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1950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 함기용

건국 이후 태극기 달고 첫 세계 1등

  •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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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국가대표 선수는 애국심이 있어야 해요. 그릇이 커야 자기 뜻을 펼칠 수 있어요. 그릇이 바로 국가관, 애국심이죠”

⊙ 1950년 4월 19일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 함기용·송길윤·최윤칠 1~3위 싹쓸이
⊙ 이승만 대통령, 눈물 흘리며 축하
⊙ 6·25사변 당시 국군 앞에서 “인민군 만세!” 외쳤다가 죽을 고비

함기용
⊙ 82세. 고려대 상학과 졸업. 중소기업은행 지점장, 대한육상경기연맹 수석부회장,
    한국사회체육육상연합회 명예회장 역임.
⊙ 1950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 우승. 現 ㈜아산기획 회장.
1950년 4월 19일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결승선을 통과하는 함기용. 건국 이후 태극기를 달고 처음으로 우승했다.
함기용(咸基鎔) 선생은 1950년 4월 19일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영웅이다. 함께 출전한 송길윤(宋吉允·작고)은 2위, 최윤칠(崔崙七)은 3위를 차지했다. 함기용은 당시 19세의 양정고보 3학년 학생이었다. 그리고 105리(里), 그러니까 42.195km 풀코스를 네 번밖에 안 뛴 신예(新銳)였다.
 
  세계 1~3위를 휩쓴 기쁨은 두 달 뒤 6·25사변의 포연(砲煙) 속에 사라졌지만,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눈물로 이들의 귀국을 반겼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손기정(孫基禎)과 1947년 보스턴 마라톤 서윤복(徐潤福)의 우승 이후 한국과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인 사건이었다.
 
  기자는 김영랑 시인의 <장(壯)! 제패(制覇)> 발굴을 계기로 지난 5월 31일과 6월 7일 함기용 선생을 만나 우승 당시의 이야기와 근황을 들었다. 그의 말이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우승한 최초의 한국인입니다. 손기정 선배는 일제강점기, 서윤복 선배는 미 군정기에 우승했지만, 저는 건국 이후 우승했으니까요.”
 
  그는 여든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젊고 여전히 날렵해 보였다. “집(경기 성남)과 동네 공원을 오가며 하루 8km 이상 걷는다”며 “현역 시절에는 몸무게가 53~54kg이었다. 지금도 60kg이 못 된다”고 했다.
 
  “그때 보스턴의 날씨가 안 좋았어요. 눈보라가 쳤지요. 어찌나 풍속이 강한지, 뛰는데 앞으로 내닫지 못하고 자꾸 옆으로 밀려가더군요. 그래도 무턱대고 달렸어요. 18km 지점쯤에서 앞서 달리던 미국, 캐나다 선수 그리고 최윤칠 선배를 따라잡았지요. 최 선배는 얼굴에 소금꽃이 하얗게 피고 피로의 기색이 뚜렷했어요. ‘최 선배 괜찮소? 기운 내십시오. 먼저 갑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앞질러 나갔지요. 그런데 경기 운영이 미숙했던 탓에 초반에 너무 스피드를 내 오버페이스를 하고 말았어요.”
 
  함기용은 초반에 바람을 안고 달리느라 20km까지는 50위 밖으로 처져 있었다. 그러나 25km까지 5km를 달리는 동안 순식간에 선두로 치고 올라왔다. 무시무시한 스피드로 달려 보스턴 마라톤의 유명한 32km 지점인 ‘상심의 언덕(Heartbreak Hill)’에 다다랐다.
 
  “아이고, 다리가 제대로 안 움직였어요. 더는 달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나를 쫓아온 선수가 있었다면 경기를 포기했을지 모르죠.”
 
 
  걷기 챔피언
 
보스턴 마라톤 우승 직후 일본에 들러 교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달리고 있는 모습. 오른쪽에서부터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손기정.
  다행히 추격하는 선수가 없었다. 피로하면 걷고, 걷다가 달리고, 그러다가 또 쉬고, 그렇게 ‘상심의 언덕’에서 세 차례나 걸었다. 경기 도중 3번이나 걷고 우승했다고 해서 당시 미국 현지 언론에서는 ‘걷기 챔피언(Walking Champion)’이라고 불렀다. 얼마나 빨리 달렸으면 걷고도 우승했을까.
 
  “시합 전 손기정 선배가 이렇게 말했어요. 그때 그분이 마라톤 코치였어요. ‘나도 했고, 서윤복도 했는데 너희가 못 하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 3명 중에 누가 우승해도 해야 한다’고요. 가슴이 뭉클했어요. 그때 손 선배가 선수들을 위해 직접 밥 짓고, 된장국 끓여 뒷바라지하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1등을 한 함기용의 기록은 2시간32분39초, 2등 송길윤은 2시간35분58초, 3등 최윤칠은 2시간39분45초였다. 양궁에서나 볼 수 있는 메달 싹쓸이를 1950년, 그것도 마라톤에서 이루었다.
 
  한국 선수들이 보스턴을, 아니 세계 육상을 ‘지배’했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거리 곳곳에 대형 아치와 현수막이 세워졌고 서울운동장(훗날 동대문운동장)에서 환영 육상대회가 열렸다.
 
  “귀국하자마자 오픈카로 경무대로 들어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어요. 대통령이 우리 세 사람을 붙들고 ‘외교관 200명 이상을 각국에 파견한 것 이상으로 한국을 선전하고 왔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가 1등 메달을 이 대통령 목에 걸어드렸어요. 물론 그 메달은 나중에 돌려받았지요. 며칠 뒤 서울운동장에서 환영대회를 여는데 이 대통령과 삼부 요인이 모두 참석했습니다. 대통령이 환영사에서 ‘큰일을 해냈다. 국가와 민족이 단합해 건국을 발전시켜 나가자’며 그 자리에서 또 우셨어요. 노(老)정객이다 보니 애국하는 견지에서 눈물이 났던 거지요. 그 양반, 나라 찾는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겠어요. 눈물나지요. 그렇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보스턴 현지 언론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그땐 미국시민이나 학생이나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나라인지 모르던 시절입니다. ‘우승 비결이 뭐냐’고 묻기에, 우리나라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김치, 깍두기, 된장, 고추장 많이 먹으면 우리같이 된다’고, ‘한국인은 어릴 때부터 그걸 먹어 잘 뛴다’고 말했어요.”
 
 
  국군 앞에서 “인민군 만세!”
 
보스턴 마라톤 우승 직후 미국 현지언론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최윤칠, 손기정, 함기용, 송길윤.
  1950년 6월 25일. 마침 이날은 서울운동장에서 제2회 학도호국단 체육대회가 열렸다. 대미를 장식하는 각종 종목의 결승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관중이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던 정오 무렵이었다.
 
  질서 유지를 담당하던 서울 중부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이 육상경기장의 확성기를 통해 긴박한 목소리로 모든 경기를 중단시키더니 관중에게 빨리 집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이날 새벽 발발한 한국전쟁이 체육계에 전해지던 순간이었다.
 
  “각 시도로 환영행사하러 다니느라 피란도 못 가고 말았어요. 그때 을지로 3가에 있던 협동호텔에서 유숙(留宿)하고 있었는데 ‘인민군이 쳐들어왔지만, 국군이 물리쳤다’고 라디오 방송을 하더군요. 그런 줄 알았는데 이튿날 서울시내에 인민군 탱크가 밀려들었어요. 큰일 났구나 싶었지요. 좌익계열 사람들이 내가 협동호텔에 있는 줄 알고 잡으러 왔습니다. 도망쳤지요. 보스턴 마라톤 우승 메달은 서울운동장 귀퉁이에 묻어놓고 고향인 춘천으로 무작정 걸어갔어요.”
 
  밀짚모자 쓰고 남의 헌옷을 얻어 입고서, 서울과 청평·가평을 거쳐 춘천까지 이틀 동안 논길과 밭길, 산을 넘어 겨우 집에 다다랐다. 사흘간 다락방에 숨어 지내는데 북한 내무서원이 그를 잡으러 왔다. 그 길로 산으로 숨어들었다.
 
  “산속에서 하루를 지내는데 배가 고파 배길 수 있어야지. 그때 나물 캐는 동네 아줌마를 산에서 보았어요. ‘우리 형수한테 얘기해 밥 좀 갖다 달라’고 부탁했지요. 약 두 달가량을 그렇게 산속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어느 날 산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니 한 떼의 병사가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복장이 국군인지, 인민군인지 헷갈렸다. 산에서 내려온 함기용은 군인들 앞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그들은 퇴각하던 인민군이었다. 기가 막힌 인민군이 총을 겨누었다. 그는 “제가 민청위원장인데 신분을 속이려고 ‘대한민국 만세’라고 했다. 용서해 달라”고 거짓말을 했다. 경계심을 푼 인민군들은 “국군 놈이 저기 오니 빨리 도망가야 한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할 수 없이 인민군을 따라 한참을 북진했다. 지형이 험한 곳에 이르러 그는 남쪽으로 도망쳤다.
 
  “인민군이 내 뒤로 총을 쏴요. 탕, 탕, 총소리가 들리는데 막 내달렸지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밭 가운데 파 두었던 반공호로 뛰어들었다. 반공호에는 아버지, 어머니, 형수가 숨어 있었다. 그런데 그가 반공호에 숨는 것을 국군이 보았다. 반공호로 총알이 쏟아졌다.
 
  “국군이 밖으로 나오라고 해서 나왔지요. 나는 무턱대고 ‘인민군 만세!’를 불렀지 뭐야. 이번에도 인민군인 줄 알았던 거지요. 죽을 짓 한 거지.”
 
 
  “당신들 손에 내가 죽는데…”
 
   국군 3명이 그를 개천가로 데려갔다. 총살시킬 모양이었다. 그는 체념한 듯 “당신들 손에 내가 죽는데, 마지막으로 할 얘기가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를 죽이려거든 내가 누군지 알고 죽여라. 내가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함기용이다.”
 
  그의 말을 의심한 국군이 “집에 가보자”고 했다. 대문 문패에서 그의 아버지 이름(함도현)을 확인한 뒤 의심을 풀었다고 한다.
 
  “그때 국군 중에 청주고 졸업반 학생이었는데, 그분이 ‘맞다. 함기용 선수는 춘천이 고향이다’며 기억을 떠올렸어요. 죽다 살아난 거지요. 군인들이 우리 형수에게 ‘냉수 한 사발을 떠달라’고 하더니, 그걸 마시고는 사발에다 건빵을 가득 담아주고 ‘몸조심하라’ 하고 떠났어.”
 
  얼마 후 국군 2사단이 원주, 춘천, 홍천으로 진격해 왔다. 그는 2사단장이던 김종오 소장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김 소장이 그에게 쌀 한 가마니를 주었다고 한다. 국군이 북진하면서 함기용 선생은 서울로 돌아갔다.
 
  “선배 집에서 지내며 전쟁이 끝나길 기다리는데 중공군이 쳐들어왔어요. 그때가 1·4후퇴 때였는데 손기정, 서윤복 선배와 나, 송길윤, 최윤칠 이렇게 몇 사람이 인천에서 미 해군 수송선(LST)을 타고 부산으로 갔어요. 그 배에는 삼부요인과 장관 가족이 잔뜩 있더라고.”
 
  부산에서 피란살이를 시작한 그는 당시 재무부 장관이던 최순주(崔淳周) 장관을 찾아가 취직을 부탁했다고 한다. 마라톤 우승 환영대회에서 몇 번 인사한 터였다.
 
  “최 장관이 당시 조선식산은행 본점에 취직을 시켜주었어요. 식산은행은 지금의 한국산업은행 전신입니다. 은행창구에 앉아 업무를 보았어요. 그때 고려대가 대구로 피란 가 있었는데, 은행장에게 부탁해 대구지점으로 옮겨 1951년 고대 상학과에 입학했어요. 은행 일 하느라 부기(簿記)와 시장론 수업을 빠졌더니 김순식, 김효록 교수가 ‘자네는 수업시간에 본 적이 없다’며 점수를 안 줘요. 그땐 그게 섭섭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그분들이 참스승이더군요.”
 
 
  짧았던 선수 시절
 
  함기용의 선수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 대비해 대구에서 훈련하고 있었다. 학교와 은행일, 마라톤 연습까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올림픽 선발전을 보름 앞두고 다리에 통증을 느껴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서 허리에 주사를 놓는다는 것이 그만 척추를 지나는 신경을 건드리고 말았다. 오른쪽 다리에 마비가 왔다. 눈앞이 캄캄했다. 올림픽 출전은 둘째치고, 다시는 걸을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연습하다 신경통이 와서 주사를 맞았는데 의사가 허리에 주사를 놓더군요. 그게 운명을 바꿔놓을 줄 몰랐습니다. 3개월간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았어요. 병신이 안 된 게 다행이라 생각해요. 그 길로 마라톤을 그만둬야 했어요.”
 
  꾸준한 재활로 걷는 데는 지장이 없게 됐지만 다시는 뛸 수 없었다.
 
  “요즘 육상은 케냐, 에티오피아 선수들이 휩쓸고 있잖아요. 모두 가난한 나라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였어요. 오랜 식민지배와 광복 직후 혼란을 거치며 몸부림치던 시절이었어요. 먹을 게 없어 밀가루 원조로 연명했잖아요. 그래도 건국한 나라가 있었고, 그 국가를 위해 보답하는 길이 열심히 뛰는 일이라 생각했어요. 민족관이 없으면 백날 연습해도 안 돼. 세계를 정복하려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연습을 해야 하고, 국가관으로 달려야 해. 머리로 뛰면 안 돼. 비록 더는 뛸 수 없었지만, 후회는 없었어요. 짧은 기간 미친 듯 달렸으니까.”
 
 
  “정치는 사기꾼들이나 하는 짓”
 
  이후 함기용은 ‘정치병’에 걸려 이철승(李哲承), 오홍석(吳洪錫)씨 등 민주당 신파와 어울리면서 은행 일을 그만둔다.
 
  “1957년인가 58년인가 민주당 춘성군(지금의 춘천시)당과 강원도당 모두에서 공천을 받았는데도 중앙당에서 낙천(落薦)되고 말았어요. 나 대신 농림부장관 출신 후보를 공천한 겁니다. 그래서 당시 서울 인사동에 있던 중앙당사로 찾아가 책상 두어 개를 엎어버리고 나왔지요. 그 길로 다시는 정치를 안 했어요. 짧게나마 정치를 해보니, 정치는 사기꾼들이나 하는 짓이더군요. 남을 속이는 사람이 정치하지, 제대로 인성을 가진 사람이면 정치를 못 합니다.”
 
  1년 반 동안 집에서 쉬다 5·16 군사혁명 후 최고회의 요원 선발 고시를 통해 공무원이 되었다. 그리고 재건국민운동본부 국민생활 개선과로 발령이 나 예체능 분야를 맡았다. 오늘날로 치면, 문화체육관광부와 같은 역할을 하던 곳이다.
 
  “제일 먼저 맡은 일이 재건체조를 만드는 일이었어요. 박정희 의장이 체조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던 겁니다. 과거에는 그냥 구령에다 체조를 넣었는데 저는 머리를 좀 썼어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동원해 선율 위에 구령을 맞췄어요. 곡은 ‘비목’, ‘기다리는 마음’을 작곡한 장일남(張一南) 선생이 만들었고, 체조율동은 경희대 어느 교수에게 맡겼는데 참 조화가 됐어요. 품평을 하는데 다른 작곡가와 교수들이 ‘유희곡 같다’, ‘저렇게 하면 안 된다’며 혹평을 하는 겁니다. 재능을 시기하는 것 같아 그냥 방망이를 두들겨 통과시켰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이양되자 재건운동본부는 해산한다. 함기용은 공무원이 되기 싫어 국영기업체로 가겠다고 지원했다. 1960년대 중반쯤, 해외로 인력을 송출하던 해외개발공사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미국, 독일,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로 용접, 운전, 건축, 간호사, 광부 등의 근로자를 내보내는 회사였는데, 함기용은 수석 검사역으로 근무했다.
 
  “가난한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젊은 노동자들을 낯설고 말 한마디 안 통하는 해외로 내보냈지요.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어요. 요즘 젊은이들은 민족관, 국가관이라는 게 없어요. 아버지 세대의 땀과 희생을 알아야 합니다.”
 
 
  은행지점장 퇴직 후 다시 육상계로
 
보스턴 마라톤을 앞두고 훈련하고 있는 함기용.
  선생은 “내가 갈 길은 은행밖에 없더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고려대 2년 후배인 재무부 이재국 장덕진(張德鎭) 국장을 찾아가 취직을 부탁했다. 그때가 1967년. 장 국장의 주선으로 중소기업은행에 취직했다.
 
  “장덕진씨가 나 보고 2급 본부 차장 자리로 가라는데 나는 거부했어요. 젊은 사람이 재무부 배경으로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욕을 먹기 싫었어요. 그래서 과장으로 입사했는데 그게 손해가 됐어요. 남들보다 1년 반을 과장으로 더 있었으니까요.”
 
  그가 중소기업은행에 입사해 처음 한 일은 마라톤팀을 창단하는 일이었다. 그는 팀 코치를 맡았다. 그러나 얼마 못 가 팀은 해체되고 만다.
 
  “그때 한일은행, 한국은행, 기업은행이 각각 마라톤팀을 만들었는데 은행들은 썩 내켜 하지 않았어요. 장덕진 국장이 시켜서 만들긴 했어도, 필요성을 못 느꼈던 거지요. 나는 선수들을 뽑아놓고 은행업무도 가르쳤어요. 을지로 6가에 있는 회계학원에 다니도록 했지요. 행원에서 대리가 되려면 시험을 쳐야 하는데, 시험이 깐깐해요. 나중 선수들이 전부 대리시험에 합격했고 일부는 과장, 차장, 지점장까지 올랐어요.”
 
  그 역시 1978년 사당동 지점장을 시작으로 천호동, 논현동, 도곡동 지점장을 거쳐 쉰다섯이 되던 1985년 정년퇴직했다.
 
  “88서울올림픽을 끝내고 이듬해 대한육상경기연맹 박정기(朴正基) 회장이 나를 만나자는 겁니다. 글쎄, 연맹 전무이사를 맡아달라는 거예요. 그때 육상계 내에 분파가 생겨 시끄러울 때였어요. 손기정·남승룡(南昇龍) 선배가 생존해 계실 때였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여쭈어 봤어요. 그분들이 한결같이 ‘자네 같은 사람이 맡아서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후 12년 동안 육상경기연맹 전무이사와 수석부회장을 맡아 봉사했지.”
 
  이 대목에서 그는 매우 신이 났다.
 
  “내가 육상연맹을 맡으며 기라성 같은 선수를 발굴해 키웠어요.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황영조(黃永祚) 선수가 금메달,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이봉주가 준우승했지요. 이봉주 선수는 2001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해 육상의 황금시대를 열었어요. 또 그 말 많던 연맹의 내분도 정화를 시켰어요.”
 
 
  아쉬움과 덕담
 
강원도 춘천 송암동에 위치한 ‘함기용 동상’ 앞에서.
  함기용 선생은 “지금까지 가슴에 남아 있는 아쉬운 일이 있다”고 했다. 사연인즉 이러했다. 그의 나이 17세 때인 1948년 런던올림픽 마라톤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됐다. 그러나 서윤복, 최윤칠, 홍종오 선수에 이어 4위를 차지, 주전이 되지는 못했다. 주전의 ‘유고(有故)’에 대비하는 후보 선수로 런던에 갔다.
 
  “런던까지 가는 데 거의 18일이 걸렸어요. 서울에서 기차 타고 부산으로, 다시 배를 타고 일본 하카타로, 열차로 도쿄~요코하마로 갔다가 거의 1년에 두 번밖에 안 간다는 중국 상하이행 선박에 올랐죠. 그리고 다시 홍콩으로 이동한 뒤 비행기를 타고 인도, 이탈리아, 파리를 거쳐 런던에 도착했어요. 손기정·남승룡씨가 그때 국가대표 마라톤 코치였는데, 갑판에서 연습을 시켰어요. 뱃멀미를 하느라 먹지도 못하는데 죽어라 운동을 시키는 겁니다. 또 공항에 도착하면 활주로 근방에서 연습을 시켰어요. 선수들 컨디션이 엉망이 되고 먹지를 못해 몸은 미라가 되어 갔어요. 그래도 난 팔팔했어요. 열일곱 살이었으니까.”
 
  그러나 함기용은 끝내 스타디움을 밟지 못했다. 출전한 선배들 역시 20등 밖으로 밀려났다.
 
  “참 아쉬워요. 그땐 피로를 몰랐거든. 당시 우승 후보였던 아르헨티나 선수와 레이스 연습을 하는데 오히려 내게 절절매는 겁니다. 그때 손기정 코치가 나를 포함해 선수 4명을 모아놓고 ‘대회에 앞서 우리끼리 20km 기록을 재서 최종 엔트리 3명을 선발한다’고 하더군요. 죽도록 뛰어 2등을 했어요. 그런데 끝내 저를 최종 출전명단에서 제외하는 겁니다. 손 선배가 약속을 안 지켰던 거지요. 그때 뛰었다면 분명 메달을 땄을 겁니다.”
 
  그는 이번 2012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에게 이런 덕담을 건넸다.
 
  “저는 런던에 아쉬움이 있지만, 여러분은 꼭 좋은 결실을 보았으면 합니다. 모름지기 국가대표는 애국심이 있어야 해요. 그릇이 커야 자기 뜻을 펼칠 수 있어요. 그릇이 바로 국가관, 애국심이죠. 손기정, 서윤복, 황영조, 이봉주가 우승한 것도 다 애국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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