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청년 박성렬군 영면.’
‘아!’ 하는 탄식과 함께 ‘아까운 청년이 세상을 떠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박성렬씨는 《월간조선》 작년 12월호에 ‘이 사람/간암 4기 투병 중인 탈북 청년 박성렬씨’라는 기사로 소개됐던 바로 그 젊은이다.
박씨의 이야기를 《월간조선》에 싣게 된 것은 김영자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의 부탁 때문이었다. 김 이사는 “참 좋은 탈북 청년이 하나 있는데 간암 4기 판정을 받았다. 자기가 이 세상에 살다 간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데, 《월간조선》에서 그 얘기를 써줄 수 없겠느냐”고 말했다. 유튜브 ‘배나TV’를 통해 북한 및 탈북자 문제를 많이 다루어온 장원재 박사에게 인터뷰를 부탁했다.
장 박사가 보내온 원고를 읽으며 ‘신세대 탈북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뭔가 사고를 쳐서, 혹은 배가 고파서 탈북한 게 아니었다. 북한에서 나름 엘리트로 살아갈 수도 있었지만 한류(韓流) 드라마를 보면서 더 넓은 세상을 꿈꾸게 됐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탈북한 사람이었다. 부모도 그의 결심을 응원했다. 한국에 들어온 후 편의점이나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그는 한류 드라마를 보면서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어 즐거워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한국사회보장정보원에서 프로그램 개발자로 일했다. 탈북자들을 위한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다.
인터뷰 말미에서 그는 북에 있는 부모에게 이렇게 말했다.
“물론 제가 완치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지만, 만약에라도 제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아들은 여기서 해볼 거 다 해봐서 원 없습니다. 고향 집을 떠날 때 얘기한 것처럼, 하고 싶은 거 정말로 다 했어요. 그리고 너무 죄송합니다.’”
“마지막 가는 길은 결코 무연고가 아니었다”
‘이렇게 맑고 밝은 사람이면 반드시 병마(病魔)를 이겨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영자 이사와 장원재 박사에 의하면 박성렬씨는 투병 중에 북한의 부모와 통화도 했고 사후(死後)에 대한 준비도 해놓았지만 그래도 삶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는데, 2월 5일 아침 갑자기 손쓸 수도 없게 병세가 악화돼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2월 7일 서울 서대문에 있는 적십자병원에 마련된 빈소를 찾았다. 쓸쓸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조문객들이 많았다. 탈북자들, 직장 동료들인 듯싶었다. 한 탈북 여성은 기자가 《월간조선》 편집장이라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성렬이가 책이 나온 후에 무척 좋아했어요. ‘내가 이렇게 인맥이 좋은 사람’이라고 농담도 해가면서…. 정말, 고맙습니다.”
장원재 박사는 박성렬씨의 생일 축하 파티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박씨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지만, 그도 친구들도 모두 밝은 표정이었다. 박성렬씨의 생일은 2월 11일이지만, 그때까지 버티기 힘들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설날 연휴 마지막 날 깜짝 생일 파티를 해준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박씨는 마지막 가는 길에도 약간의 곡절이 있었다. 국내에 가족이나 친척이 없는 탓에 ‘무연고자(無緣故者)’라고 해서 사망진단서 발급이 지체되고 장례 절차도 늦춰질 뻔한 것이다. 김영자 이사 등이 관계 공무원들을 간곡하게 설득해서 차질 없이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지인 이진영씨는 “박성렬씨는 법적으로는 무연고였을지 몰라도 마지막 가는 길은 결코 무연고가 아니라 많은 분들이 함께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다”면서 “장례식 계약을 할 때에도 무연고 탈북민의 본인상이라 무빈소 장례로 치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는데, 2일장이었음에도 250명 가까운 조문객들이 찾아주셨고, 31개의 조화를 받았다”고 말했다.
장례식장을 떠나면서 안내 전광판을 봤다. 79세, 88세, 96세, 77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분들 사이에서 3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청년 한 명이 두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 보이며 밝게 웃고 있었다. 삼가 고인(故人)의 명복을 빈다.⊙





































