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권의 책

그림이 있는 질마재 신화 (서정주 시 | 황주리 그림 | 은행나무 펴냄)

미당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고향 마을의 옛날이야기

  •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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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1915~2000년)는 일세를 풍미했던 대시인이지만 언제부터인가 ‘말당(末堂)’이라고 조롱받으며 잊히고 있다. 교과서에서 그의 시가 퇴출되었다는 말도 있다. 기자부터도 학창 시절 교과서에 실렸던 ‘국화 앞에서’나 송창식의 노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로 널리 알려진 ‘푸르른 날’ 외에는 별로 아는 시가 없었다. 작년에 우연히 《나만의 미당시-시인들이 새로 읽은 서정주》를 읽었다. 뇌성벽력이 치는 것 같았다. ‘평소 좋아했던 현대 한국 시인들의 시는 달짝지근한 아포리즘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975년에 나온 《질마재신화》는 미당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 마을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산문시(散文詩)의 형식으로 엮은 것이다. 담뱃대를 입에 물고 하얀 모시저고리를 입은 동네 할아버지가 어린애들을 모아놓고 “옛날 옛적에…”라면서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해일(海溢)이 집마당까지 밀려드는 날이면 고기잡이 나갔다가 바다에 빠져 죽은 남편이 자기를 만나러 온 것으로 여겨 얼굴 붉히던 외할머니, 결혼 첫날 이유도 모른 채 소박맞고 신혼 첫날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다가 사오십 년 후 늙은 신랑이 찾아와 그 어깨를 어루만지자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았다는 어린 신부, 흉년에 쑥버무리에 밀 껍질 남은 것을 으깨 익혀 먹으면서도 “을사년 무렵 어느 해 봄이던가, 쑥버무리에 아무것도 곡기 넣을 게 없어서 못자리의 흙을 집어다 넣어 끄니를 에우기도 했었느니라”던 할머님….
 

  오늘날 세대에게는 그야말로 ‘신화(神話)’처럼 들릴 아득한 옛적의 토속적이고 주술적인 33편의 시를 황주리 화가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27개의 민화풍의 그림으로 잘 살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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