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시라이 사건은 문화혁명 당시의 4인방 사건에 비견할 만한 정치 스캔들
⊙ 후 주석과 원 총리 등 공청단파, 젊은 좌파들의 공세 저지에 안간힘
⊙ 힘의 중심은 귀족층(태자당)에서 평민층(공청단)으로 이동 중
⊙ 후 주석과 원 총리 등 공청단파, 젊은 좌파들의 공세 저지에 안간힘
⊙ 힘의 중심은 귀족층(태자당)에서 평민층(공청단)으로 이동 중

- 치열한 권력투쟁에 들어간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부(당 정치국 상무위원들) 모습. 앞줄 왼쪽부터 리창춘(상무위원), 원자바오(총리), 후진타오(국가주석), 우방궈(전인대 상무위원장), 자칭린(정협 주석). 뒷줄 왼쪽부터 허궈창(중앙기율검사위 서기), 시진핑(국가 부주석), 리커창(부총리), 저우융캉(당 정법위 서기).
중국의 속성상 이 변화의 실체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전체적인 양상을 보면, 올해 초까지도 열세에 있던 후진타오(胡錦濤) 주석 중심의 공청단파(共靑團派)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장쩌민(江澤民) 계열의 태자당(太子黨·중국 혁명원로나 친척)·상해방(上海幇) 연합세력을 압박해 우세를 확보해 가는 중이다.
이런 양상이 올 10월 공산당 18차 당대회까지 지속된다면, 그동안 거론돼 오던 5세대 지도부 구성에도 적지않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시진핑(習近平)-리커창(李克强)이 차세대 지도부의 중심을 맡는 것에는 변화가 없겠지만, 9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중 나머지 7명의 자리를 두고 공청단 계열 인사가 다수를 차지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는 1949년 공산당 정부 수립 이래 권력의 중심에 서 있던 귀족층(즉 태자당)이 퇴조하고, 공청단을 중심으로 한 시민세력이 권력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변화는 향후 중국의 정치개혁, 경제발전모델의 수정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점에서 보시라이 사건은 문화혁명 시기 사인방(四人幇) 사건과 1998년 천시퉁(陳希同) 사건, 2008년 천량위(陳良宇) 사건에 이은 또 하나의 중대 정치 스캔들로 기록될 것이다.
SNS가 터뜨린 왕리쥔 망명기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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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시라이 실각의 단초를 제공한 왕리쥔 전 충칭시 공안국장. |
하지만 최근 인터넷과 통신의 발달로 개인 미디어가 폭발하면서 양상은 크게 바뀌고 있다. 사건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은 내용에 대해 스마트폰을 이용해 자신의 웨이보(微博·중국식 트위터)에 글과 사진을 올리면 즉각 친구들에게 전달되고, 이것이 다시 친구의 친구로 퍼져 순식간에 수백만, 수천만 명에게 소식이 전해진다. 이 웨이보의 위력에 대해 류윈산(劉雲山) 공산당 정치국원 및 중앙선전부장은 작년 9월 초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기자와 만났을 때, “인터넷과 정보통신의 발달로 뉴스를 다 통제할 수 없다. 5억 네티즌과 3억 SNS 사용자를 어떻게 다 통제할 수 있겠는가. 공산당이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다”고 말했을 정도다.
왕리쥔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도 관영 매체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을 통해서였다. 보시라이의 오른팔로 ‘범죄와의 전쟁(打黑)’을 진두지휘하던 충칭시 공안국장 왕리쥔이 2월 6일 1급 기밀문서를 휴대하고 청두 미국 총영사관을 찾아갔다는 소문이 8일 웨이보 등을 통해 중국 인터넷에 돌기 시작했다. 그를 체포하기 위해 충칭시 공안국 소속 경찰차 70여 대가 미국 총영사관을 에워쌌다는 소문도 인터넷을 통해 퍼졌다. 심지어 왕이 국가안전부 추진(邱進) 부부장(차관급) 등에 체포돼 충칭발 베이징행 항공기의 비즈니스석에 탔음을 증명하는 항공발권표까지 인터넷에 공개됐다.
공산당이 공개를 꺼리는 민감한 정치적 사건이 시민들의 인터넷 통신망을 통해 만천하에 공개되자, 중국 외교부도 2월 9일 대변인을 통해 사실을 인정했다. 같은 날 빅토리아 눌런드 미 국무부 대변인도 “이번 주 초 왕리쥔이 부시장 신분으로 청두의 미 총영사관에서 회의를 하자고 요구했고, 약속한 날 미국 측 인사들이 그를 만났다. 그는 총영사관에 왔다가 제 발로 떠났다”고 사실을 인정했다. 당시 왕은 ‘영사관에서 나오라’는 충칭 정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33시간을 버티다가 7일 저녁 영사관 문을 나서 국가안전부 요원들에게 체포돼 베이징으로 압송됐다.
이렇게 중국 시민들의 SNS로 시작된 왕리쥔 사건은 4월 중순까지 큰 파장을 일으키며 보시라이의 실각과 그의 부인 구카이라이(谷開來·52)의 체포조사로까지 이어졌다.
왕리쥔 사건의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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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시라이 가족과 친밀한 관계에 있다가 살해당한 영국인 닐 헤이우드. |
첫째 문건은 ‘왕리쥔 사건에 관한 통보(關於王立軍事件通報)’, 두 번째 문건은 ‘왕리쥔 사건과 11·15 안건의 정황에 관한 통보(關於王立軍事件和一一·一五案件的情況通報)’이다. 11·15 안건이란 2011년 11월 15일 영국인 헤이우드(Neil Heywood·당시 41세)가 사망한 사건을 가리킨다. 두 문건과 관련 보도를 종합해 왕리쥔 사건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 랴오닝성 다롄(大連) 출신의 중국여성을 부인으로 둔 영국인 헤이우드는 부인을 통해 1990년대부터 보시라이의 가족과 알게 되었다. 당시 보시라이는 다롄시장이었다. 헤이우드는 보시라이의 아들 보과과(薄瓜瓜)의 영국유학을 도와주고 후견인 역할도 맡았다. 또 영어가 유창한 변호사인 보시라이의 부인 구카이라이가 외국기업의 중국투자를 도와주는 자문회사를 운영할 때, 헤이우드가 이를 도와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위 두 번째 문건에 따르면, 두 사람 사이에 ‘경제적 모순(經濟矛盾)’이 발생했다. 그 모순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 홍콩 《명보》(明報)는 헤이우드가 숨지기 전인 작년 11월 초 영국에 있는 자신의 변호사에게 ‘보시라이 가족의 해외재산에 관한 문건’을 보냈으며 친구에게 “나를 보호하는 장치로 이것을 보낸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또 미국의 반중국 매체인 박신(博訊)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당시 헤이우드는 수십억 위안에 달하는 보시라이 전 서기 재산의 해외은닉을 잘 알고 있었고 구카이라이와도 내연관계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며칠 뒤인 11월 15일 헤이우드는 충칭의 한 호텔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당시 충칭시 정부는 그가 과음으로 숨졌다고 발표하고 시신을 화장해 버렸다. 그러나 가족과 친구들은 헤이우드가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왕리쥔이 국가안전부에 체포된 이유
보시라이의 오른팔로서 6000여 명의 범죄자를 잡아넣은 공안국장 왕리쥔은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보시라이의 부인 구카이라이가 자신의 집사인 장샤오쥔(張曉軍)과 함께 헤이우드의 살해에 개입한 증거를 잡게 되었다. 이 살인에는 모두 6명이 관여된 것으로 알려진다.
왕은 올 1월 28일 이 ‘불편한 진실’을 자신의 보스인 보에게 보고하고 적절한 조치를 요구했다.
하지만 보는 왕의 요구를 수용하기는커녕 오히려 불만을 품고 올 2월 5일 시당위원회를 소집하여 왕의 공안국장 직위를 해임하고 한직(환경담당 부시장)으로 발령냈다. 게다가 보는 왕의 약점을 잡기 위해 그와 주변 인물들의 비리사실을 비밀리에 조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보의 포위망이 좁혀오는 것을 안 왕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그동안 모은 수사 기록들을 가지고 영사관 피신을 결심한다. 그는 2월 6일 오전 충칭시 간부회의에 참석지 않고 가발을 써 변장을 한 뒤 혼자서 3시간가량 차를 몰아 오후 2시반경 미 영사관에 도착한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일차적으로 영국 영사관에 들어가려 했으나 거절당하자 미국 영사관으로 갔다. 영사관 내에서 그는 보시라이의 부인이 헤이우드 살인사건에 연루돼 있다는 점과 보의 가족이 거액의 재산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점을 알리고 이를 국제사건화해 줄 것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왕은 미 영사관 측에 정치적 망명을 요구했고 망명 신청서까지 작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진핑의 방미(2월 13~17일)를 코앞에 둔 미국 정부는 중국 국내 사건에 휘말리는 것이 양국관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왕은 황치판(黃奇帆) 충칭시장이 이끌고 온 충칭 공안에 체포되길 거부하며 영사관 안에서 33시간을 버텼다. 왕은 보시라이의 영향권 안에 있는 충칭 공안에 체포될 경우 모든 증거물을 빼앗기고 목숨마저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그는 베이징에서 국가안전부의 추진 부부장 등이 내려오자 7일 밤 11시32분 자진해서 영사관을 나와 이들에게 체포됐다. 이 과정에서 국가안전부와 충칭 공안 간에 관할권을 놓고 대립이 발생하기도 했다. 국가안전부의 추진은 베이징시 공청단 부서기를 지내 공청단파 인맥으로 분류된다.
이런 점들로 미뤄볼 때, 왕은 철저한 계산하에 미 영사관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즉 먼저 망명에 성공하면 해외에서 보시라이 가족의 어두운 진실을 폭로하고, 그것이 실패하면 공청단과 태자당이 대립하는 공산당 최상층부의 권력투쟁 구도를 활용해 보시라이 가족에 최대한의 타격을 주려 했던 것 같다.
보에 대한 왕의 적개심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외 화교사이트 박신(博訊)은 왕이 영사관 피신 전 미국 내 친구에게 보낸 문건을 입수했다며 그 내용을 공개했는데, 여기서 왕은 보시라이를 ‘간신(奸臣)’으로 묘사하며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전 세계에 보내는 공개 서신’이란 제목의 이 글은 “보 서기가 공산당 내 최대 군자(君子)인 양 행세하는 것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 이런 간신이 권력을 잡는다면 중국의 미래에 최대 불행이자 민족의 재난”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왕은 또 이 편지에서 보시라이와 함께 ‘어사망파’(魚死網破·고기도 죽고 어망도 터지다. 즉 너 죽고 나 죽자)할 것이란 각오도 밝혔다.
왕은 현재 ‘국가모반죄’로 처벌을 기다리고 있지만, 헤이우드 사건에 대한 중요한 정보제공의 공으로 처벌결정이 연기된 것으로 전해진다.
보시라이의 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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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시라이(가운데)와 아내 구카이라이(왼쪽), 아들 보과과(오른쪽). |
이로부터 약 한 달간 철저한 조사가 이뤄졌다. 3월 14일 전인대 폐막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향후 처리 방침을 시사하는 중요한 발언을 했다.
“왕리쥔 사건 발생 후에 국내와 국제사회의 높은 주목을 받았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당 중앙이 이 문제를 고도로 중시하고 있으며, 즉각 유관 부문이 전문적인 조사를 하고 있으며, 현재 조사에 진전이 있다.
우리는 장차 사실을 근거로 법률에 따라 엄격히 처리할 것이다. 조사와 처리결과는 국민에게 알릴 것이며, 법률과 역사의 검증을 거칠 것이다.
충칭시 정부와 인민은 개혁사업에 큰 노력을 기울여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현 충칭시 당위원회와 정부는 반드시 왕리쥔 사건을 반성하고 이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원 총리의 발언은 당시 충칭시 당서기를 맡고 있던 보시라이에 대한 엄중한 경고였고 다음 단계에 취해질 중대 조치에 대한 예고였다. 그 중대 조치가 바로 다음 날 내려지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공산당 중앙은 전인대 폐막 다음 날인 3월 15일 보시라이의 충칭시 당서기를 직위해제하고, 그 자리에 장더장(張德江) 부총리를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풍비박산 지경에 이른 보시라이 집안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20여 일 후인 4월 10일 2단계 조치가 내려졌다. 당 중앙은 보시라이의 정치국원 및 중앙위원 직무를 정지하고, 그가 당 기율을 엄중히 위반한 혐의로 그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보의 부인 구카이라이 역시 살인혐의로 체포 조사 중이라고 발표했다.
이로써 태자당 출신인 보시라이의 정치생명은 완전히 끝났다. 건국공신이자 등소평의 절친한 친구였던 아버지 보이보(薄一波)의 후광도 이번 사건 처리에 큰 힘이 되지 못했다.
심지어 아들 보과과도 당국의 조사를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4월 11일 영국 《데일리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보과과가 영국 옥스퍼드 유학 시절 받은 2만 파운드(약 3600만원)의 장학금은 랴오닝성 화천(華晨)자동차가 협찬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아버지 보시라이는 랴오닝성 성장이었다. 보의 집안이 졸지에 풍비박산 지경에 이른 것이다.
4월 12일 홍콩에서 발행된 시사잡지 《아주주간》(亞洲週刊)은 보시라이의 죄목이 크게 7가지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첫째, 가족의 부정부패를 종용하고 뇌물을 받았으며, 영국인 헤이우드 살인사건에 처와 함께 관여된 혐의가 있다.
둘째, 인사를 자기 마음대로 하여 조직기율을 엄중하게 위반했다. 특히 2월 2일 공안부의 동의 없이 왕리쥔의 공안국장 직위를 독단적으로 면직시키고 양회(兩會·전인대와 정협) 기간인 3월 8일 제멋대로 베이징을 떠나 충칭으로 돌아갔다.
셋째, 국가 영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외국 정보기관 배경을 가진 외국 기업인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국가의 안전을 위협했다. 헤이우드는 일찍이 영국군 정보6처(MI6)가 배후에 있는 회사에서 일했다.
넷째, 인터넷과 해외매체를 조종하고 이용하여 당과 국가지도자를 공격했다.
다섯째, 중앙 영도자들의 통화를 감청하고, 중앙경위국에 침투했다(사람을 몰래 심었다는 뜻인 듯함).
여섯째, 법치를 짓밟고 범죄와의 전쟁을 제멋대로 하였으며, 정법계통을 무시하고 시장경제질서를 파괴했다.
일곱째, 충칭에서 정치 소집단인 ‘소함대(小艦隊)’를 만들고, 민중을 이용하여 문혁(文革)식 운동을 전개하는 등 중앙 노선과 방침을 벗어났다.
《아주주간》은 이상 7가지 범죄 외에도 보시라이가 다롄시장과 당서기로 있을 때 다롄TV방송국의 미모의 아나운서인 장(張)모씨와 깊은 관계에 있었으나 부인 구카이라이에게 발견된 뒤 장이 실종되는 등 여자관계가 복잡했다고 보도했다.
정치국 상무委의 力學구도
보시라이가 이처럼 처절하게 몰락하기까지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치열한 권력투쟁이 공산당 상층부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의 몰락은 후진타오 한 사람의 결정이 아니라 9인의 당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의 합의사항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차관급 이상의 중앙부처 간부와 부성장(副省長) 이상의 지방간부 인사는 당 중앙이 하도록 되어 있다.
당 중앙이란 24명의 정치국원 가운데 뽑힌 9명의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말한다. 9인은 후진타오, 우방궈(吳邦國), 원자바오, 자칭린(賈慶林), 리창춘(李長春), 시진핑, 리커창(李克强), 허궈창(賀國强), 저우융캉(周永康)이다.
이들 9인은 고위 간부의 인사는 물론 국가 중대사의 결정도 담당한다. 후진타오 주석이 발언권이 강하긴 하지만 투표에서는 1표밖에 행사하지 못한다. 다른 상무위원과 권한이 똑같다는 얘기다.
따라서 특정 사안에 대해 의견이 갈릴 경우 어느 편이 다수를 차지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보시라이 처벌문제도 이 상무위원회에 올라, 9명의 상무위원 중 처벌에 찬성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얘기가 된다.
이는 그동안 알려진 상무위원회의 세력구도로 보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결과이다.
9명 가운데 후진타오파는 자신과 원자바오, 리커창 등 3명에 불과해 절대적 열세다. 반면 태자당과 상해방 연합세력은 이들 3명을 제외한 6명 모두이다.
이 중 시진핑·허궈창·저우융캉은 태자당, 우방궈·자칭린·리창춘은 상해방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모두 장쩌민 전 국가주석의 영향권 아래 있어 ‘장쩌민파’라고 할 수 있다. 장이 두 세력을 아우르게 된 것은 상하이에서 지도자를 역임한 후배들을 적극 키운데다, 1989년 천안문사태 이후 등소평에 발탁돼 총서기를 처음 맡았을 때 태자당의 좌장 격인 쩡칭훙(曾慶紅)을 오른팔로 기용해 태자당 세력을 껴안았기 때문이다.
이들 두 세력이 힘을 합치면 6표가 되어 보시라이 처벌안을 얼마든지 부결시킬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보를 철저히 몰락시키는 쪽으로 결론이 났을까. 이 과정에 공산당 최상층부의 냉혹한 권력투쟁이 숨어 있는 것이다.
공격의 주도권은 후진타오와 원자바오 세력, 즉 범(汎)공청단파가 잡았다. 세력구도에서 열세에 있던 후·원(胡·溫) 세력에게 ‘넝쿨째 굴러온 호박’이 바로 왕리쥔 사건이었다. 장쩌민파를 공격할 소재에 목말라하던 차에 왕리쥔 사건은 상대 측이 빼도 박도 못 할 확실한 소재였다.
수면 아래의 치열한 권력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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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로 도주했다가 체포된 밀수범 라이창싱(오른쪽)은 향후 중국 정국을 뒤흔들 수 있는 뇌관이다. |
명백한 범죄증거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강력한 명분이 된다. 정치적 라이벌이라고 해도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원자바오 총리가 전인대 폐막 기자회견에서 ‘사실을 근거로 법률에 따라 엄격히 처리할 것’이라고 밝힌 것은 국민뿐만 아니라 정치적 라이벌인 태자당에도 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공청단파는 또한 ‘각개격파’ 전략으로 라이벌인 태자당+상해방 연합세력에 대해 하나하나 동의를 받아낸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일부 보도에 따르면, 9명의 상무위원 가운데 8명이 보시라이의 충칭 당서기직 해임에 찬성하고, 저우융캉만이 기권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런 결과는 공청단파가 상대방의 약점을 정확히 잡아내 압박을 가해야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9명 가운데 자칭린은 결정적으로 라이창싱(賴昌星) 사건에 발목이 묶여 있다. 라이창싱은 푸젠성 하문(廈門)과 홍콩의 원화(遠華)그룹 회장으로 제8차 정협위원까지 지낸 인물이지만, 1990년대 경찰과 해양경비대 등의 비호를 받으며 무려 500여 억 위안(한화 약 9조원)대의 자동차 유류 등을 바다로부터 밀수, 중국 역사상 최대의 밀수꾼으로 기록됐다. 그는 주룽지(朱鏞基) 총리 시절 강력한 밀수단속에 걸렸으나 현지 공안의 보호 덕분에 1999년 캐나다로 도망갈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과 캐나다 정부의 꾸준한 교섭으로 그는 2011년 7월 23일 중국으로 강제송환됐다.
현 중국 정부가 그를 기어이 본국으로 데려온 배경에는 정치적 목적이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라이창싱이 대규모 밀수를 했던 기간은 바로 자칭린이 푸젠성 성장과 당서기를 지내던 기간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많은 중국인은 자칭린이 라이의 밀수행위를 비호했을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중국으로 송환된 라이는 하문검찰청에서 조사를 받은 뒤 기소돼, 지난 4월 6일부터 하문시 중급인민법원에서 1심 재판이 시작됐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느냐에 따라 자칭린의 정치적 운명도 결정될 위기에 처했다. 그가 남은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퇴직 후에도 편히 지내려면 현 정부에 협력할 수밖에 없다. 또 차기 지도부 구성에서 모종의 거래가 이루어질 가능성도 있다.
보시라이와 친분 있는 시진핑의 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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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세대 지도자로 내정된 시진핑. |
하지만 이런 전력은 보가 실각한 현 시점에서 보면 오히려 약점이 될 수 있다. 시진핑으로서는 보와 거리를 두고 후 주석의 노선에 찬동을 표시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더구나 보시라이가 시진핑의 충칭 방문 시 전화를 도청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보와 결별했을 가능성이 높다. 시진핑은 지난 3월 22일 ‘전국 비공유제기업 당건설공작회의’에서 “후진타오 동지를 총서기로 하는 당 중앙의 영도하에…”란 표현으로 후 주석에 대한 존경의 뜻을 나타냈다. 올 연말 대권승계를 앞둔 그로서 현 최고권력자와 맞서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저우융캉, 후진타오와 대립각 세워
상해방의 2인자 격인 우방궈 전인대 위원장과 한때 강성인물로 알려졌던 리창춘 역시 올 연말 퇴임을 앞두고 후 주석 세력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을 꺼리는 것으로 보인다.
우방궈 위원장은 각종 회의 연설에서 ‘후진타오 총서기’란 표현을 자주 사용하여 호의를 나타내고 있다. 공산국가에서 최고지도자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그에게 충성한다는 뜻이다. 우는 지난 3월 9일 전인대 상무위원회 공작보고에서 “지난해(2011년) 후진타오 동지를 총서기로 하는 당 중앙은 단결하여 전국 각 민족을 이끌고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사회주의 경제건설과 정치·문화·사회건설에서 새로운 성적을 거두었다”고 말했다.
리창춘 역시 3월 22일 중화서국(中華書局) 창설 100주년 기념식장에서 “후진타오 총서기가 대회를 축하하는 카드를 보낸 것은 중화서국이 오랜 기간 해온 중요한 공헌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새로운 환경에서 출판업무를 더욱 진일보시킬 것을 희망하는 것”이라며 후 주석을 입에 올렸다.
이 밖에 허궈창은 당 중앙 기율검사위 서기로서 보시라이 사건 조사의 최종 책임자이다. 이번 사건의 명백한 증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이기에 보시라이의 불법행위를 눈감아주거나 축소하긴 어려울 것이다. 허궈창도 보로부터 전화를 도청당해 보에 등을 돌렸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권력서열 9위인 저우융캉 중앙정법위 서기는 후진타오 세력과 한때 대립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태자당의 일원인 그는 2월 6일 왕리쥔이 미국 영사관으로 피신했을 때 이 사실을 보시라이에게 먼저 귀띔해 준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왕리쥔 조사를 맡은 당 기율검사위가 지난 2월 19일 밤 저우 서기를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저우 서기 측 경호인력이 반발하자 기율검사위는 무장경찰 병력을 증원했고, 이것이 외부에 ‘내란설’로 퍼졌다. 기율검사위 서기는 역시 태자당인 허궈창이지만, 공정한 조사를 위해 이런 조치가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저우융캉은 보시라이에 대한 처벌이 과도하다는 의견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저우 서기는 지난 3월 26일 전국정법위서기 첫 교육반 개강식에 참석, “큰 시비를 가리는 문제(大是大非問題)에서 당 중앙과 일치된 견해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끝내 후진타오 주석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지 않아 불만을 드러냈다. 집단지도체제가 아닌 후 개인에 대해서는 존경을 표시할 수 없다는 일종의 정치적 행위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우융캉이 적극적으로 후에 반기를 들 수 없는 이유는, 공산당의 ‘민주집중제’ 원칙에 따라 개인이 조직에 반대하여 단결을 깰 경우 중대한 기율위반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좌파의 반격
보시라이를 지지하는 태자당과 좌파들이 공청단의 공세에 손을 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가장 뚜렷한 반발은 지난 3월 31일 《북경일보》(北京日報)에 실린 ‘우리 당의 최고 영도자가 언제 총서기로 불렸나(我黨最高領導人何時稱總書記)’란 제목의 평론이었다. 제목부터가 자극적인 이 글의 필자는 인민대학 마르크스주의학원 왕윈셩(汪云生) 부교수이다.
그는 글에서 “총서기는 비록 당내 최고지도자의 직무이지만, 결코 당의 최고 지도기관이 아니다. 당장(黨章)은 당의 최고 영도기관이 전국대표대회와 그것을 통해 구성된 중앙위원회라는 것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총서기는 결코 당 중앙 조직을 능가하는 최고기구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이 글은 누가 봐도 후진타오 주석을 겨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내 ‘신좌파(마르크스주의에 충실하자는 젊은 학자들)’에 해당하는 왕 교수의 글은 그 후 제목이 ‘총서기는 중앙을 뛰어넘을 수 없다(總書記不能凌駕中央)’로 바뀌어 인터넷에 퍼졌다.
과거 모택동이 주도한 문화혁명이 신문에 실린 평론 한 편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글도 결코 예사로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이 글은 개인숭배를 조장하는 듯한 후진타오와 그를 따르는 공청단 세력 모두를 겨냥하고 있다.
《북경일보》에 이 글이 실린 배경과 관련, 메이닝화(梅寧華) 《북경일보》 사장이 보시라이 전 충칭 서기의 측근 중 한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보를 위한 좌파들의 ‘사상투쟁’인 셈이다.
중국의 지방 대도시 역시 때론 중앙정부의 말을 잘 안 듣는다. 중앙의 방침과 반대로 가기도 한다. 충칭시 공안국장의 교체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왕리쥔이 2월 2일 공안국장에서 해임된 뒤 그 자리를 차지한 인물은 공청단의 2인자인 리커창의 비서 출신 관하이샹(關海祥)이었다. 그러나 관하이샹은 공안국장 자리에 오른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은 3월 26일 허팅(何挺)으로 교체됐다. 장쩌민의 조카사위로 알려진 허팅은 공안부 형사정찰국에서 오래 근무하다 간쑤성(甘肅省)과 칭하이성(靑海省)에서 공안청장, 부성장, 무장경찰대 총대(總隊)서기 등을 지낸 인물이다.
이 인사는 새로 충칭시 당서기로 부임한 장더장이 저우융캉 정법위 서기와 의논해 단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공안국장 자리는 모든 직원과 간부들의 비리를 수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해방이 공청단에 반격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이 밖에도 좌파들은 인터넷 매체를 활용해 후와 원 세력을 공격하고 있다. 중국 내 좌파의 대표적 사이버 공간인 오유지향(烏有之鄕)과 유사 사이트에서는 일부 극단적인 인사들이 “원자바오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는 원의 아들(溫云松·중국위성통신공사 회장)의 비리를 공개할 수밖에 없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군부, 후진타오 지지
후 주석과 원 총리가 이런 좌파들의 공세를 제압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관철할 수 있었던 것은 군부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쩌둥(毛澤東)의 말처럼, 중국에서의 군권(軍權) 장악은 매우 중요하다. 과거 등소평이 모든 직위를 다 내놓고도 군사위 주석직만은 맨 마지막에 내놓았던 것이 이를 보여준다.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인 후진타오는 현재 인민해방군 내에서 부주석인 궈보슝(郭伯雄)과 쉬차이허우(徐才厚), 군사위원인 리지나이(李繼耐) 등의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다. 과거 군은 장쩌민 지지세력으로 분류됐으나, 후도 자파(自派)세력을 크게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군 지휘부에는 여전히 장쩌민파(이들은 보시라이를 지지)가 남아 있어, 이번 사건처리에 불만을 가진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 파워게임에서 일단은 후진타오파가 명분을 쥐고 군내 여론을 주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인대(全人代)를 앞두고 지난 3월 4일 이루어진 해방군 대표단 출범식에서 궈보슝 부주석은 “사상을 당 중앙에 철저히 통일시키고 후 주석의 결정과 지시 위에 놓아야 한다”면서 “후진타오 동지를 총서기로 하는 당 중앙에 대한 신뢰를 진일보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시라이의 정치국원 직무가 정지된 다음 날인 4월 12일 인민해방군 기관지인 《해방군보》(解放軍報)는 1면에 ‘당중앙의 정확한 결정을 견결히 옹호하자’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보시라이의 기율위반 문제에 대한 당 중앙의 조사결정과 헤이우드 사망사건에 대한 재조사 등을 지지했다.
베이징위수구 모 장갑사단의 정치위원인 류하이밍(劉海明)은 “당 중앙이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보시라이 사건의 기본적인 정황을 조사해 밝혀내고 엄정한 처리를 신속하게 단행함으로써 국내외의 관심에 부응했다”고 말했다.
10월 지도부 세대교체까지 권력투쟁 끊이지 않을 듯
공청단파는 이 밖에도 《인민일보》 등을 동원해 베이징, 상하이, 충칭 등 각지 당간부와 군중의 ‘지지’를 적극 보도함으로써, 보시라이 처리에 대한 일부의 반발을 차단하고 있다. 또 각종 루머를 실어나르거나 후진타오, 원자바오 등을 직접 비판하는 인터넷 사이트 42개를 폐쇄하고 관련자 6명을 체포했다. 이는 거꾸로 공산당, 정부, 군부, 경찰 등 조직 내부에 후 주석과 원 총리의 조치에 반대하고 이들을 비판하는 여론이 들끓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공산당 정권을 세우고 키워왔다는 자부심으로 뭉친 태자당은 이번 보시라이 숙청사건에 지속적으로 저항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건은 오는 10월 이루어질 지도부 세대교체에서 자파세력을 확대하는 전략과도 맞물려 있다. 후 세력이 이를 계기로 불리한 상무위 세력구도를 뒤집어 기존의 3대 6에서 4대 5로 바꾸는 것은 물론, 한 발 더 나아가 5대 4로 역전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예측돼 온 차기 지도부 후보군을 보면, 후진타오파에서는 기존의 상무위원인 리커창을 포함, 리위안차오(李源潮) 당조직부장, 왕양 광둥성 당서기, 류윈산 중앙선전부장, 류옌둥(劉延東) 등이 거론된다. 태자당·상해방 연합세력에서는 장더장, 왕치산(王岐山), 장가오리(張高麗), 위정성(兪正聲) 등이 이름을 올렸다.
이 중 기존의 상무위원인 시진핑-리커창을 제외하고, 리위안차오와 장더장, 왕치산이 비교적 안정권으로 거론되는 가운데, 나머지 4자리를 놓고 왕양, 류윈산, 장가오리, 위정성, 류옌둥 등 5명이 경합하는 양상이다.
현재의 세력구도하에서 표결하면 후진타오 세력이 불리할 것이 뻔하지만, 보시라이 사건과 라이창싱 사건을 어떻게 더 활용하느냐에 따라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
18차 당대회가 열리는 10월까지 공산당 최상층부의 권력투쟁은 더욱 교묘하고 치열하게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최종 결과는 6개월을 기다려봐야 알겠지만, 권력을 독점하던 귀족층(태자당)이 퇴조하고 시민층(공청단파)이 당의 핵심으로 진입하는 세력교체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경제발전과 소득상승은 민주화를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