주간지 《주간 기독교》에는 신앙과 관련한 그의 일면이 써 있다. 어느 기자가 쓴 ‘그 부부가 사는 풍경’에 황교안·최지영 부부의 인생 스토리가 실렸다.
〈… 남편은 어김없이 새벽 2시에 기상을 한다. 기도시간을 갖고 성경을 읽으면서 남편은 교회에서 가르칠 성경교재를 만든다. 그렇게 성경교재를 만들기 시작한 지 11년. 족히 몇 권의 책이 될 만한 자료가 파일 가득 촘촘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5시간 수면이면 남편은 적당하다고 생각을 한다. 저녁 9시에 취침을 하고 새벽 2시에 기상을 하는 남편은 결혼 이후 한 번도 변화를 주지 않았다.…〉
황 전 총리는 “아내 최지영을 만난 뒤, 마치 메마른 나뭇가지에 촉촉한 단비가 내리듯 부드럽고 융통성 있는 사람이 되어 왔고 약점이 보완되고 평안한 삶이 펼쳐졌다”고 고백했다. 아내 최씨는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상담학 석사, 연세대 목회상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나사렛대학교 교수(상담센터장)로 재직 중이다. 두 사람은 함께 교회에서 복음곡을 부르기도 했고, 아내 최씨는 복음성가 앨범인 〈위대한 유산〉을 낸 일도 있다.
사형을 구형한 국보법 위반자(김현장)를 ‘정치멘토’로 삼아
황교안은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1983년 청주지검에서 검사직을 시작했다. 몇 년 뒤 서울지검에 근무할 때 ‘공안부’에 충원되면서 또 다른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서울중앙지검에 근무할 때 공안부에 결원이 생겼다. 곧 복귀하리라 여겨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는데 그대로 남게 되었다”고 했다.
공안부 검사 시절, 강정구 동국대 교수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KAL기 폭파범 김현희 사건, 임수경·문규현 밀입북 사건, 거물(巨物) 간첩 이선실 등이 관련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등 공안부 역사에 기록될 초대형 사건들을 담당했다.
또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하 부미방)을 맡아 주범인 김현장에게 사형을 구형한 일도 있다. 그런데 김현장씨는 현재 ‘황교안 캠프’에서 그를 돕고 있다. 김씨는 누구인가. 1980년 5·18의 광주에서 ‘전두환 살육작전’이란 유인물을 배포, 5000만원이 걸린 현상수배범이 되었고 1982년 부미방 사건을 획책한 혐의로 사형수가 된 인물이다. 그는 1988년 12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김씨의 말이다.
“인생이 묘혀(해)요. 내가 그(황교안)를 돕고 있으니 말이에요. 언론에서 저를 ‘황교안의 정치멘토’라고 하대요? 기자 양반, 황 (전) 총리, 잘 부탁합니다. 그분을 도와주십시오.”
황교안은 《국가보안법 해설》(집영출판사·1998년 간)을 펴냈다. ‘미스터 국보법’이라는 별명이 그때쯤 붙었다. 좌파 정부에서 공안부 검사의 국보법 책 발간은 용기 있는 행동이었지만 그로 인해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인사상 부침(浮沈)을 겪어야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줄곧 “국보법 피해자”라고 주장해 왔고, 노무현 대통령은 국보법을 4대 악법으로 여겨왔으니 말이다.
부산 동부지검 차장검사 시절이던 2004년 서울고검 검사로 발령을 받았다. 검사장 승진을 목전에 두고 내려진 인사여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서울중앙지검 2차장 검사로 자리를 옮긴 것은 2005년 4월이었다.
인사상 浮沈과 塞翁之馬

그러나 검사장 승진에 한 번 더 물을 먹었다. 이듬해 2006년 인사 때 서울중앙지검 1차장과 3차장은 모두 검사장으로 승진했지만 2차장인 황교안만 제외됐다. 국정원 도청 사건과 강정구 교수 사건 때문이었다.
그는 국정원 도청 사건으로 김대중 정권의 최고 실세였던 임동원·신건 전직 국정원장을 구속시켰다. 두 사람의 구속을 둘러싸고 여야 정치권이 심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강정구 동국대 교수의 국보법 위반 사건 때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법무부 장관(천정배)의 검찰에 대한 수사지휘권이 발동되었다. 황교안 2차장 검사는 김종빈 검찰총장에게 강 교수 구속수사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김 총장은 법무장관의 수사지휘권은 수용하되 스스로 물러나는 쪽으로 용단(勇斷)을 내렸다.
― 검사장 승진에서 두 번 떨어진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보십니까.
“흔들림 없이 수사했다는 자부심과 원칙을 지켰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어요. 돌이켜보면 억울한 면도 없지는 않지만,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로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은 선배와 동료들 덕분이었습니다. 두 차례 검사장 승진에서 고배를 마시며 견뎌야 했던 고통의 시간이 시련이면서 동시에 성장의 기회였어요.”
― 김종빈 총장이 법무장관의 수사지휘권 문제로 스스로 물러났는데, 그때 마음고생이 심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당시 강정구 교수는 ‘6·25전쟁은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 전쟁’이라는 등, 국보법상 이적 동조에 해당하는 발언을 했죠. 노무현 대통령은 국보법 폐지를 주장하면서 강 교수 수사에 부정적이었어요. 결국엔 김 총장의 사퇴로 이어졌습니다.
노무현 정부하에서 이 문제가 검사로서의 장래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걱정이 없진 않았지만, 법과 원칙에 입각한 저의 판단과 소신을 굽힐 수는 없었죠.”
한편, 황 전 총리는 보수 정권이던 2009년과 2011년 국보법과 관련한 책을 다시 펴냈다. 《집회·시위법 해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박영사, 2009년 간), 《국가보안법》(박영사, 2011년 간) 등이다.
― 공안부 검사 출신이자 투철한 반공주의자로 평생 공직에 헌신하셨습니다. 북한의 속셈을 누구보다 잘 아시리라 판단됩니다. 2차 미북회담을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북한의 핵문제는 한반도의 미래, 대한민국의 안보, 우리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인 만큼 정치적 고려가 있어선 결코 안 됩니다. 이번 2차 미북회담은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진전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도, 북한의 명확한 비핵화 조치 없이 섣부르게 대북제재만 완화하든지, 한미동맹과 한미연합 방위 능력을 일방적으로 약화시키는 조치가 있어선 안 될 것입니다.”
― 북한 주민을 굶기면서 만든 핵탄두와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을 김정은 체제가 쉽게 포기할까요.
“김정은이 핵무기를 정권 유지의 필수적 수단으로 간주하는 한,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자발적 비핵화 가능성이 없는 북한을 움직일 유일한 수단은 제재 압박뿐입니다.
전례가 없던 핵, 미사일 도발을 일삼았던 북한이 평화공세로 돌아서게 만든 것도 국제사회의 강력한 대북제재 압박이었습니다.
저는 북한이 실질적인,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를 취하지 않는 한 북한에 대한 제재를 해제해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스터 국보법’이 보는 북한의 속마음
황교안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다음 ‘검사의 꽃’이라는 검사장으로 승진했다. 창원지검장(2009.1~8), 대구고검장(2009.8~2011.1), 부산고검장(2011.1~8)을 거쳤다.
이후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변호사로서 변호사 생활을 하던 중 2013년 3월 법무부 장관에 임명됐다. 그해 3월 11일 법무부 장관 취임식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법무·검찰은 최근 국민 여러분께 실망을 드리는 모습을 보여왔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소나무의 푸름을 가슴에 품고 국민이 공감하는 법무행정을 하나하나 성실히 실천해 나간다면, 국민의 큰 신뢰와 사랑을 얻을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는다.”
황교안의 취임사 중 ‘소나무’ 관련 부분은 《논어(論語)》의 ‘날씨가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의 푸름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에 나오는 말이다.
장관으로 2년 3개월을 보낸 뒤 44대 국무총리에 오른 것은 2015년 6월.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황교안 총리 임명에 반발하며 “박근혜 대통령이 공안 정치로 야당과 국민을 협박하겠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좌파 정당이나 진보 정치세력, 과격 노동계에서 볼 때 ‘공안검사 출신’ 황교안 총리는 용납하기 어려웠으리라. 이들의 반국가적 행적과 그들이 신봉하는 이념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황교안을 ‘저승사자’로 느꼈던 것이다.
황교안의 장관청문회 때는 전관예우 문제, 총리청문회 때는 딸의 신혼집 임차보증금에 대한 증여세 문제가 불거졌다.
변호사 시절 월평균 1억원 정도의 급여를 받은 것에 대해 처음엔 “일한 만큼 받은 것”이라던 황교안은 나중 “급여 중 일부를 사회봉사를 위해 쓰겠다”며 1억원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또 아들의 전세보증금, 딸의 신혼집 임차보증금에 대한 증여세 논란은 청문회를 앞두고 일단락됐다.
2015년 6월 국무총리 인사청문회 때 제출한 재산신고서에 따르면 황교안은 서울 서초구 잠원동 소재 아파트(141m2) 8억8000만원, 예금 5억291만8000원, 체어맨 승용차 1258만원 등 14억1349만8000원을 갖고 있다. 배우자 최지영은 경기도 용인 수지 아파트(164m2) 3억4900만원, 충남 천안시 빌라 건물 전세권 3000만원, 예금 5억8279만8000원을 신고했다.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의 석방은…”
황교안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2016년 12월 9일부터 2017년 5월 11일까지 5개월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일했다. 대통령 궐위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에 직면했던 것이다.
그는 기자의 대통령 탄핵과 관련한 여러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자세히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만 했다. 그래도 몇 가지 질문에는 답했다.
―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명단인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국가기록원은 ‘박근혜 정부에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못 찾았다’고 밝혔지만, 법원은 (박근혜 정부) 관련자들을 처벌했고 블랙리스트가 존재하는 것으로 사실상 정리가 되었습니다.
“특정 성향 문화·예술인에 대한 편파 지원은 진보 정권에서 사실상 시작된 것 아닌가요?
현 정부가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블랙리스트가 다시 문제가 되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것 아닙니까?
특히 문재인 정권의 방송계 장악은 심각한 수준입니다. 이런 식이면 정권이 바뀌면 또다시 단죄당하지 말란 법 있습니까? 최근, 지상파 TV 및 라디오 프로그램의 정치 편향성이 도를 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서울대의 연구 결과도 나왔지 않습니까?
이제 방송, 문화·예술 분야를 편파 지원하는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정치적 중립성과 자율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에 태극기 집회와 관련한 보고를 챙겨보셨는지 궁금합니다.
“특정 집회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국민 여론을 체크했습니다.”
― 자유한국당 전 대표께서 “(당 대표가 되면)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 석방을 위해 대국민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두 분 전직 대통령께서 모두 수감된 것은 국가적 불행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께서 병약한 몸으로 2년간 수감돼 많은 이가 걱정하고 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의 석방 문제는 국민 의견이 가장 중요합니다. 국민화합과 국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 문재인 정부는 출범 이후 ‘적폐 청산’ 드라이브를 걸며 과거 정책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과거 법원이 내린 공안 관련 판결을 뒤집기 위한 ‘과거사 재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아 현재와 미래를 올곧게 하기 위함인데, 과연 그 취지에 맞게 진행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역대 대통령 실패는 개인의 실패가 아닌 정치의 실패”
황교안은 왜 대통령의 꿈을 꾸고 현실 정치에 뛰어든 것일까. 민주화 이후 6명의 대통령이 커다란 국민적 기대 속에 취임했지만, 예외 없이 임기 말이면 비리, 실정 등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예외가 될까. 현재로선 알 수 없다.
― 한국 경제의 놀라운 성장에도 불구, 역대 대통령의 권력행사 및 운용 등에서 부정적인 평가가 많은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
“저는 정치의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문제로 보기 어렵습니다. 예외 없이 역대 대통령 모두 불행한 결말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는 전 국민이 공감하는 문제입니다. 권력 구조 개편 등 개헌문제는 국회와 정치권을 중심으로 공론화 작업을 진행해야 할 것입니다.”
― 역대 대통령을 평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은 누구입니까.
“어느 한 분을 제일 존경한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대통령이건 공과가 있고, 호불호가 생기기 마련인데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제가 기억해야 할 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산업화,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기여를 하신 분입니다. 불과 국민소득 100달러 수준의 가난했던 우리나라를 근대화할 수 있게 한, 박 전 대통령의 업적을 후손들이 꼭 기억하고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대립과 갈등을 완화시키는 조정력(혹은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대통령 리더십의 위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재인 대통령의 리더십 역시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독불장군식, 밀어붙이기식입니다. 국민을 상대로 한 위험한,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경제실험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최저임금, 근로시간 단축 등 좌파 편향적인 정책으로 민생이 파탄 났습니다.
지도자의 리더십이 얼마나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지 보여주는, 좋지 않은 사례입니다.
바람직한 대통령 리더십은 소통하는 민주적 리더십, 국민들을 진심으로 섬기는 ‘서번트 리더십’에 기반해야 합니다. 우리의 국익과 국민의 생명, 안전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위기를 타개할 ‘돌파형 리더십’도 필요합니다.”
― 한국 사회의 갈등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소수의 승자가 권력을 독점(Winner Takes All)하는 패거리식, 그리고 사생결단식 정치가 한국 사회를 지배해 왔습니다. 영호남 갈등의 원인인 지역 차별도 여기에 원인이 있다고 보입니다. 특히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로 양분되는 한국 사회의 갈등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생각과 방식이 다를 뿐, 촛불과 태극기를 든 마음은 모두가 나라를 걱정하는 애국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대한민국 국민이십니다.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건, 국민적인 통합·화합의 실현입니다.
저는 모든 정책을 ‘국민중심’으로 추진하고자 합니다. 동주공제(同舟共濟), 함께 한배를 타고 있다는 공동체 의식으로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강력한 야당을 만들겠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성공한 일은…
황교안 전 총리는 정말이지 ‘큰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정글과 지뢰밭이 가득한 정치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지난 2월 8일 그는 ‘보수의 심장’이라는 대구를 찾았다. 정치인들이 반드시 찾는 대구 서문시장을 방문해 상인들과 시민들도 만났다. 그의 뒤에는 최재훈 전 대구시의원, 김항곤 전 성주군수 등이 모습을 비쳤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최근 대구MBC는 황 전 총리 아들에 대한 병역특혜 의혹을 제기했다. “황 전 총리가 대구고검장 시절인 2009년 10월 당시 이철휘 제2작전사령부 사령관과 기독교로 친분을 쌓았다”며 “그달 27일 그의 아들은 이병 계급장을 달고 전북 전주 35사단 신병교육대→대구 2작사(2작전사령부)로 왔다”는 것이다. 전주 35사단에서 대구 2작사로 온 황 전 총리 아들은, 이 사령관이 2작사를 떠나는 2011년 4월까지 18개월간 함께 있었다고 한다.
황 전 총리는 적극 반박했다. “턱도 없는 소리, 가짜뉴스다. 전혀 문제가 없었다. 군부대에서 배치한 것이고, 제가 (대구고검장으로) 몇 달 있다가 가는지 알 수 없는데 여기에 붙여 놓겠냐”고 반박했다.
그는 장관과 총리 청문회는 넘었으나 대통령이 되기까지 많은 난관을 거쳐야 한다. 황 전 총리를 고건 전 총리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에 비유하는 이도 적지 않다. 관료 출신 정치인의 한계를 우려해서다. 황 전 총리의 말이다.
“공직자 출신이라서 정치를 못할 것이라는 건 편견입니다. 저보다 더 치열하게 공직생활을 한 사람도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1 야당을 이끌 경쟁력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훌륭한 경력을 쌓아온 사회 원로분들에 대해 자꾸 실패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매우 송구스러운 일입니다. 새로운 정치, 국민께서 열망하는 변화된 정치를 하기 위해 입당했습니다. 그 초심을 잃지 않겠습니다. 입당 후 전국을 돌며 들었던 문재인 정권의 폭정을 막아달라는 국민의 목소리도 ‘황교안 정치’에 고스란히 담도록 할 것입니다.”
― 당내 양쪽(친박·비박) 모두 외면받을 수도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설득하시겠습니까.
“제가 한국당에 막상 들어와 보니, 자신이 어느 계파라고 이야기하는 분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를 둘러싼 외교·안보 환경이 급변하고 있고, 민생경제가 날로 악화되는 상황에서 우리끼리 비난하고 편 가르기 할 겨를이 없습니다.
저는 계파정치를 하러 입당한 게 아닙니다. 만약 제가 계파정치를 한다면, 제가 바로 구태입니다.”
― 당내에서 친박, 비박이 사라지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인재 관리를 사람 중심이 아닌 일·역량 중심으로 하면 됩니다. 저 사람이 나랑 잘 맞고, 인연이 있는지 등을 기준으로 삼거나 특정 정치인에게 기대는 정치는 사라져야 할 구태입니다.”
기자가 준비한 마지막 질문은 이랬다.
― 인생에서 가장 성공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 성공으로 인해 배운 부정적인 점은 무엇입니까.
“첫사랑과 결혼한 것과 아들딸 낳은 것. 그리고 예쁜 손주들 보면서 행복하게 잘살고 있는 것입니다.”
― 인생에서 가장 실패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 실패로 인해 배운 긍정적인 점은 무엇입니까.
“바쁜 공직생활 등으로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 점점 가족의 소중함을 더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 탄핵소추의결서의 증거로 제출된 검찰 공소장도 함량 미달이었다고 대통령 변호인단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최서원(최순실)의 공소장에는 최서원의 행위를 적시하는 가운데 간간이 ‘대통령과 공모하여’라는 문구만 들어가 있을 뿐, 막상 대통령이 구체적으로 어떤 위법을 저질렀는지 불분명하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신원(伸冤)이 필요하다고 보시는가요? 박 전 대통령의 명예가 회복되는 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황 전 총리는 이 질문에 “도리는 다했다”고 에둘러 말했다. 이 밖의 몇몇 질문에는 무응답이었다. 다음 만남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인간 황교안’에 대한 탐험을 시작하자. 그는 1957년생이다. 본적은 서울 용산구 서계동 33-192.
6·25 발발로 황해도 연백에서 피란 온 가정의 여섯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황대복)는 이런저런 막노동일을 하다가 말년에는 서울 만리재 고개 근처 서부역 앞 중림동에서 고물상을 했다. 어머니(전칠례)를 상징하는 것은 쪽 진 머리였다. 마흔셋에 황교안을 낳았으니 누가 보면 어머니라기보다 할머니에 가까웠으리라.
어린 시절, 황교안을 따라다닌 수식어는 조용하고 성실한 ‘기독(基督) 학생’이었다. 경기고(72회)를 나왔는데 고(故) 노회찬 의원,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동창이다. 고교 3년 내내 반장을 맡았다.
― 6남매 중 막내인데, 막내여서 좋은 점과 나쁜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막내였지만, 가난한 고물상 집에서 자라 첫째처럼 또래보다 빨리 철이 들고 자랐습니다. 외모나 언행에서 또래보다 조숙하고 신중하다는 얘기를 듣곤 했어요. 막내인데도 막내티가 별로 나지 않았다고 하니까요.”
― 성격은 아버지를 많이 닮으셨나요? 어머니를 많이 닮으셨나요.
“두 분 성격이 섞여 있습니다. 스스로를 평가하는 게 이상합니다만, 외향과 내향적인 면 모두를 지닌 것 같아요. 친구 중 한 명이 제가 ‘고교 3년 동안 한 번도 친구들에게 욕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한 것이 기억에 남아요.”
경기고 3년 내내 반장, 총학생회장, 학도호국단 연대장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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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시절 황교안(맨 왼쪽). 경기고에서 3년 내내 반장을 했고 총학생회장이었다. |
그런데 총학생회가 폐지되면서 황교안의 신분은 총학생회장에서 학도호국단 연대장으로 바뀌었다. 경기고는 황교안이 졸업하던 1976년 2월 종로구에서 강남구 삼성동으로 교사를 이전했다. 이때 황교안은 이삿짐 트럭 행렬 중 맨 앞 차량에 탑승해 교기를 들고 서 있었다고 동기들은 전한다.
― 혹시 경기고 다니실 때 반에서 몇 등을 하셨나요.
“등수를 직접 말씀드리기는 그렇고, 당시 반장은 성적 상위 10% 정도의 학생들이 맡았고, 3년 내내 반장을 했다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 경기고 출신들이 그간 대선에 나섰다가 모두 낙마한 이유가 뭘까요.
“특정 학교의 특성 때문에 대선에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연, 학연에 의존하기보다 국민 모두에게 사랑받는 정치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황교안에게 닥친 첫 시련은 대학입시였다. 서울대 법대 입시에서 낙방한 것이다. 이듬해 두 번째 도전에서도 서울대 법대의 관문을 못 넘었다. 당시 후기였던 성균관대 법학과에 77학번으로 입학했다.
그는 자신에게 첫 시련을 안긴 대입 제도를 어떻게 생각할까. 물론 그 당시 본고사와 지금의 수능시험은 엄연히 다르다. 황 전 총리는 “학벌주의 혁신”을 얘기했다.
“대입 문제는 우리 교육의 또 다른 현실입니다. 대입과 공교육 간 연관성은 관점에 따라 다양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혁신적인 접근으로 대입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합니다. 입시 위주 교육의 근본 원인은 우리 사회가 능력 중심이 아닌, 스펙 위주 평가시스템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총리 재직 시절, 국정과제의 하나로 ‘능력 중심 사회’를 추진한 바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공부도 모두 열심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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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전 총리의 아버지 황대복과 어머니 전칠례. |
그러나 황 전 총리는 고교 때나 재수할 때는 피부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했다.
“군대에 가지 않은 것이 아니고, 질병으로 인해 부득이 못 간 것입니다. 병역의 의무를 마치지 못한 것에 대해 국가와 국민에게 빚진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대학 들어가면서부터 담마진이라는 피부병이 생겨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있을 정도로 고통을 겪었어요.
의혹을 제기하는 분들은 365만명 중 4명만이 면제 대상이라고 하는데, 제가 앓은 ‘고도’ 담마진은 2002년 (병무청 전산화) 이후 총 200명이 넘게 면제 판정을 받은 질환입니다. 그 후 17년간 꾸준히 병원 진료와 약물치료를 받았고, 다행히 증상이 호전되어 재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던 1981년 사법고시에 합격해 검사가 되었다.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신학을 공부하겠다”고 평소 기도했다고 전한다.
실제로 사시 합격 후 사법연수원 기간에 수도침례신학교 3학년 야간부에 편입해 1983년 2월 졸업했다. 그는 어느 글에서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가 나를 바꾸었다’고 했다. 주일학교 선생님의 말씀은 이랬다.
“신앙생활도 공부도 모두 열심히 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에서도 세상에서도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말이 “내 삶의 첫 번째 전환점”이라고 했다. 이후 공부도 신앙도 열심이었다. 1998년 기독교계 주간지 《주간 기독교》에는 신앙과 관련한 그의 일면이 써 있다. 어느 기자가 쓴 ‘그 부부가 사는 풍경’에 황교안·최지영 부부의 인생 스토리가 실렸다.
〈… 남편은 어김없이 새벽 2시에 기상을 한다. 기도시간을 갖고 성경을 읽으면서 남편은 교회에서 가르칠 성경교재를 만든다. 그렇게 성경교재를 만들기 시작한 지 11년. 족히 몇 권의 책이 될 만한 자료가 파일 가득 촘촘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5시간 수면이면 남편은 적당하다고 생각을 한다. 저녁 9시에 취침을 하고 새벽 2시에 기상을 하는 남편은 결혼 이후 한 번도 변화를 주지 않았다.…〉
황 전 총리는 “아내 최지영을 만난 뒤, 마치 메마른 나뭇가지에 촉촉한 단비가 내리듯 부드럽고 융통성 있는 사람이 되어 왔고 약점이 보완되고 평안한 삶이 펼쳐졌다”고 고백했다. 아내 최씨는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상담학 석사, 연세대 목회상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나사렛대학교 교수(상담센터장)로 재직 중이다. 두 사람은 함께 교회에서 복음곡을 부르기도 했고, 아내 최씨는 복음성가 앨범인 〈위대한 유산〉을 낸 일도 있다.
사형을 구형한 국보법 위반자(김현장)를 ‘정치멘토’로 삼아
황교안은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1983년 청주지검에서 검사직을 시작했다. 몇 년 뒤 서울지검에 근무할 때 ‘공안부’에 충원되면서 또 다른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서울중앙지검에 근무할 때 공안부에 결원이 생겼다. 곧 복귀하리라 여겨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는데 그대로 남게 되었다”고 했다.
공안부 검사 시절, 강정구 동국대 교수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KAL기 폭파범 김현희 사건, 임수경·문규현 밀입북 사건, 거물(巨物) 간첩 이선실 등이 관련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등 공안부 역사에 기록될 초대형 사건들을 담당했다.
또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하 부미방)을 맡아 주범인 김현장에게 사형을 구형한 일도 있다. 그런데 김현장씨는 현재 ‘황교안 캠프’에서 그를 돕고 있다. 김씨는 누구인가. 1980년 5·18의 광주에서 ‘전두환 살육작전’이란 유인물을 배포, 5000만원이 걸린 현상수배범이 되었고 1982년 부미방 사건을 획책한 혐의로 사형수가 된 인물이다. 그는 1988년 12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김씨의 말이다.
“인생이 묘혀(해)요. 내가 그(황교안)를 돕고 있으니 말이에요. 언론에서 저를 ‘황교안의 정치멘토’라고 하대요? 기자 양반, 황 (전) 총리, 잘 부탁합니다. 그분을 도와주십시오.”
황교안은 《국가보안법 해설》(집영출판사·1998년 간)을 펴냈다. ‘미스터 국보법’이라는 별명이 그때쯤 붙었다. 좌파 정부에서 공안부 검사의 국보법 책 발간은 용기 있는 행동이었지만 그로 인해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인사상 부침(浮沈)을 겪어야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줄곧 “국보법 피해자”라고 주장해 왔고, 노무현 대통령은 국보법을 4대 악법으로 여겨왔으니 말이다.
부산 동부지검 차장검사 시절이던 2004년 서울고검 검사로 발령을 받았다. 검사장 승진을 목전에 두고 내려진 인사여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서울중앙지검 2차장 검사로 자리를 옮긴 것은 2005년 4월이었다.

그러나 검사장 승진에 한 번 더 물을 먹었다. 이듬해 2006년 인사 때 서울중앙지검 1차장과 3차장은 모두 검사장으로 승진했지만 2차장인 황교안만 제외됐다. 국정원 도청 사건과 강정구 교수 사건 때문이었다.
그는 국정원 도청 사건으로 김대중 정권의 최고 실세였던 임동원·신건 전직 국정원장을 구속시켰다. 두 사람의 구속을 둘러싸고 여야 정치권이 심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강정구 동국대 교수의 국보법 위반 사건 때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법무부 장관(천정배)의 검찰에 대한 수사지휘권이 발동되었다. 황교안 2차장 검사는 김종빈 검찰총장에게 강 교수 구속수사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김 총장은 법무장관의 수사지휘권은 수용하되 스스로 물러나는 쪽으로 용단(勇斷)을 내렸다.
― 검사장 승진에서 두 번 떨어진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보십니까.
“흔들림 없이 수사했다는 자부심과 원칙을 지켰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어요. 돌이켜보면 억울한 면도 없지는 않지만,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로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은 선배와 동료들 덕분이었습니다. 두 차례 검사장 승진에서 고배를 마시며 견뎌야 했던 고통의 시간이 시련이면서 동시에 성장의 기회였어요.”
― 김종빈 총장이 법무장관의 수사지휘권 문제로 스스로 물러났는데, 그때 마음고생이 심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당시 강정구 교수는 ‘6·25전쟁은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 전쟁’이라는 등, 국보법상 이적 동조에 해당하는 발언을 했죠. 노무현 대통령은 국보법 폐지를 주장하면서 강 교수 수사에 부정적이었어요. 결국엔 김 총장의 사퇴로 이어졌습니다.
노무현 정부하에서 이 문제가 검사로서의 장래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걱정이 없진 않았지만, 법과 원칙에 입각한 저의 판단과 소신을 굽힐 수는 없었죠.”
한편, 황 전 총리는 보수 정권이던 2009년과 2011년 국보법과 관련한 책을 다시 펴냈다. 《집회·시위법 해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박영사, 2009년 간), 《국가보안법》(박영사, 2011년 간) 등이다.
― 공안부 검사 출신이자 투철한 반공주의자로 평생 공직에 헌신하셨습니다. 북한의 속셈을 누구보다 잘 아시리라 판단됩니다. 2차 미북회담을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북한의 핵문제는 한반도의 미래, 대한민국의 안보, 우리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인 만큼 정치적 고려가 있어선 결코 안 됩니다. 이번 2차 미북회담은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진전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도, 북한의 명확한 비핵화 조치 없이 섣부르게 대북제재만 완화하든지, 한미동맹과 한미연합 방위 능력을 일방적으로 약화시키는 조치가 있어선 안 될 것입니다.”
― 북한 주민을 굶기면서 만든 핵탄두와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을 김정은 체제가 쉽게 포기할까요.
“김정은이 핵무기를 정권 유지의 필수적 수단으로 간주하는 한,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자발적 비핵화 가능성이 없는 북한을 움직일 유일한 수단은 제재 압박뿐입니다.
전례가 없던 핵, 미사일 도발을 일삼았던 북한이 평화공세로 돌아서게 만든 것도 국제사회의 강력한 대북제재 압박이었습니다.
저는 북한이 실질적인,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를 취하지 않는 한 북한에 대한 제재를 해제해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스터 국보법’이 보는 북한의 속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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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시절, 황교안과 아내 최지영. |
이후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변호사로서 변호사 생활을 하던 중 2013년 3월 법무부 장관에 임명됐다. 그해 3월 11일 법무부 장관 취임식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법무·검찰은 최근 국민 여러분께 실망을 드리는 모습을 보여왔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소나무의 푸름을 가슴에 품고 국민이 공감하는 법무행정을 하나하나 성실히 실천해 나간다면, 국민의 큰 신뢰와 사랑을 얻을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는다.”
황교안의 취임사 중 ‘소나무’ 관련 부분은 《논어(論語)》의 ‘날씨가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의 푸름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에 나오는 말이다.
장관으로 2년 3개월을 보낸 뒤 44대 국무총리에 오른 것은 2015년 6월.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황교안 총리 임명에 반발하며 “박근혜 대통령이 공안 정치로 야당과 국민을 협박하겠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좌파 정당이나 진보 정치세력, 과격 노동계에서 볼 때 ‘공안검사 출신’ 황교안 총리는 용납하기 어려웠으리라. 이들의 반국가적 행적과 그들이 신봉하는 이념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황교안을 ‘저승사자’로 느꼈던 것이다.
황교안의 장관청문회 때는 전관예우 문제, 총리청문회 때는 딸의 신혼집 임차보증금에 대한 증여세 문제가 불거졌다.
변호사 시절 월평균 1억원 정도의 급여를 받은 것에 대해 처음엔 “일한 만큼 받은 것”이라던 황교안은 나중 “급여 중 일부를 사회봉사를 위해 쓰겠다”며 1억원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또 아들의 전세보증금, 딸의 신혼집 임차보증금에 대한 증여세 논란은 청문회를 앞두고 일단락됐다.
2015년 6월 국무총리 인사청문회 때 제출한 재산신고서에 따르면 황교안은 서울 서초구 잠원동 소재 아파트(141m2) 8억8000만원, 예금 5억291만8000원, 체어맨 승용차 1258만원 등 14억1349만8000원을 갖고 있다. 배우자 최지영은 경기도 용인 수지 아파트(164m2) 3억4900만원, 충남 천안시 빌라 건물 전세권 3000만원, 예금 5억8279만8000원을 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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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14일 오후 국정원 도청 수사를 총괄하는 서울중앙지검 황교안 2차장 검사가 서울 서초동 지검청사 브리핑룸에서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그는 기자의 대통령 탄핵과 관련한 여러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자세히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만 했다. 그래도 몇 가지 질문에는 답했다.
―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명단인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국가기록원은 ‘박근혜 정부에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못 찾았다’고 밝혔지만, 법원은 (박근혜 정부) 관련자들을 처벌했고 블랙리스트가 존재하는 것으로 사실상 정리가 되었습니다.
“특정 성향 문화·예술인에 대한 편파 지원은 진보 정권에서 사실상 시작된 것 아닌가요?
현 정부가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블랙리스트가 다시 문제가 되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것 아닙니까?
특히 문재인 정권의 방송계 장악은 심각한 수준입니다. 이런 식이면 정권이 바뀌면 또다시 단죄당하지 말란 법 있습니까? 최근, 지상파 TV 및 라디오 프로그램의 정치 편향성이 도를 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서울대의 연구 결과도 나왔지 않습니까?
이제 방송, 문화·예술 분야를 편파 지원하는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정치적 중립성과 자율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에 태극기 집회와 관련한 보고를 챙겨보셨는지 궁금합니다.
“특정 집회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국민 여론을 체크했습니다.”
― 자유한국당 전 대표께서 “(당 대표가 되면)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 석방을 위해 대국민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두 분 전직 대통령께서 모두 수감된 것은 국가적 불행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께서 병약한 몸으로 2년간 수감돼 많은 이가 걱정하고 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의 석방 문제는 국민 의견이 가장 중요합니다. 국민화합과 국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 문재인 정부는 출범 이후 ‘적폐 청산’ 드라이브를 걸며 과거 정책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과거 법원이 내린 공안 관련 판결을 뒤집기 위한 ‘과거사 재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아 현재와 미래를 올곧게 하기 위함인데, 과연 그 취지에 맞게 진행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역대 대통령 실패는 개인의 실패가 아닌 정치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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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과 황교안 총리. 2016년 5월 18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5차 규제개혁 장관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
― 한국 경제의 놀라운 성장에도 불구, 역대 대통령의 권력행사 및 운용 등에서 부정적인 평가가 많은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
“저는 정치의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문제로 보기 어렵습니다. 예외 없이 역대 대통령 모두 불행한 결말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는 전 국민이 공감하는 문제입니다. 권력 구조 개편 등 개헌문제는 국회와 정치권을 중심으로 공론화 작업을 진행해야 할 것입니다.”
― 역대 대통령을 평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은 누구입니까.
“어느 한 분을 제일 존경한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대통령이건 공과가 있고, 호불호가 생기기 마련인데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제가 기억해야 할 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산업화,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기여를 하신 분입니다. 불과 국민소득 100달러 수준의 가난했던 우리나라를 근대화할 수 있게 한, 박 전 대통령의 업적을 후손들이 꼭 기억하고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대립과 갈등을 완화시키는 조정력(혹은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대통령 리더십의 위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재인 대통령의 리더십 역시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독불장군식, 밀어붙이기식입니다. 국민을 상대로 한 위험한,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경제실험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최저임금, 근로시간 단축 등 좌파 편향적인 정책으로 민생이 파탄 났습니다.
지도자의 리더십이 얼마나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지 보여주는, 좋지 않은 사례입니다.
바람직한 대통령 리더십은 소통하는 민주적 리더십, 국민들을 진심으로 섬기는 ‘서번트 리더십’에 기반해야 합니다. 우리의 국익과 국민의 생명, 안전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위기를 타개할 ‘돌파형 리더십’도 필요합니다.”
― 한국 사회의 갈등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소수의 승자가 권력을 독점(Winner Takes All)하는 패거리식, 그리고 사생결단식 정치가 한국 사회를 지배해 왔습니다. 영호남 갈등의 원인인 지역 차별도 여기에 원인이 있다고 보입니다. 특히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로 양분되는 한국 사회의 갈등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생각과 방식이 다를 뿐, 촛불과 태극기를 든 마음은 모두가 나라를 걱정하는 애국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대한민국 국민이십니다.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건, 국민적인 통합·화합의 실현입니다.
저는 모든 정책을 ‘국민중심’으로 추진하고자 합니다. 동주공제(同舟共濟), 함께 한배를 타고 있다는 공동체 의식으로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강력한 야당을 만들겠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성공한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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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1일 오후 부산 중구 자갈치 시장을 찾은 황교안 전 총리가 시장 상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지난 2월 8일 그는 ‘보수의 심장’이라는 대구를 찾았다. 정치인들이 반드시 찾는 대구 서문시장을 방문해 상인들과 시민들도 만났다. 그의 뒤에는 최재훈 전 대구시의원, 김항곤 전 성주군수 등이 모습을 비쳤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최근 대구MBC는 황 전 총리 아들에 대한 병역특혜 의혹을 제기했다. “황 전 총리가 대구고검장 시절인 2009년 10월 당시 이철휘 제2작전사령부 사령관과 기독교로 친분을 쌓았다”며 “그달 27일 그의 아들은 이병 계급장을 달고 전북 전주 35사단 신병교육대→대구 2작사(2작전사령부)로 왔다”는 것이다. 전주 35사단에서 대구 2작사로 온 황 전 총리 아들은, 이 사령관이 2작사를 떠나는 2011년 4월까지 18개월간 함께 있었다고 한다.
황 전 총리는 적극 반박했다. “턱도 없는 소리, 가짜뉴스다. 전혀 문제가 없었다. 군부대에서 배치한 것이고, 제가 (대구고검장으로) 몇 달 있다가 가는지 알 수 없는데 여기에 붙여 놓겠냐”고 반박했다.
그는 장관과 총리 청문회는 넘었으나 대통령이 되기까지 많은 난관을 거쳐야 한다. 황 전 총리를 고건 전 총리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에 비유하는 이도 적지 않다. 관료 출신 정치인의 한계를 우려해서다. 황 전 총리의 말이다.
“공직자 출신이라서 정치를 못할 것이라는 건 편견입니다. 저보다 더 치열하게 공직생활을 한 사람도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1 야당을 이끌 경쟁력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훌륭한 경력을 쌓아온 사회 원로분들에 대해 자꾸 실패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매우 송구스러운 일입니다. 새로운 정치, 국민께서 열망하는 변화된 정치를 하기 위해 입당했습니다. 그 초심을 잃지 않겠습니다. 입당 후 전국을 돌며 들었던 문재인 정권의 폭정을 막아달라는 국민의 목소리도 ‘황교안 정치’에 고스란히 담도록 할 것입니다.”
― 당내 양쪽(친박·비박) 모두 외면받을 수도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설득하시겠습니까.
“제가 한국당에 막상 들어와 보니, 자신이 어느 계파라고 이야기하는 분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를 둘러싼 외교·안보 환경이 급변하고 있고, 민생경제가 날로 악화되는 상황에서 우리끼리 비난하고 편 가르기 할 겨를이 없습니다.
저는 계파정치를 하러 입당한 게 아닙니다. 만약 제가 계파정치를 한다면, 제가 바로 구태입니다.”
― 당내에서 친박, 비박이 사라지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인재 관리를 사람 중심이 아닌 일·역량 중심으로 하면 됩니다. 저 사람이 나랑 잘 맞고, 인연이 있는지 등을 기준으로 삼거나 특정 정치인에게 기대는 정치는 사라져야 할 구태입니다.”
기자가 준비한 마지막 질문은 이랬다.
― 인생에서 가장 성공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 성공으로 인해 배운 부정적인 점은 무엇입니까.
“첫사랑과 결혼한 것과 아들딸 낳은 것. 그리고 예쁜 손주들 보면서 행복하게 잘살고 있는 것입니다.”
― 인생에서 가장 실패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 실패로 인해 배운 긍정적인 점은 무엇입니까.
“바쁜 공직생활 등으로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 점점 가족의 소중함을 더 깨달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