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의 편지

보수주의자, 어떻게 살 것인가

  • 글 : 배진영 월간조선 편집장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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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나라를 멸망시키는 말은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일언(一言)이다.”
 
  6·3 대통령 선거와 정권 교체의 와중에 접하게 된 말입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세월아 네월아 하다가 세상이 바뀔 것 같으니 부리나케 줄을 바꾸어 서는 이들이 득실대는 이 시대에 이 말은 비수(匕首)처럼 가슴에 와서 꽂혔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 시절 고위 관료였던 오구리 다다마사(小栗忠順·1827~ 1868년)입니다.
 
  오구리 다다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득세하기 전부터 대대로 도쿠가와 집안을 섬겼던 명문(名門)의 후예였습니다. 그는 도쿠가와 막부에서 오늘날로 치면 재무장관, 도쿄시장, 외무장관, 육군장관 격인 요직을 역임한 관료였습니다. 1860년에는 미일수호조약 비준을 위한 방미(訪美) 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정권’을 넘어 ‘나라’를 바라본 사람
 
  미국에서 세계를 보는 눈이 열린 오구리 다다마사는 정치·군사·경제적인 측면에서 혁명적인 개혁안을 구상합니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도쿠가와 막부와 260여 봉건 영주들이 병존(竝存)하면서 각 번(藩)이 마치 하나의 나라인 것처럼 행세하는 막번(幕藩) 체제를 근대적 중앙집권국가로 바꾸자고 주장했습니다. 유럽식 군제(軍制)를 도입, 근대적 육군과 해군 건설도 추진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재정 시스템의 개혁과 식산흥업(殖産興業)도 궁리했습니다.
 
  오구리 다다마사가 1865년 요코스카(横須賀)에 근대적 독을 겸비한 군항(軍港)과 조선소 건설에 착수한 것은 특기(特記)할 만한 일입니다. 당시 막부 내에서는 재정난을 이유로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이때 오구리 다다마사가 한 말이 감동적입니다.
 

  “막부의 운명은 유한(有限)하지만 일본의 운명은 무한(無限)하다. 막부가 한 일이 장기적으로 일본에 도움이 된다면 도쿠가와 가문의 명예이고 나라의 이익이 아니겠는가?”
 
  오구리 다다마사는 ‘막부 정권’을 넘어 ‘일본’이라는 나라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도쿠가와 막부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모가 병들어 죽어갈 때, 이젠 틀렸다고 생각되어도 끝까지 간병을 해야 하지 않는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메이지 유신의 아버지’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단행되었습니다. 신정부군이 에도(江戶·도쿄)로 진격해 오자 오구리 다다마사는 항전(抗戰)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쇼군(將軍)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1837~1913년)는 ‘공순(恭順)’, 즉 항복을 결심했습니다. 그는 옷자락을 붙잡고 간언하는 오구리 다다마사를 뿌리치고 낙향(落鄕)했습니다. 오구리 다다마사는 파면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담담했습니다.
 
  “무사(武士)로서 나의 주장은 다 밝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 나의 일은 끝났다.”
 
  오구리 다다마사는 향리(鄕里)로 내려갔지만, 결국 신정부군에게 체포되어 참수(斬首)당했습니다. 막부 정권에서 그와 비슷한 지위에 있던 가쓰 가이슈(勝海舟·1823~1899년)나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1836~ 1908년) 등이 목숨을 부지한 것은 물론 메이지 정권에서도 대신(大臣), 대사, 귀족으로 잘나갔던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물론 오구리 다다마사는 대대로 도쿠가와 가문을 섬겼던 명문가의 후손인 반면, 가쓰 가이슈나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막부 말기의 변혁기에 자신의 능력으로 그 자리에 올라갔기에 그 처신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신정부군이 기어코 오구리 다다마사를 죽인 것은 그만큼 그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오구리 다다마사는 죽음에 즈음해서도 의연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미련이 없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내 등 부녀자에게는 관용을 부탁한다.”
 
  사실 오구리 다다마사가 추진했던 개혁의 방향은 메이지 유신 주체 세력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차이가 있었다면 그 주체가 도쿠가와 막부가 되느냐, 아니면 조슈(長州)와 사쓰마(薩摩)가 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오구리 다다마사의 정책들을 잘 계승했습니다. 그가 시작한 요코스카 군항과 조선소 건설은 1871년 완공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군함과 해군은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승리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역신(逆臣)으로 잊혔던 오구리 다다마사도 재조명받게 되었습니다. 쓰시마 해전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1848~1934년) 등이 오구리 다다마사를 ‘막부 측의 근대화 실행자’로 높이 평가했습니다. 메이지 시대를 다룬 역사소설을 많이 쓴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오구리 다다마사를 ‘메이지 유신의 아버지’라고 평했습니다. 요코스카 해군기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 7함대가 사용하면서 미일 동맹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오구리 다다마사가 요코스카 군항과 조선소를 세우면서 말했던 것처럼 지금까지도 일본이라는 나라의 이익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1년 전 요코스카를 여행했을 때 미 해군기지 인근 베르니공원에서 오구리 다다마사를 만났습니다. 한눈에 봐도 영민해 보이는 그의 흉상(胸像)을 보며, ‘역사는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것이고, 누군가 씨앗을 뿌리면 거두는 자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보수주의자의 귀감
 
  정권이 교체되었습니다. 이재명 정권은 ‘내란(內亂) 세력 척결’을 외치고 있습니다. 계엄과 탄핵, 대선을 거치는 과정, 이후 보수(保守) 세력이 보여준 행태들을 되돌아보면, 이번에야말로 ‘보수 궤멸’이 현실화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이 책을 만들고 있는 중 들어온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소식은 이제 ‘정글의 세계’가 상시적(常時的)인 것이 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미중(美中) 패권(覇權) 경쟁이 계속 격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자칫 잘못된 선택을 하면 우리 세대는 물론 앞으로 100년, 200년의 운명을 그르치게 될 것입니다.
 
  많은 분에게는 생소한 150여 년 전 일본인의 얘기를 하는 것은 오구리 다다마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때 일본인들도 서양 세력의 진출로 야기된 국제적 환경의 급변 속에서 나라의 생존 자체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오구리 다다마사는 기득권자이면서도 ‘정권’보다는 ‘나라’를 먼저 생각하면서 과감한 개혁을 추진했고, 마지막까지 체제를 지켜내려 혼신의 힘을 다했으며, 결국은 체제와 운명을 같이했습니다. 오구리 다다마사야말로 ‘보수주의자의 귀감(龜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보수 세력이 이 지경이 된 것은 1980년대 이후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세월을 허송했기 때문입니다. 작년 말 계엄 이후에도 이런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대선을 치르는 동안 국민의힘을 비롯한 범(汎)보수 정치 세력에게서는 ‘잘못하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절실함이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말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들에게 ‘부모가 병들어 죽어갈 때, 이젠 틀렸다고 생각되어도 끝까지 간병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간절함이 있었느냐?”고 말입니다. 대선에서 참패한 지금도 그들은 달라진 게 없습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면, 대한민국 보수 세력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울분으로 세상을 통탄하기만 해서도 미래는 없습니다. 시바 료타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구리 다다마사는 애국자였지만 남과 얘기할 때는 우국(憂國)의 정(情)을 표현하지 않았다. 참된 애국이란, 호언장담이나 술에 취해 나라 걱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었다. 오구리 다다마사의 애국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일상생활 속에서 새로운 전류(電流)를 흐르게 하는 그 무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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